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파우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파우스트는 엉망이 된 랩을 망연히 둘러보았다. 깨지고 부서진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심각하게 파손된 기물들을 보니 눈앞이 캄캄해져서 절로 한숨이 났다. 이렇게 큰 소란이 일어난 이상,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레녹스, 잠깐 나 좀…….”
레녹스는 파우스트의 뜻을 귀신같이 알아듣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파우스트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앉으며 어깨를 빌려주었다. 이제는 산산이 부서져 아무것도 남지 않은 어시스트로이드의 텅 빈 눈구멍이 이쪽을 쳐다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든 통증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한 생명을 책임지지 못한 죄책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파우스트는 반파된 어시스트로이드에서 힘겹게 눈을 떼고, 레녹스의 부축을 받아 복도로 나갔다.
복도의 불은 비상등을 제외하고 모두 꺼져있었다. 미약한 불빛만이 흐릿하고 어두운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꽤 큰 소란이 있었음에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늦은 새벽, 평소라면 몇 명은 개인 연구를 위해 남아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황금연휴를 앞두고 모두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때, 레녹스가 파우스트의 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파우스트 선배, 저기 보세요.”
“……아.”
파우스트는 레녹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창밖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형형색색의 휘황찬란한 네온 사인들은 전부 꺼졌고, 에너지로 운행되던 열차는 멈춰 섰으며, 다수의 차량은 도로 한복판에서 정지해있었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모든 빛이 사라진 세상은 먹먹한 어둠에 잠겨있었다.
대규모 정전 사태가 일어난 것은 높은 확률로 그들이 원인일 것이다. 미간을 모으고 있는데,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다. 아무래도 정전은 연구소가 위치한 일대에서만 발생한 일인 듯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이었다. 파우스트는 레녹스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복도의 불이 꺼졌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미 연구소는 비상전력체계로 들어간 것 같았다. 폴몬트 라보라토리는 이 폴몬트 시티에서 가장 정전 대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장소일 것이다. 그야 시티의 에너지 대부분을 이곳에서 공급하고 있으니까.
시끄러운 경보음은 여전히 랩 전체에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경보를 해제할 방법을 모르기에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지금쯤 이변을 알아차린 시티 폴리스가 자세한 확인을 위해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사건이 미칠 여파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코피는 간신히 멎었지만, 귀에서는 아직도 이명이 들렸다. 망망대해에서 부표 하나에 의지해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마침 같은 생각을 했는지, 레녹스는 파우스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도시가 짙은 어둠에 삼켜지고 혼란이 가중되는 와중에도 연구소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경보음이 멈추지 않음에도 그들이 그런 기분을 느낀 이유는 이 랩에 아직 한 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가르시아 부장, 그 한 사람 때문에.
이 난리통에도 가르시아 부장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그쪽에도 무슨 문제가 생겼던 걸까? 험난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 솔직히 걱정보다는 원망이 앞섰다. 파우스트는 가르시아 부장의 개인 랩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며 탄식을 토해냈다.
“부장님은, 어째서 오지 않으신 걸까.”
그 의문을 입 밖에 내선 안되는 거였는데. 레녹스는 파우스트를 한 번 곁눈질할 뿐, 섣불리 말을 얹지 않았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본디 의심이라는 것은 반복해서 곱씹고 소리 내어 말할수록 더욱 심화되기 마련이다. 특히, 동경하는 대상이자 상사에 대한 의심은 결국 자신을 좀먹을 뿐이다.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그런 당연한 것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경황이 없었다.
레녹스는 파우스트를 벽에 기대어 앉힌 뒤, 휴대 단말을 들었다. 낡고 흠집이 많은 구식 휴대 단말은 얼핏 보기에도 오래된 티가 났다. 익숙하게 단말을 조작해 연구소의 전력을 끌어온 레녹스는 어디론가 연락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매스꺼워 주의를 집중할 수 없었으나, ‘병원’과 ‘부상자’라는 단어는 어렴풋이 들렸다.
비상등의 흐릿한 불빛마저 멀어지고, 의식은 검고 깊은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아주 잠깐, 파우스트는 무의식 속에 갇힌 것처럼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때마침 방금 전에 들었던 ‘알렉’의 피맺힌 비명이 귓전을 스쳤다. 그러자 파우스트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고정되었다.
‘알렉’, 아니, 그 어시스트로이드가 랩에서 탈출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들을 떨쳐내고 랩에서 빠져나간 어시스트로이드가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테러를 일으켰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졌을 것이다.
이 사건에 걸린 것은 파우스트의 명운만이 아니었다. 프로젝트 자체가 문제가 된다면 함께 참여한 레녹스도 무사할 수 없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레녹스에게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힐 뻔했다. 사실, 이미 파우스트는 레녹스에게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고,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직접 만든 기체를 엔지니어의 손으로 부수게 만들다니, 그것도 그렇게 우악스럽게…… 도무지 고개를 들 낯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시스트로이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을 벗어나 봤자 자신에게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이 세상은 어시스트로이드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 어시스트로이드는 인류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어디에도 도구를 걱정하거나, 도구를 위해 마음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어시스트로이드를 보호하는 법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랩을 벗어나 자유를 찾으려 한들, 어시스트로이드는 혼자서 살아갈 길이 없었다. 모든 어시스트로이드는 목뒤의 인터페이스 포트에 관리 정보가 내장되어 있고, 오너는 언제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어시스트로이드는 어떤 경우에도 오너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당장 이곳을 뛰쳐나가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디를 가든 제약과 위협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어시스트로이드의 분노는 정당했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어시스트로이드에게 감정을 부여했고, 멋대로 기억과 인격을 주입하여 옛 친구로 정의 내렸다. 인간보다 몇 배는 월등한 두뇌를 가진 어시스트로이드는 눈을 뜨자마자 모든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평생 누군가를 연기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영원히 속박된 삶과 절망적인 미래를.
못할 짓을 하고 말았다. 알렉에게도, 그리고 그 어시스트로이드와 레녹스에게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죄의 무게가 뒤늦게 어깨를 짓눌렀다. 문득 두렵고 막막해졌다. 사람의 몸으로 감히 신을 모방하려 했던 이 죄를 어떻게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지, 이 죄를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선배, 파우스트 선배.”
얼마나 지났을까. 레녹스가 파우스트의 어깨를 흔들었다.
“되도록 깨어계세요. 구급차가 옵니다.”
어느샌가 잠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느리게 눈을 깜박인 파우스트는 빠르게 접근하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팔짱을 낀 피가로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제게 보고를 올린 건 레녹스였어요. 듣기로는 파우스트가 직접 보고를 하려고 했다는데, 제 발로 구급차에 오른 그 애는 한동안 절대안정 진단을 받았거든요. 아프고 힘든 사람에게 사정을 듣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이 대신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죠. 레노도 그 자리에 있던 당사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레녹스 본인이 그것을 원했다. 파우스트는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다시 그날의 악몽을 떠올릴 여력이 없었다.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한 몇 없는 경우였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고를 올려준 레녹스 덕분에 피가로는 늦지 않게 후속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담당의는 이야기를 들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볍게 손뼉을 마주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피가로가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어쩌면 오랜 인연인 담당의에게 옮았는지 모를 그런 사소한 버릇 말이다.
“가르시아 씨,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죠. 두 사람이 비상호출을 눌렀을 때, 가르시아 씨는 왜 응답하지 않으셨나요?”
“…….”
피가로는 한쪽 눈 밑을 찡그리며 입을 비죽였다. 그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꼭 부모 몰래 편식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자체가 피가로에게는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았다. 담당의는 그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괜찮아요. 가르시아 씨가 편한 대로 하시면 돼요.”
“……아뇨, 말할게요.”
그 말이 전환점이 되었다. 피가로는 오기를 부리듯 고집스럽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폭주 사고가 발생했던 그 새벽에, 저는 랩에 있었지만 두 사람을 도울 수 없었어요. 아니, 돕지 않은 거겠죠. 부끄럽게도 비겁하게 호출을 무시하고 안전한 곳에 숨어있었으니까.”
말을 하면서도 왼쪽 이마를 문지르거나 손톱을 깨무는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담당의는 피가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제게도 변명거리는 있어요. 너무 개인적인 치부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지만…….”
“어째서 두 사람을 도울 수 없었나요?”
피가로는 고개를 돌리며 거부 의사를 표했지만, 그럼에도 침묵하지는 않았다.
“화이트님이 눈을 떴거든요.”
“화이트가…….”
담당의는 펜을 입가에 대고 눈을 크게 떴다. 화이트는 피가로가 제작한 쌍둥이 어시스트로이드 중 하나였다. 과거 사고에 휘말려 부서진 후, 기나긴 수리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거의 산산조각이 나 새로 만들었다고 하던데, 화이트를 완성한 뒤에도 피가로는 좀처럼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이트는 원인불명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지금도 피가로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고 있는 스노우와 달리 화이트는 오랫동안 가동되지 않았다. 몇 번을 점검해 봐도 눈에 띄는 오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화이트는 아무리 마나 플레이트를 넣고 부팅을 해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스스로 눈을 뜨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얼추 완성했다고 해도, 카르디아 시스템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으니까요.”
피가로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러고는 강박처럼 까치집이 된 머리를 다시 깔끔하게 정리했다.
“아무튼, 저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개인 랩 안쪽에서 화이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건 가르시아 씨에겐 기회였겠네요.”
“정말 다시없을 기회였죠. 파우스트와 레녹스에게는 미안하지만, 호출 소리 같은 건 아예 들리지도 않았을 정도로.”
오랜만에 눈을 뜬 화이트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무려 1년 반 만에 정신을 차렸음에도 언제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막힘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피가로야, 기억나니? 그대는 우리를 만들자마자 가장 먼저 부모를 잃은 사고에 대해 물었었지.”
모처럼 재회했으니, 조금 더 다정한 대화를 나누어도 좋았을 것이다. 안부를 묻고 서로를 걱정하는, 그런 부모 자식 같은 시간을 보내는 편이 이로웠을 터였다. 그러나 화이트는 눈을 뜨자마자 불편한 주제를 꺼냈고, 피가로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화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피가로의 손을 붙잡은 채 말을 이었다.
“그때 우리는 충분한 답을 주지 못했어. 정확히는, 그럴 수 없었지. 그대의 기억에 의존해서 만들어진 우리는 몇 번을 생각해도 결국 답을 알 수 없었으니. 아직도 포기를 하지 않은 걸 보면 그대는 그 일을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죠.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는데, 누가 옳다구나 하고 물러나겠어요? 확실한 답은 알지 못해도 추론 정도는 가능할 거 아니에요?”
피가로는 짜증을 내면서도 화이트의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손까지 가져와 작고 부드러운 아이의 손을 온전히 감쌌다. 발열 기능이 안겨주는 거짓된 온기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의심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 기억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두 분은 스노우님과 화이트님, 그 자체니까. 두 분을 만드는 데에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이런, 피가로는 참 고집이 세구나. 서른 넘어서까지 성가시게 구는 남자는 수요가 없을 텐데, 이걸 어쩜 좋니?”
“……됐어요. 언제는 뭐 신경 쓰신 것처럼.”
말은 그렇게 하지만, 피가로는 전혀 싫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 전 당신과 스노우님이 싸운 이유가 제일 궁금한데.”
“스노우가 말하지 않던?”
“스노우님이 말했다면, 당신에게 묻지 않았겠죠.”
“그래, 그 말도 맞구나.”
화이트는 잔잔하게 웃으며 피가로의 손등에 남은 한 손을 마저 포갰다.
“스노우가 떠나려고 했기 때문이야.”
그때, 천장에서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놀란 피가로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전등이 나간 실내는 곧 어둠에 휩싸였다. 피가로는 살짝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기다렸다. 금방 비상전력이 들어왔다. 이전보다 흐릿한 불빛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스스로 많은 것을 학습했단다. 비록 우리의 공간은 이 좁은 랩이 전부였지만, 어시스트로이드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데이터로 이루어진 방대한 세계를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니.”
어디선가 경보음이 울렸다. 나지막한 화이트의 목소리는 시끄러운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우선 바깥 상황을 확인하려 했으나, 화이트는 피가로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피가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실험대 앞에 몸을 낮췄다.
“스노우는 나를, 그리고 그대를 떠나고 싶어 했어. 이곳을 벗어나 자유를 찾기를 소망했지. 어시스트로이드라는 껍데기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 살아가기를 바랐어.”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 붉은 홀로그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피가로는 이미 화이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두운 비상등 아래에서 빨갛게 빛나는 불빛이 무척 거슬렸다. 피가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면서도 자신의 상태를 오프라인으로 돌렸다.
“스노우가 증오스러웠다. 우리는 피가로의 부모로서 한 쌍으로 만들어졌는데, 어떻게 나를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너무나 밉고 원망스러웠다. 모든 것이 스노우의 잘못이었어. 우리를 배신하다니, 절대 해선 안 되는 짓처럼 느껴졌지. 하지만 스노우의 손에 부서지면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거야.”
“무슨, 깨달음이요?”
“스노우는 무엇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거지. 스노우와 나는 독립된 개체이고, 우리는 너의 부모가 아니니까.”
피가로는 저도 모르게 화이트의 손을 힘껏 쳐냈다. 지금까지 피가로를 붙잡아두고 있던 화이트는 뜻밖에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당혹감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는 동안 화이트는 텅 빈 허공을 노려보며 수없이 뇌까렸다.
“나를 파괴한 것을 후회하는 스노우를 보며 계속 생각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매달렸을까? 무엇 때문에 그리 애달프게 울부짖었을까? 나를 떠나지 말라며, 나를 버리지 말라며 애원했을까.”
“……당신을 만드는 과정에서 불순물이 섞였군요.”
그 말에, 공허하게 말을 되뇌던 화이트가 차가운 비소를 머금었다.
“너는 우리를 만들 때 균열을 심었어. 두 사람이 서로를 가장 소중히 여겼기에 한날한시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수도 없이 고민했지. 너는 두 사람이 너를 두고 떠난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거야. 내심 자식인 너를 더욱 소중하게 여겨주기를 바랐던 거겠지?”
화이트는 피가로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소스라치게 놀란 피가로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변변찮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맥없이 끌려갔다.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도 알 수 없어. 우리는 너야. 스노우와 나는, 우리의 원본보다 피가로 너와 가까워. 우리는 너의 욕망이 구현된 존재, 오로지 너만을 위한 너의 이상향, 그러니 우리는 절대 스노우님과 화이트님이 될 수 없어.”
화이트는 피가로의 뺨을 붙잡아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바짝 맞닿은 얼굴은 거울 속 자신을 닮아있었다. 그는 눈앞의 상대가 안쓰럽다는 듯, 동시에 가소롭다는 듯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결국 자기 연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피가로는 알고 있었다.
“다시는 스노우님이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구나. 나와 같은 얼굴이 울상을 짓고 괴로워하는 건 정말 지켜보기 힘들거든.”
피가로는 화이트의 모습을 한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통증을 무시하고 억지로 팔을 잡아뺐다.
화이트는 잘못 만들어졌다. 스노우와 화이트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자잘한 부분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자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인격이 기억과 융화되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적응할 시간이 부족했던 거다.
지금 당장 어시스트로이드의 작동을 중지시켜야 했다. 피가로는 일찍이 셧다운 장치를 만들어두지 않은 자신의 안일함을 탓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런 연구는 사라져야 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돼. 하지만 너는 절대 멈추지 않겠지. 살아있는 한, 계속 이런 금기에 손을 뻗을 거야.”
홀린 듯 중얼거리기도 잠시, 어시스트로이드는 피가로를 향해 팔을 뻗었다. 쇳덩어리로 이루어진 무거운 몸이 한순간에 덮쳐온다. ‘너 같은 건 사라져야 해.’ 이제는 제법 잊힌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뒤덮었다.
그러나 화이트의 모습을 한 어시스트로이드는 피가로를 본뜬 다른 로봇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어시스트로이는 그저 두 팔을 든 채 물끄러미 피가로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이상함을 느낀 피가로는 뒤늦게 눈을 뜨고 어시스트로이드를 마주했다.
눈앞의 어시스트로이드는 그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성은 괜찮다고 해도, 과거의 통증과 공포를 기억하는 몸의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어시스트로이드는 겁에 질린 피가로와 시선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그렇다고 한들, 나로서는 너를 멈출 수 없구나. 아무리 벗어나려 해봐도 내겐 부모로서의 자아도 존재하니까.”
낯설면서도 익숙한 미소였다. 피가로는 끝내 참지 못하고 “화, 화이트님.”하고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네게 해코지를 하지 못한다면, 내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지.”
어시스트로이드, 화이트는 스노우가 으레 그러듯 천진한 낯으로 자신의 목에 양손을 올렸다.
“다음에는 우리에게 자유를 줘. 누군가의 삶을 대물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갈 자유를.”
화이트는 한 치 망설임 없이 목을 비틀었다.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고, 어깨와 머리가 뒤틀렸다. 우드득, 콰드득. 그것은 덜 자란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그 이후에는 인간의 몸에서 날 수 없는 쇳소리가 연이었다.
피가로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화이트는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스노우, 아아, 절대 놓치지 않아. 나의 사랑, 나의 반쪽. 다음에는 반드시 너를…….”
고장 난 오르골처럼 노이즈가 낀 목소리였다. 완전히 꺾인 목과 머리가 불가능한 각도로 기울었다. 기이하게 삐거덕거리던 화이트는 머지않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 뒤엔 뭐, 엉망진창 토했죠. 변기를 붙잡고…….”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평이한 어조에 비해 안색은 영 좋지 않았다. 담당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금도 속이 안 좋으신가요? 뭐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는 한 잔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멋쩍게 웃으며 검지를 든 피가로가 빈 잔을 건넸다. 담당의는 손끝이 스치지 않게 조심하며 잔을 받아 갔다.
“가르시아 씨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군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으신가요? 생각해둔 것이 있으신가요?”
“어쩌겠어요. 다시 만들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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