미완. 검수 필요.
01.
마법관의 오후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마법사들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지낸다는 사정을 생각하면 평화롭다는 말은 꽤 관용적인 표현일지도 모른다.
직전까지만 해도 위층에서는 북쪽 마법사들끼리 서로 자웅을 겨루며 마법관을 반파하고 있었고, 지금은 복도 너머에서 누군가 급히 뛰어가는 소리가 났다. 곤란하다는 듯 이름을 부르는 현자의 목소리는 덤이었다. 식당 쪽에서는 네로가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하는 듯했으며, 그보다 조금 먼 곳에서는 루틸인지 미틸인지 모를 밝은 웃음소리가 짧게 터졌다가 사라졌다. 그런 소리들이 벽과 계단, 닫힌 문틈을 지나며 둥글게 뒤섞였다.
피가로는 얇은 문 너머로 전해지는 소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는 일상의 소란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래 머물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무리에 섞여 있으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는 그를 자상한 선생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박식한 의사로 찾았으며, 또 어떤 사람은 친구처럼 시답잖은 일로 말을 걸어왔다.
남쪽의 마법사 피가로. 다정하고 지혜로우며, 어딘가 능청스러운 어른. 마법관 안에서 그에게 기대되는 얼굴은 대개 그런 것이었고, 마침 피가로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 익숙했다. 제 것이 아닌 거죽을 뒤집어쓰고 산다는 건 얼핏 쉽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대다수 큰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어쨌든 피가로 또한 평범한 사람의 범주에 속하진 않았으니까.
창가 가까운 테이블에는 식어가는 차와 네로가 구워낸 과자가 놓여 있었다. 설탕이 얇게 묻은 과자 표면은 햇빛을 받아 가루눈처럼 반짝였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들려던 때, 문밖에서 기척이 멈췄다. 노크는 딱 두 번, 정중했다.
“피가로님, 계십니까?”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콕 로빈의 것이었다. 피가로는 들고 있던 찻잔을 받침 안쪽으로 밀어 넣고 대답했다.
“문은 열려 있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열린 문틈 사이로 콕 로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품에는 둥글게 만 종이와 작은 가방이 안겨 있었고, 외투 자락에는 바깥바람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숨이 차 보이지는 않았으나, 방 안으로 들어서는 걸음에는 평소보다 많은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피가로는 그 표정을 보자마자 용건이 단순한 의뢰서 전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웃었다.
“콕 로빈 씨가 직접 찾아오다니, 오늘은 또 어떤 골치 아픈 의뢰일까. 북쪽에서 산이 걸어 다닌대? 아니면 서쪽에서 술병이 말을 하기 시작했나?”
“그런, 그런 일이 아닙니다.”
콕 로빈은 바로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말단이라지만 한 나라의 관리치고는 어수룩한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아쉽네. 술병이 말한다면 샤일록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마음 같아선 조금 더 장난을 치고 싶었으나, 당장은 콕 로빈이 찾아온 이유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용건은? 현자님이 아니라 나를 찾아온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마법관을 통한 정식 의뢰는 전부 현자를 거쳐 현자의 마법사에게 전달된다. 반드시 현자를 거쳐야 하는 이유는 아직 완전히 마법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탓일 테다. 의뢰를 수행한다는 핑계로 헛짓거리를 했다가는 현자의 마법사를 지원하는 국가의 명예가 보란 듯이 실추될 테니 말이다.
제멋대로인 다른 북쪽의 마법사들과 달리 피가로는 마법사의 위험성과 행정 절차의 중요성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편이었다. 그러니 다소 언짢기는 해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쪽의 의도는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다. 콕 로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문밖을 한 번 돌아보았다.
“선생님을 뵙고 싶다는 분이 밖에 와 있습니다.”
“나를?”
“예. 피가로님을요.”
피가로는 입에 넣으려던 과자를 내려놓았다. 손끝에 묻은 설탕이 테이블 위로 작게 흩어졌다.
“의뢰인은 아니고?”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환자도 아니겠군. 내가 아무리 소문난 명의여도 여기까지 진료를 받고자 찾아오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올 사람은 많았다. 그냥 많다 뿐인가, 지나치게 많아서 문제였다.
막 현자의 마법사가 된 시기라면 모를까, 지금은 한층. 현자의 마법사라는 체계도 올해부터 제법 취지가 변했다. 옛날엔 단지 무거운 의무를 지고 있을 뿐인 뜬구름 같은 존재였다면 지금은 각종 퍼레이드와 파견, 행사 등으로 일반인들에게 얼굴과 이름이 팔려있었다. 마침내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이라는 큰 목표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단연 중앙 나라의 아서 왕자가 있었다.
매년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재액을 막고, 그로 인한 다양한 재앙을 해결하는 마법사는 인간과 거리감을 좁힐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현자의 마법사가 활약을 하면 마법사를 두려워하는 인간들도 생각을 달리할 수 있었다.
“그럼 역시 빚쟁이인가.”
“빚을 지셨습니까?”
콕 로빈의 눈에 동병상련의 아픔이 스쳤다.
인간들은 계약서를 통해 정식으로 서로를 속박한 뒤,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는 한 언제까지고 신혼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콕 로빈과 카나리아의 정확한 결혼 기간은 모르지만, 신혼인 그들은 이제 막 함께할 거주지를 마련했을 것이다. 중앙 나라의 수도는 집값이 상당히 비싼 편이니 부족한 돈을 어디선가 끌어 썼을 것이다. 어쨌든 말단 관리의 봉급은 그다지 많지 않으니 말이다.
“어디까지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수롭지 않은 답변에 콕 로빈은 또 속았다는 얼굴을 했다.
이번에도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색한 미소조차 돌려주지 않는 걸 보니 스스로 놀림받고 있다는 자각이 있나 보다. 본인이 그 사실을 자각했다면 이 이상 반복하는 건 실례였다.
피가로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콕 로빈을 올려다보았다.
“정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을 무작정 마법관 안으로 들일 수는 없어서요.”
콕 로빈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눈에 띄게 망설이는 모습에 피가로는 그를 재촉하듯 고개를 까닥였다. 별것 아닌 그 행동이 콕 로빈이 품고 있던 망설임을 걷어낸 것 같았다. 그는 어깨의 긴장을 풀고 또렷한 눈빛으로 피가로를 마주 보았다.
“피가로님의 손님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불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감을 신뢰하는 건 중요하지.”
피가로는 턱을 괴며 부드럽게 말했다. 콕 로빈의 말대로 마법관은 아무나 간단하게 드나드는 장소가 아니었다. 현자와 현자의 마법사들이 머무는 곳이며, 거대한 재액에 맞서기 위한 거점이었고,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길 잃은 사람에게 물 한 잔을 내어줄 수는 있어도, 그를 경계 안쪽으로 들이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선량해 보이는 얼굴이 선량한 마음을 보증하지 않았고, 간절한 사정이 위험하지 않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았다. 하물며 그 방문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피가로를 찾는다면 더더욱 그랬다.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곤 해도 서쪽 나라의 대대적인 연설 이후 귀찮은 일이 부쩍 늘어났다. 현자의 마법사로서 봉사하고 있다는 소재지가 명확하게 드러난 탓일 테다.
‘아무리 그래도 직접 찾아올 줄이야. 정체가 탄로날 위험도 있고, 여러모로 귀찮은걸…….’
내심 싫증을 내기도 잠시, 피가로는 재빨리 안색을 바꿨다.
“이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이름을 대면서 자기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니. 수상하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구나.”
“예.”
피가로는 콕 로빈의 얼빠진 표정을 보며 하하 웃었다. 이쯤에서 콕 로빈은 신통한 물건을 접하듯 피가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짜고 친 것처럼 마음을 읽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행히 콕 로빈은 벌레가 들어가기 전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품에 안은 종이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마음을 정한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북쪽에서 왔다고 전해 달라 했습니다.”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멀리서도 왔네. 알려줘서 고마워, 콕 로빈 씨. 내가 직접 만나볼 테니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콕 로빈이 나가자 방 안은 이전의 고요를 되찾았다. 복도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들렸고, 창가의 햇빛도 그대로였으나, 적어도 마음은 한결 차분해졌다.
피가로는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북쪽에서 온 방문객이라니,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머릿속에 스쳐가는 면면이 너무 많아 정확한 인물을 특정할 수 없었다.
북쪽은 그의 연고지지만, 그곳에서 찾아올 사람이라고 해봤자 두 부류밖에 없었다. 말끝마다 ‘피가로님, 피가로님.’ 하며 자비와 가르침을 구걸하는 까마귀 떼나 해묵은 원한을 품은 무리들 말이다. 어느 쪽이나 마뜩잖은 건 마찬가지였다.
팔짱을 낀 채 골머리를 앓던 피가로는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었다. 익숙한 손길로 옷깃을 정리하는 동안, 조금 전까지 찻잔과 과자 접시 사이에 머물던 나른함은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외출할 채비를 갖추고 방에서 나왔을 때였다. 불안한 얼굴로 복도를 서성이던 콕 로빈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 안 갔네?”
“네, 그게…….”
“그렇게 불안하면 재량껏 내쫓아도 될 텐데.”
내심 그러기를 바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콕 로빈의 안색은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콕 로빈은 누가 들을까 무서운지 몸서리를 치며 주위를 둘러봤다.
“제가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드라몬드님이 아셨다간 경을 칠 거라고요!”
피가로는 대답 대신 혀를 쏙 내밀었다. 짓궂은 행동이 제법 무책임하게 보일 걸 알면서 그랬다. 콕 로빈이 벌벌 떠는 모습이 지겨워진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 사람, 지금도 정문 밖에 있어?”
“예. 경계선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오려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얌전하네.”
“얌전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왜?”
콕 로빈은 알맞은 표현을 찾으려는지 서류철을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눈치가 없지만 감이 좋았다. 아주 드물게 이런 사람이 있었다.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본 이들이 종종 그렇듯, 눈에 보이는 사실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낌새를 먼저 감지한 듯했다.
“꽤 오래 기다리게 했는데 화가 나지도, 피곤하지도 않아 보였습니다. 말을 걸면 일단 고개를 숙이는데, 정중하다기보다는…….”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콕 로빈은 스스로 무례하다고 느낀 듯, 송구한 얼굴을 했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아니야. 도움이 될 때가 많아.”
피가로는 가볍게 대답했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콕 로빈도 알아차린 듯했다. 콕 로빈은 피가로를 따라 복도를 걸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혼자 나가셔도 괜찮겠습니까?”
“정문 앞이라면서?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인데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피가로님.”
콕 로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정문 밖입니다. 마법관의 경계 바깥이에요.”
피가로는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말고 콕 로빈을 돌아보았다. 그의 뺨은 느슨하게 풀려있었고,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자리한 채였다.
“오래 살면 걱정이 많아진다던데, 콕 로빈 씨가 벌써 그럴 나이던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놀려서 미안해. 화내지 마.”
“화나지 않았어요, 전혀!”
바로 그런 행동이 삐진 사람처럼 보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하거나 말거나 이미 토라진 콕 로빈은 투덜거리면서 저 멀리 걸어가버렸다. 피가로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매정한 등에 손을 흔들다, 콕 로빈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즈음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
복도는 여전히 밝았다. 방 안에서 들었던 일상적인 소음이 더 가까워지고, 닫힌 문 너머에서 흘러나온 웃음과 대화가 벽을 따라 번졌다.
피가로는 그 사이를 지나며 외투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좋지 않은 의뢰, 오래된 원한,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되고 귀찮은 인연. 우선은 좋게 말해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어쨌든 마법관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가던 중, 복도 끝에서 오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혀있는 것이, 아래층에서 들뜬 아이들에게 내리 시달린 모양이었다.
원래 그곳에 있었는지, 피가로의 기척을 느끼고 올라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모른 체 지나가기에는 이미 눈이 마주쳤다. 피가로는 별수 없다는 듯 손을 들었다.
“오즈.”
오즈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가는 건가?”
“응. 손님이 왔다네.”
“북쪽의 마법사인가.”
“역시 마왕이야. 마력의 기척을 읽은 거지?”
날아갈 듯 가벼운 말에 오즈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쪽의 장난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는 사람인가?”
“아직 몰라.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
오즈의 눈이 피가로의 얼굴에 머물렀다. 말로는 드러나지 않는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시선이었다.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의 침묵 끝에 오즈는 피가로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함께 가겠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따라오겠다고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되었다. 피가로는 그런 점이 오즈답다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손님맞이를 하려는 거야? 애티튜드가 많이 좋아졌네.”
오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면 나를 배웅해 주는 쪽인가?”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 다만 오즈의 시선이 피가로의 옆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앞으로 돌아갔다. 피가로는 괜히 한마디를 더 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오즈와는 때때로 이런 침묵이 더 많은 말을 대신했다.
정문이 가까워질수록 복도는 조금씩 조용해졌다. 멀리서 들리던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벽 너머로 물러나고, 창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바닥에 길게 누웠다. 정문과 이어진 정원은 사람 한 명 없이 한적했다. 커다란 분수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주기적으로 울릴 뿐이었다.
방문자는 정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아마도 사내였을 것이다. 몹시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투박한 외투는 바람도 없는데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흔히 보이는 초조함이나 피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콕 로빈의 말이 맞았다. 그는 마법관 앞에 서있을 뿐,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보기와는 다르게 참을성이 있었다. 같은 성인 남성이라기보다는 교육을 잘 받은 동물 같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위축되어 있다고 할까. 지나치게 조용하고 얌전해서, 허락받기 전까지는 숨도 제대로 쉬지 않을 듯했다. 마치 누군가가 정해준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오래도록 노력한 사람처럼.
피가로는 처음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이곳에, 이런 방식으로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문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피가로는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눈앞에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얼음처럼 투명한 푸른 눈이었다.
피가로는 그 눈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 북쪽의 눈밭에서, 죽은 이의 곁에 웅크린 채 허기를 채우던 짐승 같은 마법사가 그를 올려다보던 눈이었다.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해도 피가로의 목소리만은 놓치지 않으려 애쓰던 눈. 처음으로 이름을 받았던 날, 세상을 다 가진 듯 밝아지던 눈. 벌을 받으면 눈 위에 납작 엎드려 용서를 빌면서, 또다시 되바라진 욕망을 품던 눈.
한때 피가로의 목숨을 위협하던 순간에도, 그 눈은 끝내 피가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애써 평정을 가장했지만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아물었을 상처가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작.”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자 방문자의 눈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빛은 기쁨과 닮아 있었으나 마냥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감정은 대개 조금씩 흔들리고, 망설이며, 상대의 반응에 따라 형태를 바꾼다. 그러나 아이작의 눈빛은 여전히 멍하고 두루뭉술했다.
피가로를 알아본 아이작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중한 듯 애매한 태도였다. 꼭 복종과 순종의 차이처럼 말이다.
“오랜만입니다, 피가로님.”
목소리도 기억과 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과거의 아이작에게 남아 있던 투박한 숨결이 빠져 있었다. 말은 더 분명해졌고, 발음은 더 가지런해졌다. 그토록 오랫동안 교정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던 것이기에 놀라움이 더욱 컸다.
피가로는 잠시 말이 없었다. 피가로가 아무 말을 하지 않으니 오즈도 덩달아 침묵했다.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길지 않았으나, 그 사이 피가로는 눈앞의 아이작을 면밀히 살폈다.
목소리와 생김새만큼이나 마력의 결 또한 일치했다. 아이작의 마력은 북쪽의 눈바람처럼 거칠고 질겼다. 날카롭고 다듬어지지 않았으며, 가늘게 길게 이어질지언정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길가에 채는 돌멩이만큼이나 흔하고 지루한 마력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런 부분까지 아이작 답다고 할 수 있다.
피가로는 어떻게든 아이작에게서 이상한 점을 찾아내려고 했으나, 끝까지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아이작은 정말로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런 혼란 속에서, 감히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도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를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된다.
그 사실에 피가로는 뒤틀린 쾌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북쪽의 방식대로 보복할 생각에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이나마 손을 거쳐 간 이를 처리할 생각에 불편한 것 같기도 했다.
“오즈.”
피가로는 오즈를 돌아보며 웃었다.
“언제까지 따라올 셈이야? 이제 그만 따라오고 네 할 일 해.”
밀물처럼 들이치는 전율을 아마 완벽하게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오즈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래봤자 평소의 무심함에서 아주 조금 미간을 모은 정도긴 했다. 피가로는 떨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덧붙였다.
“오후엔 나들이에 동행하기로 했지? 아이들과 현자님이 기다릴 거야. 지금쯤 피크닉 도시락을 몇 단으로 할지 고민하고 있을 테니까.”
이번에는 의도한 대로 평온한 어조였다. 피가로는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있는 오즈를 부드러운 손길로 돌려세웠다.
“만약 현자님이 나를 찾으면, 오늘은 늦는다고 전해줘.”
오즈의 시선이 아이작에게 향했다가 다시 피가로에게 돌아왔다.
“자세한 말은 하지 말고. 지인을 만나러 갔다고 하면 돼.”
“……알았다.”
“고마워.”
연락용 부엉이 같은 취급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오즈는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으나, 피가로는 적당히 만족했다. 대답을 들었으면 됐다. 비록 약속은 아니지만 오즈는 당부를 지켜줄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것은 오즈가 가진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오즈를 돌려보낸 피가로는 마법관의 경계를 넘어 아이작에게 다가갔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피가로가 몇 걸음 앞에 멈춰 서자, 그는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다시 까마득한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비굴하기까지 한 태도가 몹시 신경을 거슬렀다.
“살아 있었구나.”
“예.”
“아니면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건가?”
아이작은 저열한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불쾌해하지도, 상처받지도 않았다. 말의 내용보다 피가로가 먼저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듯했다.
피가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은 아직도 꿈을 꾸는 듯 몽롱했다. 그 안에 적어도 두려움이나 걱정은 없었다. 도발 당한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완전히 눌러 죽이지 못한 북쪽의 자아가, 상처받은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아직 저를 반겨주시는군요.”
“무슨 착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이제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내가 너를 환영하는 게 아니라, 네가 그럴 수밖에 없는 장소에 발을 들였다는걸.”
아이작은 피가로의 말을 곱씹는 듯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그러고선 피가로에게서 처음으로 시선을 떼었다. 멍한 눈동자는 마법관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건물 안쪽에 있는 무언가를 찾듯 모든 층을 샅샅이 훑었다.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등줄기로 차가운 땀이 흘렀다. 아이작은 루틸과 미틸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곤 해도 그 아이들에게 아이작을 소개해 준 건 실수였다. 그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이작의 모든 행동이 협박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아이작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은 드물게 어떤 임무도 없는 날로, 대부분의 마법사가 숙소 내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바로 벌집…… 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압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피가로는 마법관 건물과 아이작 사이로 끼어들어 시야를 차단했다. 긴장으로 경직된 어깨가 뻐근하게 아려올 즈음이었다. 데록데록 구른 푸른 눈동자가 마침내 피가로를 향했다.
“피가로님께선 워낙 공사다망하신 분이니, 그간 저를 잊으셨을 줄 알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나를 죽이려 했던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잊겠어. 암만 나이를 먹었대도 그 정도로 오락가락하진 않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다행?”
“피가로님의 기억 속에 아직 제가 남아 있다면, 저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니까요.”
“하하, 이건 또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일까…….”
아이작의 관심을 끈 것이 잘한 행동인지 모르겠다. 대충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으나, 결국 피가로는 역겨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아이작은 북쪽 마법사치고 원래도 감성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런 예민하고 충동적인 부분이 피가로가 그를 멀리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여긴 무슨 일로 왔니?”
“이유가 있어야지만 찾아올 수 있습니까?”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할까.”
아이작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당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까?”
피가로는 낮게 웃었다. 맞물린 잇새로 흘러나오는 웃음에 신경질이 듬뿍 묻어났다.
“그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야.”
“제가 할 수 있는 답은 그뿐입니다.”
아이작은 여전히 정중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피가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아이작이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 줄이야.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피가로는 손끝으로 작은 마법을 일으켰다. 공격도 위협도 아닌, 상대의 상태를 확인하는 가벼운 마법이었다. 그러나 피가로의 마법은 아이작에게 닿기 전에 허공에서 소멸되었다. 손에 쥐고 있는 눈이 체온에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차고 무른 감각만 남았다.
아이작은 손을 쥐었다 풀기를 반복하는 피가로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무리하지 마세요.”
“걱정을 다 해주고, 기특하네.”
“피가로님이 제게 기특하다고 말씀하신 건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그처럼 제멋대로인 사람에게는 비꼬는 말도 소용없었다. 급격히 피로해진 피가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작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제가 제 이름을 제대로 썼을 때였습니다. 두 번째는 피가로님의 말을 듣고 손을 거두었을 때였고요. 지금이 세 번째입니다.”
“나야말로 네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네. 다 알고 있다기엔 넌 상당히 무례하게 굴었으니까.”
“잊으면 안 되는 말이니까요.”
아이작은 조용히 웃었다. 칠판을 쇠로 긁는 것 같은 소리였다.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피가로님께 받은 건 무엇 하나 허투루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피가로는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그는 정말로 그랬다. 비록 배우는 속도는 더디고 말뜻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피가로의 말만큼은 소중하게 여겼다. 지나가듯 가볍게 던진 말도 마찬가지다. 피가로는 그것을 성실함이라 여겼으며, 때로는 지식에 대한 갈망이라 여겼다.
이제 와선 다 옛날 일이다. 부끄럽게도 피가로는 훌륭한 스승이 아니었고, 아이작 또한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말을 섞을수록 결심은 무뎌지기는커녕 단단해지기만 했다.
피가로는 가치 없는 생각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함께 가주셨으면 합니다.”
“어디로?”
“북쪽으로요.”
맨 처음 아이작을 거둬들였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귀찮아질 줄 몰랐다.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당시는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쳐 그에게도 힘든 시기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행동에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친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늦게나마 관계를 청산하려면 모든 것이 시작된 땅으로 가는 것이 옳았다.
피가로는 마법관을 돌아보았다. 경계는 바로 등 뒤에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즈가 떠나지 않고 계속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도 아니고, 그치고는 드문 일이다. 어쩌면 피가로가 미처 읽지 못한 것을 그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친절마저 자존심이 상한다고 하면 이기적인 걸까.
지난 시간 동안 다양한 만남이 오즈를 변화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얄미워도 가족처럼 부대낀 시간이 있기에, 하나뿐인 동생제자가 항상 행복하기를 바랐다. 분명 바라던 대로 이루어졌음에도 피가로는 달라진 오즈의 태도를 느낄 때마다 조금씩 좌절과 실망감에 휩쓸렸다. 결국 오즈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끈 것은 수천 년간 함께 해온 그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서였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생각이라는 건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원치 않는 방향으로 제멋대로 흘러갔다. 피가로는 앞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어렵사리 억눌렀다.
“내가 싫다고 한다면?”
“피가로님은 거절하지 않으실 겁니다.”
“확신하고 있구나. 이유를 들어볼까?”
“피가로님은 불확실한 것을 그냥 두고 지나치는 법이 없으시죠. 당신의 계획이 틀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아이작은 피가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었다. 무던한 눈매, 굳어진 입가, 어두운 목티 위로 드러난 목덜미, 외투 아래로 숨겨진 몸의 선. 노골적인 시선에 피부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불쾌함이 엄습했다.
“무엇보다, 저를 이대로 두면 곤란해질 테니까요.”
“순순히 따라가지 않으면 난동이라도 피우겠다는 말투구나.”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쓸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죠.”
피가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대놓고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었다.
“못 본 새 제법 말이 늘었네.”
“전부 피가로님의 가르침 덕입니다.”
“나는 그런 걸 가르친 기억 없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행복은 직접 찾아야 한다고도 하셨죠.”
아이작은 허황된 말을 늘어놓았다. 물론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가로는 더 이상 아이작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 하다못해 숨소리 같은 사소한 것조차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이작.”
피가로는 팔짱을 꼈다. 자신을 보호하는 위함인지, 무작정 손이 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인지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너랑 시답잖은 추억 이야기할 생각 없어. 특히 이곳에서는 더더욱.”
옛날이었다면 아주 조금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납작 엎드려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아이작은 분명히 변했다.
어쩌면 아이작이 옳을 수도 있다. 피가로는 지금껏 살아오며 자신이 내뱉은 말을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인간이든 마법사든, 언어로 소통하는 이상 모두가 같았다. 언제나 진실과 진심만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이따금 마음에도 없는 미사여구를 내뱉었고, 앞날이 캄캄한데도 무작정 잘 될 거라며 위로하기도 했다.
특히 아이작과 함께 다닐 시절의 기억은 흐릿하다. 얄궂게도 피가로는 그 시기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내면 깊은 곳에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묻어두고 다시는 꺼내보지 않았다. 그러니 황홀경에 빠진 아이작이 지나간 일에 대해 무슨 말을 늘어놓든 그에게는 남 일처럼 멀게만 느껴질 뿐이다.
피가로는 잠시 후에야 다시 엷은 미소를 만들었다.
“장소를 옮길까?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좋겠어. 한적하고 조용하니까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 적합할 거야.”
피가로는 아이작이 반드시 반응할 거라고 생각했고, 예상은 보란 듯이 적중했다. 한순간이지만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눈에 화색이 돌았다.
“함께 가주시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 어서 앞장서. 네 말대로 나는 공사다망하신 몸이라 늦어도 내일 점심까진 돌아와야 하거든.”
기적적인 합의에 도달한 두 사람은 빗자루를 타고 마법관에서 멀어졌다. 별도의 이동 수단 없이 오직 빗자루만으로 북쪽까지 이동하는 건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오즈와 미스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아쉬웠다.
막 마법관 부지를 벗어났을 즈음이었다. 옆에서 나란히 비행하던 아이작이 몸을 기울였다.
“도움을 구하진 않으십니까?”
도움? 누가 누구에게? 올해 들은 말 중 가장 웃긴 말이었다.
“왜, 내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만큼 약해 보여?”
피가로는 코웃음 치며 아이작을 흘겼다.
“한 번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 기회를 얻었을 때 숨통을 끊어놓지 못한다면 결국 무용지물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 너나 나나 벼랑 앞의 등불이지. 어느 정도 운에 의존하는 상태 아니겠어?”
“피가로님, 당신처럼 강한 마법사가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겁니까?”
“어리석긴.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설령 죽고 싶지 않다고 해서 내가 뭘 할 수 있지? 울고불고 떼라도 쓰라는 건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아이작은 점점 가까워졌다. 피가로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센 돌풍이 불어와 아이작을 멀리 밀어냈다.
“내가 몇 번이고 말했잖아.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고 해도 순리를 거스를 순 없어.”
아이작은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피가로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힘을 맹신하는 건 전형적인 북쪽 마법사의 특징이다. 아이작은 정령을 부리고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희열에 차있었다. 힘만 있다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들은 마찬가지로 삶의 아슬아슬한 끝자락에 서있었다. 초조하고, 또 두려운 마음으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마지막 순간을 막연히 상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기적이라 신봉하는 마법은 만능이 아니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죽음은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이제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도 되었는데 수백 년을 살고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빠르게 비행하는 빗자루 위에서 대화를 나누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바람을 정통으로 맞은 탓인지 입안이 바싹 말랐다.
피가로는 아이작을 조심스럽게 살폈지만, 북쪽에 가서 뭘 할 생각이냐고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들으나 마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몇 달 전 그 자리에서 풀어내지 못한 매듭을 완전히 끊어내려는 거겠지.
마법관은 이미 멀어졌다. 대신 그는 눈앞에 놓인 길을 보았다. 북쪽 나라의 특징이라 볼 수 있는 흰 눈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전 등지고 떠났던 북쪽의 공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천천히 주변의 온도를 낮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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