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진 마음과 부진한 상황 속에서, 미래의 권력을 두고 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파우스트처럼 지위와 명예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파우스트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혁명군 내부에서는 이미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로부터 전쟁과 정치는 언제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전쟁의 막바지, 몸으로 하는 싸움이 끝나갈 무렵, 말과 인맥으로 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쪽은 파우스트가 익숙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마법사의 대표로서 그들을 이끌고 있음에도 그는 너무 순진했고, 우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치게 어리석기까지 했다.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고, 군사로서의 역량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은 이전에도 끊임없이 나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파우스트를 음해하거나 적대하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알렉의 비호를 받는 사람이었으며,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기이기도 했다.
그래, 무기. 파우스트는 어떤 불합리한 일에도 불만을 표하지 않는 완벽한 도구였다. 그는 알렉이 가진 가장 강력한 카드이자 비장의 수단이었다. 자신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쓸모를 다한 무기로서 감옥에 투옥되었을 당시의 일이다. 그건 국가를 수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파우스트를 따르는 마법사들이 알렉을 끌어내고 새로운 왕으로 그를 추대한다’는 황당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낡은 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느라 바쁜 시기였다. 즉위식 준비를 서두르느라 바빠 알렉의 얼굴을 본 지도 오래되었다.
파우스트는 반역죄로 고발당해 그랑벨 성 지하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개국공신이었지만,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무도한 무리에게 붙잡혀, 다짜고짜 목줄 매인 짐승처럼 끌려갔다.
파우스트는 몹시 당황했으나, 끝까지 체면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반역죄를 뒤집어쓴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파우스트를 도와 혁명을 승리로 이끈 많은 마법사들이 같은 혐의를 뒤집어썼다. 조사를 위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거세게 저항한 이들이 다수였다. 그만큼 억울한 누명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과 동조하고 싶었지만, 파우스트는 지당한 자기방어가 폭동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들불처럼 번지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파우스트가 나설 필요가 있었다. 결국 그는 두려움을 삼키고 의연한 태도로 유지하며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다. 단언컨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한심한 행동이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신뢰만큼 값진 교환물은 없다. 파우스트는 마법사의 약속에 버금갈 정도로 귀한 신뢰를 알렉과 나누었으며, 그것을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여겼다.
파우스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자신을 필두로 한 마법사들이 알렉을 해하고 나라를 찬탈하려 하다니, 주장하는 사람의 머리가 의심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이 일은 금방 알렉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누명을 쓴 이들은 무사히 풀려나고, 앞뒤 재지 않고 행동한 모든 이들이 엄벌에 처해질 터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파우스트와 그의 부하들은 감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한 채,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파우스트는 친우에게 항변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옥에 투옥되고 불과 닷새, 파우스트와 그의 동료들이 처형대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전란의 불길이 대지를 휩쓸고, 가뭄과 전염병이 궁핍한 사람들을 낙엽처럼 쓰러뜨렸다. 지난 몇 년간 다양한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사람들은 저주를 두려워했다. 저주의 연쇄를 막기 위해 설령 사형을 선고받은 자라도 죽기 직전의 사람은 건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파우스트는 그 모든 관습에서 예외가 되었다. 반역자로 낙인찍힌 그는 선고를 받은 이후에도 심한 고초를 겪으며 수차례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처음 보는 얼굴의 간수는 파우스트에게 억지 자백을 받아나기 위해 쓰러진 그에게 침을 뱉고 구타했으며 맨살을 달군 쇠로 지졌다. 얼마 남지 않은 자존감이 형체도 남지 않고 으스러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반가운 사람이 찾아왔다. 모진 고문으로 벌어진 상처를 끌어안고 피와 먼지로 지저분한 바닥에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을 때였다. 눅눅한 벽지는 곰팡이의 쿰쿰한 악취가 났으며 갈라진 천장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했다. 파우스트는 부상과 피로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을, 그를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느꼈다. 신발 밑창 전체로 땅을 딛는 묵직한 걸음은 무척이나 익숙한 종류였다.
파우스트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파우스트님…….”
힘겹게 올려다본 곳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알렉이 아닌, 레녹스가 있었다.
“……레녹스, 인가.”
파우스트는 꺼질 듯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어쩔 도리 없이 고개가 기울어졌다. 레녹스는 파우스트의 표정을 읽은 것 같다. 아주 짧은 순간, 레녹스의 얼굴에 깊은 상처가 스쳐 지나갔다.
“알렉님을 기다리셨습니까?”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엔 너무 지쳐있었다. 파우스트는 대답하지 않았고, 무언은 충분한 긍정이 되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알렉님은 오지 않으실 겁니다. 알렉님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레녹스는 뒷말을 흐렸다. 좋지 않은 것을 떠올리듯 흐려진 낯이 곧 절박함으로 물들었다. 파우스트가 갇힌 감옥을 향해 달려든 그는 창살 너머로 손에 든 것을 보였다. 미간을 모은 파우스트는 흐릿한 초점을 한 곳에 집중시켰다.
레녹스가 들고 있는 건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열쇠였다. 자잘한 흠이 많고 투박한 그것은 필히 감옥문을 여는 열쇠일 것이다.
“파우스트님, 여기서 도망갑시다. 제가 열쇠를 찾아왔어요. 이런 말이 달갑지 않으실 거라는 건 알지만, 제발 저를 따라 도망쳐 주세요.”
레녹스는 다부진 두 손으로 창살을 붙잡고 애원했다. 자세히 보면 초췌한 만면에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지난 며칠간 최악의 시간을 보낸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윗선은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습니다. 파우스트님은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분이 아니잖아요. 당신에겐 더 많은 역할이 남아있습니다. 저희들을, 마법사를 이끌어주셔야지요. 도망치자는 제안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부디 들어주세요.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제가 파우스트님을 구할 수 있도록 명령해 주세요.”
“불허하겠다.”
“어째서…….”
레녹스는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불명확한 시력으로도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우스트는 그나마 희미한 불빛이 드는 창살을 향해 두 손으로 기어갔다. 넝마가 된 몸이 바닥에 끌리며 지저분한 자국을 남겼다.
레녹스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창살로 다가간 파우스트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 한차례 심호흡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헐떡거리는 숨을 삼킨 그는 창살 틈으로 힘겹게 손을 뻗었다.
그대로 레녹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피와 먼지로 얼룩진 파우스트의 손은 엉망이었다. 하나의 핏덩이가 되어버린 손이 불편할 법도 한데, 레녹스는 오히려 쓰다듬을 구걸하듯 파우스트의 손을 감싸고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파우스트는 레녹스를 똑바로 쳐다보려 애썼다. 자꾸만 어긋나는 시야가 방해가 되었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입가를 당겨 어렵사리 미소를 만들었다.
“나라고 죽고 싶은 게 아니야. 하지만 도망치는 건 안돼. 난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어.”
파우스트의 말에 레녹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레녹스의 눈에 파우스트는 죽을 줄 알면서도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과 같았다. 만약 파우스트가 레녹스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 역시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레녹스…… 아니, 레노. 나는 괜찮아. 불안해하지 마. 지금보다 최악의 상황도 많았잖아. 우린 이미 험난한 산을 넘어왔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금방 알렉이 찾아올 거야. 분명 무슨 오해가 있었겠지. 여기서 도망치면 소중한 친구를 배신하는 거다. 아무리 그리워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거야.”
억지로 쥐어짠 미소는 분명 보기 싫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레녹스는 언제든 감옥문을 열고 파우스트를 들쳐 맨 채 도망칠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게다가 내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어. 나를 믿고 따라준 동료들,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와 여동생…… 그 안에는 레노, 너도 포함되어 있어. 이 모든 것을 두고 나 혼자 살자고 도망칠 수는 없어.”
파우스트는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잠깐 움직였다고 그새 온몸을 내달리는 통증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나는 여기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지 않을 거야. 내게 주어진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아뇨, 아닙니다…… 파우스트님, 후일을 도모합시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아무도 불만을 품지 않을 겁니다. 파우스트님은 바깥 상황을 모르시잖아요. 알렉님은 오지 않을 겁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합니다.”
입안에서 씁쓸한 피 맛이 났다. 찢기고 갈라진 입술이 따끔거렸다. 전부를 구할 수는 없다.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말을 하는 레녹스의 목소리는 눈동자만큼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것은 손등을 감싼 손에서도 느껴졌다. 레녹스가 품은 형태 없는 공포가 맞닿은 온기를 통해 파우스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파우스트는 이따금 얇은 벽을 타고 들리는 타인의 비명을 떠올렸다. 이곳에 잡혀온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파우스트 역시 함께 잡혀온 동료들을 구할 수 없다는 현실에 좌절을 겪었다. 파우스트와 그들의 목숨을 저울질했을 레녹스의 심정이 어떨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파우스트님을 구하고 싶습니다. 제발, 제가 그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작게 흐느낀 레녹스가 두 사람을 가로막는 감옥 앞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레녹스의 물기 서린 목소리를 들으며 파우스트는 덩달아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파우스트에게 레녹스는 언제나 단단한 사람이었다. 부러질지언정 절대 굽히지 않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그의 강인한 등을 보면 용기가 샘솟고, 반사적으로 따라 달리게 되었다.
그런 레녹스가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 때문에. 고문으로 인한 상처보다 레녹스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훨씬 더 아팠다.
“레녹스, 이번에는 내 뜻에 따라줘. 늘 그랬듯이, 나를 믿고 기다려줘.”
파우스트는 찢어진 상처에 개의치 않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파른 숨을 내쉰 그는 뜨겁게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가운 창살에 이마를 대었다.
“이런 말밖에 못 하는 못난 주군이라 미안하다.”
“파우스트님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파우스트님이 믿어달라 하시면 저는 무엇이든 믿겠습니다. 그것이 종자 된 자의 도리니까요.”
그 창살마저 미미하게 레녹스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 미지근한 느낌에 가슴 한 편이 못내 욱신거렸다. 고맙다, 고마워.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목구멍 안쪽으로 가지런히 삼켰다.
결국 파우스트를 따르기로 결정했지만, 레녹스는 끝까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레녹스는 감옥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파우스트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파우스트는 그런 기색을 읽었음에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감옥을 나서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레녹스를 외면했다.
혼자가 되니 다시 숨 막히는 적막이 찾아왔다. 늦은 밤, 잠들지 못하는 죄인들의 헐떡임과 울음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그들은 신을 부르짖었고, 소중한 사람들을 애타게 찾았다. 파우스트는 정처 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독실한 집안에서 자란 파우스트에겐 어렸을 때부터 신을 믿고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파우스트 또한 사람인지라,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곤궁한 자들이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매달리는 하나의 개념 정도로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언제나 내 말을 명심하렴.’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파우스트의 신은 분명히 존재했다. 비록 지금은 그의 곁을 떠났지만, 이 땅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눈을 감고 손에 땀이 나도록 맞잡은 채 집중하고 있으면 아직도 파우스트는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뒤에서 끌어안듯 양쪽 어깨를 쥐고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청회색의 얇은 머리카락이 차게 식은 목덜미를 스치며 기묘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파우스트에게 완전히 밀착한 피가로는 두 손을 들어 천천히 그의 귀를 막았다. 그러고는 까마득한 옛이야기를 하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파우스트, 공포를 뛰어넘어라. 그것이 승리의 열쇠가 될 것이다.’
파우스트는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 피가로의 조언을 떠올렸다. 피가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자신의 등을 지켜보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령 정말로 스승이 제게 실망하여 떠났더라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빗자루에 올라타 내려다보는 대지처럼, 마법사의 삶은 아득히 길었다. 마법사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이 날아오르면 자유롭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피가로가 자신을 떠났다면 이번에는 먼저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를 찾아가 이유를 들으면 되었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면, 사소한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파우스트는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공포를 뛰어넘자. 나약한 몸과 불안정한 정신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라는 틀에서 벗어나자. 두려움을 갖지 말자.
“알렉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나는 배신 같은 건 당하지 않을 거야. 우리의 신뢰는 어느 때고 굳건하다. 처음부터 알렉을 믿지 않았다면, 견고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길고 험난한 혁명의 길을 마무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알렉이 나를, 우리를 저버릴 리 없어.”
공포에 사로잡히지 마라. 나는 모두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내 손에 남아있는 이들을 떠올리자.
‘나의 제자, 파우스트. 너는 강하고 영특한 아이다. 절대로 잊지 말거라. 유성우가 떨어지던 날, 내 앞에서 당당하게 외치던 너의 목표.’
“그리고 내가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것들을.”
파우스트는 피가로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눈을 감고도 외울 정도로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새긴 말이었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근심과 걱정을 소리 내어 말하며, 진득하게 눌어붙은 공포와 의심을 떨쳐내고 결심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입안에서 토사물이 진창으로 뒤섞여 역한 맛이 났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파우스트는 끝내 자신의 토사물 위로 쓰러졌다. 두툼하게 쌓인 눈은 그를 부드럽게 포옹해 주었다.
열이 올라 뜨거워진 얼굴이 차가운 눈밭에 닿았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계속 계속,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눈밭을 구르고 있음에도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꺼지지 않는 불속에 있는 것처럼 전신이 아팠다. 파우스트는 강한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이상하게 괴로웠다. 다 지난 일에 불과한데, 이제는 괜찮을 텐데. 무엇이든 이 정도로 아플 리 없을 텐데.
망각은 신이 내린 가장 큰 축복이다. 파우스트는 자신이 신에게조차 버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종종 떠올렸다. 짐승처럼 헐떡이고 흐느끼다 주먹을 그러쥐었다. 다섯 손가락으로 바닥을 뒤덮은 눈을 한 움큼 움켜쥐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차라리 죽기를 바랐던 순간이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졌을 때였다. 어디든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걱정 가득한 말은 조롱처럼 들렸고, 다정한 말조차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사소한 친절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리석은 자신도, 사람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친구도,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삿대질하는 다른 구경꾼들도 진저리 나게 싫었다.
레녹스가 자리를 비운 틈에, 넝마가 된 몸을 빗자루에 싣고 무작정 중앙에서 멀어졌다. 그러다가 짐승과 정령들을 위한 깊은 골짜기에 제 발로 들어가게 되었다.
질척질척 떨어지는 빗물을 맞으며 나뭇등걸을 기어다녔다. 그대로 죽어도 상관없었다. 짧은 생을 살다 가는 미물보다 못한 채로, 하루살이처럼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 정도로 지쳐있었다. 제멋대로인 정령들이 억지로 목숨을 붙여놓아도 스스로 그 끈을 놓아버렸다. 그렇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몇 날 며칠을 보냈다.
그로부터 수십 번,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잃기를 반복했다. 밧줄에 매달려 산 채로 불에 타는 와중에도, 낯선 외지에서 혼자 조용히 죽어가는 순간에도, 계속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간절히 빌었다.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그게 아니라면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의 숨을 끊어주기를.
‘피가로님…….’
축축하게 젖은 땅에 쓰러진 파우스트는 정신을 잃은 동안 뒤죽박죽 뒤섞인 꿈을 꾸었다. 그건 악몽이라고도, 길몽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파우스트는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푹신한 침구가 몸을 감싸고, 옆에서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두려울 정도로 친숙한 느낌이었다. 이대로 거짓된 행복에 안주하게 될까 봐 불안해하면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곤히 잠든 피가로가 눈앞에 있었다. 풀어낸 머리카락이 하얀 침구 위에 흩어지고, 은은한 주홍 조명이 옥 같은 피부를 더욱 매끄럽게 비추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잠든 모습을 보자마자 어느 날인지 바로 깨달았다. 버거운 저주를 이겨낸 뒤, 피가로의 방에서 그와 함께 잠들었던 날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그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죽고 싶었다. 다시 끔찍한 현실로 돌아갈 새라 손끝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마음과 달리 몸은 저절로 움직였다.
파우스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피가로에게 다가갔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매만지고, 머뭇거림 끝에 드러난 이마를 살짝 건드렸다. 그것만으로도 예민한 피가로는 몸을 뒤척였다. 흠칫 놀란 파우스트는 손을 뗀 채 숨을 들이켰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참고 있으니, 다행히 피가로는 곧 고른 숨소리를 냈다.
스승의 옷차림을 다듬을 때, 언제나 맨살에 닿지 않도록 주의해왔다. 헐벗은 몸에 옷을 입히고, 구겨진 소매와 바짓단을 다듬어주며 느슨한 허리 끈을 조이는 과정에서 완전히 닿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토록 접촉을 피하려 했던 까닭은, 가장 안쪽에 묻어둔 희미한 욕망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피가로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런 일을 자처했다니, 나도 참 어설프지.’
흉 하나 없이 하얀 맨발을 손바닥 전체로 감쌀 때, 파우스트는 더없이 초조해졌다. 터질 듯 붉은 얼굴을 숨기려 한껏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손으로 신을 신겼다. 피가로가 불쾌함을 느끼거나, 여태 감춰온 흑심이 은연중에 드러날까 봐 불안한 마음에 지레 겁을 먹었다.
‘알고 있어. 이런 마음은…….’
더 닿고 싶고, 더 만지고 싶다니. 이건, 이런 것은 절대 아버지처럼 여기는 사람한테 품을 감정이 아니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줄곧 외면해왔을 뿐이다. 깨달음은 바람의 흐름을 탄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건 결코 평범한 이별이 아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실연이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결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런 흠이 없는, 그런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파우스트 라비니아라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운이 좋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운이 나빴던, 그런 평범한 사람 말이다.
‘당신도 나처럼 힘들었어? 나처럼 죽을 만큼 괴로웠어?’
차디찬 눈 위에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을까, 뻥 뚫린 하늘에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눈부시게 하얀 설원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파우스트는 서서히 식어가는 몸의 열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주 조금은, 당신을 원망했다. 사실은 아주 많이 원망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죄가 되는 순간에 다른 어리석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당신을 원망했다. 가장 편리한 방식대로 모든 게 당신 탓이라고, 당신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나를 떠난 당신이 나만큼 아프기를 바랐다. 그래야 했다. 세상에 이렇게 괴로운 것이 나뿐이라면, 그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슬프고 원통해서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당신의 불행을 바랐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아주 잠깐 그런 잘못된 생각을 했을지라도,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당신의 불행을 바란 적이 없었다. 나의 부족함이 당신의 죄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언제나 당신이 그리웠다. 단지 나를 잊지 않기를 바랐다. 어떠한 형태로든 당신의 기억 속에 온전히 남고 싶었다.
‘기왕 떠났으면 잘 살기라도 하지. 깔끔하게 전부 잊고 행복하기라도 할 것이지. 그런 쪽으로는 당신도, 나도 끔찍하게 융통성이 없구나.’
이래서야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둘 다 자기만의 구렁텅이를 파는데 재주가 있었다. 파우스트는 간신히 트인 숨통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머리가 맑아지자, 한구석에 고인 듯한 의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오두막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도, 오두막에 둘러두었던 피가로의 결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도, 이곳에 피가로의 마력이 짙게 남아있는 이유도,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오두막을 태운 강력한 마력도 금방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의 기억을 봉하려던 피가로의 마법은 실패했다. 장렬한 실패의 결과가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도달했다. 하필 왜, 이런 때에 재액의 영향이 미쳤을까. 고민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만남과 재회는 많은 것을 바꾼다. 파우스트 역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조금씩 달라졌다. 세상과 이어진 모든 연결고리를 끊고,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유리되어 있던 그 시절의 자신과는 달랐다.
‘피가로를 찾자. 여전히 미운 사람이지만, 그래도 내겐 고맙고 소중한 인연이니까.’
본의 아니게 불편한 기억을 엿보게 되었지만, 파우스트의 목표는 여전히 하나였다. 중요한 기억을 잃은 피가로에게 자초지종을 물을 수는 없더라도, 지금 당장 그 사람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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