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23


갑작스러운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알이 시렸다. 황망하게 주저앉아있던 파우스트는 욱신거리는 눈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피가로와 합류해야 돼. 안되면 미스라나 북쪽의 쌍둥이라도.’

피가로가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렇게나 상태가 나빴는데, 그 거대한 뱀을 상대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을까. 가호가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생존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못내 답답했다.

‘그나저나, 아까 그건 뭐였지?’

정신을 차린 것과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였다. 파우스트는 흐트러진 옷을 단단히 여미면서 생각했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히 상상으로 치부하기엔 모호한 것들이 지나갔다. 모르는 새에 피가로의 사념이 흘러들어온 것 같다. 정확히는, 과거의 기억이.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말을 떠올렸다. 침입자의 과거와 얽힌 기억을 보여준다고 했던가. 무작위로 재생된 기억 중 하필이면 피가로의 것을 엿보게 된 모양이다. 꼭 봐선 안 되는 장면을 본 듯한,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들었다.

‘됐어.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파우스트는 타인의 치부를 엿본 것을 깊이 파고들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자신과 관련된 부분일지라도, 피가로 본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닌 이상 내색할 수는 없었다. 쌍둥이 선생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피가로라니, 무척 낯선 모습이라 흥미가 이는 건 사실이다만.

‘……아차, 안되지.’

이런 식으로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그 일을 떠올리고 만다. 파우스트는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파우스트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은 뱀에게 먹히는 거였다. 결정적인 시기에 커다란 뱀이 드리운 그림자에 짓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쩍 벌어진 아가리에서 지독한 악취를 맡았고, 등 뒤에서 피가로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를 들었다. 높이 떠오른 오브에서 쏟아지는 빛을 느끼면서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것 같다.

‘어리석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감아선 안 됐는데.’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잡아먹힌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후일을 도모할 거라면, 정신을 잃기 전까지 보이는 모든 것을 눈에 담아두었어야 했다. 물론 그때는 후일이고 자시고 이미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곧 다가올 통증에 대비하여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 현재의 막막한 상황을 만든 셈이다.

‘설마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눈을 뜰 줄은 몰랐지.’

비록 이상한 곳에 날려지긴 했지만, 일단 몸은 무사하다. 심각한 동상을 입어 사지가 무감각해진 마당에 과연 무사 여부를 따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긴 하다. 그래도 이쪽은 마법사니까, 의식이 있고 마력이 남아있으며 온전히 마법을 사용할 정신이 있으면 비교적 괜찮은 상황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보다 최악의 상황도 많았잖아.’

위태로운 마력과 얇은 옷은 들이치는 한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꽁꽁 언 발로 바닥을 디딜 대마다 저릿한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파우스트는 격통에 흐려지는 의식을 다잡으며 굳건히 걸음을 옮겼다.

울창한 숲은 어디 가고 이런 장소였다. 온도 차가 극명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낯선 장소였다. 파우스트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가쁜 숨을 내쉬며 힘겹게 언덕을 올랐다. 그러다 몇 번은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미끄러져 언덕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리에 힘이 풀리고, 단단히 얼어붙은 바닥은 미끄러워 자꾸만 발을 헛디디게 되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언덕을 오르던 중, 절벽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자욱한 안개가 걷히며 아까는 보이지 않던 오두막이 나타났다. 푸릇푸릇한 초목에 뒤덮여 있을 때보다 훨씬 눈에 익었다.

그제야 파우스트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처음 보는 낯선 장소라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나 익숙한 정경인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죄스럽고 한이 맺혀 끝내 밟아보지 못한 고향땅과 같았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이곳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파우스트가 이 장소를 어떻게 여기는지 생각하면 오히려 너무 늦게 알아차린 거였다.

수상쩍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한 언덕길,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흐릿하게 보이는 해안선, 그리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자리 잡은 아담한 오두막. 두엇이 살기에 적합한 오두막의 지붕은 빛바랜 회색이었다.

눈앞의 오두막은 짧은 시간 머물렀지만, 정이 많이 든 장소였다. 피가로와 함께 지낸 한 해, 스승에게 지도 편달을 받던 그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곳. 파우스트에게는 또 다른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길을 잃고 헤맸으나, 나중 가선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이렇게 오두막을 앞두고 있으니, 마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파우스트는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홀린 듯이 걸어갔다. 수북하게 쌓인 눈밭에 발이 푹푹 빠졌지만, 멈추지 않고 무모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렵사리 도착한 오두막은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노후된 건물답지 않게 뻑뻑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옛날과 변함없는 내부가 파우스트를 맞이했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보존 마법을 걸어두었다고 했던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실내를 마주하니, 새삼스레 감흥이 밀려왔다.

그러나 감상에 잠길 시간은 없었다. 이미 온몸에 감각이 마비되었다.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이 가장 먼저 벽난로부터 확인했다. 주변에 쌓인 땔감을 대충 던져 넣고, 마법으로 불을 붙였다. 무려 사백 년 만에 찾은 장소였지만, 곳곳에 비치된 기물 하나하나가 낯설지 않았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필요 없이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파우스트는 신발을 벗고 벽난로 앞에 앉아 잠시 불을 쬐었다. 익숙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전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꽁꽁 언 손발이 녹으며 통증이 찾아왔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마법의 도움이 없어도 통증을 견디는 것은 옛날부터 자신이 있었다.

순식간에 몸이 노곤해졌다. 바닥난 마력만큼이나 몸도, 마음도 피로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잠들 수는 없었다. 동상에 걸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응급처치도 없이 잠에 빠져든다니, 그거야말로 신박한 자살행위였다.

파우스트는 온통 트고 짓무른 눈가를 문질렀다. 벌겋게 부은 피부를 벅벅 문댔더니 그제야 졸음기가 가셨다. 그는 적당히 큰 그릇을 챙겨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짐 덩어리처럼 무거운 몸은 매사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바깥은 매섭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는 것이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눈사람이 되어버릴 뻔했다.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산더미같이 쌓인 눈을 그릇에 담아 허겁지겁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혹여 찬바람이 들이칠 새라 문을 단단히 닫고, 벽난로의 열기로 담아온 눈을 녹였다.

아까 확인한 바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 외에 바닥에 쌓인 눈은 마력을 앗아가는 성질이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은 비상시를 대비해 아끼는 것이 좋았다. 지금은 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대다수의 일을 수작업으로 해야 했다.

파우스트는 따뜻한 물로 곱아든 손발을 골고루 녹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긁히고 찢긴 상처의 출혈이 완전히 멎었다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끓인 물로 환부를 깨끗하게 닦은 뒤, 옷자락을 찢어 상처 부위에 감았다.

정신을 차리니 언제나 앉던 자리에 앉아있었다. 피가로가 자주 앉아 쉬던 안락의자, 그 앞에 조금 높이가 낮은 투박한 나무의자가 바로 파우스트의 지정석이었다. 고된 훈련에 녹초가 되어 의자에 축 늘어져있으면, 가까이 다가온 피가로가 머리를 쓰다듬고 별사탕이 녹아든 따뜻한 음료를 건네주었다.

집을 떠나기 전, 파우스트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지만, 동시에 하나뿐인 동생도 돌봐야 했다. 아직 어린 동생은 아직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였다. 파우스트는 몸이 불편한 조부모와 동생을 챙기면서 수발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사소한 부분을 챙기는 건 파우스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가로는 달랐다. 더없이 고귀한 그분은 파우스트만큼이나 남을 돌보는 게 익숙해 보였다.

피가로는 지친 파우스트를 앉혀놓고, 그간의 세월로 축적된 이야기를 들려주며 엉킨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주었다. 따듯한 불 앞에서 굳은살 하나 없이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 있자면 스멀스멀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다 가끔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스승의 과거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피가로님에게도 자신처럼 보살펴야 할 가족이 있었을까? 머리를 다듬어주는 손길이 익숙한 것은 그 때문인지,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당시에 품은 의문은 결국 최후의 최후까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왜 하필 지금 그 생각이 나는 걸까. 푸르뎅뎅하게 질린 발가락을 문지르던 파우스트는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겨울 호수처럼 잔잔하게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울컥 치민 감정을 억눌렀다.

피가로가 엄청나게 걱정되지만, 당장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부끄럽게도 자기 한 몸조차 똑바로 건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기껏 재회해놓고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면, 일단 쉬고 나서 출발하는 게 나았다. 파우스트는 고민 끝에 냉정한 이성을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팔다리가 납처럼 무거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번 결정을 내리자, 누적된 피로가 눈꺼풀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시야가 일그러지며 눈앞이 가물거렸다. 거의 기절하듯 잠이 밀려오면서, 모르는 사이에 눈이 감겼다. 파우스트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먹구름처럼 몰려드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2.

잠들어 있는 동안 꿈을 꾸었다. 엄밀히 꿈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아마도 맞을 거라 생각한다. 그립고 아픈 추억이 깃든 오두막에서 잠들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즈의 성에서 칩거하던 피가로는 이제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부 다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예전처럼.’

그 말이 단지 쌍둥이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피가로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이 부분에선 피가로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짐 하나 없는 가벼운 몸으로 오즈의 성에서 나온 그는 가장 먼저 여러 나라를 둘러보며 세계의 정세를 살폈다.

놓친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가로가 끝까지 피하는 것이 있었다. 중앙의 나라와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 보다 상세히 말하자면, 피가로는 파우스트와 관련된 소식을 노골적으로 피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듣고 싶지 않아서, 혹은 그것을 듣고 나면 견딜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또다시 실의와 후회의 늪에 빠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지내다가, 수십 년간 방구석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처럼 지냈다. 그렇게 기나긴 세월을 고립 속에서 보낸 끝에 간신히 바깥세상을 돌아다닐 기운이 났다.

멀리서부터 찾아온 쌍둥이 스승의 존재와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등을 떠밀어주었다. 억지로라도 원래의 삶을 되찾아야 했다. 피가로는 지금까지의 부진을 잊기 위해 더욱 활발하게 움직였다.

잃어버린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다시금 궁핍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자연스럽게 무리에 섞여 그들과 어울리고, 일방적으로 도우며 자기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했다. 때로는 겁도 없이 덤벼드는 고향의 마법사와 생사를 건 결투를 벌이며 살아있음을 실감하기도 했다.

주인장이 특히 마음에 들었던 서쪽 국가의 단골 가게에도 갔다. 실컷 마시고 기분 좋을 정도로 취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활보했다. 가벼운 충동으로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다. 결국 금세 질려 헤어지고 말았지만, 한 번 생긴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마법사가 으레 그러듯이, 우연한 만남은 아주 먼 훗날의 재미로 남겨두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깃털같이 가벼운 인생이었다. 그야말로 머리가 텅 빈 사람처럼 살았다. 무엇에도 깊은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그때그때 끌리는 일만을 찾아다녔다.

그래, 그 말이 맞았다. 파우스트에 대해서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관련된 소식도 전부 원천 차단했다. 아무리 가벼운 소식이라도 일단 듣고 나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너무 막 살았는지 뒤에서 구설수가 돌기도 했지만, 대다수 ‘타고난 기질이 북쪽의 마법사니까 어쩔 수 없다’라는 식으로 간단히 정리되었다. 게다가 피가로는 ‘변덕스러운 북쪽 쌍둥이의 제멋대로 제자’라는 별호까지 있었다. 피가로가 과거 마왕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전혀 관련 없는 타인에게 기분을 납득시키고, 감정의 기복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꽤나 편리한 일이다. 누구와도 긴밀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던 피가로는 별종 취급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필이면 광대와 다를 바 없는 서쪽의 마법사까지 자신을 괴짜 취급하는 건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말이다.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루하고 식상한 나날들. 조금의 특별함도, 목적도 없는 그런 정처 없는 시간 말이다. 머리 아픈 문제는 내려놓은 채 슬슬 인생의 방황을 즐기고 있을 무렵, 피가로는 과거의 인연을 만났다.

학습된 버릇처럼 베넷 바에 찾아간 피가로는 마감 시간까지 가게 사장과 어울렸다. 장미의 가시처럼 까다롭고 아름다운 샤일록은 세계정복 시절부터 이어진 묘한 인연이었다. 샤일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는 과거의 행적 탓에 피가로의 발문을 껄끄러워했지만 이제는 그저 흥미롭게 여기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을 접대해온 샤일록은 분명 피가로의 마음에 뻥 뚫린 구멍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쪽의 상심을 읽어냈음에도 흥미 본위로 파고들지 않는 것은 샤일록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하기야, 괴짜가 득시글거리는 서쪽 국가에서 이름 석 자를 걸고 장사를 하며 살아온 그는 눈치가 여간 빠른 것이 아닐 것이다.

하늘 높이 떠 있는 재액이 어두운 밤거리를 비추는 야심한 시각, 베넷 바를 나와 거리를 걷던 피가로의 뒤를 누군가가 조용히 밟았다.

서쪽 국가는 최근 경기가 좋지 않았다. 원래부터 빈부격차가 심각한 지역이었지만, 부와 향락의 도시로 유명한 서쪽 국가의 이면에는 술과 약에 취해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좋은 옷을 입고 여유롭게 거리를 거닌다면 누구든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피가로는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시비에 휘말려봤다. 기분이 좋을 때는 눈이 먼 가엾을 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었고, 기분이 나쁠 때는 그들이 더 이상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에 시달리지 않도록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심정으로 마음껏 허점을 드러냈다.

그렇게 유유히 거리를 걸어갈 때였다. 길게 늘어진 피가로의 그림자를 뒤따르던 사람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람은 빠르게 달음박질쳐 피가로의 앞을 가로막았다.

“피가로 가르시아, 이곳에서 당신을 만날 줄은 몰랐군.”

사내는 피가로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유감스럽게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피가로는 취기가 도는 머리로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결과는 같았다. 풍기는 기운을 봐선 마법사임이 분명하지만, 이런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사람 따위 기억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우연히 마주쳤다고 하기에 피가로는 며칠 동안 자신을 뒤쫓는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줄곧 소란스러운 삶을 살아온 탓에 사람들의 시선은 익숙했다. 언제 어디서든 이목을 끌어모으기 마련이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

사내는 오래전부터 피가로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사내는 이곳 사람이 아니었다. 은근하게 풍기는 기질도, 독특한 억양과 익숙하면서도 낯선 복식 모두 서쪽 국가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긴 시간 동안 주위에 물어가며 피가로를 찾은 모양이었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방방곡곡을 돌아다닐 정도의 집요함이라니, 아주 조금이지만 흥미가 생겼다. 과연 어느 쪽일까. 올바른 답을 내려주는 신을 원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소문을 접하고 흥미를 느껴 접근하는 사람일까.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건대, 배배 꼬인 원한 관계일 수도 있겠다. 원한을 살만한 짓은 수도 없이 하고 다녔으니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피가로는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역할이 주어지든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발생한 이벤트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피가로는 이 상황을 즐길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로 흘러갔다.

“나를 기억하나? 나는 과거, 알렉 그랑벨을 필두로 한 혁명군에 속해있던 마법사다. 일개 병사에 불과하지만, 파우스트님의 밑에서 그분을 보좌했지.”

사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위축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계속, 계속 당신을 만나고 싶었다. 그날 당신이 파우스트님을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불쾌함이었다. 마법사는 쓸데없이 오래 사니까 이런 귀찮은 일이 생긴다. 중앙 국가와 혁명군, 파우스트에 관한 소식을 지금까지 어떻게 피해 다녔는데. 결국 이렇게 운명적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혁명이 성공으로 끝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처음부터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을 이념으로 내세운 주제에, 중앙 국가가 이상하리만치 마법사들에게 박한 대우를 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거기까지는 아무리 모른 척해도 사람과 섞여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듣게 되는 부분이었다.

그 이상의 이야기는 궁금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더는 그쪽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 편이 서로에게 좋을 거라 확신한다.

“이유가 궁금했구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내가 네게 일일이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나?”

피가로는 턱을 비스듬히 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로 불편한 기분을 담아 마력을 쏟아내자, 한순간에 압도당한 사내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도 결코 등을 보이지는 않았다.

자기보다 강한 마법사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고도 도망치지 않는다니, 용기가 가상한 녀석이다. 아니면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거나.

“……그래, 넌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런 쇠약한 몸으로 잘도 나를 찾아 여기까지 왔군. 먼 길을 돌아왔는데 이대로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채 죽는 것도 안타까우니 알려주도록 할까.”

당연하게도 좋은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려고 한 건 아니었다. 이유를 알려주기로 한 것은 심술이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하루를 망친 것에 대한 일방적인 벌이다.

“혁명군에 합류한 것도, 그곳을 떠난 것도 단순한 변덕이었어. 나는 처음부터 손님에 불과했으니 운신이 자유로웠거든. 이거면 충분한 답이 됐을까?”

충동적으로 못된 말을 내뱉어 상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유구하게 이어져온 나쁜 버릇이었다. 모진 말을 들은 사내는 눈물을 흘렸다.

“고작 그런 이유였나? 고작 그런 이유로 파우스트님을 버린 건가?”

상처 주고 싶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막상 원하는 반응이 돌아오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사내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얼굴이 초췌한 외관과 어우러져 무척 불쌍해 보였다.

피가로는 작게 혀를 찼다. 이래서야 영락없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꼴이다. 스스로 악당을 자처하다니, 풍요의 거리에서 공연하는 싸구려 연극보다 몇 배는 질 나쁜 구도였다.

“너야말로 번지수가 잘못됐어.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너는 당사자가 아니잖아. 파우스트가 직접 찾아오면 모를까, 내가 너 같은 것에게 미안해할 이유는 없을 텐데?”

“당신은 어떻게 파우스트님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있는 거지? 당신이 떠난 뒤로 파우스트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녕 모르는 건가?”

이 즈음에서 피가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세한 말이 나오기 전에, 보다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다. 평범한 마법사가 자신이 믿고 따르던 상관을 두고 떠난 사실 하나만으로 이토록 증오심에 가득 차서 자신을 찾아다닐 리 없는데.

파우스트에 관한 일은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일단 이야기를 듣고 나면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할 걸 알았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그 아이를 보고 싶을 터였다. 그래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가며 모든 소식을 멀리했다.

파우스트가 어떻게 되었는데?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본능인지, 기이한 자존심인지 모를 것이 필사적으로 욕구를 억눌렀다. 피가로가 묻지 않아도 사내는 말을 이어갔다.

“옛 왕도를 점령한 혁명군은 해체되었다.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을 내세우던 알렉 그랑벨은 마법사를 배신하고, 오로지 인간을 위한 나라를 세웠다.”

“……알렉이 배신을 했다고?”

“정말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군. 그 긴 세월 동안 당신은 관심이 없었던 거야. 짓궂은 농담 따위가 아니라, 진실로 파우스트님을 헌신짝처럼 버린 거였어.”

일순 말문이 막혔다. 되묻기 위해 달싹인 입술에서 한탄을 닮은 묵직한 숨이 새어 나왔다. 불현듯 뻥 뚫린 가슴이 답답해졌다. 재액이 바짝 다가온 날, 알렉이 약속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전부 잊고 싶어 헛된 시간을 보냈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파우스트를 지키고 곁에 두고 싶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반드시.’

하늘에 뜬 달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카락도, 시린 바다처럼 푸른 눈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알렉 그랑벨의 존재 자체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알렉이 피가로와 마찬가지로 파우스트의 행복을 바라고 있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아이를 행복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특별했던 것이다.

약속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을 부러워했다. 쉽게 약속을 입에 담는 인간을 질투하고, 배신을 일삼는 그들에게 실망하며 돌아섰다. 알렉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짧은 생애를 살아가는 인간일 텐데.

영원한 것도, 당연한 것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피가로는 자신이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당신의 그 변덕 때문에 파우스트님은 목숨을 잃었어! 당신이 있었다면, 파우스트님은 그런 치욕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분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저주하며 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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