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ㅅㅇ 02


이번에도 임시제목. 나중에 몰아서 수정함.

“하여간 연장자에 대한 존중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연장자요?”

“아무것도 아니야.”

파우스트는 대차게 콧방귀를 뀌었다. 제대로 입 간수를 못하는 건 스승이나 제자나 똑같았다. 자기 정체를 숨길 생각이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플로레스 형제에게 위태로운 거짓말을 이어가는 피가로를 보고 있으면 절로 쓴소리가 나온다.

“또 그렇게 말 돌리시고.”

“사소한 건 넘어가자. 피가로 선생님, 오랜만에 외출해서 피곤하단 말이야. 미틸도 그렇지, 응?”

“그건 그렇지만…….”

“자자, 위층으로 올라갑시다.”

피가로는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미틸의 등을 복도 쪽으로 밀었다. 어떻게든 방으로 보내서 곤경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피가로의 일 처리 방식은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다.

스스로 놓은 악수로 점점 더 궁지에 몰리는 피가로를 관망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레녹스가 잊고 있던 게 떠오른 사람처럼 피가로에게 다가갔다. 피가로 곁에 가까이 다가선 레녹스가 고개를 숙였다.

“피가로 선생님, 오늘은 방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본능적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레녹스는 덩치에 비해 조곤조곤 나직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니, 반대다. 덩치 때문에 오히려 그런 버릇이 생겼을 수도 있다.

어딜 가도 절대 꿇리지 않는 덩치를 가지고 있는 레녹스는 옛날부터 종종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사고는 했다. 빈말로도 싹싹하다곤 못하겠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말은 안 해도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파우스트가 상념에 잠겨있는 동안 피가로는 레녹스를 가볍게 밀어냈다.

“됐어. 그럴 필요 없어.”

간단히 밀려났던 레녹스는 거듭 피가로 옆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피가로 선생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물을 길어오면…….”

속삭이는 목소리는 몹시 작았다. 피가로는 쯧 혀를 찼다. 레녹스의 고집스러운 성미가 그를 자극한 것이 틀림없었다.

“너까지 왜 이래? 네가 부채감 느낄 필요 없대도. 그리고 이 모습 그대로면 뭐가 어때서?”

“아무래도 곤란하죠. 아이들도 있고.”

“그럼 사람 없을 때 맞춰서 움직이면 되지. 그만큼 힘이 남아돌면 네가 망을 보면 되겠네. 존경하는 피가로 선생님을 위한 일이잖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피가로는 자연스럽게 도발을 던졌고, 레녹스는 익숙한 듯 무던하게 받아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한쪽 눈을 감은 피가로가 레녹스의 단단한 가슴을 툭툭 쳤다.

“넌 과하게 성실해. 그런 점이 여자들을 끌어들이는 거겠지. 좋겠어,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인기남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레녹스는 피가로의 칭찬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흔들었다.

어쩐지 대화 내용이 묘했다. 이대로 계속 엿듣고 있어도 되는지 의심이 들었다. 아이들이 자리에 남아있는 만큼 못 들을 소리를 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크게 떠들만한 화제도 아닌 듯했다. 쳐다보고 있으니 기이한 기분이 든다.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순간을 엿본 듯한…….

말을 걸 타이밍을 놓친 파우스트는 뜸을 들이다가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그는 친밀하게 스킨십을 하는 두 사람을 향해 크게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애써서 사회성을 발휘할 필요는 없었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알아챈 두 사람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기 때문이다.

“왜 그래, 파우스트. 할 말 있어?”

“아니, 딱히 그런 건…….”

눈을 맞추는 피가로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피가로는 몸을 배배 꼬며 흘러내린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연신 만지작거렸다. 미안하지만 무엇을 바라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말로 해주면 좋을 텐데.’

파우스트는 복잡한 시선으로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피가로에게 씐 저주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다. 오즈의 말마따나 피가로쯤 되는 마법사라면 직접 저주를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피가로가 만전의 상태라면 말이다. 직접 말을 하진 않았으나,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마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얼마 전, 네로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마법사는 어떤 식으로 늙어가지? 육체가 나이를 먹기 시작하는 건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돌로…….’

‘그러네. 내 지인의 이야기로는 이런 느낌이래.’

네로는 팔을 휘적거렸다. 그치고는 열성적인 설명이었다.

‘어째선지 마력을 잘 쓰지 못해. 처음에는 어떻게 된 거지, 하고 당황하고 말겠지. 그런데 또 그런 날이 오는 거야. 마법을 못 쓰게 되는 날이, 못 쓰게 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 계속 늘어나다가 이윽고 열흘에 한 번, 사흘에 한 번이 돼.’

당시 파우스트는 마법을 쓰지 못해 당황하는 피가로의 모습을 무심코 머릿속으로 그렸다가 다시 지웠다. 그런 공상을 하는 것을 피가로는 원하지 않을 터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자존심 세고 고상한 사람이니까.

역시 설명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많이 보고 겪었음에도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한때 손에 잡힐 듯 가까웠던 것이 지금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피가로는 현자를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현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에도 제멋대로 활개치는 저주를 내버려두고 있었다. 오즈의 생각과 달리 피가로는 저주를 풀지 않는 것이 아니라 풀지 못하는 것이다.

‘설마 그 정도로 약해졌을 줄은 몰랐는데.’

한 번 크게 데여 실망했을지언정 파우스트에게 피가로는 언제나 강하고 대담하며 한 치 흔들림 없이 아름다운 귀인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 믿었던 존재가 이제는 날개를 접고 기나긴 여행을 마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자꾸만 현실을 부정하게 되었다.

“해주를 거들까?”

파우스트는 옆에 있는 레녹스를 의식하여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피가로가 움츠리고 있던 허리를 곧게 폈다. 친애하는 제자 앞에 선 그는 직전까지 오만 내숭을 떨며 약한 척을 하던 것이 거짓말처럼 늠름한 자태를 뽐냈다.

“괜찮아. 어차피 하루 정도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야. 대신 저주를 감당했기 때문인가, 현자님도 웬일로 응석을 잘 받아주고…… 오늘은 이 상황을 즐겨야지.”

파우스트는 이맛살을 깊게 찌푸렸다. 피가로 답다고 해야 할까. 대화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바로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자신의 삶의 방식에 의문은 없는 건가.”

“아아~ 지겹다, 그 얘기. 이미 다른 사람한테 들었어. 그러니 잔소리는 그만.”

그러거나 말거나 피가로는 깍지 낀 두 팔을 길게 펴면서 기지개를 켰다. 늘씬한 팔다리를 쭉쭉 늘리는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파우스트는 헛기침을 하며 흘러내린 안경을 손끝으로 추켜올렸다.

오즈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아직도 벌어진 옷깃을 여미지 않았다. 필시 잊어버렸으리라.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달래듯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대로 파우스트를 지나친 그는 꽃에 이끌리는 벌처럼 팔랑팔랑 현자에게 달라붙었다.

“있지, 현자님. 같이 목욕하지 않을래? 모처럼 같은 여자끼리…….”

“미쳤어욧?”

“피가로, 당신 진짜 제정신이야?”

“피가로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방에서 매서운 일갈이 터져 나왔다. 덕분에 고막이 터져나갈 뻔했다. 사방에서 도끼눈을 뜬 사람들이 피가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부러 헛소리를 늘어놓고 반감을 사는 건 익숙하지만, 이 정도로 차가운 눈빛은 오랜만이었다. 화들짝 놀라 귀를 틀어막은 피가로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툴툴거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게까지 정색할 건 없잖아. 나도 농담이었어.”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농담을 하시네요.”

*

정신이 아찔해지는 농담―과연 정말로 농담이었을까?―을 마지막으로, 파우스트는 남쪽 마법사들과 헤어져 위층으로 향했다. 막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데, 네로가 쭈뼛거리며 뒤를 따랐다.

네로의 방은 파우스트보다 한 층 낮은 3층에 위치해있다. 평소 주방과 방을 제외한 어디로든 돌아다니는 것을 꺼리는 그가 늦은 저녁에 위층으로 올라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거기까지 추론한 파우스트는 층계에 한 쪽 발을 올리고 기다렸다.

“이봐, 선생.”

아니나 다를까, 네로는 파우스트에게 볼 일이 있었던 거였다.

“네로, 별일이네. 네가 이 시간에 돌아다니고.”

“아래층이 워낙 소란스러워야지.”

음, 솔직히 맞는 말이다. 파우스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네로가 모호하게 웃었다. 네로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한참을 꾸물댔다. 곧장 본론을 말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네로의 모습은 익숙하지만, 오늘은 살짝 정도가 지나쳤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저기, 서쪽 마법사들이 오늘 밤에 재미있는 걸 한대.”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네로가 말을 꺼내는 것을 주저했던 이유를 알았다. 파우스트는 미간을 모았다.

“언제부터 서쪽 마법사와 어울리는 취미가 생긴 거야.”

“그거야말로 오해야! 아까 샤일록의 바에 갔다가 우연히 들었을 뿐이야.”

네로는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귓가에 소곤거렸다.

“아무래도 우리 관계를 들킨 것 같아.”

예상치 못한 말에 파우스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쩌다가…….”

“모르겠어. 엿보기라도 한 건가?”

“공공장소잖아. 안 될 건 없지. 야심한 시각이니까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방심했어.”

“나도.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몸을 밀착한 두 사람은 진지하게 피드백을 나누었다. 여기서 말한 두 사람의 관계라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관계를 들켰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니 제법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봤자 같은 취미를 나누는 동료에 불과했다.

동쪽 마법사 무리의 연장자 두 사람은 종종 늦은 밤에 모여 함께 ‘무언가’를 즐기곤 했다. 그 ‘무언가’란, 아무도 없는 욕탕에서 입욕제를 풀어놓고 뜨끈하게 몸을 지지며 맛있는 술과 안주를 즐기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재워놓고 부부끼리 몰래 즐기는 약주처럼 말이다.

“일단 무작정 아니라고 발뺌했는데, 믿는 눈치가 아니었어. 그러다가 뭐, 그렇게 된 거지.”

파우스트는 음흉하게 웃고 있는 서쪽 마법사의 면면을 떠올리며 표정을 굳혔다. 서쪽 마법사 녀석들, 진작 알아차렸으면서 여태 내색하지 않은 건가? 하여간 한 해 가까이 알고 지낸 지금까지도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쪽에서 ‘재미있어 보이니 우리도 함께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해서 말이야. 거절하면 당분간 귀찮게 굴 것 같고…… 앞으로 몇 번이고 고생하느니 차라리 한 번 깔끔하게 어울려줄까 싶어서 말이지. 대신 이번에 해보고 별로면 다음부터는 성가시게 굴지 않겠다고 하더라.”

자고로 서쪽의 마법사란 우르르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남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었다. 그 치들이 용케 자기들이 성가시게 군다는 자각이 있구나. 파우스트는 엉뚱한 의미로 감탄했다.

“협박당한 건가?”

“협박까진 아니라고 생각해. 이상한 소문이 나는 건 딱 질색이지만…….”

따로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말끝을 흐린 네로가 뒤늦게 덧붙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어.”

“그걸 믿어?”

찌푸려진 파우스트의 미간은 도무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네로는 보기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고 해야 할까. 당당하게 남의 답안지를 컨닝하거나 시험지를 훔치는 둥, 약삭빠르게 굴다가도 가끔은 한없이 순수해 보였다.

불필요한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그러했듯 언젠가 그 마음이 배신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 쓰였다.

“네로.”

파우스트는 네로를 측은하게 쳐다봤다.

“혹시 누가 행운의 물건이랍시고 반지 같은 걸 주면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해도, 절대 그 사람을 따라가거나 마음을 줘선 안 돼.”

“악담이야? 그냥 사기당하기 좋을 상이라고 대놓고 말하지 그래?”

입 밖에 낼 수는 없지만 비슷한 경험이라면 이미 해봤다. 파우스트는 때때로 잘 벼린 칼날처럼 매서운 감을 나타냈다. 그가 자신의 비밀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이런 순간이 오면 본능적으로 당황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도둑이 제 발 저린 셈이다.

“아무튼, 선생은 오늘 안 올 거야? 그쪽에 말해둘까?”

“아니…… 됐어. 이번 한 번 만이라면 경험해 보지 못할 것도 없지.”

파우스트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서쪽 마법사와 가능하면 얽히고 싶지 않다는 그의 바람을 흔들어놓은 건 다름 아닌 의리라는 감정이었다. 파우스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금일 저녁 네로의 참여는 피해 갈 수 없는 듯했다.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은 서쪽 마법사에게 소극적인 동쪽 마법사는 한 끼 식사에 가깝다. 그런 하이에나 무리에게 혈혈단신으로 네로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또는 동료나 친구로서도 그건 옳지 않은 행동처럼 느껴졌다.

늘 그렇듯 파우스트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용기를 북돋았다.

“그럼 한 시간 뒤에 욕탕에서 보자.”

“아아, 준비하고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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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노랑 파우스트 심각한 얘기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안 친한 친구무리가 와서 놀아달라고 했다는 소리 하는 게 너무 내향인통을 불러와요…
    오늘도 재밌게 보고 가요
    도부가로 도부가로 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