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사랑이라는 건.
첫 기억은 어둡고 퀴퀴한 골목길이었다. 눈을 떴을 때, 팔다리는 납처럼 무겁고 몸은 흠뻑 젖어있었다. 배수관이 터져 흐른 물에 옅은 붉은색 물감이 섞여있었다. 물감? 아니, 이건…… 혈액이었다. 오즈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두 눈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통증이 느껴지는 옆구리를 더듬자, 손바닥 전체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났다. 오즈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천근만근 무거운 고개를 돌려 빛이 스며드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좁은 틈으로 사람들이 빽빽하게 지나다니는 것이 보였다.
네온사인 불빛이 비쳐드는 골목길에 홀로 널브러져 있는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십, 수백 개의 각양각색의 다리가 교차하는 모습이 눈앞에 있음에도,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눈꺼풀을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연약하게 터져 나온 숨이 뿌연 입김을 만들었다.
눈을 감으니 똑, 똑, 물이 방울지며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손끝이 얼어붙으며 팔다리가 마비되어간다. 이대로 눈을 감아선 안 된다고, 어떻게든 일어서야 한다고 육체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죽음이 무엇인지 미처 알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오즈는 죽음을 직감했다.
벽에 기댄 몸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오즈는 전신을 좀먹는 피로와 졸음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두려워하며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철벅거리며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한 명, 아니, 두 명이었다. 물에 잠긴 것처럼 모든 것이 멀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오즈는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감지했다. 설령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 해도 막을 여력조차 없으면서 말이다.
오즈가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의식을 잃어가는 동안, 그들은 지척까지 접근했다.
“이것 보게, 스노우.”
“보고 있다네, 화이트.”
가까운 곳에서 타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죽음을 앞두고 차게 식어가는 와중에도 오즈는 불쾌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존중하지 않는 그들의 행동이 실로 끔찍하고 소름 끼쳤다. 인상 쓴 그 표정을 본 건지, 머리맡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 정신 좀 차려보렴.”
누군가가 뺨을 탁탁 때렸다.
“아서라, 아서. 이미 황천길을 올랐구먼.”
“아니야, 살아있어. 제대로 숨도 쉬는걸?”
마침 달콤한 수면의 물결에 몸을 맡기던 찰나였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 속에서, 오히려 그러기에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오즈는 사력을 다해 눈을 번뜩 까뒤집었다.
“이거 봐, 눈 떴잖아! 역시 본인이 옳았지?”
“아잇, 화이트쨩은 선수구먼! 그대를 의심해서 미안하네.”
오즈는 시끄럽게 떠드는 그들을 향해 싸늘하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어둠에 특화된 오즈의 눈은 희미한 불빛을 조명 삼아 그들을 정확히 포착했다. 키가 큰 사내 둘이었다. 자세히 보면 묘하게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오즈가 목적이었던 듯했다. 하긴, 그게 아니고서야 지저분하고 인적 드문 골목에 일부러 발을 들일 이유는 없을 터였다. 어떻게 봐도 쓰러져있는 사람을 우연히 발견해서 도울만한 위인들은 아니었다.
눈을 게슴츠레 뜬 오즈는 다시금 지금의 자신이 그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승산은 제로였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오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죽일 테면 죽여라. 어차피 죽을 거, 이대로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든 남의 손에 살해당하든 다를 게 없었다. 누군가에게 목숨을 위협받는다는 건, 다 약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다. 세상은 먹이사슬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힘이 약하면 도태되고, 이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한다. 어째선지 다른 모든 것이 불명확한 가운데, 그 하나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심 오즈는 복부의 욱신거리는 둔통에서 벗어날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즈의 머리맡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기다리다가, 자기들끼리 알아듣지 못할 말을 몇 번 소곤거린 게 전부였다.
그것이 오즈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
눈을 뜨면 감고, 눈을 감으면 다시 뜬다. 숨을 내쉬면 들이쉬고, 숨을 들이쉬면 다시 내쉰다. 살아있는 이상,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었다. 어느 날, 구석구석 골고루 햇볕이 쏟아지는 침대에서 눈을 뜬 오즈는 그런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죽음을 결심했던 그날 이후. 놀랍게도 오즈는 살아있었고, 제멋대로인 쌍둥이에게 멋대로 목숨을 구해졌다.
지친 육체와 혼곤한 정신탓에 여러모로 어안이 벙벙했지만, 오즈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우선 자신이 있는 장소부터.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자, 헐벗은 상반신에 꼼꼼하게 싸인 붕대가 보였다. 붕대는 하얗고 깨끗했으며, 입고 있는 옷과 이불에 햇볕에 갓 말린 듯 뽀송뽀송한 냄새가 났다.
오즈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모든 기력을 소진했을 때라면 모를까, 살아있다면 다시 치열하게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상처 부위를 감싸고 일어선 그는 마침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사내들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오, 벌써 돌아다니는 건가. 회복력이 빠르잖아.”
“아직 어려서 그런가, 팔팔하구먼.”
그들은 오즈를 마주쳐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오즈가 일어서서 스스로 활동하는 모습을 반기는 듯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행동이 빨랐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은 오즈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고무줄 팬티의 존재를 확인하곤 맨몸으로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오즈의 주먹이 휘둘러지기 전, 한 사람이 소리 없이 앞을 가로막았다. 앞머리 가르마를 왼쪽으로 탄 남자였다. 그 남자는 오즈의 팔을 붙잡아 그대로 시원하게 뒤집어버렸다. 세상이 한 바퀴 선회하더니, 눈을 깜빡였을 때는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쾅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부딪친 등과 상처 부위에 무시무시한 격통이 내달렸다. 오즈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목구멍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비명을 삼켰다.
“꺄~ 화이트쨩, 완전 멋져!”
“에헴.”
간신히 뜬 눈으로 과장되게 한 쪽 다리를 든 남자가 다른 남자의 뺨에 입을 맞추는 모습이 보였다. 입맞춤을 받은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상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바짝 밀착한 그들이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성적인 접촉을 하는 동안, 오즈는 또다시 정신을 잃기 전처럼 흐릿해지는 시야와 싸우고 있었다.
결국 오즈는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였기에 적응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많은 것을 따져야 했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자신을 구하고, 멋대로 생명의 빚을 지게 한 사람들이 우선이었다.
백주대낮에 본 쌍둥이는 정말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다. 오즈의 시선을 받은 그들은 “그러니까 쌍둥이지.”라고 동시에 말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질문에 대한 답을 하다니, 조금 더 순진했으면 그들이 독심술이라도 구사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쌍둥이는 자신들을 스노우와 화이트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겉보기엔 매우 젊어 보였지만, 몸짓과 태도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노장의 기운이 묻어났다. 쌍둥이는 오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만만치 않은 상대였고, 두 사람을 상대로 살아남은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전후 사정 없이 골목길에서 눈을 뜬 오즈는 내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오즈의 기억은 몹시 뒤죽박죽이었다. 간혹 불필요한 맛집 정보를 꿰고 있는가 하면, 가장 중요한 자신에 대한 정보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쌍둥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친 과학자에게 뇌를 헤집어진’ 것과 엇비슷한 상태였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쌍둥이는 며칠간 오즈에 대해 독자적으로 조사했지만, 끝까지 그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변덕스러운 그들의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쌍둥이는 오즈가 어디서 왔고, 누구인지 직접 알아내기보다 그의 기억을 되찾아주기로 결심했다.
“보나 마나 어딘가의 말단 조직원이었겠지.”
“배신을 당했거나, 배신을 했거나. 이 바닥에선 지겹도록 흔한 일이야.”
신원을 증명해 줄 신분증도, 핸드폰도, 자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멀리 동떨어진 외지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라는 넓은 감옥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하다못해 살아야 하는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 죽을래?”
“죽여줄까?”
오즈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건 싫었다.
“보기보다 주관이 뚜렷한 녀석일세.”
“그거면 충분하지.”
흐린 눈을 하고 있는 오즈에게 쌍둥이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들은 오즈가 발견된 장소, 입고 있었던 옷, 가지고 있던 소지품 등을 바탕으로 이전 상황을 어림짐작했다.
“꽤 어려 보이는구먼.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았잖니.”
“그럼 스물로 하자.”
그리하여 오즈는 그해 나이 스물이 되었고,
“이전에 하던 것과 비슷한 일을 하면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어. 기왕 이렇게 된 거, 킬러는 어떤가?”
어쩌다 보니 쌍둥이의 전속 킬러가 되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오즈는 완전히 급류에 휩쓸린 물고기였다. 모든 일이 물 흐르듯 빠르게 진행되었다. 반드시 기억을 되찾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 외에 달리 할 것이 없었기에 그들이 정한 대로 따르기로 했다.
말이 전속 킬러지, 어차피 모든 기억을 잃은 오즈가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알고 있는 건 자신의 이름, 할 줄 아는 건 걷고 숨 쉬는 법뿐, 그밖에는 온통 들쑥날쑥한 조각들뿐이었다. 쌍둥이는 그런 그를 반년 만에 속성으로 가르쳐 사람 구실을 하도록 만들어놓았다.
사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것을 즐기는 못된 영감들이지만, 오즈에게는 나름대로 은인이었다. 굳이 뒷세계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목숨 값은 무겁기 마련이다.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으나, 기억을 잃은 영향인지 감정에 유독 둔한 오즈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건방진 태도가 쌍둥이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다.
운명의 그날 이후 오즈는 쌍둥이가 구해준 오피스텔에서 생활했다. 오즈는 모든 욕구와 감정이 결여되어 있었기에 하고 싶은 것도, 취미도, 목표도 없었다. 그는 일이 없으면 절대로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집에만 칩거하며 하루 종일 천장을 바라보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보다 못한 쌍둥이가 전자기기를 이것저것 들여놓았지만 관심을 가지는 건 하루 이틀뿐으로, 금방 다시 원래의 무기력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오즈가 기다리는 건 오로지 일. 쌍둥이가 꼼꼼하게 엄선해서 물어다 주는 사람을 죽이는 의뢰뿐이었다.
“어쩌다 이런 놈이 굴러들어 왔을꼬.”
“사람 죽이는 데에만 관심을 보이다니, 태생이 글러먹은 놈이잖아.”
처음부터 상냥하게 돌봐준 건 아니었지만, 쌍둥이는 날이 갈수록 말이 심해졌다. 물론 오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오즈의 무료한 삶을 송두리째 바꿔줄 사건이 생겼다.
“의뢰를 맡긴 사람은 피가로라는 녀석인데…… 매번 우리 쪽에 정보를 대주는 고마운 아이거든.”
“그런데 이 애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라서 말이야. 무슨 말인지 만나보면 바로 알게 될 게야.”
시작은 언제나처럼 쌍둥이가 의뢰를 물어다 주는 것부터였다. 그런데 뜻밖에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확 까버리거라.”
“까버린다는 건.”
“바보. 억지로 수락하지 말고, 편히 거절하라는 게야. 오즈는 감이 좋으니까.”
지금까지 오즈에게 거절 같은 선택지는 없었다. 당연하다. 오즈는 단 한 번도 의뢰인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다. 쌍둥이는 오즈에게 제안하지 않았고, 오즈 또한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암묵적으로 서로 동의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쌍둥이는 오즈에게 의뢰인을 직접 만나볼 것을 권했다. 그들 답지 않은 행동이 놀라웠다. 또한 그들이 ‘피가로’라는 남자를 언급할 때 보였던 부드러운 표정과 살가운 목소리의 이유도 전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오즈는 보기 드물게 흥미를 느꼈고, 무심코 입을 열었다.
“한 번도.”
오즈가 목소리를 들려주는 건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희귀한 이벤트였다. 쌍둥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오즈에게 집중했다.
“너희들은 내게 선택지를 준 적 없었다.”
무려 한 달 만에 하는 말치고는 영 운치가 없었다. 꼭 무심하고 이기적인 이쪽을 탓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눈을 동그랗게 뜬 쌍둥이가 서로를 마주 봤다.
“그렇긴 한데…….”
“지금껏 그걸 신경 쓰고 있었는고?”
스노우와 화이트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랫입술에 검지를 대고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던 그들은 이내 꺅꺅 웃으며 서로 손뼉을 마주쳤다.
“옳거니. 토라진 거구나! 아직 애구나, 애야.”
“이렇게 어리광도 부릴 줄 알고, 키만 멀대같이 커선 보기보다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네.”
쌍둥이는 오즈를 얼싸안고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를 두드렸다. 아끼는 인형을 다루듯 거침없으면서도 애정 어린 손길이었다. 그러기도 잠시, 그들은 곧 낯빛을 바꾸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우리가 알아서 해줘서 좋았지?”
“스스로 선택하는 걸 두려워했으면서.”
“알고 있지, 알고 있단다. 정서가 발달하지 않은 네게 자신의 선택으로 돌아올 여파를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공포스럽게 다가왔겠지.”
“아무것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오즈는 그들의 말에 불쾌함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는 쌍둥이의 진심만큼은 여실히 전해졌다. 그것이 같잖은 동정 같아서 심히 거슬렸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두려움과 공포가 막연하게나마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이 옳을 것이다. 오즈는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쌍둥이는 오즈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대해서도, 그리고 오즈 자신에 대해서도.
반년의 가르침은 일상이나 사회적 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배움을 흡수하기에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한자리에 고여 있었던 오즈의 시간은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때 그 골목길에 멈춰있었다.
오즈는 확신이 없었고, 이번에도 쌍둥이의 말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즈는 쌍둥이가 미리 알려준 시간에 맞춰 의뢰인을 만나러 갔다. 운명이라는 게 뭔지, 하필이면 오즈가 강제로 새 삶을 부여받은 바로 그 골목길이었다.
“보수는 얼마든지 줄게. 어때? 나와 일을 해보는 건.”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어디 한 군데 의지할 곳도 없는 오즈는 오로지 본능만 믿고 살아왔다. 짐짓 사람 좋은 얼굴로 빙글빙글 웃고 있는 그 남자는 위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딱 잘라 설명하기 힘들지만, 대화를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오즈는 그 남자와 깊게 얽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오즈에게 몇 번 거절당한 남자는 머쓱한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구질구질한 미련이라곤 티끌만큼도 엿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마치 처음부터 거절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 한 잔 사려고.”
그 남자는 오즈의 ‘처음’이었다. 오즈는 자신이 죽인 사람 말고는 누구와도 만난 적이 없었다. 어쩌다 스치듯 지나쳐도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맞잡은 남자의 손은 따뜻했고, 일정한 주기로 숨을 쉬었으며 살아있는 사람의 살 내음이 났다.
그 남자는 본인의 체면을 운운하며 오즈를 된통 흔들어놓았다 차라리 협박하거나 저자세로 나왔다면 다루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더도 덜도 말고 깔끔하게 처리해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 남자는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는 흔한 일’이라거가, ‘멀리까지 온 사람을 대접하는 건 당연하다’던가. 오즈가 알지 못하는 ‘평범함’을 앞세워 그를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다.
지난 두 해, 오즈는 그의 은인인 쌍둥이에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주입받았다. 쌍둥이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튀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돼!’
‘이거 하나만 명심하거라. 남들이 다들 이렇게 한다고 하면 대충 맞춰주면 되는 게야!’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기억을 잃고 갑작스럽게 세상에 내던져진 오즈가 불과 두 해만에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피가로의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방구석에 틀어박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뜻밖에 오늘 처음 만난 그 남자가 정확히 정곡을 찔렀기에.
*
무료한 삶을 송두리째 바꿔줄 사건, 혹은 그런 존재. 오즈에게 그건 전부 피가로를 뜻하는 거였다.
오즈는 자신의 본능에 의거하여 확실하게 피가로의 의뢰를 거절했지만, 피가로는 개의치 않고 오즈와 교류를 이어갔다. 피가로는 쌍둥이의 중요한 사람이었고, 아무리 둔한 오즈라도 그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오즈는 피가로가 불편했다. 쉽게 밀어내고, 수틀리면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서 몹시 귀찮았다. 쌍둥이라 말한 ‘성가시다’는 의미가 이런 거라면, 그 말이 뼈저리게 이해가 되었다.
피가로는 기어이 오즈를 자신의 단골 바에 데려가 술을 먹였다. 그것이 오즈의 첫 음주였다. 먼저 바에 와 있던 금발의 여자와 친근하게 입맞춤을 나눈 피가로는 곧 오즈 옆에 앉아 정성스럽게 잔을 채워주었다. 난생처음 맛보는 달콤하고 씁쓸한 음료에 빠져 주는 대로 고분고분 받아마셨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잃은 듯한데, 눈을 떠보니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몰래 경비실에 잠입해 오피스텔의 CCTV를 돌려보니, 흔들림 없이 꼿꼿한 걸음걸이로 집에 걸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솔직히 기억은 전혀 나지 않지만, 제 발로 문제없이 들어왔다면 큰 문제는 없겠거니 싶었다.
피가로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피가로를 자신의 삶을 바꾼 특별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피가로는 그 이후에도 오즈에게 끊임없이 연락을 해왔다.
연락처는 어떻게 알아―기억이 날아간 그 시간이 가장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라있다―낸 걸까? 피가로는 집요하게 연락을 했고, 이를 위해 쌍둥이를 이용―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한패였다―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한다는 것이 거듭된 의뢰 요청도 아니고, 평범하게 같이 시간을 허비하자는 거였다.
피가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친숙하게 오즈의 삶에 침투하여 그를 서서히 바꿔놓았다. 처음부터 오즈를 알고 지낸 사람처럼 허물없이 거리를 좁혔고, 뛰어난 처세술로 그를 아주 쉽게 들었다 놓았다.
그걸 ‘가지고 놀았다’고 해야 할까? 오즈가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피가로는 오즈에게 잘해주었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아이를 대하듯 세심하게 챙기고, 깜짝 놀랄 만큼 애정공세를 퍼부었다.
피가로가 실제로 자기보다 8살이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와 어울려 지낸 지 한 달이 다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도 오즈가 묻지 않았는데 피가로가 스스로 말한 거였다. 오즈는 먼저 상대의 신상을 캐내지 않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처음으로 생일을 축하받았다. 여기서 생일이란 세상에 태어난 날을 뜻한다. 세상에 태어난 날 따위 오즈는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었지만, 쌍둥이가 멋대로 지정해 주었다. 쌍둥이는 그들의 도움으로 오즈가 새 목숨을 얻은 날을 멋대로 생일로 지정했다.
솔직히 짜증도 나지 않았다. 쌍둥이가 제멋대로 구는 것은 익숙했고, 생일 같은 건 어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가로를 만나고 나서 그날은 둘도 없이 특별한 기념일이 되었다. 누가 정보상 아니랄까 봐, 피가로는 오즈가 말하지도 않은 생일을 알아―지금 생각해 보면 쌍둥이가 알려준 것 같다―내어 챙겨주었다.
“직접 만든 거야. 어때?”
오즈의 생일날, 피가로는 불필요하게 아름답게 빚어진 케이크를 건넸다. 피가로가 직접 만들었다던 그 케이크―‘둘이 먹다 하나 죽인 제과점’ 상표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쌍둥이가 말하길, 서쪽 거리에서 꽤 유명한 가게라고―는 어째선지 손맛은커녕 철저한 자본주의의 맛이 났다. 피가로의 등쌀에 못 이겨 한 입 먹은 오즈가 제대로 된 표현을 하기도 전에, 그는 두툼하게 붕대를 감은 손을 들이밀며 하소연했다.
“베이킹은 서툴러서 말이야. 너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다가 이렇게 다치고 말았어. 정성을 봐서 맛있게 먹어줄 거지?”
피가로는 ‘너를 위한’이라는 부분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강조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정성이니 뭐니, 그 시기의 오즈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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