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밤은 유독 길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격렬한 전투 끝에 혁명군의 깃발이 성탑에 걸렸다.
“알렉, 승리했어! 전부 피가로님 덕분이야!”
알렉을 얼싸안은 파우스트는 전투의 흥분과 승리의 격정을 참지 못하고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모닥불 앞에서 춤을 출 때처럼 알렉의 손을 잡고 기뻐하다가 불현듯 이상함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웃고 있는 알렉의 얼굴에 약간의 난처함이 깃들어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런 표정으로…….”
“파우스트, 그게…….”
사람의 감이란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벌써부터 알렉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오랜 소꿉친구라는 것은, 그리하여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파우스트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지워졌다. 알렉의 손을 맞잡은 손아귀의 힘이 서서히 풀렸다. 파우스트는 알렉을 놓고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피가로님은? 피가로님은 어디 계셔?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는데…….”
“피가로님은 떠나셨어. 내게, 너를 부탁한다고 하셨지.”
떠나다니, 누가? 피가로님이? 파우스트는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황망한 눈으로 알렉을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짓궂은 장난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알렉은 망연자실한 파우스트의 어깨를 천천히 감싸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을 뿐이다.
“가엾은 파우스트, 넌 또다시 버려진 거야. 이걸로 벌써 두 번째구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친우의 부드러운 음성은 어떠한 저주보다 깊게, 맹독처럼 파고들었다.
알렉의 왼팔이 자연스럽게 목을 휘감았다. 사람이 주는 온기 외에 또 다른 무언가가 목둘레에 스쳤다. 느슨하게 묶은 알렉의 머리카락이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곧 두껍게 꼰 새끼줄이 되었다. 둥글게 매듭지은 그것이 목이 휘감기는 감각이 선명했다.
목에 걸린 밧줄이 가볍게 목을 조였다.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내달리며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두 발이 제대로 땅에 닿아있는데도 허공에 매달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파우스트는 소스라치게 놀라 알렉을 밀어냈다. 쫓기는 사람처럼 헐레벌떡 한쪽뿐인 팔을 쳐내고 매달리는 몸을 밀어냈다.
있는 힘껏 저항한 게 무색하게 발끝부터 불이 붙기 시작했다. 빠르게 번지는 불길은 온통 헤지고 찢긴 바짓단을 태우며 오물과 먼지가 엉겨 붙은 살갗을 살라먹었다.
“싫어, 이러지 마! 제발 그만둬!”
쿵쾅거리는 심장과 목 끝까지 차오른 가쁜 숨소리가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끔찍한 격통을 느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치고 있는데, 비틀거리며 물러난 알렉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파우스트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파우스트…….”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익히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변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은 이끼 낀 숲처럼 따뜻한 녹빛이었다. 시야가 흐려지는 가운데, 어느덧 알렉은 사라지고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스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길 너머로 피가로를 확인한 파우스트의 눈이 다시없을 정도로 크게 뜨였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고통이 잦아들었다. 파우스트는 이것이 질 나쁜 꿈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눈앞에서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이질감을 덮고도 남을 만큼 고통은 생생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존재가 나타난 것은 고통으로도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그날 그렇게 간절히 빌었지만, 당신은 오지 않았으니까. 끝내 내게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역설적이게도, 파우스트는 그런 방법으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윽, 머리가…….”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는 듯 골이 지끈거렸다. 지난밤에 과음을 했던 기억은 없었다. 가볍게 반주를 했을 뿐, 취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단순한 컨디션 난조거나 악몽의 영향일 것이다. 파우스트는 마법을 써서 들끓는 두통을 진정시켰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올라올 수도 있지만,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두통은 어떻게든 해결했으나, 가라앉은 기분은 그대로였다. 이게 다 잠자리가 뒤숭숭했던 탓이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구 엉킨 머리카락을 다시 인내심을 들여 한 올 한 올 풀어냈다.
파우스트의 방은 두꺼운 커튼 덕에 햇빛이 들이치지 않았지만, 대충 감으로 지금이 어느 즈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하필이면 악몽 때문에 눈이 뜨인 것이 불쾌했으나,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파우스트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찌뿌둥한 몸을 풀어준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잘 잤어?”
문 앞에 궁상맞게 쭈그려 앉아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피가로는 한 손으로 오브를 조정하며 다른 손은 바닥에 손을 붙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곳에 작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을 통해 올라온 푸르스름한 빛이 피가로의 손까지 흰빛으로 물들였다.
“피가로, 네가 왜 여기에…….”
지금 남의 방 앞에 정체불명의 마법진을 설치한 건가? 당혹감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 남아있는 잠기운까지 포함하여 완전히 말문이 막힌 파우스트가 말을 더듬을 때였다. 대답은 뜻밖에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파우스트님, 좋은 아침입니다.”
소리에 이끌려 돌아보니 옆에 레녹스도 있었다.
“레노, 너까지.”
벽면에 있어서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그 즈음, 무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휘적휘적 마법을 다루고 있던 피가로가 손을 물렸다. 피가로는 레녹스에게 손짓을 하여 불러들이더니,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녹스는 마법진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멀대같이 키 큰 성인 남자 둘이서 남의 방문 앞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것도 이런 수상쩍은 자세로. 다른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고층이라 다행이었다. 이 상황을 설명하려면 분명 귀찮았을 테니까.
“……이봐, 무슨 일인데 그래?”
하지만 설명이 필요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불만스럽게 목을 울리자, 때아닌 수업에 열중하던 두 사람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두 쌍의 눈동자가 멀뚱히 파우스트를 올려다본다. 솔직히 약간 부담스러웠다.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게 누그러지는 눈썹을 일부러 바짝 추켜올렸다.
그 모습을 본 피가로는 잊고 있던 게 떠오른 사람처럼 아아, 하고 운을 뗐다.
“그새 결계가 약해졌는지 꿈이 새어 나오더군. 레노가 문 앞에서 틀어막으려고 했던 모양인데, 금방이라도 부수고 튀어나올 기세라서 말이야. 레노는 이런 방면에 미숙하니까 나를 부른 거야.”
“죄송합니다, 파우스트님. 허락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다니…… 그래도 피가로님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마법관 전체에 소동이 이는 것보다는 낫지? 기묘한 상처에 대해서도 별로 알리고 싶지 않을 테고. 비밀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알고 있겠지만.”
레녹스의 말을 받아 덧붙인 피가로가 손을 털며 일어섰다.
“그나저나 또 그런 꿈을 꿨구나. 너도 참 여전해.”
“뭐…….”
설마 피가로가 꿈을 엿본 걸까? 결계를 보강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목격했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야 간밤에 파우스트가 꾼 꿈은 어느 정도 그와 관련된 내용이었으니까. 하물며 긍정적인 것도 아니고, 매우 불편한 주제였다.
파우스트는 긴장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피가로는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거대 고양이라니, 지나치게 상상력이 좋지 않아?”
“고, 고양이 꿈같은 건 꾸지 않았어! 되는대로 막 갖다 붙이기는.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지?”
“단단히 헛짚으셨네요.”
“어,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하고 있던 건가. 곤란하네에.”
파우스트는 머쓱하게 웃는 피가로를 째려봤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끝까지 남을 놀릴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더 위엄과 관록이 있고, 성실하고 엄격했는데. 그렇다고 지금의 모습이 싫은 건 아니지만, 아직도 가끔은 낯설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파우스트님이 옳아요. 새어 나오는 꿈은 저희가 잘 막았고, 방 안을 들여다볼 시간도 없었잖아요. 계속 저와 함께 계셨으니까. 피가로 선생님, 어서 사과하시죠.”
“응? 내가 사과해야 하는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뜬 피가로가 자신을 가리켰다. 엄청나게 눈치를 주는 태도였지만, 레녹스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연스럽게 파우스트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파우스트, 제대로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이런 꼭두새벽부터 애썼는데.”
“앗, 인사가 늦었습니다. 정말 감사합…….”
파우스트는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다가 별안간 멈칫했다. 본능적으로 인사해버렸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몸에 밴 습관이었다. 파우스트는 뒤늦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레녹스를 쳐다봤다.
피가로와 사제관계를 회복한 사실은 아직 레녹스에게 알리지 못했다. 기왕이면 좀 더 제대로 결론을 내고 전하려고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이제는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레녹스는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보기 드물게 몽글몽글한 눈빛을 띤 레녹스는 파우스트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너무 대놓고 외면하니 오히려 어색하고 민망해졌다.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평소에는 쓸모없는 이야기를 잘도 늘어놓는 주제에 피가로는 이럴 때만 조용해졌다.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상한 책임감을 느낀 파우스트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계속 여기 서있기도 뭐 하니, 일단 장소를 옮길까.”
“난 찬성.”
“저도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적당한 동의가 따라붙었다. 파우스트는 혀를 찼다.
“……그럴 줄 알았다만, 역시나군. 따라와.”
그는 자아를 잃은 사람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계단을 내려갔다.
*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걸음을 옮기던 중,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아무래도 네로가 벌써 주방에 들어간 듯했다. 네로는 파우스트 못지않게 성실하지만 지금은 그에게도 이른 시각이었다. 또 북쪽 마법사들이 배고프다며 칭얼거리기라도 했나 보지.
고작 밥 차려달라는 이유로 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은 얼토당토않는 행동이지만, 하도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파우스트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구나. 그는 다소 무심하게 생각했다.
네로가 깨어있다면 굳이 식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냄새에 이끌려온 식당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예상대로 익숙한 면면이 보였다.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약간 의외기도 했다.
미스라는 기다란 식탁의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쪽잠을 청하는지, 아예 베개를 깔고 엎드린 미스라의 손을 옆에서 현자가 잡아주었다. 그런 현자의 맞은편에는 스노우와 화이트가 의자에 앉아 허공에 뜬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고 있었다.
식당에 나타난 그들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쌍둥이였다.
“파우스트와 레녹스인가. 오, 피가로까지?”
“두 사람은 그렇다 쳐도 피가로쨩은 의외구나. 그대가 이 시간에 웬일일까?”
두 사람을 발견한 피가로의 입가가 안 좋은 의미로 부드럽게 풀렸다.
“두 분이야말로…… 늙으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는데 사실인가 봐요.”
“호호호, 그러는 피가로쨩도 일찍 일어났겠지?”
“응응, 그대를 보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처음에는 평범한 인사말로 시작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맞부딪힌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레녹스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피가로와 함께 착석했고, 사이에 낀 현자는 안절부절못했다. 무릎 위에 앉은 사크리피키움을 쓰다듬는 손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여전히 사이가 좋으면서도 나빴다. 이렇게만 보면 북쪽 마법사 평균인가 싶기도 하지만, 저 세 사람은 그보다도 가까운 사제지간이었다. 아마 나름의 애정표현이겠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또 지나치게 과격하지만 말이다.
“하하, 설마요. 오늘이 특별한 거죠. 전 어제도 늦잠 잤는걸요? 정오까지 일어나지 않아서 미틸이 직접 깨우러 왔는데요?”
“당신은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야?”
파우스트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스승과 제자라고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그것을 전부 피가로를 통해 배웠다.
유치하게 구는 피가로를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파우스트는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식탁을 등지기 무섭게 레녹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뒤를 돌아본 파우스트는 턱짓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다행히 레녹스는 금방 마음을 놓고 현자를 도와 나잇값 못하는 사제지간의 싸움을 만류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네로는 여러 개의 조리기구를 한 번에 다루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몇 번을 봐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네로에게 말한다면 그래봤자 식사 준비를 하는 것에 불과한데 오늘따라 답지 않게 유난을 떤다고 할 것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네로를 보고 있으니 느닷없이 장난기가 도졌다. 파우스트는 일부러 인기척을 죽여 접근했다.
“네로,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
“왓, 깜짝이야!”
소스라치게 놀란 네로가 손에 든 프라이팬을 놓쳤다. 프라이팬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안에 담긴 음식이 허공을 날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마법을 발동하여 프라이팬과 쏟아지는 음식을 허공에서 주워 담았다.
“이렇게까지 놀랄 줄 몰랐어. 미안하군.”
“아아, 아니야. 당신도 보기보다 짓궂은 구석이 있다니까.”
파우스트는 네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떨어지는 프라이팬을 따라 주저앉았던 네로가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네로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무사히 안착한 프라이팬과 주방 밖을 번갈아보았다.
“선생이야말로, 이상한 조합을 만들었잖아.”
“이상한 조합이라니, 그렇게 보이나?”
시작부터 이상한 조합은 아니었지만, 일찍이 식당에 와있던 현자와 미스라, 스노우와 화이트까지 합세하면서 꽤나 특이한 조합이 되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도 없고, 고생해서 만든 음식을 보람차게 먹어줄 사람도 없었으며, 별것 아닌 일에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어줄 이도 없었다.
그렇게 보니, 정말 먹이는 보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음식을 내놔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먹보와 가리는 게 많은 편식쟁이들, 그리고 대책 없는 소식가의 조합이었다. 네로가 묘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나마 현자와 레녹스가 있으니 괜찮을지도. 침음을 흘린 파우스트는 그냥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파우스트는 네로와 간단한 담소를 나누며 그를 도와 음식을 담은 접시를 옮겼다. 그 사이 이야기가 잘 된 건지, 식당은 어느새 그럭저럭 괜찮은 분위기로 변해있었다. 짧은 틈에 정말로 잠든 미스라는 현자가 열심히 깨워도 눈을 뜨지 않았다. 현자의 왼손이 봉쇄된 것을 제외하면 식사 시간은 대체로 화기애애했다.
하나둘씩 접시를 비워갈 때였다. 갑작스럽게 손뼉을 마주친 현자가 의자에 걸쳐놓은 가방을 뒤적였다.
“내 정신 좀 봐! 그러고 보니 아까 의뢰서가 도착했어요. 같이 보실래요?”
“콕 로빈이 전해준 거라면 꽤나 급한 일이겠네.”
턱을 괸 피가로가 공허한 배부른 눈으로 현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자칭 맥시멀리스트―현자가 설명해 주었다―인 현자의 가방에는 보기보다 많은 물건이 들어가 있었다. 현자는 한참을 달그락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찾아 헤매더니 곧 둥글게 말린 종이뭉치를 끄집어냈다.
현자가 의뢰서를 찾는 동안 네로와 쌍둥이가 식탁을 정리했다. 레녹스가 거든답시고 손으로 접시를 치우는 것을 그들은 마법으로 간단하게 휙휙 옮겨버렸다. 식탁은 음식물이 튄 자국 없이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아쉽게도 엎드린 미스라는 치우지 못했다.
피가로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접시 중 미스라의 접시를 잡아 그의 옆에 놓아주었다. 빠르게 식어가는 음식이 향긋한 냄새를 솔솔 풍겼지만, 이미 배가 부른 피가로는 살짝 역겨운 얼굴을 했다. 현자는 미스라의 머리를 피해 얇은 종이 두 장을 깨끗한 식탁에 펼쳤다.
하나는 의뢰서였고, 다른 하나는 대륙의 축소판 지도였다.
“현자쨩이 읽어주려무나.”
“아, 제가 요약해 드릴게요.”
현자는 게으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의뢰서를 읽으며 내용을 요약했다.
“재액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북쪽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중앙 변경에 가까운 외각에서 갑자기 눈과 빙하가 녹았다고 해요. 날씨는 전혀 풀리지 않았는데, 마치 커다란 마을 하나만큼의 면적이 전혀 다른 땅처럼 변했다고…….”
침착하게 의뢰서를 읽어가던 현자의 눈이 별안간 동그래졌다.
“어느 날 그 일대가 풀과 나무가 우거진 녹지로 바뀌었대요. 어떠한 마법적인 힘이 관여했는지는 몰라도, 정말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불모의 땅에 녹지라니, 누가 들어도 이상하네.”
“원래 사람이 살던 지역은 아니지만, 벌써 실종된 사람이 굉장히 많나 봐요. 이렇게 많은 사례가 보고된 걸 보면…….”
현자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탄식했다. 현자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의무를 짊어진 입장으로서, 혹은 인도적인 견지에서 다방면으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결국 모든 의뢰를 다 들어줄 수는 없었다.
미리 가서 예방할 수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겠으나, 인원이 한정되어 있는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경중을 따져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의 적임자답게 피가로는 능숙하게 현자를 위로했다.
“하필 그 땅에 이런 기현상이 일어나다니, 운이 안 좋았어. 북쪽 땅은 원래 터가 좋지 않고, 먹고살기 궁한 사람들이 많으니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을 거야. 어차피 여기서 죽나, 거기서 죽나 마찬가지라면 시도라도 해보는 편이 낫지 않겠어?”
“생사의 문제라고 해도 욕심에 눈이 멀어 조심하지 않은 사람들도 조금은 잘못이 있겠지.”
“네에,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 안타깝네요.”
피가로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현자가 한 손으로 미스라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사크리피키움을 정신없이 주무르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팔짱을 끼고 턱을 만지작거리던 피가로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잠깐, 현자님. 위치가 어디라고? 아까 짚어준 곳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까?”
“이 즈음이에요.”
현자는 넓게 펼친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북쪽 나라에서도 약간 옆으로 틀어진, 중앙에 가까운 위치였다. 현자가 가리킨 지역을 보며 피가로는 연신 “어라, 어라라.”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치가 익숙하네. 살다 보니 이런 우연이 다 있구나.”
피가로는 자연스럽게 바다 앞, 절벽이 있는 오두막을 떠올렸다. 한때 피가로가 머물렀던 곳이자, 유성우가 내리는 날 파우스트가 그를 찾아왔던 장소였다.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 마침 그 근처였다.
“글쎄, 정말 우연일까?”
파우스트가 끼어들며 똑같이 의문을 제기했다. 말을 마친 그는 꼭 알아달라는 것처럼 자못 심각하게 피가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현자가 장소를 가리켰을 때에도 어딘가 할 말이 있는 눈치긴 했다.
“뭐야, 그 화법은. 나는 조금 별로네.”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파우스트는 일일이 대꾸할 기력도 없는 듯 한숨을 쉬었다. 예전이라면 한 마디 날카롭게 쏘아붙였을 것 같은데, 요즈음의 파우스트는 피가로에게 굉장히 물렀다. 어느 정도냐면, 인간관계에 예민하지 않은 이들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피가로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것처럼 계속 께름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파우스트는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피가로, 알고 있지? 무조건 네가 가야 해.”
“너도 마찬가지겠지, 파우스트.”
“그래. 어차피 당신을 혼자 보낼 마음은 없어.”
슬쩍 떠본 말에 파우스트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똑바로 마주 봐왔다. 상대가 올곧게 나오니 기가 죽은 건 오히려 피가로 쪽이었다. 파우스트의 진심 어린 걱정을 마주한 피가로는 순식간에 찌글찌글해져서 “으응…….” 하고 대충 둘러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스노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현자여, 언제부터 우리 세계의 언어를 읽을 수 있게 된 게야?”
“스노우님이 읽어 달라고 부탁하셨잖아요. 그럼 그 말은 대체 왜 하신 거예요?”
“본인은 현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을 뿐이네만.”
모두가 잊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제야 눈치챈 몇 명은 놀란 눈으로 현자를 바라보았다. 관심을 한몸에 받은 현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사실은요……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서 미리 콕 로빈 씨한테 이야기를 들어뒀어요.”
“음, 요컨대 읽는 시늉만 했다는 거로군.”
“그래도 기특해. 칭찬해 주마.”
“쓰다듬어주마.”
식탁을 가로질러 날아온 쌍둥이가 양옆에서 현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떨결에 칭찬을 받은 현자는 싫지 않은 얼굴이었고, 반대로 네로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신성한 식탁에서 장난치지 말라 하고 싶은데 상대가 상대라 참는 느낌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야.”
피가로는 네로를 보며 덧붙였다. 파우스트의 시선이 다시 피가로에게 고정되었다. 네로가 최선을 다해 피가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네로는 피가로가 거북한 것 같았다. 이해는 한다. 가깝게 지내기는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면 네로는 자기보다 연상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부분도 남 일 같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피가로와 네로를 주시하는 사이, 쌍둥이는 현자를 계속 칭찬하고 쓰다듬으며 어깨를 적어도 5cm는 더 띄워주었다. 어깨가 거의 귀에 붙은 현자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스노우는 이번에는 파우스트와 피가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는 분위기가 좋아 말을 꺼내지 못했다만, 너희 둘만 갈 필요는 없단다.”
“이번 일은 우리 북쪽 마법사가 힘을 빌려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마침 북쪽에서 나타난 재액이기도 하고 말이지.”
마침 피가로와 단둘이 가기에는 불안했던 참이다.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언제 어느 때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쌍둥이처럼 피가로가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조건이 좋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파우스트는 쌍둥이의 제안을 고맙게 받으려고 했으나, 피가로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건 싫은데요.”
화이트가 말을 보태기 무섭게 피가로가 딱 잘라 거절했다. 늘 에둘러 말하는 피가로치고는 제법 단호한 의사 표현이었다.
“이번 임무는 번잡하게 몰려다니고 싶지 않아요. 파우스트와 저, 두 사람이면 충분하겠죠. 둘이서 빠르게 해결하고 돌아오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피가로야, 우리말을 들으렴. 달이 차오르며 재액의 규모도 점점 커지고 있단다. 둘이서만 움직이는 건 위험해.”
맞는 말이다. 파우스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동의를 모른 체하고 반박했다.
“그만큼 마법사의 마력도 커지고 있죠.”
“고집이 세구나. 그대보다 오래 산 우리가 감이 안 좋다고 말하고 있는데.”
“예언은 아닌 거죠? 그럼 듣지 않을래요. 저도 감이 안 좋아서 둘만 가겠다고 하는 거라서.”
“한결같이 제멋대로인 아이로구나.”
“싫다고 했는데 계속 곤란하게 하잖아요. 제멋대로인 쪽은 과연 누구일까요?”
피가로는 한 마디도 그냥 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스노우와 화이트도 날선 태도로 피가로를 대했다. 그야말로 되바라진 제자와 고지식한 스승의 환장의 콜라보였다.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또다, 또 싸운다. 그나마 장난에 가까웠던 직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어느 쪽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팽팽하게 맞서는 그들을 본 현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들었다.
“저, 그러지 말고 혹시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설산에 생긴 녹지라니, 잘 상상이 안 가기도 하고 궁금해서…….”
현자는 안쓰러울 정도로 쩔쩔맸다. 마법사끼리 다투는 것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여전히 다정하고 성실했다. 이렇게 되면 답은 정해진 거였다. 현자에게 유독 약한 피가로는 결국 앓는 소리를 내며 항복했다.
“……현자님이 원한다면 나는 상관없어.”
스노우와 화이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자를 보호해 줄 마법사가 필요하겠구나. 이변은 빨리 해결할수록 좋으니 오즈를 부를까.”
그들은 피가로가 결정을 번복할 수 없도록 재빨리 쇄기를 박아버렸다. 연륜으로 다져진 노련함이었다. 피가로는 가시 돋친 말투로 반박했다.
“오즈는 싫어요. 하고많은 사람이 있는데 왜 하필 오즈예요? 좀 봐주시죠.”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바라는 것도 참 많구나.”
“제가 한 번 물러났으면 두 분도 똑같이 한 번 물러나야죠. 그게 당연한 거예요.”
“오즈가 있으면 그대가 원하는 대로 빠르게 일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자기 고향을 버리고도 그놈의 자존심은 여전히 북쪽의 마법사처럼 빳빳하게 세우고 있구나.”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이름이 세 번 나오기 무섭게 내내 식탁에 엎드려있던 미스라가 고개를 들었다.
“뭐 하러 오즈를 불러요? 어차피 그 사람 밤에는 마법도 못 쓰는데.”
“미스라,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니?”
“방금 일어났어요. 당신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호호호, 그것참 미안하게 되었구나.”
“지금 출발하면 되는 거죠? 《아르시무》.”
미스라가 공간을 가르고 문을 만들었다. 다짜고짜 식당에 문을 만든 미스라는 방금 막 일어난 사람답게 늘어지게 하품했다. 쌍둥이는 미스라가 만든 문을 보며 반색했다.
“빗자루를 타고 가지 않아도 된다니 좋구먼. 아이고, 허리야.”
“정말, 화이트쨩! 우리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니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스노우는 곧장 화이트를 끌어안았다. 화이트가 설정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유령이 노화된 육체로 인한 허리 통증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선 파우스트도 다소 부정적이었다.
대차게 콧방귀를 뀐 피가로는 눈을 반밖에 뜨지 않은 미스라에게 다 식은 음식을 밀어주었다. 마침 배가 고팠던 건지, 아니면 늘 배고픈 상태인 건지 미스라는 군말 없이 제 몫의 식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그래서, 최종 인선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금까지는 피가로와 파우스트, 우리들과 미스라, 현자쨩까지, 이렇게 여섯이구나. 조금 더 인원을 늘려볼까?”
“상관없어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몇 명 줄거나 늘어도 비슷하게 느껴지네요.”
대화가 길어질수록 미스라의 식사는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마법으로 열린 공간의 문이 점점 축소되다가 이내 종적을 감췄다. 밥을 먹느라 정신이 팔려 깜박 잊은 것 같지만, 저만큼 어려운 마법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게 대단했다.
“네로, 너도 갈래?”
“하하…… 난 됐어. 아무리 봐도 내가 낄 자리는 아니겠지. 이따 아이들 간식도 챙겨주고 싶고.”
파우스트는 짧은 고민을 거쳐 물었다.
“남쪽의 마법사는 어때?”
피가로는 아까보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애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자칫하다간 나의 상냥한 남쪽 의사로서의 삶이 완전히 끝나버린다고. 피가로 선생님은 아직 더 약한 마법사로 있고 싶으니까.”
그때, 옆에서 얌전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레녹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남아서 루틸과 미틸을 돌보겠습니다.”
“그래줄래? 레노라면 안심이지! 뭐,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은 아니지만.”
피가로는 레녹스가 건넨 호의를 덥석 물었다. 기다렸단 듯이 화색을 띠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레녹스는 그런 피가로의 태도가 더없이 익숙해 보였다.
“따라가지 않는 편이 더 자연스러우니까요. 마법관에 남아있을 두 사람이 피가로 선생님의 행선지를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 곤란하기도 하고…… 제가 잘 둘러대겠습니다.”
“그래그래, 약한 남쪽 마법사가 북쪽 마법사들과 함께 임무에 가다니, 이상하잖아. 분명 늑대 우리에 갇힌 양처럼 가엾다고 생각할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 할 것 같은데.”
“피가로쨩은 예전보다 상상력이 더 좋아졌구먼.”
하다못해 밥을 먹는 미스라도 불쾌한 얼굴을 했다. 피가로는 온갖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수한 비난의 눈길이 꽂히는 가운데, 레녹스만이 전혀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그 표현은 거북하네요.”
“왜? 직업이랑 관련 있어서?”
“네, 직업병인 것으로.”
파우스트는 레녹스가 목자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허리춤에 매달린 그의 가방에는 언제나 양이 들어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나저나 레노도 많이 늘었구나. 이렇게 든든하게 서포트를 해주다니.”
“늘었다니, 뭐가요?”
“응, 역시 취소.”
마음대로 칭찬하고, 마음대로 취소하고 아주 제멋대로였다. “뭡니까, 그게…….” 레녹스는 불만을 품은 듯 미간을 찌푸렸으나, 금방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봐도 ‘피가로 선생님은 늘 이런 식이니까 어쩔 수 없지’라는 태도였다.
“그러면 대충 정해진 것 같구나.”
“뭐, 괜히 미루지 말고 그냥 출발하죠? 저희는 그렇다 쳐도 두 분과 미스라가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죠. 이만해도 충분히 고급 인력이잖아요.”
“암, 그렇지. 맞는 말이야. 슬슬 출발할까.”
누가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랄까 봐, 금세 사이가 좋아진 그들은 맡겨놓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들었지? 미스라, 아르시무 해줘.”
“아르시무, 얼른!”
“하아, 귀찮아. 그러니까 진작 출발했으면 됐잖아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아르시무》.”
그걸 또 들어주는 미스라도 여러모로 대단했다.
*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출발한 그들은 아르시무의 힘으로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스라의 공간이동 마법은 정확도부터 신속성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래봤자 문 하나를 이동하는 거라 승차감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괜히 아르시무 아르시무 하는 게 아니었다. 아르시무를 아예 안 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타본 사람은 없다는 게 사실이었다. 미스라의 아르시무를 한 번이라도 타봤다면 그 맛에 중독되어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니까.
처음 임무지에 도착했을 때, 파우스트는 가장 먼저 눈앞의 장소가 자신이 알고 있는 곳이 맞는지 의심했다. 굉장히 낯선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게, 눈앞의 전경은 기억과 몹시 달랐다. 오두막도, 절벽도 없거니와 새하얀 눈이 아닌 짙푸른 녹음에 뒤덮여있었다.
도착하기 무섭게 피가로는 빗자루를 타고 높이 떠올랐다. 상공에서 보이는 모습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파우스트는 재빨리 자신의 빗자루를 꺼내 그를 뒤따랐다.
“평범한 녹지라기엔 초목이 빼곡한데. 이건 정글, 아니, 밀림이라고 해야 할지도.”
피가로의 말대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은 훨씬 장관이었다. 한때 작은 오두막과 무릎까지 쌓인 눈을 제외하고 텅 비어있던 적막한 장소는 주변의 설산과 동떨어진 것처럼 드넓은 녹지가 펼쳐져 있었다. 밖에서 안쪽의 모습을 살피려 해도 나무와 풀이 빼곡하게 자라있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피가로, 이 장소 기억하고 있어?”
“그렇게 물어도 말이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눈 덮인 오두막은 기억해도 이런 푸릇푸릇한 녹지는 처음이네.”
“그건 나도 그런데…….”
파우스트는 고도를 낮추며 피가로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여기, 당신의 마력이 느껴져.”
피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특별히 짚이는 건 없네. 그래도 한때는 여기서 살았으니까 희미하게 마력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때로부터 수백 년이 지났어. 아니면 최근까지 여기를 드나들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아니지만, 몇 번 정도는 찾아왔을 수도 있지. 적어도 수십 년 전까지는?”
피가로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두루뭉술한 말은 주제를 엇나가게 만들어 피로감을 증가시킬 뿐이다. 하물며 화자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파우스트는 짤막한 한숨을 쉬었다.
“매사에 철저한 당신이 흔적 같은 걸 남기고 다닐 것 같지 않은데. 내가 틀렸나?”
피가로의 입가에 자리한 미소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피가로는 정곡을 찔린 듯 순순히 인정했다.
“알겠어, 파우스트. 내가 잘못했어. 그냥 해본 말이야.”
“미리 말해두지만 화나지 않았어. 네가 이상한 말을 하니까…….”
“응, 알고 있어.”
그 말대로 피가로는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쌍둥이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상한 기분이 약간 좋아진 것 같았다. 하여간 특이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더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겠지. 일단 내려갈까?”
“그래.”
짧은 탐색을 마친 그들은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위에서 이변을 살피는 동안 밑에서도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머리를 맞댄 쌍둥이가 미스라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파하고 있었다. 품에 사크리피키움을 안은 현자가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무슨 대화들 나누고 있어요?”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두런두런 이어지던 말소리가 뚝 끊겼다. 누구도 바로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현자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차례를 넘겨받은 것은 화이트였다.
“미스라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말이야.”
“미스라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요. 뭐라고 했는데요?”
“글쎄, 안쪽에서 치렛타의 기운이 느껴진다지 뭐니?”
“미스라도 스승이 많이 그리운가 봐요.”
세 사람은 미스라의 말을 완벽하게 헛소리 취급했다. 보고 싶은 사람의 헛것을 본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상한 건 당신들이겠죠. 제가 치렛타의 기색을 잘못 읽을 리 없어요.”
아무도 믿어주지 않자 미스라는 공격적으로 반응했다. 그를 보며 피가로는 대놓고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파우스트는 그들이 말하는 치렛타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지만,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건 분위기로 대충 알 수 있었다. 파우스트는 그러지 말라는 듯 피가로를 쳐다보았으나, 얌전히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치렛타는 이미 세상에 없잖아.”
“…….”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언급한다면 누구라도 분노할 것이다. 설령 그게 뼛속까지 북쪽의 마법사인 미스라라 하여도 말이다. 파우스트는 미스라의 폭발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미스라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평소처럼 멍한 얼굴로 사색에 잠겨있을 뿐이다.
못된 말로 미스라의 입을 다물게 한 피가로는 현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것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보다 내부가 더 넓을 수 있다는 거야. 아마 다른 공간으로 이어져 있겠지. 안쪽은 미로의 형태로 되어있을 확률이 높아. 위험한 마수가 살 가능성도 있어.”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죠.”
현자는 비장하게 손을 말아 쥐었다. 그 모습을 본 피가로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현자님, 어쩐지 긴장한 것 같네. 곧 마주하게 될 미지의 장소가 두려워?”
“네에, 조금은요…….”
경직된 현자를 간질이며 사심을 한껏 채우고 있을 때였다. 미스라는 피가로의 어깨를 강하게 밀치고 사이에 끼어들었다. 덩달아 떠밀려 비틀거리는 현자의 팔을 잡아 바로 세운 미스라가 피가로를 노려보았다.
“피가로, 당신은 오늘도 혀가 기네요. 계속 그렇게 질질 끌겠다면 먼저 가겠습니다.”
“앗, 미스라, 잠깐……!”
사실상 통보였다. 미스라는 그 말만 남기고 모두를 지나쳐 성큼성큼 녹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피가로는 손을 뻗는 현자의 어깨를 잡고 말렸다. 울창한 숲에 다다른 미스라는 어느 순간, 빨려 들어가듯 종적을 감췄다. 피가로는 가설을 증명한 것처럼 우쭐거리는 시늉을 했다.
“쌍둥이 선생님은 안 들어가세요? 미스라가 없으면 현자님을 호위할 사람은 두 분밖에 없잖아요.”
스노우와 화이트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조용히 눈짓을 나눈 그들은 짐짓 난처하게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으응, 우리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걸.”
“저 안에서 무엇을 보여줄지 알고 있으니까.”
“안 들어갈 거면 왜 따라오신 거예요? 미스라도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자자, 약한 소리 말고 어서 들어가세요.”
당연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피가로는 쌍둥이의 등을 밀어 억지로 녹지로 데려갔다. 정말 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쌍둥이는 투덜거리면서 질질 끌려갔다. 그 뒤를 벌써부터 피곤한 낯을 한 파우스트와 현자가 따라갔다.
미스라가 숲에 빨려 들어간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아마도 재액의 영향으로 형성되었을 녹지는 가까이 접근하자 실제로 그들을 빨아들였다. 미약한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감각이 사라진 팔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었다.
공간에 삼켜지는 느낌이었다. 당황한 현자가 어설프게 손을 뻗어 파우스트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인지, 현자는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타인의 신체 일부처럼 느껴지는 몸을 어렵사리 움직여 현자의 손을 잡아주었다. 다행히 떨림은 금방 잦아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주변의 풍경이 바뀌어있었다. 입구는 온데간데없이 숲 한중간에 냉큼 버려져있었다. 멀대같이 키 큰 나무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하늘을 가린 커다란 나뭇잎과 두꺼운 줄기 탓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둡기 짝이 없었다. 인기척은커녕 동물이나 풀벌레 우는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러모로 음산한 숲이다.
파우스트는 주저앉은 현자가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며 일행을 확인했다. 바로 앞에서 쌍둥이와 피가로가 정강이까지 자란 풀을 걷어내고 있었다. 다행히 들어오는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지진 않은 것 같다.
“현자님, 무사해?”
“네, 네에. 무사합니다.”
아직도 현기증이 남아있는지, 파우스트의 손을 잡고 일어난 현자가 심하게 비틀거렸다. 가까이 다가온 쌍둥이와 피가로가 동시에 마법으로 등불을 띄웠다. 주변이 밝아지니 창백했던 현자의 안색도 약간 나아졌다.
“어지러우면 조금 쉴까?”
“아뇨, 괜찮아요. 앞으로 나아갑시다. 미스라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미스라가? 그럴 리가 없잖아. 먼저 가서 얌전히 기다릴만한 인물은 못 되지.”
현자가 먼저 손을 놓지 않으니 얼떨결에 계속 손을 잡고 있게 되었다.
“나무뿌리가 많으니 조심해.”
“……넵!”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거칠게 엉킨 나무뿌리가 들쑥날쑥하게 자란 풀에 뒤섞여 완벽한 함정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발에 채는 잔가지들을 밀어내며 이따금 균형을 잃는 현자를 지탱해 주었다.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던 그들은 금방 미스라와 마주쳤다. 놀랍게도 미스라는 정말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요.”
미스라는 딱 한 마디만 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무료한 태도로 보건대, 이곳에서 한참은 있었던 듯했다. 미스라를 확인한 쌍둥이와 파우스트, 현자는 그대로 피가로를 쳐다봤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스라가 기다린 이유는 머지않아 밝혀졌다. 미스라는 놀랍게도 이곳에 온 목적을 알고 있었다. 그는 파우스트와 함께 맨 뒤에 쳐져 있던 현자를 옆에 끼고 앞서갔다. 현자는 미스라에게 가까이 붙어 주위의 풍경을 구경했다.
“설산이 갑자기 녹지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궁금했는데, 의외로 평범한 밀림이네요.”
아니, 밀림도 평범한 건 아닌가. 이 세계에 와서 정상의 기준이 완전히 고장 난 현자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렇게까지 조용할 줄이야. 역시 아직 초입부인 건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상할 건 없지.”
이 상황과 전혀 관련 없는 쌍둥이의 시시콜콜한 잡담 사이로 피가로와 파우스트가 듣기만 해도 도움이 되는 정보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내부가 더 넓은 모양이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라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겠는걸.”
“그래, 우선은 흩어지지 말고 천천히 살피다 보면…….”
파우스트가 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불어온 약한 바람에 싱그러운 풀 내음과 소박한 꽃향기가 더해졌다. 집중하지 않으면 맡지 못할 정도로 은은한 향이었다. 이런 풀숲에 파묻혀 있는데 풀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그 편이 더 이상하다. 대다수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피가로와 미스라는 고개를 들어 바람이 불어온 쪽을 쳐다봤다.
슬슬 숲의 어둠에 눈이 적응하고 있었다. 얼기설기 얽힌 나무줄기 틈으로 빛나는 하얀 솜털이 별똥별처럼 날렸다. 자세히 보면 어떤 꽃의 홀씨였다. 홀씨가 일제히 떠오르는 곳에서 희미하게 물 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우와, 예쁘다…….”
현자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미스라가 입을 열었다.
“봐요, 치렛타의 기색이에요.”
미스라는 정말 그 말만 남기고 움직였다.
“현자님, 가요.”
“……네, 네? 미스라?”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미스라는 다짜고짜 현자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손을 잡고 달린다고 해야 할까. 현자가 당황한 틈을 타 멋대로 끌고 가는 모양새였다.
“잠깐 기다리거라! 얘, 미스라!”
“정말~ 말 안 듣는 아이라니까.”
놀란 쌍둥이가 불렀지만 미스라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또한 장소의 특수성인지, 미스라와 현자는 눈 깜짝할 새에 자취를 감추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길이 바뀌어 더 이상 따라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현자를 데려간 이상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치렛타의 기운 같은 게 느껴질 리가 없잖아. 오자마자 홀려버린 건가.”
쌍둥이는 거울을 맞댄 것처럼 똑같은 자세로 한숨을 쉬었다. 미스라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던 파우스트가 다급하게 물었다.
“미스라가 현자를 데려갔는데, 당장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괜찮을 거야.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미스라는 현자랑 잘 지내고 싶어 하니까.”
피가로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진정하라는 듯 파우스트의 어깨를 두드리기도 했다. 피가로는 미스라를 쫓아가는 대신 스노우와 화이트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그보다 아까 의미심장한 말을 하지 않았어요? 이 안에서 무엇을 보여준다고요.”
두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피가로가 채근했다.
“두 분은 짚이는 게 있는 거죠? 이제 그만 알려주시죠.”
“뜨끔.”
쌍둥이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피가로의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단지 뒷짐을 진 채 신발 밑창을 풀밭에 문지르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잘못을 들킨 아이 같았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는 시늉을 할 때처럼 꽥 소리 지른 쌍둥이가 번개처럼 앞으로 튀어나갔기 때문이다.
“기어이 미스라가 현자를 납치해버렸구나. 얼른 뒤따르자!”
“어서 가서 현자쨩을 구해야 해!”
서로의 손을 잡은 쌍둥이는 미스라가 간 방향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피가로는 스노우와 화이트를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잘 됐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아, 도망쳐버렸네. 이럴 거면 대체 뭐 하러 따라온 거람?”
“알고 있으면서 붙잡지 않았잖아.”
파우스트는 조용히 책망했다. 가능한 많은 사람과 동행하고 싶은 파우스트와 달리 피가로는 처음부터 그와 단둘이 조사하고 싶어 했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더니, 쌍둥이가 미스라를 따라가면서 마침내 피가로의 바람대로 둘만 남게 되었다. 정확히는, 피가로가 의도적으로 쌍둥이를 내쫓은 거였다.
“아무렴, 우리로서는 좋지. 조용하게 둘러볼 수 있고. 그렇지?”
“난 아직도 흩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봐, 늦었잖아. 자기들끼리 먼저 가버렸지. 저 사람들과 함께라면 현자님은 안전할 거야.”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파우스트는 눈을 뾰족하게 떴다. 그는 미스라를 찾으러 갈 거면 다 함께 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피가로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렸다. 무엇보다 방금 의도적으로 눈을 피했다. 이런 부분에서는 알기 쉬운 남자였다.
파우스트는 계속 피가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피가로는 방향을 비스듬히 틀면서까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집요한 시선에 식은땀이 났다.
얼마 전부터 파우스트는 이런 식으로 피가로를 캐내기 시작했다. 스스로 인정하긴 싫지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저주상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살아가고 있어도 파우스트는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하던 눈빛이었다. 저 눈을 마주하고서는 좀처럼 거짓을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먼저 항복한 것은 피가로였다. 피가로는 다시 파우스트 쪽으로 몸을 홱 돌려 눈을 흘겼다.
“……너 나쁜 버릇이 들었어.”
“그러는 당신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나? 옛날부터 나쁜 버릇이 몸에 배어있었군.”
“…….”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제자에게 혼이 나다니, 말년에 체면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피가로는 몸에 밴 나쁜 버릇대로 고개를 돌려 거듭 회피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래도 정보는 얻었어. 여기는 침입자의 과거와 얽힌 기억을 보여주는 모양이야. 환영 계통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질 나쁜 장난이다.”
미로처럼 생긴 숲에서 동행인의 과거를 강제로 엿보게 된다니, 벌써부터 불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피가로의 판단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적은 인원으로 오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둘만 떨어지게 되어서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오랫동안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적어도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과거에 대해서 대다수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반드시 과거를 보여줘야 한다면 피가로가 나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것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한시라도 빨리 이상 현상이 생긴 원인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
“어째서 이곳에 재액의 영향이 미친 걸까.”
“우연이라는 게 무섭지. 가끔 이렇게 놀랍도록 적중한다니까.”
“당신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우연이 아니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지 않을까.”
파우스트는 눈을 감고 마력을 널리 퍼뜨렸다. 혹시라도 주위에 다른 사람이나 동물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생물 반응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식물조차도.
적막한 숲속에서는 자신과 피가로의 말소리 빼고는 어느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나마 아까는 바람이라도 불었지만, 지금은 이곳의 어느 것도 도저히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때도 그렇다. 바람은 옅은 향기를 실어 날랐을 뿐, 작은 잎사귀나 수풀조차 흔들어 놓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오싹한 감각이 등골을 스쳤다.
“뭐가 됐든 불쾌한 장소야.”
“저기, 우리 여기서 같이 수행했던 일 잊은 건 아니지?”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고 나무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것이 파우스트가 스승에게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어디 보자. 그럼 우리도 빠르게 문제를 찾아볼까?”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알아서 따라붙었다.
“파우스트, 할 말이 있는 거지? 편하게 해도 돼.”
“……역시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빨라.”
한때는 피가로가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고 진심으로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오해를 할 정도로 피가로는 눈치가 빨랐다. 세상에는 어느 한 가지 뛰어난 능력을 가졌을 때 얻는 이득과 손해가 공존한다. 이 사람이 조금만 둔했으면 인생을 조금 더 편안하게 살지 않았을까, 지금에 와서야 이따금 생각한다.
“피가로, 솔직하게 말해줘. 마지막으로 여기에 찾아온 게 언제였지?”
“음, 잘 기억 안 나네. 너를 따라 중앙으로 간 뒤로 한 번도 돌아오지 않은 것 같은데.”
파우스트는 일부러 고집스럽게 정면만 노려보았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있구나.”
“나도 사람이니까. 망각은 신이 준 가장 큰 축복이지.”
그 한 마디로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피가로에게 그런 의도는 없었겠으나, 꼭 아직까지 과거의 잔재에 사로잡혀있는 자신을 꼬집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말을 끝으로 간신히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겼다. 어렵사리 사제관계를 회복했지만, 앞으로 갈 길은 여전히 멀고 험했다. 과거에 정을 나눈 시간보다 오해와 원망으로 얼룩진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지난 시간들을 덮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앞으로 남은 시간을 떠올리면 초조한 마음이 앞섰다.
“원래라면 여기 어딘가에 오두막이 있어야 할 텐데.”
“위치를 아는 거야?”
“아니, 감이야. 그 오두막에는 내가 마법을 걸어뒀거든. 언제 다시 찾아갈지 모르고, 일단은 추억이 담긴 곳이니까 보존해두려고 했지.”
파우스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지나간 일은 덮어두자고 결심했지만, 당시의 일을 떠올리고 좋은 점만 되살려 추억으로 삼는 것은 아직 자신에게는 무리였다. 하필 간밤에 꾼 꿈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파우스트는 결코 피가로처럼 될 수 없었다. 피가로처럼 자신의 사감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다. 이런 기분으로 피가로와 온화하게 대화를 나눌 자신이 없었다.
“이곳에서 당신의 마력이 느껴지던 건 그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지. 그것과는 별개의 이야기 같지만.”
“무슨 뜻이야?”
피가로는 아주 조금 난처하게 파우스트를 쳐다봤다.
“그게…… 원래는 오두막에 덧씌워진 마력을 따라갈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결계가 무언가에 의해 깨진 것처럼.”
“당신의 결계를 깨뜨리는 건 어지간한 마법사한테는 버거울 텐데.”
“옛날이라면 그랬겠지만, 나는 약해지고 있으니까.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데, 찾아오지 않은지도 오래되었고…….”
일일이 반응하고 싶지는 않지만, 피가로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참을 수 없이 어색해졌다. 피가로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든 주제였다. 지금도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구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인간이든 마법사든 정해진 수명에서 도망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 이후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웠으나, 숲에서 피가로의 마력이 느껴지는 이유는 아직도 알 길이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곳에 살았던 흔적이나 결계의 잔재가 남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꽤 먼 길을 왔지만 중간에 헤어진 네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각자의 고민을 안고 나아가던 중, 깎아지른 절벽에 도달했다. 유일하게 원래의 모습이 남아있는 장소였다. 물론 나무와 풀 따위에 둘러싸여 있는 만큼 완벽하게 같지는 않았다.
얼추 비슷하게 보이는 장소만 돌고 돌다가 나온 새로운 풍경에 그제야 속이 좀 트이는 듯했다. 유일한 문제는 절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는 거였다.
“밑으로 내려가 볼까?”
그러나 그것은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마법사에게는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원래라면 있어야 할 오두막이 없는 것을 확인한 피가로가 제안했다.
“일단 위에서는 눈에 띄는 게 없네. 여기서 내려다봐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여.”
“안개를 걷어낼 방법은?”
“해볼까나.”
명쾌하게 답한 피가로가 마도구를 꺼냈을 때였다.
“아니, 됐어. 내가 할게. 《사틸크나트·무르크리드》.”
그보다 빠르게 자신의 마도구를 꺼낸 파우스트가 마법을 사용했다. 매끄러운 거울 표면이 빛을 발하며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비추었다. 시야를 가린 안개가 순간적으로 걷히긴 했다. 안개 너머 한몸처럼 뒤엉킨 나무줄기가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금 겹겹이 낀 희뿌연 안개로 뒤덮였다.
그뿐 아니라, 사방으로 흩어진 안개는 곧 하나로 합쳐지며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부쩍 면적을 넓힌 안개가 절벽 위로 올라와 지상을 덮기까지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잠깐, 이 안개 더 짙어졌는데…….”
제대로 형체를 가지지 않은 탓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사방이 안개로 가로막혀 왔던 길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피가로는 소매로 호흡기를 막으면서 태평한 소리를 지껄였다.
“살짝 숨쉬기 불편하네. 그밖에 문제가 될만한 성분은 없는 것 같아.”
“피가로,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그건 내가 할 말이겠지? 이래 봐도 내가 네 스승…….”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이리 와.”
그는 대뜸 옆에 있는 피가로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피가로는 한숨을 쉬며 질질 끌려왔다.
“이미 가까워…….”
어째선지 미스라에게 끌려가던 현자가 떠올랐다. 현자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그래, 미스라에 비하면 파우스트는 선녀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파우스트는 몇 차례 마법을 사용했다. 마법은 똑바로 발동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의 방법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매번 같았다.
“파우스트, 당황한 건 알겠지만 일단은 그만두는 게 낫겠어. 파헤칠수록 더 짙어지기만 하잖아.”
“……알겠습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니 답답해서.”
방금 당황하지 않았다고 말하려 했다. 두 사람 다 그 사실을 알았다. 파우스트는 반사적으로 나가려는 변명을 혀를 깨물어서 참았다. 피가로는 오히려 웃으며 파우스트의 등을 살살 문질렀다.
“지난번 마법관이 습격당했을 때에도 다짜고짜 샤일록의 방 벽을 날려버렸다면서? 넌 여전히 성격이 급하구나.”
“죄송합니다. 고치려고 노력하긴 했습니다만…….”
“이거 봐, 당황하면 바로 옛날 말투로 돌아가 버리네.”
이런 상황에서도 피가로는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반면, 파우스트는 약간 억울했다. 확실히 한 번 틀어진 관계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나 보다. 오래전 그 시절이었다면 스승이 아무리 짓궂은 장난을 쳐도 그저 얼떨떨하게 넘겼을 텐데, 지금은 무려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까지 했다.
파우스트는 아주 잠깐, 피가로의 살집 없는 팔뚝을 꼬집는 상상을 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수풀을 부드럽게 끄시는, 시끄러우면서도 잔잔한 소리였다.
“물러나, 무언가 다가온다.”
“그래, 나도 귀가 있어.”
그리고 마력도 있지. 덧붙인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옆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어서는 파우스트도 피가로를 후열로 보내는 것을 거의 포기했다. 주위를 둘러싼 안개가 어떠한 거대한 압력에 조금씩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안개를 밀어내며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무심코 압도될 정도로 커다란 괴물이었다.
“……저건 뱀, 인가?”
“아마도.”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괴물은 흔히 아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크기는 무식하게 크지만, 날개가 달리지 않은 것을 보면 용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안개를 휘감아 머리와 몸통 일부만 보였다. 그마저도 한계까지 고개를 젖혀야 간신히 머리가 보였다.
기본적인 형태는 뱀이지만, 뾰족하고 단단한 비늘은 마치 갑각류처럼 보였다. 뱀은 특이하게도 머리를 꼿꼿이 들고 있었다. 넓적하게 벌어진 입에서 얇고 기다란 혀가 튀어나왔다. 크기가 워낙 크니 적은 움직임으로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아마도 재액의 영향을 받아 형편없이 뒤틀린 마수일 것이다. 재액의 원인을 밝힐 때까지는 되도록 상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물며 이렇게 시야가 극도로 제한된 곳에서는 승산이 바닥까지 떨어진다. 기척을 죽이고 냄새를 지우는 마법을 사용하려는 찰나였다.
“이미 늦었어.”
피가로의 말과 함께 갈라진 혀를 날름거린 뱀이 그들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뱀은 두껍고 기다란 몸통을 구불구불하게 말았다. 똬리를 트는 모습을 본 피가로가 외쳤다.
“파우스트, 온다!”
피가로는 마도구를 소환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외침에 비해 실속이 없었다.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마법은 나가지 않았다. 파우스트 또한 재빨리 마법으로 불길을 일으켰으나, 뱀은 딱딱한 외피로 튕겨냈다.
“……피가로님!”
통하지 않는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길게 자란 풀이 체중에 짓눌려 죄다 바닥에 드러누웠다. 두 사람은 흙바닥에 뛰어들다시피 쓰러졌다. 본의 아니게 피가로를 깔아뭉갠 파우스트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얼굴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당신, 왜 넋 놓고 있었어!”
“아, 그게.”
피가로는 답지 않게 당황한 듯했다. 이제 저 얼굴은 지긋지긋하다. 또 다시 변명거리를 찾는 표정이었다. 그는 넘어지면서 바닥을 짚은 자신의 손을 확인하고는 이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굼뜬 동작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뱀은 방해되는 나무와 수풀을 커다란 몸으로 때려 부수며 달려들었다. 몸집이 하도 크니 천지가 뒤흔들렸다. 파우스트는 다시 한번 마법을 발동했으나, 이번에도 기이한 움직임으로 몸을 휘며 등의 비늘로 튕겨냈다.
파우스트가 당연하다는 듯이 온몸으로 피가로를 감싸려고 할 때였다. 그는 강한 발길질에 옆으로 나뒹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겠다. 망할 체격 차. 느닷없이 걷어차인 파우스트는 버릇처럼 입술을 씹어 비명을 삼켰다. 두어 바퀴 데굴데굴 구르다가 불현듯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가로는 눈앞에서 집채만 한 커다란 뱀에 붙잡혔다. 튕기듯이 몸을 일으킨 파우스트가 다급하게 마법을 발동시켰다.
“《사틸크나트·무르크리드》!”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먹이를 삼키려던 뱀은 파우스트의 마법을 정통적으로 맞고, 날카로운 이빨로 피가로의 옆구리를 짓이겨놓았다. 커다란 아가리 사이에 몸의 절반이 끼었을 때,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피가로의 비명이라는 것은 반 박자 늦게 인지했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으니 당연했다.
척추를 꼿꼿하게 세운 뱀은 소리 없이 괴기하게 몸을 비틀었고, 내동댕이쳐진 피가로는 엉망으로 풀밭을 굴렀다. 수북하게 자란 풀이 완충제 역할을 한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그를 향해 뜀박질을 하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젠장, 피가로! 마법을 써!”
피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찢긴 걸레조각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져선 풀밭을 자신의 피로 새빨갛게 적시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호흡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의식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도구를 회수하기는커녕 상처를 봉합하기 위한 최소한의 마법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어째서 마법을 쓰지 않는 거지? 여러 가지 생각이 빠르게 교차하면서 초조해진 파우스트는 주저하지 않고 피가로의 앞을 막아섰다.
조급하게 펼친 방어막은 뱀의 돌진 한 번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깨졌다. 한곳에 응집한 마력이 사방에 파편을 튀기며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나갔다. 일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을 낮춘 뱀은 무언가를 확인하듯, 아주 가까운 곳에서 파우스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파우스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은 이끼 낀 숲처럼 따뜻한 녹빛이었다. 파우스트는 뱀의 눈을 마주하고 간밤의 꿈을 떠올렸다. 애틋하고 처량한 눈빛이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당혹감에 텅 빈 머릿속으로 어떠한 환영이 파고들었다. 어째서 내 꿈속의 당신은 나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건지.
그 잠깐의 방심이 크나큰 실책을 불렀다. 뱀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등 뒤에서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을 짚은 피가로가 질퍽하게 고인 핏물에서 몸을 일으켰다. 반쯤 찢긴 몸으로 상반신만 간신히 들어 올린 피가로가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한 마디 내뱉었다.
“……《폿시데오》.”
들뜬 흙먼지와 부서진 잔해 위로 떠오른 오브에서 눈부신 빛이 터졌다. 환한 빛무리가 한순간 숲을 뒤덮은 어둠과 안개를 전부 몰아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볼 시간 같은 건 없었다.
파우스트는 거대한 그림자에 짓눌려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척까지 다가온 뱀의 아가리였다. 커다랗게 벌어진 입은 마치 어두컴컴한 뱀굴 같았다. 그리고 통째로 삼켜지면서 맡은 지독한 악취와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익숙한 마력이.
0.
지금까지의 삶을 통틀어서 가장 빛나는 시기가 있었다. 얼마나 눈부신 순간이었냐면, 인생 최고의 황금기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릇된 태생, 수없이 반복된 기대와 실망,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만큼 너무나 당연했던 실패. 그 모든 시련을 넘어서 마침내 얻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 그것은 인생에 다시없을 한 번뿐인 기회였다. 쏟아지는 유성우를 등지고 그 아이가 문을 두드렸을 때, 그리고 그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을 때. 고립되어 있던 피가로의 삶은 크게 변화했다.
그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천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랜만에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후천적인 것인지 타고난 체질인지는 모르지만, 피가로는 누군가를 위해 헌신과 봉사를 할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파우스트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전하려고 했다. 계속 그 마음 그대로 변치 않고 이어갔어야 했다. 이래 봐도 수천 년 동안 헛된 기대를 일삼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몸이다. 기나긴 세월을 살아가는 마법사로서 인내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고작 백 년, 고작 백 년이다. 설령 파우스트가 알렉과 약속을 했더라도 어차피 상대가 죽으면 끝이었다. 알렉과의 결혼으로 그 아이가 마력을 잃을 일은 없었다. 실수하지 않도록 옆에서 올바르게 약속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지도해 주면 그만이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었고, 파우스트의 순탄한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것을 이용할 준비도 되어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었더라도 파우스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찰나의 눈부신 섬광, 별처럼 빛나는 제비꽃색 눈동자. 그 아이를 상대로는 어떤 미사여구도 아깝지 않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그 빛에 눈이 멀어 변질된 것은 피가로 쪽이었다. 순간의 욕심에 눈이 멀어 기회를 걷어차버렸다. 그 결과, 피가로는 새로운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자책과 고독의 늪에 절여져 깊숙이 매몰된 시간을 보냈다.
파우스트를 떠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어떤 일을 해도 시시하고 재미없는 건 어느 때고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피가로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타인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는 자의 말로는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파우스트의 곁을 떠날 때 느낀 것은 자유를 향한 해방감이 아니었다. 자신이 끔찍한 실패자처럼 느껴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이를테면 모래 위에 그려진 소리 없는 그림 같은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무의미한 허송세월이었다.
도저히 혼자 있을 기분이 아니라서 오즈의 성에 신세를 졌다. 혼자 있기 싫어서 고른 것이 하필이면 오즈라니. 어차피 선택지는 둘 중 하나로 정해져있었다. 동생제자 아니면 스승인데, 자기들끼리 싸워 한쪽이 죽어버린 실패의 흔적보다는 살아있는 실패의 흔적이 나았다. 적어도 후자는 타인이 아닌 자신의 실패니까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었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이 꼴이 된 데에는 어느 정도 오즈의 잘못도 있었다. 오즈가 심어준 실패의 기억은 피가로의 예상보다 더욱 강하게 마음을 압박했다. 사소한 일로 눈치 보고 비위를 살피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오즈가 뭐라 하든 꼼짝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즈는 피가로가 찾아와서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았다.
‘그래, 오즈는 원래 이런 녀석이었지. 나는 또 무슨 기대를 한 거지.’
피가로는 오즈의 성에 있는 수많은 빈방 중 하나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식객으로 지냈다. 식객이라고 해봤자 가장 구석진 방을 차지한 채 방 밖으로 한 발짝도 걸음하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영양을 섭취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고마웠던 적이 없다. 혼자 있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익히 알고 지내던 누구의 얼굴을 보든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어디 가서 말 못 할 허탈감에 몇 날 며칠을 가만히 누워만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이 몇 달이 지났을 수도 있고, 몇 년이 지났을 수도 있다. 세월의 흐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시간이 올바른 약이 되기를 바라면서 얇은 이불로 전신을 감싼 채 침대에 누워 무작정 잠을 청했다.
계속, 계속 계속 잠만 잤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꿈을 꾸었고, 전부 잊어버렸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다. 한때는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주제에 지금은 그 축복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오즈는 피가로를 방임했지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보다는 확실히 귀찮아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성가시거나 거슬린다는 감정은 피가로가 오즈에게서 분명히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고맙게도 겉으로 드러나 정답지를 들춰볼 필요가 없는 종류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다른 때라면 적당히 사렸겠으나, 피가로는 막 나가기로 결정했다. 돌로 만들 테면 그러라지. 이제 와서 사력을 다해 저항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오즈가 끼어들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세상의 종말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쪽과 한평생 척질 생각이 아니라면 이 정도는 알아서 감내하라는 생각이었다.
고독을 이해하기는커녕 정서조차 똑바로 발달하지 않은 녀석을 상대로 일방적인 동질감을 느끼며 외로움을 달랬다. 멋대로 오즈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실연의 아픔을 이겨내려 했다. 이런 삶의 방식에 회의감이 들기는 했지만 그냥저냥 흐린 눈으로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피가로는 오즈가 자신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도 얌전히 지내는 탓에 피가로 자체는 별문제가 없었으나, 문제는 그의 가까운 지인이었다. 정확히는, 멋대로 찾아와 당당하게 집을 들쑤시는 스승의 존재 말이다.
“피가로야, 언제나 기운 넘치던 그대가 이게 웬일이니?”
“요즘 통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 우리가 직접 만나러 왔다는 게야!”
“놀리러 온 거라면 이대로 돌아나가세요, 제발.”
피가로는 이불 속에 틀어박혀 이를 갈았다. 기어이 보기 싫은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왔다. 눈치껏 사라져주면 좋을 텐데,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방면에서 한없이 끈질기고 귀찮은 사람들이다.
“뭐가 문제인지 일단 말이라도 해보거라! 저번에는 무리하게 마력을 운용해서 한참을 앓아누웠다면서? 그것도 무슨 오두막에서 혼자 궁상맞게 말이야!”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스노우와 화이트는 동시에 달려들어 꽁꽁 싸맨 이불을 억지로 걷어냈다. 피가로는 이불 끄트머리를 붙잡고 버텼지만, 양쪽에서 달려드는 두 사람을 버텨내지 못했다. 눈 깜짝할 새에 이불을 빼앗긴 피가로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자꾸 이러실 거예요? 드디어 가는 귀도 먹은 건가요? 나가라고 했잖아요.”
“놀리러 온 거라면 나가라면서? 놀리러 온 게 아니니까 남아있지!”
“진짜 짜증나…….”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긴 했다. 요즘 오즈의 성 안에 칩거하느라 모든 연락을 무시했더니 답답함을 못 참고 한달음에 달려온 모양이었다. 피가로는 쌍둥이에게서 이불을 다시 뺏어오려 했지만 실패했다. 겉보기로는 허술한 것 같아도 쌍둥이는 빈틈이 없었다. 분통이 터진 나머지 살상 마법까지 사용했으나, 이번에도 가볍게 막아냈다.
피가로는 쌍둥이에게 진심으로 덤빌까 고민하다가, 이곳이 오즈의 성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만두었다. 아직은 쫓겨나면 곤란했다. 막돼먹은 제자가 공격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스승이나, 자기 집에서 객식구가 마법을 남발하는데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는 동생제자나.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곳에선 자신이 제일 약자였기에 무조건 참아야 했다.
사소한 다툼이 큰 싸움으로 번져 화이트가 돌이 된 이후, 쌍둥이는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에 집착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영혼으로 묶어 되살리고, 주기적으로 저택에 제자들을 불러 가장 안정적이고 즐거웠던 시절을 재현했다. 그래봤자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땅을 치고 후회해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본인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 특유의 추한 발버둥이었다. 피가로는 유령이 되고 한층 변덕스러워진 화이트를, 그리고 그의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스노우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들은 좋은 반면교사가 되었다. 설령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피가로는 절대 그들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 그런 소식은 누구한테 들은 거예요?”
“무슨 소식 말인가? 그대가 달이 가까워질 때 무리를 한 것? 아니면 그 뒤로 병석에 자리보전을 한 것?”
“다 알고 있으면서 묻지 마세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조용히 지냈는데, 재액을 해결하러 간 두 분이 어떻게 제 사생활을 다 알고 있는 거죠?”
피가로는 이 즈음에서 당연한 의문을 제기했다. 사실은 조금 더 일찍 물어봤어야 했다. 허리에 손을 올린 스노우와 화이트가 에헴,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깟 재액 따위, 우리 상대가 안 되지. 빠르게 처리하고 일찍 귀가했단다.”
“피가로는 마력을 숨기는 데 능통하잖아. 그런 그대가 작정하고 숨었을 때, 그걸 찾아낼 수 있는 마법사는 한 명밖에 없겠지?”
쌍둥이는 처음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다. 두루뭉술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답해주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은 그것과는 별개였다.
“아, 그렇군. 역시 치렛타인가.”
“예끼! 일부러 모른 척하지 말거라!”
불신으로 똘똘 뭉친 피가로는 뻔히 보이는 진실을 거부했다. 그는 오히려 정답을 알려준 스승을 매도했다.
“두 분도 참 너무하세요. 또 시시한 농담이나 하고. 오즈가 당신들한테 그런 걸 말할 리가 없잖아요. 저도 마지막으로 그 녀석 목소리를 들은 게 언제였는지 모른다고요. 스노우님과 화이트님도 별반 다르지 않겠죠. 게다가 오즈는 저한테 관심 없어요. 오즈는 귀찮은 걸 싫어하잖아요. 굳이 손댈 이유가 없으니까 살려두는 거지, 제가 죽으면 헐레벌떡 달려와서 마나석이나 씹어 먹을 테죠. 우리는 딱 그 정도 사이에요.”
“헐레벌떡…….”
쌍둥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피가로의 말을 되뇌었다. 뜻밖에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곧 측은함으로 바뀌었다.
“피가로는 아직도 오즈를 그렇게나 낯설게 느끼고 있구나.”
“천 년이 넘는 교제도 결국 그대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니…….”
“저만 그런 게 아니에요. 두 분도 마찬가지겠죠. 어차피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오랜 시간을 지켜봤어도 우리가 오즈에 대해 잘 모르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못내 입맛이 썼으나, 이상하게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쩌면 조금은 무던해진 걸지도 모른다. 단지 복잡하게 생각하기 귀찮은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지금은 두 분 얼굴 볼 기분 아니에요. 전 실패와 체념의 늪에 빠져있다고요. 죽고 싶을 정도로 우울하니까 조금 더 이 감정에 빠져있도록 내버려 두시죠.”
“헉, 방금 죽는다고 했어.”
“피가로야, 돌이 되면 곤란해!”
몸을 던진 쌍둥이가 목과 허리를 끌어안았다. 피가로는 두 사람과 함께 침대에 나뒹굴었다. 너무 오랫동안 꼼짝도 안 한 탓인지 두 사람의 체중을 견뎌낼 힘이 없었다. 그는 기력 없이 누워 달라붙는 쌍둥이를 밀어냈다.
“죄송한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네요. 아니, 사실 하나도 죄송하지 않아요. 되는대로 적당히 반응하실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오신 거냐고요…….”
“그야 피가로쨩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언제나 우리만의 방식으로 그대를 신경 써주었지 않니. 받을 건 다 받아 놓고 이제 와서 도움이 안 된다 말하니 서운하구먼.”
이마에 핏대가 섰다. 면전에 대고 상대할 기분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쌍둥이는 도무지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장난을 쳐야 할 때, 말아야 할 때도 구분하지 못하고 당연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만하고 이기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과 자신이 별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다시금 참을 수 없게 느껴졌다.
“시끄러워…… 오즈는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이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깽판 치는 것도 그냥 내버려두고!”
“어허, 이 사람들이라니. 말을 곱게 써야지.”
“오즈도 너를 걱정하고 있는 게야. 피가로가 벌써 수십 년간 이 방에 틀어박혀있으니까.”
“됐어요, 그런 허울뿐인 이야기. 더는 듣고 싶지 않아요.”
쌍둥이는 아무리 밀어내도 몇 번이고 다시 달라붙었다. 피가로는 끝내 포기하고 기이한 무늬가 새겨진 천장만 올려다봤다.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구나. 그건 피가로에게도 다소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확실히, 충격으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려는 의도였다면 꽤나 효과가 좋았다. 말마따나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다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원래 한곳에 처박혀 얌전히 있는 것과는 성미가 맞지 않았다.
이대로 대충 살다 생을 마감할 게 아니라면 어디로든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야 했다. 물론 오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그에게 이 이상 빚을 지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버릇처럼 스노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던 것 같다. 손 틈으로 가늘고 부드러운 올이 흘러내렸다. 그러고 있으니 문득 손가락을 감싸듯이 말려드는 곱슬머리가 그리워졌다.
추억과 미련이라는 것은 조금만 방심하면 너무나 쉽게 들이쳤다. 모르는 새에 한숨을 쉬었던 것 같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눈살을 찌푸린 피가로는 손바닥으로 스노우의 눈을 가렸다.
“그 아이 때문이지? 잃어버린 제자를 찾는 것을 도와줄까?”
“그럴 필요 없어요. 어디에 있는지 충분히 예상이 가거든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중앙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제가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죠.”
“……그렇구나.”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쌍둥이는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무기력한 제자를 끌어안은 두 쌍의 팔에 힘이 실렸다. 안겨있는 몸은 두 개지만, 느껴지는 온기는 하나였다.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생명의 무게가 느껴지는데도, 화이트가 안겨있는 오른쪽 옆구리는 여전히 시렸다.
“내일부터는 제대로 정신 차리고 지낼게요. 전부 다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예전처럼.”
피가로는 시체처럼 차가운 화이트의 손을 붙잡으며, 변명처럼 덧붙였다.
1.
어딘가에 몸이 반쯤 잠겨있었다. 흐르는 물이나 녹은 얼음 같은, 흠뻑 젖은 감각이 몸의 절반을 압도했다.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어서 죽을 만큼 추웠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데, 정말 위험한데, 몸의 생존본능이 마비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일어나. 움직여. 너는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누군가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나 그조차 물속에 빠진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았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뺨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축축한 뺨을 쓰다듬는 것이 다른 이의 온기라는 사실은 뒤늦게 깨달았다.
‘파우스트님, 파우스트님!’
차가운 몸에 닿는 체온이 기분이 좋았다. 애타게 부르짖는 목소리에 응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뜨세요, 파우스트님!’
너무나 낯익은 목소리였다. 파우스트가 아는 그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이런 식으로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산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언제나 느리고 차근차근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괴롭히는 문제가 있다면 기꺼이 나서서 해결해 주고 싶었다. 마음먹은 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눈을 뜨기 위해 수차례 무의미한 시도를 반복했으나, 그 노력은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낡은 시계추가 흔들리듯 천천히 의식이 흐려졌다. 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맥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벌어진 옷 틈으로 한기가 들이쳤다. 매서운 바람 소리에 속이 울렁거렸다. 모르는 사이에 잔기침을 터뜨렸던 것 같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조심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아플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피가로님, 파우스트님을 부탁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힘은 없었지만, 여기까지 자신을 데려온 사람이 다른 믿을만한 사람에게 제 신변을 맡겼다는 사실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혼몽한 가운데 한여름의 태양처럼 뜨거운 온기가 가시고, 하나의 인기척이 멀어졌다.
남은 한 사람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반드시 구해줄게.’
그 사람은 몇 번이고 뺨을 어루만졌다. 마치 얼음장 같은 손이었다. 뺨에 닿는 손은 점점 내려가는 자신의 체온만큼이나 차가웠다. 물기 어린 다정한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기력이 있었다면 딱딱하게 곱아든 그 손에 얼굴을 비볐을 터였다.
마음속에 있던 모든 불안과 걱정이 씻은 듯 사라졌다. 단지 한 사람의 말만으로 이다지 안정을 찾을 수 있다니. 어떠한 마법보다 더 신비로운 일이었다.
*
“윽, 머리야…….”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는 듯 골이 지끈거렸다. 당연하지만 과음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지독하게 현실감이 없었던 아침과 달리 이번에는 명확하게 원인을 알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마법을 써서 들끓는 두통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큰 효과는 얻지 못했다.
앙다문 잇새로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바닥을 짚은 파우스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쓰러져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졌다. 험한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어찌어찌 참아냈다.
‘여긴 또 어디야…….’
깨질 듯 아픈 것은 머리만이 아니었다.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면서 살을 에는 추위가 엄습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경련은 금방 전신으로 퍼졌다. 가물가물한 시야를 바로잡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파우스트는 전신의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마법으로 체온을 유지했다.
‘마력이…….’
몸이 따뜻해지니 겨우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몸을 순환하는 마력이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납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피부를 문질렀다. 동상에 걸린 손발은 감각이 둔하고, 살갗이 단단했다. 이미 더 나빠질 여지가 없었다.
파우스트는 바닥에 깔린 것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어쩐지 차갑다 했더니 손에 잡히는 것은 눅눅한 흙이 아닌 꽁꽁 언 눈덩이였다. 파우스트는 체온에 녹기 시작한 눈을 움켜쥐고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온통 허여멀겋다. 파우스트는 갑자기 눈부신 설원 한복판에 버려져있었다. 키가 큰 나무들 위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어두운 먹구름이 낀 하늘에선 흰 눈이 쏟아지고, 벌어진 입술 틈으로 끊임없이 희뿌연 입김이 흘러나왔다.
위화감의 정체는 금세 밝혀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몸에 닿을 때마다 마력을 조금씩 앗아가고 있었다. 아주 미미한 양이었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여 몸 안의 마력을 고갈시켰다. 그것만으로도 이곳에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용케 지금까지 누워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영영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다. 그마저도 몸에 둘러진 가호 덕분이었다. 이조차 없었다면 눈 한 번 떠보지 못하고 조용히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가 동상으로 죽는다니, 개죽음도 그런 개죽음이 없다. 살면서 수많은 죽음을 상정했지만, 그따위 허무한 죽음만큼은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었다.
‘피가로님…….’
가슴팍에 손을 얹은 파우스트는 한숨처럼 긴 숨을 흘렸다. 몸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피가로의 마력이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피가로가 사용한 마법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법이 아닌, 파우스트를 지키기 위한 마법이었다. 사용자와 거리가 멀어지고, 내외부의 충격을 받으면서 많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가호가 남아있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알이 시렸다. 황망하게 주저앉아있던 파우스트는 욱신거리는 눈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피가로와 합류해야 돼. 안되면 미스라나 북쪽의 쌍둥이라도.’
피가로가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렇게나 상태가 나빴는데, 그 거대한 뱀을 상대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을까. 가호가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생존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못내 답답했다.
‘그나저나, 아까 그건 뭐였지?’
정신을 차린 것과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였다. 파우스트는 흐트러진 옷을 단단히 여미면서 생각했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히 상상으로 치부하기엔 모호한 것들이 지나갔다. 모르는 새에 피가로의 사념이 흘러들어온 것 같다. 정확히는, 과거의 기억이.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말을 떠올렸다. 침입자의 과거와 얽힌 기억을 보여준다고 했던가. 무작위로 재생된 기억 중 하필이면 피가로의 것을 엿보게 된 모양이다. 꼭 봐선 안 되는 장면을 본 듯한,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들었다.
‘됐어.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파우스트는 타인의 치부를 엿본 것을 깊이 파고들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자신과 관련된 부분일지라도, 피가로 본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닌 이상 내색할 수는 없었다. 쌍둥이 선생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피가로라니, 무척 낯선 모습이라 흥미가 이는 건 사실이다만.
‘……아차, 안되지.’
이런 식으로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그 일을 떠올리고 만다. 파우스트는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파우스트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은 뱀에게 먹히는 거였다. 결정적인 시기에 커다란 뱀이 드리운 그림자에 짓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쩍 벌어진 아가리에서 지독한 악취를 맡았고, 등 뒤에서 피가로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를 들었다. 높이 떠오른 오브에서 쏟아지는 빛을 느끼면서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것 같다.
‘어리석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감아선 안 됐는데.’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잡아먹힌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후일을 도모할 거라면, 정신을 잃기 전까지 보이는 모든 것을 눈에 담아두었어야 했다. 물론 그때는 후일이고 자시고 이미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곧 다가올 통증에 대비하여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 현재의 막막한 상황을 만든 셈이다.
‘설마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눈을 뜰 줄은 몰랐지.’
비록 이상한 곳에 날려지긴 했지만, 일단 몸은 무사하다. 심각한 동상을 입어 사지가 무감각해진 마당에 과연 무사 여부를 따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긴 하다. 그래도 이쪽은 마법사니까, 의식이 있고 마력이 남아있으며 온전히 마법을 사용할 정신이 있으면 비교적 괜찮은 상황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보다 최악의 상황도 많았잖아.’
위태로운 마력과 얇은 옷은 들이치는 한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꽁꽁 언 발로 바닥을 디딜 대마다 저릿한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파우스트는 격통에 흐려지는 의식을 다잡으며 굳건히 걸음을 옮겼다.
울창한 숲은 어디 가고 이런 장소였다. 온도 차가 극명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낯선 장소였다. 파우스트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가쁜 숨을 내쉬며 힘겹게 언덕을 올랐다. 그러다 몇 번은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미끄러져 언덕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리에 힘이 풀리고, 단단히 얼어붙은 바닥은 미끄러워 자꾸만 발을 헛디디게 되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언덕을 오르던 중, 절벽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자욱한 안개가 걷히며 아까는 보이지 않던 오두막이 나타났다. 푸릇푸릇한 초목에 뒤덮여 있을 때보다 훨씬 눈에 익었다.
그제야 파우스트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처음 보는 낯선 장소라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나 익숙한 정경인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죄스럽고 한이 맺혀 끝내 밟아보지 못한 고향땅과 같았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이곳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파우스트가 이 장소를 어떻게 여기는지 생각하면 오히려 너무 늦게 알아차린 거였다.
수상쩍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한 언덕길,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흐릿하게 보이는 해안선, 그리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자리 잡은 아담한 오두막. 두엇이 살기에 적합한 오두막의 지붕은 빛바랜 회색이었다.
눈앞의 오두막은 짧은 시간 머물렀지만, 정이 많이 든 장소였다. 피가로와 함께 지낸 한 해, 스승에게 지도 편달을 받던 그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곳. 파우스트에게는 또 다른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길을 잃고 헤맸으나, 나중 가선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이렇게 오두막을 앞두고 있으니, 마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파우스트는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홀린 듯이 걸어갔다. 수북하게 쌓인 눈밭에 발이 푹푹 빠졌지만, 멈추지 않고 무모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렵사리 도착한 오두막은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노후된 건물답지 않게 뻑뻑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옛날과 변함없는 내부가 파우스트를 맞이했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보존 마법을 걸어두었다고 했던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실내를 마주하니, 새삼스레 감흥이 밀려왔다.
그러나 감상에 잠길 시간은 없었다. 이미 온몸에 감각이 마비되었다.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이 가장 먼저 벽난로부터 확인했다. 주변에 쌓인 땔감을 대충 던져 넣고, 마법으로 불을 붙였다. 무려 사백 년 만에 찾은 장소였지만, 곳곳에 비치된 기물 하나하나가 낯설지 않았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필요 없이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파우스트는 신발을 벗고 벽난로 앞에 앉아 잠시 불을 쬐었다. 익숙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전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꽁꽁 언 손발이 녹으며 통증이 찾아왔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마법의 도움이 없어도 통증을 견디는 것은 옛날부터 자신이 있었다.
순식간에 몸이 노곤해졌다. 바닥난 마력만큼이나 몸도, 마음도 피로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잠들 수는 없었다. 동상에 걸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응급처치도 없이 잠에 빠져든다니, 그거야말로 신박한 자살행위였다.
파우스트는 온통 트고 짓무른 눈가를 문질렀다. 벌겋게 부은 피부를 벅벅 문댔더니 그제야 졸음기가 가셨다. 그는 적당히 큰 그릇을 챙겨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짐 덩어리처럼 무거운 몸은 매사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바깥은 매섭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는 것이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눈사람이 되어버릴 뻔했다.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산더미같이 쌓인 눈을 그릇에 담아 허겁지겁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혹여 찬바람이 들이칠 새라 문을 단단히 닫고, 벽난로의 열기로 담아온 눈을 녹였다.
아까 확인한 바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 외에 바닥에 쌓인 눈은 마력을 앗아가는 성질이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은 비상시를 대비해 아끼는 것이 좋았다. 지금은 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대다수의 일을 수작업으로 해야 했다.
파우스트는 따뜻한 물로 곱아든 손발을 골고루 녹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긁히고 찢긴 상처의 출혈이 완전히 멎었다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끓인 물로 환부를 깨끗하게 닦은 뒤, 옷자락을 찢어 상처 부위에 감았다.
정신을 차리니 언제나 앉던 자리에 앉아있었다. 피가로가 자주 앉아 쉬던 안락의자, 그 앞에 조금 높이가 낮은 투박한 나무의자가 바로 파우스트의 지정석이었다. 고된 훈련에 녹초가 되어 의자에 축 늘어져있으면, 가까이 다가온 피가로가 머리를 쓰다듬고 별사탕이 녹아든 따뜻한 음료를 건네주었다.
집을 떠나기 전, 파우스트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지만, 동시에 하나뿐인 동생도 돌봐야 했다. 아직 어린 동생은 아직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였다. 파우스트는 몸이 불편한 조부모와 동생을 챙기면서 수발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사소한 부분을 챙기는 건 파우스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가로는 달랐다. 더없이 고귀한 그분은 파우스트만큼이나 남을 돌보는 게 익숙해 보였다.
피가로는 지친 파우스트를 앉혀놓고, 그간의 세월로 축적된 이야기를 들려주며 엉킨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주었다. 따듯한 불 앞에서 굳은살 하나 없이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 있자면 스멀스멀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다 가끔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스승의 과거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피가로님에게도 자신처럼 보살펴야 할 가족이 있었을까? 머리를 다듬어주는 손길이 익숙한 것은 그 때문인지,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당시에 품은 의문은 결국 최후의 최후까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왜 하필 지금 그 생각이 나는 걸까. 푸르뎅뎅하게 질린 발가락을 문지르던 파우스트는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겨울 호수처럼 잔잔하게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울컥 치민 감정을 억눌렀다.
피가로가 엄청나게 걱정되지만, 당장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부끄럽게도 자기 한 몸조차 똑바로 건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기껏 재회해놓고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면, 일단 쉬고 나서 출발하는 게 나았다. 파우스트는 고민 끝에 냉정한 이성을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팔다리가 납처럼 무거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번 결정을 내리자, 누적된 피로가 눈꺼풀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시야가 일그러지며 눈앞이 가물거렸다. 거의 기절하듯 잠이 밀려오면서, 모르는 사이에 눈이 감겼다. 파우스트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먹구름처럼 몰려드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2.
잠들어 있는 동안 꿈을 꾸었다. 엄밀히 꿈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아마도 맞을 거라 생각한다. 그립고 아픈 추억이 깃든 오두막에서 잠들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즈의 성에서 칩거하던 피가로는 이제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부 다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예전처럼.’
그 말이 단지 쌍둥이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피가로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이 부분에선 피가로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짐 하나 없는 가벼운 몸으로 오즈의 성에서 나온 그는 가장 먼저 여러 나라를 둘러보며 세계의 정세를 살폈다.
놓친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가로가 끝까지 피하는 것이 있었다. 중앙의 나라와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 보다 상세히 말하자면, 피가로는 파우스트와 관련된 소식을 노골적으로 피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듣고 싶지 않아서, 혹은 그것을 듣고 나면 견딜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또다시 실의와 후회의 늪에 빠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지내다가, 수십 년간 방구석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처럼 지냈다. 그렇게 기나긴 세월을 고립 속에서 보낸 끝에 간신히 바깥세상을 돌아다닐 기운이 났다.
멀리서부터 찾아온 쌍둥이 스승의 존재와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등을 떠밀어주었다. 억지로라도 원래의 삶을 되찾아야 했다. 피가로는 지금까지의 부진을 잊기 위해 더욱 활발하게 움직였다.
잃어버린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다시금 궁핍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자연스럽게 무리에 섞여 그들과 어울리고, 일방적으로 도우며 자기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했다. 때로는 겁도 없이 덤벼드는 고향의 마법사와 생사를 건 결투를 벌이며 살아있음을 실감하기도 했다.
주인장이 특히 마음에 들었던 서쪽 국가의 단골 가게에도 갔다. 실컷 마시고 기분 좋을 정도로 취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활보했다. 가벼운 충동으로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다. 결국 금세 질려 헤어지고 말았지만, 한 번 생긴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마법사가 으레 그러듯이, 우연한 만남은 아주 먼 훗날의 재미로 남겨두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깃털같이 가벼운 인생이었다. 그야말로 머리가 텅 빈 사람처럼 살았다. 무엇에도 깊은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그때그때 끌리는 일만을 찾아다녔다.
그래, 그 말이 맞았다. 파우스트에 대해서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관련된 소식도 전부 원천 차단했다. 아무리 가벼운 소식이라도 일단 듣고 나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너무 막 살았는지 뒤에서 구설수가 돌기도 했지만, 대다수 ‘타고난 기질이 북쪽의 마법사니까 어쩔 수 없다’라는 식으로 간단히 정리되었다. 게다가 피가로는 ‘변덕스러운 북쪽 쌍둥이의 제멋대로 제자’라는 별호까지 있었다. 피가로가 과거 마왕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전혀 관련 없는 타인에게 기분을 납득시키고, 감정의 기복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꽤나 편리한 일이다. 누구와도 긴밀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던 피가로는 별종 취급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필이면 광대와 다를 바 없는 서쪽의 마법사까지 자신을 괴짜 취급하는 건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말이다.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루하고 식상한 나날들. 조금의 특별함도, 목적도 없는 그런 정처 없는 시간 말이다. 머리 아픈 문제는 내려놓은 채 슬슬 인생의 방황을 즐기고 있을 무렵, 피가로는 과거의 인연을 만났다.
학습된 버릇처럼 베넷 바에 찾아간 피가로는 마감 시간까지 가게 사장과 어울렸다. 장미의 가시처럼 까다롭고 아름다운 샤일록은 세계정복 시절부터 이어진 묘한 인연이었다. 샤일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는 과거의 행적 탓에 피가로의 발문을 껄끄러워했지만 이제는 그저 흥미롭게 여기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을 접대해온 샤일록은 분명 피가로의 마음에 뻥 뚫린 구멍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쪽의 상심을 읽어냈음에도 흥미 본위로 파고들지 않는 것은 샤일록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하기야, 괴짜가 득시글거리는 서쪽 국가에서 이름 석 자를 걸고 장사를 하며 살아온 그는 눈치가 여간 빠른 것이 아닐 것이다.
하늘 높이 떠 있는 재액이 어두운 밤거리를 비추는 야심한 시각, 베넷 바를 나와 거리를 걷던 피가로의 뒤를 누군가가 조용히 밟았다.
서쪽 국가는 최근 경기가 좋지 않았다. 원래부터 빈부격차가 심각한 지역이었지만, 부와 향락의 도시로 유명한 서쪽 국가의 이면에는 술과 약에 취해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좋은 옷을 입고 여유롭게 거리를 거닌다면 누구든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피가로는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시비에 휘말려봤다. 기분이 좋을 때는 눈이 먼 가엾을 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었고, 기분이 나쁠 때는 그들이 더 이상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에 시달리지 않도록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심정으로 마음껏 허점을 드러냈다.
그렇게 유유히 거리를 걸어갈 때였다. 길게 늘어진 피가로의 그림자를 뒤따르던 사람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람은 빠르게 달음박질쳐 피가로의 앞을 가로막았다.
“피가로 가르시아, 이곳에서 당신을 만날 줄은 몰랐군.”
사내는 피가로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유감스럽게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피가로는 취기가 도는 머리로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결과는 같았다. 풍기는 기운을 봐선 마법사임이 분명하지만, 이런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사람 따위 기억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우연히 마주쳤다고 하기에 피가로는 며칠 동안 자신을 뒤쫓는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줄곧 소란스러운 삶을 살아온 탓에 사람들의 시선은 익숙했다. 언제 어디서든 이목을 끌어모으기 마련이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
사내는 오래전부터 피가로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사내는 이곳 사람이 아니었다. 은근하게 풍기는 기질도, 독특한 억양과 익숙하면서도 낯선 복식 모두 서쪽 국가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긴 시간 동안 주위에 물어가며 피가로를 찾은 모양이었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방방곡곡을 돌아다닐 정도의 집요함이라니, 아주 조금이지만 흥미가 생겼다. 과연 어느 쪽일까. 올바른 답을 내려주는 신을 원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소문을 접하고 흥미를 느껴 접근하는 사람일까.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건대, 배배 꼬인 원한 관계일 수도 있겠다. 원한을 살만한 짓은 수도 없이 하고 다녔으니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피가로는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역할이 주어지든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발생한 이벤트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피가로는 이 상황을 즐길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로 흘러갔다.
“나를 기억하나? 나는 과거, 알렉 그랑벨을 필두로 한 혁명군에 속해있던 마법사다. 일개 병사에 불과하지만, 파우스트님의 밑에서 그분을 보좌했지.”
사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위축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계속, 계속 당신을 만나고 싶었다. 그날 당신이 파우스트님을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불쾌함이었다. 마법사는 쓸데없이 오래 사니까 이런 귀찮은 일이 생긴다. 중앙 국가와 혁명군, 파우스트에 관한 소식을 지금까지 어떻게 피해 다녔는데. 결국 이렇게 운명적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혁명이 성공으로 끝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처음부터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을 이념으로 내세운 주제에, 중앙 국가가 이상하리만치 마법사들에게 박한 대우를 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거기까지는 아무리 모른 척해도 사람과 섞여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듣게 되는 부분이었다.
그 이상의 이야기는 궁금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더는 그쪽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 편이 서로에게 좋을 거라 확신한다.
“이유가 궁금했구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내가 네게 일일이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나?”
피가로는 턱을 비스듬히 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로 불편한 기분을 담아 마력을 쏟아내자, 한순간에 압도당한 사내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도 결코 등을 보이지는 않았다.
자기보다 강한 마법사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고도 도망치지 않는다니, 용기가 가상한 녀석이다. 아니면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거나.
“……그래, 넌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런 쇠약한 몸으로 잘도 나를 찾아 여기까지 왔군. 먼 길을 돌아왔는데 이대로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채 죽는 것도 안타까우니 알려주도록 할까.”
당연하게도 좋은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려고 한 건 아니었다. 이유를 알려주기로 한 것은 심술이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하루를 망친 것에 대한 일방적인 벌이다.
“혁명군에 합류한 것도, 그곳을 떠난 것도 단순한 변덕이었어. 나는 처음부터 손님에 불과했으니 운신이 자유로웠거든. 이거면 충분한 답이 됐을까?”
충동적으로 못된 말을 내뱉어 상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유구하게 이어져온 나쁜 버릇이었다. 모진 말을 들은 사내는 눈물을 흘렸다.
“고작 그런 이유였나? 고작 그런 이유로 파우스트님을 버린 건가?”
상처 주고 싶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막상 원하는 반응이 돌아오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사내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얼굴이 초췌한 외관과 어우러져 무척 불쌍해 보였다.
피가로는 작게 혀를 찼다. 이래서야 영락없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꼴이다. 스스로 악당을 자처하다니, 풍요의 거리에서 공연하는 싸구려 연극보다 몇 배는 질 나쁜 구도였다.
“너야말로 번지수가 잘못됐어.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너는 당사자가 아니잖아. 파우스트가 직접 찾아오면 모를까, 내가 너 같은 것에게 미안해할 이유는 없을 텐데?”
“당신은 어떻게 파우스트님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있는 거지? 당신이 떠난 뒤로 파우스트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녕 모르는 건가?”
이 즈음에서 피가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세한 말이 나오기 전에, 보다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다. 평범한 마법사가 자신이 믿고 따르던 상관을 두고 떠난 사실 하나만으로 이토록 증오심에 가득 차서 자신을 찾아다닐 리 없는데.
파우스트에 관한 일은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일단 이야기를 듣고 나면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할 걸 알았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그 아이를 보고 싶을 터였다. 그래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가며 모든 소식을 멀리했다.
파우스트가 어떻게 되었는데?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본능인지, 기이한 자존심인지 모를 것이 필사적으로 욕구를 억눌렀다. 피가로가 묻지 않아도 사내는 말을 이어갔다.
“옛 왕도를 점령한 혁명군은 해체되었다.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을 내세우던 알렉 그랑벨은 마법사를 배신하고, 오로지 인간을 위한 나라를 세웠다.”
“……알렉이 배신을 했다고?”
“정말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군. 그 긴 세월 동안 당신은 관심이 없었던 거야. 짓궂은 농담 따위가 아니라, 진실로 파우스트님을 헌신짝처럼 버린 거였어.”
일순 말문이 막혔다. 되묻기 위해 달싹인 입술에서 한탄을 닮은 묵직한 숨이 새어 나왔다. 불현듯 뻥 뚫린 가슴이 답답해졌다. 재액이 바짝 다가온 날, 알렉이 약속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전부 잊고 싶어 헛된 시간을 보냈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파우스트를 지키고 곁에 두고 싶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반드시.’
하늘에 뜬 달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카락도, 시린 바다처럼 푸른 눈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알렉 그랑벨의 존재 자체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알렉이 피가로와 마찬가지로 파우스트의 행복을 바라고 있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아이를 행복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특별했던 것이다.
약속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을 부러워했다. 쉽게 약속을 입에 담는 인간을 질투하고, 배신을 일삼는 그들에게 실망하며 돌아섰다. 알렉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짧은 생애를 살아가는 인간일 텐데.
영원한 것도, 당연한 것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피가로는 자신이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당신의 그 변덕 때문에 파우스트님은 목숨을 잃었어! 당신이 있었다면, 파우스트님은 그런 치욕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분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저주하며 돌이 되었다.”
머리를 감싼 사내가 몸부림쳤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쫓기듯, 실재하는 악몽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악을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 때문이야. 전부, 당신이 잘못한 거다. 당신이 파우스트님을 망친 거야. 당신이 떠나지 않았다면 파우스트님은 그렇게 부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거야. 그분은 언제나 우리 마법사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말없이 사라진 당신을 감싸기 위해 인간들과 맞섰는데…… 차라리 처음부터 당신이 없었다면, 당신 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파우스트님은 그때 그런 식으로 화형 당하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사내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강한 마음은 때에 따라 기원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사내는 격렬한 증오와 원망이 불러일으킨 저주에 삼켜지고 있었다.
거리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다 죽어가는 쇠진한 몸을 쥐어짜 끌어낸 마지막 발악이었다. 애초에 원망할 대상이 잘못되었다. 원래라면 피가로가 아니라 배반자인 알렉을 향해야 할 저주였다. 이 정도의 얄팍한 저주는 마도구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피가로는 가볍게 저주를 받아쳤다.
“좋은 걸 알려줘서 고마워. 그럼 마땅한 보답을 해야겠지.”
그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주문을 외웠다. 받아친 저주가 사내에게 되돌아가는 것보다 피가로의 마법이 빨랐다. 사내의 몸은 발끝부터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미 저주에 삼켜진 사내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투명하게 얼어붙은 팔다리 위로 살얼음이 끼고 서리가 맺혔다.
사내는 딱딱한 얼음 결정이 되더니, 이내 산산조각 나 부서졌다. 수천 개로 갈라진 얼음조각과 마나석이 사방에 튀며 시간차를 두고 빗물처럼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크고 작은 결정들은 단단하게 뭉친 눈 알갱이 같았다.
사내가 돌이 되면서, 되받아 친 저주는 갈 곳을 잃고 자연히 소멸되었다. 피가로는 무감각한 눈으로 바닥에 흩뿌린 마나석을 내려다보았다. 생전 사내가 몸에 품은 마력의 양처럼 탁한 빛을 흘리는 마나석을 바라보다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파우스트가 화형을 당해? 나를 저주하면서 돌이 되었다고? 거짓말이다. 그 애가 그렇게 쉽게 죽었을 리 없어.’
무언가 오해가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피가로가 아는 파우스트는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었다. 수많은 위기를 넘나들며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라 소중한 친우에게 배신당해 불에 타 죽었다니,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그의 제자가 그렇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을 리 없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보지 못한 순간에 그 애가 죽었을 리 없어. 그렇게 허무하게 돌이 되었을 리가…….’
피가로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정신없이 걷다가 어둡고 비좁은 골목에서 멈춰 섰다. 부릅 뜬 눈이 초조하게 주위를 살폈다. 말아 쥔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다.
이 세상에 그 아이가 없을 수도 있다니. 파우스트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니. 파우스트의 곁을 떠날 때부터 어느 정도는 받아들였던 일이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되새기는 순간, 숨이 막히고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런 식으로 이별을 맞이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함께 있지 않더라도 어디선가 그 아이가 즐겁게 지내고 있다면, 멀리서나마 그의 행복을 빌어주자고 생각했다. 그것이 못난 스승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파우스트의 마나석. 마나석은 어떻게 되었지? 그것만이라도 되찾아야 해.’
전신에 도는 취기는 완전히 빠진지 오래였다. 피가로는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면서도 벽에 손을 짚고 나아갔다. 파우스트가 정말로 죽었다면, 아까 그 마법사가 파우스트의 죽음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리 희망을 품어도 도저히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파우스트의 마나석을 되찾아서 뭘 어떻게 할 셈이지? 억울하게 죽은 그 아이의 돌을 먹을 셈이야? 하나뿐인 제자를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수천 가지 생각이 빠르고 복잡하게 교차하며, 덩달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지금 당장 중앙으로 가야 할까? 그곳에 가서 파우스트를 찾아야 할까?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알렉을 문책하여 파우스트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야 할까?
이제 와서 부산을 떤들 무엇이 달라질까. 마법사는 시신조차 남기지 않는데, 그의 마나석을 찾아 가족의 품이나 고향땅에 돌려보낸다 해도 무엇이 달라질까. 애초에 제자를 버리고 도망친 스승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걸까. 자격 이전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내가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기나 할까.
피가로는 세차게 타오르는 불길에 삼켜지는 파우스트를 떠올렸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치부했으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산 채로 불타는 파우스트를 상상했다. 사무치는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는 파우스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파우스트도 아까 그 마법사처럼 저주를 퍼부었을까? 꿈과 이상을 맡겼던 친우를, 그리고 먼 미래를 함께 하기로 했으면서 멋대로 자신을 내친 스승을. 줏대 없이 자신을 배반한 사람들을 저주했을까?
그 애는 꿈에서라도 나를 보고 싶었을까. 한 마디 말없이 떠난 나를 저주할 정도로 좋아했던걸까. 절체절명의 순간에 정말로 나를, 한 번이라도 생각했을까. 최후의 순간에 소중한 친우보다도 나를 먼저 떠올려주었을까. 내가 떠난 뒤에 줄곧 나를 그리워했을까.
파우스트, 만약 네가 그랬다면 나는.
‘……역겨워.’
속이 메스꺼워지며 토기가 치밀었다. 피가로는 아무도 없는 구석진 골목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오랫동안 굶주려 피골이 상접한 사람처럼 애타게 사랑을 갈구했다. 지독하고 지긋지긋했다. 추하고 나약하며 이기적이었다.
‘최악이다, 나란 놈은.’
떨리는 손으로 팔뚝을 움켜잡은 피가로는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달을 올려다보며 순간적으로 울컥 치민 감정을 억눌렀다. 그대로 요동치는 감정이 잠잠해질 때까지 한참을 웅크려있었다.
*
가까운 지인의 부고를 접했을 때 보이는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다. 얼음의 숲에서 화이트가 스노우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을 당시에도 그랬다. 오즈와 느긋하게 세계를 전복시키던 피가로는 멀리서 강렬한 파동을 느끼고 가장 먼저 오즈의 안색을 살폈다.
오즈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눈을 끔벅이다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게 끝이었다. 중간에 몇 마디 대화가 더 오가긴 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화이트가 돌이 된 뒤로, 오즈는 한 번도 스노우를 찾아가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원래도 도통 살가운 구석이 없는 녀석이었다. 오즈를 다시 만난 것은 스노우가 제자들을 일괄적으로 호출했을 때였다.
스노우의 손을 잡고 있는 화이트를 본 오즈는, 조금 당황했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스노우는, 그들의 스승은 그 사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주었다. 피가로도 앞서 스노우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똑같이 당황하여 언성을 높이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화이트의 죽음 이후 오즈는 성에 틀어박혀 죽은 듯이 지냈다. 반대로 피가로는 더욱더 밖으로 나다녔다. 하다못해 스스로 오두막에 처박혀있을 적에도 그는 마음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사람을 찾아 돌아다녔다.
과거 혁명군이었음을 자처하는 마법사를 만나고, 피가로는 먼저 중앙으로 향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찾은 중앙 국가는 피가로가 기억하던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짧게는 수십 년, 길어봤자 백 년이다. 그 사이에 모든 것이 사라져있었다. 알렉도, 파우스트도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히 그들이 살아온 흔적은 남아있었다. 사람은 무엇이든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남기고 간 흔적을 통해 자신을 추억하도록, 그리하여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죽기 전에 남긴 흔적이 전부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중에는 분명히 거짓이 섞여있었다.
피가로는 성 파우스트 성당에 찾아갔다. 해가 뜬 낮 시간에 방문객과 뒤섞여 내부를 관람했다. 그곳에선 매년 돌아오는 건국절을 맞이하여 초대 국왕 알렉이 사용한 보검 칼라드볼그를 전시하고 있었다. 탁 트인 홀에는 한쪽 팔이 없는 알렉의 초상화와 함께 파우스트의 태피스트리가 걸려있었다.
개방된 공간을 전부 안내한 가이드는 관광객을 이끌고 성당 밖으로 나왔다.
“여러분, 왕성 동쪽 홀의 창문에 있는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가 보이시나요? 초대 국왕 폐하께서는 수양을 위해 떠난 성자 파우스트가 이 성을 둥지처럼 여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다고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시면 보라색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죠?”
금일 성 파우스트 성당을 찾은 관광객은 모두 인간이었다. 가이드는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 마법을 부렸다. 멀리 있는 사물을 상에 비치게 하여 가깝게 보이도록 만드는, 간편한 마법이었다.
“보라색은 성스러운 마법사 파우스트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초대 국왕 폐하께서는 성자 파우스트가 다시 성으로 돌아왔을 때, 그분이 직접 마법으로 보라색을 더해 작품을 완성시키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관광객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피가로는 한구석에 가만히 서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마법사는 인간에게 봉사해야 한다며, 모두가 당연하게 말했다. 동시에 인간과 마법사가 화합하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다. 피가로에게는 그들이 그리는 미래가 그리 긍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편파적이고 식상한 의견이었다.
파우스트가 화형 되었다는 말은 중앙의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알렉은 파우스트가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도록 만발의 준비를 갖춰놓았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심증은 확신이 되어갔다. 정말 모든 일이 온전히 바라던 형태로 끝이 났다면, 파우스트는 결코 알렉을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 마법사가 옳았다. 머나먼 타향까지 와서, 피가로는 마침내 파우스트가 돌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외면 다음에는 도피였다. 파우스트의 죽음을 어떻게든 잊으려 애썼다. 소식을 듣지 못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여느 때처럼 평범하게 지내려고 했다. 일부러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친분을 넓히며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무리였다.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커다란 기둥에 묶여 산 채로 불타는 파우스트의 모습이 망막에 맺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아이가 내지르는 비명이, 원망과 저주의 말이 언제 어디서든 이명처럼 들렸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너절거리는 파우스트의 모습이 머리 한구석에 눌어붙어 떠나지 않았다. 빛이 들지 않는 자리에 선 파우스트는 한때 뜨겁게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그 눈빛으로 피가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연약한 사람의 마음이 불러낸 형상은 무섭도록 생동감이 넘쳤다.
결국 피가로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믿음과 책임을 져버린 대가는 맹렬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현실이 된 악몽에 쫓길 차례였다.
피가로는 북쪽을 떠난 지 불과 한 해도 넘기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를 뚫고 날아온 그는 까마득한 절벽 위, 눈 덮인 산골짜기 어딘가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빛바랜 회색 지붕을 가진 오두막은 밤새 내린 뽀얀 눈에 덮여있었다. 인기척은커녕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장소였다. 이곳을 떠날 당시, 피가로는 가벼운 흥미와 기대를 안고 있었다. 유성우의 사자 덕분에 긍정적인 의미로 변했지만, 원래 이곳은 뼈아픈 실패를 곱씹는 고행의 장소였다.
오두막이 유지되도록 마법을 걸어둔 이유는 전부 파우스트와 얽힌 추억 때문이었다. 그저 추억을 되새기는 일기장 용도에 불과했으니,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밖에 지나지 않아, 이런 마음으로 이곳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피가로는 오두막에 걸었던 결계와 보존 마법을 해제했다. 여전히 뻑뻑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공간이 그를 반겨주었다. 그간 시간이 멈춰있었던 내부는 마법 덕분에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신발에 묻은 눈을 털고 들어간 피가로는 벽난로와 주변에 쌓인 땔감을 쳐다보았다. 가볍게 손끝을 퉁기자, 벽난로에 불이 붙으며 어두운 오두막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몸에 밴 습관이 맞는 자리로 알아서 이끌었다.
피가로는 어느새 벽난로 앞의 안락의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투박한 나무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빈 의자를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으니 희미한 잔상이 아른거렸다.
언제나 지켜보던 제자의 등이지만, 자세히 보면 살짝 달랐다. 파우스트는 엉망으로 엉킨 머리를 풀어헤친 채 피가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더 사적이고 은밀한 기억이었다. 비밀이라고 말하기도 뭐 한, 오로지 파우스트와 피가로 둘만이 공유하는 시간 말이다.
이렇게 우스꽝스러울 데가! 피가로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리운 장소로 돌아오자마자 하는 것이 보고 싶은 사람을 추억하는 거였다. 뭐, 그것까지 예상하고 이곳에 발을 들이긴 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오두막에 돌아왔냐면, 간단한 이야기다. 피가로는 지난 과오를 돌아보다가 답 없는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애써 외면하고 도피해도 소용없었다. 잘못 파고든 생각은 그대로 커다란 구덩이가 되어 피가로를 끌어들였다.
그 아이를 사랑했다.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고민한 결과, 어디에도 이 마음이 진실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결국 사사로운 감정으로 떠나버렸다면, 먼저 손을 놓아버렸다면, 그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지 않을까? 오즈가 그랬듯이, 나도 똑같은 짓을 저질러버렸는데.
피가로는 절대 스노우처럼 될 수 없었다. 파우스트를 사랑하지만, 그처럼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런 한편으로 피가로는 그에 준하는, 어쩌면 그 이상으로 최악의 사람일지도 몰랐다.
달빛이 드리운 길을 따라 차가운 바닷물에 대책 없이 뛰어들었던 옛날을 떠올렸다. 어리석은 짓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어린 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 했기에, 피가로는 파우스트에 관한 기억을 잠시 묶어두기로 했다.
때로는 자신을 잃는 것이 편할 때도 있다. 절망 속에서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만약 죄책감으로 평생을 괴로워해야 한다면, 이 커다란 실수를 감당하며 살아갈 자신이 없다면, 언젠가 견딜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봉인해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망각은 신이 내린 가장 큰 축복이다. 감히 신을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피가로는 그 자연스럽고 고마운 선물을 직접 만들어내기로 했다.
기억을 날리는 방법은 아주 쉽다. 우선 술을 진탕 마시고, 깨끗하게 비운 술병으로 머리를 내리치면 된다. 만약 그걸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보다 정확하게 원하는 기억을 지우고 싶다면? 그때는 더욱 정밀한 방법이 있었다. 한낱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 없는 것이 있기에 비로소 마법이 존재한다.
타인의 마음에 개입하는 것은 굉장히 까다로운 마법이었다. 마력의 성질이 맞지 않거나 조금만 미숙하면 바로 뇌를 진탕으로 만들 수 있었다. 백치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그건 자신의 마음을 건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복잡한 이론과 미세한 오차를 잡아내는 실력, 수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큰 무모한 행동이겠지만, 피가로는 달랐다.
‘사고를 지배하는 것도,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는 것도 지겨울 만큼 해봤지.’
전매특허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자신 있는 분야였다.
‘나라면 가능해.’
망설임은 씻은 듯 사라지고, 거짓말처럼 마음이 후련해졌다. 피가로는 자리를 깔고 본격적으로 연구에 돌입했다. 여전히 마음은 불편했으나, 이것 또한 머지않았다. 파우스트에 대해서도 어차피 곧 잊는다고 생각하니 마음껏 추억할 수 있었다.
특기라 해도 기억과 감정에 손을 대는 것은 근본적으로 난해한 마법이었다. 자주 사용한 것과는 별개로 단 한 번도 가볍게 다루지 않았다. 피가로 역시 마법사였기에, 몸이 아닌 마음을 조종하는 행위가 잔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론은 머릿속에 있었지만,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몇 번은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겁이 나기도 했다.
피가로가 원하는 것은 한 덩어리로 압축된 천여 년의 기억을 분리하여 파우스트와 관련된 기억만 도려내는 일이었다. 단순히 기억을 봉하는 것은 가벼운 충격에 매듭이 풀릴 위험이 컸다. 반대로 깔끔하게 날려버리자니, 언젠가 그 기억이 필요해질 가능성도 있었다.
무엇보다 파우스트의 존재는 피가로에게 너무나 무겁고 중했다. 스스로 파우스트에 관한 기억을 지우기로 했지만, 그것이 평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뿐인 제자가 이대로 허무하게 잊히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도려낸 기억을 미리 준비해둔 매개에 옮겨 담는다. 북쪽의 마법사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한 피가로의 마력을 견딜 수 있는 마도구는 아무 데서나 쉽게 구하지 못했다. 피가로는 매개가 될 마도구를 구하기 위해 쌍둥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자기들이 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꼬치꼬치 캐묻던 그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리지만, 덕분에 좋은 물건을 구했으니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어느 날은 얼굴 전체가 피로 흠뻑 젖은 채 깨어났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흘러나온 핏물이 말라붙은 덩어리가 되어 달라붙어 있었다. 재검토한 이론을 실험에 옮겼다는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주문을 외우고 바로 정신을 잃었나?’
아마 그럴 것이다.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심하게 지끈거리는 머리로 실패 요인을 되짚었다.
또 어느 때는 한숨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하게 깨어났다. 안 그래도 요즘 통 잠을 잘 수 없어 곤란하던 차였다. 어느 정도 힘이 있는 마법사라면 식욕도, 수면도 마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으니 상관없지만, 역시 오랫동안 잠에 들지 않으면 뇌가 마비되어 버리는 것이다. 지금처럼 바쁜 시기에 머리가 텅 빈 깡통이 되어버리는 건 진심으로 곤란했다.
‘바닥에서 잠이 든 기억은 없는데, 이상하네.’
딱딱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찌뿌듯한 어깨와 허리를 풀어주다가, 불현듯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미간을 찌푸린 피가로는 자신의 손을 살폈다. 손톱이 깨지고 벗겨져 곳곳에 피가 묻어있었다. 손톱 밑의 살도 온통 찢어져 너덜거렸다.
다친 손을 치료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러 기자재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바닥에 가늘고 긴 핏물이 띄엄띄엄 묻어있었다. 꼭 누군가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할퀸 모양새였다. 당연하지만 그런 짓을 저지른 기억은 없었다.
피가로는 완벽하게 원상태로 복구된 손으로 갈변한 핏물을 따라 그리다가 이내 잊어버렸다. 무엇이든 기억에 남길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맹세컨대 죽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본인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그의 마법은 무척 섬세하고 밀도가 높았다. 빠듯하게 조인 이론을 통해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마법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줄 알았던 마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애매하게 발동한 방어기제가 뇌에 깊숙이 침투하는 마력을 수차례 튕겨냈다.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적대적인 것으로부터 방위를 펼치는 것은 일종의 습관 같은 거였다. 과거 스노우와 화이트가 오즈를 주웠을 무렵, 오즈의 무시무시한 마력에 압도되어 무의식중에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게끔 열심히 갈고닦았던 것이 떠올랐다.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이것을 막는 방법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생존에 도움이 되는 본능을 억누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실제로 도움이 된 적도 많고 말이다.
하는 수없이 이론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실패 요인을 찾은 것은 긍정적이었다. 이로써 또 한 걸음 나아간 셈이다.
옛날에, 북쪽 나라를 휩쓴 이름 모를 전염병의 치료제를 찾기 위해 자신에게 직접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일부러 면역력을 낮추고 무방비한 상태로 만든 다음, 병자들이 거주하는 마을에 들어가 생활하며 병을 얻어왔다.
북쪽 국가 특유의 열악한 환경 탓에 발병률도, 치사율도 매우 병이었다.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그의 경우 손발이 썩어 문드러지고 구토가 멈추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긴장으로 인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육체를 마력으로 유지하며 수백, 수천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몸을 다양한 체질로 바꿔가면서 여러 이론을 내세웠으나, 대부분은 효과가 없거나 미미했고, 약이 되는 것도 있었으며 오히려 독이 되는 것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못 볼 꼴도 많이 봤다. 인의를 위한 노력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봤더라면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정도로 추잡한 몰골로 지내기도 했다. 병자 특유의 퀴퀴한 냄새뿐만 아니라, 진물과 토사물, 산 채로 썩어가는 악취 등을 풍겼던 적도 있다.
이토록 연구에 매진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고작 병 따위로 허무하게 스러지는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뜨겁게 타올랐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은 적지 않은 짜증을 유발했다. 이상하게 자꾸만 조급해졌다. 어쩌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주를 받은 걸지도 모르겠다. 완벽하게 튕겨냈다고 확신했는데, 본인도 모르는 틈에 허점을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천명으로 여겼던 아이의 죽음, 그에 얽힌 인간의 배신. 그게 이렇게까지 동요할 일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끝내 멈출 수 없었다. 유달리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보내고, 피가로는 마침내 준비를 마쳤다.
엉망이 된 오두막에서 오브를 꺼내든 피가로는 연달아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아무런 문제도 없어. 다 잘 될 거야.”
두려움으로 목구멍이 바짝 조여들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에 느껴본다. 귓가에 울리는 익숙한 비난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자신을 어르고 달랬다. 마음의 자유를 위해 그동안 기울인 노력과 결심이 무색하게, 뱃속은 배배 꼬이며 순식간에 거북해졌다.
사람은 영원히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공포라는 감정은 누구나 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앞을 가로막는 벽이 되기도 하고,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공포가 있기에 우리는 자신의 몸을 돌보고, 무모한 행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
몸을 사리는 데에는 공포가 필요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보이지 않는 공포 따위에 짓눌려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공포를 뛰어넘을 때였다. 그 아이에게 말했던 대로,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느니 차라리 앞을 가로막는 장해물을 뛰어넘는 거다. 그래야만 비로소 속박에서 벗어나 편해질 수 있었다.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피가로는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간 보아온 사랑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비이성적인 행위였다. 때로는 이타심이 넘치고, 때로는 이기심이 가득하며, 가끔은 한없이 담백하면서도, 또 어느 때엔 더없이 질척거리기도 했다. 어떤 표현으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었다. 그 논리에 맞지 않는 기적을 아주 잠깐 이해한 것 같았다.
기억을 지우려는 이 순간마저도 파우스트가 보고 싶었다. 그 아이의 미소를, 한여름 햇살처럼 따스한 빛을 흘리는 자색 눈동자를 다시 한번 마주하고 싶었다. 당장은 잊더라도 언젠간 떠올릴 것이다. 한평생 사랑하고 그리워할 것이 분명했다.
“《폿시데오》.”
아주 희미하고 옅은 빛이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피가로는 몸을 휘감는 부드러운 기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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