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20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스노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현자여, 언제부터 우리 세계의 언어를 읽을 수 있게 된 게야?”

“스노우님이 읽어 달라고 부탁하셨잖아요. 그럼 그 말은 대체 왜 하신 거예요?”

“본인은 현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을 뿐이네만.”

모두가 잊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제야 눈치챈 몇 명은 놀란 눈으로 현자를 바라보았다. 관심을 한몸에 받은 현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사실은요……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서 미리 콕 로빈 씨한테 이야기를 들어뒀어요.”

“음, 요컨대 읽는 시늉만 했다는 거로군.”

“그래도 기특해. 칭찬해 주마.”

“쓰다듬어주마.”

식탁을 가로질러 날아온 쌍둥이가 양옆에서 현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떨결에 칭찬을 받은 현자는 싫지 않은 얼굴이었고, 반대로 네로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신성한 식탁에서 장난치지 말라 하고 싶은데 상대가 상대라 참는 느낌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야.”

피가로는 네로를 보며 덧붙였다. 파우스트의 시선이 다시 피가로에게 고정되었다. 네로가 최선을 다해 피가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네로는 피가로가 거북한 것 같았다. 이해는 한다. 가깝게 지내기는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면 네로는 자기보다 연상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부분도 남 일 같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피가로와 네로를 주시하는 사이, 쌍둥이는 현자를 계속 칭찬하고 쓰다듬으며 어깨를 적어도 5cm는 더 띄워주었다. 어깨가 거의 귀에 붙은 현자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스노우는 이번에는 파우스트와 피가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는 분위기가 좋아 말을 꺼내지 못했다만, 너희 둘만 갈 필요는 없단다.”

“이번 일은 우리 북쪽 마법사가 힘을 빌려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마침 북쪽에서 나타난 재액이기도 하고 말이지.”

마침 피가로와 단둘이 가기에는 불안했던 참이다.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언제 어느 때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쌍둥이처럼 피가로가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조건이 좋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파우스트는 쌍둥이의 제안을 고맙게 받으려고 했으나, 피가로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건 싫은데요.”

화이트가 말을 보태기 무섭게 피가로가 딱 잘라 거절했다. 늘 에둘러 말하는 피가로치고는 제법 단호한 의사 표현이었다.

“이번 임무는 번잡하게 몰려다니고 싶지 않아요. 파우스트와 저, 두 사람이면 충분하겠죠. 둘이서 빠르게 해결하고 돌아오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피가로야, 우리말을 들으렴. 달이 차오르며 재액의 규모도 점점 커지고 있단다. 둘이서만 움직이는 건 위험해.”

맞는 말이다. 파우스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동의를 모른 체하고 반박했다.

“그만큼 마법사의 마력도 커지고 있죠.”

“고집이 세구나. 그대보다 오래 산 우리가 감이 안 좋다고 말하고 있는데.”

“예언은 아닌 거죠? 그럼 듣지 않을래요. 저도 감이 안 좋아서 둘만 가겠다고 하는 거라서.”

“한결같이 제멋대로인 아이로구나.”

“싫다고 했는데 계속 곤란하게 하잖아요. 제멋대로인 쪽은 과연 누구일까요?”

피가로는 한 마디도 그냥 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스노우와 화이트도 날선 태도로 피가로를 대했다. 그야말로 되바라진 제자와 고지식한 스승의 환장의 콜라보였다.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또다, 또 싸운다. 그나마 장난에 가까웠던 직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어느 쪽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팽팽하게 맞서는 그들을 본 현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들었다.

“저, 그러지 말고 혹시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설산에 생긴 녹지라니, 잘 상상이 안 가기도 하고 궁금해서…….”

현자는 안쓰러울 정도로 쩔쩔맸다. 마법사끼리 다투는 것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여전히 다정하고 성실했다. 이렇게 되면 답은 정해진 거였다. 현자에게 유독 약한 피가로는 결국 앓는 소리를 내며 항복했다.

“……현자님이 원한다면 나는 상관없어.”

스노우와 화이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자를 보호해 줄 마법사가 필요하겠구나. 이변은 빨리 해결할수록 좋으니 오즈를 부를까.”

그들은 피가로가 결정을 번복할 수 없도록 재빨리 쇄기를 박아버렸다. 연륜으로 다져진 노련함이었다. 피가로는 가시 돋친 말투로 반박했다.

“오즈는 싫어요. 하고많은 사람이 있는데 왜 하필 오즈예요? 좀 봐주시죠.”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바라는 것도 참 많구나.”

“제가 한 번 물러났으면 두 분도 똑같이 한 번 물러나야죠. 그게 당연한 거예요.”

“오즈가 있으면 그대가 원하는 대로 빠르게 일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자기 고향을 버리고도 그놈의 자존심은 여전히 북쪽의 마법사처럼 빳빳하게 세우고 있구나.”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이름이 세 번 나오기 무섭게 내내 식탁에 엎드려있던 미스라가 고개를 들었다.

“뭐 하러 오즈를 불러요? 어차피 그 사람 밤에는 마법도 못 쓰는데.”

“미스라,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니?”

“방금 일어났어요. 당신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호호호, 그것참 미안하게 되었구나.”

“지금 출발하면 되는 거죠? 《아르시무》.”

미스라가 공간을 가르고 문을 만들었다. 다짜고짜 식당에 문을 만든 미스라는 방금 막 일어난 사람답게 늘어지게 하품했다. 쌍둥이는 미스라가 만든 문을 보며 반색했다.

“빗자루를 타고 가지 않아도 된다니 좋구먼. 아이고, 허리야.”

“정말, 화이트쨩! 우리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니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스노우는 곧장 화이트를 끌어안았다. 화이트가 설정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유령이 노화된 육체로 인한 허리 통증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선 파우스트도 다소 부정적이었다.

대차게 콧방귀를 뀐 피가로는 눈을 반밖에 뜨지 않은 미스라에게 다 식은 음식을 밀어주었다. 마침 배가 고팠던 건지, 아니면 늘 배고픈 상태인 건지 미스라는 군말 없이 제 몫의 식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그래서, 최종 인선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금까지는 피가로와 파우스트, 우리들과 미스라, 현자쨩까지, 이렇게 여섯이구나. 조금 더 인원을 늘려볼까?”

“상관없어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몇 명 줄거나 늘어도 비슷하게 느껴지네요.”

대화가 길어질수록 미스라의 식사는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마법으로 열린 공간의 문이 점점 축소되다가 이내 종적을 감췄다. 밥을 먹느라 정신이 팔려 깜박 잊은 것 같지만, 저만큼 어려운 마법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게 대단했다.

“네로, 너도 갈래?”

“하하…… 난 됐어. 아무리 봐도 내가 낄 자리는 아니겠지. 이따 아이들 간식도 챙겨주고 싶고.”

파우스트는 짧은 고민을 거쳐 물었다.

“남쪽의 마법사는 어때?”

피가로는 아까보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애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자칫하다간 나의 상냥한 남쪽 의사로서의 삶이 완전히 끝나버린다고. 피가로 선생님은 아직 더 약한 마법사로 있고 싶으니까.”

그때, 옆에서 얌전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레녹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남아서 루틸과 미틸을 돌보겠습니다.”

“그래줄래? 레노라면 안심이지! 뭐,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은 아니지만.”

피가로는 레녹스가 건넨 호의를 덥석 물었다. 기다렸단 듯이 화색을 띠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레녹스는 그런 피가로의 태도가 더없이 익숙해 보였다.

“따라가지 않는 편이 더 자연스러우니까요. 마법관에 남아있을 두 사람이 피가로 선생님의 행선지를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 곤란하기도 하고…… 제가 잘 둘러대겠습니다.”

“그래그래, 약한 남쪽 마법사가 북쪽 마법사들과 함께 임무에 가다니, 이상하잖아. 분명 늑대 우리에 갇힌 양처럼 가엾다고 생각할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 할 것 같은데.”

“피가로쨩은 예전보다 상상력이 더 좋아졌구먼.”

하다못해 밥을 먹는 미스라도 불쾌한 얼굴을 했다. 피가로는 온갖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수한 비난의 눈길이 꽂히는 가운데, 레녹스만이 전혀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그 표현은 거북하네요.”

“왜? 직업이랑 관련 있어서?”

“네, 직업병인 것으로.”

파우스트는 레녹스가 목자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허리춤에 매달린 그의 가방에는 언제나 양이 들어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나저나 레노도 많이 늘었구나. 이렇게 든든하게 서포트를 해주다니.”

“늘었다니, 뭐가요?”

“응, 역시 취소.”

마음대로 칭찬하고, 마음대로 취소하고 아주 제멋대로였다. “뭡니까, 그게…….” 레녹스는 불만을 품은 듯 미간을 찌푸렸으나, 금방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봐도 ‘피가로 선생님은 늘 이런 식이니까 어쩔 수 없지’라는 태도였다.

“그러면 대충 정해진 것 같구나.”

“뭐, 괜히 미루지 말고 그냥 출발하죠? 저희는 그렇다 쳐도 두 분과 미스라가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죠. 이만해도 충분히 고급 인력이잖아요.”

“암, 그렇지. 맞는 말이야. 슬슬 출발할까.”

누가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랄까 봐, 금세 사이가 좋아진 그들은 맡겨놓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들었지? 미스라, 아르시무 해줘.”

“아르시무, 얼른!”

“하아, 귀찮아. 그러니까 진작 출발했으면 됐잖아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아르시무》.”

그걸 또 들어주는 미스라도 여러모로 대단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출발한 그들은 아르시무의 힘으로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스라의 공간이동 마법은 정확도부터 신속성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래봤자 문 하나를 이동하는 거라 승차감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괜히 아르시무 아르시무 하는 게 아니었다. 아르시무를 아예 안 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타본 사람은 없다는 게 사실이었다. 미스라의 아르시무를 한 번이라도 타봤다면 그 맛에 중독되어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니까.

처음 임무지에 도착했을 때, 파우스트는 가장 먼저 눈앞의 장소가 자신이 알고 있는 곳이 맞는지 의심했다. 굉장히 낯선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게, 눈앞의 전경은 기억과 몹시 달랐다. 오두막도, 절벽도 없거니와 새하얀 눈이 아닌 짙푸른 녹음에 뒤덮여있었다.

도착하기 무섭게 피가로는 빗자루를 타고 높이 떠올랐다. 상공에서 보이는 모습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파우스트는 재빨리 자신의 빗자루를 꺼내 그를 뒤따랐다.

“평범한 녹지라기엔 초목이 빼곡한데. 이건 정글, 아니, 밀림이라고 해야 할지도.”

피가로의 말대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은 훨씬 장관이었다. 한때 작은 오두막과 무릎까지 쌓인 눈을 제외하고 텅 비어있던 적막한 장소는 주변의 설산과 동떨어진 것처럼 드넓은 녹지가 펼쳐져 있었다. 밖에서 안쪽의 모습을 살피려 해도 나무와 풀이 빼곡하게 자라있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피가로, 이 장소 기억하고 있어?”

“그렇게 물어도 말이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눈 덮인 오두막은 기억해도 이런 푸릇푸릇한 녹지는 처음이네.”

“그건 나도 그런데…….”

파우스트는 고도를 낮추며 피가로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여기, 당신의 마력이 느껴져.”

피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특별히 짚이는 건 없네. 그래도 한때는 여기서 살았으니까 희미하게 마력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때로부터 수백 년이 지났어. 아니면 최근까지 여기를 드나들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아니지만, 몇 번 정도는 찾아왔을 수도 있지. 적어도 수십 년 전까지는?”

피가로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두루뭉술한 말은 주제를 엇나가게 만들어 피로감을 증가시킬 뿐이다. 하물며 화자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파우스트는 짤막한 한숨을 쉬었다.

“매사에 철저한 당신이 흔적 같은 걸 남기고 다닐 것 같지 않은데. 내가 틀렸나?”

피가로의 입가에 자리한 미소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피가로는 정곡을 찔린 듯 순순히 인정했다.

“알겠어, 파우스트. 내가 잘못했어. 그냥 해본 말이야.”

“미리 말해두지만 화나지 않았어. 네가 이상한 말을 하니까…….”

“응, 알고 있어.”

그 말대로 피가로는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쌍둥이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상한 기분이 약간 좋아진 것 같았다. 하여간 특이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더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겠지. 일단 내려갈까?”

“그래.”

짧은 탐색을 마친 그들은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위에서 이변을 살피는 동안 밑에서도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머리를 맞댄 쌍둥이가 미스라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파하고 있었다. 품에 사크리피키움을 안은 현자가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무슨 대화들 나누고 있어요?”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두런두런 이어지던 말소리가 뚝 끊겼다. 누구도 바로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현자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차례를 넘겨받은 것은 화이트였다.

“미스라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말이야.”

“미스라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요. 뭐라고 했는데요?”

“글쎄, 안쪽에서 치렛타의 기운이 느껴진다지 뭐니?”

“미스라도 스승이 많이 그리운가 봐요.”

세 사람은 미스라의 말을 완벽하게 헛소리 취급했다. 보고 싶은 사람의 헛것을 본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상한 건 당신들이겠죠. 제가 치렛타의 기색을 잘못 읽을 리 없어요.”

아무도 믿어주지 않자 미스라는 공격적으로 반응했다. 그를 보며 피가로는 대놓고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파우스트는 그들이 말하는 치렛타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지만,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건 분위기로 대충 알 수 있었다. 파우스트는 그러지 말라는 듯 피가로를 쳐다보았으나, 얌전히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치렛타는 이미 세상에 없잖아.”

“…….”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언급한다면 누구라도 분노할 것이다. 설령 그게 뼛속까지 북쪽의 마법사인 미스라라 하여도 말이다. 파우스트는 미스라의 폭발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미스라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평소처럼 멍한 얼굴로 사색에 잠겨있을 뿐이다.

못된 말로 미스라의 입을 다물게 한 피가로는 현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것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보다 내부가 더 넓을 수 있다는 거야. 아마 다른 공간으로 이어져 있겠지. 안쪽은 미로의 형태로 되어있을 확률이 높아. 위험한 마수가 살 가능성도 있어.”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죠.”

현자는 비장하게 손을 말아 쥐었다. 그 모습을 본 피가로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현자님, 어쩐지 긴장한 것 같네. 곧 마주하게 될 미지의 장소가 두려워?”

“네에, 조금은요…….”

경직된 현자를 간질이며 사심을 한껏 채우고 있을 때였다. 미스라는 피가로의 어깨를 강하게 밀치고 사이에 끼어들었다. 덩달아 떠밀려 비틀거리는 현자의 팔을 잡아 바로 세운 미스라가 피가로를 노려보았다.

“피가로, 당신은 오늘도 혀가 기네요. 계속 그렇게 질질 끌겠다면 먼저 가겠습니다.”

“앗, 미스라, 잠깐……!”

사실상 통보였다. 미스라는 그 말만 남기고 모두를 지나쳐 성큼성큼 녹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피가로는 손을 뻗는 현자의 어깨를 잡고 말렸다. 울창한 숲에 다다른 미스라는 어느 순간, 빨려 들어가듯 종적을 감췄다. 피가로는 가설을 증명한 것처럼 우쭐거리는 시늉을 했다.

“쌍둥이 선생님은 안 들어가세요? 미스라가 없으면 현자님을 호위할 사람은 두 분밖에 없잖아요.”

스노우와 화이트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조용히 눈짓을 나눈 그들은 짐짓 난처하게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으응, 우리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걸.”

“저 안에서 무엇을 보여줄지 알고 있으니까.”

“안 들어갈 거면 왜 따라오신 거예요? 미스라도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자자, 약한 소리 말고 어서 들어가세요.”

당연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피가로는 쌍둥이의 등을 밀어 억지로 녹지로 데려갔다. 정말 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쌍둥이는 투덜거리면서 질질 끌려갔다. 그 뒤를 벌써부터 피곤한 낯을 한 파우스트와 현자가 따라갔다.

미스라가 숲에 빨려 들어간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아마도 재액의 영향으로 형성되었을 녹지는 가까이 접근하자 실제로 그들을 빨아들였다. 미약한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감각이 사라진 팔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었다.

공간에 삼켜지는 느낌이었다. 당황한 현자가 어설프게 손을 뻗어 파우스트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인지, 현자는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타인의 신체 일부처럼 느껴지는 몸을 어렵사리 움직여 현자의 손을 잡아주었다. 다행히 떨림은 금방 잦아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주변의 풍경이 바뀌어있었다. 입구는 온데간데없이 숲 한중간에 냉큼 버려져있었다. 멀대같이 키 큰 나무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하늘을 가린 커다란 나뭇잎과 두꺼운 줄기 탓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둡기 짝이 없었다. 인기척은커녕 동물이나 풀벌레 우는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러모로 음산한 숲이다.

파우스트는 주저앉은 현자가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며 일행을 확인했다. 바로 앞에서 쌍둥이와 피가로가 정강이까지 자란 풀을 걷어내고 있었다. 다행히 들어오는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지진 않은 것 같다.

“현자님, 무사해?”

“네, 네에. 무사합니다.”

아직도 현기증이 남아있는지, 파우스트의 손을 잡고 일어난 현자가 심하게 비틀거렸다. 가까이 다가온 쌍둥이와 피가로가 동시에 마법으로 등불을 띄웠다. 주변이 밝아지니 창백했던 현자의 안색도 약간 나아졌다.

“어지러우면 조금 쉴까?”

“아뇨, 괜찮아요. 앞으로 나아갑시다. 미스라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미스라가? 그럴 리가 없잖아. 먼저 가서 얌전히 기다릴만한 인물은 못 되지.”

현자가 먼저 손을 놓지 않으니 얼떨결에 계속 손을 잡고 있게 되었다.

“나무뿌리가 많으니 조심해.”

“……넵!”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거칠게 엉킨 나무뿌리가 들쑥날쑥하게 자란 풀에 뒤섞여 완벽한 함정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발에 채는 잔가지들을 밀어내며 이따금 균형을 잃는 현자를 지탱해 주었다.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던 그들은 금방 미스라와 마주쳤다. 놀랍게도 미스라는 정말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요.”

미스라는 딱 한 마디만 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무료한 태도로 보건대, 이곳에서 한참은 있었던 듯했다. 미스라를 확인한 쌍둥이와 파우스트, 현자는 그대로 피가로를 쳐다봤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스라가 기다린 이유는 머지않아 밝혀졌다. 미스라는 놀랍게도 이곳에 온 목적을 알고 있었다. 그는 파우스트와 함께 맨 뒤에 쳐져 있던 현자를 옆에 끼고 앞서갔다. 현자는 미스라에게 가까이 붙어 주위의 풍경을 구경했다.

“설산이 갑자기 녹지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궁금했는데, 의외로 평범한 밀림이네요.”

아니, 밀림도 평범한 건 아닌가. 이 세계에 와서 정상의 기준이 완전히 고장 난 현자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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