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
이후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피가로는 혈액 대신 냉각수가 흐를 것 같은 스폰서와 무사히 계약을 맺었다. 완성된 계약서는 엄중하게 보안 처리되어 데이터 서랍에 소중히 보관되었다.
카르디아 시스템의 새로운 스폰서는 대단히 결단력 있고 성격이 담백하여, 계약서를 작성하는 즉시 통장에 돈을 꽂아주었다. 피가로는 오즈의 깔끔한 일 처리에 몹시 감동하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통장에 돈이 들어오자마자, 피가로는 속으로 시끄럽게 떠들던 ‘더러운 돈’에 대한 불만을 모두 잊어버렸다. 회사의 값비싼 설비를 이용해 타인의 신상을 캐내며 이미 한 번 내다 버린 양심이었다. 아니, 고작 한 번뿐이겠는가. 여태 살아오면서 수차례 내동댕이친 피가로의 양심은 이제 모서리가 둥글게 깎여 보름달처럼 되어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비록 말수가 적은 무기상과 매주 지옥 같은 면담 시간을 가지야 했지만, 얻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약간의 스트레스를 감수하는 대신 목표한 연구 자금의 70퍼센트를 확보한 것이다. 이건 정말 살아생전 있을 수 없는 놀라운 행운이었다.
피가로는 스폰서가 무슨 제안을 하든 최대 세 번까지는 너그러이 넘기기로 했다.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절대 돈 때문이었다. 스폰서가 안주머니에 숨기고 있을 정체불명의 초소형 무기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완전히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피가로는 마음을 옥죄던 자금난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난 기념으로 밤새 각성제를 콸콸 들이부으며 연구에 몰두했다. 오너의 기분에 동화된 스노우는 옆에서 말리기는커녕 열심히 그를 응원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착실히 흘러, 어느덧 두 번째 미팅 날짜가 다가왔다. 금번 미팅 장소는 대낮의 호텔이 아니라, 번화가에 위치한 초저녁의 레스토랑이었다. 마침 백주대낮에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이 지치던 참이었다.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는 실험실에만 처박혀있던 피가로는 햇볕을 쬘 때마다 전설 속의 뱀파이어처럼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이번에는 스노우를 랩에 두고 혼자 움직였다. 스노우는 무척 걱정했지만,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쓸데없는 염려를 하냐며 단호하게 일축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해가 저문 시간이니까 진심으로 괜찮았다.
미팅 장소에 도착한 건 좋은데,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손님이 없었다. 설마 자신이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이라고 말한 것을 의식해서 저녁 시간을 통째로 대절한 건가? 피가로는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즉시 부정했다.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상상은 자유라지만, 이제는 아예 소설을 쓰고 있었다.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위한 슈퍼컴퓨터 구동비의 절반 이상을 일시불로 지불하는 대단하신 분이 그렇게까지 이쪽의 사정을 봐줄 리 없었다.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부터 그날 입안의 침이 마르도록 설명한 병의 증세까지, 피가로는 오즈가 자신에 대해 벌써 절반 이상 잊어버렸을 거라 확신했다. 그 가설에 오늘 점심 먹다 남긴 고단백 영양바를 걸어도 좋았다.
피가로는 오늘도 먼저 와 있는 오즈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당연히 악수는 하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 만에 재회하는 것이 엄청나게 불편할 줄 알았지만, 그나마 한 번 봤다고 처음보다 훨씬 나았다.
“…….”
피가로를 본 오즈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침묵은 오히려 불편한 기분을 가중시켰다.
‘이게 대체 무슨 반응이지.’
피가로는 오즈의 강한 의사 표현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는 눈이 마주칠 새라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속으로 백 번 한숨을 쉬었다. 사람을 보자마자 질색을 하다니, 묘하게 예의가 밥 말아먹은 태도였다.
분명 지난주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훈훈한 분위기―오, 지나간 일을 미화하는 인간의 기억 왜곡은 참 대단했다― 속에서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던가. 마음이 자꾸만 불편해졌지만, 그렇다고 왜 인상을 쓰냐며 득달같이 달려들어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두 사람은 별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오즈와의 두 번째 미팅은 그야말로 침묵, 숨 막히는 정적 그 자체였다. 주방에서 있는 둥 없는 둥 숨죽인 직원들을 제외하고, 단둘뿐인 커다란 레스토랑에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유일하게 울려 퍼졌다.
얹힌다. 이건 무조건 얹힌다. 지난주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오늘은 확실했다. 밥이 입이 아니라 코로 넘어가고 있었다. 괜스레 눈앞의 음식을 깨작거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피가로는 먼저 말을 꺼냈다.
날씨와 장소, 취미나 여가 활동, 지금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이외에도 기타 등등. 오즈는 무슨 말을 해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누구라도 쉽게 참여할 수 있을 법한 가벼운 스몰토크를 수차례 건넸지만, 모두 딱딱한 단답에 튕겨져 나갔다.
애써 쥐어짜낸 형식적인 질문을 다 소진하자 문득 이 상황에 회의감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즈는 피가로와 대화를 나눌 의지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덩달아 의지를 상실한 피가로는 ‘그럼 그러던가…….’라고 생각하며 접시를 비우는 데만 집중했다.
오랜 은둔형 외톨이 생활로 쪼그라든 위장에 꾸역꾸역 음식물을 채워 넣고 있을 때였다. 눈 깜짝할 새에 접시를 비운 오즈가 냅킨으로 우아하게 입을 닦으며 말했다.
“너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이마와 등줄기로 차가운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피가로는 식기를 쨍그랑 떨어뜨리며 마구 손사래를 쳤다.
“다, 당치도 않습니다. 오즈님에 대해선 맹세코 아무것도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런.”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무언가 말하려던 오즈는 버릇처럼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인상을 쓰니 몇 배는 더 위압적이었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인 피가로의 정수리에서 도통 눈길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지금의 반응으로 확실히 알았다. 오즈는 피가로가 멋대로 그의 신상을 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아무것도 얻은 건 없었지만, 시도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 폴몬트의 설비와 보안은 따라올 곳이 없는 수준인데,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정말 만만치 않은 남자였다.
‘지금이라도 납작 엎드려 빌까?’
그 방법도 고려했지만, 이제 와서 그러기엔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반성하고 있으니 적당히 좀 용서해라!’
하지만 그럼에도 참을 수 없는 반항심이 고개를 들었다. 앞선 일로 자신을 처리할 생각이었다면 레스토랑에 데려와 비싼 밥을 먹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피가로는 편리한 대로 최후의 만찬이라는 가능성을 빠르게 배제했다.
다행히 오즈는 바들바들 떨며 시선을 피하는 피가로의 모습이 황당한 듯,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째 미팅은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 번째 미팅 날이 도래했다. 아, 어째서 시간은 이다지 쏜살같이 흐르는지. 오즈와 어떻게 대화를 이어갈지 전혀 궁리하지 않은 피가로는 그저 무심한 시간의 흐름을 원망했다. 그나마 수란한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건 낯선 공간도, 단둘이 만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세 번째 미팅 장소는 폴몬트 라보라토리 고층에 위치한 피가로의 개인 랩이었다. 말이 미팅이지, 오늘의 목적은 스폰서의 특별한 어시스트로이드, 아서의 메인터넌스였다. 오즈는 약속대로 정해진 날에 아서를 데리고 피가로가 근무하는 폴몬트 랩을 방문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피가로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응, 나도 반가워. 누가 만들었는지 아주 정밀하고 귀엽게 생겼구나.”
오즈의 손을 잡고 나타난 아서는 어린아이의 외형을 한 어시스트로이드였다. 지금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외관 변환이 자유로운 모델인 모양이었다. 피가로는 이제 막 열 살 즈음으로 보이는 아서를 보며 오즈의 취향이 참 의외라고 생각했다.
“네가 생활하는 시설을 둘러보고 싶다.”
오즈는 랩이 피가로에게 제2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여러 작품에 나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이 흔히 그러듯, 피가로는 대개 랩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했다. 매일매일 연구 삼매경에 빠져있느라 집에 들어가는 날이 드물었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 번, 그것도 모처럼 귀가해서 하는 일이 곯아떨어질 때까지 진탕 술을 퍼마시는 것뿐이었다. 남들이 보면 도대체 왜 저러나 싶겠지만, 피가로에게는 그것이 나름대로 삶의 낙이었다. 달에 한 번 그런 일탈을 해주어야 연구도 잘 되고, 더욱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보나 마나 오늘 미팅은 길어질 전망이었다. 피가로는 내심 슬펐으나, 이런 일에 익숙한 프로답게 겉으로는 능숙하게 오즈를 안내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적정 거리 유지는 필수였다.
시설을 어느 정도 둘러본 다음에는 드디어 아서의 메인터넌스 시간이었다. 피가로가 여태까지의 미팅 중 유일하게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아서는 언뜻 보기에도 절대 평범한 기체가 아니었다. 피가로를 따라 시설을 구경하는 내내, 아서는 오즈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옆에서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것을 목도한 어린아이였다. 아서는 언제나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개인적인 감상과 함께 가감 없이 표현했다. 마치 실제로 감정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오즈가 그토록 아끼는 어시스트로이드가 어떤 모델일지 궁금했지만, 아서를 직접 본 지금은 아서라는 어시스트로이드 자체에 더 큰 흥미가 생겼다.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오즈는 아서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 오즈는 아서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아서의 모든 행동을 존중했다.
어시스트로이드를 ‘모두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입장에서, 두 사람의 모습은 보기 흐뭇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아서를 지켜보는 동안,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친 느낌이 들었다.
오즈와 함께 자신의 랩으로 돌아온 피가로는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아서를 정비대에 눕혔다. 모르는 것을 알아갈 때의 설렘과 희열은 어떤 감정도 따라올 수 없었다. 그 또한 평생을 한 분야에 매진하며 살아온 사람인지라, 정교하게 설계된 어시스트로이드를 낱낱이 파헤칠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아서의 등 뒤로 돌아간 피가로는 설비를 가동하고, 여러 개의 디스플레이를 띄워 메인터넌스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신속하고 정확한 정비에 도움이 되도록 ID를 알려줄 수 있을까?”
아서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입니다. ID:A-GRANVELLE-001, 그랑벨 시리즈 A 타입, ‘아서 그랑벨’입니다.”
“……그랑벨?”
설마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들을 줄 몰랐던 익숙한 이름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강한 충격을 받은 피가로는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완전히 말문이 막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였다. 180도로 머리를 돌린 아서가 등 뒤의 피가로를 바라보며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가 될까요?”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아니, 아무것도. 자, 이제 배터리를 제거할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표정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먼저 허를 찌르는 말을 한 주제에, 이제 와서 피가로의 기분을 고려하는 듯 아서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그건 평범한 어시스트로이드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자율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카르디아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었다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피가로는 투명한 패널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 오즈의 눈치를 살폈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고집스럽게 어깨만 봤지만,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관리자로부터 접근 권한을 받아 손을 가져다 대자, 아서의 왼쪽 가슴이 청백색으로 빛났다.
피가로는 마나 플레이트를 꺼낼 때 떠오르는 독특한 문양을 놓치지 않았다. 마나 플레이트를 제거할 때 나타나는 백합 문양은 카르디아 시스템의 특징이었다. 예상대로 오즈의 어시스트로이드는 그랑벨 시리즈 A 타입의 초기 모델이었다. 카르디아 시스템의 토대이자 몇 달 전 폭주 사건을 일으킨 A-GRANVELLE-999의 베이스 모델 말이다.
당연하게도 피가로는 이런 것을 만든 적이 없었다. 단순히 만든 적 없는 수준이 아니라, 애초에 카르디아 시스템을 최초로 구축한 것은 피가로가 아니었다.
이런 엄청난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고, 변덕스럽게 방치할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밖에 없다. 시티에서 자신보다 더 지적인―객관적으로 섹시는 자신이 우세하다, 라고 피가로는 주장한다―남자, 폴몬트 종합연구기관의 이사장인 무르 하트, 오로지 그 사람뿐이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폴몬트 랩에 카르디아 시스템 프로토콜을 남겨둔 것도, 아서의 제작자도 전부 그 사람이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역을 엿본 까닭에, 불현듯 머리가 아찔해졌다.
어째서 카르디아 시스템의 오리지널 기체가 오즈의 손에 있는 걸까? 방대한 데이터 서버에 저장된 자신의 기록을 전부 말소한, 막대한 재력을 가진 무기상에게.
……아아, 엄청나게 불길한 상상을 해버렸다. 이놈의 호기심. 무작정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도저히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오즈님. 이 어시스트로이드는 무슨 용도로 곁에 두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대답은 망설임 없이 돌아왔다.
“무기로 구매했다.”
피가로는 한쪽 입꼬리를 애매하게 올린 채,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호기심에 눈먼 이야기가 있다면 딱 이런 것이다. 의도가 불손하게 들릴까 봐 일부러 무엇을 위해 사들였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오즈는 피가로의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답을 들려주었다.
이걸 고마워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딱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용도까지 알고 싶진 않았다는 것이다.
카르디아 시스템이 내장된 어시스트로이드이자 무기인, 그랑벨 시리즈의 오리지널 기체. 그 기체의 제작자인 이사장은 그것을 뒷세계에 암약하는 무기상에게 넘겼다. 그래, ‘신의 천둥’. 정확히 그 생각이 났다.
그쪽 세계와 연이 없는 피가로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신의 천둥’은 음험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 인류 최종 병기였다. 실존 여부조차 불분명하고, 존재 자체가 베일에 싸인 정체 모를 물건이다. 어떤 형태인지,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도 모를 그 무기를 얼마 전 한 사람이 손에 넣으면서, 사람들은 경외심을 담아 무기 자체가 아닌 그것의 소유주를 대신 ‘신의 천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과거, ‘신의 천둥’의 소식을 접한 피가로는 그것이 경전처럼 거룩한 이름이라고 생각한 바 있었다. 감정을 가진 어시스트로이드가 무기로서 활용된다. 직접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독자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어시스트로이드가 감히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 오만한 인간들에게 징벌을 내린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리는 벌, 진정한 의미의 신의 천둥이 아니겠는가.
정말이지 가당치도 않은 비밀을 알아버렸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일에 말려들었는지 깨달은 피가로는 죽상으로 변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벌써 세 번째 미팅이었지만, 짧은 주기만큼이나 그날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대략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피가로와 시간을 보낸 오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깔끔하게 돌아갔다.
건물 밖까지 귀중한 스폰서를 배웅한 피가로는 랩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무언가를 작성해 자신의 클라우드 서버에 남겨두었다. 손님이 와있는 동안 개인실에서 슬립 모드로 잠들어있던 스노우가 슬금슬금 나타나 디스플레이를 엿보았다.
“유서.”
스노우는 대문짝만하게 적힌 문자를 읽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유서는 왜 쓰는 거니?”
“몰라요. 말리지 마세요.”
“말린다니, 누가? 본인이 그대를?”
스폰서에게 살해당한 미래를 열심히 시뮬레이션하던 중, 피가로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스노우를 째려보았다.
“이럴 때는 말리는 시늉이라도 좀 하세요.”
“그런 건 행동 양식에 누락되어 있다는 게야.”
피가로가 아는 스노우는 훨씬 친절하고 다정했었는데, 자신이 만든 이쪽은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원본이 아닌 타인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졌으니 이 또한 그의 잘못일 터였다. 만들면서 버그가 발생했거나, 어떤 요소가 부족했거나. 불완전한 연구이니 짚이는 부분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어느 날 제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하면, 스노우님은 앞으로 어떡하실래요?”
피가로는 그 사이 완성한 유서를 치우고, 무릎을 굽혀 스노우를 끌어안았다.
“당신을 돌봐줄 사람도, 당신의 신원을 보증해 줄 사람도 영영 없어져 버리는데.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아직 세상은 어시스트로이드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거든요. 그러다가 혹여 안 좋은 일에 휘말리거나 고장이라도 나게 된다면…….”
가만히 안겨 있던 스노우가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스노우는 보는 사람이 안타까워질 정도로 애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보다도, 나는 걱정이구나. 피가로가 사라진다면 나와 같은 형태의 어시스트로이드를 만들어줄 사람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지.”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대감만큼 실망도 컸다. 피가로는 한껏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또 그 이야기인가요. 정말 지긋지긋해.”
“그대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겠지.”
스노우가 자신의 반쪽을 더 챙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관계였기에 오히려 원본답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쪽을 걱정해 주기를 바랐다. 그들의 자식인 자신을 바라보고 챙겨주기를 바랐다.
그래, 마지막 순간에 한 번이라도 남겨질 사람을 생각했다면 그런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피가로는 서운함을 감추며 스노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품에 안기느라 흐트러진 앞머리를 걷어내고, 드러난 이마에 정중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도 그렇네요. 어쩔 수 없지, 벌집이 되지 않도록 힘낼 수밖에.”
“그래그래, 본인을 혼자 두면 지옥까지 쫓아갈 테니 말이네.”
“스노우님 바보. 어시스트로이드는 지옥에 갈 수 없어요.”
인간에 의해, 인간의 욕심으로 만들어진 어시스트로이드는 한없이 무구하며, 가엾고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피가로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사후세계가 존재하고, 어시스트로이드가 그곳에 발을 들일 수 있다면, 그들이 갈 곳은 분명 천국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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