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프로토콜:#N/A 06


날조.


“……선생님이 상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담당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뒤늦게 오해를 정정했지만, 그걸로 안심이 안 되는지 연달아 길게 탄식을 토해냈다.

“아무튼, 방으로 올라갔는데요.”

“그걸 또 얌전히 따르셨구나.”

기분 탓인지 담당의의 말투가 묘하게 무례해진 것 같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 이런 일을 겪는다면 누구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피가로는 한숨과 함께 뺨을 쓸어내리며 당시의 기억을 되새겼다.

피가로가 바짝 얼어붙어 있는 동안, 오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떠났다. 의중을 캐낼 유일한 기회를 놓친 피가로는 반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일단 스폰서의 명령대로 방에 가서 대기하는 수밖에. 그리고 스폰서가 들어오면 그때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하는 거다.

피가로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정해진 방으로 향했다. 그래, 어떤 의미로는 꿈이긴 했다. 현실과 융화되어버린 끔찍한 악몽 말이다. 피가로는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착실하게 사람을 피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오즈가 나이가 세 줄이 넘어가는 늙은 변태 영감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고작 몇 푼도 아닌, 천문학적인 액수가 오가는 거래라면 미래가치 정도는 조금 떨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남 일처럼 생각했다. 문제는 살아있는 사람과 접촉을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창자가 사정없이 뒤틀린다는 거였다.

으, 침대에 누워 스폰서와 마주 보는 상상을 했더니 속에 있는 게 다 올라올 것 같았다. 억지로 뱃속에 밀어 넣은 음식이 목구멍을 열고 자유롭게 뛰쳐나오기 직전이었다. 자신의 기구한 삶에 펑펑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피가로는 벌받는 사람처럼, 커다란 스위트룸의 침대에 홀로 앉아 대기했다.

‘이 침대에서 곧 그 사람과…… 우욱.’

오즈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피가로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즈는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넉넉하게 주는 줄 알았다. 정말 정말 하기 싫었지만, 화장실에 들어가 먼저 몸을 청결하게 닦기까지 했다.

비록 스폰서와 원치 않는 관계를 맺게 되었으나, 무릇 이런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일단 상대는 무척 젊고 잘생겼다. 겉보기로 흠이 없는 남자였으니 첫 경험 상대로는 나쁘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해 주의를 환기했다.

‘설마 뒤도 풀어놔야 하나? 어디서 본 적이 있어. 남자끼리 할 때는 그, 그곳을 사용한다고…….’

씻는 것까지는 어떻게 해도 그것만큼은 도저히 자신의 손으로 할 수 없었다. 혼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피가로는 결국 심각한 거부감을 참지 못하고 한차례 변기를 붙잡고 끙끙 앓아야 했다.

“가르시아 씨는 참, 모든 일에 열심히네요…….”

“성실하다는 말 자주 들어요.”

“…….”

다시 현실로 돌아와, 담당의가 퀭한 눈으로 피가로를 쳐다봤다. 담당 환자의 기구한 사연을 들은 그는 그새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여, 역시 너무 본격적이었죠? 저도 반성하고 있으니 마음에 없는 말은 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피가로는 울상을 지었다. 역시 여기까지는 얘기하지 말 걸 그랬다. 진심으로 후회했지만, 때는 너무 늦어있었다. 담당의는 이미 피가로를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가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피가로를 지켜보았다.

이제는 하다 하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담당 의사에게까지 동정을 받다니. 그마저도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해서 이리저리 눈을 피해야 하는 것까지 아주 가관이었다. 피가로는 부끄러운 마음에 큼큼 헛기침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폰서는 밤새 오지 않았어요. 대기 중에 할 게 없어서 잠이라도 잘까 고민했는데, 그건 또 어렵더라고요. 밤에 찾아오면 어쩌나 무서워서 잠도 못 자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하필 그날 호텔에 자잘한 소란이 있었나 봐요. 호수를 잘못 찾은 건지 새벽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리고, 시끄러운 고함 소리도 들려서…… 하아, 너무 불안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먼저 연락해 볼 생각은 안 하셨어요?”

“그렇네요. 이상하게 그때는 그 생각이 안 났어요.”

담당의는 희미하게 웃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웃음이라기보다는, 불안해하는 환자를 달래기 위한 일종의 버릇 같은 거였다. 옛날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그것이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그만의 지침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많이 혼란스러우셨나 봐요. 원래 당황하면 생각이 마비되는 경우가 많아요. 종종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주변의 소리나 움직임이 점점 멀어지고, 머리가 새하얘지곤 하죠?”

피가로는 머리를 위아래로 격렬하게 흔들었다.

“네, 네, 맞아요. 정확해요. 종종이라기엔 자주 겪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겠죠. 전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이니까…….”

“가르시아 씨의 잘못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요. 저도 알고 있어요. 그날 미팅은 그렇게 끝났지만, 그 이후로도 가끔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어나고는 해요.”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잠시, 그 말 한마디에 담당의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집에 있을 때도요?”

“집은 아니고, 랩에 있을 때요.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집에 귀가하는 일이 드무니까…… 실은 그 일이 있고 나서 자택에 한 번도 가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집에 있을 때는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정확히 무슨 이유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날의 기억이 제 뇌에서 어떤 심리적 작용을 일으킨 것 같아요.”

“그건 확실히 문제네요.”

담당의는 바닥에 떨어뜨린 펜을 주워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가르시아 씨, 잠깐 살펴볼게요. 괜찮으시죠?”

피가로는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천천히 눈을 내리깔자,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담당의가 가만히 피가로의 안색을 살폈다.

“안색이 정말 안 좋네요. 잠을 많이 설치셨군요. 수면제를 처방해 드릴까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담당의를 상대로 딴청을 피울 수는 없었다. 피가로는 입술을 깨물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뇨, 필요 없어요. 전에 주신 것도 남아있거든요.”

“하나도 안 드셨겠군요.”

“예에…….”

드디어 시선이 떨어졌다. 피가로는 슬쩍 눈을 들어 담당의를 살폈다. 의료 차트를 확인하는 담당의는 필사적으로 한숨을 참고 있었다. 말 안 듣는 어린아이나 구제불능이 된 기분이었다.

“잠은 꼭 주무셔야 해요. 식사도 거르지 마시고요. 되도록 압축 블록 말고, 제대로 형태를 갖춘 고형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 드세요.”

“예에에…….”

완전히 정곡을 찔렸다. 그러나 나태는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진정한 죄악이었다. 건강하고 확실한 8시간의 숙면은 그처럼 일분일초가 급한 연구자에게는 심각한 사치였다.

에너지 블록은 식사라는 행위에 불필요하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면서도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 작은 블록 하나에 무려 11가지 비타민과 무기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에너지 블록이야말로 바쁜 현대사회에 걸맞은, 이 세기 최고의 발명이었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담당의가 기함을 토할 것이 분명하므로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다음에, 음…….”

잔소리 폭탄을 들은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분위기가 엉망으로 다운되었다. 피가로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여덟 번째 미팅은 뭐, 평범했어요. 제 스폰서는 언제나 그래요.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전혀 관심 없으면서, 건강 상태 같은 것을 자꾸 체크하려고 하죠. 병원은 다니고 있냐, 약은 먹고 있는 거냐,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은 차도를 보였냐. 한 번은 일을 그만두고 싶으냐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대체 나한테 무슨 답을 원하는 건지…….”

피가로는 손을 밑으로 내려 무릎을 만지작거렸다. 도드라진 뼈를 문지르다 옴폭 파인 부분을 꾹 눌렀다. 아까부터 다리도 자꾸 떨리고, 안전부절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꺼낼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먼저 정리했더니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진짜 최악인 건, 그러니까, 오늘 이 얘기를 꺼낸 이유가 지난주에 있었던 미팅 때문인데요.”

피가로는 몇 번이나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보고 긴 숨을 삼킨 담당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슨 일이 더 있었군요.”

“네, 마지막 미팅이었어요.”

마침내 아홉 번째 미팅까지 왔다.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은 피가로는 애써 기억의 저편에 밀어두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기왕 호텔 스위트룸 이야기를 꺼낸 김에 말하는 건데, 오해에 대한 해명은 제대로 들었다. 여덟 번째 미팅부터 아홉 번째 미팅 날이 되기까지 내내 고민에 시달리던 피가로는 결국 오즈를 만나자마자 의문을 해소하려 들었다.

“그날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신 건가요? 저는 오즈님이 저를 장난감처럼 엉망진창으로 가지고 놀려는 줄 알았어요. 절대 그 일을 기대하거나 오즈님을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혹시라도 저를 그런 용도로 사용하시려는 거라면 미리 알아두고 싶어서…….”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횡설수설도 이런 횡설수설이 없었다. 자신의 귀로 듣기에도 현재의 그는 마치 도수 높은 술을 연달아 들이켜고 쓰러지기 직전의 사람처럼 마구잡이로 지껄이고 있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지금쯤 귀까지 벌겋게 익어있을 거라는 사실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그곳에 숨고 싶다. 열기가 느껴지는 뺨을 손등으로 더듬은 피가로가 강렬하게 바랄 때였다. 가만히 있던 오즈가 별안간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얻어맞는다! 오즈의 턱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피가로는 소스라치게 놀라 목을 움츠리고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만약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입바른 말을 줄줄 늘어놓은 죄밖에 없을 것이다.

주제에 맞지 않게 건방진 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한 대 맞을 줄 알았건만, 기다리는 극렬한 통증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어디서 탁, 하고 무언가를 힘없이 때리는 소리가 났다. 실눈을 뜨고 보니, 고개를 뒤로 젖힌 오즈가 자신의 이마를 짚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들은 소리는 오즈가 본인의 이마를 치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실눈을 뜬 피가로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오즈를 곁눈질했다. 뜻밖에 오즈는 몹시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눈을 감고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 의도로 방을 잡은 건 아니었어. 네가 항상 피곤해 보이니, 잠깐이라도 눈을 붙였으면 했을 뿐이다.”

‘뭐지, 같이 다니기 쪽팔리다는 뜻인가?’

의심도 이쯤 되면 병이었다. 피가로는 끝까지 투덜거렸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긴장은 한결 풀어졌다. 무려 오즈가 직접 확답을 해주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괜스레 미간을 문지르는 모습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해를 사기 딱 좋은 사건이었지만, 어쨌든 선의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면 그걸로 되었다. 덩달아 머쓱해진 피가로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들었던 팔로 자연스럽게 손차양을 만들어 뒤집어썼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즈는 언제나 피가로를 신경 쓰고 챙겨주었다. 원래 낮이었던 미팅 시간이 밤으로 변경된 것도, 인적 드문―드문 건지, 내쫓은 건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것도,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시티의 야경을 보여준 것도, 그밖에 무거운 문을 대신 열어주거나 자가용으로 이동을 돕던 것도 모두.

물론, 막대한 후원만큼 심금을 울리는 건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오즈가 피가로를 대하는 태도는 사소한 친절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여태껏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식이란 때로 밑도 끝도 없이 편협하니, 단지 고액의 스폰서이자 무기상이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쓰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너를 오해하게 만들었다면 그건 내 잘못이다. 사과하지.”

“아닙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피가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이는 오즈를 보며 낯을 흐렸다. 그 오즈가 단순히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 서투른 사람이었다니. 그와 자신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피가로는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이 그간 오즈에게 얼마나 모질게 굴었는지 되돌아보며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오즈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반드시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꼭 소리 내어 말을 하는 것만이 대화의 방식은 아니었다. 피가로는 스폰서와 미팅을 한 지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침묵 속의 평온을 알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르디아 시스템의 연구는 계속되고 있었다. 오즈는 단 한 번도 연구의 진척을 묻지 않았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재산이 썩어 넘치는 사람이라 해도, 전혀 관심 없는 연구에 이만큼의 돈을 쏟아붓지는 않을 테니까.

오즈가 카르디아 시스템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차례 고민했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즈는 피가로에게 연구를 돕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고, 그의 목적이 궁금했던 피가로는 혼자서 멋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피가로로서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중대한 이유가.

설령 카르디아 시스템이 악용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다못해 살아있는 사람조차 올바른 일에만 쓰이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오즈가 자신을 지원하는 것은 오로지 카르디아 시스템만이 이뤄줄 수 있는 어떠한 소원이 있기 때문이라 믿었다.

같은 것을 원하는 입장에서 친구, 까지는 아니어도 동지 정도는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믿음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솔직히 그 사람과 말다툼한 날은 자세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제대로 된 도움을 받으려면, 담당 의사에게 실제 있었던 일을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야 했다.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결국 연구와 관련된 문제였다. 아마 오즈에게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한 실적 보고서를 건네준 게 원인이었을 것이다.

“차가운 기계 따위는 나를 이해할 수 없어. 단지 인간의 손에 만들어진 로봇 따위가 나와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는 없다.”

쾅, 시끄러운 소음이 울리며 가게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치고 일어선 피가로는 귀신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오즈를 노려보았다. 진하게 우려낸 커피가 테이블 아래로 흘러 뚝뚝, 바닥에 짙은 얼룩을 남겼다. 그렇게 쏟아진 커피는 점점 넓게 번져 피가로의 손끝을 아주 조금 적셨다.

“피가로님…….”

의외의 소란에 아서가 고개를 들어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이 작은 아이가 옆에서 듣고 있는데 버젓이 그런 말을 하다니. 동그랗게 뜬 아서의 순진한 눈망울을 마주하자, 더욱더 화를 참기 힘들어졌다.

“당신은 내가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앙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모멸감이 밀려왔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지만, 자신과 오즈는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단순히 스폰서와 연구자를 넘어, 한층 발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전부 헛된 꿈이었다. 오즈가 아서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것도, 그에게도 소중한 어시스트로이드가 있다는 것도, 혼자만의 어리석은 착각에 불과했다.

“최소한의 관심도 없으면서 연구를 후원한다고…….”

오즈는 대답하지 않았고, 피가로는 한껏 인상을 쓰며 간헐적인 웃음을 흘렸다. 오즈는 피가로의 연구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피가로가 추구하는 바를 부인하며, 그 노력은 쓸데없는 것이라며 단호하게 못 박았다.

무엇을 위한 후원이고, 무엇을 위한 미팅인가. 더러운 돈은 기꺼이 받아도, 자신의 유일한 꿈이자 희망인 카르디아 시스템을 욕보이는 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설령 오즈의 도움으로 카르디아 시스템을 완성하더라도, 그 초석이 뿌리부터 썩어 있다면 부모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사람의 돈을 받아 그들을 완성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분명 스노우와 화이트도 노발대발할 것이다.

피가로는 홀린 듯이 그 가능성에 이끌렸고, 너무나 쉽게 분노라는 충동에 몸을 내맡겼다.

“진정한 고독을 모르는 당신에게는, 절박함을 모르는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땡전 한 푼 받지 않겠어!”

오, 그건 무척 용감한 행동이었다. 비록 그 직후,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자리를 박차고 도망쳤지만 말이다.

그렇게 떠난 뒤로, 오즈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많은 혜택을 내동댕이친 피가로와 달리, 오즈는 아쉬울 게 없었다. 그렇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피가로는 기어이 제게 주어진 천재일우의 기회를 발로 뻥 차버린 것이다.

‘어떻게 그 쉬운 부정 한 번 하지 않을 수 있어?’

랩으로 돌아온 피가로는 스노우를 끌어안고 간이침대 위를 뒹굴었다. 영문을 모르는 스노우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정수리에 코를 박은 채 볼품없이 훌쩍거렸다.

사람의 기분이란 어째서 이렇게 자기중심적인지, 자기가 저지른 짓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미친 듯이 서운하기만 했다. 오즈는 진실로 피가로가 무엇을 연구하는지 일말의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가 막히고 황당해서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소연이라도 할 곳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타고나길 외톨이인 탓에 사정을 털어놓고 조언을 청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한참을 코를 먹고 있었더니, 슬슬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충동적인 짓은 저지르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한 번의 행동으로 잃은 것을 떠올리니 맹렬한 두통이 뒤통수를 후리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 치 망설임 없이 일단 저질러놓고 이제 와서 후회한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추잡하기 짝이 없었다. 참을 수 없이 마음이 불편해진 피가로는 스노우에게 칭얼거렸다.

“스노우님, 제가 크나큰 실수를 했어요. 따끔하게 혼내주세요.”

그제야 피가로의 품에서 풀려난 스노우가 축 늘어진 팔 밑으로 기어 나왔다.

“어휴, 뭔지는 모르겠지만 피가로쨩이 그렇게 말하니 최선을 다해 혼내주마! 에잇 에잇.”

스노우는 옆으로 돌아누워있는 피가로의 엉덩이를 작은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솔직히 전혀 아프지 않았다. 덕분에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기보다는 참을 수 없는 반항심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자식이 먼저 저와 스노우님, 화이트님을 무시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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