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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ㅅㅇ 05

ㅇㅅㅇ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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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임시제목. 나중에 몰아서 수정함.

3. 머나먼 옛날이야기

목욕탕에서 거대한 혼란을 겪은 뒤, 파우스트는 뽀송뽀송해진 상태로 탕을 나왔다. 잠자리에 들기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비록 정신적 피로도는 높았지만, 이후에는 레녹스와 단둘이 방에서 반주를 하기로 했다.

원래는 네로의 방으로 장소를 이동해 한 잔 더 하려 했지만, 서쪽 마법사의 기행에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네로가 간절히 휴식을 원해 무산되었다.

파우스트는 네로의 마음을 이해했다. 누가 괴짜 집단 아니랄까 봐, 서쪽 마법사들은 혼자 여성의 몸을 하고 있는 피가로가 부끄럽지 않도록 모두가 다 함께 변신 마법을 쓰자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을 내렸다.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으나, 흘러가는 분위기에 모든 것을 맡기는 성격상 모두가 찬성―심지어 북쪽 마법사조차―하는 분위기에 당당하게 초를 칠 수는 없었다. 네로도 뭐…… 얼추 비슷했던 것 같다. 결국 두 사람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남탕에서 여탕 놀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 어울려야 했다. 착하고 성실한 새 나라의 어린이들이 전부 잠든 시간이라 다행이었다.

자리를 옮긴 파우스트와 레녹스는 빠르게 자리를 마련하고 탁자에 마주 앉았다. 겸사겸사라고 하긴 뭐 하지만, 마침 레녹스에게 할 말이 있던 참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즈음, 파우스트는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레녹스, 오늘 너를 초대한 건 그간의 일로 할 말이 있어서다.”

“그간의 일이라는 건 뭔가요?”

“피가로와 내 문제다. 그리고 너까지.”

레녹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파우스트가 어찌나 비장하게 말하는지 덩달아 긴장하게 되었다.

“네가 지금까지 나와 피가로 사이를 중재하며 많은 고생을 했다는 걸 알고 있어. 못난 지인들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말해놓을게. 이제부터는 우리 문제로 너를 불편하게 만들 일은 없을 거야.”

레녹스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바보 같은 표정. 파우스트는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애써 억눌렀다.

“왜 그런 얼굴이야?”

“아, 그게…… 조금 갑작스러워서요.”

레녹스는 본디 성정이 느긋하다. 그런 그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아예 넋을 놓는 일은 드물었다. 살아온 세월에 걸맞지 않은 그 어수룩한 반응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솔직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파우스트님과 피가로님을 돕는 것을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하겠지.”

눈을 크게 뜬 채 파우스트를 바라보는 레녹스는 ‘피가로님처럼 말씀하시네요.’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생각한 것을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은 그도 나름대로 성장했다는 증거였다. 레녹스는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피가로님과 화해하신 겁니까?”

“그런 거창한 건 아니야. 애초에 화해가 필요할 만큼 그 사람이랑 싸운 적도 없잖아. 너도 알다시피 피가로와 우리의 끝은 일방적이었어. 이렇게 마법관에서 재회하기 전까지는 피가로를 만난 적도, 그에 대한 소식을 접한 적도 없었지.”

“그랬죠.”

머뭇거리며 망설이던 게 거짓말처럼 레녹스는 쉽게 수긍했다. 파우스트는 미소를 머금었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 이유는 알고 있었다.

“화해 같은 게 아니라…….”

순식간에 바싹 메마른 입안이 끈적끈적해졌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상당히 복잡했다. 그래선지 말을 꺼내기까지 참 많이도 고민했다. 어떻게 들릴지 몇 번이고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마침내 레녹스에게 알리기로 했다. 레녹스는 지금의 자신보다 피가로와 더 가까운 관계였으니까.

“레노, 나는.”

파우스트는 작은 숨을 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차피 운명의 그날은 다가오고 있고, 그날이 지나고 나면 뻔히 알게 될 일이었다. 말해. 그냥 말해! 그는 마음속의 외침을 무시하지 않았다.

“나는, 현자의 마법사로서 소임을 다한 뒤에도 그분의 곁을 지키고 싶다.”

재앙을 막아낸 이후의 거취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있었다. 단순히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다시 피가로의 제자로 들어가기 전에도 파우스트는 조금쯤 그를 보필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하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는 피가로가 기어이 말년에 혼자 남겨진다면 말이다.

피가로를 내버려두지도, 눈 밖으로 치우지도 못한다면 애초에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당장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몰라. 하지만 내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지금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반드시 말해줄게.”

결국 말해버렸다. 자발적으로 피가로의 노후를 책임지고 싶다고. 여태 삐거덕거리는 모습만 지켜봐온 레녹스에게는 엄청나게 갑작스러울 것이다. 레녹스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파우스트는 눈앞에 놓여있는 술을 한 번에 들이켜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불행 중 다행히 레녹스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혹시 어떤 감정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떤 감정이라니?”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파우스트님이 피가로님에게 품은 감정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져서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레녹스는 음, 하고 목을 울렸다. 그는 알아듣지 못한 파우스트를 위해 다시 한번 느릿느릿―일부러 느리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물었다.

“파우스트님은 피가로님을 각별히 여기시나요?”

“내가 어떻게 감히.”

대답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오죽하면 말을 꺼낸 본인마저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제가 완전히 헛짚었네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할 것까지야.”

아무래도 파우스트의 예상치 못한 심경 변화를 레녹스는 그가 피가로에게 가진 ‘특별한 감정’을 원인으로 꼽은 모양이다. 레녹스가 말하는 ‘특별한 감정’의 정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에게 묻는 것보다 본능이 빨랐다.

“아무튼 네가 말한 그런 건 아니야.”

고맙게도 레녹스는 적당히 수긍하고 넘어가 주었다.

“대답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언젠가 여유가 되면 말씀해 주세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하겠지만, 저로서는 두 분이 사이좋게 지내주신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으니까요.”

“예전처럼…… 그래, 그건 힘들겠지.”

레녹스도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이었는걸. 비록 마무리가 최악이었을지언정 당시에 느낀 좋은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그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었다.

탁자 앞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잠시간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예로부터 추억을 되새기는 건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고 했다. 분명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째선지 분위기는 아까보다 더 숙연해졌다.

이 상황을 만든 사람으로서, 파우스트는 숨 막히는 침묵을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피가로가…….”

“피가로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열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두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가 미리 맞춘 것처럼 동시에 말을 꺼냈다.

“파우스트님 먼저.”

“아니야, 너 먼저 얘기해.”

레녹스는 사양하지 않았다.

“오늘도 피가로님이 한바탕하셨네요.”

그는 헛기침을 하며 빈 잔을 채웠다.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었다.

“그 사람은 늘 제멋대로라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의외로 별생각 없으실지 모르죠.”

파우스트가 아는 사람 중에서 피가로는 가장 복잡한 사람이었다. 사리에 밝고 사려가 깊으며, 그만큼 쓸데없는 생각도 많았다. 그의 머릿속에 침투해 불필요한 생각을 덜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파우스트는 그저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죠. 파우스트님, 기억나십니까?”

“글쎄, 피가로가 기행을 벌인 적이 어디 하루이틀이었어야지.”

“기행까지는 아니었을 겁니다. 굳이 따지자면 피가로님의 사생활과 관련된 일화였죠.”

“피가로의 사생활?”

전혀 짚이는 바가 없었다. 멍한 눈빛을 하고 있는 파우스트를 위해 레녹스는 처음부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혁명군에 소속되어 있을 시절에 말입니다. 피가로님에 대해 문란한 소문이 돌았었죠.”

“그런 일도 있었지.”

이야기를 들으니 지난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파우스트는 흐릿한 기억을 되짚어 그 시절의 피가로를 떠올렸다. 파우스트의 스승이자 혁명군의 참모였던 피가로는 대현자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얇고 하늘하늘한 옷을 걸친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결 좋은 푸른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긴 속눈썹이 빗살처럼 그림자를 드리웠다. 값비싼 옷이나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피가로도 상당히 자유분방하지만, 그때의 그는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의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면 피가로는 언제나 시대에 맞춰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실 과거의 피가로가 특별했다기보다는 당시의 파우스트가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였다는 쪽이 옳다.

졸지에 네로를 놀라게 해버렸지만, 피가로의 나신에 익숙하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하나뿐인 제자로서 피가로를 곁에서 보필했던 파우스트는 그의 몸을 지긋지긋하게 봐왔다. 현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군의 어른으로서 위엄찬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지나치게 편한 차림을 하고 다녀서 파우스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피가로는 원체 변수가 많은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맹목적으로 그를 믿고 따르던 파우스트조차 진의를 의심한 적이 있을 정도로.

“당시 피가로의 행적은 수상쩍은 소문이 돌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장 큰 우군은 바로 나 자신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만큼은 배신하지 않지. 그건 일이 커지도록 내버려둔 피가로의 잘못도 있어. 당장 본인조차 제대로 부인하지 않았잖아.”

“피가로님은 늘 그러시죠. 중립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안일하다고 해야 할까. 한 발자국 물러나서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고 계시니까요.”

혼자 흥분해서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렸다.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레녹스의 낯은 먹구름 낀 하늘처럼 흐려진 채였고, 파우스트는 그제야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피가로님과 재회했을 때 여자나 밝히는 사람이라고 책망하신 거군요.”

“그건…….”

파우스트는 침음을 흘리며 미간을 꼬집었다.

“……내 실책이다. 방금은 실컷 잘난 체했지만, 소문이란 본인에게 직접 확인을 하기 전까지 신뢰해선 안 되는 거야. 잘못된 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그땐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었어. 오랫동안 혼자 살아서 성격이 많이 꼬인 모양이다.”

“어설픈 위로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녹스가 먼저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 모습을 본 파우스트는 탁자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웃었다.

“레녹스, 너도 이제 제법 아픈 부분을 건드릴 줄 아는구나.”

“아픈 부분이셨나요? 죄송합니다.”

“…….”

파우스트는 독주를 들이키듯 반쯤 남은 잔을 깨끗이 비웠다. 이젠 농담인지 진담인지도 모르겠다.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남쪽 나라에서 피가로와 어울리더니 부쩍 능글맞아졌다. 파우스트는 머리 한 편에 어른거리는 파란 환상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조촐한 마른안주를 집어먹으며 옛 추억에 잠겼다.

*

“피가로님, 피가로님에게 있어 저는 자랑스러운 제자인가요?”

“그럼 자랑스럽고말고. 내가 표현이 인색해도 이해해 주렴. 말로 전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란다.”

이른 새벽에 흔들리는 산들바람처럼, 정답게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기억한다. 혹여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실까 두근거렸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파우스트에게 피가로는 무척이나 각별했다. 그분께서 손을 잡고 옳은 길로 이끌어주시면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몰랐고, 칭찬을 받으면 하늘을 날듯 기뻤다. 남들보다 한 도 낮은 서늘한 온기조차 그분을 상징하는 것 같아 특별하게 느껴졌다.

남들과는 다른 속도로 삶을 살아가는 마법사는 그들만이 가진 특성 탓에 타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기 어렵다. 예로부터 마법사가 가진 힘은 인간에게 이해 범주를 넘어선 종류였다. 때문에 인간은 마법사를 미지의 존재 취급하며 배척했고, 마법사가 일으킨 여러 사건이 전역에 퍼지고 와전되며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마법사의 인식은 더욱 나빠지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부모에게 버려지는 아이가 늘었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어린 나이에 내쳐지는 아이들은 대다수 마법사였다. 마법사라고 해봤자 그들이 가진 마력은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당연하게도 상황을 변하게 할 기적 같은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애매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는 인간과 별다를 바가 없다. 실제로 어리고 약한 마법사는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아남았다. 마법사의 삶을 포기하고 모든 힘을 봉한 자들도 있었다. 물론 그중엔 운 좋게 좋은 스승을 만나 성공한 케이스도 있다. 대개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기 때문일까, 마법사의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는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힘든 시간을 견뎌온 스승은 마찬가지로 같은 길을 걷는 제자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쳤다.

스승은 제자에게 의를 다하고, 제자는 스승에게 예를 다한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어떤 제자는 낳아준 부모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스승을 따랐다. 이를테면 부모 대신이었다.

파우스트로 말할 것 같으면 어느 쪽도 아니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최악의 환경은 아니었다. 비록 아버지는 일찍이 집을 나갔지만, 그에겐 어머니와 조부, 여동생이 있었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이 있었다.

파우스트는 마법사의 세계보다 인간의 세계가 익숙했다. 정확히는, 얼마 전까지 마법사의 세계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렉을 도와 혁명을 시작하기 전까지 파우스트가 만난 마법사라곤 그에게 마도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떠돌이 마법사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 파우스트가 자신의 세계를 넓힐 결심을 한 것은 전부 알렉과 동료들 덕분이었다.

단 한 번도 순조로운 적이 없었던 혁명은 점차 심각한 난항을 겪었다. 이름이 알려지고 존재가 각인되었기에 이득을 취했지만, 손해를 본 것도 많았다. 같은 뜻을 품은 동지를 얻었으나, 반대로 새로운 적 또한 생겨났다.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나아가기는커녕 안개와 먹구름이 낀 날이 계속되었다.

애초에 특별한 능력 없이 어중이떠중이로 구성된 군대였다. 한계를 느끼고 주춤하기 시작한 혁명군을 향한 세간의 평가는 ‘운이 좋았다’였다.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더 이상의 우연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사람의 신체 부위 중 가장 가벼운 것이 입이다. 그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그러기에 쉽게 떠들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세간의 평가는 정확했다. 파우스트는 혁명군의 참모로서 한계를 누구보다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게 바로 파우스트가 스승을 찾아 나선 이유였다. 혁명군에겐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고, 그는 단시간에 힘을 길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능력을 백분 끌어내줄 수 있는 스승을 모실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피가로를 만났다. 그를 배신하고 큰 상처를 주었으나, 먼 훗날 재회하게 된 사람. 솔직하지 못하고 몹시도 성가신 스승을.

피가로와의 만남은 파우스트의 인생에서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아마 그 순간을 한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불모의 대지에서 피가로는 무척이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는 황폐한 땅에 녹아들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북쪽의 대마법사이자 현인인 피가로에 대해 소문은 무성했으나, 실제로 만나본 그는 상상했던 이미지와 전혀 달랐다. 전해지는 이야기만 접했을 때는 조금 더 나이가 많고 투박한 느낌일 거라 생각했다. 왜, 현인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모습이 있지 않은가. 그 또한 편견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이 이야기를 어쩌다 꺼내게 되었느냐. 여기까지 이르게 된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보다 많은 말이 필요하다.

스승이나 그 위로 전해 내려온 유파에 따라 다르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 제자의 조건이나 역할이 까다로웠다. 일단 파우스트의 기준은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피가로와 파우스트는 처음부터 합이 좋았다. 북쪽의 쌍둥이 마법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피가로는 강하고 고결한 현인이었고, 파우스트는 보기 드물게 신실한 학생이었다. 어떤 과격한 시험을 계기로, 마침내 피가로의 제자로 인정받은 파우스트는 제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피가로에게 받은 것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파우스트는 스승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파우스트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것들은 피가로가 가진 것에 비해 한없이 초라했다. 보잘것없는 물건, 허울뿐인 지위와 명예. 유성군이 떨어지던 밤, 추레한 행색으로 현인의 문을 두드리던 그는 남에게 베풀 능력도, 여유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파우스트, 네가 나서서 뭔가를 할 필요는 없어. 지금껏 제자로 받아달라며 찾아온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내가 내는 시험에 합격한 건 오로지 너뿐이야. 그러니 내 제자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너 하나 밖에 없을 거다.”

알게 모르게 이쪽의 초조함이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위해 일부러 좋은 말을 해주었다.

“이 나의 제자로서 출발점에 서는 것으로 수업료는 이미 지불한 셈이다. 네가 내게 무언가를 해줄 필요는 없어. 넌 그저 내가 내는 과제와 수행에 집중하며 학업에 정진하면 돼.”

어떤 상황에서든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스승답지 않았다.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자신의 존재가 스승을 깎아내리는 것 같아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무엇이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쯤은 있을 터. 피가로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감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로 간단하게 기가 죽어서는 곤란하다. 상대가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을 굳이 걸고넘어지는 건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알고 있지만, 파우스트는 원래 은혜를 갚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맡겨주세요. 피가로님을 모시기엔 턱없이 부족한 몸입니다만, 이래 봐도 한 명의 성인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끈기 하나만큼은 뒤지지 않습니다.”

“젖살도 안 빠진 아이가 그렇게 말해봤자…….”

파우스트의 열띤 연설을 들은 피가로는 난처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 어째선지 가슴이 뛰었다. 스승의 곤란한 모습은 기뻐하는 모습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치명적인 파괴력이 있었다.

예기치 못하게 공격을 받은 파우스트가 심장을 부여잡고 있을 때였다.

“……말뿐인 말이 아니라, 정말로 내게 보답하기를 바라는구나. 파우스트, 너는 내가 보아온 이들 중 가장 독특한 아이야.”

그렇게 말한 피가로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오랜 세월이 축적된 미소는 파우스트가 알아볼 수 없는 종류였다.

“피가로님…….”

“쉿. 더는 말하지 않아도 돼. 아니면 이 스승의 명을 따르지 않을 셈이니?”

피가로는 손을 뻗어 파우스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아마도 파우스트만이 아니라,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이들을 같은 방식으로 달래주고 칭찬해 주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가정이 풍비박산나지 않았다면 부모님께 가장 먼저 받았을 애정이었다.

“마침내 장성한 네가 온 세상에 나의 가르침과 너의 의지를 전한다면 나는 그걸로 족해.”

지금처럼 피가로가 다정한 말로 어르고, 상냥한 손길로 쓰다듬어줄 때면 마치 자신이 그의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노여움을 살까 봐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파우스트는 감히 그분을 아버지처럼 생각했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파우스트는 기어이 억지를 부려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게 되었다. 수업 준비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매 끼니마다 식사를 차렸으며, 하루 세 번 스승의 옷차림을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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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1. 감히 아버지처럼 생각한 분께 가장 먼저 한 예의 표현이 의식주인 점이 너무 가족 수발 오래 든 사람 같아서 조금 슬펐네요…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파이어 파이어 파이어 파이어 파이어

    1. 걈말랭이

      제가 정말 좋아하는 부분이죠.
      파우의 처지는 슬프지만….
      파우가 아버지에 대한 환상을 키운 게 병에 걸린 조부를 돌볼 시기였을 거라는 점이 흥미롭지 않나요. 역시 돌봄 속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건가. 와, 진짜 싫은데요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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