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19 (2권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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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은 유독 길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격렬한 전투 끝에 혁명군의 깃발이 성탑에 걸렸다.

“알렉, 승리했어! 전부 피가로님 덕분이야!”

알렉을 얼싸안은 파우스트는 전투의 흥분과 승리의 격정을 참지 못하고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모닥불 앞에서 춤을 출 때처럼 알렉의 손을 잡고 기뻐하다가 불현듯 이상함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웃고 있는 알렉의 얼굴에 약간의 난처함이 깃들어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런 표정으로…….”

“파우스트, 그게…….”

사람의 감이란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벌써부터 알렉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오랜 소꿉친구라는 것은, 그리하여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파우스트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지워졌다. 알렉의 손을 맞잡은 손아귀의 힘이 서서히 풀렸다. 파우스트는 알렉을 놓고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피가로님은? 피가로님은 어디 계셔?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는데…….”

“피가로님은 떠나셨어. 내게, 너를 부탁한다고 하셨지.”

떠나다니, 누가? 피가로님이? 파우스트는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황망한 눈으로 알렉을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짓궂은 장난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알렉은 망연자실한 파우스트의 어깨를 천천히 감싸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을 뿐이다.

“가엾은 파우스트, 넌 또다시 버려진 거야. 이걸로 벌써 두 번째구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친우의 부드러운 음성은 어떠한 저주보다 깊게, 맹독처럼 파고들었다.

알렉의 왼팔이 자연스럽게 목을 휘감았다. 사람이 주는 온기 외에 또 다른 무언가가 목둘레에 스쳤다. 느슨하게 묶은 알렉의 머리카락이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곧 두껍게 꼰 새끼줄이 되었다. 둥글게 매듭지은 그것이 목이 휘감기는 감각이 선명했다.

목에 걸린 밧줄이 가볍게 목을 조였다.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내달리며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두 발이 제대로 땅에 닿아있는데도 허공에 매달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파우스트는 소스라치게 놀라 알렉을 밀어냈다. 쫓기는 사람처럼 헐레벌떡 한쪽뿐인 팔을 쳐내고 매달리는 몸을 밀어냈다.

있는 힘껏 저항한 게 무색하게 발끝부터 불이 붙기 시작했다. 빠르게 번지는 불길은 온통 헤지고 찢긴 바짓단을 태우며 오물과 먼지가 엉겨 붙은 살갗을 살라먹었다.

“싫어, 이러지 마. 제발 그만둬.”

쿵쾅거리는 심장과 목 끝까지 차오른 가쁜 숨소리가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끔찍한 격통을 느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치고 있는데, 비틀거리며 물러난 알렉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파우스트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파우스트…….”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익히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변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은 이끼 낀 숲처럼 따뜻한 녹빛이었다. 시야가 흐려지는 가운데, 어느덧 알렉은 사라지고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스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길 너머로 피가로를 확인한 파우스트의 눈이 다시없을 정도로 크게 뜨였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고통이 잦아들었다. 파우스트는 이것이 질 나쁜 꿈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눈앞에서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이질감을 덮고도 남을 만큼 고통은 생생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존재가 나타난 것은 고통으로도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그날 그렇게 간절히 빌었지만, 당신은 오지 않았으니까. 끝내 내게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역설적이게도, 파우스트는 그런 방법으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윽, 머리가…….”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는 듯 골이 지끈거렸다. 지난밤에 과음을 했던 기억은 없었다. 가볍게 반주를 했을 뿐, 취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단순한 컨디션 난조거나 악몽의 영향일 것이다. 파우스트는 마법을 써서 들끓는 두통을 진정시켰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올라올 수도 있지만,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두통은 어떻게든 해결했으나, 가라앉은 기분은 그대로였다. 이게 다 잠자리가 뒤숭숭했던 탓이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구 엉킨 머리카락을 다시 인내심을 들여 한 올 한 올 풀어냈다.

파우스트의 방은 두꺼운 커튼 덕에 햇빛이 들이치지 않았지만, 대충 감으로 지금이 어느 즈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하필이면 악몽 때문에 눈이 뜨인 것이 불쾌했으나,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파우스트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찌뿌둥한 몸을 풀어준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잘 잤어?”

문 앞에 궁상맞게 쭈그려 앉아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피가로는 한 손으로 오브를 조정하며 다른 손은 바닥에 손을 붙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곳에 작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을 통해 올라온 푸르스름한 빛이 피가로의 손까지 흰빛으로 물들였다.

“피가로, 네가 왜 여기에…….”

지금 남의 방 앞에 정체불명의 마법진을 설치한 건가? 당혹감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 남아있는 잠기운까지 포함하여 완전히 말문이 막힌 파우스트가 말을 더듬을 때였다. 대답은 뜻밖에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파우스트님, 좋은 아침입니다.”

소리에 이끌려 돌아보니 옆에 레녹스도 있었다.

“레노, 너까지.”

벽면에 있어서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그 즈음, 무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휘적휘적 마법을 다루고 있던 피가로가 손을 물렸다. 피가로는 레녹스에게 손짓을 하여 불러들이더니,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녹스는 마법진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멀대같이 키 큰 성인 남자 둘이서 남의 방문 앞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것도 이런 수상쩍은 자세로. 다른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고층이라 다행이었다. 이 상황을 설명하려면 분명 귀찮았을 테니까.

“……이봐, 무슨 일인데 그래?”

하지만 설명이 필요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불만스럽게 목을 울리자, 때아닌 수업에 열중하던 두 사람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두 쌍의 눈동자가 멀뚱히 파우스트를 올려다본다. 솔직히 약간 부담스러웠다.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게 누그러지는 눈썹을 일부러 바짝 추켜올렸다.

그 모습을 본 피가로는 잊고 있던 게 떠오른 사람처럼 아아, 하고 운을 뗐다.

“그새 결계가 약해졌는지 꿈이 새어 나오더군. 레노가 문 앞에서 틀어막으려고 했던 모양인데, 금방이라도 부수고 튀어나올 기세라서 말이야. 레노는 이런 방면에 미숙하니까 나를 부른 거야.”

“죄송합니다, 파우스트님. 허락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다니…… 그래도 피가로님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마법관 전체에 소동이 이는 것보다는 낫지? 기묘한 상처에 대해서도 별로 알리고 싶지 않을 테고. 비밀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알고 있겠지만.”

레녹스의 말을 받아 덧붙인 피가로가 손을 털며 일어섰다.

“그나저나 또 그런 꿈을 꿨구나. 너도 참 여전해.”

“뭐…….”

설마 피가로가 꿈을 엿본 걸까? 결계를 보강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목격했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야 간밤에 파우스트가 꾼 꿈은 어느 정도 그와 관련된 내용이었으니까. 하물며 긍정적인 것도 아니고, 매우 불편한 주제였다.

파우스트는 긴장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피가로는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거대 고양이라니, 지나치게 상상력이 좋지 않아?”

“고, 고양이 꿈같은 건 꾸지 않았어! 되는대로 막 갖다 붙이기는.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지?”

“단단히 헛짚으셨네요.”

“어,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하고 있던 건가. 곤란하네에.”

파우스트는 머쓱하게 웃는 피가로를 째려봤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끝까지 남을 놀릴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더 위엄과 관록이 있고, 성실하고 엄격했는데. 그렇다고 지금의 모습이 싫은 건 아니지만, 아직도 가끔은 낯설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파우스트님이 옳아요. 새어 나오는 꿈은 저희가 잘 막았고, 방 안을 들여다볼 시간도 없었잖아요. 계속 저와 함께 계셨으니까. 피가로 선생님, 어서 사과하시죠.”

“응? 내가 사과해야 하는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뜬 피가로가 자신을 가리켰다. 엄청나게 눈치를 주는 태도였지만, 레녹스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연스럽게 파우스트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파우스트, 제대로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이런 꼭두새벽부터 애썼는데.”

“앗, 인사가 늦었습니다. 정말 감사합…….”

파우스트는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다가 별안간 멈칫했다. 본능적으로 인사해버렸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몸에 밴 습관이었다. 파우스트는 뒤늦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레녹스를 쳐다봤다.

피가로와 사제관계를 회복한 사실은 아직 레녹스에게 알리지 못했다. 기왕이면 좀 더 제대로 결론을 내고 전하려고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이제는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레녹스는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보기 드물게 몽글몽글한 눈빛을 띤 레녹스는 파우스트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너무 대놓고 외면하니 오히려 어색하고 민망해졌다.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평소에는 쓸모없는 이야기를 잘도 늘어놓는 주제에 피가로는 이럴 때만 조용해졌다.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상한 책임감을 느낀 파우스트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계속 여기 서있기도 뭐 하니, 일단 장소를 옮길까.”

“난 찬성.”

“저도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적당한 동의가 따라붙었다. 파우스트는 혀를 찼다.

“……그럴 줄 알았다만, 역시나군. 따라와.”

그는 자아를 잃은 사람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계단을 내려갔다.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걸음을 옮기던 중,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아무래도 네로가 벌써 주방에 들어간 듯했다. 네로는 파우스트 못지않게 성실하지만 지금은 그에게도 이른 시각이었다. 또 북쪽 마법사들이 배고프다며 칭얼거리기라도 했나 보지.

고작 밥 차려달라는 이유로 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은 얼토당토않는 행동이지만, 하도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파우스트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구나. 그는 다소 무심하게 생각했다.

네로가 깨어있다면 굳이 식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냄새에 이끌려온 식당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예상대로 익숙한 면면이 보였다.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약간 의외기도 했다.

미스라는 기다란 식탁의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쪽잠을 청하는지, 아예 베개를 깔고 엎드린 미스라의 손을 옆에서 현자가 잡아주었다. 그런 현자의 맞은편에는 스노우와 화이트가 의자에 앉아 허공에 뜬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고 있었다.

식당에 나타난 그들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쌍둥이였다.

“파우스트와 레녹스인가. 오, 피가로까지?”

“두 사람은 그렇다 쳐도 피가로쨩은 의외구나. 그대가 이 시간에 웬일일까?”

두 사람을 발견한 피가로의 입가가 안 좋은 의미로 부드럽게 풀렸다.

“두 분이야말로…… 늙으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는데 사실인가 봐요.”

“호호호, 그러는 피가로쨩도 일찍 일어났겠지?”

“응응, 그대를 보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처음에는 평범한 인사말로 시작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맞부딪힌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레녹스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피가로와 함께 착석했고, 사이에 낀 현자는 안절부절못했다. 무릎 위에 앉은 사크리피키움을 쓰다듬는 손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여전히 사이가 좋으면서도 나빴다. 이렇게만 보면 북쪽 마법사 평균인가 싶기도 하지만, 저 세 사람은 그보다도 가까운 사제지간이었다. 아마 나름의 애정표현이겠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또 지나치게 과격하지만 말이다.

“하하, 설마요. 오늘이 특별한 거죠. 전 어제도 늦잠 잤는걸요? 정오까지 일어나지 않아서 미틸이 직접 깨우러 왔는데요?”

“당신은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야?”

파우스트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스승과 제자라고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그것을 전부 피가로를 통해 배웠다.

유치하게 구는 피가로를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파우스트는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식탁을 등지기 무섭게 레녹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뒤를 돌아본 파우스트는 턱짓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다행히 레녹스는 금방 마음을 놓고 현자를 도와 나잇값 못하는 사제지간의 싸움을 만류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네로는 여러 개의 조리기구를 한 번에 다루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몇 번을 봐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네로에게 말한다면 그래봤자 식사 준비를 하는 것에 불과한데 오늘따라 답지 않게 유난을 떤다고 할 것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네로를 보고 있으니 느닷없이 장난기가 도졌다. 파우스트는 일부러 인기척을 죽여 접근했다.

“네로,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

“왓, 깜짝이야!”

소스라치게 놀란 네로가 손에 든 프라이팬을 놓쳤다. 프라이팬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안에 담긴 음식이 허공을 날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마법을 발동하여 프라이팬과 쏟아지는 음식을 허공에서 주워 담았다.

“이렇게까지 놀랄 줄 몰랐어. 미안하군.”

“아아, 아니야. 당신도 보기보다 짓궂은 구석이 있다니까.”

파우스트는 네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떨어지는 프라이팬을 따라 주저앉았던 네로가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네로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무사히 안착한 프라이팬과 주방 밖을 번갈아보았다.

“선생이야말로, 이상한 조합을 만들었잖아.”

“이상한 조합이라니, 그렇게 보이나?”

시작부터 이상한 조합은 아니었지만, 일찍이 식당에 와있던 현자와 미스라, 스노우와 화이트까지 합세하면서 꽤나 특이한 조합이 되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도 없고, 고생해서 만든 음식을 보람차게 먹어줄 사람도 없었으며, 별것 아닌 일에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어줄 이도 없었다.

그렇게 보니, 정말 먹이는 보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음식을 내놔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먹보와 가리는 게 많은 편식쟁이들, 그리고 대책 없는 소식가의 조합이었다. 네로가 묘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나마 현자와 레녹스가 있으니 괜찮을지도. 침음을 흘린 파우스트는 그냥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파우스트는 네로와 간단한 담소를 나누며 그를 도와 음식을 담은 접시를 옮겼다. 그 사이 이야기가 잘 된 건지, 식당은 어느새 그럭저럭 괜찮은 분위기로 변해있었다. 짧은 틈에 정말로 잠든 미스라는 현자가 열심히 깨워도 눈을 뜨지 않았다. 현자의 왼손이 봉쇄된 것을 제외하면 식사 시간은 대체로 화기애애했다.

하나둘씩 접시를 비워갈 때였다. 갑작스럽게 손뼉을 마주친 현자가 의자에 걸쳐놓은 가방을 뒤적였다.

“내 정신 좀 봐! 그러고 보니 아까 의뢰서가 도착했어요. 같이 보실래요?”

“콕 로빈이 전해준 거라면 꽤나 급한 일이겠네.”

턱을 괸 피가로가 공허한 배부른 눈으로 현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자칭 맥시멀리스트―현자가 설명해 주었다―인 현자의 가방에는 보기보다 많은 물건이 들어가 있었다. 현자는 한참을 달그락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찾아 헤매더니 곧 둥글게 말린 종이뭉치를 끄집어냈다.

현자가 의뢰서를 찾는 동안 네로와 쌍둥이가 식탁을 정리했다. 레녹스가 거든답시고 손으로 접시를 치우는 것을 그들은 마법으로 간단하게 휙휙 옮겨버렸다. 식탁은 음식물이 튄 자국 없이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아쉽게도 엎드린 미스라는 치우지 못했다.

피가로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접시 중 미스라의 접시를 잡아 그의 옆에 놓아주었다. 빠르게 식어가는 음식이 향긋한 냄새를 솔솔 풍겼지만, 이미 배가 부른 피가로는 살짝 역겨운 얼굴을 했다. 현자는 미스라의 머리를 피해 얇은 종이 두 장을 깨끗한 식탁에 펼쳤다.

하나는 의뢰서였고, 다른 하나는 대륙의 축소판 지도였다.

“현자쨩이 읽어주려무나.”

“아, 제가 요약해 드릴게요.”

현자는 게으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의뢰서를 읽으며 내용을 요약했다.

“재액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북쪽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중앙 변경에 가까운 외각에서 갑자기 눈과 빙하가 녹았다고 해요. 날씨는 전혀 풀리지 않았는데, 마치 커다란 마을 하나만큼의 면적이 전혀 다른 땅처럼 변했다고…….”

침착하게 의뢰서를 읽어가던 현자의 눈이 별안간 동그래졌다.

“어느 날 그 일대가 풀과 나무가 우거진 녹지로 바뀌었대요. 어떠한 마법적인 힘이 관여했는지는 몰라도, 정말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불모의 땅에 녹지라니, 누가 들어도 이상하네.”

“원래 사람이 살던 지역은 아니지만, 벌써 실종된 사람이 굉장히 많나 봐요. 이렇게 많은 사례가 보고된 걸 보면…….”

현자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탄식했다. 현자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의무를 짊어진 입장으로서, 혹은 인도적인 견지에서 다방면으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결국 모든 의뢰를 다 들어줄 수는 없었다.

미리 가서 예방할 수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겠으나, 인원이 한정되어 있는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경중을 따져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의 적임자답게 피가로는 능숙하게 현자를 위로했다.

“하필 그 땅에 이런 기현상이 일어나다니, 운이 안 좋았어. 북쪽 땅은 원래 터가 좋지 않고, 먹고살기 궁한 사람들이 많으니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을 거야. 어차피 여기서 죽나, 거기서 죽나 마찬가지라면 시도라도 해보는 편이 낫지 않겠어?”

“생사의 문제라고 해도 욕심에 눈이 멀어 조심하지 않은 사람들도 조금은 잘못이 있겠지.”

“네에,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 안타깝네요.”

피가로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현자가 한 손으로 미스라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사크리피키움을 정신없이 주무르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팔짱을 끼고 턱을 만지작거리던 피가로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잠깐, 현자님. 위치가 어디라고? 아까 짚어준 곳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까?”

“이 즈음이에요.”

현자는 넓게 펼친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북쪽 나라에서도 약간 옆으로 틀어진, 중앙에 가까운 위치였다. 현자가 가리킨 지역을 보며 피가로는 연신 “어라, 어라라.”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치가 익숙하네. 살다 보니 이런 우연이 다 있구나.”

피가로는 자연스럽게 바다 앞, 절벽이 있는 오두막을 떠올렸다. 한때 피가로가 머물렀던 곳이자, 유성우가 내리는 날 파우스트가 그를 찾아왔던 장소였다.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 마침 그 근처였다.

“글쎄, 정말 우연일까?”

파우스트가 끼어들며 똑같이 의문을 제기했다. 말을 마친 그는 꼭 알아달라는 것처럼 자못 심각하게 피가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현자가 장소를 가리켰을 때에도 어딘가 할 말이 있는 눈치긴 했다.

“뭐야, 그 화법은. 나는 조금 별로네.”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파우스트는 일일이 대꾸할 기력도 없는 듯 한숨을 쉬었다. 예전이라면 한 마디 날카롭게 쏘아붙였을 것 같은데, 요즈음의 파우스트는 피가로에게 굉장히 물렀다. 어느 정도냐면, 인간관계에 예민하지 않은 이들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피가로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것처럼 계속 께름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파우스트는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피가로, 알고 있지? 무조건 네가 가야 해.”

“너도 마찬가지겠지, 파우스트.”

“그래. 어차피 당신을 혼자 보낼 마음은 없어.”

슬쩍 떠본 말에 파우스트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똑바로 마주 봐왔다. 상대가 올곧게 나오니 기가 죽은 건 오히려 피가로 쪽이었다. 파우스트의 진심 어린 걱정을 마주한 피가로는 순식간에 찌글찌글해져서 “으응…….” 하고 대충 둘러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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