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시아 5


*

그로부터 며칠 뒤, 이보르는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공동묘지는 영면에 든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였다.

몸에 보이지 않는 방벽을 둘러 바람과 추위를 막는 것은 할아범에게서 제일 먼저 배운 주술이었다. 이보르는 자기 한 몸 지키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그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피가로는 마을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방벽을 펼칠 수 있었다. 범위가 너무 넓은 게 문제였을까. 비록 마을 안쪽으로 들이치는 눈보라를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앞길을 막아서는 눈보라를 뚫고 나아간 이보르는 아버지의 묘에서 예전과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당황한 이보르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강한 바람에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세워진 작은 돌담 밑에는 곱게 개킨 털 뭉치가 있었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돌담 밑으로 손을 넣었다. 감춰진 물건을 꺼내서 살펴보니, 그것은 사슴 모피로 만든 겉옷이었다. 자연스럽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이 손마디를 구석구석 간지럽혔다. 하필이면 사슴 모피라, 예상치 못하게 어머니의 흔적을 발견했다. 일이 바빠 기일에 동행하지 못한다더니, 며칠 앞서 온 모양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그때 불러서 같이 오지. 아버지는 날짜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을 텐데.’

평소엔 영리하게 실속을 챙기면서 정작 중요한 부분에선 한없이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영리하기보다는 독기로 똘똘 뭉쳤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기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어머니가 어리석은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보르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묘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가, 들고 있는 모피를 돌담 밑으로 다시 쑤셔 넣었다.

한 달 넘게 지속된 눈보라 탓에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었다. 천천히 내려온 마을은 고요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어두워진 거리를 직선으로 가로질러 신당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건 본격적으로 마을에 들어선 이후였다.

처음에는 귓전을 두드리는 세찬 바람 소리에 먹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조용했다. 사람의 감이란 때로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들어맞곤 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데 별안간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올라오며, 축축한 식은땀이 등짝을 흠뻑 적셨다.

이보르는 우두커니 선 채 눈만 굴려 어둠이 짙게 깔린 마을을 둘러보았다. 지붕에 한계치까지 덮인 눈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우수수 무너졌다. 집 밖을 나다니는 사람은 없었고, 외풍을 막기 위해 옷가지를 둘러놓은 창문에서는 빛 한 점 새어 나오지 않았다.

모든 집이 마찬가지였다. 생각한 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제법 용기가 필요했다. 가까운 집으로 향한 이보르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겉보기에는 어설프지만, 궂은 날씨를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진 집이었다. 목재를 두껍게 덧대 만든 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쉽게 열렸다.

이보르는 천천히 집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이런 날씨에 집을 비우고 외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설프게 밖으로 나가 죽은 사람이나 계속된 굶주림에 지쳐 아사한 사람의 집일지도 모른다.

이보르는 열셋부터 언덕 위의 신당에 신세를 졌다. 오랫동안 마을에서 살았지만, 이보르에게 집은 신당이나 마찬가지였다. 활동 반경이 좁아 아는 사람이 적어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시신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보르는 내심 마음의 준비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 모르는 사람의 시신을 목격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작은 창을 통해 희미하게 달빛이 비쳐들었다. 창문을 둘러싼 얇은 외투를 뚫고 들이친 은색의 달빛은 좁은 실내의 참상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보르는 “헉.” 하고 급히 숨을 삼켰다. 아이를 끌어안고 쓰러진 남자가 있었다. 아마 가족일 것이다. 그들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으며, 밑으로 색을 알아볼 수 없는 끈적한 액체가 흘렀다. 낡은 바닥에 스며들다 한가득 고인 액체가 이보르의 발치까지 조금씩 흘러왔다.

이미 죽었다.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경악에 눈을 부릅뜨고 있기도 잠시, 이보르는 도망치듯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혹시 몰라 확인해 본 다른 집도 엇비슷했다. 눈보라 치는 마을은 겉보기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나, 집 안으로 들어가 보면 사람이 죽어있거나 텅 비어있었다. 어느 집이든 생활감은 느껴졌다. 그래서 더더욱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몰라 찾아가 본 그레타의 집이나 주술사 할아범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온기 한 점 없이 텅 비어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밖으로 나간 것처럼.

언제고 조짐은 있었다. 그동안 언덕 밑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어렵지 않게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현실에서 유리되어 있던 이보르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보르는 비틀거리며 언덕을 올랐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아끼고 사랑하지는 않아도 어쨌거나 그가 한평생 살아온 고향이었다. 마치 타지처럼 낯선 모습이 몹시 당혹스러웠다.

신당이 가까워질수록 불길한 예감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심화되었다. 쿵쾅쿵쾅 요란하게 방아를 찧는 맥박은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덕을 오르는 내내 계속 생각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신당이 무너지거나 불길에 휩싸여 있으면 어쩌나. 무도한 침략자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손상된 상태라면 어쩌나.

어머니, 주술사 할아범, 그리고 피가로님…… 이런 상황에서 떠오르는 얼굴이 셋밖에 없다는 사실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높이 치솟는 불길은 보이지 않았고, 매캐한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어느샌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보르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팍을 그러쥐었다. 거센 눈발에 뒤덮인 시야가 일렁이며, 크게 뜬 눈알이 욱신거렸다. 언덕을 오르는 길은 가깝고도 멀었다. 그 잠깐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멀리 보이는 신당은 역시나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이보르는 거의 달리다시피 걸음을 서둘렀다. 어머니도, 주술사 할아범도, 나머지 마을 사람들도 전부 신당에 모여 있을 것이다.

마을의 어른들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신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무릇 신이란 자연과 정령의 사랑을 받는 존재, 하늘의 대리인이다. 그들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녔고, 정령과 소통하여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며, 신기에 가까운 능력으로 많은 것을 이루어줄 수 있었다.

마침내 신당에 도달한 이보르는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 근처에서 주춤거렸다. 열린 입구 앞에 적지 않은 시신이 쌓여있었다. 입고 있는 복장으로 보건대 신당을 지키는 사제들이었다. 눈보라 속에서도 코를 찌르는 피 냄새만큼은 틀림없이 맡아졌다. 추적추적 흐르는 핏물이 흰옷을 붉게 물들이고,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는 사제들의 몸에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아직 사제들의 몸이 눈에 완전히 덮이지 않은 것을 보면 참변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이보르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참지 못하고 연달아 헛구역질을 하며 널브러진 시신들을 피해 간신히 안으로 들어갔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달음박질치며 예스러운 장식이 놓인 복도를 지나쳤다. 수상할 정도로 변치 않은 모든 것을 외면하고 무작정 나아갔다. 그렇게 도달한 곳은 신이 거주하는 성스러운 장소, 신당의 가장 안쪽 방이었다.

사람이란 볼품없을 정도로 나약한 존재였다.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고통을 겪을 때 저도 모르게 신의 이름을 맹목적으로 부르짖게 되었다. 이보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단 피가로를 찾고, 어머니와 주술사 할아범을 도와달라며 부탁하는 거다. 신당의 경비가 무너진 걸 보면 피가로도 무사하긴 어렵겠지만,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오랫동안 지켜봐온 신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던 다른 장소와 달리 방 안은 희미한 조명이 있었다. 그래봤자 탁자 위의 옅은 등불이 전부였으나, 적어도 안쪽의 분위기를 파악할 정도는 되었다.

미미한 훈기가 퍼져 나오는 방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몸뚱이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다. 오가는 대화는 급박하고 말투가 날카로워 제대로 내용을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하나같이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설마 우리 중에 변절자가 나올 줄은 몰랐어.”

“추격대를 보내놨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다.”

뒤죽박죽인 숨을 고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였다. 느긋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너희는 일을 벌인 것치고 담이 작구나.”

다른 건 몰라도 그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귀에 박혔다.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아. 어차피 후일을 걱정하는 거지?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너희를 저주하거나 하지 않아.”

피가로다. 피가로님은 무사했다! 이보르는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선택을 얼마나 후회하게 될지 모르고.

“피가로님!”

방 안에는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신원은 특정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다섯 명은 있었다. 짙은 망토 차림의 무뢰배들이 땅바닥에 무릎 꿇은 피가로를 에워싸고 있었다. 예상과 전혀 다른 그 모습이 멍한 머리로 생각하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이보르가 매일 아침 정성껏 다듬어주던 피가로의 머리카락은 산발로 풀어헤쳐져 있었다. 거칠게 다뤄진 건지, 잘려나간 머리카락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피가로의 목에 서슬 퍼런 칼날이 드리워졌다. 얇은 살갗을 가르고 백옥같이 투명한 피부에 붉은 핏방울이 방울방울 배어 나왔다.

“당신들 대체 누구야? 어째서 이런 짓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문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던 이보르는 굴러다니는 어떤 물건에 걸려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짙게 깔린 어둠 탓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지만, 자세히 보니 주술사 할아범이었다. 정확히는, 몸에서 분리된 주술사 할아범의 잘린 머리가 발에 치여 데굴데굴 굴러갔다. 신발 앞코에 감긴 머리카락을 발견한 순간, 이보르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어디선가 비웃음이 들렸다. 수치심을 느낄 틈도 없었다. 한순간에 몰아치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늘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새로운 제물을 바쳐야 해. 고작 산양 따위로는 안 돼. 신의 피로 제단을 흠뻑 적시고, 심장을 도려내어 바칠 거야. 어떻게든 눈보라를 그치게 만든 뒤, 새로운 신을 내세우면 그만이다.”

“이제야 올바른 순리대로 돌아가는 거야. 우리 마을은 그동안 몸집을 부풀렸고, 그중에는 새로 태어난 주술사도 있어. 신을 대체할 자는 어디에나 있지.”

“손 놓고 구경한다 해도 아무도 너를 나무라지 않을 거다. 너는 다음 신이 되어야 할 귀한 몸이니까.”

눈앞의 사람들은 이보르를,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마을을 둘러싼 골치 아픈 문제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외부에서 온 침입자가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런 잔인한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을 배신하는 무거운 진실은 마을을 휩쓴 눈보라처럼 어김없이 그에게 닥쳐왔다.

“이보르, 물러나라. 너까지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아.”

이보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황하는 시선이 앞에 있는 사람을 훑었다. 찢어진 옷 틈으로 왼쪽 팔의 문신이 보였다. 저것과 같은 위치에, 동일한 문신을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레타의 오랜 친구이자 강경파의 일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레타와 함께 신당에 찾아온 남자는 그녀를 지원하고 피가로를 압박했다.

동시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허무하게 떠난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어린 이보르를 무척 아끼며 곧잘 목말을 태워주었다.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이보르는 언제나 남자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솔직히 피가로를 구하고 싶어도 쪽수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혼자 연습한 적은 많았지만, 이보르는 실전 경험이 전무했다. 사람은커녕 짐승을 상대로도 무기를 휘둘러본 적이 없었다. 아마 강경파는 이미 마을을 다 잡아먹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촌장도 죽었거나 최소한 도망자 신세일 터였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신님을 구하는 것은 이보르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이보르의 마음을 읽은 듯, 묵묵히 침묵을 고수하던 피가로가 입을 열었다.

“난 괜찮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마침 신이라는 무거운 직무에 질려가던 참이었으니, 차라리 잘됐어. 그저 자유롭게 해방될 뿐이야.”

피가로는 목에 칼이 들어온 상황에서도 침착했다. 산발된 머리카락 틈으로 눈이 마주쳤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피가로는 정말로 이보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맞춘 피가로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초연한 낯에는 여유마저 느껴졌다.

이런 순간조차 피가로는 이보르를 이해하고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이보르에게 그 말은 꼭 자신을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다. 독특한 녹색 동공이 가늘어지며 자신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는 듯했다.

피가로를 둘러싼 이들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보르가 완전히 의지를 상실했다는 것을 알아챈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녀린 목에 여러 개의 실선을 만들던 칼날이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피부가 갈라지며 벌건 속살이 드러나는데도 피가로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는 통증을 참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말아 쥐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격렬한 숨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간신히 힘을 주고 있던 피가로의 목이 어느 순간 맥없이 꺾였다. 꿀럭꿀럭 쏟아진 핏물이 양탄자에 스며들었다. 반쯤 잘린 목이 벌어지며 단면이 들여다보였다. 칼을 든 사람이 혀를 찼다. 두꺼운 날은 얇고 가느다란 뼈에 걸려 나아가지 못했다. 짐승을 도축하듯 뼈째로 단숨에 잘라내려던 찰나였다. 망그러지는 시야 속에서 이보르는 주술사 할아범의 가르침과 피가로의 조언을 떠올렸다.

매사 이보르를 얕잡아보고 깎아내리던 그레타와 달리, 그들은 이보르를 존중해 주었다. 피가로는 이보르가 결코 약하지 않다고 했다. 마을 밖으로 나가게 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의 뒤를 이어 마을의 신 역할을 하는 데에는 충분할 거라 말했다.

‘네게 부족한 건 경험과 자신감이야. 타고난 마력은 이 이상 나아지기 어렵지만, 나머지는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 줄 거야.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거지.’

이보르는 마을의 청년으로, 오래된 관습에 따라 성인식을 치르며 평생 사용할 질 좋은 칼을 받았다. 사냥꾼으로 활동하던 시절 그레타가 사용했던 칼은 무척 관리가 잘 되어 세월이 지나도 예리함을 잃지 않았다. 하루도 숫돌질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날은 손을 대면 베일 정도로 날카로웠고, 손잡이엔 무두질한 가죽이 감겨있었다. 다른 것보다도 빠르게 짐승을 도축하기에 적합한 칼이었다.

피가로는 이보르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어 멋대로 칼을 가져갔다. 그는 칼날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위험하다고 말려도 듣지 않았다. 그러다 또 장난기가 솟았는지, 눈 깜짝할 새에 이보르의 턱 밑에 칼끝을 들이댔다.

‘사람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누구나 특기인 분야가 있어. 이 마을 사람들은 엽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잖아. 사냥꾼의 피를 이은 너는 칼을 잘 다루지. 마법도 마찬가지야. 이를테면, 여기에 마력을 실으면 어떨까?’

‘마법이니 마력이니, 또 그런 이상한 말을…… 제사장이 들으면 싫어할 거야.’

‘실수야, 실수. 가볍게 넘겨. 그보다 어때? 모처럼 조언을 해줬는데, 시도해 보지 않을래?’

피가로는 도무지 허술한 구석이 없었다. 그는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양 능숙하게 칼을 다뤘고, 당황한 이보르의 턱을 날이 없는 칼등으로 쓸어올리며 말했다.

‘아주 잘 드는 칼날을 만드는 거야. 가볍게 베기만 해도 종이처럼 잘리도록. 이 작은 칼이 뼈와 핏줄을 일격에 도려내는 걸 상상해 봐. 꽤 흥미롭지 않아?’

‘……넌 가끔 그렇게 무서운 얘기를 하더라.’

‘삶의 지혜라고 하자.’

피가로는 코끝을 찡그리며 눈매를 휘었다. 그 장난스러운 얼굴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보르는 어지럽게 돌아가는 시야 속에서 절망적인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다. 어머니의 말처럼, 그는 썩어빠진 근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행태로 부모의 이름에 먹칠을 했고, 결국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

이보르는 평생을 그레타에게 끌려다녔다. 그레타의 뜻대로 집안에서 칩거했고, 등쌀에 밀려 신당에 들어왔으며, 어머니를 증오하면서도 그녀에게 피가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성실하게 보고했다. 어머니의 그늘에 완전히 짓눌려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반항하지 못했다. 찰나의 허무가 스친 뒤에 남은 건 통렬한 후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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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다음편을기다려요…

    1. 오독

      아마 언젠가는 나올 거 같습니다. 버려지는 일은 없도록 힘내겠습니다……………
      잊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이어 파이어 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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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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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독

      아마 언젠가는 나올 거 같습니다. 버려지는 일은 없도록 힘내겠습니다……………
      잊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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