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킬러 01


Q. 세상에 목적 없는 사랑은 있다 / 없다?

피가로는 탁 트인 거리를 걸으며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햄, 치즈, 야채가 들어있는 베이직한 샌드위치였다. 더운 날씨에 치즈가 녹아 입안에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그 탓일까, 얼마 먹지 않았는데 벌써 물렸다.

‘역시 치즈는 빼달라고 할걸.’

애초에 유제품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절반 넘게 남은 걸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손으로 힘껏 눌러 납작하게 만든 샌드위치를 억지로 꾸역꾸역 뱃속에 밀어 넣었다.

안 그래도 먹기 싫어 죽겠는데, 샌드위치를 들고 있는 손에서 냄새까지 났다. 몇 번을 비누로 씻어도 손끝에 비릿한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아, 정말이지.’

안 그래도 입맛이 없는 와중, 강렬한 쇠 냄새가 식욕을 더욱 감퇴시켰다. 이 직업의 단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단연 손에서 냄새가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작 그는 비교적 안전한 곳에 숨어 단물을 빠는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피가로는 자기가 산 샌드위치를 원수처럼 노려보며 도로변에 주차된 차량에 올라탔다. 점심만 빠르게 사고 돌아온 덕에 다행히 주정차 위반 딱지는 떼지 않았다. 차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라벤더향 방향제와 오래된 차량의 퀴퀴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향긋하면서도 속이 느글거리는 냄새였다. 어쩐지 애매하게 좋은 향이라 불쾌함이 배가 되었다.

차 키를 꽂고 시동을 걸지 않은 채 핸들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남은 샌드위치를 숙제를 치우듯 급하게 먹어치웠다. 쓰레기를 깔끔하게 쪽지 모양으로 접고, 입가에 묻은 소스를 엄지로 훔쳐냈을 때였다.

조수석에 놓인 핸드폰이 별안간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평소 소지하고 다니는 두 개의 핸드폰 중 연락이 오는 일이 드문 핸드폰이었다. 피가로는 진동이 다섯 번 울릴 때까지 방치하다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피가로쨩, 안녕 안녕!」

「반가워 반가워!」

불쾌할 정도로 발랄한 목소리가 밀폐된 공간에 울려 퍼졌다.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멀리 둔 피가로는 액정을 흘기며 오만상을 썼다. 전화가 오기 전에 식사를 마쳐서 다행이었다. 위장을 가득 채우고 몸을 둔하게 만드는 음식물보다 지긋지긋한 것이 있을까 싶었는데, 최악은 예상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요즘 고생하고 있다며? 듣자 하니 여기저기서 보기 좋게 까이고 있다던데.」

「명색이 정보상인데 직접 발품을 팔고 있다니 안쓰럽잖아.」

“…….”

피가로는 말없이 볼륨을 줄였다.

「언제부터 정보상의 정의가 바뀐 거지? 정보상은 정체를 숨기고 암약하는 존재 아니었나?」

「어허, 화이트여. 멀쩡한 애 기죽이지 말게. 이게 다 피가로가 초짜라 그렇구먼. 겨우 10년밖에 안 되었잖니. 이 바닥에서 10년은 더 굴러야 쓸만한 인재가 되지.」

「일 처리가 이래서야 그때까지 살아있기나 하려나?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기 힘들겠는걸. 조만간 목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그러게 우리 밑에서 얌전히 밥그릇을 받아먹었으면 좀 좋아. 뭣 하러 원수를 갚겠답시고 뒷세계에 뛰어들어선, 끌끌.」

그들은 일부러 들으란 듯 큰 소리로 떠들었다. 상대가 싫어하면 그만둬야 할 텐데, 쌍둥이는 도무지 적당히 하는 법을 몰랐다. 점점 커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낮춘 볼륨을 뚫고 피가로의 귀에 쏙쏙 날아와 박혔다.

피가로는 애꿎은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핸들을 주먹으로 쿵 하고 내리쳤다.

“여전히 귀가 밝으시네요. 이미 알고 계셨다면 모른 척해주셔도 될 텐데, 눈치도 없으시고요.”

쌍둥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영상통화를 하지 않아도 그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말했다.

「우리가 눈치가 없는 게 아니야. 눈치를 볼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지.」

「음음, 피가로랑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절친한 사이 아니겠는감.」

“하하, 재밌네요. 올해는 반드시 거슬리는 혹 두 개를 똑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걸.”

「어이구, 차가워라. 웃어른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만두게, 스노우여. 아이가 사춘기라 많이 예민해.」

“……누가 사춘기라는 거야.”

너무 제멋대로라 이제는 반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피가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부모도 아니면서 올해 계란 한 판인 사람에게 ‘아이’라던가, ‘사춘기’라는 표현을 쓰는 건 세상천지 그들밖에 없을 것이다.

「어때, 계획은 좀 진척되고 있는고?」

웃으며 받아주기도 잠시, 피가로는 본연의 까칠함을 숨기지 못했다.

“참 일찍도 물어보시네요. 있는 대로 놀려놓고선. 다 갖고 놀았으니 이제는 제 입으로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으신가요?”

「피가로쨩, 앙칼지구나.」

「그게 피가로쨩의 매력이지.」

내게 강 같은 평화를. 이마에 핏대가 솟았지만 익숙하게 가라앉혔다. 이만큼 말려든 걸로도 충분했다. 두 사람에게 더 이상 개입할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피가로는 불필요한 말은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할 말을 이어갔다.

“전혀요. 완전히 제자리걸음이에요. 망망대해가 따로 없네요. 이 바닥에 쓸만한 녀석이 한 명도 없다니.”

통상적인 직장인의 점심시간이 지나자 교통단속반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백미러를 통해 차량 뒤편을 확인한 피가로는 저 멀리 단속차량을 발견하고 혀를 찼다. 피가로는 시동을 걸고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그러고는 끊지 않은 전화에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다들 겁쟁이뿐이에요. 믿음과 신뢰는커녕 막대한 보수를 목전에 두고도 발을 빼기 일쑤죠. 하나뿐인 목숨이 그렇게 아까웠으면 애초에 이 바닥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지.”

「저런. 어릴 적부터 보아온 아이가 막다른 길에 놓여있다니, 참으로 안쓰럽구나. 우리가 뭐라도 도울 게 없을까?」

「있지, 있어. 마침 그 녀석이 있잖아.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녀석이!」

「오오, 그렇구먼! 화이트쨩, 언제나처럼 좋은 타이밍이었어.」

「피가로야, 필요하다면 솜씨 좋은 녀석을 하나 소개해 줄까?」

솔깃한 제안이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이들과 대다수 접선해 본 입장에서, 피가로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두 사람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피가로가 아는 ‘그 녀석’이라면 이번 일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실은, 두 사람에게 전화가 왔을 때부터 이 이야기를 꺼내주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다. 피가로는 씩 웃으며 매끄럽게 코너를 돌았다.

“보나 마나 주선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겠죠. 속옷 한 장까지 남김없이 털어가는 두 분께 빚지고 싶지는 않지만…… 구미가 당기는 건 사실이네요.”

수화기 너머로 껄껄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게야. 그대는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테니.」

“두 분이 기르는 사역견이라면 한 사람밖에 없죠. 기왕 제안해 주셨으니 고맙게 받아먹을게요.”

「그래그래, 솔직하니 좋구나. 녀석에겐 일러두마.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네에, 부탁드립니다.”

이건 정말 뜻밖의 수확이었다.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스트레스도, 느끼하고 맛없는 샌드위치도 전부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피가로는 머릿속으로 망가진 판을 치우고 재빨리 새로운 판을 짰다.

「진동 말고 벨 소리로 바꿔놓고!」

“벨 소리는 뭔 벨 소리에요. 누가 노인네 아니랄까 봐, 이상한 데에 집착하긴…….”

비록 잔소리는 여전히 듣기 싫었지만, 이번만큼은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로 했다.

*

쌍둥이는 성가시고 짜증나지만 행동력만큼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그들은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며칠 뒤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바람잡이를 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가 좀 바빠서!」

「둘만 만나도 괜찮지? 어색해도 참아. 피가로는 어른이니까!」

“나 참,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약속 시간에 딱 맞추지 않고 미리 도착해있는 건 기본적인 에티켓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상엔 그런 당연한 것마저 지키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덕분에 예의범절이 몸에 습관처럼 밴 피가로는 아주 쉽게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정보상으로서 맨얼굴을 드러내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었지만, 쌍둥이의 조언이 있었다. ‘상대의 진심에는 진심으로 맞부딪쳐야 한다’거나, ‘오즈는 무척 까탈스러우니 그의 환심을 사려면 많이 노력해야 된다’던가. 그중에는 ‘한 번 뒤돌아서면 그걸로 끝’이라는 힌트가 특히 유효했다.

지난 몇 년간 피가로는 이 바닥에 얼마나 쓸만한 인물이 얼마나 없는지 직접 확인했다. 피가로가 무리한 일을 벌이려고 한다는 소문은 오래전에 뒷세계에 쫙 깔렸다.

일찍이 눈여겨 본 많은 이들이 피가로의 의뢰를 거절했다. 말이 킬러지, 돈 받는 만큼 일하는 백정 주제에 이것저것 참 많이도 따졌다. 결국 의뢰를 완수하고 무사히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다. 어차피 깔끔하게 다 죽이면 보복도 없을 텐데, 다들 지레 겁을 집어먹고 꼬리를 말았다.

피가로가 아는 ‘오즈’는 그들과 다르다. 피가로는 이 바닥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오즈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쌍둥이와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덕이었다. 오즈는 의뢰를 받는 전문 킬러였으나, 수수께끼의 쌍둥이 신사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다. 신분을 숨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오즈는 그것을 감안하고도 자신의 정체를 유독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다.

반드시 쌍둥이 신사를 통해야 한다는 점에서 접선 난이도는 높았으나, 오즈는 일단 의뢰를 받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실수 없이 완벽하게 처리했다. 그런 부분에서 오즈는 특별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아무리 전문 킬러라 해도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일을 완벽하게 해내리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오즈는 그 어려운 것을 해냈고,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오즈에 대한 이야기는 작년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탁월한 능력과 무결점의 실행력을 자랑하는 전설의 킬러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뜬소문으로 치부했지만, 피가로는 곧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피가로는 자신을 위해 오랫동안 일할 전속 킬러가 필요했고, 오즈는 그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문제는 쌍둥이가 이쪽의 사정을 다 알면서도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건데…… 이제는 그 문제도 해결되었다.

피가로가 원하는 건 단발적인 의뢰가 아니었다. 한 번 계약을 맺으면 최소한 몇 년 동안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보상으로 내걸 준비가 되어있었다. ‘무엇이든 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위해 그동안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살아왔다. 남은 건 단 하나,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뿐이다.

피가로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초조하게 얽으며 골목 밖을 내다봤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안개 낀 밤거리를 밝혀주었다. 일정한 주기마다 번뜩이는 불빛이 피가로가 있는 골목 안쪽까지 스며들었다. 불꽃놀이처럼 현란하게 터지는 빛의 세례를 바라보고 있으니 눈꺼풀 안쪽이 욱신거렸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자꾸만 주머니로 손이 갔다. 딱 한 개비만 피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중요한 접선을 앞두고 이미지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는 신경도 쓰지 않을 테지만. 이건 그러니까, 일종의 강박증 같은 거였다.

나이 서른에 피해 갈 수 없는 주름을 걱정하며 미간을 꾹꾹 눌러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골목으로 들어왔다. 피가로는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무려 전설적인 킬러를 만나는 자리였다.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하게 뛰고, 명치가 긴장으로 바짝 조여들었다.

느긋하게 걸어온 남자가 피가로 앞에 멈춰 섰다.

“피가로 가르시아?”

호명된 피가로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유를 가장하려 했지만, 관자놀이를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렀다.

그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맸다. 웃음기 하나 없이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과 저승사자 같은 행색은 상상했던 것과 전연 딴판이었다. 조금 더 능글맞고 약삭빠른 사람일 줄 알았다. 설마 만화에서 튀어나온 전형적인 킬러같이 생겼을 줄은 몰랐다.

역시 흡연하지 않기를 잘 했다. 만약 한창 담배를 피우고 있었더라면, 저 모습을 보고 입에 문 것을 무력하게 바닥에 떨궈버렸을 테니까. 피가로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벽에 기댄 몸을 바로 세웠다.

“네가 오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잖아.”

피가로는 오즈를 향해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오즈는 꼿꼿하게 턱을 든 채 눈만 내리깔아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마주하니 키가 꽤 컸다. 예상보다는 덩치가 작았지만, 얇은 코트에 싸인 몸은 굉장히 탄탄했다. 뭐든 겉보기로 판단하기엔 이르다. 인간 흉기가 아니고서야 절대 그만한 실적을 가질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초면에 대뜸 만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볍게 흥미가 동했으나, 하나뿐인 목숨으로 그런 짓은 절대 못 한다. 어쩌다 보니 이런 위험한 곳에 몸을 담고 있지만, 결국 피가로의 삶의 모토는 안전제일이었다. 반드시 오즈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있었던 피가로는 두 팔을 교차해 팔짱을 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반가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네. 혹시 나 기억해? 네 쪽에 정보를 제공하던 사람인데.”

“모른다.”

나름 스타트를 잘 끊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돌아온 건 싸늘한 단답이었다. 얼굴에 힘을 잔뜩 주고 있지 않았다면 보기 좋게 표정을 구겼을 것이다.

‘무뚝뚝하긴, 겉치레도 모르나? 하여간 이래서 사람 죽이기만 잘하는 녀석들은 안 된다니까.’

오즈는 대화를 원만하게 이어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느닷없이 고개를 높이 쳐들더니 먹구름이 잔뜩 낀 어두컴컴한 하늘을 향해 하품을 발사했다. 이 녀석, 벌써 지겨워하고 있었다.

‘쉽지 않겠어…….’

젊은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상대는 이 바닥에서 모두가 알아주는 전설적인 킬러다. 기회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정보를 캐내고 접점을 만들어야 한다. 피가로는 느슨해진 정신을 재차 단단히 붙잡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지금까지 항상 그 사람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잖아. 난 네가 쌍둥이의 히트맨인 줄 알았어.”

“두 사람에겐 빚을 갚았을 뿐이다.”

“무슨 빚? 쌍둥이가 무엇을 해주었길래 그렇게 오랫동안 두 사람을 위해 일한 거야? 구명이라도 받은 건가?”

“네게 말해줄 의무는 없다.”

“그렇게 나와야지.”

피가로는 장난스럽게 콧방귀를 뀌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오즈는 생각보다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일단 중요한 정보는 하나 얻었다. 비록 반쪽짜리였지만 말이다. 오즈는 쌍둥이에게 빚을 지고 있고, 그것을 갚기 위해 그들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목숨을 바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 악취가 풀풀 풍겼다.

눈앞에 있는 오즈로 말할 것 같으면, 얼마나 콧대가 높은지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 절대로 의뢰를 수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한 명성을 가진 킬러라면 언제나 갑의 입장이었을 테니 고고하게 구는 것도 이해 못 할 건 없었다. 백정 따위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지만, 지금 아쉬운 쪽은 명백히 피가로였다.

피가로는 흠, 하고 짧은 숨을 내쉬며 턱을 문질렀다. 쌍둥이의 알선을 받은 이상 어차피 그들에게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거절당하는 것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결코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 계산은 확실한 모양이네. 두 분이 그랬던 것처럼 네게 빚을 지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내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겠지.”

말을 하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으나, 오즈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좋아, 도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 다음은 어느 부분을 건드려볼까?

‘아니, 지금은 본론을 꺼내야지.’

피가로는 팔꿈치 안쪽을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보수는 얼마든지 줄게. 어때? 나와 일을 해보는 건.”

“거절한다.”

대답은 한 치 망설임 없이 나왔다.

“왜?”

“단순 감이다. 너한테는 위험한 냄새가 나.”

두 눈을 반쯤 감은 오즈는 몹시 나른해 보였다. 누구와 달리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는 모습이 흡사 배부른 짐승을 방불케 했다. 피가로는 일부러 아주 조금,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미간을 모았다. 그대로 구부정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서 오즈를 비스듬히 올려다봤다.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말한다고…….”

보란 듯이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건 대체 어느 쪽인지. 오즈는 피가로를 앞에 두고 한껏 방심하고 있었지만, 허점은 보이지 않았다. 타고난 포식자로서의 본능이 몸에 배어있었다. 대놓고 나태한 모습을 보이는 오즈를 상대하고 있으니, 그를 경계하며 잔뜩 날을 세우고 있는 이쪽만 바보 같았다.

“넌 돈으로 움직이는 타입도, 단순한 스릴 중독자도 아니구나.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으면서 이 바닥에 남아있는 이유가 뭐야?”

“그건…….”

피가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즈는 솔직하게 말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뜸을 들이고 있었다. 괜히 시간 아깝게. 위험한 상대라는 걸 알면서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첫인상은 별로였다. 아무래도 위업은 사실이겠지만, 직접 만나본 그는 어쩐지 답답하고 맹해 보였다. 그럼에도 이 남자가 절박하게 필요한 자신의 처지가 새삼 억울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오히려, 절대로 이 변변찮은 사내를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피가로는 입술 끝을 삐쭉였다.

“뭐, 됐어. 나도 싫다는 사람 계속 물고 늘어지는 취미는 없으니까. 그래도 잠깐 시간 정도는 내어줄 수 있지?”

“…….”

오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알아서 용건을 말하리라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피가로는 입을 꾹 다물고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건 오즈였다.

“……이유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 한 잔 사려고.”

“인연? 그런 건…….”

피가로는 오즈의 입술만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오즈는 말이 아주 느렸다. 입이 달싹이면 먼저 한숨처럼 긴 숨이 빠져나오고, 하고 싶은 말은 뒷전이었다. 그것을 알고 났더니, 눈앞의 사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조금 감이 왔다.

피가로는 오즈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냅다 선수를 쳤다.

“쌍둥이에게 소개받아서 온 거잖아? 멀리까지 온 너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면 내 입장이 뭐가 되겠어? 나도 체면은 차려야지. 받아둬. 이걸로 네게 뭔가 요구하거나 하지 않을게.”

그렇게 말한 피가로는 오른손의 장갑을 벗고 오즈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오즈는 그 손을 맞잡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설마 악수를 모르지는 않을 테고. 이 녀석, 예의라곤 정말 눈곱만큼도 없구나. 사소한 예의범절에 깐깐하게 구는 쌍둥이가 이런 녀석을 이때까지 내버려둔 게 용하다.

‘가르칠 필요도 없었겠지. 무기는 무기로서의 역할만 잘 하면 될 테니. 애초에 그런 인간들이잖아.’

그럼 나는? 불현듯 치고 올라온 생각에 기분이 확 상했다. 멋모르던 시절, 쌍둥이에게 잔뜩 휘둘리며 장난감 취급을 당하던 과거가 떠오른 탓이다. 피가로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꽉 붙잡고 흔들림 없는 미소를 유지했다.

“뭐해, 악수 몰라?”

오즈는 피가로의 손에 고정된 눈을 떼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네 의뢰는 받지 않아. 이미 말했을 터.”

“그러니까~ 상관없다고! 어차피 이렇게 얼굴도 깐 거, 동종업계 종사자끼리 서로 잘해보자는 가벼운 인사치레라니까? 계속 이러고 있다간 팔 떨어질 거 같은데, 적당히 하고 슬슬 받아주지 그래?”

피가로는 빨리 붙잡으라는 듯 내민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오즈는 그제야 머뭇머뭇 팔을 뻗어 손을 맞잡았다. 오즈의 손은 무척 컸다. 모양 좋은 손은 솥뚜껑처럼 단단하고 온통 흉터와 굳은살로 뒤덮여있었다. 피가로는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짓궂게 흔들었다. 악수를 하는 시늉을 하며 괜스레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니, 오즈가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간지럼을 타는 것 같지는 않은데. 단순히 상대의 적극적인 태도가 거슬리는 모양이다.

‘오호라, 보기보다 순진한 타입이구나.’

언뜻 뻔뻔한 듯하지만, 대놓고 눈치를 주면 쉽게 기울어진다.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처럼.

“두 분에겐 내가 잘 말해둘게. 신경 써줘서 고맙다?”

피가로는 노골적으로 알랑거리며 아첨을 떨었고, 오즈는 망설임 끝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수심에 찬 얼굴이었다. 피가로는 오즈의 눈 밑에 패인 깊은 주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암담한 시야가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피가로는 지금까지 이런 사람을 수도 없이 만나봤다. 정점에 군림하는 킬러라는 껍데기를 벗기고 본 오즈는 직업에 맞지 않게 순진하고, 상당히 맛 좋은 먹잇감처럼 보였다.

‘이건 이용해 먹을 수 있겠어. 어떻게 잘 구슬리기만 하면…….’

피가로는 음흉한 상상을 하며 몰래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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