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 01


0.

“《그라디아스·프로세라》!”

“《파르녹턴·닉스지오》”

두 사람이 쏘아낸 마법이 충돌했다. 서로 형태가 다른 빨갛고 푸른 칼날이 허공에 부딪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불꽃놀이처럼 불똥을 튀겼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충돌의 여파를 피해 동시에 한 걸음 물러났다. 차갑고도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급한 대로 팔을 들어 막았지만 강한 바람은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온통 뒤집어놓았다.

“잘했어, 카인! 전보다 마력이 더 안정됐잖아!”

“그래. 나도 방금 느꼈어!”

맞은편에서 아서가 큰 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 평소의 정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있었다. 아서는 제 옷매무새를 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고서 카인의 성장을 자기 일처럼 축하해 주기 바빴다.

“어떻게 한 거야? 따로 연습할 시간도 없었잖아. 비결이 있다면 가르쳐 줘.”

“별 건 아니고, 좋은 선생님한테 배웠거든.”

“오즈님 말고? 나 몰래 다른 사람에게 과외를 받았구나. 누구인지 궁금한데…….”

“하하, 비밀이야.”

절대, 절대 오웬이라곤 말 못 한다. 내내 퉁명스럽게 굴던 그가 저를 앉혀놓고 하나하나 세세하게 설명해 줬다곤 절대로 말 못 한다. 아서가 오웬을 좋게 봐준다면 그것 나름대로 좋겠지만, 왠지 둘만의 비밀 같아서 말하기 꺼려졌다. 실제로 둘만의 비밀스러운 대화도 오갔고…….

“여기까지 하고 슬슬 식사하러 갈까?”

카인은 웃는 낯으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한계까지 마력을 운용한 탓인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났다. 옷으로 가려진 등짝은 이미 흠뻑 젖은 지 오래다. 늘 하는 훈련이라지만, 마법으로 하는 대련이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평소보다 배는 힘들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이쪽보다 상황은 낫겠지만 아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카인은 검을 검집에 되돌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서는 손을 잡기는커녕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남아서 더 해볼게.”

“오늘 네로가 맛있는 크림 스튜를 해준다고 했는데.”

“조금 식어도 상관없겠지? 일부러 해준 네로한테는 미안하지만…… 역시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아.”

“너 어제도 그렇게 말했잖아…….”

고개를 돌린 아서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랬던가? 아무튼, 먼저 가봐. 너한테는 너만의 루틴이 있잖아. 난 혼자서도 괜찮으니까, 알지?

“……그래. 이따 보자.”

무슨 말이든 하려 했다. 땀으로 젖은 이마에 머리칼이 붙어있는 게 보여서,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하는 게 평소의 모습과 달라서. 무리하지 말라는 말은 못 해도 응원의 말 정도는 해주려고 했다. 그러지 못한 건 마음속에 남은 꺼림칙함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난한 대화였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아서가 며칠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거의 주방에 상주하는 네로한테 듣기로, 아서는 카인이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혼자 훈련을 하다가 정오가 다 된 시간에 늦은 아침 식사를 한다고 한다. 그 뒤로는 곧장 왕성으로 가 업무를 처리하니, 도무지 휴식 시간이 없을 것이다.

아서는 무리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유에 대해선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최근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서쪽 나라와의 외교 문제, 인조 마법사와의 싸움, 노바로부터의 습격, 마법관의 붕괴―다음날 오즈가 깨끗하게 고쳤다―. 거기에 더해 볼더 섬의 사건까지.

결과는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한 해에 한 번 있어도 버거운 일을 짧은 주기로 너무 많이 겪었다. 마치 자기 자신의 역량을 시험하는 것처럼. 너는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수도 없이 많다고. 존재하는지도 모를 신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더 강해져야 한다.’ 아마 카인을 포함해서 다들 느꼈을 것이다. 원래 모든 일은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는가. 더욱 정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면 벌써 한 발자국 내디딘 것인데, 문제는 아서가 정도를 모른다는 것이다.

아서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조급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오즈가 습격을 받았다. 아무리 마법을 쓸 수 없는 밤이라지만 그 오즈가 노바에게 당해 깊은 상처를 입었다. 마침 근처에 실력 좋은 의사 선생님도 있고 해서 금방 나았지만, 다들 적잖이 충격받은 기색이었다.

스노우와 화이트를 비롯한 연륜이 있는 마법사들은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고, 아이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밤을 지새웠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사람을 감싸는 가운데, 오즈를 아버지처럼 따르는 아서는 밤새 오즈 곁을 지켰다. 오즈는 상처 회복이 빠르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쌍둥이의 말도 당시의 아서를 진정시키진 못했다.

사람이란, 때로는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을 위해서 강한 의지를 발휘하곤 한다. 카인이 아서를 지키고 싶은 것처럼, 아서는 오즈를 지키고 싶은 것이다. 오즈가 세계 최강의 마법사든 마왕이든 관계없이 빨리 어른이 되어서 그의 짐을 덜어주고 곁에 머물고 싶은 것이다.

기묘한 상처로 인한 페널티가 있다곤 하지만 상대는 명불허전 세계 최강의 마법사. 동등해질 순 없어도 최소한 발목은 잡고 싶지 않은 거겠지. 사랑하는 사람의 약점이 된다는 건 무척 슬픈 일이니까.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탓일까. 카인은 아서의 마음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고 조급증을 내는 건 좋지 않다. 대다수 노력은 단기간에 결실을 이룰 수 없다. 하물며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일은 하루도 빠짐없이, 좋은 칼을 벼리듯이 인내심을 갖고 담금질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꾸준함을 위해 휴식과 훈련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거늘, 지금 같은 페이스론 한 달은커녕 보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서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는 건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이겠지.

노바는 마법관을 피습하고 오즈를 해하는 것으로 자신의 힘과 여유를 보여주었다.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실제로 그날 이후 마법관은 전에 없던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강해지고 싶어서, 강해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주제에 남에게 충언을 할 자격은 없다. 아서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은 그런 이유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볼 수도 없으니 슬슬 적절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아서를 말릴 수 있다면 마냥 좋겠으나, 그게 안된다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릴 수밖에.

*

카인은 그 길로 아서를 두고 어디론가 향했다. 땀에 푹 절은 몸을 뽀송뽀송하게 말리자마자 향한 곳은 식당도, 담화실도 아닌 도서실이었다.

“오즈, 여기 있어?”

익숙한 기척을 따라 손을 들고 걸어가자, 길게 늘어선 책상 앞에서 누군가 손뼉을 마주쳤다. 불만 하나 없이 접촉한 건 예상대로 오즈였다.

대충 있을 것 같아서 오긴 했으나, 정말로 있을 줄은 몰랐다. 평소보다 한층 주름진 미간에 미미한 졸음이 묻어났다. 남들과 시간 감각이 현저히 다른 오즈는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하기야, 아서를 만나기 전까지 모닥불 앞에서 불멍만 몇십 년 때렸다고 하니 오죽할까.

“뭐 하고 있었어?”

“수업 준비를.”

“아, 정말이네.”

그 말대로, 오즈는 놓게 쌓인 책 석탑에 둘러싸인 채 시험지를 만들고 있었다. 직전까지 파우스트와 함께 있었는지 책상 위에 낯선 책이 놓여있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에 서투른 오즈는 종종 파우스트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 노력 덕분일까. 오즈는 항상 양질의 수업을 해주었다. 오즈 정도 되는 대마법사가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이만큼 심혈을 기울인다니. 정말이지 언제 봐도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믿음이 무럭무럭 자란다고나 할까. 역시 상담 상대를 잘 찾아왔구나. 카인이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한창 열심히 하고 있는 중에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들어보고 판단하겠다.”

“아서를 말려줬으면 해.”

아서를 말린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오즈는 두어 차례 눈을 끔벅였다.

“말린다는 건.”

“막 거창한 건 아니고, 요즘 많이 무리하는 거 같아서 말이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겠지. 우리 중앙 마법사의 선생님이니까.”

“……그래.”

확실히, 짚이는 바가 있나 보다. 오즈는 두 번 되묻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알지? 기합이 들어간 건 좋지만 뭐든 지나치면 독이 되니까.”

“알겠다. 내가 가지.”

“응, 고마워.”

깔끔한 대답에 카인은 내심 안도했다. 오즈는 좋은 녀석이지만 대화할 땐 무심코 긴장하게 된다. 마법사 특유의 무구한 잔혹함이 엿보여서 그런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무르를 돌로 만들려던, 그때의 인상이 깊게 남아있는 탓일 수도 있다.

아무튼 오즈가 아서를 맡아준다면 그걸로 됐다. 뒷일은 오즈에게 맡기자. 아서는 오즈의 말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 드니까. 한 건 해결했다는 후련함과 동시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 가서 말 못 할 감정이다.

‘나도 전력을 다하겠지만, 오즈가 저항하면 어떻게 하면 돼?’

‘아서를 위해서니까 말을 들으라고 하면 돼. 아서에게는 오즈를 위해서라고 하고.’

왜 하필 지금 같은 순간에 그 일이 떠오르는지.

과연 마법관의 손꼽히는 브레인답게 피가로의 조언은 정확했다. 오즈는 그렇다 쳐도, 몇 년 알고 지낸 자신보다 피가로가 아서에 대해 잘 아는 건 못내 입맛이 썼다. 이 또한 하나의 거대한 오해였지만, 진실을 알지 못하는 카인은 다시금 정진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아쉬움을 삼켰다.

1.

……라고 카인은 생각했으나, 기실 오즈가 나선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세상만사 모든 고민이 올 나간 스웨터처럼 쉽게 풀리면 오죽 좋겠냐마는, 안타깝게도 오즈는 소통이라는 종목의 심각한 낙제생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운을 떼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 하루를 꼬박 보냈다. 그러고도 답을 내리지 못해서 아서를 마주칠 때마다 이상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어찌나 쩔쩔매는지, 오히려 부탁을 한 카인이 오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서는 잘못된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마법사의 마력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과 초조함은 오히려 마력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관계에 능숙한 주변인들과 달리 오즈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모른다. 그러나 제 손으로 거둔 아서의 마음만큼은 아주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아서가 무엇을 목적으로 노력하고 있고, 누구를 위해 이렇게 무리를 하는지.

지켜보는 보호자의 심정은 복잡하다. 무리하는 아이에 대한 걱정 반, 빨리 자라서 품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에 대한 서운함 반. 그리고 그 두 개를 합친 만큼 아서가 대견스러웠다. 아이가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해할까 저어 되면서도 그 아이의 노력과 진심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까마득한 어른답게 더없이 인자한 태도로.

“그래서 날 부른 거야?”

피가로가 잔을 기울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오즈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즈는 운이 좋은 편이다. 마침 말을 유창하게 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근처에 있으니. 다른 이라면 몰라도 긴 세월 동안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은 피가로에겐 부탁하는 일이 꺼려지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긴 했는데, 역시 아서 문제구나.”

피가로는 오즈의 진지한 태도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오즈 본인은 모르겠지만 지금 굉장히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느닷없이 베넷 바에서 한 턱 내겠다길래 무슨 바람이 분 건가 했다. 오즈에게 초대받는 건 좀처럼 드문 일이라, 내심 기대를 했던 것도 같다. 귀여운 형제제자―*불특정 다수의 비명소리―와 어울릴 수 있다면 고민 상담 정도는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런데 기껏 한다는 말이 아서와 관련된 거라니. 예상대로라고나 할까. 어려울 땐 한없이 어려우면서 이런 부분은 또 알기 쉬웠다.

“이렇게 무거운 고민일 줄 몰랐는걸.”

“네게도 그런가?”

“뭐, 그렇지. 몇 명을 키워도 똑같아. 어린아이란 더없이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니까.”

“그렇군.” 중얼거린 오즈의 낯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암운이 드리우다 못해 번개가 꽝꽝 내리친다. 바깥 날씨가 어떤 상황일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형제 제자의 면면을 빤히 바라보던 피가로가 “그래도 오즈치고는 말이야.”라며 운을 떼었다.

“상대를 잘 찾아왔어. 굳이 따지자면 연장자 중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건 나일 테니까. 그럼 지금부터 함께 고민해 볼까? 일단 이것부터 다 마시고…….”

술병을 든 피가로가 알아서 빈 잔을 채울 때였다. 머리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대뜸 눈을 가렸다. “우왓.” 피가로가 짤막한 비명을 토했다. 다행히 병을 놓치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샤일록이 오늘을 위해 특별히 골라준 술을 몇 방울 흘리고 말았다.

“그런 말을 잘도 부끄럼 없이 하는구먼.”

“세상에서 제일 까다로운 아이를 둘이나 키운 우리를 두고 말일세.”

단순히 놀라게 하는 게 목적이었는지, 눈을 가린 작고 말랑한 손은 쉽게 떨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화려한 옷을 걸친 쌍둥이가 있었다.

“스노우님, 화이트님.”

오즈가 눈살을 찌푸리고, 피가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아는 체를 했다. 시간이 몇 신데 저런 옷을 입고 활보하는지, 하여간 주책맞은 늙은이들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까다롭다니요. 오즈는 몰라도 전 그 정도까진 아닌데요.”

“피가로야, 그대도 가끔은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구나.”

“조금만 한눈팔라 치면 곧장 굶주린 눈빛으로 쳐다보던 게 안타깝고 불쌍해서 원.”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단다. ‘관심을 줘! 사랑을 줘!’ 그렇게 말하는 듯했지.”

“제가 언제 그랬어요. 매일 아침마다 포옹해달라며 귀찮게 군 건 당신들이면서.”

팽팽한 신경전은 마치 불꽃이 튀는 것 같다. 빠른 공방에 오즈는 일찍이 대화에 섞이길 포기했다.

“누가 누굴 가여워하는 건지, 웃기지도 않아…….”

얌전히 제 몫의 잔을 비우고 있자, 한숨 섞인 실소를 흘린 피가로가 곧장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아니, 그 이전에 누가 데려왔어요?”

“어허, 말본새 좀 보게!”

“우리가 못 올 곳을 왔는가!”

쌍둥이가 꽥 소리 질렀다. 목소리에 서운함이 가득 묻어났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 중 뻔히 보이는 함정에 걸려들 사람은 없었다.

“자주 오시진 않으니까요.”

차갑게 대꾸한 피가로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 부분은 오즈도 공감했다. 나잇값 못 하는 쌍둥이의 고성은 썩 듣기 좋은 종류가 아니었다.

“여기 있으니 밖이 안 보여서 말이지.”

“갑자기 밤이 돼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네.”

쌍둥이는 그렇게 말하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과연,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납작한 액자가 등받이에 기대어있었다. 그림자가 짙게 깔린 곳이라 여태 눈치채지 못했다.

피가로는 일부러 들으란 듯이 혀를 찼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요. 정말이지 조심성이 없네요. 두 분도, 오즈도.”

“왜 나까지 욕을 먹어야 하는 거지.”

오즈는 피가로에게서 병을 빼앗아 두 사람의 잔을 채웠다. 쌍둥이와의 다툼으로 목이 타는지, 피가로는 오즈가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평소보다 템포가 빨랐다. 짧은 고민 끝에 오즈는 다시 빈 잔을 채웠다.

그 사이, 화제 전환이 능숙한 세 사람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오즈를 제외하고 대화를 끌어갔다.

“아서 얘기를 들으니 말인데. 화이트, 기억나는가?”

“그럼 그럼, 옛날에 비슷한 일이 있었지.”

“우리도 같은 경험을 했단 것이야.”

“와, 그거 참 놀랍네요. 두 분한테 제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 설마 이번에도 제 얘기는 아니겠죠?”

불안한 마음에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피가로를 무시한 쌍둥이가 짝짝 손뼉을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는 오즈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자, 교훈이 필요한 오즈를 위해 옛날이야기를 해볼까.”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쌍둥이 스승님과 피가로라는 아이가 있었단다.”

“역시나…….”

쌍둥이의 이야기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피가로의 한숨과 함께 시작되었다.

2.

그 아이를 만난 건 까마득히 먼 과거였다. 원래 하나였던 두 사람이 쪼개지지 않고 온전했던 시절이다. 그들은 그때고 지금이고 변덕스럽기 그지없어서,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그저 흘러가며 살고 있었다.

이 하늘 아래, 서로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적의 일이다. 단 한순간을 제외하고 삶의 태도는 늘 비슷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잠든 쌍둥이는 같은 꿈을 꾼다. 달을 보고, 별을 읽으며 절대 틀리지 않을 예언을 내린다. 몸도, 마음도 한데 묶여있는 그들은 부러 언어라는 수단으로 서로를 시험하고 견제할 이유가 없다.

눈 덮인 들판을 구멍 낼 듯,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유성우의 꿈을 꿨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정의 끝에서 새로운 인연과 조우하는 예언을 읽었다. 변화 없이 무료한 인생에 스스로에게 예언을 내리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 탁 트인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이 총총 수놓아져있었다. 푸르스름한 은하수를 따라 가느다란 호선을 그리며 유성우가 쏟아졌다. 일렁이며 쏟아지는 별들의 춤은 운명의 이끌림이다.

서로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쌍둥이에게 구구절절한 설명은 불필요했다. 그날은 손을 맞잡고 아주 멀리까지 산책을 나갔던 것 같다. 미리 약속한 것처럼 정해진 곳을 향해 나아갔다. 동화책 속 그림 같은 하늘을 빗자루를 타고 날았으며, 무릎까지 잠기는 새하얀 눈밭을 걷고, 얼어붙은 호수 위를 달음박질쳐 가로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나아간 설원의 끝에서 한 아이를 만났다. 둥그렇게 차오른 달의 마력에 홀린 아이는 만월이 만든 청은색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화려하게 쏟아지던 유성우는 어느새 멎은 채였다.

하늘에서 쏟아진 별이 전부 바다에 담긴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차가운 바닷물에 가슴팍까지 잠긴 아이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저 물끄러미 달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달을 통해 무엇을 비춰보고 있을까. 어째서 달에 닿기 위해 험난한 길을 걷고 있었나. 말없이 시선을 맞춰오는 화이트에게 스노우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한평생 고독과 동떨어져 있던 그들로선 전혀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날, 변덕스러운 북쪽의 쌍둥이 마법사는 흠뻑 젖은 아이를 주워 자신의 아이로 삼았다.

“유성우가 내리고 있었나요?”

턱을 괸 피가로가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손톱이 딱딱한 표면에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그 소리는 쌍둥이의 잔잔한 음성을 파고들어 이야기에 푹 빠진 이들을 현실로 돌려놓았다.

“기억나지 않는고? 아쉽구나.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황홀한 광경이었거늘.”

“당시엔 그런 걸 신경 쓸 형편이 안 됐어요. 아시잖아요.”

“그렇지. 루살카에게 붙들린 것처럼 무작정 앞만 보고 나아가고 있었으니 말일세.”

“네네, 물귀신이 될 뻔했죠. 저도 어리석었다고 생각해요.”

맞은편에 앉은 오즈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어째서 물에 들어갔지?”

쌍둥이와 피가로가 말을 멈추고 오즈를 쳐다봤다. 누가 사제지간 아니랄까 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은 진의를 헤아리듯 눈을 가늘게 뜨다가 이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이제야 묻는 거야? 넌 정말 따라오는 속도가 느리구나…….”

“과연 오즈라고 할까.”

“제대로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구나.”

“두 분 다 너무 놀리지 마세요.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요.”

명백히 사람을 바보 취급 하고 있다. 불쾌함을 담아 노려보자 고개를 돌린 쌍둥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피가로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빈 의자를 당겨 서있는 쌍둥이에게 자리를 권했다.

“피가로. 물음에 답해라.”

“왜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 유성우가 내리는 날에 저를 데려왔다고.”

그는 일부러 말을 돌렸다. 둔한 오즈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재빠른 화제 전환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물으려 했으나, 그보다 스노우가 빨랐다.

“묻지 않았으니까, 라고 할까. 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네.”

“아무래도 유성우 하면 떠오르는 추억은 스노우와의 추억이 대다수이니.”

“화이트쨩…….”

“스노우쨩…….”

“아, 제발.”

까르르 웃은 쌍둥이가 각자 자리를 잡았다. 스노우는 바로 옆, 빈 의자에 걸터앉았으며 화이트는 피가로의 허벅지에 엉덩이를 붙였다. “무거워요.” 피가로는 한 마디를 하고 곧장 화이트에게 꿀밤을 맞았다.

오즈는 말없이 잔에 담긴 액체를 내려다봤다. 고요한 수면에 은은한 주홍빛 불빛이 비쳤다. 눈앞의 정겨운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억지로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쌍둥이는 피가로를 편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화제를 덮었다.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덕분에 더 이상 물어볼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답할 때까지 고집스럽게 묻는 방법도 있겠지만, 어차피 무슨 수를 써도 말해줄 것 같지 않았다. 단념한 오즈는 불만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지. 아쉬움도 있었던 것 같구나. 이토록 재능 있는 어린 마법사가 그런 선택을 하려 했다니,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었네.”

‘그런 선택’이라는 문장을 내뱉을 때, 화이트는 오즈를 일별했다. 다행히 오즈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가? 본인은 돌을 주워 먹으려 했다네.”

스노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영혼을 공유한 쌍둥이지만 이럴 때는 멀게 느껴지구나.”

화이트가 한탄했다. “물론 농담이었네.” 피가로의 경멸을 한몸에 받은 스노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스노우를 외면한 화이트가 말을 이었다.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지. 이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 그 먼 길을 왔구나.”

몸을 뒤로 젖히자 단단한 가슴팍이 닿았다. 화이트는 피가로에게 기댄 채 눈을 감고 작게 흥얼거렸다.

그래, 분명 호기심이었을 터. 앞으로 남은 기나긴 삶을 쉽게 저버리는 모습에 아쉬움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가 지닌 마력이다. 이렇게 작은 아이인데 벌써부터 순도 높은 마력을 품고 있었다. 더욱이 그 성질이 차갑게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아 흥미를 끌었다.

놓치기엔 아까운 인재다. 예언 때문일까. 한 번도 이런 적 없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욕심이 났다. 고개를 돌려 스노우를 바라보자 눈이 마주쳤다.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기왕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제자로 들이기로 했다. 아이는 용모가 단정하고, 타고난 마력이 적당했으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적응할 만큼 영리했다. 적어도 어디 가서 내어놓기에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선뜻 따라나선 것과 달리, 아이의 마음은 육신만큼이나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미세하게 금이 간 모습은 시체처럼 차갑고 핏기 하나 없었다. 그래서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목전에 들이밀었다. 사랑을 모르는 아이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긴 시간, 서로밖에 없던 쌍둥이에게 아이의 존재는 새로운 낙이 되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는 건 처음이었다. 한평생 해본 적도, 할 필요도 없었던 낯선 경험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유흥이 되었다.

그 아이를 주운 것도, 사랑으로 키운 것도 단순한 변덕. 한편으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아이의 모습이 썩 흡족했다. 인형처럼 무뚝뚝한 낯에 다채로운 표정이 생기고, 편안한 분위기에 물들어 온화한 기색이 스미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충족감을 가져다주었다.

‘더 기쁘게 하고 싶어. 더 미소 짓게 만들고 싶어!’

끊임없이 아이의 주변을 배회하며 진귀한 것을 들이민 것은 아마 그런 일념이었을 것이다.

북쪽의 대마법사, 쌍둥이 스승은 첫 제자를 보듬어 살피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가르쳤으며 듬뿍 애정을 주었다. 아이는 쌍둥이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도 사소한 부분에서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 그게 또 기특하고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대는 몇 살쯤 되었는고?”

“어린아이를 보는 건 처음이 아니건만, 그대는 참 작구나.”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스스로의 나이를 몰랐다. 그 시기 북부의 마법사가 으레 그렇듯, 작은 취락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살다가 홀로 남겨졌다고 했다. 갈 곳을 잃은 다음부턴 어딘지 모를 외진 바닷가에서 셀 수 없는 밤을 지새웠다고.

그 뒤로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며 쓴웃음을 짓는 아이는 여전히 작고 어렸다. 어찌나 작은지, 어른의 모습으로 품에 쏙 안길 정도였다. 어림짐작으론 열다섯 정도로 보이는데, 또래보다 조그마할 수도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마법사에게 몇 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쌍둥이는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아이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연약한 인간은 쉬이 재난과 병마에 시달려 멸망한다고 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잠깐의 형벌조차 견디지 못한 것은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아이가 온 뒤로 오래된 고성은 비로소 활기를 되찾았다. 가끔 울려 퍼지는 명랑한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는 멈춘 시간을 움직이게 했다. 갖은 수고를 들여 어렵사리 얻어낸 것을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비밀로 했다.

“그래, 나이 같은 게 뭐가 중요한가. 나중엔 그런 것도 다 까마득하니 잊게 된다네.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살다 보면 누구나 그리되지.”

“신경 쓰지 말거라. 인간의 손길이 닿은 듯하여 물은 것이니.”

그때까지만 해도 눈앞의 아이가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이는 그들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쌍둥이는 아이에게 전례 없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언젠가는 나이를 물었고,

“어허, 그만 꼼질거리고 벽에 딱 붙거라.”

“당장 손톱만큼 더 크게 보여서 뭘 어쩌려는 게야. 나무 말고 숲을 보거라. 먼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 정확한 지표를 내는 편이 더 좋지 않겠니.”

어느 날은 함께 아이의 키를 쟀다. 일생에 단 한 번, 덧없이 흐르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뭐든지 눈에 보이는 기록으로 남겼다.

아직도 고성에는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다. 세월이 지나 희미해졌지만 옅어질지언정 사라지지 않는 자국이다. 화이트와 마찬가지로, 밀려오는 물살에 몸을 내맡기듯 눈을 감은 스노우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직접 만든 별사탕을 선물이라며 내밀었을 땐 정말 감동이었지.”

“그런 일도 있었지. 다 기억나는구나. 그 작고 못생긴 별사탕이 뭐라고, 한동안 아까워서 입에 대지도 못했어.”

“본인 혼자 절반가량 먹어버렸을 땐 화이트쨩이 울상을 지으면서 이 몸을 마구 때리더구나.”

아이가 어린 나무의 잎처럼 작은 손으로 별사탕이 담긴 병을 내밀었던 날을 기억한다. 선물을 건넨 아이는 부끄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상대가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진심만큼은 여실히 느껴졌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다. 아이의 별사탕은 그들이 자주 만들어주던 것에 비해 투박했으나, 개중에선 가장 특별한 것이었다. 일부러 만든 수십, 수백 개의 별사탕 중 가장 달콤하고 모양 좋은 것을 골라 담았을 터였다.

“귀한 재료들이 단 한 방에 가버렸군!”

“이로써 당분간 원치 않는 휴가로구나.”

처음 전수해 준 마법으로 얼음 숲의 고목들을 절반 이상 쓰러뜨렸을 때는 너무 기쁘고 황당한 나머지 어른의 모습으로 아이를 몇 번이나 공중에 띄웠다. 나름대로 성과를 축하하는 거였지만, 정작 당사자는 영문 모를 행동에 공포에 질렸다. 제대로 멀미한 제자는 헛구역질을 하며 사과를 반복했고, 스승들은 오해를 푸느라 단단히 진땀을 뺐다.

실제로 그 일이 있은 뒤로 쌍둥이는 한동안 공방 작업에 착수하지 못했다. 열심히 키운 고목이 절반이나 벌목 당하는 바람에 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 일로 계속 미안해했으나, 쌍둥이는 전연 개의치 않았다.

추억은 함께한 시간만큼 쌓이는 것. 두 명의 작은 스승과 어린 제자는 그들이 비호하는 마을에서 인간과 어울렸으며, 가끔은 앞마당에서 눈싸움을 했고, 때로는 열린 창문 틈으로 탐스럽게 익은 마시아 열매를 따먹었다.

어디선가 쓸모없는 마법을 알아와 거리를 온통 새하얀 꽃으로 뒤덮었을 때엔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동심으로 돌아가 꽃이 핀 눈밭을 헤치며 뛰어놀았다.

“어린 피가로쨩은 정말이지 귀여웠다네.”

꿈을 꾸듯이 몽롱한 얼굴을 한 스노우가 말했다.

“지금의 멀대 같은 모습으론 상상조차 할 수 없지.”

화이트가 잇따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암, 그렇고말고. 본인은 사실 지금도 꽤 귀여워하고 있어.”

“화이트쨩도? 정말이지~ 질투나! 피가로쨩은 위험한 수컷이야. 우리를 홀려 자연스럽게 둘만의 세계에 스며들었으니.”

두 사람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탁자에 올려놓은 피가로의 손등을 야금야금 쓰다듬었다. 번갈아가며 쉴 새 없이 간질이는 통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끼어들 틈이 없어 가만히 듣고 있긴 했는데, 표현하는 방식이 진심으로 소름 끼쳤다. 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하지 않은가. 피가로는 손등을 제멋대로 기어다니는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저기, 두 분 세계에 딱히 스며들고 싶었던 적 없거든요. 당연하지만 홀린 적도 없고요. 애초에 전부 거짓말이잖아요. 자기들끼리 물고 빠느라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으면서.”

“그래서 토라졌느냐?”

“호호호, 그만큼 살고도 아직 나잇값을 못하는구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사랑을 받아야겠어.”

“하하, 재미없으니까 그만 하세요.”

웃는 낯으로 경고해도 쌍둥이는 멈추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운다고 현자에게 말해둘까?”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다. 옛날 생각이 나도록 진득하게 예뻐해주마.”

말이 씨가 되는 체험―현자님이 즐겨 쓰는 표현―을 한 지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 죽어버리라던가, 죽여버린다던가. 그런 나쁜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두 번 다시 그때처럼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며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혔다. 스노우와 화이트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르는 건 흔한 일이고, 굴욕은 잠깐 참으면 순식간에 지나가니까. 하지만, 하지만…….

“……진짜 죽일까.”

참고 넘기기엔 그 또한 북쪽 마법사의 혼을 갖고 있었다.

“그것참 기대되는구나.”

“해보렴, 해보렴.”

게다가 쌍둥이는 끝도 없이 도발한다.

“내가 못할 줄 알고.”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 노인공경 따윈 개나 주라지. 결정 내린 피가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덩달아 구르듯이 무릎에서 내려온 화이트가 스노우와 달라붙어 음산한 얼굴을 했다. 모처럼 위계질서와 예의범절을 막론하고 치열하게 다투기 위해 마도구를 꺼냈을 때였다.

“피가로.” 여태 가만히 있던 오즈가 이름을 불렀다.

“앉아.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더 들어서 뭐 하게?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오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랜 교제로 헤아리건대,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는 기색이다. 하여간 스승이나 제자나 쌍으로 문제다. 그 범주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은 피가로가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야, 오즈, 너까지…….”

“두 번은 말 안 해.”

피가로의 말을 끊은 오즈가 단호하게 일축했다. 늘 그렇듯 오즈의 고압적인 말투에 기가 질렸다. 쌍둥이를 노려본 피가로는 혀를 차며 다시 착석했다. 대신 분풀이로 탁자 다리를 짜증스럽게 걷어차고, 뒤통수에 꽂히는 가게 주인의 따가운 시선은 가볍게 무시했다.

“오즈에게 교훈을 준다고 하셨잖아요. 이 이야기 어디에 교훈이 있다는 겁니까?”

“여전히 성질이 급하구먼.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럼 빨리하고 끝내죠?”

“그대가 막지 않았는가. 벌을 받는 기분이 들거든 잠자코 듣기나 하게.”

스노우가 뾰족하게 날 선 태도를 책망했다. 피가로는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표정은 풀었지만, 불편한 심정을 숨기지 않고 내색했다.

“그래요. 계속 멋대로 지껄이세요. 되도록 쓸데없는 사족 붙이지 말고.”

“알겠네, 알겠어. 으휴, 누굴 닮아서 저러는지 원.”

어째 대화를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사이가 더 틀어지는 것 같다. 아무리 눈부신 추억이어도 과거는 과거일 뿐인가. 지겨우니까 그만 좀 싸워…… 오즈는 멍하니 앉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재차 무릎 위에 올라타는 화이트를 밀어내지 않은 걸 보면 어느 정도 마음은 풀어진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하고 진정이 빠른 것이 피가로의 장점이었다.

쌍둥이의 구박을 용케 견뎌냈다. 같이 몰아세운 입장에서 위로의 말은 못 건네지만, 어른스럽게 인내한 피가로의 잔을 대신 채워주었다.

눈짓으로 인사한 피가로가 술을 홀짝거리고, 높이 팔을 든 화이트가 명랑한 어조로 외쳤다.

“그럼 아까 끊긴 곳에서부터 이어하겠네!”

좋은 시절이 영원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모든 순간은 언젠간 끝이 온다. 스노우와 화이트는 처음부터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예언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예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나긴 마법사의 삶에 아이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턱없이 짧다. 때가 되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 스승을 떠날 것이다. 하물며 부모 자식 사이도 평생 함께할 수 없는데 사제 관계는 어련할까.

무릇 사람은 다 자라면 익숙한 둥지를 떠나 새로운 가지로 옮겨가야 한다. 보호자의 품이라는 아늑한 장소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둘러보아야 했다. 아이를 오래도록 잡아두고 싶은 건 보호자의 욕심에 불과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섭섭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영영 자라지 않으면 좋을 텐데. 아주 잠깐, 그런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어린 것의 성장은 아쉬울만치 빠르다. 안정적인 환경이 도움이 되었는지, 아이는 근래 들어 부쩍 자라났다. 뼈가 쑤신다는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늘 몇 달 새에 머리 하나만큼 커졌다. 마치 위아래로 잡아 늘린 것 같은 모양새였다.

처음 저택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그들의 본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오히려 내려다보는 입장이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아무런 변화 없이 고요했던 쌍둥이의 삶에 아이의 시간은 너무나 빨랐다. 두 사람은 아이의 성장에 맞춰 눈에 띌 정도로 허둥거렸다.

부쩍 자란 키에 맞춰 새로운 옷을 준비하고, 낮은 가구의 높이를 키웠다. 길쭉한 타원형 거울은 보다 높은 위치에 달렸으며 다리 밑동을 잘라낸 의자는 오랜만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아이의 마음은 어느덧 단단해졌다. 구멍 난 자리를 완전히 채워주진 못했지만, 스승 된 자로서 마땅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사회교육과 인성교육은 적당히, 사랑은 듬뿍, 마법은 쉽게 죽지 않을 만큼은 가르쳤다. 심부름을 나간 아이가 제게 덤벼오는 북쪽 마법사를 돌로 만들었을 때엔 이젠 정말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어른이 되고 싶었던 아이는 제게 찾아온 성장통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찰나의 계절처럼 빠르게 스쳐가는 추억에 허전함을 느끼는 건 그들뿐이었다.

“피가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마력을 정제하고 자기 자신을 가다듬었어. 우리는 몹시 서운했다네. 못난 스승이라 제자의 성장을 마냥 기뻐할 수 없었지. 시작은 변덕이었지만 끝은 그렇지 않았던 거야.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라고 생각했거늘, 겨우 몇 년 만에 쑥쑥 자라 둥지를 떠나려 하니…….”

“결국 우리가 주는 사랑은 턱없이 모자랐던 게지. 귀찮게 구는 것이 지긋지긋했던 걸 수도 있고.”

“제가 그랬다고요?”

피가로는 처연한 쌍둥이의 말을 끊었다. 슬슬 취기가 도는지 목소리가 살짝 잠겨있었다.

이제 와선 놀랍지도 않다. 피가로는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지만 꽤 서둘러 마시는 편이다. 항상 같이 마시는 사람의 속도를 고려하지 않고 혼자 떠들다가 끝까지 달려버리는데, 하필이면 가장 오래된 술친구가 오즈인 탓이다.

피가로는 한결 풀어진 얼굴로 오즈에게 빈 잔을 밀었다.

“두 분은 정말 제멋대로에요. 다 기억났다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계시는걸요. 반대에요. 전 두 분 품에서 벗어나기 싫어 어리광을 부리던 입장이었으니까.”

그는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질렀으나, 쌍둥이를 바라보는 눈빛은 온화하게 물들어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를 곁눈질 한 오즈는 얌전히 잔을 채웠다. 병 속의 액체는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때요. 전혀 모르겠죠?”

“그랬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이거 봐.”

피가로가 쌍둥이의 줏대 없는 태도에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너도 웃기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물으며, 오즈를 향해 턱짓한다.

“모른다. 내게 묻지 마.”

쌍둥이와 피가로 사이에 끼어서 좋은 꼴을 봤던 적이 없다. 귀찮은 일에 연루되기 싫었던 오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날 떼어놓으려 한 건 당신들이었어요. 처음엔 즐거웠지만 나중 가선 흥미가 떨어졌겠죠. 이대로 두면 조만간 제 발로 떨어져 나가겠다고, 실실 웃으면서 좋아하셨죠.”

“거짓말 치지 말거라! 이거야말로 악마의 편집이구나!”

“우우, 우리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늙은이를 놀리면 못 써!”

“물론 지금은 오해인 걸 알지만요. 네, 알아요. 안다고요. 두 분이 저를 얼마나 총애하는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제자잖아요.”

“우와, 뻔뻔해. 전혀 귀엽지 않아…….”

“무슨 자신감인고. 눈에 넣으면 당연히 실명할 것이네…….”

쌍둥이를 상대로 장난치는 피가로는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그는 다짜고짜 화이트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체중에 눌린 화이트가 “꺅~!” 하고 비명을 지르며 가볍게 몸부림쳤다.

홀아비 냄새가 난다는 투덜거림도 무시하고 가만히 화이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버둥거리던 화이트는 상냥한 손길을 받고 금방 얌전해졌다.

피가로는 노래하듯이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어요. 기왕 얘기가 나온 거, 뒤 내용은 제가 이어받을까요?”

“그래. 올바른 답이 무엇인지 어디 들어나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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