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28


파우스트를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과는 별개로, 레녹스가 목표를 이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레녹스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남몰래 기도하고 축복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바람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기적적인 재회는 어린아이들의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레녹스는 수십, 수백 번의 실패를 반복했고, 피가로는 그와 떨어진 머나먼 땅에서 레녹스가 보내온 편지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고작 육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마음이 아픈 것만으로 사람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피가로는 레녹스가 마음을 좀먹는 상심으로 인해 물거품처럼 바스러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레녹스를 돌보는 것은 어쩌면 파우스트를 향한 속죄일 수도 있었다. 피가로는 매번 이런 식으로 잃거나 제 손으로 버리고 나서 멋대로 후회하고 속죄해왔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 게 지겹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피가로는 다시 한번 레녹스를 남쪽 나라로 호출했다. 운 좋게도 이번에는 꽤나 적절한 핑계가 있었다. 옛날부터 줄곧 양을 돌보던 목자가 환절기 독감으로 앓아누운 것이다. 거기에 더해 고령이었던 목자는 슬슬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원래는 동네 아이를 후임으로 삼아 일을 가르칠 계획이었지만, 그 아이가 보다 큰 도시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무산되었다.

피가로는 빈자리에 레녹스를 추천했다. 아는 사람의 일이라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며 과장된 말과 행동을 꾸며냈다. 처음에 레녹스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결국 이번에도 피가로의 뜻에 따르게 되었다. 이미 많은 도움을 받은 은인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피가로는 긴 여행으로 녹초가 된 레녹스를 향해 두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더도 덜고 말고 두 해면 돼.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사람을 구해볼게. 너도 알다시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이 작은 마을에선 양 떼를 맡길 만큼 신뢰할 만한 사람을 찾는 것도 일이거든.”

시작은 2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자연스럽게 5년이 되고, 10년이 되었다. 그 즈음에는 레녹스의 곁에 쿠릴이라는 듬직한 목양견도 생겼다. 레녹스는 진심으로 쿠릴을 아꼈다. 사람이 무뚝뚝해서 그렇지, 레녹스는 본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커다란 몸집만큼이나 속에 품은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 못 하는 짐승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애정을 베풀었다.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심드렁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쿠릴의 존재는 도움이 되었다. 쿠릴은 레녹스를 더욱 단단하게 지탱해 주고,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아주었다. 피가로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어느 날, 피가로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파우스트를 찾지 않아도 괜찮아?”

“쿠릴을 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남쪽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쿠릴은 사람을 좋아하는 얌전한 아이였다. 겨울 한 철 정도라면 굳이 피가로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선뜻 맡아줄 터였다. 그러나 레녹스는 쿠릴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법사인 자신에 비해 짧은 생을 살아갈 쿠릴과 계속해서 추억을 쌓고 싶다고.

그 말을 들은 피가로는 묘한 얼굴이 되었다.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북쪽 출신 마법사와 중앙 출신 마법사는 연고 없는 남쪽 나라에서 교제를 이어나갔다.

“피가로님, 여기 깔고 앉을 것을.”

“됐어.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피가로는 휘휘 손사래를 치며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웅대하고 장엄한 장관으로 유명한 레이타 산맥, 피가로는 그곳에서 양을 방목하는 레녹스를 종종 찾았다. 햇살이 뜨거운 여름이지만, 레이타 산맥은 고도가 높아 선선한 바람이 많이 불어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무엇보다 레녹스와 함께 있으면 주변 눈치를 살피지 않고 마음껏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레녹스는 쓸모가 없어진 담요를 들고 굳어 있다가 천천히 피가로의 옆에 앉았다. 초원에 흩어져 메에, 하고 우는 양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녹스는 기어이 피가로의 무릎 위에 얇은 담요를 올려두었다. 몇 번이나 필요 없다고 해도 참 고집스러웠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레녹스는 여전했다. 레녹스는 피가로를 파우스트의 스승이자 은인으로 대했고, 피가로는 레녹스를 파우스트의 종자이자 자신에게 도움을 받은 한 사람으로 여겼다. 수십 년이 흘러도 변함없었다. 두 사람은 가깝고도 한없이 먼 사이였다.

가파른 언덕길에 다리를 쭉 펴고 앉은 피가로는 수북한 풀을 손바닥으로 흐트러뜨렸다.

“올해도 이곳에 머물 거야?”

“……그렇네요.”

레녹스는 갑작스러운 피가로의 질문에 고개를 숙였다. 두꺼운 뿔테안경에 가려진 눈빛이 수심에 차있었다. 피가로는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잔잔한 산들바람이 풀밭을 부드럽게 너울지게 했다. 두 팔로 흙바닥을 짚은 피가로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뻥 뚫린 산맥의 시원한 공기를 만끽했다. 바람에 들썩이며 흐트러진 앞머리가 이마를 간질였다.

레녹스가 신중한 건 알고 있었지만, 감안해도 고민이 길었다. 뭐,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불과 몇 달 전에 쿠릴의 장례를 치렀다. 나이가 들어 다리가 불편해진 쿠릴은 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놀지 못했다. 언제나 오두막의 벽난로 앞에 지친 몸을 누이고 있을 뿐이었다. 특별한 병은 없었지만, 이미 언제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져있었다. 튼튼한 것을 감안해도 쿠릴은 다른 개에 비해 굉장히 오래 살았다. 아마 레녹스를 두고 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레녹스를 더불어 쿠릴을 아끼던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었다. 그중에서도 이별이 낯선 어린아이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아이들은 예쁜 꽃과 소중한 물건을 가져와 쿠릴과 함께 묻어주었다.

쿠릴은 레녹스가 남쪽에 머물 이유였다. 쿠릴이 죽은 이상, 더 이상 레녹스가 남쪽에 다리를 붙이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피가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에 잠긴 레녹스의 옆모습을 보며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그를 남쪽에 붙잡아 두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레녹스는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조금 더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려고 합니다.”

“휴식?”

“네, 역시 지친 것 같아요.”

말을 마친 레녹스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틀고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안될까요?”

자리에 앉아 몸을 웅크린 레녹스는 피가로보다 눈높이가 살짝 낮았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모습은 영락없이 식탁 밑의 쿠릴을 떠올리게 했다.

피가로는 가끔 레이타 산맥에 찾아와 레녹스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가볍게 반주를 즐기곤 했다. 물론 언제나 가볍게 마셨던 것은 아니다. 흠뻑 취할 때까지 들이부었던 적도 있었고, 술김에 사소한 일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남쪽 나라의 술은 독하고, 안주는 대개 부실했지만 때로는 양고기 같은 사치품을 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쿠릴은 제 밥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콩고물이 떨어질까 싶어 식탁 근처를 배회했다. 생각해 보면 의젓하지만 식탐이 많은 아이였다.

실제로도 몇 번 쿠릴의 밥그릇을 채워준 적이 있었다. 피가로는 입이 짧았고, 레녹스는 쿠릴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식을 앞에 둔 쿠릴은 푹신한 귀를 늘어뜨리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표정은 마치 ‘정말 먹어도 돼?’라고 묻는 듯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레녹스에게서 쿠릴의 모습을 본 피가로는 참지 못하고 막힌 웃음을 터뜨렸다.

“왜 나한테 허락을 받는 거야? 끌리는 대로 하면 되잖아.”

“일을 맡겨주신 건 피가로님이니까요.”

“내가 아니야. 네게 일을 주는 건 고용주겠지?”

“그건 맞지만, 그래도 피가로님께 여쭤보는 게 우선이겠죠. 제가 남쪽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것도, 이렇게 목자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전부 피가로님이 신경 써주신 덕분이니까요.”

“이상한 말을 하네. 난 소개를 해줬을 뿐, 신뢰를 쌓고 일감을 얻어낸 건 너의 힘이야. 레노, 넌 자유로워. 네가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레녹스는 말문이 막힌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말에 소질이 없었다. 어느 쪽도 먼저 입을 열지 않으니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가느다란 바람 소리, 풀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 양들이 낮게 우는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어지는 침묵이 숨 막힐 법도 한데, 달라진 관계 탓인지 옛날만큼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피가로는 한참 동안 양들이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불현듯 잊고 있던 게 떠오른 것처럼 삐딱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있잖아, 레노. 하나만 물어도 될까?”

레녹스는 피가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피가로는 얕은 숨을 들이켜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처럼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파우스트가 혹시라도 나를 저주했을까?”

“왜 그런 말을…….”

당황한 레녹스가 말을 더듬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파우스트와 함께 있었던 사람으로서 레녹스에게 묻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녹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자 아주 나쁜 짓을 한 기분이 들었다. 몹시 잔인한 질문이지만, 그럼에도 성실한 레녹스는 어떻게든 답을 해주려 했다. 절대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단칼에 끊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단언할 수 없었다.

피가로의 말대로 배신당해서 상처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잃는다. 강한 증오와 원망은 사람을 바꿀 힘이 있었다. 알렉에게 내쳐진 파우스트가 감옥에 갇히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주군을 찾아 헤맨 레녹스가 바뀌었듯이.

결국 레녹스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레녹스의 얼굴은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넌 나를 비난하지 않는구나.”

피가로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내가 밉지 않니?”

레녹스는 간신히 뭍에 올라온 사람처럼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무렵에는 비교적 차분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밉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저는 피가로님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야말로 죄인에 불과한걸요.”

레녹스가 쓰게 웃었다. 차라리 우느니만 못한 미소였다. 입안에서 새까맣게 타버린 재의 맛이 느껴졌다.

“피가로님을 탓할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는걸요.”

레녹스는 자신의 무릎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손등에 뼈와 핏줄이 도드라졌다.

“저는 지금껏 파우스트님에게 무거운 역할을 강요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은, 그분이 자신을 더 소중히 여겨주었으면 했을 뿐인데. 정말 그뿐이었는데…….”

길게 내려온 앞머리 탓에 표정을 살피기 어려웠다. 레녹스는 한숨을 쉬며 안경을 벗었다. 세월의 깊이를 간직한 눈으로 안경을 바라보다가, 상처투성이 손으로 연거푸 마른 세수를 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시 그때로 돌아가 파우스트님을 구할 수 있다면, 하다못해 상처받은 몸을 이끌고 떠나는 그분을 붙잡을 수 있었다면…….”

“넌 진심으로 파우스트의 행복을 바라고 있구나.”

피가로는 작게 탄식했다. 허공에 팔을 띄운 채 잠시 머뭇거린 그는 곧 레녹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깻죽지를 문지르며 답지 않게 어색한 위로를 건넸다.

“레녹스,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니? 파우스트가 너를 잊어도? 너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떠나주길 원한다고 해도, 그래도 상관없는 거니?”

“피가로님, 저는 지금까지 무작정 파우스트님을 찾아다녔습니다. 파우스트님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어 각지를 떠돌며 그분의 행복을 기원해왔습니다.”

레녹스는 피가로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 피가로를 의식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레녹스는 꺼멓게 죽은 안색으로 심한 자책의 말을 쏟아냈다.

“파우스트님은 저 같은 것보다 중요합니다. 저는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 파우스트님과 재회하고 싶지만, 만약 제 존재가 그분에게 새로운 마음의 짐이 된다면 이대로 영영 만나지 못해도 좋습니다. 그분이 행복하게 지내고 계신지, 이 눈으로 담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영웅이 되셨으면 좋겠다고도, 옛날의 뜻을 되찾으셨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분이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누리기를 바랄 뿐입니다.”

“레노.”

“저를 잊음으로써 행복하실 수 있다면 오히려 다행이겠죠. 어차피 그때의 기억은 더 이상 그분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겁니다. 옛 추억은커녕 악몽으로나 남지 않으면…….”

“레녹스, 진정해.”

레녹스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무릎을 움켜쥔 손도, 옛날보다 현저히 마른 어깨도 전부 조금씩 경련하고 있었다. 피가로는 난처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모처럼의 대화가 이렇게 된 책임은 전적으로 피가로에게 있었다. 어리석은 감정에 이끌려 쓸데없는 질문을 한 탓이다.

피가로는 레녹스의 등을 자상하게 어루만지며 거칠게 헐떡이는 그를 진정시켰다.

“자기보다 소중하다니, 그런 생각은 좋지 않아. 파우스트가 듣는다면 널 혼낼 거야.”

피가로는 레녹스를 감싸듯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남는 손으로 강하게 말린 레녹스의 손을 살살 풀어냈다. 부드럽게 어깨를 주무르며, 손아귀에서 부서질 뻔한 안경을 천천히 끄집어냈다.

“……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다행히 레녹스는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갑작스러운 폭발로 다소 지친듯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피가로는 그제야 안심하고 눈썹 끝을 누그러뜨리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피가로 선생님이야. 둘만 있을 때는 괜찮지만 나쁜 버릇이 들까 걱정되는구나.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 줘.”

“주의하겠습니다, 피가로 선생님.”


그 이후로도 레녹스와는 종종 파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하게 동요하던 레녹스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담담해지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게 옛 추억을 언급할 수 있게 되었다.

레녹스는 파우스트의 종자였고, 피가로는 한때 파우스트의 스승이었다. 실상 두 사람의 인연은 파우스트가 이어준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파우스트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위로와 안정을 찾았다.

어떠한 사건도, 감정의 고저도 없이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을 때였다. 또 어느 날은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왔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진료소의 문을 닫아걸었을 무렵이었다. 등 뒤에서 익숙한 마력의 기색이 느껴졌다.

이곳에 절대 발을 들일 리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 존재를 의심했지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피가로가 틀릴 리가 없었다. 세상에 이런 마력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당혹감 때문일까, 의식하지 않아도 손끝이 떨렸다. 피가로는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를 한데 모아 정돈하며 입을 열었다.

“오즈, 오랜만이다.”

언제나 피가로 쪽에서 오즈를 찾아갔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날에도, 드물게 맑은 날에도. 지금까지 아무 마찰도 없었던 것처럼 술 한 병을 들고 북쪽 나라의 성을 찾아갔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오즈 쪽에서 먼저 피가로를 찾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것만으로도 일생에 다시없을 특별한 날이 되었다.

“네가 여기까지 웬일일까.”

피가로는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뒤로 돌았다.

“피가로.”

정말로 오즈잖아. 피가로는 눈에 익은 동생제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헛것이 아니었다. 피가로를 바라보는 오즈는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초조해 보였다. 무심한 낯에서 시선을 돌리자, 엉성한 자세로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품에 있는 건?”

“아이가 이상하다.”

오즈의 말을 들은 피가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오즈의 입에서 ‘아이’라는 호칭이 나온 것도, 그가 아픈 아이를 데려왔다는 사실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오즈가 피가로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저도 모르게 움찔한 피가로는 자신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색색거리는 어린아이의 가녀린 숨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마도 열병에 시달리고 있을 아이는 오즈의 두 팔에 완전히 감싸여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진찰을 위해 데려왔으면서 정작 빼앗기는 것이 두려운 듯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오즈는 무척 이상했다. 그냥 모든 것이 낯설었다. 피가로가 아는 오즈는 인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사람의 몸을 부여받았을 뿐인, 마음 없는 인형. 그러나 지금 피가로의 눈앞에 있는 건 분명히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 몸속에 붉은 피가 흐르고,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지닌 평범한…….

강제로 생각을 끊어낸 피가로는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왜 내게 데려온 거야? 묻고 싶었지만, 동시에 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고향을 등지면서까지 어렵게 얻은 안식이었다. 피가로에게 진료소는 집이자 일터이며, 다정한 기억이 깃든 곳이었다. 이곳에서 괜히 오즈와 입씨름을 하고 불쾌한 심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환자가 우선이다. 혀를 찬 피가로는 재빠르게 의자에 내려놓은 가운을 걸치며 손짓했다.

“거기서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여기 눕혀.”

오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는 답지 않게 조급한 태도로 아이를 하얀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내려놓는 순간에도 팔을 내려 머리를 받치는 것이 지극정성이 따로 없었다. 오즈가 데려온 건 작고 마른 아이였다. 자기보다 연약한 것을 상대로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하필 행동의 주체가 오즈라 징그러운 기분이 되어버린다.

피가로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그리고 처음으로 아이를 보게 되었다. 오즈가 품에 넣고 감추고 있던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피가로는 숨을 삼켰다. 옆에 선 오즈의 불안한 눈빛도, 아픈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도 순간적으로 전부 잊어버렸다.

하늘에 뜬 달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카락이었다. 아이를 보자마자 피가로는 과거에 연이 있던 어떤 사람을 떠올렸다. 감히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내걸던 건방진 인간이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사랑스러운 잔상이 스쳐간다. 향기가 옅은 제비꽃처럼, 작고 섬세한 제자의 모습이 뒤따랐다. 코 끝에 남은 부드럽고 달콤한 잔향에 잠시 넋을 놓았던 것 같다.

“피가로.”

피가로는 오즈의 재촉을 듣고서야 간신히 현실로 돌아왔다. 아이의 열을 재기 위해 이마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한 아이가 오즈의 목소리를 듣고 힘겹게 눈을 떴다.

“오즈, 님…….”

마주친 것은 시린 바다처럼 푸른 눈이다. 약속을 쉽게 입에 담는 인간의 아이. 그럼에도 눈앞의 아이는 인간이 아닌 마법사였다. 아이는 손을 내밀었고, 오즈는 기다렸단 듯이 그 손을 붙잡았다. 피가로는 무감각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운명이라는 것은 잔혹하기도 하지. 결국 이렇게 오즈를 통해 다시 한번 피가로를 얽어맸다. 아이는 고사리손으로 오즈의 손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피가로의 눈에는 그것이 꼭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달뜬 얼굴로 해사하게 미소 지으며 자기는 괜찮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그런 아이의 목소리가 물속에 있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피가로는 감동적이고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생판 다른 생각을 했다.

‘우연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알렉을 닮았어. 당연히 그의 후손이겠지.’

알렉은 피가로와의 약속을 어겼다. 알렉이 파우스트를 배신하면서 두 사람의 혼인은 무산되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결합을 도와 파우스트의 권리를 확립하려던 피가로의 계획은 화려하게 부서졌다. 그래도 만약 파우스트가 예정대로 알렉과 혼인을 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알렉을 닮은 아이일까, 파우스트를 닮은 아이일까.

‘이런 생각까지 하고, 드디어 미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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