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13


파우스트는 그 길로 곧장 피가로에게 향했다.

“피가로님, 부탁드립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다른 방도가 있었다면 피가로를 귀찮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는 파우스트가 아닌 피가로였다. 파우스트가 치료할 수 없는 부상도 피가로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파우스트의 저주를 순식간에 지워낸 대마법사이자 북부에서 유행하던 전염병의 치료약을 개발할 만큼 뛰어난 의사였다.

파우스트가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은 대다수 피가로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는 피가로가 수많은 중증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직 미숙하고 제약이 많은 파우스트와 달리 피가로는 무엇이든 고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피가로라면 알렉을 낫게 해줄 수 있었다. 그러기에 지금 파우스트가 기댈 곳은 피가로밖에 없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도움을 구할 것을 예상하지 못한 듯 난처하게 웃었다.

“파우스트, 네가 내게 이런 부탁을 할 줄이야. 알렉에게 아무 말도 전해 듣지 못한 거니? 난 이미 경고했어. 그래도 상관없다며 무모하게 밀고 나간 건 그야. 결과적으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으니 그걸로 된 게 아닐까?”

“하지만 팔을 잃을 거예요! 그것도 주로 쓰는 팔을…….”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옷자락을 애절하게 붙들었다. 앙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알렉은, 옛날부터 줄곧 화가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게나 그림을 잘 그리고 좋아하는데, 이제 다시는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알렉은 피가로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파우스트 또한 피가로가 무슨 조건으로 혁명군에 합류했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피가로님의 유일무이한 제자이자 그분이 총애하는 자신의 부탁이라면.

실로 오만방자한 태도였다. 다른 때라면 이런 교만한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파우스트에게는 알렉이 중요했다.

“피가로님, 제 일생일대의 부탁입니다. 알렉을 도와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약속, 약속이라. 피가로가 입속말로 되뇌었다. 비스듬히 돌아선 피가로의 몸이 달빛을 등졌다. 스승의 옆얼굴이 역광을 받아 그림자처럼 검게 물들었다. 미미하게 찌푸린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자리했다.

“약속이라는 말을 쉽게 입에 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파우스트는 대답 대신 머리를 조아렸다. 피가로의 가르침을 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만큼 절박했을 뿐이다.

피가로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성인이라 불리는 스승은 단 한 번도 파우스트 앞에서 감정적으로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파우스트의 고개는 시들어가는 해바라기처럼 계속 아래로 숙여졌다.

피가로는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충분히 뜸을 들였다. 그럼에도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다시 몸을 돌려 파우스트를 마주했다.

“가여운 파우스트, 소중한 친구의 불행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구나. 애석하게도 난 도와주지 못해. 그럴 생각도 없고, 이미 늦었어.”

피가로는 꼿꼿한 허리를 기울여 파우스트와 눈높이를 맞췄다. 파우스트의 얼굴을 손바닥 전체로 감싸고 죄인처럼 숙인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평소에 그러하듯, 다정하게 뺨을 어루만진다.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구나. 원하는 걸 들어줄 수는 없지만, 조금 편하게 해줄까?”

고개를 들어 마주한 피가로의 눈은 상냥한 빛을 띠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역광 탓인지 안광이 흐릿하여 몹시 두려운 느낌을 주었다. 어둡게 물든 눈동자에 독특한 동공만이 빨려 들어갈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옅은 푸른빛이 명멸했다. 더없이 익숙한 스승의 마력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따듯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봄볕처럼 따스한 기운은커녕 살을 에는 북녘의 바람처럼 아주 차가웠다.

파우스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는 어설픈 위로를 바라지 않았다. 무슨 마법을 사용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가로가 의도하는 건 어떤 종류든 간에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를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저절로 몸이 움직여졌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손을 힘차게 쳐냈다. 손등이 손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

피가로는 설마 파우스트가 자신을 밀어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끝내 스승을 당황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번에도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굴다니, 피가로님께 실망을 안겨드렸으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안은 한편, 알렉을 향한 죄책감과 설득에 실패했다는 낙심이 이리저리 뒤섞였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무려 자기 자신을 내걸었음에도 피가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피가로에게 있어 파우스트라는 존재가 특별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무럭무럭 자라난 좌절감이 전염된 저주처럼 파우스트를 집어삼켰다.

”왜 바로 치료하지 않았나요? 피가로님은 알렉의 옆에 계셨잖아요! 어째서 막아주지 않은 건가요?”

”난 알렉에게 충분히 주의를 줬어. 이미 썩어버린 팔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현재의 의학 기술로 가능할 리가 없잖아? 나는 모든 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온 게 아니고, 그는 책임을 져야 해. 그것이 올바른 순리니까.”

“올바른 순리라니.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지금 이 순간,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알고 있었다. 늦었다는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

피가로는 단지 알렉을 치료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경고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 그가 죗값을 치르는 것을 당연히 여겨서 냉정하게 방관하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일이 아니니까. 알렉과 파우스트, 그리고 혁명군의 모든 이들이 목숨을 바치는 혁명은 피가로에게 어느 날 보았던 불꽃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격양되는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울컥 치미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생각을 쏟아내려는 찰나였다.

‘피가로, 그 오만한 자는 우리의 혁명을 소꿉장난 취급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뜻을 이루기 위해 한 몸 바치는 걸 바로 앞에서 직관하면서 적선하듯 자비를 베풀고 있지 않습니까? 꼭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떠한 말이 번개처럼 머리를 강타했다. 파우스트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가로를 욕보이던 동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파우스트는 너무나도 편리하게 모든 일을 피가로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피가로에게 답을 구걸하며 그의 가슴을 파먹으려 들던 무도한 무리와 진배 없이.

아무리 친우의 불운에 괴로웠어도 그렇지, 결코 해선 안 되는 말을 꺼낼 뻔했다. 지나친 압박과 슬픔으로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경애하는 스승을 원망하는 마음이 싹틀 리가 없었다.

한 번 실수를 하고 났더니, 입을 열고 말을 꺼내는 것이 두려워졌다. 파우스트는 입가를 덮은 손을 떼지 못했다.

“파우스트, 역시 너는 용감해. 네 소중한 사람을 위해 나한테도 화를 낼 수 있어.”

피가로는 새파랗게 질린 파우스트의 안색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너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이런 말을 꺼내기에 적절한 시기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피가로는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제자에게 분노하기는커녕 어른스럽게 대처했다. 그 때문에 파우스트는 한층 더 부끄러움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피가로님. 피가로님을 몰아붙일 일이 아닌데…….”

“괜찮다.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네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이해하고 있으니. 하지만 내 입장도 한 번쯤 고려해 줬으면 해. 이 혁명은 너희가 마침표를 찍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거니까.”

“네, 실례했습니다. 그럼 저는 다시 돌아가 알렉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도록 하렴. 지금 그에겐 너의 마법이 필요할 거다.”

피가로는 예상보다 엄격했고, 설득은 실패했다. 알렉의 말대로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시큰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알렉에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저를 믿고 기다리고 있을 알렉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훨씬 무거웠다. 알렉을 마주하는 것이 무서웠다. 위기에 봉착한 알렉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매섭게 노려보던 눈빛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친우의 비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마 평생토록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촘촘하게 쌓아 올린 신의가 박살 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알렉은 결국 팔을 절단했다. 오른팔에 퍼진 저주는 겉면만 아니라 내부를 좀먹기 시작했고, 만일의 희망을 품고 상처를 내버려 두기에 검게 썩어 녹아내리는 팔은 지독한 악취를 풍겼으며 영 상태가 나빴다.

피가로의 말대로 알렉에게는 파우스트의 마법이 필요했다. 치료 과정에서 파우스트는 알렉의 통각을 잠시 앗아갔다. 죽어가는 동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쓰이다가 익숙해진 마법은 돌고 돌아 기어이 가장 소중한 친우에게 사용되었다. 그 사실이 못내 괴로웠던 파우스트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일련의 사고는 혁명군에 크고 작은 파란을 일으켰다. 알렉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강인한 전사였다. 그러나 검을 휘두를 오른팔을 잃은 지금, 더 이상 선봉에 설 수 없었다. 그는 현장에서 물러나 전선 뒤편으로 물러나야 했다.

알렉의 부상을 방관한 피가로의 처사는 수많은 반발을 낳았다. 누가 소문을 낸 건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일이 번거롭게 되었다. 알렉은 최선을 다해 피가로를 비호했으나, 모두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조력자로 불러온 피가로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납득시키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피가로의 정체와 목적을 파헤치다 보면 가장 먼저 파우스트가 딸려 왔다. 긍정적인 상황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비난을 받을 때 파우스트와의 유착관계를 밝힐 수는 없었다.

알렉은 파우스트의 입장을 고려하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주저하는 알렉과 달리 파우스트는 물러섬이 없었다. 질 나쁜 소문과 악의는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사그라들 테지만, 한 번 깎여나간 체면은 돌이킬 수 없다. 파우스트는 존귀한 스승보다 자신의 일신을 우선시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두둔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구나. 굳이 인간과 어울려 살 필요가 없는 나는 괜찮지만, 네게는 적이 생길 거야. 호사가에게 먹이를 주지 마. 파우스트, 넌 잃어버릴 게 많은 사람이다.”

혁명군 내에 피가로가 파우스트의 스승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파우스트 본인과 알렉, 레녹스밖에 없었다. 피가로는 불미스러운 소문에 휘말리기 전에 자신과 거리를 두라고 에둘러 말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두 번 다시 피가로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직접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피가로를 원망하고 그를 탓하던 순간의 기억은 여전히 파우스트에게 깊은 죄악감으로 남아있었다.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를 할 때, 피가로는 독주를 삼킨 것처럼 쓴웃음을 짓는다. 피가로는 다정하고 온후한 사람이니까 분명 그들에게 정을 주었을 것이다.

파우스트는 언제나 피가로를 웃음 짓게 하고 싶었다. 텅 빈 바다에 내버려진 것처럼 허무한 미소가 아니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꼭 자신이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우선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한 번의 실수를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그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처음에는 만류하던 이들도 파우스트의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파우스트는 타인의 아니꼬운 시선에 굴하지 않았으며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끝까지 언짢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노력이 통했는지 머지않아 마음을 돌려주었다.

알렉은 팔을 잃은 뒤로 부쩍 예민해졌다. 부하들 앞에선 평소와 다름없이 의연하게 대처했으나, 파우스트와 단둘이 남으면 사소한 부분에서조차 날 선 태도를 보였다. 환상통을 포함한 자잘한 통증부터 더 이상 전쟁에 나설 수 없는 자신이 무능하다는 착각까지. 알렉은 심리적으로 몰려있었고, 파우스트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친우의 곁에서 떠날 수 없었다.

그 시기의 파우스트는 과민한 알렉을 상대하느라 몸과 마음이 늘 지쳐있었다. 알렉은 이따금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치고, 알렉의 두려움은 명확하게 마법사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법사에게 공격을 당한 것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는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다른 병사들처럼 가끔씩 편집증을 드러냈다.

‘인간은 마법사를 이길 수 없다. 마법사를 동등하게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마법사뿐이다.’

파우스트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주장하던 것이었다. 그 말대로 알렉은 마법사와 그들이 가진 알 수 없는 힘을 두려워했고, 그런 알렉을 진정시킬 수 있는 건 군에 속한 마법사 중에 비교적 강한 축에 속하는 파우스트밖에 없었다.

그즈음이었다. 알렉이 선두에서 물러나면서, 인간 쪽으로 미묘하게 치우쳐있던 군의 지휘권이 마법사 쪽으로 기운 것이.

비어버린 알렉의 자리는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었다. 알렉이 이끌던 부대는 재편성의 여유가 날 때까지 임시로 레녹스가 맡게 되었다. 레녹스는 비교적 초기에 합류한 멤버였고, 알렉의 휘하에 속해있었으며, 유순한 성격과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성정으로 나름대로 인망이 높았다. 권력을 탐하는 소수의 인원이 뒤에서 조금씩 불만을 표출했으나, 어디까지나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당장은 작전의 성공이 중요했다.

레녹스가 알렉을 대신하여 출정하던 날, 파우스트는 레녹스를 막사로 불러 준비를 거들었다. 헐거운 이음매를 조이고 장비를 점검하며 갑주를 걸치는 것을 도왔다.

“레노, 나와 알렉을 위해 승리를 가져다줘.”

”두 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한 목숨 바치겠습니다.”

파우스트 또한 금방 뒤따를 테지만, 알렉의 자리에 대신 서는 레녹스를 상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레녹스의 등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은 채 이마를 붙이고 전해져오는 고동을 듣고 있으려니, 레녹스가 “파우스트님?” 하고 걱정스럽게 이름을 불러왔다.

파우스트는 뒤돌아 서려는 레녹스를 만류했다. 일부러 그의 팔과 어깨를 그러쥐고 정면을 바라보도록 단단히 붙들었다. 얕게 들썩이는 레녹스의 몸은 유달리 따뜻했다. 레녹스가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믿고 따르는 주군으로서 무너지기 직전의 약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살아 돌아와, 반드시.”

파우스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1.

맹렬한 바람에 밀린 억새풀이 일제히 드러누웠다. 드넓은 평야에 수많은 병사가 검은 점처럼 포진해있었다. 평범한 병사와 마찬가지로 무리에 섞여있던 파우스트가 선두로 나왔다. 간결한 동작과 위엄찬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그는 멀리서도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파우스트는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짧게 의논한 다음, 레녹스를 끌어당겨 귀엣말을 건네었다. 레녹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마친 파우스트가 고개를 돌려 신호를 보냈다.

알렉은 그 모든 것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있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왼팔을 들어 신호에 답했다. 동시에 멈춰있던 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뜬 알렉은 열을 맞춰 진군하는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키 큰 나무가 드리운 그늘이 내리쬐는 햇살을 막아주었다. 매서운 추위에 머리카락 틈으로 드러난 귀가 얼어붙고, 겉에 내놓은 손이 곱아들었다.

이유 모를 씁쓸함과 무력함을 느끼고 있을 즈음, 때아닌 훈풍이 불어닥쳤다.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알렉은 거추장스러운 머리칼을 걷어내고 옆을 곁눈질했다. 뒷짐을 진 채 서있는 피가로의 입가가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그의 시선은 멀어지는 병사들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정확히는, 그들을 이끄는 파우스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 테다.

“당신은 어째서 내 옆에 있는 거죠? 나보다는 파우스트의 곁에서 그를 지키고 싶을 텐데.”

“그 애가 누구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파우스트는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야. 내 제자는 혼자서도 잘 하는 아이다. 누구를 상대로도 싸울 수 있고, 쉽게 죽지 않을 정도로 가르쳤지. 당장은 그만하면 충분할 거다.”

알렉은 피가로의 눈에 스며든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간 알렉이 지켜본 피가로는 충격적인 과거를 가진 수수께끼의 인물이지만, 파우스트를 화제로 올릴 때만큼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알렉은 언제나 피가로가 파우스트를 부모의 마음으로 돌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는 애매했다. 피가로는 때때로 파우스트를 야심한 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아침을 밝히는 태양처럼 바라보았다. 아득한 세월의 깊이를 간직한 두 눈에 비치는 파우스트는 어떠한 보석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맹목적인 믿음이자 지독한 환상이며, 어떤 의미로는 피가로 본인이 설파하던 신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토록 손에 넣고자 하는 자신만의 꿈이자 이상 말이다.

“그렇다면, 나를 지키는 것은 파우스트가 시켜서 하는 일입니까?”

“말을 삼가라. 난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아. 허나,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널 비호하는 것은 파우스트가 그러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넌 우리와 달리 약한 인간이니까.”

우리, 명백하게 선을 긋는 단어였다. 알렉은 미간을 슬 찌푸렸다. 파우스트는 당신의 제자이기 이전에 나의 친우인데. 완벽하게 맞춰놓은 대열을 누군가 흐트러뜨린 듯한 불편함이 엄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냉정한 이성은 피가로의 말이 옳다고 동의하고 있었다.

이 사람의 말대로 파우스트는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 인간과 마법사의 수명은 명백하게 차이가 난다. 그들이 아무리 끈끈한 신의로 뭉쳐있다 한들, 모든 관계는 영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끝이 온다. 알렉이 병이나 노환으로 시름시름 앓을 때에 파우스트는 그의 곁을 지킬 것이다. 적어도 알렉이 숨을 거둘 때까지는 계속 함께하며 아낌없는 정을 나눌 것이다. 그러나 낡고 병든 몸에 갇힌 영혼은 점점 무기력해질 것이고, 파우스트는 거동이 불편해진 알렉을 돌보며 서서히 그의 곁을 떠날 준비를 할 것이다.

알렉 그랑벨이라는 한 명의 인간의 삶은 고작 백 년 남짓한 시간으로 종지부를 찍겠지만, 마법사인 파우스트의 삶은 그 이후에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으니까.

그때가 되면 친우로서의 신의와 동료로서의 충의를 모두 다했다며 미련 없이 알렉을 떠날 것이다. 백골이 된 알렉이 차디찬 무덤에 묻힐 때에 파우스트는 두 번째 인생을 찾을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단 하나의 관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파우스트에게는 기나긴 삶을 부여받은 마법사 동료가 있었으며 스승인 피가로가 있었다.

소중한 친우의 죽음에 슬퍼하기야 하겠지. 너무 슬퍼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몇 년을 허송세월로 보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그뿐이다. 알렉의 사후,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앙을 떠날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아닌 우리의 왕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스승을 따라 그와 함께 북녘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추억으로 남는 것과 계속 함께 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후자였다. 내가 없는 곳에서 웃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그리고 서서히 나를 잊어가겠지. 그렇게 수많은 사람과 얽히고 얽히며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이름조차 남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인생에 스쳐간 수많은 친구 중 하나로 기억될 수도 있다.

그것이 아마 서로 다른 우리에게 준비된 미래일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다르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피가로를 보고 있으면 어렴풋한 짐작은 확신이 되어 자리매김했다.

“피가로님은 당신을 파우스트와 같다고 생각하는군요.”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곤란하다. 슬슬 표정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다. 알렉은 침착하게 손을 들어 피가로에게 보이는 얼굴 반쪽을 가렸다. 그대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함을 어렵사리 삼켰다. 무감각한 피가로의 시선이 느껴지며 입안이 바싹 말랐다.

피가로는 짧은 세월을 살아가는 얄팍한 인간의 감정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알렉은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거북했다. 겉으로는 무해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나, 피가로는 인간의 입장에서 너무나도 거대한 포식자였다.

아무리 자비로워도 결국 괴물은 괴물일 뿐. 피가로 앞에서는 어떠한 내색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알렉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가로는 다시 기분 좋게 입가를 허물어뜨렸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분명 같아질 거다. 그것이 유구한 삶을 살아가는 마법사란 존재니까.”

그래, 언젠가는. 피가로는 알렉으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까마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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