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익은 버릇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피가로는 상념에 잠긴 와중에도 자신의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마법으로 필기구를 불러내 증상을 기록했다.
“다행히 평범한 감기야. 약 먹고 푹 쉬면 금방 좋아질 거야.”
아직 어린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아이는 또래보다 확연히 작았다. 키만 아니라 팔과, 다리도 가늘고 볼품없이 말랐다. 옴폭 들어간 볼은 자못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몸에 남은 상처는 없었지만, 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학대받는 집안의 아이처럼 보였다.
한평생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오즈가 아이를 어떻게 키웠을지 벌써부터 감이 왔다. 피가로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오즈를 흘겼다. 팔짱을 낀 오즈는 눈을 돌리며 피가로의 시선을 피했다. 웬일로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는 태도였다. 어쩌면 피가로의 눈에만 그렇게 비쳤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피가로는 오즈에게 눈치를 주는 것을 멈추고 허공에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선반에 놓인 여러 개의 병들이 들썩거리며 날아왔다. 피가로 본인은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마법의 힘이 알아서 약초를 절구에 빻고, 플라스크 속에 재료를 혼합했으며, 완성된 약을 둥그런 병에 옮겨 담았다.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아이에게는 퍽 신기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아이는 오즈의 손을 꼭 잡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다양한 도구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뇌가 녹을 듯한 고열 속에서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텐데, 붙박인 시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과 크게 떠진 눈은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얄궂게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아이가 누구를 닮았는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이를 보며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을 가르친 스승과 마찬가지로, 피가로 역시 때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피가로는 완성된 약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자, 한 번에 쭉 마셔. 조금 쓸 거야.”
쓰다는 건 어린아이에게는 다소 어려운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입 밖에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환자에게 사소한 충고를 건네는 것은 일종의 버릇 같은 거였다.
바닥까지 떨어진 면역력을 보강하는 약초가 들어간 약은 보기만 해도 식욕이 감퇴하는 초록색이었다. 둥근 약병에서 출렁이는 걸쭉한 액체는 어지간한 어른도 거부감을 느낄만한 모습이었다.
못 먹겠다고 떼를 쓰면 어쩌지? 미소를 띤 피가로는 부드러운 얼굴로 생각했다. 그때는 아이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상냥한 의사 선생님이 나설 때였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을 즈음, 아이가 기운 없는 손으로 병을 받았다. 몸이 성치 않은 와중에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물건을 건네받는다. 걱정과 달리 아이는 약을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분명 쓰고 비릴 텐데, 내색하지 않는 것이 무척 용감하고 대견했다. 어떻게 이런 순하고 귀여운 아이가 오즈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옳지, 잘 마셨구나. 착한 아이에게는 피가로 선생님의 별사탕을 줄게.”
텅 빈 약병을 돌려받은 피가로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빈손에 별사탕을 떨어뜨렸다. 아이는 작고 알록달록한 별사탕을 보고 가냘픈 감탄사를 터뜨렸다.
피가로가 만든 별사탕은 쌍둥이 스승의 것처럼 마냥 달콤하지는 않았으나, 고맙게도 진료소에 방문한 많은 아이들이 좋아해 주었다. 어쩌면 아이들도 피가로처럼 별사탕 속에 담긴 따뜻한 관심에 기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손바닥에 있는 별사탕을 하나씩 천천히 입에 넣었다. 앞서 의젓하게 약을 먹었지만, 달콤한 별사탕에 사족을 못 쓰는 모습은 틀림없는 어린아이였다. 두 개밖에 없는 별사탕을 아껴 먹는 모습도, 한껏 볼을 부풀리고 우물거리는 모습도 하나같이 사랑스러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피가로의 별사탕을 먹은 아이는 금세 잠이 들었다. 열감기로 노곤했던 탓도 있지만, 사실은 약에 들어간 졸음을 유도하는 성분 때문이었다. 피가로는 이불을 끌어올려 잠든 아이에게 덮어주었다.
다음은 돌발행동이 특기인 동생제자와 대화를 나눌 차례였다. 오즈는 피가로가 진료를 마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쉰 피가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꺼운 격리 커튼을 쳤다. 이제부터는 아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피가로는 오즈를 잡아끌고 최대한 침대에서 멀어졌다.
“오즈, 넌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어. 그건 너도 알고 있지? 넌 아이를 키우는 방법도 모르고, 아이한테 관심도 없잖아.”
오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피가로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압박하며 여유를 두다가 본론을 꺼냈다.
“차라리 저 아이를 나한테 넘기는 건 어때?”
알렉을 닮은, 그의 후손이었다. 알렉 자체에 특별한 감정은 없었지만, 어쩌면 파우스트의 자식이었을지도 모를 아이였다. 일단은 옛 인연이기도 했고, 이대로 어설프게 오즈의 손을 타서 잘못된 결말을 맞이하느니 자신이 거두는 편이 나을 거라 여겼다.
“어차피 마나석을 위해서라면, 내가 저 아이를 돌로 만든 것만큼의 마나석을 줄게.”
“아니.”
그러나 오즈의 생각은 피가로와 다른 듯했다. 대답은 망설임 없이 바로 나왔다. 피가로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오즈는 못다 한 말이 있는 것처럼 뜸을 들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어릴 적부터 오즈를 지켜본 피가로는 그 미세한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옛날처럼 오즈의 말을 듣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짧은 침묵 끝에 마침내 오즈가 입을 열었다.
“저건 나의 것이다.”
“……아, 그래.”
아이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오즈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생 오즈에게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꼴사나운 얼굴이었다. 피가로는 몹시 기분이 상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차피 떠보기 위한 말이었다. 오즈가 아이를 넘기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만큼 오즈에게 아이는 특별했다. 오즈 본인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피가로는 알 수 있었다. 아마 저 아이는 오즈를 뒤흔들 처음이자 마지막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저 아이가 싫었다.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이를 이루는 모든 것이 싫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지 고작 몇 년밖에 되지 않은 미숙한 존재가 오즈의 약점이 될 거라는 사실도, 알렉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아이는 너무나 쉽게 오즈에게 스며들었다. 피가로는 오즈를 변화시키고자 했고, 그에게 쏟은 감정과 시간만큼 뼈아픈 실패를 겪었다. 그러나 아이는 피가로가 평생에 걸쳐 이루지 못한 일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해냈다.
긴 세월 교제를 이어갔음에도 오즈에게 피가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쏟아부은 관심만큼은커녕 그 절반도 돌아오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그보다 나았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진심으로 공경했다. 그 아이가 품은 경애는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피가로는 파우스트에게 가장 값진 것이 되지 못했다. 파우스트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알렉이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관계에서 피가로는 어디까지나 손님에 불과했다. 하필이면 오즈가 선택한 것이 알렉의 후손인 것이, 그가 파우스트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낳은 결과물이라는 점이 큰 환멸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때에도 피가로는 만약의 상황을 상상했다. 만약 알렉과 파우스트가 예정대로 혼인을 올렸다면, 알렉이 피가로와의 약속을 지켜 파우스트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그래서 지금 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파우스트의 후손이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를 꼭 닮은 아이였다면, 사랑스러운 갈색 곱슬머리에 제비꽃 같은 자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지금쯤 피가로는 오즈와 척을 질 각오를 하고 아이를 훔쳐 달아났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찾지 못하는 폭풍의 계곡 속에 숨어 살며 홀로 아이를 키웠을 것이다. 아이를 속세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다른 의지할 곳 없이 오직 자신만 바라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상처 하나 없는 아이로 키우자. 아낌없는 사랑과 애정으로 온전히 감싸 안자. 나와 평생을 함께해 줄 나의 아이로 실패 없이 새로 키우자. 오즈도, 파우스트도, 지난 실패의 흔적 따위 전부 잊을 수 있도록 완벽하게 다시 키우자.
자기 자신의 추잡한 욕망에 구역질이 났다.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독이라는 것이 자신을 몰라보게 바꾸었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쨌든 이대로면 곤란해. 아이들은 다른 인간보다 훨씬 약하고 섬세하다고. 아무렇게나 막 대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야. 당장 돌로 만들게 아니라면 조금 더 신경 써주는 편이 좋아.”
피가로는 버릇처럼 무거운 숨을 뱉어내며 앞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오즈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똑같이 무심한 얼굴이지만, 아무튼 피가로는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말해도 넌 모르겠지. 잠깐 있어봐. 내가 가르쳐 줄게.”
피가로는 선뜻 오즈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느긋하게 이끌어 책장 앞으로 데려갔다. 책장에 꽂힌 책 중에는 그럭저럭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었다. 치렛타가 꿈에 그린 듯한 육아를 시도한 흔적이었다.
“넌 내가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피가로는 팔을 높이 들어 가장 높은 곳에서 손수 책을 꺼냈다. 이렇게 구석진 책장에서 먼지를 타느니,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편이 나을 터였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소중한 친구가 두고 간 책을 꺼내주며, 겸사겸사 마왕과 관련된 동화도 챙겨주었다. 오즈는 악마의 뿔과 여섯 개의 팔이 달린 표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마왕 오즈…….”
피가로는 오즈가 중얼거리는 말을 못 들은 척했다.
5.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어느 날 돌연 찾아왔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첫 숨을 내쉬고 신으로 떠받들어질 때처럼, 또한 고향을 새하얗게 매몰시킨 눈보라처럼 갑작스러웠다. 자신의 여명을 직감한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빛가림 커튼 없이 탁 트인 창문으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평소보다 이른 아침에 깨어난 피가로는 한참 동안 침대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머리는 복잡했지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서,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을 놓고 있었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마법사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다. 피가로는 그동안 수많은 죽음을 지켜봐왔다. 수명을 다한 죽음이 괜히 호상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인간은 대체로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했고, 마법사는 보다 일찍 자신의 죽음을 깨닫고 주변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죽음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했다. 인간이든 마법사든,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가족과 친지와 정을 나누고, 신의 품에 안기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피가로를 찾아왔다.
혼자 외로이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의 형상을 뒤집어쓴 신의 대체자로서 피가로는 지금껏 수많은 장례를 치러왔다. 간절한 부탁을 받아 일주일 내내 함께해 주기도 했고, 직접 간호를 하기도 했으며, 고통에 시달리던 이들이 직접 영면에 들도록 돕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치렛타는 행복했다. 그녀는 소중한 가족들의 곁에서 언제나 웃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불모의 땅에서 화려하게 피었던 꽃은 남쪽의 풍요로운 땅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피어나 강렬한 향기를 퍼뜨렸다.
치렛타는 꺼져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크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그럼에도 피가로는 치렛타를 가여워했다. 감히 그녀를 안쓰럽게 여기며 동정했다. 소중한 친구의 행복을 부정하면서, 사실은 그녀가 괴로움을 감추고 억지로 웃고 있을 거라 멋대로 추측했다.
‘세상에, 네가 이런 표정을 짓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나뭇잎을 투과한 정오의 햇살이 비쳐드는 진료소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렛타가 자신의 수명을 전했을 때, 피가로는 쌍둥이 스승의 예언을 언급하며 뱃속의 아이를 지울 것을 권했다. 주치의로서의 권고라기보다는 친구로서의 부탁이었다. 그러나 치렛타는 모처럼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피가로는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을 빗방울 취급하며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그치곤 보기 드물게 집요한 행동이었다. 처음에는 성가셔하던 치렛타도 곧 그런 피가로의 절박한 태도를 즐기기 시작했다.
치렛타는 괴짜들로 가득한 북쪽에서도 유난히 특이한 마녀였다. 피가로는 그녀가 즐거워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웃을 일이 아니야. 너도 그런 핏덩이보다는 네 몸을 더 생각해야지. 너에겐 남편도 있고, 챙겨야 할 아이도 있잖아. 잊은 건 아니지? 루틸은 아직 어려. 그 아이에게는 네가 필요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치렛타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기는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과한 참견이나 잔소리처럼 들려도 상관없었다. 정신이 들도록 따끔한 충고를 하려던 찰나, 치렛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만삭이 된 몸을 이끌고 다가왔다.
‘네 이런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솔직하게 구는 너는 정말 사랑스럽구나. 쌍둥이 선생님이랑 오즈가 너의 이런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손을 내민 치렛타가 피가로의 왼뺨을 감싸 자상하게 쓰다듬었다. 피가로는 저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듯 치렛타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어차피 내가 돌이 되는 순간에 너는 그 자리에 없겠지?’
피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다. 치렛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끝내 임종을 지켜주지 않는 친구가 야속할 법도 하건만, 치렛타는 끝까지 피가로를 나무라지 않았다.
피가로는 치렛타의 손에 정중히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잘 가, 치렛타.’
‘그래,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또 보자.’
치렛타는 절대 죽음을 앞둔 사람답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고고하게 인사를 받았으며,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치렛타는 드높은 자존심을 가진 북쪽의 마녀였고, 동시에 친구의 사정을 이해해 주는 상냥한 남쪽의 마녀이기도 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치렛타의 곁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피가로는 평생 그녀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이별이 아니야. 그저 새로운 여행일 뿐이지. 피가로, 너도 언젠가는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야.’
“나는 모르겠어. 도저히 모르겠다고, 치렛타…….”
어떻게 너는 웃을 수 있었어? 죽음을 앞두고, 소중한 사람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어? 어떻게 아무런 미련 없이 뒤돌아서 떠나버릴 수 있었어?
이렇게 빨리 치렛타의 뒤를 따르게 될 줄은 몰랐다. 살아가면서 이룰 수 있는 건 대다수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어설픈 미련도 모두 버린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코앞에 닥치니 두려움이 밀려왔다.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한기가 닥친 몸이 가늘게 떨렸다.
소중한 것들이 나를 먼저 떠나기 전에, 내가 그들보다 먼저 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루라도 좋으니 그들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일찍 떠났으면 좋겠다. 가슴 한 편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공허함을 느끼기 전에 끝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죽음의 숨결을 느끼자, 외로움이 사무치고 형체 없는 공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누군가, 누구라도 좋으니까, 내 죽음을 슬퍼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혼자 내버려두지 못할 정도로 안타깝고 애절하게 여겨줄 사람이 있었으면. 따뜻한 온기로 내 손을 감싸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물론 이런 바람이 얼마나 주제넘은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어차피 자신이 바라는 건 마땅한 자격을 갖춘 이들뿐이기 때문이다.
치렛타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그럴 리 없지. 치렛타는 나와는 다르니까.’
피가로는 목구멍을 뚫고 올라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연거푸 마른 세수를 했다. 죽음을 직감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치렛타는 정말 대단했다. 용케 그런 무던한 반응을 보였다 싶다.
사랑하는 사람도, 배 아파 낳은 자식도 두고 떠나야 한다는 현실을, 서서히 약해지고 쓸모 없어지다가 어느 순간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조용히 돌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그렇게 용감하게 받아들였다. 수많은 것을 두고 가야 했던 치렛타와 달리, 스스로 관계를 잘라낸 피가로는 바람처럼 가벼웠다. 그런데도 이다지 두려운 걸 보면, 역시 치렛타는 피가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
죽음을 예감한 피가로는 차분하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자신의 남은 수명을 깨닫는 원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피가로의 경우 운이 좋았다. 정말로 운이 나쁜 사람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을 때에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했으니,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면한 셈이었다.
여러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던 진료소를 정리했다. 먼저 위험한 물건들을 분리하여 치우고, 그다음은 개인적인 물품들을 정리했다. 순수한 호의로 선물 받은 것들은 진료소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다가올 그날까지 아직 여유는 있었지만, 무릇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다. 무엇이든 미리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하나둘씩 미뤄둔 일들을 처리했다. 의학을 가르치던 젊은 인간을 독립시키고, 후대에 전할 지식을 시간이 날 때마다 글로 옮겨 적었다. 온화한 남풍처럼 천천히 지나가던 시간이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공포를 이겨내고 미련을 끊어내는 과정에서 곤란한 일을 겪기도 했다. 피가로는 일부러 모든 일을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했다. 가끔 마을에 들리는 레녹스는 눈치채지 못했으나, 뜻밖에 루틸과 미틸이 바쁘게 움직이는 피가로의 발목을 붙잡았다.
평소 가지고 있던 게으른 이미지 때문일까. 치렛타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그들의 집에 찾아갔을 때였다. 루틸이 피가로의 옷소매를 당겼다. 그 뒤에서는 울상을 지은 미틸이 우물쭈물 본인의 잠옷자락을 잡아늘리고 있었다.
“피가로 선생님, 혹시 어디 가시나요?”
“마을을 떠나시는 건 아니죠?”
어린아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감이 좋았다. 허리에 닿을 정도로 작은 아이들인데도,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을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피가로는 떠오르는 난색을 밝은 미소로 감추며 무릎을 굽혔다. 조그마한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거 아니야. 피가로 선생님도 이제 슬슬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해서.”
“정말, 놀래키지 말아 주세요!”
품에 안긴 루틸이 동그란 뺨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아직 어리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미틸은 벌써 피가로의 어깻죽지에 고개를 파묻은 채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미안해. 선생님이 불안하게 했구나.”
피가로는 목둘레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느끼며 사과를 건넸다. 모든 아이들이 예민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치렛타의 아이들은 이미 부모의 죽음을 두 차례나 겪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이별에 민감하고 조숙한 편이었다. 그 점이 못내 안쓰러웠다.
피가로는 아이들의 푹신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다가 두 팔로 힘껏 끌어안았다. 느닷없이 끌어안긴 아이들은 놀란 비명을 질렀으나,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는 않았다. 체온이 높은 아이들은 몹시 부드럽고 따뜻했다.
피가로는 루틸과 미틸의 부모가 아니었고, 부모의 자리를 대신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을 품어주기엔 한참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눈앞의 작고 약한 존재들이 이런 자신이라도 의지해 주었으면 했다. 작은 가슴에 담긴 불안을 덜고, 아이답게 온전히 기쁨과 애정을 누렸으면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새벽녘의 이슬처럼 맑고 투명한 영혼을 가진 아이들은 가끔 예상치 못한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루틸과 미틸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녀리고 아담한 팔을 뻗어 오히려 피가로를 안아주었다. 자기보다 어른이라는 사실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외로움을 덜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따뜻한 마음은 맞닿은 체온을 통해 확실히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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