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18


3.

겨울의 막바지, 알렉을 위시한 혁명군은 강행군을 펼치며 중앙성 일대에 진출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 근방에 도는 묘한 소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소문의 내용은 간단하다. 몹시 포악한 마법사가 옛 왕도를 정복하고 성을 빼앗았으며, 근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수탈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혐오하는 마법사의 존재는 그리 드물지 않았다. 마법사와 인간의 갈등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이들의 마찰은 이미 수백, 수천 년간 지속된 것이며, 절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단순히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서라면 굳이 중앙성을 차지하고 농성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중앙성은 줄곧 옛 왕조의 후예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을 터, 일반적인 마법사가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춘 그들을 상대로 혼자서 승리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높은 확률로 살아남은 옛 왕조의 후예와 손을 잡았을 것이다. 그쪽도 혁명군의 발 빠른 진군에 맞춰 진작 움직이고 있었을 테니.

피차 미력한 이들끼리 동맹을 맺는 건 현명한 방법이다.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라면 더 쉽고 간편한 방법이 있겠지만,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피가로는 단언할 수 있었다. 찰나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이미 손에 쥐고 있는 부귀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시하네. 고작 그런 것 따위에 집착하다니.’

현재 중앙의 마법사는 세계정복을 하던 오즈에 의해 쓸려나가, 몹시 어리거나 변변찮은 마력을 지닌 이들밖에 남지 않았다. 운 좋게 소식을 접한 덕에 참사를 면했다고 해도 그래봤자 중앙 출신이다. 치밀하게 조직된 군대에 정면으로 맞설 정도는 아닐 것이다. 빠르게 근접하는 혁명군의 소식을 접했을 텐데 물러나지 않는 것은 다른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이런 식인가.’

이렇게 되면 완전히 구세력과 신세력의 싸움이었다. 혁명군에 합류할 때부터 짐작했던 양상대로 흘러갔다.

저쪽도 어느 정도 세력이 큰 만큼 까다롭기야 하겠지만, 결국 혁명군이 승리할 것이다. 어느 정도 정해진 결말이었다. 단순히 자신이 가세했기 때문이 아니다. 성 안에 틀어박혀 농성이나 하는 겁쟁이들과 중앙 전체를 휩쓸며 이곳까지 도달한 혁명군은 쌓인 경험부터가 차이 났다.

물론 혁명군이 이렇게까지 끈질길 줄은 저쪽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혁명이 여기까지 도달할 줄은.

‘정말로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나다니, 영웅이라는 말에 손색이 없군.’

이 부분에서는 피가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구세력을 상대로 하는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적은 왕도 밖에서부터 방어전을 펼쳤다. 왕도로 접근할수록 과거 유력 귀족이 지배하던 구역이 많아졌다. 그런 성이나 요새는 다른 곳에 비해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구조와 설비가 잘 짜여있었다. 그중에서도 혁명군이 목표로 하는 요새는 비교적 외곽에 있었으나, 전쟁이 길어질 것을 대비하여 거점으로 삼기에 좋은 위치였다. 어차피 잔존 세력 전부를 복속시키기 위해선 무조건 거쳐가야 하는 관문이었다.

요새는 사면에 강을 둘러싸고 있었다. 때문에 요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나 하늘을 통해야 하는데,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수위 자체는 깊지 않지만, 으레 그렇듯이 맨몸으로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늦겨울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날이 추웠다. 표면에 살얼음이 낀 강은 몹시 차가웠다.

그렇다고 하늘을 경유하기에는 마법사 부대가 따로 있는 혁명군을 의식하여 상대도 이미 대비책을 갖춰놓았을 것이다. 마법사 부대라고는 하나, 정식으로 스승에게 교육을 받은 이들은 얼마 없었다. 아직까지 빗자루를 타고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숙달된 마법사라면 모를까, 마법사는 대개 비행 중에 무방비해진다. 그 상태에서 격추당하면 그대로 물에 떨어져 손쓸 도리 없이 목숨을 잃고 만다.

어느 곳 하나 빈틈이 없다는 점에서 과연 난공불락의 요새라 부를만했다.

‘오즈의 벼락 한 번에 와르르 무너져버려서 몰랐지만.’

생각해 보면 오즈의 벼락을 맞고 멀쩡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쓸만한 거라고는 튼튼한 몸과 마력밖에 없는 북쪽의 마법사도 오즈의 마법을 정통으로 맞으면 속수무책으로 돌이 되어버리고는 했다.

아무튼 혁명군은 어떻게든 요새를 공략하려 했으나, 지리적 악조건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그들은 큰 수확 없이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공략전이 뜻밖에 지체되면서, 겨울을 맞이하며 원래도 느려졌던 진군이 더욱 더뎌지게 되었다.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주는 건 첫 번째가 돈과 물자요, 두 번째가 좋은 지휘관이며, 세 번째가 강한 장수였다. 하지만 그것들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병사들의 사기였다. 병사들의 사기가 자잘한 요인으로 쉽게 오르내리는 걸 생각하면 지금은 무척 안 좋은 상황이었다.

굳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파우스트라면 다 알고 있을 테지만.

“피가로님, 부상자의 치료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손을 거들지.”

때마침 돌아온 파우스트가 도움을 청했다. 얼굴에 진 그늘로 보건대, 정찰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듯했다. 파우스트는 묵묵히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으며 다친 병사들을 돌보았다. 피가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소리 없이 안타까워했다.

알렉이 팔을 잃은 이후, 파우스트는 한동안 계속 우울해했다. 제자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파우스트는 꾸밈없이 밝은 얼굴이 제일 잘 어울렸다. 아이의 미소를 보지 못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내심 아쉬워하던 찰나, 1월의 생일을 기점으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사이 커다란 마음의 짐을 덜은 것이 틀림없었다. 비록 이쪽은 그날의 대화를 떠올리면 어쩔 수 없이 불편한 기분이 되어버리지만 말이다.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언젠가는…….’

어떠한 문제를 미루고 외면하는 것은 오래 산 지혜이자 나쁜 버릇이었다. 회피하는 태도가 불성실하게 보일 수도 있다. 누가 뭐라 하든 나름대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여기에 체류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네.”

피가로는 의무실 막사를 나오자마자 운을 떼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안으로 밀고 들어갈 방법을 찾을 거라고 했었지. 그래서 파우스트, 계획은?”

피가로가 질문할 것을 예상했는지, 파우스트는 긴장으로 목을 움츠렸다.

“계획이라고 해봤자 힘으로 뚫는 것밖에 없는데요…….”

“정말 그뿐일 리가 없잖아. 내가 너를 잘 아는데.”

“그것도 그렇네요.”

파우스트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파우스트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도, 이 이상 지체할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것이 걱정입니다만, 목표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해서 분위기가 처져있어요. 날이 따뜻해진다 해도 승리는 요원합니다. 그때까지 모두가 버틸 수 있을지는 더더욱…….”

작게 한숨 쉰 파우스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는 대낮에 보일 리 없는 달의 흔적을 눈으로 좇았다.

“피가로님도 느끼고 계시죠? 마침 재액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열흘 뒤는 만월이 뜨는 날이죠. 부쩍 가까워진 달빛이 쏟아지는 날이라면, 마법사가 많은 저희가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그날까지 체력을 온존하다가 요새의 방호를 뚫겠습니다. 마법사가 선두에 서서 요새의 안쪽부터 제압하면 훨씬 진입이 수월하겠지요.”

“넌 언제나 위험한 작전을 떠올리는구나.”

“저도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습니다만…… 역시 이 밖에 다른 방법은 생각이 나지 않네요.”

“그 점은 나도 동의해.”

위험성은 둘째 치고서라도 굉장히 좋은 작전이었다. 시기가 좋았다. 재액이 가까워지면 마법사의 마력은 강해진다. 그때에는 아무리 약한 마법사여도 평소보다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마법사의 활용이 보다 자유롭다면 다양한 전술을 획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피가로가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번거로웠다.

‘그보다 쉬운 방법이 있는데.’

피가로는 뇌리를 스쳐간 어떠한 가능성에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개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금까지 잘도 도외시해놓고 이제 와서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다니. 아마 끝이 다가오기 때문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일 테다.

파우스트는 알렉에게 보탬이 되고 싶어 은둔하는 피가로를 찾아왔다. 파우스트와 피가로를 이어주는 가장 두꺼운 끈은 바로 혁명이었다. 사제관계에 부여하는 의미는 서로 다르다. 결국은 동상이몽이다.

어느 겨울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찾아와 마법사로서 살아가는 고민을 토로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필요로 했으나, 냉정히 말해 피가로는 뒷전이었다. 그 또한 소중한 것은 맞지만, 피가로는 알렉이 인간이라서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대신 채워주는 일종의 대체재였다. 적어도 피가로가 느끼기로는 그랬다.

이 혁명이 끝나면 그땐 정말로 파우스트에게 자신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너저분하기 짝이 없는 스승의 실체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차마 드러내기 부끄러운 것이라 꽁꽁 감추었으니까.

알렉을 향한 파우스트의 믿음은 굳건했다. 무슨 대화를 해도 알렉의 이름이 나왔다. 파우스트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소중한 친우의 존재는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피가로가 말하는 ‘우리’와 파우스트가 말하는 ‘우리’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포하는 뜻이 전혀 달랐다.

파우스트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 매 순간 알렉과 파우스트의 굳건한 관계를 느끼고, 추악한 질투에 몸서리치며 비참함을 느끼더라도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당장은 이 아이의 가장 소중한 것이 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리라고 믿으려고 했다.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천 년을 넘게 살아왔다. 지난 시간에 비하면 그깟 백 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분명 그럴 텐데, 그래야 할 텐데…… 왜 이렇게 버티기 힘든 걸까? 당장이라도 파우스트가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떠나버릴 것 같은 건 어째서일까?

‘이래서 생각하지 않으려 한 건데.’

오랫동안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돌고 돌아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형태로 정착해버리고 만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다. 파우스트에게서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을 들었으니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피가로는 여전히 도망치고 싶었다.

알렉의 옆에서 웃는 파우스트를 볼 때마다 속이 매스꺼워졌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간 알렉의 부탁에 따라 파우스트를 가르치던 시간이 떠올랐다. 어째서 그런 부탁을 들어주었을까. 하지만 그건 정치에 좀처럼 뜻이 없는 파우스트의 입지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만약 틀렸다고 한다면, 무엇이 옳은지 누군가 답을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늘 이런 마음으로 살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매달리면서.

‘……지친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오즈 앞에서 실컷 지껄인 만큼 이번은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진심은 어땠을까. 파우스트의 말대로 피가로는 언제나 때와 상황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켰다. 피가로는 자신을 감추는데 너무 능숙해서 가끔은 자기 자신마저 감쪽같이 속이고 만다.

제자 자랑은 일부러 했다. 파우스트의 귀여운 점을 한 명이라도 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오즈를 도발하고 싶었다. 그 박정한 녀석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무언가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다.

이럴 거면 세계정복 같은 일은 끼어들지 말 걸 그랬다. 딱히 보답을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계속 그때의 그림자에 속박될 줄 알았더라면 세상이 통째로 불타버리더라도 거들지 않았을 것이다.

“피가로님, 왜 그러세요?”

왁자지껄한 상념을 가르고 다정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피가로를 돌아보는 파우스트는 제비꽃 같은 눈에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파우스트의 말을 놓쳐버린 듯했다.

구름이 이동하면서 생긴 그림자가 파우스트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이상하다. 피가로는 무채색으로 물든 파우스트를 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자신의 제자가 전혀 일면식 없는,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피가로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늘 그렇듯, 당면한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며 모른 척 외면했다. 그러는 동안 열흘은 덧없이 지나가고, 어느덧 파우스트가 지정한 날이 왔다. 파우스트는 미리 예고한 대로 늦은 밤에 작전을 개시했다.

둥그렇게 뜬 달은 성의 뒤편, 탑의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먹구름이 낀 어두운 밤하늘과 검푸른 강은 제법 운치 있는 풍경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조차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는 모양이다만.

알렉과 함께 후방에 있던 피가로는 병사들이 흉흉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사기가 심각하게 떨어진 탓인지, 아무도 강을 건너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잔뜩 주눅 든 이들을 독려하는 건 힘든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염려와 달리, 파우스트는 동요하지 않았다. 준비를 마친 파우스트는 당당한 걸음으로 알렉에게 다가갔다.

“알렉, 너의 생일에 걸맞은 최고의 승리를.”

파우스트는 정중하게 몸을 낮춘 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알렉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알렉은 몸을 반듯이 세운 채 파우스트를 내려다보았다. 순식간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피가로는 그것이 약속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미래에 나눌 약속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혼은 약속이다. 예로부터 인간과 결혼한 마법사는 매우 드물게 존재했다. 피가로도 세상을 돌아다니며 몇 번 그런 마법사를 만났다. 수명이 다른 마법사와 인간 사이에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었다. 이를 뛰어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길어야 백 년.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마음을 묶인 마법사는 배우자의 사후, 쇠약해지다가 결국 오래 살지 못하고 명을 다했다. 그들이 가여웠다. 어리석고 안타까웠지만, 동시에 부러웠다.

답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파우스트의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연을 끊을 각오를 하고 떠나거나. 선택지는 두 개뿐이었다. 이미 수차례 실패를 겪어봤기에, 파우스트 같은 사람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이대로 알렉의 배우자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과 약속하고 그 사람에게 마음을 건넨 파우스트를, 피가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의 마음을 온전히 차지하지 못한다면, 자신으로 가득 채우지 못한다면 결국 평범한 관계와 다름없었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피가로는 파우스트에게서 알렉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마침내 피가로는 결정했다. 이건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심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은 충동일까.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타인의 어긋난 길을 잡아주는 건 꽤 자신 있었지만, 피가로에게는 그런 옳고 그름을 알려줄 신이 없었다. 그런 존재가 실제로 있었다 해도, 과연 결과가 달라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오랫동안 알렉의 손등에 입술을 누르고 있던 파우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파우스트는 이번에는 피가로를 향해 부탁했다.

“피가로님, 마지막으로 조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어.”

손 위에 떠오른 오브가 느리게 회전했다.

“내가 길을 열어주지.”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강 앞에 대열을 갖추고 있던 병사들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기울어진 달이 강 위에 새하얀 은빛의 길을 드리웠다. 피가로는 까마득한 세월을 지나, 다시 한번 이곳에 섰다. 어리고 한심했던 과거에는 이 광경을 보며 참으로 감상적인 생각에 잠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야 했다.

피가로는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광채를 발하는 오브에서 쏘아진 눈부신 화살이 수면을 쏜살같이 가로질렀다. 마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빛나는 꼬리가 달빛이 낸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하얀 포말이 수면 밖으로 뿜어져 나오고, 잔잔한 강물에 수십 개의 빗금이 그어졌다.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친 물은 거센 파도처럼 일렁이며 외곽으로 쏟아졌다. 사방으로 퍼진 물보라를 맞은 것처럼 먹구름이 걷히고, 부글거리는 물거품은 점점 넓어지다가 이내 물 위를 덧씌우듯 사라졌다.

성곽까지 이어진 길이 단숨에 뚫렸다. 심하게 물러 질퍽거리는 흙길 너머, 굳게 닫힌 성문이 보였다. 좌우로 갈라진 강물은 투명한 장벽에 막힌 듯 탁 트인 길로 쏟아지지 않았다. 물이 세차게 쏟아지는 소리가 잦아들고, 한차례 거친 폭풍우가 지나간 것처럼 비정상적인 고요가 찾아왔다.

기적을 목도한 이들은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같은 사람의 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세상 어딘가에 깊은 물을 가르고 우뚝 솟은 산을 평지로 만드는 강력한 마법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모두가 부풀려진 소문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파우스트였다.

“진격하라! 신은 우리의 편이다!”

파우스트의 외침에 따라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드높아진 사기만큼이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는 귀가 아플 정도였다.

“파우스트, 잠깐.”

피가로는 선두로 향하는 파우스트를 붙잡았다. 파우스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기다리지 않고 그의 뺨을 감싸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피가로님, 이건…….”

화들짝 놀란 파우스트가 팔을 마구 휘저었다. 그럼에도 피가로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파우스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져있었다. 엉망으로 흔들리는 순진한 눈망울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러났다. 축복의 마법을 걸었다는 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것이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등을 힘차게 밀어주었다. 수줍은 청년의 모습에서 장수의 다부진 얼굴로 돌아간 파우스트가 다시 앞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갔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등을 바라보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원래의 자리라니, 이렇게 우스울 데가. 사실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공연히 손목을 문지르다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피가로에게서 어떠한 기색을 읽어낸 알렉은 놀라지 않았다. 알렉은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피가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감이 좋은 녀석이었다.

“알렉, 나도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할까.”

이미 알고 있다면 번거롭게 돌려 말할 필요는 없었다. 피가로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알렉을 돌아보았다.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줘.”

“약속하겠습니다, 반드시.”

하늘에 뜬 달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알렉은 시린 바다처럼 푸른 눈으로 피가로를 보며 맹세했다. 그의 말에 절로 웃음이 났다. 즐거워서 나는 웃음이 아닌, 허탈한 웃음이었다.

약속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은 이렇게나 쉽게 약속을 입에 담는다. 그것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사실은, 피가로도 파우스트에게 선뜻 약속하고 싶었다. 아무런 고민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너와 함께 살겠다고 약속하고 싶었다. 그저 적당히 둘러댄 말이 아니라 진심 어린 마음을 건네고 싶었다.

질투를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인간을 상대로, 지저분하게 시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차피 이런 꿈같은 시간도 전부 끝이었다. 좋은 순간은 아슬아슬한 추억만 남기고 전부 물거품처럼 녹아버렸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필요는 없었다. 쓰디쓴 실패를 삼키고 돌아서면서, 몇 번이고 파우스트를 떠올렸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곱슬머리, 상냥한 자색 눈동자, 수줍은 미소를 떠올렸다. 추운 겨울에도 항상 따뜻한 손과 그보다 뜨겁게 불타는 심장을 떠올렸다.

언제 어느 때고 다정하고 아름다웠던 제자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축복을 덧대었다. 너에게 축복을. 네가 행복하기를. 앞으로도 줄곧, 네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살면서 유성우가 떨어지는 모습을 수십, 수백 번도 넘게 지켜보았다. 지겨우리만치 반복되는 풍경에 감흥이 일기 시작한 것은 유성우가 쏟아지는 날에 네가 내게로 왔기 때문에. 그만큼 너는 내게 각별했다. 너로 인해 다시 한번 꿈을 꾸었다. 실망이 불러온 공허를 딛고 일어나, 나의 행복보다도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을 우선으로 바라게 되었다.

파우스트는 그 자체로 충분히 완벽하다. 그 아이를 바꾸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알렉을 버리고, 그간 이룬 것, 동고동락해온 관계를 전부 자기 손으로 직접 끊어내고 나를 선택해달라고 말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뻔히 정해진 결말을 돌려보겠다고 무작정 떼를 쓰고 애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좋으니 나만 봐달라고 매달리고. 그따위 우스운 촌극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추하게 매달린다면 그 아이는 나를 봐줄 것이다. 손에 쥔 것을 놓지도, 나를 내버려두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겠지. 그거야말로 비극이다. 그건 그 아이를 망가뜨리는 행동이었다. 애지중지 키운 제자를 내 손으로 직접 꺾을 수는 없었다.

파우스트가 나를 선택했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무슨 말을 해도 알렉이 원한다면 파우스트는 결국 그와 약속을 할 것이다. 평생의 사랑을 약속하는, 동반자의 약속을. 설령 알렉이 죽고 나서도 내게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한 쌍으로 존재했던 쌍둥이 마법사가 있었다. 언제까지고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덥힐 것 같았던 그들은 어느 날, 차가운 눈밭을 구르게 되었다. 무릎까지 쌓인 새하얀 눈은 동생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날 얼음의 숲에서 스노우는 화이트의 돌을 양손 가득 움켜쥐고 오열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스노우는 기어이 화이트를 되살렸다. 어리석게도 날 때부터 주어졌던 자신의 반쪽을 제 손으로 없애고, 다시 되살려 그와 함께 웃고 있었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그들은 직접 그것을 증명해냈다. 인간이든, 마법사든, 사람은 반드시 변심한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마법사보다 훨씬 편하다. 백 년은 짧다. 변심하기 전에 수명을 다할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약속을 했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 죽음으로 박제되어 영원히 변치 않는 존재로 남아있다면. 죽음은 가장 완벽한 형태의 종결이다. 산 사람은 절대로 죽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

피가로라는 사람은 알렉 그랑벨과 다르다. 파우스트가 아무리 외로워해도 자신은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할 것이다.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멋대로 참견하고 멋대로 내팽개쳐지고, 다시 그때와 같은 경험을 하는 건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었다. 다행히 오래전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린 덕에 눈치가 빨랐다. 퇴장할 순간은 알고 있다는 것은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빗자루에 올라타 싸늘한 밤바람을 맞고 있으면 소란스러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피가로는 일찍이 가라앉은 머리가 이끄는 대로 무작정 북쪽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역시 이 이야기는 오즈한테 하지 말자. 그 녀석이 알면 분명 비웃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정착할 거라고 호언장담하더니, 결국 또 못 참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으니까. 입 밖으로 내진 않아도, 조금의 인내심도 없는 녀석이라고 속으로 생각할 거야. 비웃음을 당하고, 우습게 여겨질 테니 말하지 말자.’

뼈저린 실패의 기억은 혼자만 품어도 충분하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었다. 이제 더는 좋은 스승으로 남지 않아도 된다. 나 자신을 속여가며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 하지만…… 조금 더 제대로 끝을 맺을걸. 이런 식으로 급하게 도망치지 말 걸. 좋은 기억으로 남도록 적당히 둘러대기라도 할걸. 이미 늦었어. 이런 생각을 지금 와서 해봤자,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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