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하늘을 빼곡하게 뒤덮은 먹구름과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불빛이 연달아 터졌다. 맹렬한 불길이 바람에 일렁이며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검은 연기가 흔들리는 불길의 궤적을 덧그렸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찌르며 야단스러운 소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파우스트는 이 즈음에서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이 아닌 허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파우스트는 잠이 든 상태로 계속해서 꿈을 꾸었다.
“피가로,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성큼성큼 다가온 금발의 마녀가 피가로의 멱살을 잡아챘다. 성인 남성을 가뿐히 들어 올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에 축 늘어진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피가로보다 키가 작은 여자는 그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은 채 무서운 표정으로 위에서 내려다봤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높이 매달린 덮개처럼 쏟아졌다. 피가로는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마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웃지만 말고 무슨 말이든 좀 해봐. 네가 항상 하는 말이잖아! 나도 그래.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고! 뭐든 말해줘야 방법을 찾을 수 있어.”
그 태평한 모습에 마녀는 화를 냈다. 마녀는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솔직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얼굴은 파우스트에게도 몹시 익숙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녹음을 닮은 눈에 따스한 빛 대신 은근한 서늘함이 서려 있다는 것이다.
마녀에게 붙잡힌 피가로는 여전히 실없이 웃고 있었다. 혀를 찬 마녀가 짜증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두 분을 부를 수밖에 없어. 네가 드디어 미쳤으니 도움이 필요하다고 전할 거야.”
끊임없이 이어지던 웃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피가로는 그제야 움직였다. 전신을 축 늘어뜨린 채, 매끈한 이마가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젖히고 있던 그는 스스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고개를 든 피가로는 답지 않게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가로는 자신의 멱살을 쥔 마녀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한 악력에 마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서로 불쾌한 감정은 가감 없이 드러냈으나, 두 사람 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피가로가 마녀에게 무언가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엉망으로 뭉개져 잘 들리지 않았다. 피가로를 붙잡은 마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마녀가 눈밭에 피가로를 힘껏 내던졌다. 커다란 모자가 매섭게 부는 돌풍에 날아갔다. 싸라기눈이 화려한 금발 머리카락에 아무렇게나 달라붙었다.
“북쪽 마법사의 긍지? 진짜 웃기지도 않아. 넌 자기 아쉬울 때만 출신을 들먹이면서 긍지를 운운하더라. 이곳에 대해 불평했던 건 전부 잊은 거니? 지금 네 꼴을 봐.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으면 처신을 똑바로 했어야지.”
마녀는 대차게 코웃음 쳤다. 어딘가 피가로와 닮은 사람이었다. 말투는 그에 비해 훨씬 직설적이지만, 생각 자체는 비슷했다. 피가로와 터놓고 대화할 정도라니, 이 사람이 말로만 듣던 치렛타라는 사람인가. 플로레스 형제의 어머니라더니 정말 루틸과 똑같이 생겼다.
파우스트가 한가로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피가로의 조용한 말 한마디에, 매정하기 그지없던 마녀의 낯이 서서히 흐려졌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엿보이는 마녀는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녀는 눈밭에 쓰러진 피가로를 향해 몸을 기울였고, 이내 얇은 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넌 뭐든지 쉽게 말해.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넌 나의 소중한…….”
마지막 말을 듣기 전에 눈앞이 일그러지더니, 까무룩 세상이 암전 되었다.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 피가로는 조명이 달린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숲을 거닐고 있었다. 환상적인 빛을 내뿜는 신비로운 돌이 공중에 떠있었다. 그 돌은 숲 전체에 깔린 빛을 조금씩 반사하며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다채로운 색을 흩뿌렸다.
전에 피가로에게 들은 적이 있다. 북쪽의 나라에는 꿈의 숲이라는 인상적인 장소가 있다고. 그때 나눈 대화를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치명적인 독을 내뿜고 있으니 접근하지 말라는 말을 했었다. 독을 내뿜는 숲치고는 제법 운치 있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독을 머금고 있기에 더욱 화려하고 아름다운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다른 북쪽의 마법사와 함께 임무지에 다녀온 쌍둥이가 ‘몽환의 나뭇가지 성냥’이라는 수상쩍은 물건을 마법관에 반입한 적이 있었다. 나뭇가지를 불에 태우면 행복한 환상을 볼 수 있다고 했던가. 신나서 아이들에게 나눠주려던 걸 피가로가 압수하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언뜻 지나가듯 들은 물건의 출처가 바로 이곳이었다.
신기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문득 누군가 말을 걸었다.
“여기는 왜 온 거야? 도망치고 싶었던 거야? 당신도 한심하네.”
구불구불 얽힌 나무들 틈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 사람, 아마도 파우스트가 알고 있는 어떤 마법사는 불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빈정거렸다.
“그렇게 실실 웃고, 드디어 미친 거야? 넌 여전히 기분 나쁜 녀석이구나…….”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세상이 뒤집혔다.
“피가로,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조금만 기다려. 쌍둥이 선생님을 불렀으니까 곧…….”
이제는 꽤 익숙해진 금발의 마녀, 치렛타의 목소리였다.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새 장면이 전환된 것 같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야에 익숙해지기 전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이렇게 공격적인 마법을 마구 쏟아내는 건 당신답지 않은데요. 순순히 싸움에 응하는 것도……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죠?”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나른한 목소리였다. 공교롭게도 이 목소리 또한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게, 얼마 전까지 같이 다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평소처럼 퉁명스러운 어조에 아주 작은 헐떡임이 섞였다. 설마 싸우고 있는 건가. 온전하지 않은 시력으로는 알 길이 없었다.
무언가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마법을 사용한 것 같다. 짧은 충돌 이후, 미스라가 투덜거렸다.
“뭐야, 단지 싸우고 싶었을 뿐인가요? 이제야 북쪽의 마법사답네요. 진작 이럴 것이지, 뭐 하러 지금까지 본성을 억누른 건가요?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다니…… 치렛타가 당신이랑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뭐 이제 와선 상관없나.”
일방적인 대화는 그쯤에서 끊겼다. 왜곡된 세상 속에 여러 가지 풍경이 뒤섞이며 극심한 어지럼증을 일으켰다. 이제는 더 이상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지금 느끼는 두통과 멀미는 현실에 가까웠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휩싸인 그때, 갑작스럽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넌 정말 정상이 아니야. 그새를 못 참고 또 도망치다니! 두 분이 너를 애타게 찾고 있어! 어떻게 이런 상태로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무작정 마법을 썼다간 네 몸이…….”
치렛타는 어느 때보다도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분적으로 들렸다 안 들리기를 반복했다. 어떻게든 움직여보려 했으나, 전신이 속박된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무런 조짐 없이 눈앞이 밝아졌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길게 늘어진 코트 자락이었다. 피가로에 버금갈 정도로 키가 큰 남자가 등을 보이고 서있었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목석처럼 우두커니 선 남자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등도, 손에 들린 길쭉한 지팡이 모양의 마도구도 전부 눈에 익었다.
“오즈? 네가 웬일로…….”
눈을 가늘게 뜬 피가로가 생각했다.
‘……오즈는, 아니, 나는 뭘 하고 있었더라? 아, 또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그는 녹은 젤리처럼 흐늘거리는 뇌로 열심히 고민했다. 한껏 찌푸린 미간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러는 사이, 양쪽에서 뻗어온 팔이 어깨를 끌어안았다.
“피가로야,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니?”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하구나.”
얼마나 정신이 없으면 근처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피가로는 불편함에 바르작거렸지만 몸에 감겨든 팔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되려 더욱 묵직하게 체중을 어왔을 뿐이다.
“무거워…….” 작게 중얼거리는 피가로에게 스노우와 화이트가 잔소리를 쏟아냈다.
“그대는 앞으로 더욱 행동을 조심하려무나. 나 원, 불안해서 혼자 둘 수 있어야지!”
“이 불효막심한 것아, 우리보다 먼저 돌이 되지 말란 게야.”
“네, 스노우님, 화이트님…….”
피가로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대답했다. 얼떨결에 분위기에 휩쓸려버렸다. 낯선 장소에 모두가 모여 있는 이유도, 두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하는 까닭도,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워낙 독특한 사람들이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러는 화이트님은 이미 돌이 되셨으면서.’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친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은 겨우 남아 있던 이성 덕분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이유 모를 허탈감이 심신을 지배하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도대체 뭘 하다가 바닥까지 끌어 썼는지, 남은 마력마저 다 소진된 상태였다.
“피가로쨩, 그동안 많이 외로웠지? 당분간은 우리랑 같이 지낼까?”
“마침 적적하던 차에 잘 됐구나. 새 보금자리로 이사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으련?”
피가로가 알기로는 아직 거처를 옮길 시기가 아니었다. 새 거처를 잡은 지 고작 수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이쪽을 의식해서 일부러 일거리를 늘리는 티가 났다. 이 정도로 대놓고 신경 써주면 매정하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보이는 변덕스러운 관심이 조금 불편하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걱정과 달리 기억에 이상은 없는 듯했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이 들었다.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심한 두통을 잠재우고, 잃어버린 마력을 회복해야 했으며, 머릿속에서 빠진 부분이 없는지 점검할 시간이 필요했다.
쌍둥이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킬 즈음이었다.
“피가로.”
얼어붙은 조각상처럼 서있던 오즈가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잃어버린 매개를.”
“오즈.”
행동만큼이나 천천히, 떠듬떠듬 이어가는 말을 스노우가 가로막았다.
“그런 건 이제 와서 중요하지 않겠지.”
“…….”
피가로를 감싸듯 두 손을 맞잡은 쌍둥이가 오즈를 똑바로 바라봤다. 오즈는 두 쌍의 샛노란 눈동자를 마주하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럴 때만 쓸데없이 말을 잘 듣는다. 그들에게서 오가는 묘한 분위기가 영 수상쩍었으나, 지금은 도저히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스승과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는 것을, 모든 말을 흘려들은 오즈가 묵묵히 주문을 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네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도 파우스트는 여전히 새하얀 설원에 남아있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구름 하나 없이 푸른 하늘 밑에 흰 눈밭이 언제까지고 이어져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똑같은 풍경이었다. 파우스트는 머나먼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작게 기침을 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매캐한 탄내는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목이 메어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혀 밑에서 새까맣게 타버린 재의 맛이 났다. 숨이 막힌다는 느낌조차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연달아 기침을 하던 파우스트는 보이지 않는 연기에 질식하기 전에 눈을 떴다.
눈을 떴다, 는 말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눈부신 설원은 어디 가고,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파우스트는 콜록콜록, 힘겨운 숨을 몰아쉬며 미간을 모았다. 직전의 피가로가 그랬듯이, 그는 혼몽한 머리로 생각했다.
‘아니, 이건…….’
단순히 어두운 게 아니라, 화재의 연기였다. 파우스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어두컴컴한 오두막으로 돌아와 있었다. 머리 위에서 우지끈, 듣기만 해도 위험해 보이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화마에 갉아 먹힌 대들보가 내려앉고 있었다.
불이 난 오두막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기 무섭게 정신이 퍼뜩 들었다.
갑작스럽게 피어오른 불길은 주변 기물을 하나둘씩 삼키며 몸집을 부풀렸다.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불길은 확산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눈 깜짝할 새에 집 안 전체가 매캐한 연기로 뒤덮였다.
두툼한 커튼과 나무로 만든 의자를 먹어치운 불이 파우스트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닿는 것을 전부 잿더미로 만든 불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검붉은 불똥이 흙탕물에 떨어지는 빗물처럼 튀었다. 파우스트는 격렬한 기침을 터뜨리곤 서둘러 소매를 당겨 호흡기를 막았다.
잠기운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거대한 추를 덕지덕지 매단 것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탈출구부터 확보했다. 부상과 피로로 인한 노곤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파우스트는 일말의 주저 없이 바로 입구로 뛰어갔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어떠한 운명적 끌림에 매료된 것처럼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피가로와 함께 지낸 오두막은 가장 좋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그것은 아주 오래된 악몽이기도 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나아가던 치기 어린 시절과 잊지 못할 두 번의 배신은 파우스트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이미 죽은 동료들에게 속죄할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한다. 단 한 번의 실수로 파우스트는 죄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기나긴 마법사의 인생에서 그 일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남은 기억은 파우스트의 수백 년을 최악의 형태로 지배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는 고향에도, 오두막에도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었고, 그렇다고 인생의 실패를 무한정 되새기며 영원히 고통받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는 전생처럼 멀게 느껴지는 고향도, 알렉이 세운 중앙의 나라도, 자신을 버리고 간 스승의 오두막도. 하나같이 지긋지긋했다.
그럼에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추억이 깃든 공간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았던 장소가 원인불명의 화재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하필 자신이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큰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마음에 한 점 거짓 없이 살고 싶었다. 마음을 좀먹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넓은 세상을 둘러보고 싶었다. 그걸 위해 후회나 미련 따위는 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파우스트의 목표는 오두막에 번지는 불길을 제압하는 것이 되었다. 결정과 행동이 빠르다는 건 분명한 장점이었다. 파우스트는 미약하게 회복된 마력을 아끼지 않고 마법을 퍼부었다.
그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오두막을 절반쯤 집어삼킨 불길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불이 아니었다. 적어도 파우스트보다 강한 마법사가 일부러 일으킨 화재였다. 인위적인 불을 제압하려면 많은 마력이 필요했지만, 지금의 파우스트에게는 무리였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으나, 무엇 하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두막을 보전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몸에 불이 옮겨붙었다. 너무나 쉽게 옮아 붙은 불은 강한 마력을 쏟아붓지 않으면 꺼지지 않았다.
불에 대한 공포는 이미 오래전에 극복했다. 불에 관련된 마법을 사용할 때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꺼지지 않는 불을 다루고 있으니, 점점 공황이 찾아왔다. 평정을 잃으면서 몸을 둘러싼 결계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투명한 반구 안으로 조금씩 스며드는 연기를 흡입하자,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가빠졌다.
“으……!”
다 지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동요를 감출 길이 없었다. 파우스트는 잠깐 사이에 많은 것을 떠올렸다. 높이 쌓아 올린 장작불 앞에서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리던 순간, 타오르는 모닥불 앞의 조촐한 연회, 불길에 휩싸인 부하들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내지르던 장면. 시뻘건 불길을 두른 그들이 죽음과 저주의 춤을 추는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과 겹쳐졌다.
옷에 붙은 불을 서둘러 꺼뜨리며, 어떻게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국 파우스트는 점점 커지는 불길에 밀려 오두막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하게 뛰었다. 생리적인 눈물이 눈가를 적셨고, 반대로 코안의 점막은 버석하게 말랐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흰 입김과 함께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밖으로 빠져나온 파우스트는 다시 불길에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전보다 거대해진 불길은 바람을 타고 악마처럼 위협적인 형상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두막은 뼈대조차 남기지 않고 허물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두막을 삼킨 불길은 서서히 잦아들더니 곧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무수히 흩뿌려진 잿더미가 바람에 날려갔다.
체감은 길었지만, 실제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추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오로지 파우스트뿐이었다. 이곳에는 까맣게 그을린 자국과 파우스트밖에 남지 않았다.
낙담한 파우스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에 닿는 차가운 눈의 한기가 반갑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 또한 재와 먼지에 뒤덮여 처참한 몰골이었다. 오두막을 빠져나올 때, 제대로 몸가짐을 갖출 새도 없었다. 화상을 입은 손발은 붉게 물집이 생겼으며, 아예 옅은 갈색으로 물든 부분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통증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얼음물을 통째로 들이부은 듯, 몸이 으슬거리며 떨렸다. 부종이 생긴 손이 반쯤 타고 찢겨나간 옷을 파고들었다. 한 겹의 천으로 보호된 팔뚝을 뭉그러진 손톱으로 사정없이 할퀴었다. 거뭇한 피부 위로 신선한 핏물이 더해졌다.
전신을 태운 화상이 뒤늦게 욱신거리는 격통을 전해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밭에 엎드린 파우스트는 입을 크게 벌린 채 피 묻은 손으로 목을 벅벅 긁었다. 그는 미미하게 꿈틀거리며 상처 입은 짐승처럼 신음하다가 눈밭에 구토를 했다. 거의 소화된 음식물을 게워내며 뱃속을 비우고, 그것도 모자라 끈적한 위액까지 흘렸다.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눈의 감촉도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함께 앞을 보고 달리던 친우와 뒤를 받쳐주는 믿음직한 동료들이 있던 시절. 과거에 죽은 망령이 발목을 붙잡고 당기는 것처럼, 파우스트는 그 시절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겨울의 끝자락,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며 차츰 길어지는 해처럼 파우스트는 혁명의 끝을 앞두고 있었다. 끝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고민이 많아지는 시기였다. 파우스트는 누구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줄곧 지금처럼 함께 있고 싶었다. 그래서 욕심을 부렸고, 뜻밖에 모두 기쁘게 받아들여주었다.
철벽의 요새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기적을 목도했다. 스승의 열어준 아름다운 길, 빛나는 수면 위에 길게 늘어진 달의 길은 승리를 향한 이정표였다. 파우스트가 원하는 것은 지위도, 명예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소중한 사람들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었다. 눈부신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믿었기에 더욱 사기가 들끓었다.
그러나 우렁찬 승전고가 울릴 때,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떠났다. 그토록 아꼈으면서, 더없이 사랑스럽고 영민하다 칭찬해 주었으면서, 하나뿐인 제자를 위해 가벼운 전언조차 남기지 않았다. 피가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우스트가 찾는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피가로가 떠난 후, 다음의 전투에서 파우스트는 심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근심으로 가득 찬 우울한 낯은 미처 감추지 못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떠난 일에 대해 끝없이 자책했다. 피가로는 완벽하고 상냥한 스승이었다. 그런 사람이 말없이 떠났다면 당연히 자신의 잘못일 터였다.
‘내가 피가로님을 실망시킨 거야. 단 한 번도 내게 실망한 적 없다고 말해주었던 그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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