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10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 눈을 감으니 오히려 감각이 예민해졌다. 들릴 듯 말 듯 작고 부드러운 흥얼거림, 발목까지 찰랑이는 미온수와 궂은살 하나 없는 섬섬옥수가 발가락 사이를 정성스럽게 문지르는 느낌까지.

앞서 괜찮다고 지겹도록 말했건만, 파우스트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피가로는 꿈틀거리는 발가락 하나하나를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얽으며 키득거렸다.

“옛날에도 종종 이렇게 네 발을 씻겨주곤 했지. 기억하는지 모르겠구나.”

“기억하죠. 기억하고말고요.”

“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쑥스러움을 타.”

“당신 앞에선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여전히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추켜세우고.”

“피가로님은 경애와 신의를 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됐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 따로 없구나.”

파우스트는 말 한마디 지지 않았다. 보기 드물게 기세에 밀린 피가로가 쯧, 혀를 찼다. 불쑥 치고 들어오는 추억담에 경직된 입가가 풀렸다. 일부러 노골적으로 반응하는 스승을 보며 파우스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말대로, 피가로가 파우스트의 발을 씻겨주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제자 시절부터 유구하게 이어져온 관례 같은 거였다. 고된 수행으로 마력이 바닥나 녹초가 되어 있으면 늘 피가로가 뒤처리를 해주었다. 과도한 마력 운용의 부작용으로 앓아누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피가로는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파우스트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사람들은 흔히 과묵하고 위엄이 넘치는 피가로를 무서운 마법사로 오해하지만, 사실 그는 무척 온후하고 제자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피가로의 제자로서 배움의 길을 걸은 파우스트가, 파우스트를 곁에서 모시기 위해 함께 있던 레녹스가 대표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주에 가려져있을 때는 몰랐는데, 피가로의 손에 감싸인 자신의 발은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로 볼품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가장으로 고된 일을 일삼은 파우스트의 발은 흉 하나 없이 매끈한 피가로의 발과 달리 투박하고 궂은살이 박여있었다.

파우스트는 짧은 인생의 험난한 굴곡에도 일평생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피가로에게 흉터로 가득한 자신의 발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웠다.

발톱은 찌그러졌고, 발바닥은 부르텄으며, 발꿈치는 보기 흉하게 갈라져 있다. 아무리 둘러봐도 물렁한 면 없이 온통 단단하고 거칠어서 피가로의 부드러운 손에 몹시 거슬릴 것이다. 그런데도 피가로는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파우스트의 발을 씻어주었다.

스승에게 궂은일을 시킨다는 부담에 속이 더부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 같아서 위로가 되기도 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긍정해 준다는 건 이런 느낌이겠지. 파우스트는 막연히 생각했다.

불현듯 목이 꽉 막히며 콧부리가 시큰해졌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내려다보며 공연히 코를 비틀었다.

스승이기 이전에, 이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이 몸을 낮추고 자신의 발을 대신 씻어주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외려 그 편이 이상할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배덕감에 자꾸만 가슴이 술렁였다.

저주가 빠져나간 파우스트의 발은 깨끗해진지 오래였다. 그 와중에 장난기가 도졌음이 틀림없다. 짓궂은 구석이 있는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발을 찰흙을 반죽하듯 몇 번 더 주물거리고는 놓아주었다.

드디어 풀려났다. 파우스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어찌어찌 버티긴 했지만, 단지 기운 없이 박박 씻김 당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이런 건 다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스승의 다정한 손길이 기분 좋은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자신에게 봉사―파우스트는 아직도 동의하지 않는다―하는 피가로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로 심장에 해로웠다.

피가로는 이번에도 마법으로 젖은 손을 말렸다. 그 모습을 보며 파우스트는 직감했다. 해주가 일단락되었으면 이제 미뤄온 이야기를 꺼낼 때였다. 그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피가로님, 인사가 늦었지만 미리 언질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해주신 조언 덕분에 무사히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파우스트가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분명 더 높은 곳에 앉아있는데, 거듭 인사를 하느라 조만간 머리가 땅에 닿을 것 같았다.

“피가로님이 안 계셨다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습니다. 큰소리를 떵떵 친 게 부끄럽게도, 전 실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하하…… 이거, 지휘관 실격이네요.”

담담하게 사실만 고하려고 했으나, 결국 자조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피가로에게 주눅 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궁상을 떤단 말인가. 이보다 험난한 미래를 생각하면 침울해질 시간도 없었다. 모두의 목숨을 짊어진 이상, 자신의 잘못을 알았으면 더 나아지고 발전해야 한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정처 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기가 쉽지 않았다.

피가로는 침울한 파우스트를 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진지하게 임하는 제자에겐 미안한 일이나, 역시 이 아이는 아직 한참 젊었다. 파우스트를 보고 있으면 너무 성실한 것도 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을 좋아하긴 하지만.

“파우스트, 지나간 일을 마음에 두지 마. 누구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다. 당장의 실수보다 뒷일이 중요한 거야. 난 너라서 훌륭하게 처신했다고 생각해.”

몸을 일으키고 허리를 곧추세운 피가로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그러자 신묘하게도 파우스트의 팔을 뒤덮은 검은 반점이 점점 묽어지더니, 머지않아 피가로의 손바닥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그라졌다.

피가로는 다정한 스승이지만, 교육을 할 때는 가차 없었다. 지금까지 수행이라는 명목의 극기 훈련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몇 번이던가. 좋은 말로 달래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솔직히 이번 건은 회초리를 맞을 거라 생각했다. 차고 넘치는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에 맞춰 대응하지 못했으니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가로는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깐깐한 스승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빈말을 하지 않기에, 방금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진심이었다.

파우스트는 새삼스럽게 느꼈다. 자신의 내면에 피가로의 존재는 정말 거대했다. 오죽하면 스승의 한 마디에 좌불안석 불안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버릴 정도였다.

파우스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피가로님께선 늘 최적의 시기에 최선의 조언을 해주시죠. 그 지식과 지혜에 매번 감탄하곤 합니다. 언젠가 저도 당신처럼 될 수 있을까요?”

“……충분히 될 수 있지. 난 그저 오래 살았을 뿐, 일개 범부에 지나지 않아.”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을 잡은 채로 옆자리에 앉았다. ‘아니, 넌 무리야. 나 같은 사람이 되기에 넌 너무 순진하고 사랑스럽거든.’ 순간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은 마음속에 곱게 묻어두었다.

생각이 많은 건 천성이자 버릇이었다. 순간적인 고민으로 기분이 저조해진 피가로가 한숨을 삼켰다. 이런 불유쾌한 심정을 파우스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는 살짝 거리를 벌리면 된다. 일단 멀어져서 적당히 무게를 잡으며 스승으로서의 위엄을 되찾으면 그만이다. 파우스트가 이쪽에게 가진 환상을 깨지 않도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주의하면서 아주 천천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피가로가 파우스트에게 닿은 손을 조심스럽게 빼낼 때였다. 파우스트는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손을 맞잡았다. 사소한 접촉에 어쩔 줄 모르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다섯 손가락에 제 손을 강하게 얽으며 눈을 빛냈다.

“아니요. 이제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요. 피가로님은 자신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피가로님은 언제나 때와 상황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그건 결코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파우스트는 한차례 숨을 골랐다.

“피가로님께 배움을 청합니다. 이번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셨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음에 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알아두고 싶습니다.”

이번에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잡힌 쪽은 피가로였다. 피가로는 붙들린 손을 내려다보며 꼼지락거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스승의 체면이라는 것이 있는데, 파우스트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건 정말 우스울 것 같았다.

“우선, 놓아주지 않겠니?”

“아,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란 파우스트가 손을 놓고 물러났다. 아무래도 의식하지 않고 저지른 행동이었던 듯싶다. 피가로는 펼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꾹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다행히 허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군중을 제어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압도적인 힘도, 잔혹성도 아닌 공포야. 마법사와 인간을 가리지 않고 공포는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공포는 아주 가벼운 시도조차 할 수 없도록 억압하고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사람은 나약한 육체와 불안정한 정신을 타고났기에 별것 아닌 감정의 농간만으로도 순식간에 무력해질 수 있어.”

피가로는 평소처럼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착란의 원인은 저주지만, 그 기저에는 공포가 있다. 이번 전투에 사용된 저주는 내면의 기억을 자극하여 공포를 유발하고, 그로 인해 극대화된 공포는 뇌의 어느 부분을 자극하여 혼란을 일으킨다. 공포는 끔찍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어. 마법사는 정령과 마력의 기색을 읽을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해. 마음이 약해진 마법사는 저주에 당해 인간을 공격하고, 아군에게 허를 찔린 인간은 미지의 공포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저주의 연쇄지. 그때부터는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는 인간도 마찬가지로 저주에 걸려들게 되는 거야. 공포라는 이름의 저주에.”

말로 설명을 들으니 보다 명확하게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등을 맡기고 싸운 전우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 따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복기가 필요했다.

파우스트는 눈을 감고 지난 일을 회상했다. 문제의 전투로부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거니와 당시 현장이 말도 못 하게 잔혹했던 지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공포, 공포라.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저주의 여파가 역병처럼 퍼진 뒤로, 파우스트는 잃어버린 통솔권을 되찾기까지 아주 많은 고생을 했다. 불특정 다수가 토해내는 처절한 비명을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파우스트는 본능적으로 저주가 사라진 자리를 더듬었다.

“피가로님도 공포를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나라고 없지 않겠지. 공포라는 건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그래도, 지금 말하고 있는 거라면 꽤나 단순하고 원초적인 종류겠지? 아, 그렇게 들으니 당장 떠오르는 일이 있구나.”

“이렇게나 강하고 현명한 피가로님께서 공포를 느끼는 존재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나를 믿고 따르는 제자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그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야. 일종의 영혼에 각인된 감정이지.”

피가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자리했다. 파우스트는 낯설고도 익숙한 옆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탄식했다. 역시 피가로는 공포를 알고 있었다. 그 대상은 아마 마왕 오즈겠지. 피가로님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하는 건 오로지 그 자밖에 없었다.

파우스트는 과거 세계를 평정한 마왕 오즈에 대해서 무엇 하나 알지 못한다. 몸집이 집채만 하다던가, 머리에 뿔이 달렸다던가, 여자, 그것도 처녀를 밝힌다던가. 항간에 도는 소문은 무수하게 많지만 그것이 전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가 대지에 거대한 상흔을 남길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이며, 인간과 마법사를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도륙하고 다녔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마왕 오즈가 세계정복을 시도한 것은 파우스트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그 때문에 마법사가 두려운 존재로 각인되고, 중앙 국가가 분열했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원한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스승의 고운 얼굴에 주름이 지는 이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마왕이 원망스러웠다.

측은한 눈빛으로 피가로를 바라본 파우스트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살짝 아쉬운 기분이네요. 그런 감정이 없다면 더욱 거리낌 없이 많은 일을 행할 수 있을 텐데.”

“이론상으로는 그렇겠지. 하지만 실제는 달라.”

피가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파우스트, 사람은 공포 없이는 살 수 없어. 공포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벽이 되기도,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해. 공포가 있기에 자신의 몸을 돌보고, 무모한 행동을 억제할 수 있는 거야. 공포라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면 이런 되다만 몸뚱이로는 조금도 살지 못할 거다.”

“사람은 영원히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요.”

“……그래, 공포라는 감정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야.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라도.”

피가로는 동시에 몹시 불쾌한 얼굴을 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멍하니 쳐다봤다. 또다시 그 얼굴이었다. 아주 먼 옛날을 되새기는, 그립고도 아쉬운 낯 말이다.

파우스트는 같은 사람의 몸과 마음, 그러한 형태를 가지고 어떠한 감정이 결여된 채 살아가는 사람을 상상했다. 적어도 파우스트 주위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 싶지만, 피가로는 까다로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알고 있는 듯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에게 관심이 많았다. 평소에는 최대한 억누르고 있으나, 그에 대한 것은 무엇이든 궁금했다. 피가로가 떠올리는 사람이 자신이 짐작하는 그 사람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질문은 자유였다. 그러나 어떠한 질문을 해도 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피가로님은 늘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답을 주려 하지만,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는 정작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으니까.

“반면,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몸을 사리는 데에는 공포가 필요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 대업을 앞두고 보이지 않는 공포 따위에 짓눌려서는 곤란하지.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느니 차라리 공포를 뛰어넘어보자. 그 편이 더 후회가 남지 않을 테니까.”

“네, 피가로님.”

스승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일단 맞장구를 쳤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과는 별개로, 피가로는 공포를 뛰어넘는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그것이 가능할 거라고 믿지 않는 듯했다. 진심으로 조언하던 이전과 달리 서로 다른 기질에 적당히 맞춰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피가로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정리했다.

“사담이 길어졌군. 파우스트,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네 방으로 돌아가렴.”

“아, 그게…….”

파우스트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 머뭇거렸다. 다른 때라면 순순히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게 떠나고 싶지 않았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에게 등을 보인 채로 물었다.

“왜 그러지?”

“그게, 이대로 돌아가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무서운 경험을 한 탓인지, 도저히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결례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 더 곁에 있고 싶었다. 이 나이를 먹고도 누군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어수룩한 모습이 민망해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피가로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던 중, 뒤를 돌아본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화들짝 놀란 파우스트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콩닥콩닥 요란하게 뛰었다. 이래서야 완전히 제 발 저린 꼴이다.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곁눈질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기댄 그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는 달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피가로는 어두운 하늘과 짙은 먹구름을 올려다보며, 흘러가는 구름처럼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네 방은 여기서 가장 멀리 있었지. 돌아가기 힘들다면 오늘은 여기서 함께 잘까?”

“예에? 어떻게 그런 짓을!”

파우스트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펄쩍 뛰기도 잠시, 곧 마음을 바꿨다. 직전의 반응은 솔직하지 못했다. 여기에 남고 싶어서 망설였던 주제에 이제 와서 아닌 척 빼다니, 엄청나게 속 보이고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확실히 피곤한 것 같습니다. 저, 저주가 심신에 부담을 준 것일지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말을 더듬고 잔기침을 하면서도 끝까지 꿋꿋하게 말을 마쳤다.

“그런 모양이구나. 정말 상태가 나빠 보여.”

“그, 그흠, 하루만 신세 져도 괜찮을까요?”

파우스트는 말아 쥔 주먹에 검지만 펼쳐들었다. 금방 커튼을 치고 돌아온 피가로가 친히 검지를 접어주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필요 없대도.”


긴 밤과 짧은 새벽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해가 뜬다. 치열한 전투 끝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어도 살아남은 이들은 어떻게든 새로운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대의를 짊어진다는 건 결국 그런 의미다. 때때로 현실이 무자비하게 느껴지더라도, 이 또한 자신이 선택한 길이라고 생각하면 갈 곳 없는 원망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맞으며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혁명군의 전신이라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이상, 잠시도 쉴 수 없었다. 특히 어제처럼 혹독한 전투를 치른 뒤에는 더더욱.

알렉은 아침 일찍 성을 둘러본 후, 피가로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는 파우스트를 먼저 볼 생각이었지만, 이제 막 해가 떠오른 이른 시간임에도 그는 방에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고에 대해 이미 보고를 받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차마 말 못 할 끔찍한 저주에 휩쓸린 파우스트는 완전히 지친 듯했다. 점령한 성을 정리하는 내내 말이 없었고, 저주가 퍼진 팔다리며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안색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눈이 가물가물 감기는 것을 몇 번이고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알렉은 진심으로 파우스트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본인이 먼저 드러내지 않는 이상, 그의 부진을 언급할 수는 없었다. 그건 친우를 모욕하는 일이었다. 파우스트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자신은 어느 때고 흔들리지 않는 채로 강인하게 그를 이끌어줄 뿐이다.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지만 일종의 약속 같은 거였다.

오늘도 방을 비워두고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마음 같아선 침대에 묶어두고 온종일 휴식을 취하게 만들고 싶었으나, 그런 건 본인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요즘같이 바쁜 시기에 파우스트쯤 되는 인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파우스트를 안전한 장소에서 편히 쉬게 만들려면 그 없이도 문제없이 굴러가게끔 하루 빨리 더 나은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지금은 그것과 관련된 상담이 우선이었다. 연이은 전투로 머리가 굳은 탓에 혼자서는 이렇다 할 명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이의 힘을 빌리기엔 지나치게 사적이거나 털어놓기 곤란한 문제가 수두룩했다. 이럴 때는 권력에 욕심이 없으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피가로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그걸 위해 모셔온 사람이니까.

알렉은 연달아 마른 세수를 하는 것으로 피로한 기색을 씻어내고 문을 두드렸다.

“피가로님, 계십니까?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아침 일찍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침묵. 그리고 또 침묵. 두꺼운 문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자리를 비운 건가? 공교롭게도 파우스트와 피가로 모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두 사람이라면 어디서 마법 수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피가로와 파우스트가 자투리 시간에 수련을 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종종 있었던 일이다. 파우스트는 지식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뛰어난 교육자인 스승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지 못해 안달이었다.

지식에 대한 열정이라고 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전부 알렉 때문이었다. 파우스트는 알렉이 이끄는 혁명군이 큰 위기를 겪고 주저앉을 뻔했을 때, 반대를 무릅쓰고 스승을 구하러 나섰고, 짧은 기간 동안 목숨을 걸고 많은 것을 배워왔으며, 피가로의 도움을 받기 위해 알렉을 스승의 거처까지 안내하기도 했다. 중간에 설득의 과정이 있었지만, 파우스트는 지금까지 대체로 큰 이견 없이 알렉에게 동조해왔으므로 이 부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새삼 친우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역시 파우스트를 만나면 꼭 감사를 전하자. 뜻을 함께해 주고, 언제나 믿고 따라와 줘서 고맙다는 진심을 직접 얼굴을 맞대고 전하도록 하자. 예고 없이 북받친 감정에 목과 가슴이 뜨거워졌다. 옷 위로 가슴 근처를 그러쥔 알렉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을 때였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갑작스럽게 문이 열렸다.

“알렉,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파우스트?”

문을 열고 나온 것은 파우스트였다. 당연히 피가로를 상상하고 있던 알렉은 눈을 크게 떴다. 파우스트는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알렉을 올려다봤다. 그는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 몰랐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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