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흐름을 늦춘 것은 훌륭한 판단이었다. 단순히 진군을 늦춘 것만으로 경직된 분위기와 사람들의 피로도가 한결 덜어졌다. 예상대로 중앙성이 존재하는 옛 왕도에 가까워질수록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대다수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모두와 함께하는 미래에 명예로운 승리가 약속되어 있다고 믿었다. 믿음직한 동료와 연속된 승리에 도취되어 의식하지 않는 사이 나태해졌을지도 모른다. 순간의 안일함은 가장 뼈아픈 실책을 낳았다.
“알렉님, 물러서십시오! 적들이 포위망을 좁혀옵니다!”
느리지만 큰 피해 없이 착실히 나아가던 도중,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변수가 된 것은 붕괴성의 돌이었다. 붕괴성의 돌은 세계 각지에 있다고 전해지지만, 전쟁에 사용할 정도로 유의미한 양을 모은 것은 그들이 처음이었다.
붕괴성의 돌은 마법 생물이나 마법사를 자극한다. 보통은 소량으로 치유나 심신 해방에 사용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기가 거칠어지고 흉포해지기도 한다. 상대 진영에서 붕괴석의 돌을 적극 활용하면서, 협공하던 인간과 마법사 부대 사이의 지시가 틀어지게 되었다.
잘 짜인 진형이 무너지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 파우스트가 이끄는 마법사 부대와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미리 정해놓은 신호를 올려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적이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통에 알렉이 속한 부대는 계속해서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팽팽하게 맞서고는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조금만 버텨! 금방 지원이 올 거다!”
파우스트를 향한 알렉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비록 그들은 갇혔으나, 파우스트라면 일찍이 포위망을 벗어났을 것이다. 반대로 바깥쪽에서 밀어붙이고 있을 파우스트를 생각하면 이 시점에서 후퇴를 할 수는 없었다. 위기를 기회로, 오히려 밀어붙일 시기였다.
“알렉, 이번에는 퇴각하는 게 나을 거다.”
그러나 피가로의 생각은 달랐다.
“조금 전에 마법사에게 부상을 입었겠지. 그대로 방치하면 위험할 거야.”
피가로는 그 말과 함께 알렉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알렉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오른쪽 어깨 아래, 팔뚝에 감아놓은 붕대에 옅은 핏기가 비쳤다.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한 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뻐근해지며 움직임이 둔해졌다.
붕대에 감싸인 환부는 살짝 부풀어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마법으로 당했으니 평범한 상처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지난번 파우스트를 삼켰던 저주와 비슷한 종류일지도 모른다. 슬슬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불편한 것이, 피가로 말대로 조만간 완전히 굳어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손쓸 수 없게 되기 전에 일단 물러나서 파우스트에게 치료를 받자. 모두를 구하는 건 어렵지만 너 하나라면 이곳에서 빼내줄 수 있어.”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 단체의 수장된 자가 부하를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제 무모한 행동의 결과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쉽게도 말하는군. 반드시 후회할 텐데.”
두 사람은 양쪽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각자 쳐냈다.
“중앙의 아이들은 정말이지 고집이 세.”
우두머리의 위치를 확인한 적들의 공세가 매서워졌다. 이쪽으로 화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잔챙이는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알렉은 지금 죽어선 곤란하다. 혀를 찬 피가로가 돌풍을 일으켰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병사들이 주춤했다.
알렉이 달라붙는 병사들을 두엇 베어내고, 피가로는 그를 끌어당겼다. 시야가 가려진 사이에 빈틈을 찾아 빠르게 이동했다.
“넌 나의 정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겠지. 내게 도움을 구걸하진 않는 것이냐.”
“피가로님은 어차피 손을 빌려주지 않으시겠죠. 처음부터 그런 조건이지 않았습니까. 피가로님은 말을 번복하는 분이 아니시니…… 동료의 목숨이 달린 일에 자존심을 세울 틈은 없습니다만,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일에 무조건 매달리는 것 또한 원치 않습니다.”
알렉은 눈가에 튄 피와 땀을 닦아내며 피가로를 올려다보았다.
“피가로님은 파우스트의 부탁을 받아 저를 보호하고 계시죠. 그런 피가로님이 먼저 행하지 않는 일이라면 어디든 활로는 있을 것입니다. 더 많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저는 그곳을 뚫겠습니다!”
“그 또한 옳다. 스스로 각오했다면 더는 권할 필요가 없겠지.”
보검의 칼날에 묻은 피가 쨍한 햇살을 받아 번들거렸다. 피가로는 알렉의 결정을 존중했다. 애초에 혁명의 주체는 알렉과 파우스트다. 알렉이 결정을 내렸다면 피가로는 그에 따르는 것이 응당하다.
아주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알렉이 마법사였다면 자신의 제자는 둘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숭고한 의지를 품은 혁명도, 이러한 만남도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 당초 의미 없는 가정이다.
파우스트가 알렉을 찾은 것은 전투를 마친 늦은 저녁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늦었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나자마자 바로 온 거였다.
알렉이 쉬고 있는 막사에 도착했을 무렵, 파우스트의 등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뛰었더니 땀이 났다. 아직도 조금 전 느낀 불길한 감을 떠올리면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다급히 달려온 그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막사 앞에 섰다.
막 천막을 걷고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피가로 가르시아, 또 그 사람이군요. 그 사람에게 이런 중요한 일을 맡겨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파우스트는 익숙한 목소리가 뱉어내는 이름에 멈칫했다. 누군가 큰 소리를 내는 것을 시작으로 안쪽에서 나누는 대화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그 사람은 지나치게 제멋대로입니다. 알렉님의 옆을 지키면서 이런 심각한 부상을 입는 것을 방관하다니! 저희라면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그 자는 대체 뭡니까? 파우스트님의 지인이라고 하지만, 저희는 그 자에 대해 무엇 하나 알지 못합니다. 그저 강력한 힘을 가진 마법사라고밖에…….”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으면 불미스러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요. 일부러 막지 않은 것이 더 수상쩍게 여겨집니다. 다른 진영에서 보낸 첩자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파우스트는 친애하는 스승에게 향하는 원색적인 비난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피가로, 그 자는 대체 무슨 속셈이랍니까? 그 오만한 자는 우리의 혁명을 소꿉장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 자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힘을 가졌다는 것도, 수많은 지혜와 경험으로 무장했다는 것도 알겠습니다만. 모두가 뜻을 이루기 위해 한 몸 바치는 걸 바로 앞에서 직관하면서 적선하듯 자비를 베풀고 있지 않습니까? 꼭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같은 마법사 중에는 그를 두려워하는 이도 있습니다. 인간보다 강한 마법사가 두려워할 정도의 존재라면 얼마나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듣기로 강한 마법사는 하나같이 변덕스럽다던데, 그 사람이 변심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피가로는 혁명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지인이랄 게 특별히 없었다. 면식 없는 타인이 가득한 이곳에서 피가로를 보호할 사람은 파우스트밖에 없었다.
피가로가 사실이 아닌 일로 억울하게 모욕을 당한다면 당연히 그의 제자인 자신이 나서서 해명을 해야 한다. 설령 피가로 본인이 개의치 않더라도 그를 감싸는 것은 파우스트 역할이었다.
파우스트는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나서서 매섭게 몰아치는 파도로부터 은사를 지키는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한창 적군과 뒤섞여 전투를 벌이던 중에 느낀 불안한 감의 이유도 확인해야 했다.
일분일초가 귀했다. 말도 안 되는 오해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다. 결심을 마친 파우스트가 힘차게 천막을 걷으려고 할 때였다.
“피가로를 의심하는 건 그만둬. 그거야말로 무의미한 짓이다.”
파우스트는 행동을 멈추고 알렉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불쑥 치고 들어온 친우의 목소리에 괜히 반가워졌다. 목소리에 담긴 지치고 피로한 기색만 아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피가로의 신원은 나와 파우스트가 보장할게. 굳이 말을 얹자면, 피가로는 처음부터 나를 돕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니야. 그는 속세에 속하지 않은 마법사로, 쌓아온 세월과 지식의 깊이는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알렉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뜸을 들였다. 파우스트는 알렉이 미간을 짚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간 지켜봐서 알겠지만, 이따금 전선을 둘러보며 조언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을 받고 있어.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는 거야. 예지를 구하기 위해 모셔온 현인에게 무례한 언행은 삼가도록 해.”
권하는 것처럼 들려도 사실상 명령이었다. 알렉의 단호한 말에 고조된 분위기가 식고, 언성을 높이던 사람들이 잠잠해졌다. 파우스트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마땅히 자기 사람을 챙기는 알렉의 인품이 친구로서 자랑스러웠다.
알렉이 충분히 할 일을 해주었으니,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파우스트는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여기에 모여 있었구나.”
파우스트는 막사 안에 있는 면면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췄다. 예상대로 전부 아는 얼굴이었다. 각 부대를 이끄는 대장들이다. 누군가는 불편한 듯 파우스트의 시선을 피했고, 과반수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봤다. 파우스트는 그들의 적대적인 시선에 흠칫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깨동무를 하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그런 그들이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눈초리를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순 말문이 막힌 파우스트는 굳어버린 머리를 굴려 무슨 말이든 꺼내려고 했다.
“우연찮게 밖에서 얘기를 들었어. 그건…….”
그러나 파우스트는 끝까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도중에 알렉이 말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다음에 이야기하자. 파우스트와 단둘이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자리를 비워줄 수 있을까?”
“네, 푹 쉬십시오.”
그들은 군말 없이 인사를 하고 막사를 나갔다. 그중 한 사람이 입구로 향하며 파우스트와 어깨를 부딪쳤다. 가볍게 부딪친 정도라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기분은 좋지 않았다. 힘든 전투 끝에 만났는데 살갑게 굴진 않을망정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변한 동료들의 태도에 무척 쓸쓸하고 괴로워졌다. 파우스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가슴 근처에 퍼지는 둔통을 인내했다.
알렉은 사람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인기척이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파우스트, 역시 네가 와줄 줄 알았어.”
다정한 말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파우스트는 황급히 알렉에게 달려갔다.
“알렉, 괜찮아? 네게 건 수호의 마법이 깨지는 느낌이 들어서…….”
“아아, 그래. 안 그래도 네가 준 부적이 부서져버렸어.”
알렉은 굳게 쥔 왼손을 펼쳤다. 상처투성이 손바닥 위에 산산조각 난 돌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오래전, 파우스트가 알렉의 안녕을 기원하며 건네준 부적이었다.
“부적은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줄게. 그러니 어서 다친 곳을 보여줘.”
파우스트에게 붙들린 알렉이 어설프게 웃었다. 부하들 앞에서는 애써 의연한 척했지만, 믿음직한 친우와 단둘이 남으니 동요를 감출 길이 없었다. 알렉이 약한 모습을 보일수록 파우스트는 초조해졌다.
알렉은 몸을 돌려 그늘에 숨기고 있던 오른편을 드러냈다. 부상을 입은 것은 오른팔인 모양이다.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파우스트는 망설임 없이 환부를 덮은 천과 붕대를 걷어냈다.
“오, 신이시여…….”
상처를 확인한 파우스트는 입을 틀어막았다.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알렉의 오른팔은 반쯤 썩은 상태였다. 상처를 살피는 파우스트의 눈동자가 엉망으로 흔들렸다. 순식간에 심각해진 친우의 낯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 알렉의 입가가 더욱 뻣뻣해졌다.
파우스트는 그제야 정신을 다잡았다. 알렉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환자였다. 절망적인 기색을 드러내면 지금보다 더 상황이 악화될 것이다. 파우스트는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알렉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가만 보면 전신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피부가 썩어가는 과정은 필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신을 놓지 않고 끝까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부하들을 독려하고 분노한 그들을 진정시켰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평범한 시골 청년이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정신력이었다.
파우스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는 모습에 알렉이 하하, 어깨를 들썩이며 힘없이 웃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파우스트, 마법사는 정말 굉장해. 인간은 하지 못하는 일을 너무나 손쉽게 해내고 말아.”
알렉은 늙어 죽어가는 고목처럼, 검고 푸르스름하게 변색되어 썩어가는 피부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허공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더니, 그대로 팔을 베였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그 마법사는 피가로님이 어떻게든 해주셨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전쟁 한복판에 끼어들 정도로 호승심이 강한 마법사라고 하더군. 피가로님은 얌전히 후퇴하고 네게 치료를 받으라 했지만, 이렇게 중요한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마당에 물러설 수는 없지. 그랬다간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들을 대면할 명목이 없잖아…….”
저주에 잠식된 팔은 악취를 풍겼고, 피와 진물이 뚝뚝 떨어졌다. 알렉은 살이 녹아내려 뼈가 드러난 오른손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내게는 파우스트, 네가 있으니까.”
해사하게 미소 짓는 얼굴은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광기가 느껴졌다. 알렉은 자상하게 웃으며 파우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치료법보다는 효과적이지. 불편하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지 않아도 마법이라면 순식간에 낫게 할 수 있어. 나의 친우, 파우스트여. 수없이 많은 동료의 목숨을 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너의 마법이라면 분명 무엇이든 할 수 있겠지.”
놓치지 않도록 돌조각을 움켜쥔 그는 파우스트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알렉의 손이 스친 뺨에 미량의 핏물이 묻어났다. 파우스트는 알렉의 일그러진 눈매와 손의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하필 이 순간, 피가로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던 것이 떠올랐다. 피가로는 꽤 자주 파우스트를 기특하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파고드는 별사탕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었고, 굳은살 하나 없이 부드러운 손은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 기억에 이끌린 파우스트는 반사적으로 알렉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알렉은 그것을 무언의 동의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는 눈에 띄게 안심하여 한결 풀어진 낯으로 말했다.
“자, 파우스트. 내 팔을 치료해 줘. 이제 나를 고통 속에서 해방시켜줄래?”
“……감쪽같이 낫게 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해볼게.”
솔직하게 말하면 파우스트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막 상처를 입었을 때면 모를까, 그때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으로선 어떻게 손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알렉의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그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오로지 그런 일념으로 무엇이든 시도해 보기로 했다.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니, 겨우 그 정도의 각오로는 부족하다. 설령 불가능하더라도, 능력 밖의 일이라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렉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 소중한 친우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지 않으면.
해주를 먼저, 아니, 아니다. 지금은 해주보다 치료가 우선이다. 팔에 깊숙이 남은 자상과 녹아내린 살점을 어떻게든 하고, 환부를 소독한 다음에 해주를 하는 편이 나았다. 파우스트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외면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무작정 마력을 쏟아냈다.
그러나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치료조차 순탄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팔을 뒤덮은 다른 마법사의 마력부터 걷어내야 하는데, 묵은 저주와 뒤섞여 온통 알 수 없게 되었다.
애초에 목숨에 영향을 줄 정도로 치명적인 저주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저주는 오른팔에만 머무를 뿐, 더 이상 번지거나 전염되지 않았다. 그저 신체 일부를 망가뜨리기 위한 용도로 치밀하게 짜인 저주였다. 알렉이 마법사였다면 몸 안에 있는 마력을 활성화시켜 어떻게든 해봤겠지만…….
마력을 쏟으면 쏟을수록 파우스트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끝에 가선 거의 산송장처럼 희게 질려있었다.
“못해, 무리야, 난, 나로서는 도저히…….”
파우스트의 비명 같은 말을 알렉은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알렉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파우스트. 이거 봐, 내 팔은 마법사의 저주에 당했을 뿐이야. 절단되거나 으스러진 게 아니라고. 전에 피가로님이 저주를 씻고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본 적 있어. 아직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면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겠지? 빨리 너의 마법으로 어떻게든 해줘. 늘 그렇게 해왔겠지?”
“아니, 아니야. 알렉, 우선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줘.”
알렉은 파우스트를 믿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함께 해온 친우로서, 뜻을 함께한 동료로서, 등을 맞대고 싸운 전우로서, 어떤 의미로는 가족보다 의지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알렉을 실망시키고 말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서 숨이 턱 막혔다.
“미안, 정말 미안해. 이 정도의 저주는 나로서도 불가능해. 바로 처치를 했다면 모르겠지만, 시간이 너무 흘러서…… 그래도, 피가로님이라면! 내가 피가로님에게 부탁해 볼게!”
뒤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커졌다. 파우스트는 그만큼 절박했다. 평정을 잃은 파우스트가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 알렉이 작게 이를 갈았다. 알렉은 무서울 정도로 눈을 부릅뜬 채였다. 피로에 찌든 눈가가 가늘게 떨리더니, 왼손에 쥔 부적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안으로 곱은 손아귀의 힘을 풀자, 부서진 부적의 조각이 손 틈새로 흘러내렸다.
“내 몸을 지켜줄 거라더니.”
알렉이 몸을 들썩이며 경련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벌어진 입술로 독기에 찬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이딴 게, 대체 뭐가 부적이라는 거야. 부적이라면서 전혀 지켜주지 않았잖아.”
그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파우스트를 노려봤다.
“거짓말을 했구나, 파우스트. 허황된 말로 나를 안심시킨 거야.”
직전에 서늘하게 쳐다보던 동료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들과 알렉이 겹쳐 보였다. 평생을 쌓아온 신의가 그렇게 쉽게 변질될 리 없는데도.
“맹세코, 거짓말이 아니야. 부적은 충분히 효과를 발휘했어. 단지 내가 약해서 그래. 부적에 마법을 건 내가 부족해서 저주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한 거야.”
파우스트는 침착함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반면 알렉은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체 일부, 그것도 팔을 잃을 상황에 처했다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애먼 불똥이 튀지 않도록 친구인 자신이 단단히 붙잡아주어야 했다.
―사실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알렉이 자신을 탓하고, 부적에 담긴 진심을 깎아내리는 것이 몹시 괴로웠다. 얇은 가슴 안쪽에서 걱정과 두려움에 숨죽인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파우스트는 못 견디게 괴로울 때마다 고통스러운 알렉의 모습을 마주했다. 알 수 없는 저주에 맞서 싸우는 것도, 몸집을 부풀린 공포에 겁에 질린 것도 자신이 아닌 알렉이었다. 언젠가 저주를 뒤집어쓴 자신을 알렉이 따뜻하게 안아주었듯이, 그 또한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친우를 이끌어줘야 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지금 당장 피가로님을 불러올게.”
그때, 알렉이 자리를 뜨려는 파우스트를 붙잡았다.
“기다려, 파우스트. 피가로님은 나를 돕지 않을 거야. 이미 정해진 일로 그 사람에게 빌지 마. 나 때문에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어. 어차피…….”
“알렉, 그렇지 않아. 날 믿어. 피가로님을 불러올게. 반드시 너의 팔을 낫게 해줄 테니까.”
차갑고 땀에 전 손이 비정상적인 악력으로 파우스트의 손을 가두었다. 파우스트는 알렉의 손을 한차례 맞잡은 뒤, 부드럽게 뿌리쳤다. 계속 매달릴 것 같았던 알렉은 의외로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는 의자에 기대어 반쯤 무너진 채, 비통한 얼굴로 파우스트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지만, 낯선 표정이었다. 알렉이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지 깊이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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