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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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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북쪽의 아침은 느리게 밝았다. 창틈으로 스며든 빛은 희고 옅어서, 방 안에 남은 밤의 기척을 단번에 밀어내지 못했다. 꺼지지 않은 난롯불은 뭉근하게 숨을 쉬고 있었고, 벽가에 걸린 외투와 탁자에 놓인 책 더미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윤곽을 되찾았다.

미스라는 눈만 깜박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시야에 먼저 들어온 건 천장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 피가로의 어깨였다. 손을 조금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웠고, 밤새 덮고 있던 이불 안쪽에는 아직 식지 않은 온기가 고여 있었다.

베개에 얼굴 반쪽을 묻은 채 그 모습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으면 좀 떨어져.”

미스라는 꼼짝하지 않고 눈만 데록데록 굴렸다.

“깼어요?”

“방금 막.”

피가로는 이미 상체를 일으킨 뒤였다. 옆으로 미끄러진 이불 아래로 어깨선이 드러나고, 묶이지 않은 머리카락이 등과 베개 위로 느슨하게 흘러내렸다. 평소처럼 정돈된 모습은 아니었다. 늘 단정히 묶여 있던 머리는 이리저리 엉켜있었고, 잠기운이 덜 걷힌 얼굴에는 평소의 이지적인 기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미스라는 피가로를 물끄러미 보았다. 평소 옷깃 하나 흐트러짐 없던 사람이 아침의 흐린 빛 속에서는 퍽 무방비해 보였다. 손등으로 눈가를 가볍게 문지르는 작은 습관도,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찮은 듯 넘기는 동작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그만 쳐다봐.”

“부담스러워요?

“그래.”

미스라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피가로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는 미스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평범하게 어른의 관심을 요구하기에 미스라는 꽤 많이 독특한 아이였으니까.

피가로는 이유를 묻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발이 닿자 오래된 나무가 삐걱거렸고, 밤새 가라앉아 있던 방 안의 공기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조금 흔들렸다.

피가로는 침대에서 내려오다 말고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미스라가 상반신을 죄다 드러낸 상태로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별다른 말없이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손길은 거칠지 않았지만, 다정하다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무뚝뚝했다.

“미스라, 일어나야지.”

“좀 더 있을래요.”

“더 잘 거면 네 방으로 돌아가.”

“늦장 부리게 두지도 않을 거면서. 어차피 나를 일으키려는 계략이죠? 다 알아요.”

미스라는 꾸물거리기만 할 뿐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피가로는 짧은 숨을 토해냈다. 짜증과 체념 사이 어딘가에 놓인 소리였다. 이 정도 말로는 미스라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반응이기도 했다.

피가로는 창가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북쪽의 아침빛은 희미한 회색에 가까웠고, 방 안으로 흘러든 빛은 책상과 의자, 벽가에 걸린 외투, 정리된 약초 꾸러미의 윤곽을 천천히 되살렸다. 미스라는 열린 창으로 들어온 차가운 공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이미 들어온 한기는 내쫓을 수 없었다.

계속 뒤척이는 동안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스라는 벌어진 이불 틈으로 바깥 상황을 엿보았다. 가운을 걸친 피가로의 등이 있었다. 그는 작은 서랍에서 머리끈을 꺼냈다. 긴 머리카락을 빗질한 다음, 한데 모으는 손놀림은 익숙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밤새 흐트러졌던 머릿결이 차례대로 정리되었고, 느슨하게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은 곧 하나의 묶음으로 모였다. 마지막으로 끈이 단단히 감기자, 피가로는 다시 미스라가 알던 형태에 가까워졌다.

미스라는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손목이 가볍게 돌아가는 모양, 머리카락이 당겨지며 정돈되는 흐름, 묶음을 고정하고 남은 머리칼을 어깨너머로 넘기는 동작까지. 별것 아닌 일인데도 이상하게 눈길을 끌었다.

그때 피가로가 돌아보았다.

“대체 언제까지 농땡이를 피울 셈이지?”

“일어나요. 일어나면 되잖아요.”

미스라는 그제야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있으니 피가로의 시선이 곧장 따라붙었다. 팔짱을 낀 피가로는 보기 드물게 심술이 가득 묻어나는, 못마땅한 낯을 하고 있었다.

미스라가 피가로의 방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잠이 오지 않는다고 내려왔고, 어느 날은 그냥 돌아가기가 싫어서 남아 있었다. 옛날에는 피가로가 미스라를 위층 끝방까지 데려다주었지만, 결국 자기 방을 내어 주는 일이 늘었다. 미스라가 같이 누워 자자며 칭얼거리기도 했고, 그 방의 침대가 둘이 눕기 워낙 비좁은 탓도 있었다.

천둥번개 따위로 날씨가 사납거나, 밤공기가 유난히 싸늘하거나, 미스라가 말없이 난롯가에 오래 앉아 있는 날이면 피가로는 번거롭게 묻지 않고 방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온기가 필요한 밤에는 자연스럽게 이 침대에 눕게 되었다. 피가로는 그 일을 끝까지 어색해하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나마 다행히 두 사람 다 잠버릇이 사나운 편은 아니었다. 다만 때때로 미스라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다가 피가로가 무의식중에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낄 때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피가로는 밤새 미스라를 끌어안고 있던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잠에서 깨기 직전이면 이상하리만치 반듯한 자세로 돌아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체온이 높으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품 안쪽은 답답하기보다 따뜻했고, 피가로의 팔은 치렛타처럼 거침없이 감싸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조심스러워서, 미스라는 대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잠들었다.

“미스라.”

아주 조금 미적거렸을 뿐인데 잔소리가 득달같이 따라붙었다.

“네네, 일어났습니다.”

미스라는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차가운 바닥의 감각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자 아직 이불 속에 남아 있을 온기가 뒤늦게 아쉬워졌다. 열린 창문으로 찬바람이 들이닥친 후에도 방 안에는 희미한 약초 냄새와 밤새 꺼지지 않은 난롯불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그새 옷을 갈아입은 피가로는 이미 평소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얼마 전까지의 흐트러짐은 사라지고, 늘 보던 단정한 표정이 자리 잡았다.

“피가로, 오늘은 뭐해요.”

“수업.”

“또.”

“어제도 했으니까 오늘은 안 해도 된다는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알았지.”

피가로는 탁자에 흩어진 책을 옆구리에 끼며 코웃음 쳤다. 얄팍한 속내를 읽힌 것이 분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미스라는 입을 삐죽이면서 방을 나서는 피가로의 뒤를 따랐다.

*

피가로와 미스라가 함께 지내는 시간은 어느새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되어 있었다. 물론 타고난 성격이 다른 만큼 여전히 부딪히는 일은 많았다. 피가로는 참견이 심한 선생님이었고, 미스라는 고분고분한 학생이 아니었다. 수업 중에는 같은 지적을 세 번쯤 듣고 나서야 겨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고, 식사예절을 지적하면 보란 듯이 맨손으로 음식을 집었다. 피가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썹을 찌푸렸으며, 미스라는 그럴 때마다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런 일이 아무리 쌓인다고 해서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질 리 없었다. 그래도 툭툭 던지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게 된 건 몇 안 되는 장점이었다. 어느 날은 짜증이 나고, 어느 날은 지루하고, 어느 날은 괜히 상대의 얼굴이 거슬리다가도 저녁이 되면 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같은 공간에 있었다. 창문을 뒤흔드는 칼바람 소리를 같이 듣고, 식기를 함께 부딪치며, 이따금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면, 좋든 싫든 상대의 기척이 몸에 배게 되었다.

미스라는 이제 피가로의 걸음 소리만 들어도 그날의 기분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작업대 근처를 오가는 발소리가 평소보다 조용하면 생각이 많은 날이었고, 내딛는 걸음이 짧고 단단하면 외출하고 와서 심기가 불편한 경우가 많았다. 기분이 좋은 날을 짐작하는 일은 애초에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날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피가로도 계단 위에 걸터앉은 미스라의 등을 보는 것만으로 얼추 그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듯했다. 수업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갔는지, 아니면 전부 창밖의 눈보라 속으로 날려 보냈는지 말이다.

겉으로는 아무도 스승과 제자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아침이면 수업이 시작됐고, 잘못된 자세는 그때마다 피가로의 손에 고쳐졌다. 식탁 앞에서는 잔소리와 대꾸가 빠지지 않았다. 피가로는 인정하지 않았고, 미스라도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매일 반복되는 일들은 제 모양을 갖추기 마련이었다.

달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피가로는 어느 순간부터 오즈의 이름을 거의 입에 담지 않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 이름을 즐겨 말하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언급 자체는 잦았다. 피가로에게 오즈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불만에 가까웠던 것이다.

정확히 미스라의 가출 사건 이후였다. 자신의 사소한 언행이 전부 미스라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게 된 피가로는 감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갈무리하게 되었다. 쌍둥이의 성서 돌아온 날에도, 북쪽의 오래된 마법사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에도, 대화가 그쪽으로 흘러갈 만한 순간이면 피가로는 늘 한 박자 이르게 화제를 꺾었다. 말없이 책장을 넘기거나,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가거나, 괜스레 미스라의 안 좋은 버릇을 지적하는 식이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마냥 서투른 회피는 아니었다. 피가로는 원래 여러 방면에서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정말 우연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만큼 성가신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미스라도 그 정도 눈치는 생겼다. 피가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람마다 견딜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반대로 허용 가능한 선이 있다. 불필요한 분란을 피하기 위해 미스라가 깨우친 게 바로 그것이었다.

미스라는 오즈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을 버리지 못했지만 피가로에게 묻지는 않았다. 오즈에 대해 물어보면 피가로가 싫어한다. 대답하기 싫은 화제를 올릴 때 피가로는 입을 꾹 다물고 불퉁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수업은 길어지고, 덩달아 잔소리도 늘어난다.

아마 피가로는 알지 못할 것이다. 숨기고 외면할수록 미스라의 안에서 오즈라는 존재가 더욱 또렷해진다는 사실을.

미스라는 피가로의 힘을 알고 있었다. 제대로 말실수를 했을 때 온 공방이 한순간에 낯선 짐승의 속처럼 변하던 감각을 기억했다. 피가로가 웃지 않는 얼굴로 이름을 부른 순간, 어깨를 묵직하게 짓누르던 마력의 무게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치렛타의 힘도 알고 있었다. 바람처럼 가볍고 제멋대로 흩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거대한 뼈의 괴물을 한순간에 부숴 버리던 힘. 또한 오래전 쌍둥이의 성에서 느꼈던 기묘한 압력도 희미하게 육체에 새겨져 있었다. 작고 희고, 장난처럼 웃으면서도 결코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던 존재들.

그렇다면 피가로가 두려워하고, 치렛타가 높이 사며, 쌍둥이마저 어쩔 수 없이 고삐를 풀어놓는 그 이름은 대체 어느 정도의 무게를 지닌 걸까.

본 적도 없는 존재의 힘을 가늠하는 일은 어려웠다. 그러나 미스라는 자꾸만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가로와 자신의 힘을 견주고, 치렛타의 마력과 쌍둥이에게서 느꼈던 압박감을 떠올리다 보면, 아득히 높은 곳에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형체가 어렴풋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 상대는 윤곽도, 목소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미스라는 자꾸만 그쪽을 의식했다.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한 번쯤 손을 뻗어 보고 싶어졌다.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이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피가로가 덮어 두려 할수록 오히려 호수 밑에 가라앉은 뼈처럼,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또렷하게 걸렸다.

어쨌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터였다. 피가로의 말마따나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으니까.

그날 수업은 공방의 꼭대기 층에서 이루어졌다. 위층은 평소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창문이 좁고 바람이 세서 약초를 말리기에도, 책을 펼쳐 두기에도 적당하지 않았다. 대신 오래된 도구나 다루기 까다로운 물건을 따로 옮겨 두는 데 쓰였고, 그중에는 피가로가 호기심 많은 아이에게 되도록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는 물건도 섞여 있었다.

피가로는 한참 망설이다가 그날에야 그 방문을 열어 주었다. 원래 이런 건 꽁꽁 감출수록 더 궁금해지는 법이다. 잔뜩 신이 난 미스라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 방 안의 물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끈 것은 탁자 위에 놓인 낡은 금속 고리였다. 표면은 닳아 있었고, 안쪽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처음 보면 오래된 장식품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미스라는 곧장 눈을 반짝였다.

“이거 주구군요.”

피가로는 대답 대신 금속 고리 옆에 얇은 막을 하나 펼쳤다.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결계가 둘러져 있었다. 성질 급한 미스라가 냉큼 그것을 집으려 하자, 피가로는 손가락 끝으로 탁자 가장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직 만지지 마. 반쯤 망가진 물건이라 잘못 건드리면 튕겨 나갈 거야.”

“고칠 수 있어요?”

“그걸 지금부터 네가 해야지. 실패해 봤자 폭발하기밖에 더 하겠어. 부담을 갖지 말라는 말은…… 됐다. 네가 이제 와서 내 눈치를 살필 리가 없지.”

미스라는 입꼬리를 올렸다. 피가로의 말대로였다. 경고 같은 건 이미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엔 주술과 저주에 관련된 수업을 제대로 배치하지 않은 피가로의 잘못도 있었다. 피가로의 수업표에서 그런 항목은 늘 마지막 장 근처에 처박혀 있었다.

“저주를 싫어해요?”

“또 이상한 질문을 하는구나. 좋아할 이유가 없지 않나.”

피가로는 고리 주변에 작은 표시를 몇 개 더했다. 오래된 문자처럼 보였지만, 미스라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저주는 이도 저도 아닌 잡기에 불과해.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저주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면서요.”

“그래. 네가 모른 채 당하는 건 더 보기 싫으니까. 명색이 널 가르치는 입장이다. 알려주지 않아서 당했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면 이쪽이 곤란하거든.”

그 말은 잔소리처럼 나왔지만, 미스라는 적당히 만족했다. 그는 더는 불평하지 않고 몸을 숙여 도구를 들여다보았다. 금속 표면의 문양은 거의 닳아 있었지만, 그 아래 깔린 흐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래전에 끝난 것이 아직도 끈질기게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죽음의 호수에서 주워 온 뼈들과 비슷했다. 겉으로는 이미 쓸모를 다한 것처럼 보여도, 안쪽에는 아직 긁어낼 것이 있었다.

“마법 생물의 신체 일부인가요. 내부 마력을 건드리면 되는 거죠?”

“잘 알고 있군. 평소에도 이만큼만 관심을 보였으면 좋겠는데.”

피가로는 고리 위에 걸린 결계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말해주지 않아도 알겠지만 마력을 부딪칠 때는 신중하게 진행해야 해. 억지로 마력을 밀어 넣지 말고, 성질을 먼저 이해하는 거다.”

미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설명은 이해하기 쉬웠다.

“알고 있어요. 당신 결계를 깰 때 몸으로 배웠거든요.”

삐뚜름하게 선 피가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도발하는 솜씨가 제법 훌륭하구나.”

“뭘요. 그럼 시작할게요?”

기분 탓인지 팔짱을 낀 손에 힘이 들어간 것 같다. 상당히 언짢아 보였지만 미스라는 개의치 않았다.

미스라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마력을 밀어 넣는 대신, 손끝에서 풀려나온 힘을 실처럼 가늘게 펴서 금속 고리의 표면 위로 흘려보냈다. 처음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낡은 문양은 일그러짐 하나 없었고, 고리 안쪽에 남은 기운도 죽은 척 숨을 죽이고 있었다.

벌써부터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미스라는 무작정 힘을 더하지 않고, 오히려 조금 덜어냈다. 얇게, 더 얇게. 물밑에 가라앉은 뼈를 더듬을 때처럼, 먼저 보이지 않는 모양을 찾았다. 금속 아래에 묻힌 결이 어디서 끊겼는지, 어디가 삭았고, 어디가 아직 버티고 있는지 하나씩 짚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강한 마력에 반발하듯 탁자 위의 고리가 요란하게 덜그럭거리기 시작했다.

미스라는 어정쩡하게 손을 내민 채 숨을 멈췄다. 혹시 몰라 등 뒤에 선 피가로를 곁눈질했지만, 그는 바로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라는 조언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지적도 없었다.

변화가 일어난 건 그즈음이었다. 얼마 안 되는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허공에 떠오른 문양이 복잡한 선을 이루기 시작했다. 창밖의 바람 소리와 낡은 목재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한 꺼풀 멀어지고, 끊어진 문양의 끝과 끝이 희미하게 이어졌다. 식은 불씨 같은 빛이 금속 아래에서 가늘게 번졌다.

반짝이는 것에 매료될 만큼 어리고 유치하지는 않았지만, 마법이라는 건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미스라는 어렵사리 잡은 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조금만 더. 강하게 밀어붙이면 부서질 테고, 늦추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테니 중도를 잘 잡아야 했다.

금속 고리가 낮게 울렸다. 이번에는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잠들어 있던 것이 눈꺼풀을 밀어 올리듯, 희미한 빛이 문양 사이로 번지며 고리 안쪽을 한 바퀴 돌았다. 미스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됐다, 하고 입 밖으로 내기 직전이었다.

“아니, 이 반응은…….”

피가로가 팔짱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미처 고개를 들기도 전에, 창문 쪽에서 단단한 것이 한꺼번에 깨져 나가는 소리가 났다.

단단한 유리가 안쪽으로 밀려들고, 오래된 창틀이 비명을 지르듯 휘어지며, 바깥의 눈바람이 방 안으로 한꺼번에 쏟아졌다. 처음에는 무언가 잘못 건드린 줄 알았다.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한 몸이 먼저 반응했다. 미스라는 반사적으로 손을 거두었고, 아직 이어져 있던 마력의 실이 끊겼다. 금속 고리 안쪽에서 막 살아나려던 빛이 뒤틀리며 가라앉았다.

깨진 유리 조각이 흰 눈발 사이에서 은빛 비늘처럼 흩어졌다. 탁자 위에 펼쳐 둔 낡은 종이와 얇은 천 조각도 바람에 들썩였다. 찰나의 순간, 피가로가 미스라의 팔을 당겨 등 뒤에 숨겼다. 자기보다 약한 것을 지키는, 지극히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의 마력이 넓게 퍼지며 사방으로 퍼지는 유리 조각과 눈발을 붙잡았다.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미스라는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탁자 위의 고리와 부서진 창문을 번갈아 보았다. 고리는 깨지지 않았다. 터진 것도 아니었다. 방 안으로 밀려든 눈바람 너머, 깨진 창틀 위에 누군가가 아무렇지 않게 걸터앉아 있었다.

“재미있는 걸 하고 있었네. 나도 끼워 줘.”

미스라는 한동안 눈만 깜박였다. 외부의 압력을 받은 창문이 갑자기 깨진 것도, 피가로가 제 앞을 막아선 것도, 깨진 창문으로 밀려든 눈바람도 전부 뒷전으로 밀려났다.

미스라는 그제야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랫동안 듣지 못한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는 방금 외출했다 다녀온 사람처럼 그들이 있는 공간에 자연스럽게 섞였다.

치렛타였다. 창 안쪽까지 말려든 망토 자락 아래로 눈이 묻은 금발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치렛타는 깨진 창틀에 걸터앉은 채 방 안을 둘러보다가, 이제야 미스라를 제대로 본 사람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어머, 그새 많이 컸네.”

미스라는 자기 손목과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피가로가 아침마다 옷매무새를 고쳐 주는 몸은 여전히 작았고,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발끝이 먼저 튀어나가는 것도 그대로였다. 아무리 살펴봐도 달라진 구석은 없었다.

“하나도 안 컸어요.”

미스라는 반박자 늦게 덧붙였다.

“당신은 너무 늦었고요.”

치렛타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 대신 미스라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치렛타가 돌아오면 해야 할 말이 많았다. 어디에 있었는지, 왜 말없이 떠났는지, 언제부터 돌아올 생각이었는지. 그러나 막상 그 얼굴을 보자 질문들은 전부 목 안쪽에 걸렸다.

피가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제의 극적인 상봉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미스라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무는 것을 보고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피가로는 깨진 창문과 흩어진 유리 조각, 창틀을 넘어오며 결계까지 찢어 놓은 치렛타를 차례로 보더니 천천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왜 하나같이 문으로 오고 가지 않는 거야.”

치렛타는 창틀 위에서 가볍게 다리를 흔들었다.

“오랜만에 등장했잖아. 조금쯤 화려해도 괜찮지 않아?”

“네 즐거움을 위해 남의 집 설비를 망가뜨리지 말라는 말을 직접 해야 알아듣겠나?”

치렛타는 별 고민 없이 머리카락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피가로는 여전히 사소한 걸 따지네.”

“사소하지 않아. 그리고 네 제자도 똑같은 짓을 했어.”

피가로의 시선이 미스라 쪽으로 향했다. 미스라는 괜히 탁자 위의 주구를 내려다보았다. 깨진 창문으로 밀려든 바람 탓에 방금 되살아나던 빛이 고리 안쪽에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자가 답지 않게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치렛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미스라가? 그건 좀 자랑스러운데.”

“그 반응을 보니 네가 뭘 가르쳤는지 알겠다.”

“안심해. 가르친 적은 없어.”

“굳이 말로 안 해도 보고 배우는 게 있는 법이지.”

피가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치렛타에게 엄하게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결국 그는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듯 깨진 창문을 가리켰다.

“됐고, 그거 고쳐 놓고 들어와.”

“지금 손님한테 일을 시키는 거야? 피가로 체면 다 죽었네.”

“손님은 창문으로 들어오지 않아.”

“그럼 오랜 친구에게 베푸는 관용은?”

“오랜 친구라고 해서 무례를 범해도 되는 건 아니지.”

치렛타는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곧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고치면 되잖아.”

반성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치렛타가 손을 들자, 허공에 묶여 있던 유리 조각들이 눈발 사이에서 반짝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가로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고, 미스라는 창틀 위의 치렛타와 탁자 위의 주구를 번갈아 보았다.

유리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창틀 안에서 맞물렸다. 갈라진 결계도 얇은 빛을 머금고 다시 이어졌다. 다만 피가로가 짜 둔 결계처럼 촘촘하지는 않았다. 비어 있는 곳만 얼기설기 기운 모양새에 가까웠고, 피가로는 그 허술한 마감이 못내 성에 차지 않는지 이마를 찌푸렸다.

방 안으로 밀려들던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자, 꼭대기 층에는 깨진 소리보다 긴 침묵이 남았다. 치렛타는 손끝을 가볍게 털고 창틀에서 내려왔다. 망토 자락에 묻은 눈이 바닥 위로 조금 떨어졌지만, 피가로는 그 일을 못 본 척 넘겼다. 창문은 고쳐졌고, 결계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등장 방식은 최악이었지만, 어쨌든 시킨 일은 해낸 셈이었다.

피가로는 잠시 치렛타를 보았다. 미스라만큼이나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우르르 쏟아 내 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서 와, 치렛타.”

치렛타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창밖의 흐린 빛이 깨끗해진 유리 너머로 스며들고, 고운 얼굴 위에 꽃잎처럼 옅은 웃음이 번졌다. 미스라가 기억하던 치렛타였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먼저 꺼내고, 남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으면서, 오래 비워 둔 자리를 하루쯤 비운 것처럼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뻔뻔한 사람.

“다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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