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추운 해변가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눈사태로 고향을 잃고, 쌍둥이를 만나기 전이다. 어째서 그곳을 거처로 정했을까.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드러난 살갗을 칼날처럼 베고 지나가는 바람에 위로를 받았던가. 높게 솟은 파도가 암벽에 부딪치는 소리를, 파도가 일으키는 하얀 포말을 좋아했던가. 평화롭고 고요한 수면이 마음에 들었나.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수평선을 온종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의 기억은 소복이 쌓인 눈에 살포시 덮여있는 것 같다. 자세히 떠올리려 해도 어디선가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묻혀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바다를 좋아했느냐 하면 애매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을 싫어했던 것 같다. 특히 몸을 덮을 정도로 수북하게 쌓이는 눈은 질색이다.
북쪽은 사시사철 춥고 날씨가 나빠서 어디든지 눈이 많이 쌓였다. 새하얀 옷을 입은 나무에 서리가 맺히고, 튀어나오고 굴곡진 장소마다 성에꽃이 피었다. 언덕이나 산등성이엔 연약한 사람 몇 명 정도는 족히 잠겨버릴 정도로 두툼한 눈더미가 쌓였다.
해변가에 살아서 좋은 점은 그런 것이다. 바다에 내리는 눈은 쌓이지 않고 녹아버린다. 깊고 푸른, 얼어붙은 파도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쌓이지 않고 섞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끔은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쌓인 눈보다는 녹은 물이 낫다. 그저 녹은 것보다는 흐르는 것이 낫다. 꽤나 단순한 흐름이었다.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는 마당에 이만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이유였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을 축복하면서도 막연히 끝을 상상했다. 마법사들이 흔히 받는 예감이었다. 사람은 너무나 약하고 덧없으니까, 결국은 혼자 살아남을 거라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홀로 남겨질 거라고.
그래도 먼 미래라고 믿었다. 언젠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겠지만, 적어도 백 년은 끄떡없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갑작스럽게 그날을 맞이하고 말았다.
열린 옷깃으로 찬바람이 파고드는 것처럼, 가슴을 에는 듯한 외로움이 몰아쳤다.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보답하지 못한 좌절감도, 북받치는 슬픔도, 고독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든 좋으니 모자란 자신을 감추고 싶었다. 다시는 꺼내볼 수 없도록 깊이 묻어두고 싶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얼어붙은 바다에 몸을 담근 채였다. 나아가는 방향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새하얀 길이 펼쳐져 있었다. 넓게 번져 좁혀지지 않는 길은 방황하는 영혼에 꼭 선물처럼 느껴졌다.
어떠한 확신을 갖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텅 빈 그릇을 채우기 위해서.
“아이야, 무엇을 하고 있니?”
걸음을 멈춘 것은 누군가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물기가 스며든 눈꺼풀이 무거웠다. 대체 언제부터 눈을 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선명하게 들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물놀이를 하기에 적당한 시기는 아닌 것 같구나.”
눈앞에 똑 닮은 쌍둥이가 있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 그대로 묻어들 것 같은 아이들은 그를 보며 샛노란 눈동자를 번뜩였다. 아득한 밤바다를 배경으로, 짐승 같은 두 눈이 유난히 밝게 빛났다.
제대로 들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대답할 형편이 못되었다. 당장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헷갈렸다.
물이 들어간 건지 젖은 귀가 먹먹했다. 목덜미를 스치는 싸늘한 바람에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쌍둥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들리지 않는 것 같군.”
“가는 귀가 먹은 건가.”
소란스럽게 구는 쌍둥이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정신이 들자 잊고 있던 추위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얇고 긴 바늘로 몸을 연달아 찌르는 듯했다. 물 밖에 있는 상반신은 아찔한 통증이나마 느꼈지만, 완전히 잠긴 하반신은 한참 전부터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가슴 안쪽까지 물이 찬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고, 뻣뻣하게 굳은 얼굴은 당장이라도 돌 조각이 되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다.
끔찍한 통증이 뇌를 마비시키는 와중에 이가 딱딱 부딪쳤다. 늘 그렇듯 마법으로 경감하면 되겠으나, 지금은 가벼운 마법 하나 사용하기가 버거웠다. 고향이 눈사태에 휩쓸린 뒤로 정령을 제대로 다룰 수 없게 된 탓이다.
비틀거리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고르지 않은 모래바닥과 출렁이는 물살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릴 때였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쌍둥이가 불쑥 몸을 들이밀었다.
“정녕 끝까지 갈 셈이냐.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게야.”
“운 좋게 도달한다 한들, 저곳에 바라는 건 존재하지 않을 거다.”
강행군을 말리고 싶은 것처럼,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말리는 사람치곤 발랄한 어조였다.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광경이다. 야밤에 물에 빠진 채 하늘을 나는 어린 쌍둥이의 걱정을 받고 있다니.
“가고자 한다면 막을 순 없지만, 역시 아깝구나.”
“우리가 그보다 더 좋은 걸 줄 수 있는데.”
뒷짐을 진 쌍둥이가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러더니 재미있는 장난이 떠오른 것처럼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내다버릴 목숨이라면 우리를 따라오지 않으련?”
“괜찮다면 아주 잠깐 변덕스럽게 사랑해 주마.”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쌍둥이를,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은빛 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달은 요사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것을 목표로 향하고 있었나. 일순 아연해진다. 이렇게 망설이는 지금도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지만, 머리끝까지 꽁꽁 얼어붙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대답은?”
아이의 손이 뻗어와 뺨을 감쌌다. 물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밀어내고 차갑게 언 맨살을 문질렀다. 펑퍼짐한 케이프가 바람에 날려 한순간 시야를 가렸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두 쌍의 눈동자는 저 달만큼이나 차가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무심코 기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묘한 박력이라고 할까. 저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감상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로 하여금 믿고 따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스스로 원해서 발을 들인 주제에 이제 와서 후회하고 살기를 바란다니. 돌이켜보면 우스운 일이나, 그때는 복잡하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따라, 갈래요…….”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요. 데려가 주세요. 제발.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 마디 내뱉었다. 사실은, 엉망으로 갈라진 말 대신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앙 다문 입 안쪽으로 소리가 되지 못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 말을 기다렸단다.”
또래 어린아이 같은 짓궂은 미소는 자상한 미소로 대체되었다. 부드럽게 귓가를 어루만진 아이는 곧 키 큰 어른으로 변모했다. 길쭉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뺨을 감싼 손은 턱 전체를 덮을 정도로 커졌다.
달을 등진 사내는 눈부신 빛을 발했다.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신비로운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훌쩍 커진 사내는 옷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직접 물속에 들어와 잠긴 그를 끌어올렸다. 새파랗게 질려 굳은 몸을 상냥하게 안아 올렸다.
살얼음 낀 머리칼이 뺨에 달라붙고, 뒤집어쓴 바닷물이 얼굴 옆선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닿는 물기는 찝찔한 맛이 났다.
사내가 빛을 가린 탓일까. 어느새 아름다운 달의 길은 흐릿하게 지워져있었다. 남은 건 시커멓게 일렁이는 수면뿐이다. 어둠과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검은 바닷물은 당장이라도 발목을 잡고 끌어내릴 것 같았다.
무슨 생각으로 이 차디찬 물에 몸을 담근 건지.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역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혹여 다시 물에 빠질까,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당겼다. 사시나무처럼 떨며 사내의 옷깃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러자 머리맡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둥실 떠오른 아이가 젖은 눈가를 훔쳐냈다.
“많이 추웠겠구나. 집에 가면 갓 데운 우유를 내어주지.”
고개를 숙인 아이가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췄다. 보나 마나 추한 몰골을 하고 있을 게 뻔한데, 쌍둥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서슴없이 끌어안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를 좇아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마법을 걸었는지 계절에 맞지 않는 훈풍이 불었다. 그제야 비로소 떨림이 잦아들었다.
지금까지 항상 수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대신 들어주는 역할이었다. 저를 필요로 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자비라는 이름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 생의 이유라고, 그것을 해내지 못한 이상, 누구도 원치 않는 불량품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난생처음, 타인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안도감에 맥이 탁 풀리며 전신이 느른해졌다. 물먹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얼핏 빗자루 같은 것을 본 것 같다.
단단히 받쳐주는 가슴팍에 기대어 칭얼거리던 것. 부끄럽게도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미 들은 얘기지? 방금 들은 말을 다시 설명해 봤자 지겹기만 할 테니 그 부분은 생략할게.”
마지막이 될 뻔한 순간에 조우한 인형처럼 아름다운 쌍둥이.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같은 사람 답지 않은 분위기까지. 누가 봐도 저승사자 같은 점이 흥미로웠다. 쌍둥이는 오래전부터 그랬다. 유구한 삶 속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모습을 늘 선호해왔다. 어느 정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오즈와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른대로 말할 순 없다. 그랬다간 그놈의 ‘물에 왜 들어간 거냐’라는 질문부터 다시 시작할 테니까. 오즈는 보기보다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화제를 피하고 싶거든 처음부터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쌍둥이 선생님의 말 대로야. 까고 보면 못 미더운 구석이 많지만, 두 분과 지내는 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어. 운 좋게 눈에 들어온 덕에 편안한 나날을 보냈지.”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에 쌍둥이 선생님이 인자하게 웃었다.
“피가로야, 말에 가시가 있구나.”
“그만하면 충분하지. 정말이지 바라는 것도 많구먼.”
“뭐, 우유에 꿀 타주셨으니 용서할게요.”
“어쩜 우리 제자는 마음도 넓어.”
“뭘요.”
이 모든 꼴값을 지켜보는 오즈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얼굴이다. 그게 또 웃겨서 웃음이 났다. 피가로는 이상함을 느낀 오즈가 불만을 표출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앞에선 자기 좋을 대로 말했지만, 미담만 있지는 않아. 너도 알다시피 두 분은 인망이 없잖아. 힘으로 찍어 누르는 법만 알지, 어르고 달래는 데에는 영 재주가 없거든.”
“이런 불초 제자를 보았나.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땐 언제고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구나.”
웬일로 칭찬을 하나 했더니 칭찬 한 마디에 욕을 서너 마디를 박아버린다. 그래, 이래야 피가로지. 이제야 험난한 북부에서 살아남은 우리의 제자답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로 알고 지낸 기간이 기간인지라, 아주 약간의 힌트만 있어도 두 사람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뭐, 안다고 해서 반드시 신경 쓸 필요가 있나. 피가로는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오즈, 들어봐. 네가 거처를 옮긴 뒤에 말이야. 저 사람들, 자기들보다 강해진 네가 복수하러 올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거 알아? 집 결계도 강화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고.”
오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뜬 채 스노우와 화이트를 쳐다봤을 뿐이다. 그 눈빛이 마치 사실이냐고 묻는 듯하다. 지레 찔린 쌍둥이는 “뜨끔.” 소리를 내며 목덜미를 움츠렸다.
“정말 너무하지. 제자에 대한 믿음이 그 정도로 없다니. 오즈가 얼마나 마음이 약한데 그것도 모르고. 이러니까 오즈가 두 분을 안 따르는 거예요.”
“너는 뭐 잘 따르는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그래그래, 화이트 말이 다 맞다. 피차 같은 처지에 야멸차게도 구는구나!”
“시끄럽다.”
나란히 언성을 높이던 세 사람은 오즈의 말에 약속한 것처럼 합죽이가 되었다. 명령하는 목소리가 어찌나 냉랭한지, 지팡이가 바닥을 찧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방금 얘기나 계속해.”
아까부터 간당간당하던 오즈의 기분이 확연히 나빠졌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핀 피가로가 말을 돌렸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어. 싫다는 사람 붙잡고 강제로 인형 놀이를 하지 않나, 멋대로 이상한 버릇을 주입시키고, 낮이고 밤이고 마구잡이로 찾아와 피부가 벗겨질 때까지 쓰다듬었지. 자기들만의 규칙이 엄격해서 복장은 물론이고 머리도 내 멋대로 못 잘랐어.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전부 다 허락 맡고 해야 했는데, 그게 또 얼마나 번거로운지…… 내 몸이라기보단 저 치들 소유물에 가까웠지.”
“지금 우리의 미감을 욕하는 겐가.”
“예술인으로서 그것만은 참을 수 없구나.”
옆에서 불만이 쇄도했으나, 과감하게 무시했다.
“취향에 안 맞는 옷을 입혀지며 장난감 취급당한 건 참을 수 있어. 애초에 두 분 상대로 존엄성이 지켜지길 기대한 적도 없었고. 하지만 다짜고짜 마수의 소굴에 던져졌을 때엔 진짜 이대로 죽는 거 아닌가 싶었지. 마수가 무리를 이루는 일이 드물어서 그런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네. 꽤 강한 녀석들이었는데…… 아, 그런 점은 브래들리를 닮았군.”
“하다 하다 말 못 하는 금수에 빗대다니…….”
“그 아이가 들으면 화내겠구나.”
“그만큼 리더십이 있다는 거죠. 전 칭찬한 거예요. 의도를 곡해하지 말아주실래요?”
“누가 뭐라니.” 쌍둥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는 폭로전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너처럼 빙산에 갇힌 적은 없지만 설원 한복판에 버려진 적은 있어. 알아서 자급자족하면서 한 달을 먹고살았지. 누군가를 돌로 만든 것도 그때가 처음이야. 당시엔 가진 마력에 비해 어리고 미숙했으니까 누군가 냄새를 맡고 온 거겠지.”
“저들은 심부름이라고 했다.”
“심부름은 무슨, 그냥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한 거지. 가까스로 이겼지만 출혈이 많아서 방금 죽인 녀석의 뒤를 따라갈 뻔했어. 스승이고 나발이고 그때는 진심으로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
“기억이 안 나는구먼.”
“하하, 뭐 만날 기억 안 난대. 참 편리한 변명이네요. 누구처럼 영혼이라도 깨졌어요?”
“영혼 대신 사람은 깨졌단다.”
“시끄럽다고 했다.”
뒤쪽 카운터에서 우당탕, 물건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심하다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화이트의 썰렁한 농담 때문에 서리가 풀풀 내렸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선. 스노우가 피가로에게 책망의 눈빛을 보냈다. 도대체 누가 누굴 나무라는 건지. 솔직히 억울했다.
“내가 처음으로 같은 마법사를 사냥해서 얻은 돌말이야. 생각해 보니 그것도 뺏어 먹었구나. 일종의 중개 수수료 같은 거라면서 말이야.”
“악질이군.”
번갈아가며 골고루 핀잔을 주던 오즈가 처음으로 피가로의 편을 들었다. 오즈는 누군가의 전리품을 허락 없이 가로채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비슷한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들끼리 통하는 감성이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즈에게 두둔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덕분에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좀 풀리는 것 같다. 애초에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지만.
쌍둥이의 훈육 방식은 북부의 마법사답게 거칠었다. 아니, 단순히 거칠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지독하고 고약하며 악랄하고, 순 제멋대로에 강압적이었다. 저 중 한두 가지만 있어도 혀를 내두를 판에 통제광스러운 면모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정말 그뿐이었다면 진작 도망쳤을 것이다.
“그래도 난 두 분과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었어. 혼자 살기가 죽기보다 두려웠거든.”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공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는 백성들을 보면서, 내가 그들에게 더 의지가 되는 모습이었으면 어땠을까 종종 상상하곤 했다.
이런 어린아이가 ‘신’이라는 것은 보통은 믿기 힘들 것이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극복하여 한시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먹구름처럼 드리운 사람들의 불안을 걷어내고, 영원한 믿음을 약속하고 싶었다.
영원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을 이루던 모든 것이 새하얀 눈에 파묻혔을 즈음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한참을 방황했다.
방황은 지긋지긋하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부표처럼 떠다니는 삶에 회의감을 느꼈다. 목숨에 가치를 매길 수 있다면, 자신은 한없이 고귀하면서도 한없이 비천한 존재일 것이다. 살아있기엔 죄스러웠지만, 그래도 아직 더 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뜻 손을 내밀어 준 쌍둥이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다. ‘우리가 더 좋은 걸 줄 수 있는데.’ 그 말대로 그들은 가족의 따뜻함과 낯선 행복을 가르쳐 주었다.
죽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남을 위해 살아가자. 소중한 이들이 살아있을 동안, 못다 한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자. 그 결심은 비록 자기만족이나 위선일지언정 마음을 고쳐먹는 계기가 되었다.
쌍둥이 스승은 엄청나게 강했다. 피가로가 가지지 못한 것들, 그리고 가지고 싶었던 것들을 그들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척박한 북쪽 땅에서 대마법사로 추앙 받는 쌍둥이의 처음이자 유일한 제자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적어도 망망대해에서 익사할 운명은 아니었나 보지. 쌍둥이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날 때부터 고독을 몰랐던 탓에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가르치지 못했지만, 그들은 적어도 어른이 되고 싶은 욕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쌍둥이 스승은 아이들이 눈 깜짝할 새에 어른이 된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며, 조급해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예나 지금이나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태 인간과 어울려 지낸 피가로에겐 일주일이, 한 달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러도,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간다. 계절의 흐름은 무심히 지나가는 구름과도 같다.
피가로는 쌍둥이의 가르침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쌍둥이의 수업 방식은 다소 험한 면이 있었지만, 피가로의 눈높이에 맞춰 가르쳤고, 질문이 있을 때는 성실히 답해주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물려준다. 의도치 않아도 비슷한 성질의 제자를 들이게 되는 건 이 같은 연유일 것이다. 어른이 되는 설렘을 간직한 채, 피가로는 스승의 뒤를 이을 준비를 했다.
아이의 모습으로 지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건, 그로부터 한 해가 더 지났을 무렵이다.
“이리 오렴. 얼마나 자랐는지 보자꾸나.”
그날은 오랜만에 키를 재는 날이었다. 쌍둥이는 식사를 마친 피가로를 붙잡아 구석으로 향했다. 피가로는 익숙하게 지정된 자리로 가서 섰다. 등을 맞댄 벽에 움푹 팬 자국이 있었다. 그 자국은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일렬로 늘어진 여러 개의 작은 흠집은 쌍둥이가 직접 낸 것이다. 그들은 점차 자라나는 피가로의 키를 불규칙한 간격으로 기록해왔다.
“그새 이만큼 자라다니.”
“눈높이가 달라졌을 때 이상하다 했어.”
벽에 손을 짚은 쌍둥이가 머리 위에 새로운 표시를 남겼다. 두 사람이 다가오면서 자연스럽게 거리가 가까워졌다. 얼굴에 열이 오르며 뒤꿈치가 절로 들썩였다. 피가로는 눈을 내리깐 채 신발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요즘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쑥쑥 자라나네.”
“아직도 뼈마디가 쑤신다지? 언제까지 자랄지…… 어쩌면 우리보다 더 커질지도 모르겠구나. 저 나무 꼭대기에 걸려야 멈추려나.”
화이트가 창 밖으로 보이는 마시아 나무를 가리켰다. 화이트의 너스레에 스노우가 웃는다.
“그 정도나? 화이트는 상상력이 풍부하군.”
“우리는 꿈 한 쪽도 나누는 쌍둥이니까, 그런 점에서는 스노우도 마찬가지야.”
쌍둥이는 주문을 외울 때처럼 서로의 손을 포개고 까르르 웃었다. 말수가 적은 피가로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대로 조금 더 기다리자, 시답잖은 농담을 하던 쌍둥이가 피가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큼지막한 두 손이 포슬포슬한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해가 쨍쨍한 정오에 불어오는 미풍처럼 잔잔한 손길이었다.
“그나저나, 가르칠 게 거의 다 떨어졌구나. 피가로가 우리를 떠나 독립할 날도 머지않았구먼.”
“아쉽구나, 아쉬워. 좋은 순간은 찰나인 게지.”
“빈자리가 아주 클 거야. 그래도 스노우는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줄 거지?”
“물론이지.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잘해보자꾸나.”
“스노우쨩…….”
“화이트쨩…….”
쌍둥이가 둘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솔직히 보기에 눈꼴 시렸지만, 사이가 좋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독립이라는 단어가 피가로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생글생글 웃는 쌍둥이는 몹시 즐거워 보였다. 입으로는 아쉽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애제자라고 싸고돌지만, 그래봤자 함께한 시간은 두 해 정도다. 고작 십 대에 불과한 자신과 달리 쌍둥이는 서로를 의지하며 수백 년을 살아왔다. 2년이란 시간이 가지는 의미는 명백히 다를 것이다.
피가로는 말없이 팔뚝을 감쌌다. 갑자기 더운 느낌이 들었다. 등짝에 옷이 달라붙고, 이마에 옅은 땀이 배어 나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깊고 어두운, 끈끈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몰려왔다. 과거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이건 고독이라 불리는 감정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즈음엔 옷 위로 손톱을 세워 팔뚝을 긁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약으로 억누른 상처는 약간의 계기만으로 쉽게 벌어져 벌건 속살을 드러냈다. 이런 생각을 두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피가로야, 여길 보려무나.”
스노우가 공간을 비집어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천구의를 닮은 둥그런 오브였다. 쌍둥이의 인형과 비슷한 마도구라는 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소중한 제자를 위해 준비한 졸업 선물일세.”
“기쁘게 받아주렴.”
쌍둥이의 저택에는 진귀한 물건이 많이 있었다. 어느 날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낯선 방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천구의를 처음 봤고, 관심을 가졌다. 인간이 발명했는지, 마법사가 발명했는지 모를 그 물건은 요즘에 와서 보기엔 무척 조악한 형태지만, 당시엔 꽤나 혁신적이었다.
그때 피가로가 흥미를 보인 것을 쌍둥이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피가로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사실, 할 말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짧은 머뭇거림 끝에 손을 내밀어 마도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피가로는 마도구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게 덤벼오는 마법사 한 명을 돌로 만들어 버렸다. 다른 마법사를 죽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긴장과 두근거림을 느낀 첫 경험과 달리 이번에는 놀랍도록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쌓인 눈 위에 흩어진 다량의 마나석 중 가장 큰 조각을 집어 들었다. 붉은 기를 머금은 물기를 옷으로 대충 닦아내고 달빛에 비춰보았다. 유려한 마나석은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더욱 다채로운 빛깔로 빛났다.
강력한 마력을 지닌 돌을 보면서, 그는 지난 일을 떠올렸다.
“두 분을 처음 뵈었을 때, 어린아이의 모습이셨죠. 마법사는 자신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건가요?”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해변에서 처음 쌍둥이를 만났을 때, 그들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쌍둥이의 저택에서 눈을 뜬 이후, 그들은 피가로 앞에서 언제나 어른의 모습을 고수했다.
“그래. 변형 마법답게 까다롭긴 하다만, 마력만 받쳐준다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단다.”
“짧게는 쉽지만 오래 유지하기는 어렵지. 피가로야, 어른이 되고 싶으냐?”
목을 울려 웃은 스노우와 화이트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말을 잇는 그들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었다. 피가로는 마른 목을 축이며 쌍둥이를 유심히 살폈다.
쌍둥이는 어른의 모습으로 지내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두 사람은 어떠한 불편함도 내비치지 않았지만, 피가로는 왠지 모르게 이질감을 느꼈다.
“아니요. 설령 하고 싶다 해도 지금의 제가 사용하기엔 버거운 것 같습니다.”
“자신의 역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구나. 객관적인 시야는 삶을 편하게 만들어주지. 바람직한 일이야.”
“허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구나. 말해보련.”
“그건 취미의 일환인가요?”
그 질문은 두 사람에게도 의외였던 것 같다. 쌍둥이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음~”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우선, 무엇을 생각하고 있든 그건 오해일세.”
“영문 모를 파렴치한 취급은 진심으로 피하고 싶구나.”
“이걸 뭐라 말해야 하나. 실로 난처하구먼.”
“취미라고 한다면 오히려 이쪽 모습이 취미에 가깝네만.”
고개를 주억거리는 쌍둥이에게 거짓은 느껴지지 않는다. 먼저 물어보긴 했으나, 예상치 못한 답에 도리어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왜…….”
“그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지.”
쌍둥이는 오랜 장난이 성공한 것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훤칠한 어른의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쪽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는 건.”
불쑥 끼어든 오즈가 물었다. 과연 오즈답게 재미있는 반응이다. 피가로는 눈썹을 내리고 웃었다.
“맞춰봐. 이유가 짐작이 가니?”
“내가 먼저 물었다. 대답해.”
“그러네. 어차피 넌 모르겠지. 그래서, 두 분이 뭐라고 했냐면…….”
당시 스노우와 화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했던 것일세.”
“같은 아이보단 어른의 모습이 더 위로가 된다고 판단했지. 그래, 딱 금슬 좋은 엄마와 아빠 같지 않은고.”
다시 2천 년의 세월을 지나, 말을 전해 들은 오즈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인간 같군.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한 거지?”
“뭐?”
언성을 높인 피가로가 배를 붙잡고 웃었다.
“역시,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조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 오즈는 엄청나게 빈정 상한 얼굴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면전에 대고 비웃음을 샀는데 불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와, 표정 무서워.”
“피가로쨩, 조금만 살살 긁어라. 본인은 아침이 오는 게 두렵구나.”
“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시네요.”
안 그래도 무뚝뚝한 인상이 점점 무시무시해졌다. 짓궂고 수다스러운 사람들 사이에 낀다는 건 제법 고생스러운 일이다. 천 단위의 시간동안 어울려도 이들의 방정맞은 언행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말로만 무섭다고 하고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겁에 질리기는커녕 흥미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대놓고 기대하는 모습에 오히려 반응하기가 싫어진다.
오즈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미리 꺼내놓은 술병이 카운터 쪽에서 둥실둥실 날아왔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알아서 마개가 뽑히고, 빈 잔을 채운다. 졸졸 흐르는 검붉은 색 액체를 보고 있으니 서서히 졸음이 밀려왔다. 똑 닮은 사제가 떠드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어이, 오즈. 일어나. 말하고 있잖아.”
완전히 눈을 감았을 즈음, 코앞에서 딱 소리가 났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피가로가 담겼다. 무릎에 올라탄 화이트를 한 손으로 끌어안은 피가로는 상반신을 바짝 내밀고 있었는데, 손을 튕겨 졸고 있는 그를 깨운 모양이다.
“무슨 말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
“기억난다. 그런데…… 이해가 안 돼.”
“잊지 마, 오즈. 네 눈앞에 있는 건 단순히 제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 싶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재액에 맞서 싸운 허영심 많은 영감탱이들이라고.”
“허영심 많은 영감탱이라니.”
“아주 제대로 멕이는구먼.”
오즈는 잔존한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 미간을 짚었다. 재잘대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었더니 두통이 도진 것 같다. 불행 중 다행히 피가로는 대화를 이어가려는 마음이 있는 듯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칭얼거리는 쌍둥이의 입에 어디서 난 건지 모를 비스킷을 밀어 넣었다.
“스노우님과 화이트님이 어른의 모습으로 있었던 건 인간들 틈에 섞여 산 나를 위해서였어. 지금 모습으론 상상도 안 가겠지만, 그때의 난 정서적으로 불안했거든.”
이번에는 제 손으로 직접 피가로의 잔을 채웠지만, 그는 결국 들지 않았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생각에 잠긴 피가로는 고요한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는 알겠어. 두 분은 옛날부터 인간을 좋아했으니 그들의 삶을 지켜보며 얻은 게 있었던 거야. 실제로 조금은 동경했을지도 모르겠네. 난 인간의 품에서 자라난 마법사였으니까.”
피가로는 숨을 고르듯 말을 멈췄다. 오즈는 잔에 든 액체를 홀짝였고, 쌍둥이는 일부러 비스킷을 느리게 갉아먹었다. 오즈는 그렇다 쳐도 쌍둥이의 침묵은 상당히 유쾌했다.
“다른 부모들이 그렇듯,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지해 주고 싶었던 거지. 네 말 대로야. 말도 안 되지. 단순 변덕으로 주운 제자한테 누가 그런 번거로운 짓을…….”
씁쓸한 웃음을 흘린 피가로가 긴 숨을 뱉어냈다.
“사람들은 어떻게 단지 아끼고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불필요한 과정을 감수하는 걸까?”
그 말에 여태 침묵하던 쌍둥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피가로야, 내 보기엔 그대도 그렇구나.”
“두 분이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제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시잖아요.”
“그대는 상냥한 아이야. 우리가 그리 키웠지.”
“우리는 좋은 부모도, 좋은 스승도 되지 못했지만 여전히 넌 자랑스러운 우리의 제자란다.”
슬쩍 곁눈질한 쌍둥이는 보기 드물게 자애로운 낯을 하고 있었다. 그게 또 소름 끼쳐서, 피가로는 혀를 차며 무릎에 떨어진 과자 가루를 탁탁 털어냈다.
“낯간지럽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말씀 하셔도 이제 와서 좋은 스승이라고 추켜세워주진 않을 거예요.”
“얘 좀 봐. 좋은 말을 해줘도 참…….”
추억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매사 제멋대로 구는 쌍둥이가 얄밉다가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 어김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걸까. 어른의 모습으로 생활하는 것 따위 쌍둥이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테다. 그저 변덕이고, 유흥일 뿐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피가로는 쌍둥이가 제게 들인 수고가 고마웠다.
어렸을 때도 그렇게 솔직하게 표현하면 좋았을 텐데. 워낙 숫기 없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나. 피가로는 턱을 괸 채 다시 한번 어슴푸레한 기억을 더듬어갔다.
“일부러 그러실 필요 없어요. 스노우님과 화이트님이 어떤 모습이라도 저는 괜찮으니까.”
“기특한지고. 우리도 나름 기분전환이 되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우린 작은 모습도, 큰 모습도 전부 좋아하니 말이지. 뭐, 그래도 이 모습보단 아이의 모습을 더 선호하긴 하는구나.”
“자.” 스노우가 이어질 답을 차단하듯 과자를 내밀었다. 피가로는 어색하게 과자를 받아먹었다.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지만, 웃는 낯으로 권하는 탓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투박해 보이는 과자가 의외로 맛이 좋았다. 표면은 무척 바삭했고, 마시아 열매로 만든 잼은 전율이 일 정도로 새콤했다.
입안에 든 과자를 꼭꼭 씹어 삼킨 뒤, 찻물로 입을 헹궜다. 먼 길을 돌아온 끝에 마침내 정말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두 분은 어떻게 성장을 멈추신 건가요?”
쌍둥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갸웃거린 화이트가 스노우를 본다.
“가르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화이트를 본 스노우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이론은 화이트의 담당이었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던 쌍둥이는 금방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분업을 했다고. 그래그래, 지금 알려주면 되겠구나. 마법사들은 마력이 성숙해지는 시점에서 육체의 시간이 멈춘단다. 우리의 본신이 어린아이인 건 그런 까닭이지. 즉, 그대의 스승은 엄청나게 대단하고 천재적인 마법사란 게다.”
그 말대로, 쌍둥이 스승은 특별했다. 그만큼 어린 나이에 마력을 안정시키는 건 오즈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으면 또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오즈는 그럴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당시, 피가로는 두 사람의 가르침에서 힌트를 얻었다. 사람들을 돕기 위한 힘을 기르는 동시에 조금이라도 더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방법을 기어이 찾아낸 것이다.
잔잔한 물결에 파문이 일었다. 피가로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직전의 대화로 무언가를 느낀 걸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새삼스럽게 달리 보였다.
고풍스러운 원형 탁자가 하나. 그리고 탁자를 둘러싼 의자 세 개. 탁자 위엔 어느 때고 집어먹을 수 있도록 예쁜 병에 담긴 쌍둥이의 별사탕이 놓여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셔서, 저도 모르게 연달아 눈을 깜박거렸다. 맞은편에서는 찻잔을 든 쌍둥이가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창을 투과한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의 무늬를 따라 점점이 퍼져 나갔다. 따스한 빛깔로 흩어진 빛의 조각들은 스노우를 지나 화이트에게 닿자 무지갯빛으로 물들었다. 해가 비치는 방향에 따라 조금씩 일렁이는 빛깔은 마치 부서진 마나석처럼 보였다.
쌍둥이의 저택은 외관의 웅장함만큼이나 넓은 내부를 가지고 있다. 외관만큼, 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둘러보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긴 시간을 들여 셀 수 없이 많은 방을 거의 다 둘러보았다. 특별히 길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워낙 넓고 구조가 복잡한 탓에 자주 길을 잃었다. 두 해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헤맬 때는 헤맨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쌍둥이만큼은 어디에 있든 곧잘 찾아낼 수 있었다.
다른 곳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 같은 문, 불길한 마력이 감도는 상자, 늦은 밤에 들리는 정체 모를 소리.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한껏 뒤틀린 이곳을 어느새 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법사의 제자가 스승 밑에서 어느 정도의 수행 기간을 거치는지 알지 못한다. 마법사의 시간은 일반 인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니까, 못해도 십여 년, 길게는 백 년가량을 함께할 줄 알았다.
언제까지고 아이로 남을 수는 없다. 때가 되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조금 정도는 욕심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자기보다 강하고 어른스러운 스승 밑에서 비호를 받으며 어리광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자. 마법사를 넘어선, 사람으로서 평범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리우면서도 정겨운 풍경은 슬그머니 떠오른 욕심을 부추겼다.
피가로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보다 누군가의 가족이자 제자로 살고 싶었다.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스산한 바람이 눈 덮인 나무를 뒤흔들었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선 피가로는 손에 든 돌을 입에 넣고 혀로 굴렸다. 분명 아무 맛도 나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 달게 느껴졌다. 스노우가 건넨 마시아 잼이 발린 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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