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수상쩍게 허둥거렸고, 알렉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난, 피가로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 맞다. 그랬었지. 나도 참, 경황이 없어서…… 이만 가볼게.”
그러는 너는? 너는 왜 여기서 나와?
제대로 묻기도 전에 파우스트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파우스트는 알렉을 남겨둔 채 복도 저편으로 달려갔다. 꽉 막힌 것은 말문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떠나는 파우스트를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알렉은 멀어지는 파우스트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황당한 건 황당한 거고, 여기까지 온 목표를 잊어선 안 되었다. 알렉은 얼떨떨한 심정을 어렵사리 내리누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 안쪽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뒷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이 방에서 급하게 뛰쳐나온 누구와는 달리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피가로님.”
“서 있지 말고 앉지.”
창가로 걸어간 알렉은 피가로의 맞은편에 앉았다. 피가로는 친히 잔을 채워주었다. 일련의 동작이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오늘따라 몹시 기분이 좋아 보인다.
피가로가 혁명군에 합류한지 대략 반년, 이토록 들뜬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하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혁명군의 수장으로서 친화력은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는데도, 피가로에 대해선 무엇 하나 알지 못했다.
피가로는 속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파우스트는 한사코 부정하지만, 피가로가 풍기는 분위기는 도저히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마법사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다. 피가로는 거만하고 오만한 태도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이 세상에 관리자가 있다면 아마 그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것이다.
피가로가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은 파우스트와 관련된 상황뿐이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못내 안심이 되었으나, 지금은 잘 모르겠다. 소중한 친우가 괴팍한 마법사를 스승으로 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한편, 오로지 파우스트만을 바라보는 피가로의 시선에 간혹 뒷목이 서늘해졌다.
알렉은 잔을 들어 향을 맡고 찻물을 입에 댔다. 그는 피가로의 기분이 아닌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알렉이 앉기 전까지 피가로의 맞은편은 잔이 놓여있지 않았다. 이로써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첫 번째, 파우스트는 함께 차를 들지 않았다. 두 번째, 피가로에게 다과상을 차려준 것은 파우스트였다. 피가로가 준비했다면 파우스트의 잔을 빼놓을 리 없으니까.
정신없이 옷매무새를 바로잡던 파우스트를 떠올렸다.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그 녀석은 자기 옷차림을 다듬지도 못했으면서 이 사람부터 챙긴 거구나. 그렇다는 건 정말 이곳에서 밤을 보내기라도 했단 말인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미묘하게 찝찝해졌다.
파우스트가 어떤 사람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렉은 파우스트의 오래된 친구이자 부모만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부모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파우스트가 알렉을 아는 만큼, 알렉 또한 파우스트를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뜻을 함께 할 정도로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보기보다 관계에 서투른 구석이 있었다. 그의 인생에 가벼운 만남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자신의 스승을 상대로는. 하물며 직전 알렉이 떠올린 어떠한 망상은 더더욱 가망이 없었다. 단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람을 사귀느니 차라리 혼전순결을 외칠 사람이었다.
파우스트가 피가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한없이 결핍에 가깝다. 혁명군에 몸담고 험난한 전쟁터를 전전하고 있다 하나, 그들은 아직 한참 어렸다. 파우스트는 어릴 적 집을 나간 친아버지 대신, 피가로에게 본인이 가지지 못한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문제는 피가로의 생각을 전혀 모르겠다는 건데…… 알렉은 가늘게 뜬 눈으로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피가로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제자가 깔아준 판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알렉의 눈빛이나 비정상적인 침묵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물어보는 것이다. 알렉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피가로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계획의 진행 여부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질문의 의중을 모르겠군.”
“일전에 말씀드린 건 말입니다.”
잔에서 입을 뗀 피가로가 아, 하고 웃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래 봐도 교육에는 조예가 깊어서, 저 고지식하고 숙맥인 아이를 상대로도 착실히 나아가고 있다.”
“……그렇습니까.”
차마 무엇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돌아올 답도 무서웠지만, 당초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체면을 구기는 것이다. 피가로가 무슨 대답을 하든 어차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답답함이 영 내키지 않았다.
가르치라고 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다던가, 파우스트가 동의했다는 말이라도 나오면 그땐 정말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이전에 들은 제자에게 유별난 집착을 품는 괴짜 마법사의 건도 동시에 생각나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그 부분은 안심해도 돼. 네 계획을 훼방 놓을 생각은 없으니.”
그 말에 아무런 걱정 없이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피가로 가르시아가 이유 없이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변덕스러운 마법사라는 점이다. 그것도 명백히 갑의 입장에 있는. 그래서 알렉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12.
가뭄과 전염병으로 최악의 여름을 보내고, 풍족하진 않아도 그나마 숨통 정도는 트였던 가을이 지나갔다. 몇 번의 전투와 재정비를 갖추는 사이, 중앙에도 조금 이른 겨울이 찾아왔다.
혁명을 결심하고 맞이하는 두 번째 겨울이었다. 첫해는 여러모로 미숙한 탓에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올해는 확연히 달랐다. 착실하게 쌓인 경험, 수많은 동료의 합류, 그에 더해 뜻밖에 힘을 보태주는 대마법사까지.
스승의 가르침으로 부쩍 성장한 파우스트는 명실상부한 일등공신이었고, 피가로는 직접 참전하진 않았지만 예지를 내려주거나 부상자를 치료하는 등 할 수 있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다른 마법사들의 힘을 이끌어내니 모두의 성장세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겨울은 정말이지 점령전을 벌이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알렉을 필두로 한 혁명군은 현재 중앙성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향할수록 추위는 강해지고 바람은 매서워졌다. 오죽하면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남부 지방 사람들은 하루 종일 시름시름 앓을 정도였다.
물론 행동이 굼떠진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온화한 기후 속에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은 목표를 앞둔 군대의 고된 일정을 따라가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피로를 호소하는 이와 병에 걸린 환자가 속출했다.
결국 혁명군은 겨우내 진군을 늦추기로 결정했다. 그에 맞춘 것처럼 때마침 묘한 소문이 들려왔다. 원래라면 살아남은 옛 왕조의 후예가 거주하고 있을 중앙성 일대에서 최근 수상쩍은 움직임이 보인다고 한다. 무척 강력하고 손속에 자비가 없는 마법사의 이야기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 매우 신경 쓰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무리를 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란 것이 원래 그렇다. 흐름을 놓치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조급증을 내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자잘한 부분이야 인간들의 문제고. 일단은 혁명군에 속해있으나, 그들과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피가로는 시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한가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내리는 눈을 보다가 한 번쯤 북쪽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북쪽 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가끔 그리워하기는 해도 각별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곳에 두고 온 게 많을 뿐, 나고 자란 고향이라고 특별 취급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어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북쪽 국가에서 지낼 때도 그랬다. 그곳만의 문화라고 해야 할까. 힘을 중시하는 기질이 호쾌하면서도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꽤 자주 거리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북녘 생각이 난 것은 순전히 어떤 마법사 때문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마음 맞는 오랜 친구도, 자기들 멋대로 싸움박질하는 얄미운 스승도 아니고, 고독도, 즐거움도, 은혜도 모르는 시건방진 동생제자가 떠올라서.
그도 그럴게, 예로부터 그런 박정한 녀석을 챙기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오즈, 오랜만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북쪽에서 맑은 날을 보기는 매우 드물다. 피가로는 그런 특별한 날에 술 한 병을 들고 동생제자를 찾았다.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처럼 갑작스럽게 성에 방문한 피가로가 발코니에 사뿐히 내려앉을 때, 오즈는 침실의 벽난로 앞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즈가 응접실에 없는 것을 확인한 피가로는 거리낌 없이 침실로 침입했다.
“기분도 좋고 자랑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어. 기쁨은 여럿이서 나눌 때 더욱 커지는 법이니까.”
방에 들어와 오즈가 있는 것을 확인한 피가로는 익숙하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오즈는 묵묵부답이었다. 알아보고 환영해 주지는 않더라도 하다못해 왜 왔냐고 묻는다던가, 이름을 부르지조차 않는다. 하기야, 애당초 찾아온 손님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는 녀석한테 무엇을 바랄까.
입을 비죽인 피가로는 탁자에 가져온 술병을 올려놓고 잔을 꺼냈다.
“너도 참, 대체 언제부터 계속 이 상태로 굳어 지낸 거야? 자기가 석상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지금이 무슨 계절인지는 알아? 외로운 너를 챙겨줄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술병을 깠다.
“어디 보자, 제자를 들였다는 말은 전에 했었지?”
그는 바로 잔을 채워 오즈 앞으로 밀었다.
“그간 제자랑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 사적인 이야기도 잔뜩. 나는 말하기보다 듣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눈치를 살피지 않고 서로를 알아가는 게 얼마 만인가 싶더라고. 다 좋은데 내 제자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야. 어찌나 사람을 잘 믿는지, 고작 한 해 알고 지낸 나한테 약점이 될만한 이야기도 서슴없이 해버린다니까. 뭐, 타인의 약점을 앞세워 죽을 때까지 싸우는 짓 같은 건 북쪽 마법사 말고 보통은 안 한다지만.”
잔을 들어 혼자 목을 축인 피가로는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오즈를 상대로 계속 말을 이었다.
“드디어 완전히 마음을 놓은 거야. 믿고 기댈 만큼 나를 신뢰하게 된 거지. 놀랍지 않니? 누군가의 환심을 산다는 건 이만큼 어렵고 즐거운 일이란다.”
피가로는 조심스럽게 이불 속에 숨어들던 제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말 말도 못 하게 귀여웠지. 이미 씻겨 내려간 저주의 영향 같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같이 있고 싶었다니. 존경하는 스승 옆에서 잠을 청하는 건 도저히 무리였는지 계속 달아오른 얼굴로 잠든 시늉이나 하고. 밤새 놀리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혼이 났더랬다.
피가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의자 밑으로 다리를 흔들었다. 파우스트를 생각하면 장소와 상황을 막론하고 기분이 들떴다. 사랑스러운 제자의 존재는 어떠한 약보다 효과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잘 될 예감이 들어. 드디어 내 오랜 숙원을 이루는 거야. 더 이상 번거롭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 지긋지긋한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오즈의 시선은 타오르는 불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즈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넌지시 눈길을 돌린 피가로가 이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즈, 넌 네가 세계정복을 그만둔 이후에 세계가 어떤 꼴을 맞이했는지 궁금했던 적 있어?”
오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그는 굉장히 무관심해 보였다. 원래 오즈는 어디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온 것도 아니고, 이게 당연하다. 피가로는 뱃속에서 우글거리는 벌레를 무시하며 뻣뻣해진 표정 근육을 이완시켰다.
“네가 세계정복을 하겠다며 온통 헤집어놓은 탓에 지금 세상은 엉망이야. 인간과 마법사는 서로를 배척하고,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이며, 백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붉게 물든 대지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어. 이제 만족해? 그토록 미운 세상을 반쯤 으스러뜨려서. 제대로 희열을 느끼고 있는 걸까?”
기분 탓일까. 일순 오즈가 쳐다보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건 죄책감이 만들어낸 그럴듯한 환상일 뿐이다. 피가로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같이 저질러놓고 나만 빠져나간다니, 그런 건 비겁하지. 걱정 마. 나만 살겠다고 너를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오즈는 아주 조금 몸을 움직였다. 불편한 자세를 고치듯이, 피가로 쪽으로 약간 돌려 앉았다. 그러나 마침 갑갑한 심정을 숨기기 위해 눈을 감은 피가로는 보지 못했다.
“너는 여전히 말수가 적구나. 아무리 너라도 방금은 충분히 감동받을 만하지 않았나? 한 마디도 안 하고 듣고만 있다니.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너만 계속 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네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상관없지만…… 스노우님과 화이트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어? 두 분은 성가신 구석이 있으니, 직접 찾아가진 않더라도 연락 정도는 성실하게 받아야 해. 전에도 얘기했었지?”
오즈는 무감정한 얼굴로 제 앞에 높인 잔을 내려다보았다. 손깍지를 낀 피가로는 초조하게 열 손가락을 얽었다. 그는 뼈가 도드라진 손등을 긁어대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잔에 담긴 술을 벌컥 들이켰다.
“……이봐, 오즈. 대답을 해. 뭐든 좋으니까 일단 말을 하라고.”
피가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욱하고 치받는 감정을 삼키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원인 모를 짜증만 치솟았다. 오즈를 상대할 때는 늘 그랬다.
“내 말 안 들려? 대답하라니까!”
피가로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에 놓인 잔이 들썩이며 미량의 술이 흘렀다. 당연하게도 전혀 입에 대지 않은 오즈의 잔이었다. 참 얄밉기도 하지. 분을 못 이긴 자신이 시근거리는 소리만 들리고, 맞은편의 오즈는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젖힌 피가로는 느리게 숨을 몰아쉬며 몇 번이고 마른 세수를 했다.
오즈는 제어되지 않는 짐승이다. 당장은 종잡을 수 없는 변덕으로 내버려두고 있지만 언제 이쪽을 삼키려 들지 모른다. 오즈를 대할 때는 언제나 친절하게, 불쾌하지 않은 선에서 충고하고 타이르며 정을 느끼게끔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 먼 훗날 오즈의 화살이 우리에게 향하지 않을 수 있다. 너무나 기나긴 세월을 되새김질하여 지겨울만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피가로는 오즈가 미웠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가 무서웠고, 어떠한 말과 행동에도 응해주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웠으며, 자신의 손을 뿌리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피가로의 독단적인 호의였다고 해도,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응당 돌아와야 할 반응이 오지 않는 것이 못마땅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거야? 뭐, 그러겠지. 넌 남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오즈와 대화를 나누면 언제나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피가로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고, 오즈는 묵묵히 그것을 듣는다. 그래서 오즈랑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오즈는 먼저 다른 사람을 찾지 않으니, 피가로가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다면 만날 일이 없었다. 가끔 스노우와 화이트에게 호출당해 두 사람의 성에 가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하면 된다.
형제제자라지만 결국은 동문이라는 연관성 아래 억지로 묶인 것. 나중에 심사가 뒤틀린 오즈가 세상을 통째로 쓸어버리든 말든, 피도 안 이어진 녀석 따위 마음에서 밀어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래, 분명 그거면 되는데. 일부러 오즈를 피했던 적도 있지만, 결국은 먼저 찾아가게 되었다. 왜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좋아서도 아니고, 외로워서도 아니고. 굳이 따지면 주제에 맞지 않게 연민한 탓일까.
“넌 옛날부터 그랬지. 정말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한 번 시작한 말을 멈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성은 그만하라고 종용하는데도 오즈 앞에 서면 기어이 감정이 앞서게 되었다. 하나뿐인 제자의 눈에 비치는 멋지고 상냥한 스승의 모습처럼, 계속 그런 사람으로 있고 싶은데 잘되지 않았다.
“넌 인형이나 다름없구나. 그저 사람의 몸을 부여받았을 뿐인, 마음 없는 인형과 마찬가지다.”
오즈는 파우스트와 다르다. 그 성실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와는 조금도 비교되지 않는다. 오즈와 대화하고 있으면 공연히 화만 났다. 훌륭하고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오즈를 상대로는 그럴 수 없었다. 사실은 오즈보다 오즈를 용납하지 못하는 제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오즈를 바꿀 수도,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도 없다면 그를 멀리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빛이 있기에 그림자도 있다. 이를테면 파우스트는 빛이고, 오즈는 그림자 같은 거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생제자에게 무례한 말이지만, 적어도 피가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해하지 마. 화를 낸 게 아니야. 그냥,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져서…… 오즈, 너도 괜찮지?”
“……그래.”
오랜만에 듣는 오즈의 목소리였다. 대답을 하라고 그렇게 쪼아댔으면서 정작 그토록 원하는 것을 받자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서 찾아온 건 당연하게도 자괴감이었다.
오즈는 왜 이런 굴욕을 감내하는 걸까? 그 정도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 이미 한 번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을 밀어버렸으면서, 왜 주기적으로 와서 참견하는 형제자는 두고 보는 걸까? 불쾌하다면 까짓것 눈앞에서 치워버리면 그만일 텐데. 항상 그렇게 보기 싫은 것에 뚜껑을 덮듯이.
“너를 탓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된 걸까?”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피가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는 턱을 괸 채 빈 잔을 바라보다가 다시 머리를 들었다.
“역시 너랑 엮이면 되는 게 없다니까. 너도 나를 비슷하게 생각하지? 매번 찾아와서 귀찮게 굴기나 하고, 약한 주제에 시끄럽게 짖어댄다고.”
이번에도 오즈는 반응하지 않았다. 피가로는 개의치 않고 쫙 펼친 손바닥으로 자신의 왼쪽 어깨를 툭툭 쳤다.
“있잖아, 오즈. 지금의 나, 무척 즐거워 보이지? 네가 봐온 모습 중에 가장 빛나고 있지?”
오즈가 눈을 돌려 피가로를 쳐다봤다. 이곳에 발을 들이고 수많은 말을 쏟아내었음에도 오즈가 이쪽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피가로는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새빨간 눈을 바라보며 천진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오즈.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당분간 집 밖으로 나오지 마. 특히 중앙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 나는 조금 더 이 즐거움을 누리고 싶거든. 하긴,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지? 넌 외출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네가 좋아하는 건 이 커다란 성에서 혼자 불이나 쬐면서 시간을 축내는 거잖아.”
등받이에 기댄 채 고개를 기울인 오즈에게서 살갑게 웃는 파우스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다.
한때는 오즈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기도 했다. 스노우님과 화이트님처럼 서로에게 이상적인 반려는 아니지만, 같은 고독을 짊어진 입장에서 단지 동질감만으로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북쪽의 쌍둥이 마법사가 몸소 나서서 그것을 증명해냈다.
북쪽은 온통 어수선한 것투성이다. 구멍 난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도, 이따금 제멋대로 내리치는 번개도,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새하얀 것들도, 아쉬울 때만 자비를 구걸하고 쉽게 돌아서는 이들도, 그 밖에도 다른 어리석은 모든 존재가. 다들 자신의 행동이 끼칠 영향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대로 들쑤시고 다녔다.
그에 비하면 다른 곳은 얼마나 좋은가. 여름에는 조금 덥지만, 그래도 겨울은 춥지 않았다. 바람도 적당하고, 날씨도 이곳처럼 변덕스럽지 않았다. 힘에 집착하여 허구한 날 싸우지도 않았으며 비교적 인심도 좋았다. 못된 사람들이 있는 한편, 이렇게 엉망이 된 와중에도 올곧게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허울뿐인 동경이라 해도 좋았다. 파우스트와 같이 있으면 자신도 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간다면 버리지 않겠다는 말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지. 어차피 약속도 아니고, 오즈는 신경도 안 쓸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나.
“자, 이제 전하고 싶은 말도 다했으니 서로 얼굴 붉힐 일 없도록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자. 그래, 내 제자 이야기 들을래? 넌 그런 불필요한 유흥 따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막상 들으면 너도 제자를 받고 싶어질지 모르지.”
피가로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들어 오즈의 잔을 채웠다. 오즈는 말없이 피가로가 따라주는 술을 받아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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