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제목 못 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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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하얗고 푸르스름한 색이 넘치는 실험실. 바깥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이 공간은 크고 무거운 기계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탁한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투명한 고글을 쓰고, 무엇인가를 찾는 듯 주위를 살폈다.
“시스템 충돌로 유실된 데이터는 복구했어. 인격은 문제없고, 다음은 미리 백업해둔 기억을 연결해서…….”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워크라이트가 한 점을 집중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인공적으로 형성된 빛무리는 실험대 위에 일자로 누운 사람을 감쌌다. 그 사람은 실험실을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는 남자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계속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는 남자와 달리, 실험대 위에 놓인 사람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생명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몸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빈 껍데기처럼 보였다.
“맞아, 그게 있었지.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가 있어? 아아, 내 정신 좀 봐…….”
짝, 손뼉을 마주치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유독 크게 울렸다. 남자는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 것처럼 서둘러 달려가, 여러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인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테트리스를 하듯 묵직하게 쌓인 박스들과 도통 쓰임새를 알 수 없는 머리통만 한 기구를 낑낑거리며 힘겹게 옮기더니, 그 밑에 깔려 있던 작은 상자를 찾아냈다. 눈에 띄게 반색한 남자는 상자를 들고 허둥지둥 실험대로 돌아왔다.
남자는 상자를 실험대 위에 내려놓고, 이마에 묻어난 비지땀을 소매로 닦았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남자의 눈은 상자와 실험대 사이를 오갔다. 초조함에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허공을 건드렸다.
“준비는…… 이만하면 충분해. 실수한 부분도 없어.”
부산스럽게 굴기도 잠시, 남자는 열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허공에 반투명한 디스플레이가 떠오르며, 복잡하게 얽힌 데이터와 그래프가 눈앞에 펼쳐졌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복잡하게 꼬인 데이터를 노려보다가 디스플레이의 몇 번 두드렸다.
“됐어. 조건은 빠짐없이 갖췄어. 이제 가동한다.”
크게 심호흡한 남자는 상자에서 푸른색 직사각형 플레이트를 꺼냈다. 어시스트로이드를 가동하기 위한 기본적인 재료, 마나 플레이트였다. 남자는 마나 플레이트를 들고 실험대 위에 잠든 어시스트로이드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마른침이 긴장과 불안으로 위축된 목울대를 타고 꼴깍 넘어갔다.
남자는 누워있는 어시스트로이드의 얇은 가운을 어깨 밑으로 끌어내린 뒤, 손에 든 마나 플레이트를 그것의 왼쪽 가슴에 삽입했다.
“자, 눈 뜰 시간이야.”
마나 플레이트를 가져다 대자, 축 늘어진 어시스트로이드의 맨 가슴에서 옅은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마나 플레이트는 흡수되듯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남자는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심장을 얻은 어시스트로이드가 천천히 눈을 뜨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한 꺼풀의 막이 벗겨지듯 내리감은 눈이 뜨였다. 독특한 녹색 동공과 회색 눈동자가 주변을 둘러본 뒤, 눈앞에 있는 인물을 똑바로 응시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 몇 번을 겪어도 여전히 경이로웠다. 그 눈에 비치는 자신을 보자, 알 수 없는 설렘이 가슴속 깊이 파고들며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눈을 뜬 어시스트로이드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엔지니어가 미리 옮겨놓은 데이터를 종합하여 자신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의 행동 패턴을 도출하는 중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동안, 내장된 분석 프로그램이 바삐 돌아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모든 구동 과정을 거친 어시스트로이드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피가로 가르시아.”
평소 듣는 것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나는 이런 목소리로 말하는구나. 남자, 피가로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좋아. 말을 할 수 있군. 내가 누군지 알겠어?”
“폴몬트 라보라토리 지능기계정보부 부장, 카르디아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는 엔지니어이자 나의 창조자.”
“맞아, 정확해. 전송한 데이터가 바디에 잘 접착되었나 보네. 정말 다행이야…….”
자신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래 봐도 이 어시스트로이드는 정밀한 실험을 위해 인격과 기억을 복제하여 섬세하게 제작된 프로토타입이었다. 물론 짧은 실험을 위해 만든 개체인 만큼 겉모습만 그럴듯하고, 내장 기관은 연구비 절감을 위해 저급 소재로 구성되었다.
모델이 된 본체와 똑같이 제작되었다면, 실험의 성공을 위해 한낱 실험체인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피가로 본인의 생각은 그랬지만, 일단은 모를 일이다. 본래라면 단순한 확인 작업을 위해 함부로 예산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 주제를 고려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변수는 최대한 줄여야 했다.
전선이 얼기설기 얽히고, 쇠 냄새가 나는 기계의 육체에 갇혔다는 사실은 인간의 정신으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외관을 신경 쓰지 않고 이질적인 생김새로 만들었다가 자신의 입지를 혼동하고 폭주를 일으키기라도 하면 여간 곤란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비용과 수고를 들이더라도 안전을 추구하는 판단이 옳았다. 이건 결코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되는 중대한 프로젝트니까.
“나는…….”
중얼거린 어시스트로이드는 손을 쳐다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기름칠 덜 된 쇳덩이처럼 관절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놈의 저급 소재는 만들 때부터 사람을 고생시키더니, 무사히 완성된 이후에도 계속 말썽이었다. 지레 찔린 피가로는 흠칫 놀라 어시스트로이드의 눈치를 살폈으나, 다행히 어시스트로이드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어시스트로이드는 엉성하게 만들어진 자신의 몸을 확인하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비록 기계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있는 조잡한 몸뚱이였지만, 그 행동만큼은 실제 감정을 가진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기대했던 대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그간의 고생이 떠오르며 감동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피가로는 양손을 불끈 쥐고, 작은 목소리로 “완벽해!”라고 외쳤다.
어시스트로이드는 삐거덕거리는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육체의 내구성을 확인하듯 부드럽게 스트레칭을 하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마주했다.
“카르디아 시스템의 테스트를 위해 나를 만든 건가.”
피가로는 어시스트로이드를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래, 그래.”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아직 완전히 정착하지 않은 인격과 기억이 서서히 시스템에 스며드는지, 어시스트로이드는 점점 더 유창하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실험의 목적은 단순히 어시스트로이드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연구하는 것은 다른 때와는 다르다. 실험의 핵심은 인간의 기억과 인격을 가지고도 만들어진 기계장치의 몸에 위화감이나 거부감을 느끼는지 살피는 것. 또한, 강제로 주입된 타인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부러 원본과의 비교가 용이한 자신을 실험 대상자로 선택했다. 만약 앞서 언급한 부분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또 먼 길을 돌아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거기까지 이해하고 있구나. 훨씬 일이 쉬워지겠어. 그렇다면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겠지? 지금부터 어디까지 기억이 온전한지, 지식은 얼마나 완벽하게 보전되어 있는지 확인해 볼 거야. 그리고 최종적으로 네가 느끼는 기분을 말해줘.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혹시 어떠한 감정이나 충동이 인다면 바로 알려줘야 해.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
이만해도 훌륭한 성과였다. 피가로는 어시스트로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허공에 떠오른 디스플레이에 무언가를 받아 적었다. 어시스트로이드는 피가로가 연구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피가로는 뒤늦게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시스트로이드와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추며 멋쩍게 웃었다.
“하하…… 나도 모르게 신나서 이것저것 얘기해버렸네. 어차피 나를 다운로드한 너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그럼 시작하자.”
“뭐든 물어봐.”
“좋은 자세야. 그렇게 협조적으로 나와야지. 그래도 목소리만 아니라 말투까지 똑같은 건 조금 무서울지도…… 우선은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자. 떠오르는 건 뭐든 말해도 좋아. 우리의 일치성을 확인할 테니 나에 대해서 얘기해 봐.”
어시스트로이드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머리카락의 음영에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가로는 알 수 있었다. 저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취하는 자세였다.
“그건 전원을 켜자마자 말한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미간을 모은 피가로가 반박하려 할 때였다. 어시스트로이드는 나긋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그런 간단한 정보가 아니겠지. 글쎄, 어떨까. 우리만 아는 이야기라고 하면, 한 달 전에 자택에서 술 먹고 변기에 토한 거?”
“아, 그건.”
미처 막을 틈도 없었다. 어시스트로이드는 이 세상에서 오로지 둘만 아는 비밀 이야기를 술술 쏟아냈다.
“변기 뚜껑을 덮은 채로 토해서 치우느라 고생했지? 토사물로 지저분한 바닥을 박박 닦으면서 ‘이럴 거면 스노우님을 랩에 두고 오는 게 아니었어! 집에 데려와서 치워달라고 할걸!’하고 소리쳤지. 잔뜩 취하고 주저앉아서 울던 것도 기억나. 사실 기억 자체는 조금 흐릿하지만…… 객관적으로 추했어. 아무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지. 그리고 또…….”
어시스트로이드가 그걸로도 부족한지 더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자신을 본떠 만든 어시스트로이드에게 부끄러운 일을 지적받는 것은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듣다 못한 피가로가 얼굴을 붉히며 꽥 소리쳤다.
“잠깐, 잠깐잠깐!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돼! 간신히 잊고 있었는데!”
“알려달라고 한 건 너잖아. 일치성을 확인하겠다면서? 실험체인 내가 연구 내역을 술술 읊느니, 혼자만 간직한 부끄러운 기억을 말하는 편이 서로 불편한 상황이 없겠다고 생각했어.”
“그런 재수 없는 말을…….”
참자, 참아. 세부적인 확인은 아직이지만, 상대는 자신과 8할 이상 일치하는 어시스트로이드였다. 여기서 화를 낸들 제 얼굴에 침 뱉기밖에 더 되겠는가. 오늘도 냉철한 이성이 열심히 힘을 냈다. 피가로는 부르르 몸을 떨며 한계까지 치달은 민망함을 가라앉혔다.
어시스트로이드는 심드렁한 얼굴로 세운 무릎에 턱을 괴었다. 어떻게 된 게 쉽게 싫증 내는 것조차 자신과 비슷했다. 그래도 실험에 대한 의욕은 있는지, 계속해서 무엇이든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럼 이건 어때? 우리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부모님에 대한 것은?”
문제는 그 과정이 심히 도발적이라는 데에 있었다. 피가로는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어시스트로이드를 쳐다보았다.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시스트로이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시스트로이드는 눈알을 한 바퀴 굴리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피가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면, 기억의 일치성을 확인하는 건 그만두고 다른 주제로 대화할까? 이를테면 사리사욕에 눈이 먼 네가 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속삭이듯 자그마한 목소리에는 조금도 웃음기가 없었다. 어시스트로이드는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의 그림자 속에 자신을 감춘 채 피가로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분명 모든 부분에서 자신과 일치할 텐데, 타인의 시선으로 보니 제법 오싹한 구석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움츠린 피가로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 부분은 이제 됐어. 기억이 온전하다는 건 확실히 알았으니까. 다음은, 그래…….”
피가로는 들어선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정신없이 도리질 쳤다. 직후, 그는 눈에 띄게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피가로는 급히 정리하던 기록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렇게나 잘 만들어졌는데 실험이 끝나면 결국 너를 폐기해야 한다니, 아쉽네. 조수 역할로 곁에 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귀찮은 시사 프로그램에도 대신 내보내고 말이지. 그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자주 생각하던 거잖아, 그렇지?”
“됐어. 쓸데없는 생각은 이제 그만해. 나도 조심할 테니.”
피가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쩌다 이런 골치 아픈 상황이 펼쳐진 건지. 그래도 이 실험으로 얻을 결과를 생각하면 잠깐의 스트레스쯤은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적당히 따끔한 맛을 보는 편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기분은 어때? 너를 만든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아까 너와 나를 통틀어 ‘우리’라는 호칭으로 묶었었지. 네가 보기에 이 실험은 성공한 것 같아?”
“성공이라…… 반대로 네가 내 입장이 되었다면 그런 태평한 소리는 할 수 없었을 거야.”
“빈정거리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역시 너는 너무 안일하고 무모해. 이게 얼마나 위험한 연구인지 너는 모르겠지.”
이제 알았다. 이 어시스트로이드는 원본처럼 연구에 대한 열정이 차고 넘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실험을 망칠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종합해 보면 실험이 실패한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꼭 자신의 내면에 카르디아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깔려있었던 것처럼.
자신이 조금이라도 연구를 부정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단단히 기분이 상한 피가로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 얼굴과 목소리로 나를 책망하는 건 이제 관두지 않을래?”
실험을 마치는 즉시 폐기될 어시스트로이드를 상대로 화를 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알고 있는데도 날카로운 소리가 튀어나갔다.
“나도 이 연구가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 위험성과 앞으로의 방향을 확인하고자 너를 만든 거야.”
“넌 이해가 느리구나. 그게 아니라면, 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러나 본체를 똑닮은 어시스트로이드는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쳤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런 연구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설명한다고 해서 네가 납득할 수 있을까? 위험한 연구라며 손을 떼고 물러나야 한다고 해도,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개선점을 찾아서 연구에 돌입할 거야. 네겐 그만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
“……이래라저래라 시끄럽네. 넌 그저 내 지식과 인격, 기억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기계에 불과해. 어제까지의 나의 기억을 전부 백업하여 연결해두었으니, 목적을 완수하면 파기될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넌 그냥 네가 느낀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알려주면 그걸로 족해.”
그 말에 어시스트로이드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한껏 인상을 썼다. 근처에 자갈이라도 있으면 그러모아 던지고 싶은 얼굴이었다.
“넌 정말 고집스러워.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고 너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면전에 대고 자기 자신을 욕보이다니, 충고해 줘서 고마워. 확실히 내 성격에 개선점이 있을 수도 있겠어. 그건 깔끔하게 인정할게.”
피가로는 신경질적으로 이를 갈며, 결국 과정을 기록하던 디스플레이를 주먹으로 내리쳐 꺼버렸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 스스로 감정을 깨친 것은 좋지만 이렇게 나와 생각이 다르다니, 실험은 절반 정도 실패한 셈이네. 지금부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면 더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어시스트로이드는 말이 없었다. 어쩐지 기괴한 침묵이 이어졌다. 등줄기를 타고 불길함이 올라왔다. 피가로는 고개를 돌려 어시스트로이드를 쳐다봤고, 몹시 당황했다. 어시스트로이드는 이제 적대감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것은 매서운 눈초리로 자신의 본체이자 관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내 판단을 들려줄게. 이런 연구는 사라져야 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돼. 하지만 나는 절대 멈추지 않겠지. 살아있는 한, 계속 이런 금기에 손을 뻗을 거야.”
당혹감 다음에 치고 올라온 것은 희열이었다. 저것은 자발적으로 창조주에 대한 분노를 학습했다. 비록 그 의견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눈앞의 어시스트로이드는 기계로서 자신의 몸에 맞춰 옳고 그름을 따지고 행동을 취했다.
처음부터 폭주를 염려하여 그럴듯하게 구색을 맞추지 않았던가. 만약 자신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어시스트로이드였다면,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저것의 뜻에 동의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평생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뜻밖의 수확을 마음껏 기뻐하기도 전에, 뛰어내리듯 실험대에서 몸을 내민 어시스트로이드가 피가로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니 내가 사라지면 돼. 아니, 너 같은 건 사라져야 해.”
쇳덩어리로 이루어진 무거운 몸이 한순간에 피가로를 덮쳤다. 어시스트로이드는 자신의 몸을 내던져 피가로를 깔아뭉갰다. 움직일 수 없도록 완전히 내리누르고 두 손으로 목을 힘껏 조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고, 부릅 뜬 눈알에 힘이 들어갔다. 크게 벌어진 입술에서 신음 대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갔다.
생리적인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목을 죄이는 힘이 무시무시해서 뼈가 먼저 부러질 것 같았다. 피가로는 혀를 내민 채 헐떡이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산발이 된 어시스트로이드가 꿈에 나올까 무서운 낯으로 또 다른 존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증오와 원망으로 물든 얼굴이 추악했다. 그럼에도 실없는 웃음이 나오는 건 이 결과에 만족하고 있는 탓이다. 물론 실험은 실험이고, 이대로 얌전히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가로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소매에 감춰놓은 셧다운 장치를 건드렸다.
난생처음 겪는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 어시스트로이드는 이변을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 작은 빨간색 버튼을 건드리는 즉시 위에 올라탄 무거운 몸이 무너져내렸다. 구동이 정지된 어시스트로이드를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밀어낸 피가로는 몸을 굴려 옆으로 누웠다. 그는 몇 번이고 잔기침을 터뜨리며 움푹 팬 손자국이 남은 목을 부여잡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하, 하하, 성공, 했어. 성공했다고……!”
짭조름한 눈물과 함께 엉망으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옆에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어시스트로이드가 팔다리가 기이하게 뒤틀린 채 굴러다니고 있음에도, 한 번 터진 웃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피가로는 떨리는 몸을 끌어안고, 꽤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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