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까지 조용할 줄이야. 역시 아직 초입부인 건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상할 건 없지.”
이 상황과 전혀 관련 없는 쌍둥이의 시시콜콜한 잡담 사이로 피가로와 파우스트가 듣기만 해도 도움이 되는 정보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내부가 더 넓은 모양이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라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겠는걸.”
“그래, 우선은 흩어지지 말고 천천히 살피다 보면…….”
파우스트가 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불어온 약한 바람에 싱그러운 풀 내음과 소박한 꽃향기가 더해졌다. 집중하지 않으면 맡지 못할 정도로 은은한 향이었다. 이런 풀숲에 파묻혀 있는데 풀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그 편이 더 이상하다. 대다수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피가로와 미스라는 고개를 들어 바람이 불어온 쪽을 쳐다봤다.
슬슬 숲의 어둠에 눈이 적응하고 있었다. 얼기설기 얽힌 나무줄기 틈으로 빛나는 하얀 솜털이 별똥별처럼 날렸다. 자세히 보면 어떤 꽃의 홀씨였다. 홀씨가 일제히 떠오르는 곳에서 희미하게 물 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우와, 예쁘다…….”
현자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미스라가 입을 열었다.
“봐요, 치렛타의 기색이에요.”
미스라는 정말 그 말만 남기고 움직였다.
“현자님, 가요.”
“……네, 네? 미스라?”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미스라는 다짜고짜 현자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손을 잡고 달린다고 해야 할까. 현자가 당황한 틈을 타 멋대로 끌고 가는 모양새였다.
“잠깐 기다리거라! 얘, 미스라!”
“정말~ 말 안 듣는 아이라니까.”
놀란 쌍둥이가 불렀지만 미스라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또한 장소의 특수성인지, 미스라와 현자는 눈 깜짝할 새에 자취를 감추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길이 바뀌어 더 이상 따라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현자를 데려간 이상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치렛타의 기운 같은 게 느껴질 리가 없잖아. 오자마자 홀려버린 건가.”
쌍둥이는 거울을 맞댄 것처럼 똑같은 자세로 한숨을 쉬었다. 미스라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던 파우스트가 다급하게 물었다.
“미스라가 현자를 데려갔는데, 당장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괜찮을 거야.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미스라는 현자랑 잘 지내고 싶어 하니까.”
피가로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진정하라는 듯 파우스트의 어깨를 두드리기도 했다. 피가로는 미스라를 쫓아가는 대신 스노우와 화이트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그보다 아까 의미심장한 말을 하지 않았어요? 이 안에서 무엇을 보여준다고요.”
두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피가로가 채근했다.
“두 분은 짚이는 게 있는 거죠? 이제 그만 알려주시죠.”
“뜨끔.”
쌍둥이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피가로의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단지 뒷짐을 진 채 신발 밑창을 풀밭에 문지르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잘못을 들킨 아이 같았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는 시늉을 할 때처럼 꽥 소리 지른 쌍둥이가 번개처럼 앞으로 튀어나갔기 때문이다.
“기어이 미스라가 현자를 납치해버렸구나. 얼른 뒤따르자!”
“어서 가서 현자쨩을 구해야 해!”
서로의 손을 잡은 쌍둥이는 미스라가 간 방향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피가로는 스노우와 화이트를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잘 됐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아, 도망쳐버렸네. 이럴 거면 대체 뭐 하러 따라온 거람?”
“알고 있으면서 붙잡지 않았잖아.”
파우스트는 조용히 책망했다. 가능한 많은 사람과 동행하고 싶은 파우스트와 달리 피가로는 처음부터 그와 단둘이 조사하고 싶어 했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더니, 쌍둥이가 미스라를 따라가면서 마침내 피가로의 바람대로 둘만 남게 되었다. 정확히는, 피가로가 의도적으로 쌍둥이를 내쫓은 거였다.
“아무렴, 우리로서는 좋지. 조용하게 둘러볼 수 있고. 그렇지?”
“난 아직도 흩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봐, 늦었잖아. 자기들끼리 먼저 가버렸지. 저 사람들과 함께라면 현자님은 안전할 거야.”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파우스트는 눈을 뾰족하게 떴다. 그는 미스라를 찾으러 갈 거면 다 함께 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피가로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렸다. 무엇보다 방금 의도적으로 눈을 피했다. 이런 부분에서는 알기 쉬운 남자였다.
파우스트는 계속 피가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피가로는 방향을 비스듬히 틀면서까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집요한 시선에 식은땀이 났다.
얼마 전부터 파우스트는 이런 식으로 피가로를 캐내기 시작했다. 스스로 인정하긴 싫지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저주상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살아가고 있어도 파우스트는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하던 눈빛이었다. 저 눈을 마주하고서는 좀처럼 거짓을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먼저 항복한 것은 피가로였다. 피가로는 다시 파우스트 쪽으로 몸을 홱 돌려 눈을 흘겼다.
“……너 나쁜 버릇이 들었어.”
“그러는 당신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나? 옛날부터 나쁜 버릇이 몸에 배어있었군.”
“…….”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제자에게 혼이 나다니, 말년에 체면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피가로는 몸에 밴 나쁜 버릇대로 고개를 돌려 거듭 회피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래도 정보는 얻었어. 여기는 침입자의 과거와 얽힌 기억을 보여주는 모양이야. 환영 계통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질 나쁜 장난이다.”
미로처럼 생긴 숲에서 동행인의 과거를 강제로 엿보게 된다니, 벌써부터 불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피가로의 판단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적은 인원으로 오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둘만 떨어지게 되어서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오랫동안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적어도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과거에 대해서 대다수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반드시 과거를 보여줘야 한다면 피가로가 나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것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한시라도 빨리 이상 현상이 생긴 원인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
“어째서 이곳에 재액의 영향이 미친 걸까.”
“우연이라는 게 무섭지. 가끔 이렇게 놀랍도록 적중한다니까.”
“당신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우연이 아니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지 않을까.”
파우스트는 눈을 감고 마력을 널리 퍼뜨렸다. 혹시라도 주위에 다른 사람이나 동물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생물 반응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식물조차도.
적막한 숲속에서는 자신과 피가로의 말소리 빼고는 어느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나마 아까는 바람이라도 불었지만, 지금은 이곳의 어느 것도 도저히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때도 그렇다. 바람은 옅은 향기를 실어 날랐을 뿐, 작은 잎사귀나 수풀조차 흔들어 놓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오싹한 감각이 등골을 스쳤다.
“뭐가 됐든 불쾌한 장소야.”
“저기, 우리 여기서 같이 수행했던 일 잊은 건 아니지?”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고 나무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것이 파우스트가 스승에게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어디 보자. 그럼 우리도 빠르게 문제를 찾아볼까?”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알아서 따라붙었다.
“파우스트, 할 말이 있는 거지? 편하게 해도 돼.”
“……역시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빨라.”
한때는 피가로가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고 진심으로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오해를 할 정도로 피가로는 눈치가 빨랐다. 세상에는 어느 한 가지 뛰어난 능력을 가졌을 때 얻는 이득과 손해가 공존한다. 이 사람이 조금만 둔했으면 인생을 조금 더 편안하게 살지 않았을까, 지금에 와서야 이따금 생각한다.
“피가로, 솔직하게 말해줘. 마지막으로 여기에 찾아온 게 언제지?”
“음, 잘 기억 안 나네. 너를 따라 중앙으로 간 뒤로 한 번도 돌아오지 않은 것 같은데.”
파우스트는 일부러 고집스럽게 정면만 노려보았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있구나.”
“나도 사람이니까. 망각은 신이 준 가장 큰 축복이지.”
그 한 마디로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피가로에게 그런 의도는 없었겠으나, 꼭 아직까지 과거의 잔재에 사로잡혀있는 자신을 꼬집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말을 끝으로 간신히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겼다. 어렵사리 사제관계를 회복했지만, 앞으로 갈 길은 여전히 멀고 험했다. 과거에 정을 나눈 시간보다 오해와 원망으로 얼룩진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지난 시간들을 덮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앞으로 남은 시간을 떠올리면 초조한 마음이 앞섰다.
“원래라면 여기 어딘가에 오두막이 있어야 할 텐데.”
“위치를 아는 거야?”
“아니, 감이야. 그 오두막에는 내가 마법을 걸어뒀거든. 언제 다시 찾아갈지 모르고, 일단은 추억이 담긴 곳이니까 보존해두려고 했지.”
파우스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지나간 일은 덮어두자고 결심했지만, 당시의 일을 떠올리고 좋은 점만 되살려 추억으로 삼는 것은 아직 자신에게는 무리였다. 하필 간밤에 꾼 꿈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파우스트는 결코 피가로처럼 될 수 없었다. 피가로처럼 자신의 사감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다. 이런 기분으로 피가로와 온화하게 대화를 나눌 자신이 없었다.
“이곳에서 당신의 마력이 느껴지던 건 그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지. 그것과는 별개의 이야기 같지만.”
“무슨 뜻이야?”
피가로는 아주 조금 난처하게 파우스트를 쳐다봤다.
“그게…… 원래는 오두막에 덧씌워진 마력을 따라갈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결계가 무언가에 의해 깨진 것처럼.”
“당신의 결계를 깨뜨리는 건 어지간한 마법사한테는 버거울 텐데.”
“옛날이라면 그랬겠지만, 나는 약해지고 있으니까.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데, 찾아오지 않은지도 오래되었고…….”
일일이 반응하고 싶지는 않지만, 피가로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참을 수 없이 어색해졌다. 피가로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든 주제였다. 지금도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구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인간이든 마법사든 정해진 수명에서 도망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 이후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웠으나, 숲에서 피가로의 마력이 느껴지는 이유는 아직도 알 길이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곳에 살았던 흔적이나 결계의 잔재가 남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꽤 먼 길을 왔지만 중간에 헤어진 네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각자의 고민을 안고 나아가던 중, 깎아지른 절벽에 도달했다. 유일하게 원래의 모습이 남아있는 장소였다. 물론 나무와 풀 따위에 둘러싸여 있는 만큼 완벽하게 같지는 않았다.
얼추 비슷하게 보이는 장소만 돌고 돌다가 나온 새로운 풍경에 그제야 속이 좀 트이는 듯했다. 유일한 문제는 절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는 거였다.
“밑으로 내려가 볼까?”
그러나 그것은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마법사에게는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원래라면 있어야 할 오두막이 없는 것을 확인한 피가로가 제안했다.
“일단 위에서는 눈에 띄는 게 없네. 여기서 내려다봐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여.”
“안개를 걷어낼 방법은?”
“해볼까나.”
명쾌하게 답한 피가로가 마도구를 꺼냈을 때였다.
“아니, 됐어. 내가 할게. 《사틸크나트·무르크리드》.”
그보다 빠르게 자신의 마도구를 꺼낸 파우스트가 마법을 사용했다. 매끄러운 거울 표면이 빛을 발하며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비추었다. 시야를 가린 안개가 순간적으로 걷히긴 했다. 안개 너머 한몸처럼 뒤엉킨 나무줄기가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금 겹겹이 낀 희뿌연 안개로 뒤덮였다.
그뿐 아니라, 사방으로 흩어진 안개는 곧 하나로 합쳐지며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부쩍 면적을 넓힌 안개가 절벽 위로 올라와 지상을 덮기까지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잠깐, 이 안개 더 짙어졌는데…….”
제대로 형체를 가지지 않은 탓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사방이 안개로 가로막혀 왔던 길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피가로는 소매로 호흡기를 막으면서 태평한 소리를 지껄였다.
“살짝 숨쉬기 불편하네. 그밖에 문제가 될만한 성분은 없는 것 같아.”
“피가로,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그건 내가 할 말이겠지? 이래 봐도 내가 네 스승…….”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이리 와.”
그는 대뜸 옆에 있는 피가로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피가로는 한숨을 쉬며 질질 끌려왔다.
“이미 가까워…….”
어째선지 미스라에게 끌려가던 현자가 떠올랐다. 현자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그래, 미스라에 비하면 파우스트는 선녀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파우스트는 몇 차례 마법을 사용했다. 마법은 똑바로 발동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의 방법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매번 같았다.
“파우스트, 당황한 건 알겠지만 일단은 그만두는 게 낫겠어. 파헤칠수록 더 짙어지기만 하잖아.”
“……알겠습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니 답답해서.”
방금 당황하지 않았다고 말하려 했다. 두 사람 다 그 사실을 알았다. 파우스트는 반사적으로 나가려는 변명을 혀를 깨물어서 참았다. 피가로는 오히려 웃으며 파우스트의 등을 살살 문질렀다.
“지난번 마법관이 습격당했을 때에도 다짜고짜 샤일록의 방 벽을 날려버렸다면서? 넌 여전히 성격이 급하구나.”
“죄송합니다. 고치려고 노력하긴 했습니다만…….”
“이거 봐, 당황하면 바로 옛날 말투로 돌아가 버리네.”
이런 상황에서도 피가로는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반면, 파우스트는 약간 억울했다. 확실히 한 번 틀어진 관계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나 보다. 오래전 그 시절이었다면 스승이 아무리 짓궂은 장난을 쳐도 그저 얼떨떨하게 넘겼을 텐데, 지금은 무려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까지 했다.
파우스트는 아주 잠깐, 피가로의 살집 없는 팔뚝을 꼬집는 상상을 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수풀을 부드럽게 끄시는, 시끄러우면서도 잔잔한 소리였다.
“물러나, 무언가 다가온다.”
“그래, 나도 귀가 있어.”
그리고 마력도 있지. 덧붙인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옆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어서는 파우스트도 피가로를 후열로 보내는 것을 거의 포기했다. 주위를 둘러싼 안개가 어떠한 거대한 압력에 조금씩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안개를 밀어내며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무심코 압도될 정도로 커다란 괴물이었다.
“……저건 뱀, 인가?”
“아마도.”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괴물은 흔히 아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크기는 무식하게 크지만, 날개가 달리지 않은 것을 보면 용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안개를 휘감아 머리와 몸통 일부만 보였다. 그마저도 한계까지 고개를 젖혀야 간신히 머리가 보였다.
기본적인 형태는 뱀이지만, 뾰족하고 단단한 비늘은 마치 갑각류처럼 보였다. 뱀은 특이하게도 머리를 꼿꼿이 들고 있었다. 넓적하게 벌어진 입에서 얇고 기다란 혀가 튀어나왔다. 크기가 워낙 크니 적은 움직임으로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아마도 재액의 영향을 받아 형편없이 뒤틀린 마수일 것이다. 재액의 원인을 밝힐 때까지는 되도록 상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물며 이렇게 시야가 극도로 제한된 곳에서는 승산이 바닥까지 떨어진다. 기척을 죽이고 냄새를 지우는 마법을 사용하려는 찰나였다.
“이미 늦었어.”
피가로의 말과 함께 갈라진 혀를 날름거린 뱀이 그들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뱀은 두껍고 기다란 몸통을 구불구불하게 말았다. 똬리를 트는 모습을 본 피가로가 외쳤다.
“파우스트, 온다!”
피가로는 마도구를 소환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외침에 비해 실속이 없었다.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마법은 나가지 않았다. 파우스트 또한 재빨리 마법으로 불길을 일으켰으나, 뱀은 딱딱한 외피로 튕겨냈다.
“……피가로님!”
통하지 않는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길게 자란 풀이 체중에 짓눌려 죄다 바닥에 드러누웠다. 두 사람은 흙바닥에 뛰어들다시피 쓰러졌다. 본의 아니게 피가로를 깔아뭉갠 파우스트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얼굴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당신, 왜 넋 놓고 있었어!”
“아, 그게.”
피가로는 답지 않게 당황한 듯했다. 이제 저 얼굴은 지긋지긋하다. 또 다시 변명거리를 찾는 표정이었다. 그는 넘어지면서 바닥을 짚은 자신의 손을 확인하고는 이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굼뜬 동작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뱀은 방해되는 나무와 수풀을 커다란 몸으로 때려 부수며 달려들었다. 몸집이 하도 크니 천지가 뒤흔들렸다. 파우스트는 다시 한번 마법을 발동했으나, 이번에도 기이한 움직임으로 몸을 휘며 등의 비늘로 튕겨냈다.
파우스트가 당연하다는 듯이 온몸으로 피가로를 감싸려고 할 때였다. 그는 강한 발길질에 옆으로 나뒹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겠다. 망할 체격 차. 느닷없이 걷어차인 파우스트는 버릇처럼 입술을 씹어 비명을 삼켰다. 두어 바퀴 데굴데굴 구르다가 불현듯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가로는 눈앞에서 집채만 한 커다란 뱀에 붙잡혔다. 튕기듯이 몸을 일으킨 파우스트가 다급하게 마법을 발동시켰다.
“《사틸크나트·무르크리드》!”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먹이를 삼키려던 뱀은 파우스트의 마법을 정통적으로 맞고, 날카로운 이빨로 피가로의 옆구리를 짓이겨놓았다. 커다란 아가리 사이에 몸의 절반이 끼었을 때,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피가로의 비명이라는 것은 반 박자 늦게 인지했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으니 당연했다.
척추를 꼿꼿하게 세운 뱀은 소리 없이 괴기하게 몸을 비틀었고, 내동댕이쳐진 피가로는 엉망으로 풀밭을 굴렀다. 수북하게 자란 풀이 완충제 역할을 한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그를 향해 뜀박질을 하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젠장, 피가로! 마법을 써!”
피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찢긴 걸레조각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져선 풀밭을 자신의 피로 새빨갛게 적시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호흡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의식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도구를 회수하기는커녕 상처를 봉합하기 위한 최소한의 마법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어째서 마법을 쓰지 않는 거지? 여러 가지 생각이 빠르게 교차하면서 초조해진 파우스트는 주저하지 않고 피가로의 앞을 막아섰다.
조급하게 펼친 방어막은 뱀의 돌진 한 번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깨졌다. 한곳에 응집한 마력이 사방에 파편을 튀기며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나갔다. 일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을 낮춘 뱀은 무언가를 확인하듯, 아주 가까운 곳에서 파우스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파우스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은 이끼 낀 숲처럼 따뜻한 녹빛이었다. 파우스트는 뱀의 눈을 마주하고 간밤의 꿈을 떠올렸다. 애틋하고 처량한 눈빛이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당혹감에 텅 빈 머릿속으로 어떠한 환영이 파고들었다. 어째서 내 꿈속의 당신은 나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건지.
그 잠깐의 방심이 크나큰 실책을 불렀다. 뱀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등 뒤에서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을 짚은 피가로가 질퍽하게 고인 핏물에서 몸을 일으켰다. 반쯤 찢긴 몸으로 상반신만 간신히 들어 올린 피가로가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한 마디 내뱉었다.
“……《폿시데오》.”
들뜬 흙먼지와 부서진 잔해 위로 떠오른 오브에서 눈부신 빛이 터졌다. 환한 빛무리가 한순간 숲을 뒤덮은 어둠과 안개를 전부 몰아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볼 시간 같은 건 없었다.
파우스트는 거대한 그림자에 짓눌려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척까지 다가온 뱀의 아가리였다. 커다랗게 벌어진 입은 마치 어두컴컴한 뱀굴 같았다. 그리고 통째로 삼켜지면서 맡은 지독한 악취와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익숙한 마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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