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
끝없이 이어지는 말을 경청하던 담당의는 두통이 이는지 미간을 짚었다.
“가르시아 씨, 아직도 더 남았나요? 만약 있다면 오늘 아예 끝까지 털어놓읍시다.”
잘은 모르겠지만, 직전의 이야기에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던 것 같다. 역시 문제가 된 건 유서 부분일까? 아니면 어시스트로이드인 스노우에게 부모로서의 관심과 사랑을 요구한 부분일지도. 피가로는 매우 냉정하게 담당의의 부정적인 반응과 자신의 실패 요인을 분석했다.
“그럼요. 처음으로 그 사람과 계약을 맺은 게 두 달 전이었으니까, 그 이후로 무려 일곱 번이나 더 만났거든요.”
“……말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는 거네요.”
“그, 그건 죄송하게 생각해요. 그때는 정말 경황이 없어서…….”
“괜찮아요. 가르시아 씨가 그간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상담의 기본은 의사에게 협조하는 것이다. 당연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음에도 담당의는 피가로를 나무라지 않았다. ‘역시 정신적으로 몰려있는 환자를 나무라는 의사는 없겠지.’라고 생각하는 한편, 그가 사소한 말과 행동까지 조심하며 이쪽의 기분을 배려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 세상에서 피가로의 사정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그의 담당 의사가 유일했다. 담당의는 무척 상냥한 사람이었다. 단순히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넘어 언제나 피가로를 걱정했고, 피가로를 위해 많은 것을 제안했으며 또 시도했다.
담당의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제게 들어오는 어떠한 간섭이 성가신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담당의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마치 친구와 함께 있는 것 같아서 즐거웠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잔뜩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원 치료를 권하거나 머리가 멍청해지는 약물을 한가득 처방해 주지 않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사람이었다.
어쨌든, 피가로를 바라보는 담당의의 시선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담당의는 당장이라도 종이에 적힌 ‘165회차’를 박박 지우고, 처음으로 스폰서와 미팅을 했다던 ‘163회차’로 고쳐 쓰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봤자 그때로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생각을 했던 듯싶다. 미련을 떨쳐낸 담당의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맑은 눈빛으로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스폰서 문제인가요?”
“네, 아무래도…… 계속 얘기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제 스폰서는 정말 의중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데다가 만날 때마다 괴상망측한 제안을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나름의 농담인가 싶었지만, 그 사람의 직업과 재력을 생각하면 결코 빈말은 아닌 것 같았어요.”
처음에는 말을 꺼내기 망설여졌지만, 담당의의 말대로 고민을 털어놓다 보니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담당의가 이야기를 들어줘서 다행이다. 물론 그것이 직업인 사람이지만. 이상한 부분에서 안도감을 느낀 피가로는 이제 거리낌 없이 오즈를 떠올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
늦은 저녁의 외출과 스폰서와의 정기적인 미팅은 익숙해졌지만, 오즈를 상대하는 것은 여전히 까다로웠다. 호불호를 전혀 알 수 없기에 더욱 어려운 사람이었다. 오즈는 자신에 대해 좀처럼 말하지 않았고, 피가로는 꽤 자주, 아니, 항상 그와의 대화 주제를 선정하는 데 골머리를 앓았다.
피가로의 기준에서 오즈는 만날 때마다 성가시게 굴었다. 깐깐하게 요구사항을 제시하거나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는 다른 스폰서에 비할 바는 아니나, 그들과는 다른 의미로 지독했다.
짧은 텀을 두고 이루어진 세 번의 만남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탐색하는 시간―글쎄, 완전히 갑의 위치에 있는 스폰서에게 그런 불필요한 노력은 필요 없었을 거라 확신한다―을 가진 뒤, 오즈는 점점 더 괴이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네 번째 미팅 날, 오즈는 처음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학습했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피가로가 통째로 나온 두툼한 고기―세상에 또 고기다, 또 고기―를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고 앞뒤로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그거 하나 제대로 못 써는 건가. 어지간히 힘이 없군.”
“아.”
그냥 먹기 싫어서 그런 건데…….
오즈는 말리기도 전에 접시를 가져갔다. 한 손으로 들기엔 꽤 무거울 텐데, 불편한 자세를 무릅쓰고 가져와 자신의 앞에 놓았다. 마침 매번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음식이 아깝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기왕 가져간 김에 대신 먹어주면 좋겠다. 피가로는 상황에 맞지 않는 태평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즈는 극도로 절제된 동작으로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피가로에게 돌려주었다. 피가로는 공허한 배부른 눈으로 스테이크를 노려보았다. 친절을 베풀어준 건 고마운데, 한입에 넣기에는 여전히 너무 컸다.
‘내가 대체 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 거지.’
맞은편에 앉은 오즈는 식사도 멈추고, 어서 먹으라는 듯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묘하게 데이트처럼 느껴지는 이 상황이 무척 불편했다. 그래도 연구 자금의 큰손이자 인류 최종 병기를 소유한 무기상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기에, 오늘도 뻣뻣한 턱을 벌려 꾸역꾸역 음식을 삼켰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오즈가 아직까지 동태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도 사적으로 관심 있는 상대에게 저런 눈빛을 보내지는 않을 테니, 그쪽 방면으로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피가로는 이것도 다 돈 많은 사람들의 변덕이겠거니 생각하며 열심히 잘 먹는 시늉을 했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적당히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금방 알게 되었다. 예상과 달리 오즈는 도통 타협을 몰랐다.
“너는 항상 피곤해 보이는군.”
“이건 어제 늦게까지 일을 해서…….”
피가로는 화들짝 놀라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 말대로 눈 밑이 옴폭 패고 피부가 까칠했다. 오즈는 워낙 말수가 없는 사람이라, 아직도 그가 먼저 말을 걸면 때때로 당황하곤 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즈가 자신의 안색을 신경 쓰다니, 직접 겪고서도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피가로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뺨을 문질렀고, 오즈는 초췌한 낯짝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이 정말 좋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너를 보고 있으니 입맛이 떨어져.’ 같은 말을 뱉을 것처럼 말이다. 내심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오즈는 그 말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무단결근하고 있는 직원이 있다고 들었다. 그 직원이 문제인가?”
그 말을 듣자마자 본능이 시끄러운 경고음을 울렸다. 그런 정보는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순간적으로 찾아온 공황은 물러가고, 피가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부하를 변호했다.
“아, 아뇨, 아닙니다. 폴몬트 랩은 자유로운 근로 환경을 제공하니까요. 저도 밤새 개인적인 연구를 하고 있었을 뿐, 그 직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애초에 딱히 손이 가지도 않고요.”
파우스트는 알까.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를 계속 안전하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폭주 사고도 무마해 주고, 무단결근도 산업재해로 처리해 주고, 이제는 정체 모를 무기상의 위협까지 막아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파우스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일이 이렇게 커진 것은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었으니까.
“밤새…….”
눈을 내리깐 오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필사적인 변호는 먹혀든 것 같았다. 피가로가 몰래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그는, 반 이상 남은 피가로의 접시를 쳐다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렇군. 되도록 연구는 적당히 하고 제때 잠을 자도록 해라.”
“하하…… 네, 그러겠습니다.”
‘너 같으면 그게 되겠냐.’
피가로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대충 대답했다. 그 과정에서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체적인 흐름은 바뀌었지만, 결국 네 번째 미팅도 이전 사례와 얼추 비슷하게 끝이 났다.
다섯 번째 미팅은 폴몬트 시티 상공에 위치한 플로팅 아일랜드에서 진행되었다. 반중력 제어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진 플로팅 아일랜드는 대기권과 아주 가까운 고도에서 부유하는 인공섬이었다. 국민들의 혈세를 녹여 만들어진 플로팅 아일랜드는 초고층 빌딩들과 인공적인 자연물, 공중 정원으로 둘러싸여 전에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했다. 그야말로 하이클래스들을 위한 전유물이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입장료가 턱없이 비싸다는 점일까.
당연히 피가로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이런 데이트 명소 같은 곳에 스폰서와 함께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즈의 제안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나마 오즈가 아서를 데리고 왔다는 점이 위안이 되었다. 처음부터 아서에게 구경을 시켜주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 같다.
‘그럼 나는 왜 부른 거냐고…….’
플로팅 아일랜드의 야경은 장시간의 연구로 침침한 두 눈이 개안될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솔직히 피가로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만큼 커다란 섬을 시티 한복판에 띄운 기술력이 흥미롭긴 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경치 따위에 일일이 심취하기에 그의 감성은 너무나 메말라있었다.
수많은 관광객들과 뒤섞인 그들은 트램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공중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달리는 트램은 슬림하고 유려한 외관으로, 고속 이동에 적합한 공기역학적 형태를 자랑했다. 때때로 다용도로 운행되는 트램은 현재 자동운행모드로 플로팅 아일랜드 외곽을 둥글게 돌며 아름다운 인공섬의 이모저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자연물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부유섬과 어두운 밤에 투명하게 빛나는 레일 위를 달리는 백색의 트램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비싼 돈을 내고 추억을 쌓으러 온 사람들답게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런 식상한 소란은 피가로의 옆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창문에 달라붙은 아서가 오즈의 옷소매를 당기며 “오즈님, 이거 보세요. 풍경이 정말 아름답습니다!”라고 외쳤다. 오즈는 보기 드물게 온화한 태도로 아서와 함께 창밖을 구경했다.
객관적으로 아서는 귀엽고, 오즈는 아서에게 더없이 상냥하니 그들을 지켜보는 건 꽤 즐거웠다. 하지만 그 외에는 전부 최악이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와 트램 내부의 빡빡한 인구 밀도가 피가로를 압박하여 숨통을 틀어막았다.
얇고 투명한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이 내다보였다. 다양한 전광판과 홀로그램이 번쩍이며 다채로운 형태를 띠고 있었다. 홀로그램 영상 한 번에 어떤 기업의 막대한 자산이 광고라는 형태로 터져나가고 있었다.
피가로는 빠르게 지나가는 CF들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는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피가로.”
“……네, 네?”
어쩌면 너무 정신을 빼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피가로는 자신을 부르는 묵직한 저음에 놀라 저절로 수그러들던 고개를 들었다. 오즈는 어느새 피가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다. 피곤한 건가?”
“그건 아니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금 버겁네요.”
초저녁의 플로팅 아일랜드는 끝내주는 시간을 보내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방에서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이곳은 도무지 눈을 댈 곳이 없었다. 특히 여러 사람과 오랜 시간 한 공간에 갇혀있어야 하는 관광 트램은, 중증의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을 앓고 있는 입장에서 지옥과도 같았다. 어디로 눈길을 돌려도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치기 일쑤였던 것이다.
오즈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피가로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안하다면, 만나지 않으면 되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영원히 사람을 만나지 않게 해줄까?”
헉, 피가로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원래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예 오즈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는 것조차 무리였다.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며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반사회적인, 위험한 사람 같으니. 절대 정상인의 발상이 아니었다. 완전히 질린 피가로가 혀를 내두를 즈음,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창밖을 구경하던 아서가 오즈의 어깨너머로 피가로를 쳐다보았다.
간신히 고개를 든 피가로는 아서를 발견하고 입매를 굳혔다. 맑고 곧은 푸른 눈동자가 피가로를 똑바로 직시했다. 유리알처럼 번질거리는 눈동자에 새파랗게 질린 피가로의 얼굴이 비쳤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사랑스러운 얼굴은 모든 감정이 빠져나간 듯 무표정했다.
무해한 외관에 속아 중요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아서는 인류 최종 병기 ‘신의 천둥’이고, 오즈는 그것의 소유주였다.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아서는 오즈의 명령 한 번이면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었다.
‘신의 천둥’이 정확히 어떤 성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나, 괜히 인류 최종 병기라는 오싹한 명칭이 붙은 게 아닐 터였다. 피가로가 아는 폴몬트 종합연구기관의 이사장이라면 인류를 말살시킬 대학살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원래 그랬다. 자신보다 그쪽이 호기심에 미친 천재에 가까웠다. 무르 하트는 그다지 인간 친화적이지도 않았고, 인성 면에서도 영 꽝이었다.
말을 꺼낸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웃고 즐기라는 협박처럼 들렸다. 그래서 피가로는 내려앉은 눈썹을 펴지 못한 채 그저 오작동한 로봇처럼 하염없이 웃었다.
여섯 번째 미팅은 또다시 식사 자리였다. 달에 한 번 있는 아서의 정기점검을 마친 뒤, 오즈는 도시 근교의 조용한 레스토랑으로 피가로를 데려갔다. 단언컨대 그토록 복잡한 보안 필터가 내장된 에어카는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과한 설비였지만, 소유자의 직업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으니 양껏 먹어라.”
“너무 많은데요…….”
“넌 볼품없이 말랐어. 제대로 먹는지 지켜보겠다.”
남이야 삐쩍 꼴아 해골처럼 보이든 말든 뭔 상관이람! 피가로는 울상을 지었다. 급기야 신종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괴롭힘의 이름은 바로 식고문이었다. ‘내가 뭔가 실수한 게 분명해.’ 피가로는 남몰래 훌쩍거리며, 불쾌할 정도로 더부룩한 뱃속에 음식물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오즈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뒤룩뒤룩 먹여놓고는 돌아가는 길에 친히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집까지 에스코트해 주지.”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가는 길에 들를 곳이 있어서요.”
‘내가 당신이랑 무슨 사이라고 에스코트 같은 걸 받아!’ 피가로는 크게 소리치고 싶은 욕망을 어렵사리 억누르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어차피 집에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인간의 하루는 고작 24시간. 그중 먹고 자는 시간을 최대한 아껴도 연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20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 20시간 중 오즈의 개인적인 부탁을 위해 아까운 시간을 두 시간―아서의 메인터넌스 시간은 제외한다. 카르디아 시스템의 오리지널 기체를 살피는 것은 피가로에게도 뜻깊은 시간이니까―이나 할애했다. 일정이 끝났으니 잃어버린 시간만큼 효율을 뽑기 위해 다시 랩에 틀어박혀 연구를 해야 했다.
대망의 일곱 번째 미팅은, 아, 정말 끔찍했다. 그건 피가로의 기억 속에 길이길이 남을 최악의 미팅이었다. 장소는 두 달 전, 스폰서와의 첫 미팅을 위해 방문한 번화가의 호텔이었다.
“방을 잡아 놨다.”
오즈는 저녁 식사를 마친 직후,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그 말과 함께 방 번호와 패스코드를 보내주었는데,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확인한 피가로는 대번에 창백해졌다. 이건 무조건 스위트룸이었다. 피가로는 부정해 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오즈를 보았으나, 오즈는 평소처럼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마치 지금 당장 방으로 올라가라는 듯이.
이래서야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수상하게 상대방을 살찌우는―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스폰서가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말도 안 돼.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공기가 텁텁해지며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쿵, 피가로의 심장이 추락하는 것과 동시에 툭, 가벼운 물건이 떨어져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생생한 현장을 파고드는 이질적인 소리는 피가로를 새하얀 직사각형 방으로 돌려놓았다.
‘165회차’라는 단어가 적힌 종이 밑으로 자잘한 글과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이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고개를 들자, 바닥에 펜을 떨어뜨린 담당의가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가르시아 씨, 괜찮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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