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시아 1


아주 먼 옛날, 마법사를 신이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이분이 앞으로 우리 마을을 보살펴주실 새로운 신, 피가로님이시다.”

무두질한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쓴 자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기껏해야 예닐곱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작은 아이는 의젓하게 몸을 바로 세우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결코 주눅 드는 법 없이 고개를 높이 들었다. 서툴게 주위를 둘러보거나 낯선 환경에 당황해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회색 눈동자 속에 자리한 선명한 녹색 동공이 좌중을 휘어잡았다.

이 마을은 북쪽의 다른 마을 못지않게 외지인에게 박한 곳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촌장이 주워온 연고 없는 아이. 누구 한 명 반대할 법도 했으나, 사람들은 홀린 듯이 아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아이의 존재에 완전히 압도당한 것처럼.

“반대하는 사람은, 없어 보이는군.”

등 뒤에 선 사내가 중얼거렸지만, 아이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듯 그저 우직하게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내는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그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아이에게는 신묘한 힘이 있었다. 그건 사람들을 아우르는, 타고난 지배자의 기운이었다.

작은 반발과 소란은 각오했건만, 분위기가 이렇다면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사내는 마음 놓고 아이 앞에 몸을 낮추었다. 고개를 숙인 채 깍지 낀 두 손의 엄지를 이마부터 콧등까지 내리그으며, 아이의 손을 잡고 손등과 검지에 입을 맞추었다. 그 모든 것이 신성한 의식처럼 경건하기 짝이 없었다.

“저희 마을을 잘 부탁드립니다, 피가로님.”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애롭게 미소 짓는 아이는 그 말속에 담긴 의미를 깊이 이해한 듯했다. 촌장은 신의 손을 잡고 머리를 조아린 채, 오랫동안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높은 단상 위의 그들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의식에 동참할 때까지.

어느 날 갑자기 촌장이 마을 밖 설원에서 데려온 아이. 그 아이는 그날부로 한 마을을 책임지고, 가호를 내리는 신이 되었다.

0.

“피가로님, 피가로님. 이렇게 많이 맺었습니다.”

“피가로님의 가호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를 지켜봐 주세요.”

정기적인 시찰 시간, 기다렸단 듯이 피가로의 곁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른과 아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경애하는 신을 향해 인사하고 축복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반면, 마을에서 천한 자들로 경시되는 이들은 차마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피가로님, 저희의 공물을 받아주세요.”

“이것을 받으시고, 저희 가족의 평화를 빌어주세요!”

부모의 뒤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들은 자신보다 작고 어린 아이에게 가져온 것을 깍듯이 두 손으로 건넸다. 아이들이 건넨 것은 작은 열매였다. 진한 붉은색 껍데기에 둘러싸인 열매는 표면이 몹시 거칠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아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시아 열매예요!”

아이의 말에 피가로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마워. 정말 좋아하는 거야.”

피가로가 열매를 받자,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까르르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명랑하고 순수한 웃음이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와 친구들에게 돌아가 신이 공물을 받아주었다며 큰 소리로 자랑했다. 부모는 자랑스러워했고, 친구들은 입을 모아 부러워했다.

너그럽고 온화한 신은 그 어떤 값비싼 패물보다도 아이들이 건네는 작은 열매를 더욱 기꺼워했다. 늘 입고 먹을 것이 부족한 취락에서 음식을 받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겉보기엔 보잘것없는 열매였지만, 아이들이 한 달에 두 번 나누어 받는 귀중한 간식이었다.

무릇 아이란 존재는 충동에 약하다. 타인에게 베풀기보다는 자신의 것을 챙기기에 급급할 나이였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마을을 수호하는 신을 위해 한 치 망설임 없이 제 몫을 바친 것이다. 그 마음이 어찌 갸륵하지 않을 수 있을까.

피가로는 가벼운 손짓으로 아이를 다시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피가로와 눈높이가 맞지 않는 아이들은 얌전히 몸을 낮추고 신의 사랑을 받았다.

그 광경을 본 다른 아이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높고 가느다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노랫가락을 닮았다. 피가로를 둥글게 둘러싼 아이들은 앞길을 막지 않도록 조심하며, 얇은 가지를 흔들어 신에게 바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들 중에는 피가로와 비슷한 연배의 아이도 있었고, 그보다 나이가 적거나 많은 아이들도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자식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피가로님, 부디 은총을 내려주십시오.”

피가로는 걸음을 멈추고, 여자와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타고나길 몸이 약해 걱정입니다. 지금도 달에 한 번 꼴로 앓아눕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이 험한 땅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올해 열 살이 되었다는 아이는 또래보다 작고 왜소했다. 병치레가 잦다는 말이 사실인 듯 표정은 비관적이고, 안색이 초췌했다. 열 살은커녕 그보다 세 살은 어린 피가로와 동갑처럼 보였다. 부모의 손에 끌려 나온 아이는 이만큼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쭈뼛거리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이리 오렴.”

부러 뜸 들일 필요 없이, 피가로는 아이의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을 걷어낸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맞닿은 부위에서 시작된 푸르스름한 빛무리가 넓게 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그 빛은 차가운 색을 띠고 있지만, 매우 따스했다.

아이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가슴 안쪽으로 따뜻한 물결이 넘실거렸다. 기분 탓인지 몸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기도 했다. 피가로는 아이와 똑바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제 아프지 않을 거다. 더는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말려무나.”

“어…….”

피가로의 말을 듣는 순간, 아이의 얼굴에 놀라움과 당혹이 스쳤다. 아이는 오랫동안 비슷한 고민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는 허를 찔린 듯 어쩔 줄을 모르더니, 금방 눈가에 그렁그렁 물기가 맺혔다.

“감사합니다, 피가로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

목재와 동물의 가죽 따위를 얼키설키 뒤섞어 지어놓은 원형 집 안쪽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곳에는 약한 불똥을 튀기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둘러앉아있었다.

불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남자는 몹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병자처럼 창백한 안색은 타오르는 불빛을 받고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 남자는 긴 나무막대를 이용해 타들어가는 장작더미 사이로 잘 말린 산양의 똥을 밀어 넣었다.

“새로운 신님이 마을에 내려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군.”

“처음에는 촌장님이 헤까닥하신 건 아닌지 진심으로 걱정했다니까. 하지만 지금은 촌장님의 선견지명을 높이 사고 있다네.”

불가에 가까이 앉은 두 사람이 노닥노닥 말을 섞고 있으니, 왼쪽 팔에 문신을 새긴 남자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래, 확실히 신님이 오신 뒤로 마을 분위기가 훨씬 안정적이야. 아직까지 별 탈도 없고 말이지.”

그들은 모닥불에 몸을 녹이며 차근차근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덧 대화 주제는 완전히 마을의 새로운 신에 대한 이야기로 기울었다.

“그분의 은총을 받은 아이가 병마를 극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나?”

“남색 지붕 집 아이 말이지? 아비가 늑대 사냥꾼이라던.”

“내가 그 집과 건너 건너 아는 사이인데, 그분의 축복은 실제로 효능이 있다더군. 뭐, 단순히 우연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짐승의 배설물을 집어삼킨 불길이 한순간 높이 치솟았다. 문신을 새긴 남자는 불길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모닥불 위에 적당한 크기의 쇠솥을 올렸다. 금세 열을 흡수한 솥이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축복은 무슨.”

여태껏 조용히 있던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여자는 턱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가 있고, 두꺼운 눈썹과 짙은 눈매를 가지고 있었으며, 양쪽 귀에 얇고 긴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귓가에서 찰랑거리는 귀걸이의 금속은 불빛을 머금고 번뜩였다.

여자는 익숙한 손길로 손질한 고기를 솥에 쏟아부었다.

“그런 편리한 것이 존재할 리 없잖아. 조금 있으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고들 하겠어.”

여자의 빈정거림에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한쪽 눈썹이 없는 남자와 문신을 새긴 남자는 입을 다물었고, 창백한 안색의 남자는 미간을 모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섣불리 말을 얹지 않자, 그는 나서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뭐야, 그레타. 또 자넨가? 자네는 어찌 매번 불만이 그리 많은가? 이럴 거면 촌장님이 신님을 데려왔을 때 반대를 표하지 그랬나? 자네는 그럴 만한 힘이 있을 텐데.”

“그 자리에 없었으면 말도 꺼내지 마. 그 상황에서 반대를 어떻게 표명해? 촌장님께서도 참 제멋대로시지.”

이름이 호명된 여자, 그레타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맞은편에 앉은 붕대로 손을 감싼 여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반대? 웃기는군. 그레타, 자네가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는 것을 내가 다 보았다네.”

“그 입 다물어.”

우스갯소리로 시작된 대화는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열기를 띠었다. 발끈한 그레타가 이를 갈며 성을 냈기 때문이다. 그레타가 내리친 국자가 냄비를 세게 때렸다. 귀가 아플 정도로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내에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 신음하며 귀를 막았다.

“으, 시끄러워.”

“그러게 왜 그레타를 화나게 하나?”

붕대를 감은 여자는 다른 사람의 책망에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은 전혀 잘못한 게 없다는 태도였다. 그레타의 눈치를 보던 이들은 그녀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다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아까보다 언성은 훨씬 낮아진 상태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아이, 신으로서의 자격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우리의 신님께선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 아주 어질고 현명하지. 주술사가 그 아이를 보자마자 넙죽 엎드리는 걸 보았나? 그 사람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걸 다들 알고 있지 않나.”

“확실히 대단한 아이야. 그렇게 작고 약한 몸에 그만한 힘을 품고 있다니, 그야말로 신의 그릇에 적합하다고 할까.”

신에 대한 화두가 오르기 무섭게 냄비를 휘젓던 그레타가 다시 한번 끼어들었다.

“그딴 늙은이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알 게 뭐야? 이미 노망나서 사리분별도 못하는데.”

“이봐, 말조심해. 오늘내일 한다고 해도 우리 마을을 삼십 년간 지킨 수호신이야.”

문신을 새긴 남자가 드물게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러나 그레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지키기는 무슨! 요즘은 그저 명줄만 이어놓은 것도 지켰다고 표현하는군그래? 역할을 다했다고 해봤자 그것도 십여 년 전까지의 이야기지. 그 자는 너무 노쇠했어. 덕분에 우리 마을도 그 자를 따라 명운을 달리하고 있고 말이지.”

그레타는 동의를 구하듯 모여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말했다.

“그 자가 더 강하거나 수완이 좋았으면 우리 마을이 반 토막이 나지도 않았겠지. 지난 수해를 잊은 거야? 예기치 못한 눈보라에 대한 대응은 또 어떻고? 그런 뒷방 늙은이를 믿었다간 결국 얼마 못 가 다 죽고 말 거야.”

여기저기서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들렸다. 표현은 과격했지만 그레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레타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이번에도 수습하려 나선 것은 창백한 안색의 남자였다. 이쪽도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그는 도리어 엄하게 그레타를 나무랐다.

“어허,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얼마 전까지는 자네도 신을 모시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나?”

“신을 내세우자는 것에 동의했지, 외지인을 극진히 모시자는 건 아니었어. 그것도 그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도 모를 고아 녀석을…….”

“거기까지 해.”

그레타의 말을 끊은 것은 그간 어떤 대화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묵묵히 숫돌에 칼을 갈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레타를 노려보았다.

“어쨌든 촌장님이 데려오고 모두가 인정했으니 그분은 우리의 새로운 신님이시다. 그레타, 아무리 너라도 그분을 모독한다면 더는 가만있지 않을 거다.”

그레타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 공백을 메우듯 더욱 강경하게 나섰다.

“가만있지 않는다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네 아들이 신이 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고 해서 그분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 그만두라는 거다.”

“듣자 하니 도저히 못 참아주겠군. 네가 몸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는 있는 거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레타가 남자에게 다가가며 눈 깜짝할 새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당장 싸움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창백한 안색의 남자는 문신을 새긴 남자와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았고, 동시에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잇, 떨어져, 떨어져! 싸우지 말게들! 우리끼리 싸워서 무슨 득이 있다고 이러나? 기가 막혀서 원…….”

다른 사람들이 나서서 중재를 시작한 그때, 마찬가지로 구석에 조용히 있던 노인이 수염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바치는 제물이 부족해서 하늘이 노하신 게야. 우리의 불찰이지. 그래도 그만하면 다행이지 않나. 통째로 잠겨버린 옆 마을에 비하면.”

노인은 가장 나이 든 사람답게 능숙하게 화제를 돌려 달아오른 공기를 갈라놓았다. 덕분에 더 이상 열을 올리며 싸우기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 더 화를 냈다가는 머저리 취급을 받기 딱 좋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레타는 애꿎은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며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당초 그걸 막는 게 신님의 역할 아닌가요? 그걸 못하니까 그 자가 주술사에 불과한 거고. 이 얘긴 이제 됐어요. 공연히 화만 나네요. 그보다 옆 마을에 사람은 언제 파견한답니까? 물에 잠긴 건 잠긴 거고, 아예 떠내려가기 전에 쓸만한 게 있는지 확인해 봐야죠.”

“그 건 말인데, 내가 조금 있다 촌장님을 뵙고 말씀드리지.”

신에 대한 이야기는 그 즈음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마을의 중대사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타는 길었던 식사를 마치고 가장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문신을 새긴 남자가 따랐다. 그레타는 남자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알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남자는 성큼성큼 앞서가는 그레타를 서둘러 따라잡았다.

“신님에 대한 것은? 그레타, 이대로 포기할 텐가?”

“그럴 리가.”

그레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헛웃음을 흘렸다. 그레타는 끝까지 남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남자 또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계속 정면을 바라보며 그레타와 보폭을 맞췄다. 그레타는 가판이 늘어서 있는 거리를 걸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소문을 들었어. 우리의 신님께서 재미없는 마을에 와서 무료하신가 보더라. 말동무가 되어줄 또래의 아이를 찾고 있다고 하던데.”

“촌장은 언제나 강한 주술사의 존재를 간절히 바랐었지. 어떻게든 신님을 마을에 붙들어놓고 싶을 테니, 조만간 자격을 갖춘 아이를 선출하겠군.”

“이보르가 갈 거야.”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나누기도 잠시, 남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자네의 아이가?”

넌지시 눈치를 주었으나, 그레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침 그 애도 똑같이 신의 자격을 갖추고 있어. 놀이 상대로는 그만한 조건이 없겠지. 이보르가 신의 동태를 살피고 교류하며 친분을 쌓을 거야. 새로운 신님이 언제까지고 그 자리를 꿰차고 있지는 않을 테니, 우리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어?”

“설마, 신님을 끌어내릴 셈인가?”

“지금은 아니야. 그것이 가진 힘은 진짜니까. 이용할 수 있을 만큼은 이용해야지.”

“그레타, 자네는 정말…….”

남자는 한숨을 쉬었고, 그레타는 조용히 하라는 듯 턱짓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말을 이었다.

“멀쩡한 아이를 신당에 밀어 넣겠다고? 부모와 떨어져 지내기엔 아직 어리지 않은가. 게다가 그 아이는 상당히…….”

그레타는 상대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내 아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유약하기 짝이 없던 제 아비를 닮는 건 용납 못 해.”

“하아…….”

이렇게까지 나오면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남자는 더 이상 권유하지 못하고 혀를 찼다.

“그레타, 자네는 참 잔인한 부모야.”

“알고 있어.”

*

얼마 뒤, 한 아이가 신당에 보내졌다. 이제 막 열셋이 된 이보르는 짙은 적갈색 머리에 두꺼운 눈썹, 그리고 짙은 눈매를 가진 소년이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똑 닮은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신을 모실 종자이자 말동무로 발탁되었다.

신의 곁에서 배움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차고 넘치게 많았으나, 다른 아이들은 이보르만큼 부모의 배경이 좋지 않았다. 비록 부모에 의해 떠밀리듯 오게 되었지만, 이보르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무척 만족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을을 보우하시는 신님을 돕는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다니,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복잡한 어른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보르의 가슴은 그저 동경과 설렘으로 하염없이 부풀어 올랐다.

신이 거주하는 신당은 마을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신당의 벽과 지붕은 늙은 고목나무와 커다란 돌로 지어졌고, 내부는 동물의 가죽과 털로 덮여있었다.

무성한 자연 속에 놓인 신당은 정령들과의 친화력을 높일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북풍이 거세게 불고, 계절을 막론하고 눈과 얼음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출입이 허락된 몇몇 사람들은 일정한 주기마다 언덕에 올라 신당을 관리했다.

이보르는 입구를 지키는 사제들과 인사를 나누고, 예스러운 장식이 놓인 복도를 지나쳤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면 마침내 신을 배알할 시간이었다.

그들의 신은 시찰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사슴 가죽으로 만든 겉옷을 두르고, 곱슬기가 도는 머리카락을 풀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푸른 머리카락은 섬세한 손길로 땋아 장식을 달았다.

“아…….”

“…….”

저도 모르게 멍청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피가로는 이보르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범인으로선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신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이보르보다 세 뼘 가까이 작았고, 체구가 아담해 마치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조그마한 인형처럼 보였다.

실제로 본 신은 사랑스러웠다. 아니, 단순히 사랑스럽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고작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이기 이전에, 그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피부가 눈처럼 희고, 이목구비는 뚜렷하며 오밀조밀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난생처음 보았다. 마을에서 내로라하는 여인들조차 아이 앞에서는 얼굴을 내밀지 못할 정도였다.

피가로는 얇은 얼음으로 뒤덮인 것처럼 표정이 없었다. 그 얼굴은 같은 사람으로서의 감정이 결여된 듯했다. 이보르는 피가로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새하얀 얼굴에 자리한 밋밋한 표정은 매력을 반감시키기는커녕, 그로 하여금 내면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끓어오르게 했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을까. 피가로는 이보르를 향해 약하게 손짓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보르는 고개를 숙이고 허둥지둥 피가로의 앞으로 뛰어갔다. 상대는 간신히 허리에 닿을 정도로 작은 아이였지만, 모두를 단숨에 휘어잡던 기묘한 눈빛 때문인지 몸이 저절로 숙여졌다.

많은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피가로는 연신 꾸벅거리는 이보르를 바라보며 오른발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이보르는 그 의미를 바로 이해했다. 그는 바닥에 코가 닿을 정도로 납작하게 엎드려 신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의 신, 피가로님께 예를 다합니다.”

“그래.”

피가로는 당연하게 인사를 받았다. 행동처럼 느리고 우아한 어조였다.

“이야기는 들었다. 네가 그 아이구나.”

피가로의 발은 그의 몸집만큼이나 무척 작았다. 이보르는 가죽신으로 덮인 발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허락을 받기 전까지는 몸을 일으켜선 안 될 것 같았다. 어떤 감에 이끌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문득 목덜미에 솜털이 곤두서며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맹독을 가진 뱀이 발밑을 기어다니는 듯한 감각이었다. 이보르는 벌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피가로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보르는 신과 같은 태생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눈앞의 아이가 자신과 같은 자격을 타고났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피가로는 이보르를 위협하거나 그에 준하는 행동을 무엇 하나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보르는 크나큰 불경을 저지른 것처럼 머리를 한껏 낮추어야만 했다.

이마와 등짝에 땀이 흠씬 배어났다. 이보르는 짧은 시간 동안, 결코 좁혀질 수 없는 힘의 격차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마을의 운명을 등에 업은 우리의 수호신. 위대한 자연과 강력한 침입자로부터 백성들을 지키는 상서로운 존재. 아주 작은 아이에게서, 차마 들여다보지 못할 정도로 까마득한 연륜이 느껴졌다.

압박감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이보르는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허덕이며 상체를 깊이 수그렸다.

“이름이 무엇이냐.”

“그레타의 아들, 이보르. 이보르 가르시아라고 합니다.”

같은 주술사의 혈통을 타고났어도 가지고 있는 힘은 천차만별이었다. 현재 이보르는 마을에서 가장 강한 주술사였다. 어느 정도냐면, 마을을 삼십 년간 지켜온 주술사 할아범보다도 정령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덜 자란 육체와 실전 경험으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차기 신 후보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아왔다. 그런 이보르에게 어머니인 그레타는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피가로가 가진 힘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주술사 할아범은 물론, 이보르조차도 신님이 가진 지고한 힘을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별것 아닌 손짓 하나로도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절대 거슬러선 안 된다. 같은 주술사이기에, 눈앞의 아이가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지를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피가로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보르 스스로 그 사실을 깨닫기를 바랐던 것 같다.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머리맡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도 좋아.”

시야가 흐리고 어지러운 가운데, 피가로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귀에 파고들었다. 이보르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불편한 자세를 취한 탓에 관절이 온통 시큰거렸다.

꼼짝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이보르 앞에, 이번엔 피가로가 쪼그리고 앉았다. 옷에 생긴 구김살이 현실감을 더해주었다. 피가로는 가만히 이보르를 바라보았고, 그는 더 이상 노골적인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나름의 각오를 다진 이보르는 조심스럽게 피가로를 마주했다. 그제야 숨소리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얼음조각처럼 무덤덤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한순간에 따스한 봄볕처럼 풀어지는 고운 얼굴은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피가로는 이보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쳐내지도, 붙잡지도 못한 채 쩔쩔매고 있을 때였다.

“넌 순하고 다정한 아이구나.”

이보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부드러운 촉감과 온기가 얼굴에 닿는 순간, 주눅 들어 축 늘어진 어깨가 가늘게 요동쳤다.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눈높이를 맞춘 신이 이보르의 뺨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다친 상처를 감싸듯 쓰다듬는 아이의 손은 작고 보드라웠다. 그 손길은 언제나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어머니의 손길보다 몇 배나 더 자애로웠다.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신님이라 해도 그렇지, 자기보다 훨씬 어린 아이에게서 이런 안정감을 느끼다니.

“이보르,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러나 신이라는 자리가 허투루 있는 게 아니듯, 피가로에게는 무심코 기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이보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피가로의 손아귀에 몸을 내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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