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27


4.

크고 작은 나무뿌리가 얼키설키 얽힌 머리맡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관자놀이를 두드리는 차가운 빗물에 돌연 눈이 뜨였다. 내리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어둡게 침잠한 회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녹색 동공이 수축했다가 천천히 확장되었다.

눈을 뜬 피가로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눈만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깐 정신을 잃은 사이에 이슬비가 내린 모양이었다.

‘몸은…….’

그는 축 늘어진 손끝을 쳐다봤다. 억지로 움직여보려 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는다.

‘무리야. 꼼짝도 안 해.’

뱀에게서 벗어난 것만 해도 최선을 다한 거였다. 알면서도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긴 한숨을 쉬었다.

피가로는 현재 겹겹이 얽힌 나무뿌리가 만든 작은 굴속에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간신히 발동한 마법은 반쪽짜리였다. 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파우스트를 삼키는 것은 막지 못했다.

피가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파우스트를 되찾고자 했다. 그는 온전치 않은 몸으로 뱀과 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뱀의 꼬리에 맞아 절벽 밑으로 추락했다.

급한 대로 빗자루를 불러 날아오르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예리한 이빨에 관통당한 옆구리는 상태가 심각했다. 깊이 스며든 독 탓에 운신은 자유롭지 않았고, 쉴 새 없이 콸콸 쏟아지는 피가 멎지를 않았다. 꼬리로 후려쳐지며 갈비뼈와 장기가 손상되었는지 심한 격통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비교적 온난한 숲과는 달리 안개로 가려진 절벽 밑은 미친 듯이 추웠다. 바람을 가르며 떨어진 피가로는 살얼음이 낀 강에 떨어졌다. 물살에 거세지 않은 하류에 메다 꽂힌 게 천만다행이었다. 피가로는 얼음에 몸이 부딪치기 직전, 필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몸을 방어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물에 닿자마자 얇은 칼날로 몸을 저미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내달렸다.

수직으로 낙하한 피가로의 몸에 들이 받친 살얼음은 우수수 깨져 조각만 남았고, 그는 물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벌어진 옷 틈을 가득 메우며 소름 끼치는 한기가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가 절로 딱딱 부딪치면서, 뇌가 얼얼하게 마비되기 시작했다.

얇은 방어막 한 겹만을 두른 맨몸에 가해진 충격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섰다. 그대로 기절할 뻔했으나, 지혈되지 않은 부상을 움켜쥐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피가로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몸을 억지로 보채며 허겁지겁 뭍으로 향했다.

물을 잔뜩 먹은 탓에 호흡기가 먹먹하게 막혀, 어떤 것도 또렷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쓸모 없어진 몸뚱이를 재촉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붉게 물든 물에서 겨우 기어 나올 수 있었다.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골고루 아파서 뱀에게 물어뜯긴 옆구리 정도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피가로는 보랏빛으로 질린 채 이번에도 근처의 나무둥치로 네 발로 기어갔다.

힉힉거리는 딸꾹질이 자꾸 나와 애를 먹었다. 피가로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힘겹게 끔벅였다.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 까무룩 점멸하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간신히 안전한 곳을 찾아 숨을 돌리던 것이 직전의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뱀이 노리는 것은 피가로였다. 뱀은 그들이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줄곧 피가로를 찾고 있었다. 뱀은 피가로를 먹어치울 셈이었다. 파우스트를 삼킨 것도 그에게 묻은 피가로의 마력을 잘못 읽어 실수한 거였다.

피가로의 질문을 대충 얼버무린 쌍둥이가 현자를 구해야 한다며 재빠르게 달아난 뒤였다. 다른 사람들과 흩어지게 되었을 때, 피가로는 이유 모를 불안에 파우스트에게 마법을 걸었다. 약해지고 있다고 해도 피가로는 여전히 파우스트보다 강했다.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고, 몰래 가호를 거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현명하고 뛰어난 마법사지만, 피가로는 여전히 비상시에 자신이 어른으로서 그를 지켜줘야 한다고 느꼈다. 아마 이 또한 몸에 밴 나쁜 버릇일 것이다. 파우스트가 알면 불쾌하게 여길 테니 당연히 말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마력에 제한이 걸릴 줄 알았더라면 더욱 꼼꼼하게 방비를 하는 건데. 얼마 전에 비슷한 낭패를 겪고서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반복된 실책에 대해선 안일했다는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마법이 나오지 않는 문제가 노화 때문이 아니라 장소의 특수성 때문인 듯했다. 비교적 익숙한 북쪽 나라에 속해있음에도 이곳은 피가로와 상성이 몹시 나빴다. 아마도 재액의 영향일 것이다.

파우스트를 삼킨 뱀은 곧 목표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피가로에게 달려들었다. 차라리 저항하지 않고 뱀에게 먹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파우스트에게 걸어둔 마법은 풀리지 않았다. 먹히자마자 소화되거나 하는 불상사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쌍둥이와 미스라의 행방이 묘연한 마당에 그런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같이 먹히기보다는 밖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 판단했다.

‘마비독, 아니, 신경독이라고 보는 편이 맞나.’

피가로는 냉정하게 자신의 상태를 재확인했다. 욱신거리는 두통을 견디기 위해 눈을 감으니 거짓말처럼 다시 잠이 밀려왔다. 마력은 넉넉하게 남아있으나, 아직도 출력이 불안정했다. 컨디션이 온전할 때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전신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에서 해독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적어도 망가진 육체를 복구하기까지 적절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파우스트를 구해야 하는데…….’

그 뱀은 대체 뭐였을까. 그것에게서 익숙한 마력이 느껴졌다. 간단히 말해, 피가로 자신의 마력이었다. 하도 위급한 상황이라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파우스트도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자신의 기색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에 비해 짚이는 바가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매개를 뺏긴 기억도, 그런 것을 만들어낸 기억도 없었다.

이상 현상과 관련된 기억이라면 뭐든 좋았다. 무엇이든 떠올려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또다시 눈앞이 가물거렸다.

‘어차피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해. 어떻게든 위로 올라간다고 해도 금방 들켜서 먹히겠지.’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고 해도 잠시뿐이다. 그만한 덩치에 자신의 마력을 품고 있다면 지금쯤 거의 다 회복되었을 것이다. 결국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상황이 악화된 셈이다.

……조금만 쉴까. 초조한 마음과 별개로 피가로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어쩐지 피로로 찌든 육체의 유혹에 지는 것 같아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 판단이 옳았다.

피가로는 긴장으로 움츠러든 몸을 이완시켰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는 감각이 소름 끼쳤다. 시시각각 체온이 떨어지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죽지 않을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위험해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건 특기였다. 불안과 걱정으로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자마자 병든 육체가 죽음처럼 깊은 숙면을 요구했다.


설원에서의 일 이후, 피가로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즈는 곧장 자신의 성으로 돌아갔고, 피가로는 스노우와 화이트를 따라 새로운 거처로 향했다. 도무지 물어볼 틈이 없었다. 물론 물어본다고 해도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둘러댈 뿐, 절대 이유를 알려주지 않을 터였다. 당당하게 썩은 인연이라고 부를 만큼 오래된 교제인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가로는 쌍둥이를 도와 새로운 거처를 꾸미고, 마당에 마시아 나무를 심었다. 적적한 노인들을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야박한 동생제자를 탓하며 성심성의껏 스승을 보좌했다. 더할 나위 없이 한적하고 무료한 시간이었다. 피가로는 스승의 비호 아래 여유를 만끽하며 자신에게 벌어진 문제를 찾기 시작했다.

피가로가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기억하는 순간은 과거 혁명군 출신의 마법사에게 파우스트의 죽음을 전해 들은 일이었다. 겁도 없이 저주를 걸어오는 마법사를 돌로 만든 기억은 생생한데, 그 뒤는 솔직히 모호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건 틀림없는데, 이상하게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가끔은 모르는 편이 오히려 득이 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쌍둥이를 따라나설 때부터 그들의 변덕스러움에 빠르게 질릴 것이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정된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피가로는 작게 간소화한 짐을 모두 트렁크에 욱여넣고, 빵빵하게 채운 트렁크를 챙겼다.

누가 쓸데없이 감 좋은 노인네 아니랄까 봐, 스노우와 화이트는 정말 눈치가 빨랐다. 늘 그렇듯이 소리 없이 떠날 생각이었는데, 그들은 이번에도 기어코 알아차리고 피가로를 배웅하러 나왔다.

“피가로야, 떠나는 겐가? 더 오래 있어도 되는데.”

“하하……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게야?”

“비슷해요. 두 분에겐 신세졌어요. 조금 귀찮긴 해도 여태 어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찮다’와 ‘고맙다’가 공존할 수 있는 단어라는 걸 처음 알았구먼. 제대로 감사를 표하는 버릇이 안 되어있어.”

다행히 쌍둥이는 떠나는 피가로를 붙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몇 번 성가신 스승에게 잡혀본 경험이 있는 피가로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니?”

“남쪽으로 갈 거예요. 그곳에서 황무지를 개척하는 일을 도울 겁니다.”

“남쪽이라…….”

스노우와 화이트는 대놓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충분히 예상대로였다. 피가로는 작게 웃으며 고풍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문에 손을 댔다. 어차피 한 번씩 얼굴을 볼 텐데, 굳이 복잡한 인사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였다.

“스노우님, 화이트님.”

피가로는 의식하지 않은 채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은 인간과 마법사가 화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스노우와 화이트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동시에 입을 모아 말했다.

“불가능하진 않겠지. 다만, 실현이 가능한 건 먼 훗날이 아닐까?”

“인간도, 마법사도 서로 마음을 열어야 해. 그러려면 큰 계기가 필요할 게야.”

“응응, 인간들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아주 크고 어려운 계기가.”

마주 보고 고개를 주억거린 쌍둥이가 이번에는 피가로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피가로야말로 독특한 질문을 하는구나. 인간은 약하고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라면서?”

“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저한테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이 있거든요.”

피가로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문에 새겨진 문양을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잔향을 좇듯이 눈을 감고 차가운 표면을 더듬었다.

“허황된 말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겐 꽤 괜찮게 느껴졌어요. 물론 단순한 신뢰만으로는 어려울 거예요. 서로 많이 양보하고 배려하며, 값진 것을 내어주어야겠죠. 이번에는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보려고 해요. 정말 실현 가능한 꿈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요.”

쌍둥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긍정적인 응원도, 부정적인 만류도 없었다. 그런 반응조차 언제까지고 한곳에 고여 있는 그들다웠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피가로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힘껏 문을 열었다.

이사와 정착을 도운 스승의 새로운 거처, 낯설지만 그새 정이 들었던 장소를 떠나는 길. 한사코 거절해도 쌍둥이는 기어이 알록달록한 별사탕이 든 병을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쌍둥이의 성을 나온 피가로는 빗자루 끝에 트렁크를 매달고 높이 날아올랐다.

오랜만에 찬바람을 맞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기나긴 비행을 앞두고 예쁜 병에서 아기자기한 별사탕을 꺼내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달다.’

쌍둥이의 별사탕은 여전히 엄청나게 달았다. 옛날에는 음식의 폭이 제한적이고 귀했다. 까마득히 어린 시절, 처음 쌍둥이에게서 달콤한 별사탕을 받았을 적엔 입에 달고 살 정도로 굉장히 좋아했었다.

지금은 입안에 퍼지는 단맛이 물려서 하나만 먹어도 충분했다. 이런 부분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을 실감하곤 했다. 천 년을 넘게 살아왔으면서 주제넘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옛날 생각나네.’

그새 입맛이 변한 걸까, 아니면 달콤한 별사탕 속에서 느껴지는 쌍둥이의 관심이 좋았던 걸까. 이제 와선 알 수 없었다. 깊게 파고들고 싶지도 않았다.


북쪽을 떠난 피가로는 머지않아 남쪽 나라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생소하게 느껴졌던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슬슬 익숙해질 즈음이었다. 오랜 떠돌이 생활로 지친 날개를 쉬기 위해 자리 잡은 새로운 둥지에서 다시 한번 옛 인연과 재회하게 되었다.

큰 키와 뼈대가 굵은 체구 탓에 인물 자체는 수수할지라도 어디에 가든 도드라져 보이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넓어 보였던 등이 초라할 정도로 가늘어져 있었다. 피가로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안녕, 오랜만이네.”

“피가로님.”

레녹스는 뜻밖의 만남에 당황한 눈치였다. 매서운 눈빛이 다시없을 정도로 부릅 뜨여 있었다. 바라보는 눈동자는 익히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었으나, 근본적으로 녀석과는 달랐다. 피가로는 그 눈에 담긴 다채로운 감정 속에서 원망과 증오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런 곳에서 옛 지인을 만날 줄은 몰랐어. 여행을 하던 중이니?”

“여행…….”

중얼거린 레녹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레녹스는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마주친 눈동자는 무척 깊고 우울했다.

“여행이라기보다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레녹스는 느린 어조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말했다. 원래 이런 느낌이었나? 떠올려보려 했지만, 너무 옛날 일이라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괜히 말을 걸어 상황을 악화시킨 걸지도 모른다. 상상 이상의 음침한 분위기에 질린 피가로는 몰래 곤란한 소리를 냈다.

피가로는 넓적한 바위에 앉은 레녹스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차지했다. 레녹스는 아무 말 없이 열 손가락을 얽다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피가로님, 이런 말씀드리기 염치없지만…… 혹시 그분을, 파우스트님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음…….”

그렇군. 역시 파우스트를 찾고 있었나. 피가로는 눈썹 끝을 내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과연 레녹스다운 이유였다. 레녹스의 초췌한 몰골도, 뜬금없이 남쪽을 헤매고 있는 이유도 모두 이해가 갔다. 과하게 충성스럽고, 지나치게 우직했다.

“어떡하지, 그 이후로 파우스트를 만난 적은 없는데. 미리 말해두자면 소식도 듣지 못했어. 내가 아는 정보는 너보다 적을 거야.”

“……그렇, 습니까.”

대답을 들은 레녹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 간신히 살아남은 패잔병처럼 처참한 모습이었다. 비스듬히 기운 고개를 통해 레녹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눈 밑의 짙은 그늘과 창백한 안색이 지켜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피가로가 파우스트를 버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레녹스는 그에게 기대를 품고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어 실망을 했다. 마치 피가로가 아직도 파우스트의 스승인 것처럼, 피가로가 혁명군의 길을 밝혀주는 귀인인 것처럼.

레녹스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피가로에게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정확히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면 피가로가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녀석의 시간은 아직도 그 시절에 멈춰있구나.’

남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는 편은 아니지만, 레녹스를 보고 있으니 피가로 또한 문득 울적해졌다. 어떻게든 이 기분을 정의 내리고 싶었지만, 이런 불편한 감정을 동질감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피가로는 순간적으로 느낀 감정을 책임감이라 이름 붙이기로 했다.

“너, 레녹스라고 했었나? 갑작스럽지만 시간 있어?”

피가로는 잘 정돈된 머릿속을 뒤적여 상대의 이름을 찾아냈다. 다리를 꼬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무해함을 드러냈다.

피가로는 언제나 때와 상황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켜왔다. 그에겐 수많은 가면이 존재했다. 적어도 여기에 내보일 형태는 차갑고 강력한 북쪽의 마법사나 위엄 있는 책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상냥한 남쪽의 의사 선생님이었다.

“별 건 아니고, 마침 일손이 부족해서 말이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도와주지 않을래?”

과거 구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피가로는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이들을 구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제안을 들은 레녹스의 표정은 영 시큰둥했다. 그런 사소한 일에 할애할 여유는 없다는 태도였다.

모처럼 친절을 베풀었음에도 이대로면 맥없이 거절당할 위기였다.

“이번 여름만이야.”

피가로는 힘차게 쇄기를 박았다.

“꽤 오랫동안 돌아다닌 것 같은데, 여비는 괜찮아? 너를 고용하고 싶어. 이번 일을 도와주면 웃돈도 얹어줄게.”

“……여름 한 철만이라면.”

레녹스는 오랫동안 주저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느닷없이 부탁해서 미안해. 그래도 덕분에 살았어.”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은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현재도 개척을 진행 중인 남쪽 나라에는 일자리도 풍부했고, 일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이 필요하다면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피가로는 레녹스를 위해 일부러 한자리를 마련했다. 마침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목자의 일이었다.

피가로는 레녹스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제시했다. 그는 레녹스가 순순히 단념해 주기를 바랐다. 생사불명의 주군에게 매달리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갔으면 했다. 레녹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무의미한 기대에 집착하는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안쓰러웠다.

그러나 레녹스는 정말 딱 한 철만 돕고 남쪽 나라를 떠났다. 고작 임시로 일손을 거드는 정도였다. 오래 붙잡아둘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괘씸한 녀석이지만, 그를 돕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그러던 중에 레녹스가 남긴 메모를 전달받았다. 일을 마무리하고 레이타 산맥을 내려온 레녹스는 주인에게 양들을 넘겨준 뒤, 그에게 메모의 전달을 대신 부탁한 듯했다. 피가로는 약간 긴장한 손길로 두 번 접은 메모를 펼쳤다.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극히 레녹스다운 투박한 필체였다. 앞으로 잘 지내라는 안부 인사라던가, 파우스트를 찾아 돌아오겠다던가, 하다못해 재회를 기약하는 말도 없었다.

“제대로 미움받고 있구나.”

씁쓸하게 중얼거린 피가로는 원래대로 접은 메모를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다. 말과는 달리 희미하게 치솟은 입가에 작은 즐거움이 스쳤다. 그 길로 피가로는 레녹스에게 편지를 부쳤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아담하고 흰 새는 메모에 남은 레녹스의 기운을 따라 그를 쫓았다.

레녹스에게 피가로는 주군의 스승이지만, 동시에 그 소중한 주군을 버린 사람이기도 했다. 이전의 행적 탓에 이쪽에 손을 벌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레녹스는 순순히 피가로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애초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가로에게조차 파우스트의 행방을 물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었을 것이다.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에 파고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따금 레녹스가 주저할 때마다 피가로는 교묘하게 그를 부추겨 자신의 도움을 받아들이게끔 유도했다. 타지의 지인을 소개해 주거나 일시적으로 머무를 장소를 제공해 주는 등,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소소한 도움이었다.

스스로 멈추는 법을 모르는 태엽 인형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레녹스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제자의 곁을 일방적으로 떠난 뒤, 피가로는 단 한 번도 파우스트를 찾지 않았다. 직접 소식을 알아본 적도 없고, 생사를 확인한 적도 없었다.

파우스트를 만날 준비 같은 건 되어있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을 것이다. 피가로가 레녹스를 돕기로 결심한 건 파우스트가 죽었거나 이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변했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배신당해서 상처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잃는다. 빛도, 상냥함도, 온화함도, 축복도, 솔직한 미소도. 그토록 아름답고 선명한 것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그런 사람들을 여러 번 지켜봐왔다. 절망은 독처럼 사람을 바꾼다.

피가로가 천명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파우스트는 특별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 또한 배신의 상처를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다. 사람 된 몸으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피가로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제 한 몸 편하자고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파우스트를 일찍이 마음속에서 살해하고 무덤을 꾸려놓았다. 이건 저주와 마찬가지다. 만약 파우스트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더라도, 그 애더러 비참하게 목숨을 이어갈 거면 차라리 죽으라고 저주하는 꼴이었다.

그 생각에 오싹해져서 더는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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