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1권 part.2


12.

가뭄과 전염병으로 최악의 여름을 보내고, 풍족하진 않아도 그나마 숨통 정도는 트였던 가을이 지나갔다. 몇 번의 전투와 재정비를 갖추는 사이, 중앙에도 조금 이른 겨울이 찾아왔다.

혁명을 결심하고 맞이하는 두 번째 겨울이었다. 첫해는 여러모로 미숙한 탓에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올해는 확연히 달랐다. 착실하게 쌓인 경험, 수많은 동료의 합류, 그에 더해 뜻밖에 힘을 보태주는 대마법사까지.

스승의 가르침으로 부쩍 성장한 파우스트는 명실상부한 일등공신이었고, 피가로는 직접 참전하진 않았지만 예지를 내려주거나 부상자를 치료하는 등 할 수 있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다른 마법사들의 힘을 이끌어내니 모두의 성장세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겨울은 정말이지 점령전을 벌이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알렉을 필두로 한 혁명군은 현재 중앙성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향할수록 추위는 강해지고 바람은 매서워졌다. 오죽하면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남부 지방 사람들은 하루 종일 시름시름 앓을 정도였다.

물론 행동이 굼떠진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온화한 기후 속에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은 목표를 앞둔 군대의 고된 일정을 따라가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피로를 호소하는 이와 병에 걸린 환자가 속출했다.

결국 혁명군은 겨우내 진군을 늦추기로 결정했다. 그에 맞춘 것처럼 때마침 묘한 소문이 들려왔다. 원래라면 살아남은 옛 왕조의 후예가 거주하고 있을 중앙성 일대에서 최근 수상쩍은 움직임이 보인다고 한다. 무척 강력하고 손속에 자비가 없는 마법사의 이야기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 매우 신경 쓰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무리를 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란 것이 원래 그렇다. 흐름을 놓치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조급증을 내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자잘한 부분이야 인간들의 문제고. 일단은 혁명군에 속해있으나, 그들과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피가로는 시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한가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내리는 눈을 보다가 한 번쯤 북쪽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북쪽 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가끔 그리워하기는 해도 각별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곳에 두고 온 게 많을 뿐, 나고 자란 고향이라고 특별 취급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어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북쪽 국가에서 지낼 때도 그랬다. 그곳만의 문화라고 해야 할까. 힘을 중시하는 기질이 호쾌하면서도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꽤 자주 거리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북녘 생각이 난 것은 순전히 어떤 마법사 때문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마음 맞는 오랜 친구도, 자기들 멋대로 싸움박질하는 얄미운 스승도 아니고, 고독도, 즐거움도, 은혜도 모르는 시건방진 동생제자가 떠올라서.

그도 그럴게, 예로부터 그런 박정한 녀석을 챙기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오즈, 오랜만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북쪽에서 맑은 날을 보기는 매우 드물다. 피가로는 그런 특별한 날에 술 한 병을 들고 동생제자를 찾았다.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처럼 갑작스럽게 성에 방문한 피가로가 발코니에 사뿐히 내려앉을 때, 오즈는 침실의 벽난로 앞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즈가 응접실에 없는 것을 확인한 피가로는 거리낌 없이 침실로 침입했다.

“기분도 좋고 자랑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어. 기쁨은 여럿이서 나눌 때 더욱 커지는 법이니까.”

방에 들어와 오즈가 있는 것을 확인한 피가로는 익숙하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오즈는 묵묵부답이었다. 알아보고 환영해 주지는 않더라도 하다못해 왜 왔냐고 묻는다던가, 이름을 부르지조차 않는다. 하기야, 애당초 찾아온 손님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는 녀석한테 무엇을 바랄까.

입을 비죽인 피가로는 탁자에 가져온 술병을 올려놓고 잔을 꺼냈다.

“너도 참, 대체 언제부터 계속 이 상태로 굳어 지낸 거야? 자기가 석상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지금이 무슨 계절인지는 알아? 외로운 너를 챙겨줄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술병을 깠다.

“어디 보자, 제자를 들였다는 말은 전에 했었지?”

그는 바로 잔을 채워 오즈 앞으로 밀었다.

“그간 제자랑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 사적인 이야기도 잔뜩. 나는 말하기보다 듣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눈치를 살피지 않고 서로를 알아가는 게 얼마 만인가 싶더라고. 다 좋은데 내 제자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야. 어찌나 사람을 잘 믿는지, 고작 한 해 알고 지낸 나한테 약점이 될만한 이야기도 서슴없이 해버린다니까. 뭐, 타인의 약점을 앞세워 죽을 때까지 싸우는 짓 같은 건 북쪽 마법사 말고 보통은 안 한다지만.”

잔을 들어 혼자 목을 축인 피가로는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오즈를 상대로 계속 말을 이었다.

“드디어 완전히 마음을 놓은 거야. 믿고 기댈 만큼 나를 신뢰하게 된 거지. 놀랍지 않니? 누군가의 환심을 산다는 건 이만큼 어렵고 즐거운 일이란다.”

피가로는 조심스럽게 이불 속에 숨어들던 제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말 말도 못 하게 귀여웠지. 이미 씻겨 내려간 저주의 영향 같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같이 있고 싶었다니. 존경하는 스승 옆에서 잠을 청하는 건 도저히 무리였는지 계속 달아오른 얼굴로 잠든 시늉이나 하고. 밤새 놀리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혼이 났더랬다.

피가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의자 밑으로 다리를 흔들었다. 파우스트를 생각하면 장소와 상황을 막론하고 기분이 들떴다. 사랑스러운 제자의 존재는 어떠한 약보다 효과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잘 될 예감이 들어. 드디어 내 오랜 숙원을 이루는 거야. 더 이상 번거롭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 지긋지긋한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오즈의 시선은 타오르는 불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즈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넌지시 눈길을 돌린 피가로가 이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즈, 넌 네가 세계정복을 그만둔 이후에 세계가 어떤 꼴을 맞이했는지 궁금했던 적 있어?”

오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그는 굉장히 무관심해 보였다. 원래 오즈는 어디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온 것도 아니고, 이게 당연하다. 피가로는 뱃속에서 우글거리는 벌레를 무시하며 뻣뻣해진 표정 근육을 이완시켰다.

“네가 세계정복을 하겠다며 온통 헤집어놓은 탓에 지금 세상은 엉망이야. 인간과 마법사는 서로를 배척하고,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이며, 백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붉게 물든 대지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어. 이제 만족해? 그토록 미운 세상을 반쯤 으스러뜨려서. 제대로 희열을 느끼고 있는 걸까?”

기분 탓일까. 일순 오즈가 쳐다보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건 죄책감이 만들어낸 그럴듯한 환상일 뿐이다. 피가로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같이 저질러놓고 나만 빠져나간다니, 그런 건 비겁하지. 걱정 마. 나만 살겠다고 너를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오즈는 아주 조금 몸을 움직였다. 불편한 자세를 고치듯이, 피가로 쪽으로 약간 돌려 앉았다. 그러나 마침 갑갑한 심정을 숨기기 위해 눈을 감은 피가로는 보지 못했다.

“너는 여전히 말수가 적구나. 아무리 너라도 방금은 충분히 감동받을 만하지 않았나? 한 마디도 안 하고 듣고만 있다니.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너만 계속 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네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상관없지만…… 스노우님과 화이트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어? 두 분은 성가신 구석이 있으니, 직접 찾아가진 않더라도 연락 정도는 성실하게 받아야 해. 전에도 얘기했었지?”

오즈는 무감정한 얼굴로 제 앞에 높인 잔을 내려다보았다. 손깍지를 낀 피가로는 초조하게 열 손가락을 얽었다. 그는 뼈가 도드라진 손등을 긁어대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잔에 담긴 술을 벌컥 들이켰다.

“……이봐, 오즈. 대답을 해. 뭐든 좋으니까 일단 말을 하라고.”

피가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욱하고 치받는 감정을 삼키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원인 모를 짜증만 치솟았다. 오즈를 상대할 때는 늘 그랬다.

“내 말 안 들려? 대답하라니까!”

피가로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에 놓인 잔이 들썩이며 미량의 술이 흘렀다. 당연하게도 전혀 입에 대지 않은 오즈의 잔이었다. 참 얄밉기도 하지. 분을 못 이긴 자신이 시근거리는 소리만 들리고, 맞은편의 오즈는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젖힌 피가로는 느리게 숨을 몰아쉬며 몇 번이고 마른 세수를 했다.

오즈는 제어되지 않는 짐승이다. 당장은 종잡을 수 없는 변덕으로 내버려두고 있지만 언제 이쪽을 삼키려 들지 모른다. 오즈를 대할 때는 언제나 친절하게, 불쾌하지 않은 선에서 충고하고 타이르며 정을 느끼게끔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 먼 훗날 오즈의 화살이 우리에게 향하지 않을 수 있다. 너무나 기나긴 세월을 되새김질하여 지겨울만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피가로는 오즈가 미웠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가 무서웠고, 어떠한 말과 행동에도 응해주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웠으며, 자신의 손을 뿌리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피가로의 독단적인 호의였다고 해도,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응당 돌아와야 할 반응이 오지 않는 것이 못마땅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거야? 뭐, 그러겠지. 넌 남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오즈와 대화를 나누면 언제나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피가로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고, 오즈는 묵묵히 그것을 듣는다. 그래서 오즈랑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오즈는 먼저 다른 사람을 찾지 않으니, 피가로가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다면 만날 일이 없었다. 가끔 스노우와 화이트에게 호출당해 두 사람의 성에 가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하면 된다.

형제제자라지만 결국은 동문이라는 연관성 아래 억지로 묶인 것. 나중에 심사가 뒤틀린 오즈가 세상을 통째로 쓸어버리든 말든, 피도 안 이어진 녀석 따위 마음에서 밀어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래, 분명 그거면 되는데. 일부러 오즈를 피했던 적도 있지만, 결국은 먼저 찾아가게 되었다. 왜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좋아서도 아니고, 외로워서도 아니고. 굳이 따지면 주제에 맞지 않게 연민한 탓일까.

“넌 옛날부터 그랬지. 정말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한 번 시작한 말을 멈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성은 그만하라고 종용하는데도 오즈 앞에 서면 기어이 감정이 앞서게 되었다. 하나뿐인 제자의 눈에 비치는 멋지고 상냥한 스승의 모습처럼, 계속 그런 사람으로 있고 싶은데 잘되지 않았다.

“넌 인형이나 다름없구나. 그저 사람의 몸을 부여받았을 뿐인, 마음 없는 인형과 마찬가지다.”

오즈는 파우스트와 다르다. 그 성실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와는 조금도 비교되지 않는다. 오즈와 대화하고 있으면 공연히 화만 났다. 훌륭하고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오즈를 상대로는 그럴 수 없었다. 사실은 오즈보다 오즈를 용납하지 못하는 제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오즈를 바꿀 수도,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도 없다면 그를 멀리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빛이 있기에 그림자도 있다. 이를테면 파우스트는 빛이고, 오즈는 그림자 같은 거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생제자에게 무례한 말이지만, 적어도 피가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해하지 마. 화를 낸 게 아니야. 그냥,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져서…… 오즈, 너도 괜찮지?”

“……그래.”

오랜만에 듣는 오즈의 목소리였다. 대답을 하라고 그렇게 쪼아댔으면서 정작 그토록 원하는 것을 받자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서 찾아온 건 당연하게도 자괴감이었다.

오즈는 왜 이런 굴욕을 감내하는 걸까? 그 정도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 이미 한 번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을 밀어버렸으면서, 왜 주기적으로 와서 참견하는 형제자는 두고 보는 걸까? 불쾌하다면 까짓것 눈앞에서 치워버리면 그만일 텐데. 항상 그렇게 보기 싫은 것에 뚜껑을 덮듯이.

“너를 탓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된 걸까?”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피가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는 턱을 괸 채 빈 잔을 바라보다가 다시 머리를 들었다.

“역시 너랑 엮이면 되는 게 없다니까. 너도 나를 비슷하게 생각하지? 매번 찾아와서 귀찮게 굴기나 하고, 약한 주제에 시끄럽게 짖어댄다고.”

이번에도 오즈는 반응하지 않았다. 피가로는 개의치 않고 쫙 펼친 손바닥으로 자신의 왼쪽 어깨를 툭툭 쳤다.

“있잖아, 오즈. 지금의 나, 무척 즐거워 보이지? 네가 봐온 모습 중에 가장 빛나고 있지?”

오즈가 눈을 돌려 피가로를 쳐다봤다. 이곳에 발을 들이고 수많은 말을 쏟아내었음에도 오즈가 이쪽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피가로는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새빨간 눈을 바라보며 천진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오즈.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당분간 집 밖으로 나오지 마. 특히 중앙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 나는 조금 더 이 즐거움을 누리고 싶거든. 하긴,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지? 넌 외출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네가 좋아하는 건 이 커다란 성에서 혼자 불이나 쬐면서 시간을 축내는 거잖아.”

등받이에 기댄 채 고개를 기울인 오즈에게서 살갑게 웃는 파우스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다.

한때는 오즈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기도 했다. 스노우님과 화이트님처럼 서로에게 이상적인 반려는 아니지만, 같은 고독을 짊어진 입장에서 단지 동질감만으로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북쪽의 쌍둥이 마법사가 몸소 나서서 그것을 증명해냈다.

북쪽은 온통 어수선한 것투성이다. 구멍 난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도, 이따금 제멋대로 내리치는 번개도,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새하얀 것들도, 아쉬울 때만 자비를 구걸하고 쉽게 돌아서는 이들도, 그 밖에도 다른 어리석은 모든 존재가. 다들 자신의 행동이 끼칠 영향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대로 들쑤시고 다녔다.

그에 비하면 다른 곳은 얼마나 좋은가. 여름에는 조금 덥지만, 그래도 겨울은 춥지 않았다. 바람도 적당하고, 날씨도 이곳처럼 변덕스럽지 않았다. 힘에 집착하여 허구한 날 싸우지도 않았으며 비교적 인심도 좋았다. 못된 사람들이 있는 한편, 이렇게 엉망이 된 와중에도 올곧게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허울뿐인 동경이라 해도 좋았다. 파우스트와 같이 있으면 자신도 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간다면 버리지 않겠다는 말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지. 어차피 약속도 아니고, 오즈는 신경도 안 쓸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나.

“자, 이제 전하고 싶은 말도 다했으니 서로 얼굴 붉힐 일 없도록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자. 그래, 내 제자 이야기 들을래? 넌 그런 불필요한 유흥 따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막상 들으면 너도 제자를 받고 싶어질지 모르지.”

피가로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들어 오즈의 잔을 채웠다. 오즈는 말없이 피가로가 따라주는 술을 받아마셨다.

*

겨우내 흐름을 늦춘 것은 훌륭한 판단이었다. 단순히 진군을 늦춘 것만으로 경직된 분위기와 사람들의 피로도가 한결 덜어졌다. 예상대로 중앙성이 존재하는 옛 왕도에 가까워질수록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대다수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모두와 함께하는 미래에 명예로운 승리가 약속되어 있다고 믿었다. 믿음직한 동료와 연속된 승리에 도취되어 의식하지 않는 사이 나태해졌을지도 모른다. 순간의 안일함은 가장 뼈아픈 실책을 낳았다.

“알렉님, 물러서십시오! 적들이 포위망을 좁혀옵니다!”

느리지만 큰 피해 없이 착실히 나아가던 도중,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변수가 된 것은 붕괴성의 돌이었다. 붕괴성의 돌은 세계 각지에 있다고 전해지지만, 전쟁에 사용할 정도로 유의미한 양을 모은 것은 그들이 처음이었다.

붕괴성의 돌은 마법 생물이나 마법사를 자극한다. 보통은 소량으로 치유나 심신 해방에 사용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기가 거칠어지고 흉포해지기도 한다. 상대 진영에서 붕괴석의 돌을 적극 활용하면서, 협공하던 인간과 마법사 부대 사이의 지시가 틀어지게 되었다.

잘 짜인 진형이 무너지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 파우스트가 이끄는 마법사 부대와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미리 정해놓은 신호를 올려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적이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통에 알렉이 속한 부대는 계속해서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팽팽하게 맞서고는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조금만 버텨! 금방 지원이 올 거다!”

파우스트를 향한 알렉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비록 그들은 갇혔으나, 파우스트라면 일찍이 포위망을 벗어났을 것이다. 반대로 바깥쪽에서 밀어붙이고 있을 파우스트를 생각하면 이 시점에서 후퇴를 할 수는 없었다. 위기를 기회로, 오히려 밀어붙일 시기였다.

“알렉, 이번에는 퇴각하는 게 나을 거다.”

그러나 피가로의 생각은 달랐다.

“조금 전에 마법사에게 부상을 입었겠지. 그대로 방치하면 위험할 거야.”

피가로는 그 말과 함께 알렉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알렉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오른쪽 어깨 아래, 팔뚝에 감아놓은 붕대에 옅은 핏기가 비쳤다.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한 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뻐근해지며 움직임이 둔해졌다.

붕대에 감싸인 환부는 살짝 부풀어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마법으로 당했으니 평범한 상처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지난번 파우스트를 삼켰던 저주와 비슷한 종류일지도 모른다. 슬슬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불편한 것이, 피가로 말대로 조만간 완전히 굳어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손쓸 수 없게 되기 전에 일단 물러나서 파우스트에게 치료를 받자. 모두를 구하는 건 어렵지만 너 하나라면 이곳에서 빼내줄 수 있어.”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 단체의 수장된 자가 부하를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제 무모한 행동의 결과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쉽게도 말하는군. 반드시 후회할 텐데.”

두 사람은 양쪽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각자 쳐냈다.

“중앙의 아이들은 정말이지 고집이 세.”

우두머리의 위치를 확인한 적들의 공세가 매서워졌다. 이쪽으로 화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잔챙이는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알렉은 지금 죽어선 곤란하다. 혀를 찬 피가로가 돌풍을 일으켰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병사들이 주춤했다.

알렉이 달라붙는 병사들을 두엇 베어내고, 피가로는 그를 끌어당겼다. 시야가 가려진 사이에 빈틈을 찾아 빠르게 이동했다.

“넌 나의 정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겠지. 내게 도움을 구걸하진 않는 것이냐.”

“피가로님은 어차피 손을 빌려주지 않으시겠죠. 처음부터 그런 조건이지 않았습니까. 피가로님은 말을 번복하는 분이 아니시니…… 동료의 목숨이 달린 일에 자존심을 세울 틈은 없습니다만,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일에 무조건 매달리는 것 또한 원치 않습니다.”

알렉은 눈가에 튄 피와 땀을 닦아내며 피가로를 올려다보았다.

“피가로님은 파우스트의 부탁을 받아 저를 보호하고 계시죠. 그런 피가로님이 먼저 행하지 않는 일이라면 어디든 활로는 있을 것입니다. 더 많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저는 그곳을 뚫겠습니다!”

“그 또한 옳다. 스스로 각오했다면 더는 권할 필요가 없겠지.”

보검의 칼날에 묻은 피가 쨍한 햇살을 받아 번들거렸다. 피가로는 알렉의 결정을 존중했다. 애초에 혁명의 주체는 알렉과 파우스트다. 알렉이 결정을 내렸다면 피가로는 그에 따르는 것이 응당하다.

아주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알렉이 마법사였다면 자신의 제자는 둘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숭고한 의지를 품은 혁명도, 이러한 만남도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 당초 의미 없는 가정이다.

*

파우스트가 알렉을 찾은 것은 전투를 마친 늦은 저녁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늦었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나자마자 바로 온 거였다.

알렉이 쉬고 있는 막사에 도착했을 무렵, 파우스트의 등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뛰었더니 땀이 났다. 아직도 조금 전 느낀 불길한 감을 떠올리면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다급히 달려온 그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막사 앞에 섰다.

막 천막을 걷고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피가로 가르시아, 또 그 사람이군요. 그 사람에게 이런 중요한 일을 맡겨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파우스트는 익숙한 목소리가 뱉어내는 이름에 멈칫했다. 누군가 큰 소리를 내는 것을 시작으로 안쪽에서 나누는 대화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그 사람은 지나치게 제멋대로입니다. 알렉님의 옆을 지키면서 이런 심각한 부상을 입는 것을 방관하다니! 저희라면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그 자는 대체 뭡니까? 파우스트님의 지인이라고 하지만, 저희는 그 자에 대해 무엇 하나 알지 못합니다. 그저 강력한 힘을 가진 마법사라고밖에…….”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으면 불미스러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요. 일부러 막지 않은 것이 더 수상쩍게 여겨집니다. 다른 진영에서 보낸 첩자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파우스트는 친애하는 스승에게 향하는 원색적인 비난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피가로, 그 자는 대체 무슨 속셈이랍니까? 그 오만한 자는 우리의 혁명을 소꿉장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 자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힘을 가졌다는 것도, 수많은 지혜와 경험으로 무장했다는 것도 알겠습니다만. 모두가 뜻을 이루기 위해 한 몸 바치는 걸 바로 앞에서 직관하면서 적선하듯 자비를 베풀고 있지 않습니까? 꼭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같은 마법사 중에는 그를 두려워하는 이도 있습니다. 인간보다 강한 마법사가 두려워할 정도의 존재라면 얼마나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듣기로 강한 마법사는 하나같이 변덕스럽다던데, 그 사람이 변심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피가로는 혁명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지인이랄 게 특별히 없었다. 면식 없는 타인이 가득한 이곳에서 피가로를 보호할 사람은 파우스트밖에 없었다.

피가로가 사실이 아닌 일로 억울하게 모욕을 당한다면 당연히 그의 제자인 자신이 나서서 해명을 해야 한다. 설령 피가로 본인이 개의치 않더라도 그를 감싸는 것은 파우스트 역할이었다.

파우스트는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나서서 매섭게 몰아치는 파도로부터 은사를 지키는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한창 적군과 뒤섞여 전투를 벌이던 중에 느낀 불안한 감의 이유도 확인해야 했다.

일분일초가 귀했다. 말도 안 되는 오해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다. 결심을 마친 파우스트가 힘차게 천막을 걷으려고 할 때였다.

“피가로를 의심하는 건 그만둬. 그거야말로 무의미한 짓이다.”

파우스트는 행동을 멈추고 알렉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불쑥 치고 들어온 친우의 목소리에 괜히 반가워졌다. 목소리에 담긴 지치고 피로한 기색만 아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피가로의 신원은 나와 파우스트가 보장할게. 굳이 말을 얹자면, 피가로는 처음부터 나를 돕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니야. 그는 속세에 속하지 않은 마법사로, 쌓아온 세월과 지식의 깊이는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알렉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뜸을 들였다. 파우스트는 알렉이 미간을 짚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간 지켜봐서 알겠지만, 이따금 전선을 둘러보며 조언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을 받고 있어.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는 거야. 예지를 구하기 위해 모셔온 현인에게 무례한 언행은 삼가도록 해.”

권하는 것처럼 들려도 사실상 명령이었다. 알렉의 단호한 말에 고조된 분위기가 식고, 언성을 높이던 사람들이 잠잠해졌다. 파우스트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마땅히 자기 사람을 챙기는 알렉의 인품이 친구로서 자랑스러웠다.

알렉이 충분히 할 일을 해주었으니,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파우스트는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여기에 모여 있었구나.”

파우스트는 막사 안에 있는 면면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췄다. 예상대로 전부 아는 얼굴이었다. 각 부대를 이끄는 대장들이다. 누군가는 불편한 듯 파우스트의 시선을 피했고, 과반수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봤다. 파우스트는 그들의 적대적인 시선에 흠칫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깨동무를 하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그런 그들이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눈초리를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순 말문이 막힌 파우스트는 굳어버린 머리를 굴려 무슨 말이든 꺼내려고 했다.

“우연찮게 밖에서 얘기를 들었어. 그건…….”

그러나 파우스트는 끝까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도중에 알렉이 말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다음에 이야기하자. 파우스트와 단둘이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자리를 비워줄 수 있을까?”

“네, 푹 쉬십시오.”

그들은 군말 없이 인사를 하고 막사를 나갔다. 그중 한 사람이 입구로 향하며 파우스트와 어깨를 부딪쳤다. 가볍게 부딪친 정도라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기분은 좋지 않았다. 힘든 전투 끝에 만났는데 살갑게 굴진 않을망정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변한 동료들의 태도에 무척 쓸쓸하고 괴로워졌다. 파우스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가슴 근처에 퍼지는 둔통을 인내했다.

알렉은 사람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인기척이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파우스트, 역시 네가 와줄 줄 알았어.”

다정한 말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파우스트는 황급히 알렉에게 달려갔다.

“알렉, 괜찮아? 네게 건 수호의 마법이 깨지는 느낌이 들어서…….”

“아아, 그래. 안 그래도 네가 준 부적이 부서져버렸어.”

알렉은 굳게 쥔 왼손을 펼쳤다. 상처투성이 손바닥 위에 산산조각 난 돌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오래전, 파우스트가 알렉의 안녕을 기원하며 건네준 부적이었다.

“부적은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줄게. 그러니 어서 다친 곳을 보여줘.”

파우스트에게 붙들린 알렉이 어설프게 웃었다. 부하들 앞에서는 애써 의연한 척했지만, 믿음직한 친우와 단둘이 남으니 동요를 감출 길이 없었다. 알렉이 약한 모습을 보일수록 파우스트는 초조해졌다.

알렉은 몸을 돌려 그늘에 숨기고 있던 오른편을 드러냈다. 부상을 입은 것은 오른팔인 모양이다.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파우스트는 망설임 없이 환부를 덮은 천과 붕대를 걷어냈다.

“오, 신이시여…….”

상처를 확인한 파우스트는 입을 틀어막았다.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알렉의 오른팔은 반쯤 썩은 상태였다. 상처를 살피는 파우스트의 눈동자가 엉망으로 흔들렸다. 순식간에 심각해진 친우의 낯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 알렉의 입가가 더욱 뻣뻣해졌다.

파우스트는 그제야 정신을 다잡았다. 알렉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환자였다. 절망적인 기색을 드러내면 지금보다 더 상황이 악화될 것이다. 파우스트는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알렉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가만 보면 전신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피부가 썩어가는 과정은 필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신을 놓지 않고 끝까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부하들을 독려하고 분노한 그들을 진정시켰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평범한 시골 청년이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정신력이었다.

파우스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는 모습에 알렉이 하하, 어깨를 들썩이며 힘없이 웃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파우스트, 마법사는 정말 굉장해. 인간은 하지 못하는 일을 너무나 손쉽게 해내고 말아.”

알렉은 늙어 죽어가는 고목처럼, 검고 푸르스름하게 변색되어 썩어가는 피부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허공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더니, 그대로 팔을 베였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그 마법사는 피가로님이 어떻게든 해주셨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전쟁 한복판에 끼어들 정도로 호승심이 강한 마법사라고 하더군. 피가로님은 얌전히 후퇴하고 네게 치료를 받으라 했지만, 이렇게 중요한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마당에 물러설 수는 없지. 그랬다간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들을 대면할 명목이 없잖아…….”

저주에 잠식된 팔은 악취를 풍겼고, 피와 진물이 뚝뚝 떨어졌다. 알렉은 살이 녹아내려 뼈가 드러난 오른손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내게는 파우스트, 네가 있으니까.”

해사하게 미소 짓는 얼굴은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광기가 느껴졌다. 알렉은 자상하게 웃으며 파우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치료법보다는 효과적이지. 불편하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지 않아도 마법이라면 순식간에 낫게 할 수 있어. 나의 친우, 파우스트여. 수없이 많은 동료의 목숨을 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너의 마법이라면 분명 무엇이든 할 수 있겠지.”

놓치지 않도록 돌조각을 움켜쥔 그는 파우스트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알렉의 손이 스친 뺨에 미량의 핏물이 묻어났다. 파우스트는 알렉의 일그러진 눈매와 손의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하필 이 순간, 피가로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던 것이 떠올랐다. 피가로는 꽤 자주 파우스트를 기특하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파고드는 별사탕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었고, 굳은살 하나 없이 부드러운 손은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 기억에 이끌린 파우스트는 반사적으로 알렉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알렉은 그것을 무언의 동의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는 눈에 띄게 안심하여 한결 풀어진 낯으로 말했다.

“자, 파우스트. 내 팔을 치료해 줘. 이제 나를 고통 속에서 해방시켜줄래?”

“……감쪽같이 낫게 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해볼게.”

솔직하게 말하면 파우스트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막 상처를 입었을 때면 모를까, 그때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으로선 어떻게 손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알렉의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그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오로지 그런 일념으로 무엇이든 시도해 보기로 했다.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니, 겨우 그 정도의 각오로는 부족하다. 설령 불가능하더라도, 능력 밖의 일이라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렉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 소중한 친우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지 않으면.

해주를 먼저, 아니, 아니다. 지금은 해주보다 치료가 우선이다. 팔에 깊숙이 남은 자상과 녹아내린 살점을 어떻게든 하고, 환부를 소독한 다음에 해주를 하는 편이 나았다. 파우스트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외면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무작정 마력을 쏟아냈다.

그러나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치료조차 순탄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팔을 뒤덮은 다른 마법사의 마력부터 걷어내야 하는데, 묵은 저주와 뒤섞여 온통 알 수 없게 되었다.

애초에 목숨에 영향을 줄 정도로 치명적인 저주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저주는 오른팔에만 머무를 뿐, 더 이상 번지거나 전염되지 않았다. 그저 신체 일부를 망가뜨리기 위한 용도로 치밀하게 짜인 저주였다. 알렉이 마법사였다면 몸 안에 있는 마력을 활성화시켜 어떻게든 해봤겠지만…….

마력을 쏟으면 쏟을수록 파우스트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끝에 가선 거의 산송장처럼 희게 질려있었다.

“못해, 무리야, 난, 나로서는 도저히…….”

파우스트의 비명 같은 말을 알렉은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알렉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파우스트. 이거 봐, 내 팔은 마법사의 저주에 당했을 뿐이야. 절단되거나 으스러진 게 아니라고. 전에 피가로님이 저주를 씻고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본 적 있어. 아직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면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겠지? 빨리 너의 마법으로 어떻게든 해줘. 늘 그렇게 해왔겠지?”

“아니, 아니야. 알렉, 우선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줘.”

알렉은 파우스트를 믿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함께 해온 친우로서, 뜻을 함께한 동료로서, 등을 맞대고 싸운 전우로서, 어떤 의미로는 가족보다 의지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알렉을 실망시키고 말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서 숨이 턱 막혔다.

“미안, 정말 미안해. 이 정도의 저주는 나로서도 불가능해. 바로 처치를 했다면 모르겠지만, 시간이 너무 흘러서…… 그래도, 피가로님이라면! 내가 피가로님에게 부탁해 볼게!”

뒤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커졌다. 파우스트는 그만큼 절박했다. 평정을 잃은 파우스트가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 알렉이 작게 이를 갈았다. 알렉은 무서울 정도로 눈을 부릅뜬 채였다. 피로에 찌든 눈가가 가늘게 떨리더니, 왼손에 쥔 부적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안으로 곱은 손아귀의 힘을 풀자, 부서진 부적의 조각이 손 틈새로 흘러내렸다.

“내 몸을 지켜줄 거라더니.”

알렉이 몸을 들썩이며 경련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벌어진 입술로 독기에 찬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이딴 게, 대체 뭐가 부적이라는 거야. 부적이라면서 전혀 지켜주지 않았잖아.”

그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파우스트를 노려봤다.

“거짓말을 했구나, 파우스트. 허황된 말로 나를 안심시킨 거야.”

직전에 서늘하게 쳐다보던 동료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들과 알렉이 겹쳐 보였다. 평생을 쌓아온 신의가 그렇게 쉽게 변질될 리 없는데도.

“맹세코, 거짓말이 아니야. 부적은 충분히 효과를 발휘했어. 단지 내가 약해서 그래. 부적에 마법을 건 내가 부족해서 저주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한 거야.”

파우스트는 침착함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반면 알렉은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체 일부, 그것도 팔을 잃을 상황에 처했다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애먼 불똥이 튀지 않도록 친구인 자신이 단단히 붙잡아주어야 했다.

―사실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알렉이 자신을 탓하고, 부적에 담긴 진심을 깎아내리는 것이 몹시 괴로웠다. 얇은 가슴 안쪽에서 걱정과 두려움에 숨죽인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파우스트는 못 견디게 괴로울 때마다 고통스러운 알렉의 모습을 마주했다. 알 수 없는 저주에 맞서 싸우는 것도, 몸집을 부풀린 공포에 겁에 질린 것도 자신이 아닌 알렉이었다. 언젠가 저주를 뒤집어쓴 자신을 알렉이 따뜻하게 안아주었듯이, 그 또한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친우를 이끌어줘야 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지금 당장 피가로님을 불러올게.”

그때, 알렉이 자리를 뜨려는 파우스트를 붙잡았다.

“기다려, 파우스트. 피가로님은 나를 돕지 않을 거야. 이미 정해진 일로 그 사람에게 빌지 마. 나 때문에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어. 어차피…….”

“알렉, 그렇지 않아. 날 믿어. 피가로님을 불러올게. 반드시 너의 팔을 낫게 해줄 테니까.”

차갑고 땀에 전 손이 비정상적인 악력으로 파우스트의 손을 가두었다. 파우스트는 알렉의 손을 한차례 맞잡은 뒤, 부드럽게 뿌리쳤다. 계속 매달릴 것 같았던 알렉은 의외로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는 의자에 기대어 반쯤 무너진 채, 비통한 얼굴로 파우스트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지만, 낯선 표정이었다. 알렉이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지 깊이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파우스트는 그 길로 곧장 피가로에게 향했다.

“피가로님, 부탁드립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다른 방도가 있었다면 피가로를 귀찮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는 파우스트가 아닌 피가로였다. 파우스트가 치료할 수 없는 부상도 피가로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파우스트의 저주를 순식간에 지워낸 대마법사이자 북부에서 유행하던 전염병의 치료약을 개발할 만큼 뛰어난 의사였다.

파우스트가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은 대다수 피가로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는 피가로가 수많은 중증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직 미숙하고 제약이 많은 파우스트와 달리 피가로는 무엇이든 고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피가로라면 알렉을 낫게 해줄 수 있었다. 그러기에 지금 파우스트가 기댈 곳은 피가로밖에 없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도움을 구할 것을 예상하지 못한 듯 난처하게 웃었다.

“파우스트, 네가 내게 이런 부탁을 할 줄이야. 알렉에게 아무 말도 전해 듣지 못한 거니? 난 이미 경고했어. 그래도 상관없다며 무모하게 밀고 나간 건 그야. 결과적으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으니 그걸로 된 게 아닐까?”

“하지만 팔을 잃을 거예요! 그것도 주로 쓰는 팔을…….”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옷자락을 애절하게 붙들었다. 앙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알렉은, 옛날부터 줄곧 화가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게나 그림을 잘 그리고 좋아하는데, 이제 다시는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알렉은 피가로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파우스트 또한 피가로가 무슨 조건으로 혁명군에 합류했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피가로님의 유일무이한 제자이자 그분이 총애하는 자신의 부탁이라면.

실로 오만방자한 태도였다. 다른 때라면 이런 교만한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파우스트에게는 알렉이 중요했다.

“피가로님, 제 일생일대의 부탁입니다. 알렉을 도와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약속, 약속이라. 피가로가 입속말로 되뇌었다. 비스듬히 돌아선 피가로의 몸이 달빛을 등졌다. 스승의 옆얼굴이 역광을 받아 그림자처럼 검게 물들었다. 미미하게 찌푸린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자리했다.

“약속이라는 말을 쉽게 입에 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파우스트는 대답 대신 머리를 조아렸다. 피가로의 가르침을 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만큼 절박했을 뿐이다.

피가로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성인이라 불리는 스승은 단 한 번도 파우스트 앞에서 감정적으로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파우스트의 고개는 시들어가는 해바라기처럼 계속 아래로 숙여졌다.

피가로는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충분히 뜸을 들였다. 그럼에도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다시 몸을 돌려 파우스트를 마주했다.

“가여운 파우스트, 소중한 친구의 불행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구나. 애석하게도 난 도와주지 못해. 그럴 생각도 없고, 이미 늦었어.”

피가로는 꼿꼿한 허리를 기울여 파우스트와 눈높이를 맞췄다. 파우스트의 얼굴을 손바닥 전체로 감싸고 죄인처럼 숙인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평소에 그러하듯, 다정하게 뺨을 어루만진다.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구나. 원하는 걸 들어줄 수는 없지만, 조금 편하게 해줄까?”

고개를 들어 마주한 피가로의 눈은 상냥한 빛을 띠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역광 탓인지 안광이 흐릿하여 몹시 두려운 느낌을 주었다. 어둡게 물든 눈동자에 독특한 동공만이 빨려 들어갈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옅은 푸른빛이 명멸했다. 더없이 익숙한 스승의 마력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따듯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봄볕처럼 따스한 기운은커녕 살을 에는 북녘의 바람처럼 아주 차가웠다.

파우스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는 어설픈 위로를 바라지 않았다. 무슨 마법을 사용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가로가 의도하는 건 어떤 종류든 간에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를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저절로 몸이 움직여졌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손을 힘차게 쳐냈다. 손등이 손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

피가로는 설마 파우스트가 자신을 밀어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끝내 스승을 당황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번에도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굴다니, 피가로님께 실망을 안겨드렸으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안은 한편, 알렉을 향한 죄책감과 설득에 실패했다는 낙심이 이리저리 뒤섞였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무려 자기 자신을 내걸었음에도 피가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피가로에게 있어 파우스트라는 존재가 특별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무럭무럭 자라난 좌절감이 전염된 저주처럼 파우스트를 집어삼켰다.

”왜 바로 치료하지 않았나요? 피가로님은 알렉의 옆에 계셨잖아요! 어째서 막아주지 않은 건가요?”

”난 알렉에게 충분히 주의를 줬어. 이미 썩어버린 팔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현재의 의학 기술로 가능할 리가 없잖아? 나는 모든 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온 게 아니고, 그는 책임을 져야 해. 그것이 올바른 순리니까.”

“올바른 순리라니.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지금 이 순간,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알고 있었다. 늦었다는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

피가로는 단지 알렉을 치료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경고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 그가 죗값을 치르는 것을 당연히 여겨서 냉정하게 방관하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일이 아니니까. 알렉과 파우스트, 그리고 혁명군의 모든 이들이 목숨을 바치는 혁명은 피가로에게 어느 날 보았던 불꽃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격양되는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울컥 치미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생각을 쏟아내려는 찰나였다.

‘피가로, 그 오만한 자는 우리의 혁명을 소꿉장난 취급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뜻을 이루기 위해 한 몸 바치는 걸 바로 앞에서 직관하면서 적선하듯 자비를 베풀고 있지 않습니까? 꼭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떠한 말이 번개처럼 머리를 강타했다. 파우스트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가로를 욕보이던 동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파우스트는 너무나도 편리하게 모든 일을 피가로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피가로에게 답을 구걸하며 그의 가슴을 파먹으려 들던 무도한 무리와 진배 없이.

아무리 친우의 불운에 괴로웠어도 그렇지, 결코 해선 안 되는 말을 꺼낼 뻔했다. 지나친 압박과 슬픔으로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경애하는 스승을 원망하는 마음이 싹틀 리가 없었다.

한 번 실수를 하고 났더니, 입을 열고 말을 꺼내는 것이 두려워졌다. 파우스트는 입가를 덮은 손을 떼지 못했다.

“파우스트, 역시 너는 용감해. 네 소중한 사람을 위해 나한테도 화를 낼 수 있어.”

피가로는 새파랗게 질린 파우스트의 안색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너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이런 말을 꺼내기에 적절한 시기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피가로는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제자에게 분노하기는커녕 어른스럽게 대처했다. 그 때문에 파우스트는 한층 더 부끄러움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피가로님. 피가로님을 몰아붙일 일이 아닌데…….”

“괜찮다.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네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이해하고 있으니. 하지만 내 입장도 한 번쯤 고려해 줬으면 해. 이 혁명은 너희가 마침표를 찍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거니까.”

“네, 실례했습니다. 그럼 저는 다시 돌아가 알렉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도록 하렴. 지금 그에겐 너의 마법이 필요할 거다.”

피가로는 예상보다 엄격했고, 설득은 실패했다. 알렉의 말대로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시큰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알렉에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저를 믿고 기다리고 있을 알렉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훨씬 무거웠다. 알렉을 마주하는 것이 무서웠다. 위기에 봉착한 알렉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매섭게 노려보던 눈빛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친우의 비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마 평생토록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촘촘하게 쌓아 올린 신의가 박살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

알렉은 결국 팔을 절단했다. 오른팔에 퍼진 저주는 겉면만 아니라 내부를 좀먹기 시작했고, 만일의 희망을 품고 상처를 내버려 두기에 검게 썩어 녹아내리는 팔은 지독한 악취를 풍겼으며 영 상태가 나빴다.

피가로의 말대로 알렉에게는 파우스트의 마법이 필요했다. 치료 과정에서 파우스트는 알렉의 통각을 잠시 앗아갔다. 죽어가는 동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쓰이다가 익숙해진 마법은 돌고 돌아 기어이 가장 소중한 친우에게 사용되었다. 그 사실이 못내 괴로웠던 파우스트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일련의 사고는 혁명군에 크고 작은 파란을 일으켰다. 알렉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강인한 전사였다. 그러나 검을 휘두를 오른팔을 잃은 지금, 더 이상 선봉에 설 수 없었다. 그는 현장에서 물러나 전선 뒤편으로 물러나야 했다.

알렉의 부상을 방관한 피가로의 처사는 수많은 반발을 낳았다. 누가 소문을 낸 건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일이 번거롭게 되었다. 알렉은 최선을 다해 피가로를 비호했으나, 모두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조력자로 불러온 피가로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납득시키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피가로의 정체와 목적을 파헤치다 보면 가장 먼저 파우스트가 딸려 왔다. 긍정적인 상황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비난을 받을 때 파우스트와의 유착관계를 밝힐 수는 없었다.

알렉은 파우스트의 입장을 고려하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주저하는 알렉과 달리 파우스트는 물러섬이 없었다. 질 나쁜 소문과 악의는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사그라들 테지만, 한 번 깎여나간 체면은 돌이킬 수 없다. 파우스트는 존귀한 스승보다 자신의 일신을 우선시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두둔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구나. 굳이 인간과 어울려 살 필요가 없는 나는 괜찮지만, 네게는 적이 생길 거야. 호사가에게 먹이를 주지 마. 파우스트, 넌 잃어버릴 게 많은 사람이다.”

혁명군 내에 피가로가 파우스트의 스승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파우스트 본인과 알렉, 레녹스밖에 없었다. 피가로는 불미스러운 소문에 휘말리기 전에 자신과 거리를 두라고 에둘러 말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두 번 다시 피가로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직접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피가로를 원망하고 그를 탓하던 순간의 기억은 여전히 파우스트에게 깊은 죄악감으로 남아있었다.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를 할 때, 피가로는 독주를 삼킨 것처럼 쓴웃음을 짓는다. 피가로는 다정하고 온후한 사람이니까 분명 그들에게 정을 주었을 것이다.

파우스트는 언제나 피가로를 웃음 짓게 하고 싶었다. 텅 빈 바다에 내버려진 것처럼 허무한 미소가 아니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꼭 자신이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우선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한 번의 실수를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그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처음에는 만류하던 이들도 파우스트의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파우스트는 타인의 아니꼬운 시선에 굴하지 않았으며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끝까지 언짢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노력이 통했는지 머지않아 마음을 돌려주었다.

알렉은 팔을 잃은 뒤로 부쩍 예민해졌다. 부하들 앞에선 평소와 다름없이 의연하게 대처했으나, 파우스트와 단둘이 남으면 사소한 부분에서조차 날 선 태도를 보였다. 환상통을 포함한 자잘한 통증부터 더 이상 전쟁에 나설 수 없는 자신이 무능하다는 착각까지. 알렉은 심리적으로 몰려있었고, 파우스트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친우의 곁에서 떠날 수 없었다.

그 시기의 파우스트는 과민한 알렉을 상대하느라 몸과 마음이 늘 지쳐있었다. 알렉은 이따금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치고, 알렉의 두려움은 명확하게 마법사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법사에게 공격을 당한 것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는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다른 병사들처럼 가끔씩 편집증을 드러냈다.

‘인간은 마법사를 이길 수 없다. 마법사를 동등하게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마법사뿐이다.’

파우스트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주장하던 것이었다. 그 말대로 알렉은 마법사와 그들이 가진 알 수 없는 힘을 두려워했고, 그런 알렉을 진정시킬 수 있는 건 군에 속한 마법사 중에 비교적 강한 축에 속하는 파우스트밖에 없었다.

그즈음이었다. 알렉이 선두에서 물러나면서, 인간 쪽으로 미묘하게 치우쳐있던 군의 지휘권이 마법사 쪽으로 기운 것이.

비어버린 알렉의 자리는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었다. 알렉이 이끌던 부대는 재편성의 여유가 날 때까지 임시로 레녹스가 맡게 되었다. 레녹스는 비교적 초기에 합류한 멤버였고, 알렉의 휘하에 속해있었으며, 유순한 성격과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성정으로 나름대로 인망이 높았다. 권력을 탐하는 소수의 인원이 뒤에서 조금씩 불만을 표출했으나, 어디까지나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당장은 작전의 성공이 중요했다.

레녹스가 알렉을 대신하여 출정하던 날, 파우스트는 레녹스를 막사로 불러 준비를 거들었다. 헐거운 이음매를 조이고 장비를 점검하며 갑주를 걸치는 것을 도왔다.

“레노, 나와 알렉을 위해 승리를 가져다줘.”

”두 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한 목숨 바치겠습니다.”

파우스트 또한 금방 뒤따를 테지만, 알렉의 자리에 대신 서는 레녹스를 상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레녹스의 등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은 채 이마를 붙이고 전해져오는 고동을 듣고 있으려니, 레녹스가 “파우스트님?” 하고 걱정스럽게 이름을 불러왔다.

파우스트는 뒤돌아 서려는 레녹스를 만류했다. 일부러 그의 팔과 어깨를 그러쥐고 정면을 바라보도록 단단히 붙들었다. 얕게 들썩이는 레녹스의 몸은 유달리 따뜻했다. 레녹스가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믿고 따르는 주군으로서 무너지기 직전의 약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살아 돌아와, 반드시.”

파우스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1.

맹렬한 바람에 밀린 억새풀이 일제히 드러누웠다. 드넓은 평야에 수많은 병사가 검은 점처럼 포진해있었다. 평범한 병사와 마찬가지로 무리에 섞여있던 파우스트가 선두로 나왔다. 간결한 동작과 위엄찬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그는 멀리서도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파우스트는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짧게 의논한 다음, 레녹스를 끌어당겨 귀엣말을 건네었다. 레녹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마친 파우스트가 고개를 돌려 신호를 보냈다.

알렉은 그 모든 것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있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왼팔을 들어 신호에 답했다. 동시에 멈춰있던 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뜬 알렉은 열을 맞춰 진군하는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키 큰 나무가 드리운 그늘이 내리쬐는 햇살을 막아주었다. 매서운 추위에 머리카락 틈으로 드러난 귀가 얼어붙고, 겉에 내놓은 손이 곱아들었다.

이유 모를 씁쓸함과 무력함을 느끼고 있을 즈음, 때아닌 훈풍이 불어닥쳤다.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알렉은 거추장스러운 머리칼을 걷어내고 옆을 곁눈질했다. 뒷짐을 진 채 서있는 피가로의 입가가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그의 시선은 멀어지는 병사들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정확히는, 그들을 이끄는 파우스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 테다.

“당신은 어째서 내 옆에 있는 거죠? 나보다는 파우스트의 곁에서 그를 지키고 싶을 텐데.”

“그 애가 누구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파우스트는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야. 내 제자는 혼자서도 잘 하는 아이다. 누구를 상대로도 싸울 수 있고, 쉽게 죽지 않을 정도로 가르쳤지. 당장은 그만하면 충분할 거다.”

알렉은 피가로의 눈에 스며든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간 알렉이 지켜본 피가로는 충격적인 과거를 가진 수수께끼의 인물이지만, 파우스트를 화제로 올릴 때만큼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알렉은 언제나 피가로가 파우스트를 부모의 마음으로 돌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는 애매했다. 피가로는 때때로 파우스트를 야심한 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아침을 밝히는 태양처럼 바라보았다. 아득한 세월의 깊이를 간직한 두 눈에 비치는 파우스트는 어떠한 보석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맹목적인 믿음이자 지독한 환상이며, 어떤 의미로는 피가로 본인이 설파하던 신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토록 손에 넣고자 하는 자신만의 꿈이자 이상 말이다.

“그렇다면, 나를 지키는 것은 파우스트가 시켜서 하는 일입니까?”

“말을 삼가라. 난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아. 허나,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널 비호하는 것은 파우스트가 그러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넌 우리와 달리 약한 인간이니까.”

우리, 명백하게 선을 긋는 단어였다. 알렉은 미간을 슬 찌푸렸다. 파우스트는 당신의 제자이기 이전에 나의 친우인데. 완벽하게 맞춰놓은 대열을 누군가 흐트러뜨린 듯한 불편함이 엄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냉정한 이성은 피가로의 말이 옳다고 동의하고 있었다.

이 사람의 말대로 파우스트는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 인간과 마법사의 수명은 명백하게 차이가 난다. 그들이 아무리 끈끈한 신의로 뭉쳐있다 한들, 모든 관계는 영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끝이 온다. 알렉이 병이나 노환으로 시름시름 앓을 때에 파우스트는 그의 곁을 지킬 것이다. 적어도 알렉이 숨을 거둘 때까지는 계속 함께하며 아낌없는 정을 나눌 것이다. 그러나 낡고 병든 몸에 갇힌 영혼은 점점 무기력해질 것이고, 파우스트는 거동이 불편해진 알렉을 돌보며 서서히 그의 곁을 떠날 준비를 할 것이다.

알렉 그랑벨이라는 한 명의 인간의 삶은 고작 백 년 남짓한 시간으로 종지부를 찍겠지만, 마법사인 파우스트의 삶은 그 이후에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으니까.

그때가 되면 친우로서의 신의와 동료로서의 충의를 모두 다했다며 미련 없이 알렉을 떠날 것이다. 백골이 된 알렉이 차디찬 무덤에 묻힐 때에 파우스트는 두 번째 인생을 찾을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단 하나의 관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파우스트에게는 기나긴 삶을 부여받은 마법사 동료가 있었으며 스승인 피가로가 있었다.

소중한 친우의 죽음에 슬퍼하기야 하겠지. 너무 슬퍼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몇 년을 허송세월로 보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그뿐이다. 알렉의 사후,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앙을 떠날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아닌 우리의 왕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스승을 따라 그와 함께 북녘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추억으로 남는 것과 계속 함께 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후자였다. 내가 없는 곳에서 웃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그리고 서서히 나를 잊어가겠지. 그렇게 수많은 사람과 얽히고 얽히며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이름조차 남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인생에 스쳐간 수많은 친구 중 하나로 기억될 수도 있다.

그것이 아마 서로 다른 우리에게 준비된 미래일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다르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피가로를 보고 있으면 어렴풋한 짐작은 확신이 되어 자리매김했다.

“피가로님은 당신을 파우스트와 같다고 생각하는군요.”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곤란하다. 슬슬 표정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다. 알렉은 침착하게 손을 들어 피가로에게 보이는 얼굴 반쪽을 가렸다. 그대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함을 어렵사리 삼켰다. 무감각한 피가로의 시선이 느껴지며 입안이 바싹 말랐다.

피가로는 짧은 세월을 살아가는 얄팍한 인간의 감정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알렉은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거북했다. 겉으로는 무해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나, 피가로는 인간의 입장에서 너무나도 거대한 포식자였다.

아무리 자비로워도 결국 괴물은 괴물일 뿐. 피가로 앞에서는 어떠한 내색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알렉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가로는 다시 기분 좋게 입가를 허물어뜨렸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분명 같아질 거다. 그것이 유구한 삶을 살아가는 마법사란 존재니까.”

그래, 언젠가는. 피가로는 알렉으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까마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

“파우스트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턱밑으로 불쑥 꽃다발이 들이밀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파우스트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레녹스, 이건?”

“파우스트님의 생일을 맞이하여 다 같이 준비했습니다. 원래는 혼자 하려고 했습니다만, 다들 어떻게든 손을 보태고 싶다고 해서…….”

멋쩍게 목덜미를 훑은 레녹스가 파우스트의 품에 각자 다르게 포장된 여러 물건을 안겨주었다.

“이것도, 이것도. 아, 이것도요.”

선물을 끝도 없이 안겨주는 통에 품이 가득 차는 건 순식간이었다. 파우스트는 자꾸만 손에서 미끄러지는 물건을 잡아 올리며 난처하게 웃었다.

“고마워, 레노. 어쩐지 미안하네. 원래라면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였을 텐데 이렇게 되어버려서.”

“상관없습니다. 저 혼자만의 승리도 아니고, 파우스트님의 탄생일만큼 경사스러운 날은 없으니까요.”

“하하, 그런 말은 부담스러워.”

레녹스는 과묵하고 성실하여 마음 없는 말을 하거나 불필요한 너스레를 떨 줄 모른다. 그러니 직전의 말은 모두 진심일 것이다. 단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의 축하를 받을 수 있다니, 다사다난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자 마음이 따듯해졌다.

파우스트는 근처 바닥에 받은 선물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몸을 가볍게 한 그가 가장 먼저 집어 든 건 꽃다발이었다.

“이건 비앙카인가. 고향의 꽃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소담한 흰 꽃이 줄기에 한 아름 엮여있었다. 파우스트는 꽃다발에 끌어안은 채 코를 묻고 폐부 깊이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레녹스도 금방 선물의 분류를 거들었다.

“이쪽은 에단의 선물이군요. 무척 좋은 검입니다.”

“그래, 투박하지만 아주 튼튼해. 게다가 이 장식, 그 남자도 보기보다 섬세한 부분이 있는걸.”

“그럼 이건? 이 돌조각은 직접 깎은 건가? 부적처럼 보이는데. 아, 이 얇은 건 뭐지?”

“그건 제가 준비한 건데…… 가급적 혼자 계실 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끄럽지만 편지를 적어서.”

“레노가 편지를? 응,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혼자 있을 때 볼게.”

파우스트는 레녹스가 직접 쓴 편지가 그 어떤 선물보다 기뻐 보였다. 한 팔로 새하얀 꽃다발을 안고서 순수하게 웃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덕분에 파우스트를 지켜보는 레녹스의 뺨도 덩달아 느슨해졌다.

“그렇다면 받은 선물은 제가 파우스트님의 방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파우스트님, 알렉님은 만나보셨나요?”

“아직. 이번에 새로 협약을 맺게 되어 바쁜 모양이더군.”

“그쪽과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네요. 그럼 저랑 한잔하시겠습니까?”

파우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에단이 너를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괜찮아. 피가로님을 뵙고 싶기도 하고.”

“그럼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에단도 저도, 다른 사람들도 파우스트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요.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 찾아주세요.”

“알았다. 시간 나면 한 번 가지.”

레녹스는 몸을 숙여 바닥에 놓인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파우스트는 레녹스가 물건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김에 놓친 것까지 잊지 않고 세심하게 쌓아주었다.

레녹스는 하지 말라고 해도 여전히 깍듯하게 인사했다. 파우스트는 레녹스를 배웅한 뒤, 다시 승전 연회가 열리는 회장으로 돌아왔다.

최근 점령하여 거점으로 삼은 요새는 넓은 회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옛 왕조 시절부터 권력을 잡아온 성주가 하루가 멀다 하고 각국의 유명 인사들을 초대하여 향락을 일삼았다는 소문은 사실인 듯했다. 한때는 귀족의 성이었으나, 현재는 혁명군의 본거지가 된 곳에서 인간과 마법사, 나이와 성별, 지위를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교류를 이어가고 있었다.

막상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혁명군 초기에는 마땅한 장소가 없어 모닥불을 피워두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곤 했는데, 지금은 번듯한 장소에서 연회를 열고 있었다. 비록 당장은 어색하지만 앞으로는 기회가 더욱 많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런 생활도 차차 익숙해질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끝까지 방심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혁명이 종착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자각도 있었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기도 잠시, 파우스트는 얕게 도리질 치는 것으로 잡념에서 벗어났다. 감상에 젖는 것은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다음이면 족하다. 그는 회장을 자유로이 누비며 피가로를 찾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과분할 정도로 많은 축하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목표로 한 피가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그를 목격한 사람조차 없었다. 파우스트는 회장을 돌고 돌며 피가로를 찾다가 테라스 근처까지 도달했다. 잠시 앉아서 쉴 곳을 찾던 찰나, 열린 문 너머로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심각한 고민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저주에 당한 것처럼 꿈자리가 사납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자꾸만 꿈에 나타나고…….”

“솔직히 말해 죽음이 두렵습니다. 모두가 대의를 위해 한 몸 바치고 있는데, 저 혼자만 겁을 먹고 물러서는 것 같아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이 감정을 마법으로 지울 수는 없을까요?”

“제게 딸자식 하나가 있사온데, 이 아이는 심각한 난치병을 앓고 있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하루의 절반을 누워서 보내야 합니다. 어느 의사나 마법사에게 보여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어서…….”

신에게 기도하듯 애타게 답을 구하는 목소리는 하나도 빠짐없이 귀에 익었다.

목소리에 얽힌 기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을 쉽게 비난하고 모욕하던 그들의 무례한 언사가 잊히지 않았다. 대의를 위해 완만하게 문제를 해결했지만,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억지로 굽히고 들어갔던 일은 오랫동안 파우스트를 괴롭혔다.

파우스트가 질 나쁜 소문의 해명을 위해 찾아갔을 때에도 끝까지 거만한 태도를 고수하던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누군가에게 간청하는 모습은 실로 기이한 풍경이었으나, 이쪽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언짢은 심기를 갈무리하고 못 들은 척 지나치려던 순간,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혼란한 좌중을 진정시켰다.

“과연, 각자 복잡한 사정이 있구나. 밤은 길고 시간은 많으니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 볼까.”

앞선 이들과 달리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의 내용은 마냥 온화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우선, 너는 저주에 당한 게 아니다. 내면의 죄책감이 형상화되었을 뿐,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들을 위해 작은 제사를 지내도록 해라. 또한,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살아있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감정을 마법으로 지우는 것은 쉽지만, 그에 의존하다가는 다른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게 될 거다.”

원하는 답을 얻은 이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터뜨렸다. 광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맹목적인 믿음이 돋보이는 가운데, 피가로가 말을 이었다.

“난치병이라는 것은 결국 고치기 어려운 것이지, 고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래, 이렇게까지 사정하니 내가 한 번 봐주도록 할까.”

“정말로 그래주시는 겁니까?”

“동이 트면 내 방으로 데리고 오도록 해.”

“아아, 감사합니다, 피가로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피가로님, 결례를 무릅쓰고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기다려, 다음은 내 차례다. 피가로님, 부디 당신의 혜안을 빌려주십시오!”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는 새 주먹을 쥐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염치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사람들 같으니. 한때는 피가로를 혁명군에 빌붙은 한량이자 악독한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며 잇속을 챙기더니, 이제는 감히 그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피가로와 관련된 일이다. 혁명군과 함께 지내고 있지만 그들과 동떨어진 위치에 있는 피가로는 뒤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지 못한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그릇된 자들에게 불필요한 자비를 베푸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파우스트는 주저하지 않고 난입했다.

“피가로님.”

“파우스트, 마침내 오늘의 주역이 왔구나.”

난간에 기대어있던 피가로는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었다. 파우스트는 예로부터 쉽게 격해지는 면이 있어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다. 그는 피가로를 둘러싼 면면을 하나하나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그들은 파우스트의 눈빛에 놀라서 저마다 핑계를 대며 죄지은 사람처럼 도망쳤다. 이제는 동료라고 칭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웠다. 파우스트는 그들이 주방에 숨은 쥐처럼 달아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피가로를 마주했다.

“저들이 당신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정말이지, 넌 여전히 걱정이 많아. 예지를 바란다기에 가르침을 주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당사자의 말이니 믿기야 하겠지만, 떨떠름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시무룩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았고, 피가로는 아무 말 없이 밤의 장막이 드리운 경치를 바라보았다.

무작정 침묵을 이어가던 중,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테라스로 접근하는 몇 명의 사람들은 피가로와 파우스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앞서 만난 이들에게 위치를 물어 찾아온 모양이었다.

인기인은 피곤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두 사람 다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대로면 조만간 그들을 찾는 사람들이 들이닥칠 테라스로 기세였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단순히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둘만 있을 수 있는 장소로 갈까.”

“네, 피가로님.”

파우스트의 어깨에 손을 올린 피가로가 주문을 외웠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동안, 그들은 좁은 테라스에서 광활한 숲으로 이동해 있었다. 피가로는 대화를 나누거나 수업을 할 때 사람이 없는 장소를 선호했기에 이런 식으로 자주 장소를 바꾸고는 했다. 공간 이동 마법에 일일이 놀라고 감탄하기엔 대마법사의 제자로 살아온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파우스트는 그들이 있는 장소를 둘러보았다. 숲은 굉장히 어두웠다. 눈앞의 사물을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막막한 가운데, 달을 등진 키 큰 나무들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빼곡한 수풀 틈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달이 보였다. 하늘에 걸린 거대한 재액은 은색 빛무리를 찬란하게 흩뿌리고 있었다.

피가로는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파우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파우스트, 손을.”

한쪽 발을 뒤로 뺀 피가로가 가볍게 몸을 숙였다. 춤을 청하는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정중했다. 망설임이 섞여있던 과거와 달리 파우스트는 냉큼 피가로의 손을 잡았다.

“그 이후로 얼마나 늘었는지 볼까.”

피가로는 맞잡은 왼손으로 파우스트를 제 쪽으로 당긴 다음, 그대로 손을 풀어 허리를 끌어안고 한 바퀴를 돌았다. 파우스트는 몸에 힘을 빼고 피가로를 따라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피가로를 안고, 남는 손을 어깨에 올린 채 잡초가 자란 흙바닥 위를 둥글게 배회했다.

그대로 몇 번 익숙한 동작을 반복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피가로님, 저…….”

파우스트는 말을 하다 말고 피가로의 눈치를 살폈다. 피가로는 계속 말하라는 듯이 턱을 까딱였다.

“손은, 안 잡아주시나요?”

지금껏 피가로는 파우스트에게 춤을 가르칠 때 언제나 양손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왼팔로 허리를 안을 뿐, 오른팔은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가로가 하는 일이니 마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고 있지만, 역시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파우스트는 궁금한 것은 도저히 물어보지 않고선 못 배겼다. 타고난 성미가 그랬다.

“지금은 이거면 돼.”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질문에 간결하게 답했다. 문제는 하도 간결해서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지만,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순진한 반응을 즐겼다.

파우스트는 끝내 피가로의 생각을 읽어내지 못했다. 피가로는 현명했고, 파우스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눈앞의 상황밖에 보지 못하는 파우스트와 다르게 피가로는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그런 피가로를 보고 있으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체스판이고, 자신이 그 위에 놓인 말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이따금, 아주 가끔이지만 스승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쁜 의도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늘 어리석은 이를 상대하며 누군가를 지도하던 피가로에게는 몸에 밴 습관 같은 것이다.

“파우스트, 이전에 네게 물었던 것을 기억해?”

“피가로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기억합니다.”

“자신이 넘치는구나. 그런 태도 좋아해.”

작게 흥얼거린 피가로가 몸을 틀어 부드럽게 방향을 전환했다. 성가신 이들을 상대할 때보다 한층 풀어진 어조였다.

“몇 달 전, 이상적인 반려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지. 그때 너는 알렉의 옆에 마법사가 있기를 바란다고 했어.”

“……그랬었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파우스트의 견해는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쉽사리 답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는 없고, 그냥 감이었다.

“죄송합니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감히 피가로님의 생각을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러네.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만약 그 자리에 네가 있으면 어떨 거 같아?”

피가로는 정말로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이 경우는 오히려 너무 노골적이라 문제였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몸에 힘이 들어갔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허리를 감싼 팔을 강하게 조였다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느끼고 재빨리 풀었다.

“여러 가능성이 있겠지만 일단 저는 아닙니다. 알렉의 옆에는 저보다 다른 현숙한 여인이 어울릴 겁니다.”

파우스트는 칼처럼 단호했다.

“무엇보다 저랑 알렉은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알렉도 제게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스승 앞에서 언제나 유약한 모습을 보이던 그 답지 않았다. 피가로는 파우스트 몰래 입매를 비틀었다. 어쩐지 우스운 심정이 되었다. 알렉과 파우스트의 관점은 완전히 동상이몽이다. 가엾게도 파우스트는 알렉이 피가로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알렉의 계획에 동의한 이상, 그 또한 공범이었다.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지만,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장 가깝다고 자부하는 사람의 속조차 모른다는 것은 허무하고 비참한 일이다.

“네 말이 옳아. 이런 허황된 가정은 그만두자. 머나먼 가능성을 따지기보다는 가까운 현실을 직시하는 편이 낫겠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춤의 속도는 이야기가 고조될수록 점점 느려졌다. 서로의 숨소리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숨이 조금 거칠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럼 보다 실속 있는 주제를 꺼내볼까. 파우스트,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것이 있지?”

“아,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 자기 제자의 기분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피가로는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파우스트를 한 바퀴 돌렸다.

“무엇이든 편히 물어보렴. 넌 내 유일한 제자니까.”

깐깐하게 격식을 맞춘 춤이 자유로운 형태로 변화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옷자락과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풀벌레가 우는소리를 배경음 삼아 두 사람은 끝없이 이어지던 춤을 마무리했다.

가볍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파우스트가 피가로를 주시했다. 결국 피가로는 끝내 오른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파우스트가 그 손을 잡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피가로의 말까지 종합해 보면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사양 않고.”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대뜸 피가로의 손을 잡았다. 파우스트치곤 대담한 행동이었지만, 피가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요즘 군대 내의 기류가 이상합니다. 서로에게 가진 불만이 심화되면서 인간과 마법사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어요. 혁명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알렉이 자중시키고는 있지만, 잘되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특히 지휘권이 넘어온 일로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마법사 동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현재는 많이 나아졌지만, 한 달 전까지 알렉은 쇠약한 상태였다. 육체보다도 정신이 불안정했다. 혁명군에서 파우스트가 알렉의 오른팔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 피가로와 파우스트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이들은 알렉의 잘린 오른팔을 파우스트에 빗대어 비아냥거렸다.

소문은 깃털처럼 가볍고, 떠도는 바람만큼 빠르다. 소문을 접한 알렉은 한동안 시름에 잠겼다. 그런 그의 곁에 날파리가 꼬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파우스트처럼 정과 인연을 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한평생 욕심을 버릴 수 없기에 사람은 쉽게 변심한다.

아름다운 이상에 이끌려 걸음을 옮긴 이들이 있는 반면, 탐욕에 물든 이들도 있었고, 처음부터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한 이들도 있었다. 혁명군은 인간과 마법사를 가리지 않고 뜻이 맞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중에는 아군인지 적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세상은 마법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믿고 등을 맡기는 동지인 저희조차 이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요. 전쟁이 끝난 뒤에 마법사들은 이 세상에 뿌리내린 혐오를 딛고 잘 적응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더 이상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말을 일축했다.

“앞으로의 일은 모르지만, 아직까지 마법사와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어. 당분간은 계속 그럴 거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을 잡고 돌출된 바위로 이끌었다. 비교적 평평한 부분을 찾은 피가로가 먼저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파우스트, 기억하니? 마법사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과 같은 이야기야. 분쟁의 시대에 어떤 마법사는 속세를 떠나 산속 깊숙이 틀어박혔고, 어떤 마법사는 인간 밑에 들어가 삶을 영위했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을 하는 마법사도 있는 반면, 아주 드물게 인간들에게 사역 당하기를 택한 이들도 있어. 어느 것에도 정답은 없어. 중요한 건 마법사의 효용이 아직 건재하다는 거야. 이 세상은, 인간은 마법사를 필요로 하고 있어.”

피가로는 장난치듯 파우스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무척 간지러웠지만 입을 앙다무는 것으로 간신히 참았다.

“그건 마법사도 마찬가지지. 사람은 고독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마법사보다 인간의 수가 월등히 많으니,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골짜기에 틀어박힐 게 아니라면 결국 교류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거야.”

말을 멈춘 피가로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길게 뻗은 가지와 수풀로 가려진 하늘과 별빛이 내리는 하늘을 반쯤 뒤덮은 먹구름, 어쩌면 그 무엇도 아닌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약한 마법사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어. 아니, 꼭 약한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모든 마법사가 인간과 어울려 살아야 할 거야.”

“당신도 그런가요?”

파우스트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원래는 더 기다리려고 했지만 입이 근질거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마, 나는 아니겠지.”

갑작스러운 질문이 당황스러울 법도 하건만, 피가로는 진지하게 고민해 주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나는 계속 나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사람을 사귈 거다. 누군가를 의지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결국 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야. 애석하게도 모든 마법사가 나처럼 강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니.”

“…….”

파우스트는 말없이 손을 옹송그렸다. 한눈을 팔던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침묵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 말대로, 피가로는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 필요가 없었다. 알렉과 혁명군에게 그러했듯, 아주 가끔 변덕스럽게 사람과 어울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준 뒤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유일한 제자였다. 이 사람에게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 입맛이 썼다. 사제관계는 쉽사리 끊어지지 않지만 피가로를 붙잡아두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피가로는 새처럼 자유로운 사람이었으며 누구도 그를 온전히 품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말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이별을 떠올렸다. 이 혁명이 끝나면, 중앙 국가가 안정되면 피가로님은 그대로 떠나실까? 더 이상 도움이 필요 없는 시기가 오면, 장성한 제자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리실까?

가끔씩 보러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몇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고, 몇 년에 한 번씩 비정기적으로 만남을 갖는 걸로 만족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순식간에 심란해졌다.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게 피가로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속상한 심정을 감추려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데, 피가로가 긴장을 풀어주듯 맞잡은 손을 살살 주물렀다.

“세상은 복잡한 먹이사슬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테면 이런 거야. 메뚜기는 풀을 먹고, 개구리는 메뚜기를 먹고, 뱀은 개구리를 먹지. 먹이사슬은 각자 천적 관계를 갖고 있어. 인간이 마법사를 죽이고, 마법사가 인간을 죽이는 것처럼. 혹은 인간끼리, 마법사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것도 비슷한 이치…… 아, 이런 이야기는 조금 잔인했나? 일단은 넘어갈까?”

피가로는 창백해지는 파우스트의 안색을 살피며 적절히 말을 돌렸다.

“먹이 사슬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존재는 바로 사람이야.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잔혹해서, 가끔 생각지도 못한 수를 쓰고는 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해를 끼치는 한 개체를 절멸시키기 위해 일부러 천적을 풀어놓고 방치한다던가, 뭐 그런 일을 말이야. 그렇다면 할 일을 마친 천적은 어떻게 될까? 사람에 의해 의도적으로 풀려난 이 생물은 앞으로도 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걸까?”

앉은 자리가 몹시 불편했다. 정확히는, 피가로의 말이 불편했다. 의미를 묻고 싶은 마음이 산더미 같았으나, 파우스트는 우선 잠자코 들었다.

“여러 가능성이 있겠지. 하지만 난 공존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않아.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무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에게 공포의 상징이 된 무기는?”

다리를 꼰 피가로가 손을 미끄러뜨려 파우스트의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손목뼈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무기가 눈에 보이고 존재하는 이상, 누군가는 또 그것을 휘두르려 하겠지. 결국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이익과 욕구를 위해 움직이는 존재니까. 결코 나쁘다는 것이 아니야. 그것이 그들의 본질일 뿐이지. 지긋지긋한 싸움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사용이 끝난 무기는 제대로 폐기처분을 해야 돼. 전부 다 불태우고 매장하여 눈에 보이지 않게 해야겠지.”

피가로는 어린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 나긋한 어조로 속삭였다.

“우리들, 마법사는 그런 존재야. 힘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언제까지고 배척당할 수밖에 없는.”

파우스트를 돌아본 피가로는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순 불어온 바람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잔잔한 물살처럼 너울거렸다. 냉열을 모두 간직한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파우스트는 눈꼬리를 내려뜨렸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인간과 마법사를 굳이 분리해서 생각하는 걸까. 마력의 여부만 차이 나는, 똑같은 사람인데.

“방금 전까지는 인간과 마법사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하셨잖아요.”

“필요로 하고말고. 내가 말한 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야. 실제로는 누구도 무기를 처분하지 못하니까. 무기의 존재를 두려워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손에서 놓을 수가 없는 거야. 마법사가 얼마나 강력한 전력인지는 너와 네 군대가 증명했겠지. 쓰임새가 있는 한, 마법사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줄어들 거다.”

“……피가로님은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지금까지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나요?”

문득 피가로와 함께 보낸 밤을 떠올렸다. 피가로를 마주 보고, 그의 품에 안겨있으면 꼭 물에 잠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깊은 물속에 잠겨 전혀 접해본 적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는 것에 비해 파우스트는 그를 알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절대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살아온 세월일 수도 있고, 삶의 방식일 수도, 평범하게 지식의 차이일 수도 있다.

“감사합니다, 피가로님. 당신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모든 것이 명확해졌어요. 안개가 가득 서려있던 머리가 맑게 개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파우스트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스승을 좋아하니까, 그가 이해해 주었으면 하니까. 계속 끈질기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해이해진 탓에 어리석은 소리를 했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스며들고, 마음을 물들여서, 진심을 통하게 하고 싶다고 감히 바라게 되었다.

“피가로님께서는 필요에 의해 다른 사람을 사귀고 쉽게 내친다고 하시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마음을 돌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열기 위해, 이 세상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없애기 위해 알렉과 저는 혁명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저는 혼자가 아니기에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제 곁에는 알렉이, 믿음직한 동료들이 뒤를 받쳐주고 있습니다.”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길이 곳곳에 옮아 붙어 이윽고 중앙 나라를 휩쓸고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듯이, 이 사람도 변화시키고 싶었다.

“처음 혁명을 시작했을 때, 모두가 불가능하다며 헛된 일로 목숨을 낭비하지 말라고 손가락질했었죠. 하지만 보세요, 우리는 어느덧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저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겠습니다. 당신이 살아온 세월과 겪는 일들을 전부 없던 것으로 할 수 없겠지만, 이제부터는 당신을 괴롭고 피로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제가 세상을 바꾸겠습니다. 만약 피가로님을 까마귀처럼 쪼아 먹으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앞장서서 막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열어가는 공존의 시대에 피가로님께서 꼭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파우스트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에는 꽤나 담담하고 냉정한 편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중앙 출신답게, 그의 마음은 작은 자극으로도 너무나도 쉽게 끓어올랐다.

어쩌면 지나치게 몰입한 걸지도 모른다. 파우스트는 어느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두 손을 피가로의 양어깨에 올린 채 바짝 밀착해있었다. 확 좁혀진 거리감에 피가로가 크게 뜬 눈을 끔벅거렸다. 다가오는 파우스트를 피하기 위해 허리를 젖힌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피가로는 차마 파우스트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렇, 그렇구나…….”

더듬었다. 방금 말을 더듬었다!

스승과 많은 순간을 함께했지만, 말을 더듬는 것은 처음 본다. 파우스트는 쥐구멍에 들어가 꾸역꾸역 숨거나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죄송합니다.”

파우스트는 후다닥 손을 떼고 물러났다. 방금까지 앉아있었던 바위로 비틀비틀 걸어간 그는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방구석에 틀어박힌 외톨이처럼 세운 무릎에 얼굴을 처박고 있으니 옆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낯이 뜨거워서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언제나 표표한 스승이 아주 드물게 보여주는 당황한 표정이 좋았다. 무엄하게도, 스승의 곤란한 얼굴을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그러나 맹세컨대 이런 식으로 당혹감을 주려던 건 아니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나.’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정신건강을 위해 과감하게 모른 척했다. 파우스트는 차가운 손바닥으로 화끈거리는 뺨을 꾹 눌렀다. 한 번 오른 열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분위기가 엄청나게 어색했다. 모종의 책임감을 느낀 파우스트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 했으나, 결국 그만두었다. 여기서 더 이상한 짓을 했다간 피가로가 소리 소문 없이 도망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우스트와 마찬가지로 피가로 또한 침묵을 고수했다. 조심스럽게 곁눈질한 피가로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평소 보여주던 이지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무척 멍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세운 무릎에 팔을 괸 파우스트가 피가로의 머릿속을 멋대로 상상하고 있을 때였다.

“파우스트.”

“네, 네넵!”

피가로가 이름을 불렀다. 파우스트를 둘러싸고 있던 몽글몽글한 공상이 비눗방울처럼 펑펑 터져나갔다. 파우스트는 화들짝 놀라 앉은 채로 펄쩍 뛰었다.

“오랫동안 나와 있어도 곤란하니, 슬슬 돌아갈까?”

“네에…….”

반응만 보면 꼭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 같았다. 피가로는 새빨갛게 물든 파우스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파우스트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그는 숱 많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으로 열심히 얼굴을 가렸다.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파우스트는 버릇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겹쳤다. 한겨울의 찬바람이 전신에 도는 열을 급속히 식혀주었다.

그제야 조심스럽게 피가로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피가로의 안색은 쏟아지는 달빛 탓인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얼굴에 짙은 패색이 묻어나는 건 착각일까. 묘하게 기분도 저조해 보였다.

“피가로님, 왜…….”

왜 그런 얼굴을 하시나요? 어째선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달싹인 입술은 뿌연 입김만 가득 토해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피가로는 그를 막지 않았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손끝이 뺨에 닿기 전에 스스로 제동을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렴.”

“……아닙니다.”

닿지 못한 손은 마음만큼이나 조용히 수그러들었다. 열이 가신 몸에 한기가 스며드는 건 금방이었다.

*

멀리까지 나갔던 두 사람은 피가로의 마법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오래 자리를 비운 건지 모르겠지만, 회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파우스트는 연신 피가로의 눈치를 살폈다. 피가로는 여전히 언짢은 기색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가로님이다. 문제가 있으면 직접 말씀해 주실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파우스트가 벌받는 사람처럼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파우스트님. 여기 계셨군요.”

테라스로 나온 레녹스가 파우스트를 보고 반색했다. 레녹스는 날이 쌀쌀한데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줄곧 파우스트를 찾고 있던 모양이다.

“모시러 왔습니다. 알렉님이 부르십니다.”

“알렉이?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라도…….”

“걱정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알렉님께서 자정이 지나기 전에 파우스트님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렇군. 전해줘서 고맙다.”

알렉의 부름을 받은 파우스트는 몹시 들떠 보였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에게 목례한 뒤, 자리를 떠났다. 파우스트는 레녹스를 지나치면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귀엣말을 했다. 드물게 당황한 레녹스가 “예?” 하고 큰소리를 냈다. 아무리 봐도 납득하지 못한 사람의 반응이었지만, 시간이 없었던 파우스트는 레녹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무언가를 멋대로 부탁하고는 갈 길을 갔다.

레녹스는 파우스트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지르며 피가로에게 다가왔다. 레녹스는 피가로 옆에 목석처럼 서있을 뿐, 정작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말주변이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럴 거면 뭐 하러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상대는 드물다. 피가로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을 텐데, 레녹스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계속 파우스트를 찾아다녔으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피가로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안심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모시는 주인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어느 쪽이든 감이 좋은 녀석이었다. 우직하고 외골수인 줄만 알았는데, 의외였다.

피가로는 혁명군 내에서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파우스트와 알렉을 제외하면 레녹스가 그나마 면식이 있는 편이었다. 레녹스는 파우스트의 수행 시절부터 함께였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피가로의 오두막에 함께 찾아왔고, 수업을 같이 들었다. 레녹스는 마법사라기보다는 마력이 없는 인간에 가까웠다. 그는 마력이 아주 적었고, 마법에 낯설었다.

곁다리로 가르침을 받던 레녹스는 피가로의 수업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강한 마법사도 아니고, 당돌하지도 않으며, 어느 것 하나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피가로의 기억 속에 레녹스는 항상 인상이 흐릿했다. 피가로에게는 언제나 파우스트만이 중요했으므로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나마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정말 우직하다는 것이다. 레녹스는 기다리는 것도 잘하고, 찾아다니는 것도 잘했다. 요령을 모르고 성실한 것은 이 주종의 특징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엄청나게 끈질기다는 것이다. 파우스트의 그런 점을 좋아하지만.

피가로는 한숨을 쉬면서 잘 정돈된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역시 무슨 생각을 하던 다시 파우스트로 돌아가버린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겨울바람 덕인지 머리는 일찍이 차분해졌다. 그러나 직전에 파우스트와 나눈 대화가 끊임없이 머릿속에 나돌았다.

뭐가 알렉이고, 뭐가 우리냐. 그깟 이상, 그깟 혁명 따위. 그냥 패권을 쥐기 위한 싸움에 불과하잖아. 인간과 마법사의 공존 같은 말도 안 되는 목표에 눈을 빛내기나 하고. 스스로 어려운 길을 간다. 파우스트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복잡한 것은 다 내던지고 자기 한 몸 지키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데. 그 애에게는 스승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데.

‘……아니지. 아니야.’

피가로는 앓는 소리를 내며 깍지 낀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실은, 나를 선택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알렉의 당부도, 참된 스승으로서의 본분도 잊고, 파우스트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다른 소중한 것들을 전부 내칠 정도로 자신을 바란다고, 그 애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 것이다.

타인에 대한 것은 비교적 알기 쉽지만, 자신에 대한 것은 늘 어려웠다. 뚜렷하게 원하는 것이 있음에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야 서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손에 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봐버렸으니까.

파우스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가족과 친구, 동료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피가로가 우습게 여기는 혁명이 파우스트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오즈에게 한껏 큰소리쳤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피가로가 가장 원하는 것을 파우스트는 줄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파우스트는.

앞으로 몇십 년, 몇백 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이루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파우스트의 곁에 아무도 남지 않는다면 말이다.

인간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마법사는 자신의 삶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그날이 오면, 소중한 것을 잃은 파우스트의 곁을 지키며 그를 위로해 주는 것이다. 어느 때고 혼자가 되지 않도록 곁에 머무르는 거다. 그렇게 된다면, 나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런 점이 싫었다. 이런 부분이 지긋지긋해서 견딜 수 없었다. 상대를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서 고립되기를 바란다니, 맨 정신으로 가능성을 따지는 자신이 소름 끼쳤다. 납작 엎드려 사랑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지리멸렬한 자기 연민의 시작이었다.

충동은 갑작스럽게 밀려왔다. 전부 다 내려놓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깊은 골짜기에 틀어박혀, 시간이 약이 될 때까지 웅크려있고 싶었다. 결국 사무치는 외로움에 못 이겨,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사람의 온기를 찾아 헤매더라도 지금 당장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숨을 쉬는 일조차 잊었던 것 같다. 피가로는 손으로 만든 그늘에 얼굴을 숨긴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물에 잠긴 것처럼 서서히 침잠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감각에 집중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건드렸다.

“피가로님, 마실 것을 가져올까요?”

상처 입은 짐승을 대하듯 신중한 자세였다. 피가로는 그제야 레녹스의 존재를 인지했다. 혼자만의 생각에 몰두해서 레녹스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피가로는 레녹스의 손을 밀어내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꼿꼿하게 곧추세우고 있던 몸을 무너뜨리고 비스듬히 턱을 괴었다. 찬바람을 하도 많이 쐰 탓에 골이 지끈거렸다. 피가로는 성가신 것을 쫓듯 레녹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도 네 일행이 있겠지? 이만 가보도록 해.”

“아닙니다. 여기 있겠습니다.”

“어차피 파우스트가 부탁했겠지. 그 아이에게는 알아서 둘러댈 테니 내 눈치 볼 것 없다는 거야.”

레녹스는 잠시 멍을 때렸다. 맥락을 보건대 정곡을 찔려 당황한 것 같다. 이런 때마저도 표정 변화가 전혀 없어 오히려 무서울 정도였다.

“……부탁을 받은 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피가로님 옆에 남아있고 싶습니다.”

“어째서.”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한심한 이유였다. 입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피가로는 레녹스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낯을 굳혔다.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 들은 탓에 맥이 탁 풀렸다.

“너도 참 희한하구나.”

그 말을 들은 레녹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멍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아뇨, 자주 듣는 말이라서…….”

피가로는 대차게 콧방귀를 뀌었다. 덕분에 우울한 마음이 싹 가셔버렸다. 처음부터 이것을 노린 거라면 대단히 영리한 녀석이었다.

피가로는 난간에 반쯤 매달린 채 레녹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위대하신 현인이 체통 없이 액체 괴물처럼 녹아있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분명 뭐가 문제인지도 모를 것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주제에 영 귀염성이 없었다. 피가로는 눈앞의 아이로 무료함을 달랠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런 무뚝뚝한 성격은 취향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마시아 열매처럼 새빨간 눈이 오즈를 떠올리게 해서 기분 나빴다.

*

인기척이 없는 복도는 적막했다. 파우스트는 한적한 복도를 거닐며 쾌재를 불렀다. 그는 방금까지 알렉과 함께 있었다. 레녹스를 통해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알렉은 실제로 파우스트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혁명이 막바지에 이른 요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단둘이 있는 시간은 오랜만이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심히 불안했던 알렉의 상태는 올해 들어 부쩍 나아졌다. 파우스트가 곁에 없으면 어쩔 줄 모르던 것이 거짓말처럼, 지금은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알렉은 정말 대단하다. 신체 일부를, 그것도 오른팔을 잃었음에도 머지않아 모두가 믿고 따르는 흠잡을 데 없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자리에 있는 게 파우스트 본인이었다면 절대 알렉처럼 무던하게 굴지 못했을 터였다.

알렉은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지만, 파우스트가 몸담은 혁명군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알렉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게 기뻤다. 오늘은 그가 다시 예전처럼 대해주는 게 좋아서 참지 못하고 마셔버렸다.

실컷 마신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최근 음주는 자제하고 있다. 물론 금주는 아니었다. 많이 마셔봤자 목을 축이는 정도였다. 평소에는 살짝 들뜰 정도만 마시다가 분위기를 탔을 때만 조금 더 마셨다.

계기가 된 것은 작년의 연회였다. 피가로가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번 흥을 참지 못하고 끝까지 달린 적이 있었다. 무슨 추태를 보였는지는 모르나, 눈을 뜨자마자 무언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날 마주한 피가로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 점이 무서웠다. 지난밤에 대해 넌지시 물어봐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날 밤의 일을 기억에서 송두리째 도려낸 것처럼.

잘은 모르겠지만 말도 못 하게 끔찍했음이 틀림없다. 엄청나게 두려워서 레녹스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스승의 입버릇처럼,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피가로 앞에서 심각한 추태를 보였다면 도저히 얼굴을 들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그날 밤의 일은 영원히 미궁 속에 묻혔다. 왜 갑자기 그 일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늦게까지 이어지던 연회가 마무리된 요새는 고요했으며, 밤은 서서히 깊어갔다.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그전에 피가로님께 인사를 드리고, 부탁을 들어준 레노에게는 감사를 전하자.

피가로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스승은 무척 멀게 느껴졌다. 원래도 손에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당장이라도 떠나버릴 듯했다. 하늘하늘한 그 사람을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누군가 붙잡아주었으면 했다.

멋대로 맡기고 가긴 했지만, 레녹스에게 피가로는 까마득히 높으신 분이다. 자기보다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을 불편하게 여기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물며 레녹스는 말주변이 없으니까, 아마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역시 미안한 짓을 했다.

오늘따라 유독 길게 느껴지는 복도만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계속되었다.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잡념에 휩싸여있던 파우스트는 빠르게 접근하는 인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사각지대에 있던 사람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가까스로 멈춰 서긴 했으나, 상대의 풍족한 가슴에 튕겨나갔다. 비틀거리는 파우스트를 맞은편의 사람이 두 손으로 단단히 붙들었다.

고작 살덩이에 밀려났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파우스트의 머리 위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그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파우스트님.”

“아, 레노구나.”

파우스트는 가슴팍에 손을 얹는 것으로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진심으로 당황한 그와 달리 레녹스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마침 찾고 있었습니다. 파우스트님, 잠깐 괜찮으신가요?”

“무슨 일이지?”

레녹스는 말을 하려다 말고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파우스트의 목이었다.

“그 목걸이, 못 보던 거네요.”

“아아, 이거 말인가.” 중얼거린 파우스트가 쇄골을 더듬었다. 그는 목에 걸린 얇은 끈을 손으로 쥐며 수줍게 웃었다.

“알렉이 선물로 주었어. 잘 어울리나?”

“네, 어울립니다.”

“같은 칭찬이어도 네게 들으니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군.”

파우스트는 목걸이를 다시 옷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엇나간 주제를 되돌렸다.

“그래, 피가로님은?”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끝까지 배웅해 드리려고 했는데, 절대 싫다며 거절하셔서요.”

“레노, 너도 참…… 아니다.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지. 그래서, 볼 일이라는 건?”

레녹스가 아, 하고 목을 울렸다. 목적이 있어 찾고 있었으면서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다.

“피가로님과 관련된 일입니다만.”

“피가로님의…….”

피가로의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파우스트는 본능적으로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을 법한 곳을 찾아 레녹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레녹스의 입에서 피가로의 이름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파우스트가 생각하기에 레녹스가 절대 언급하지 않을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피가로였다. 너무 자연스럽게 입에 담아서 이상한 줄도 몰랐다.

“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파우스트님께선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마른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파우스트는 잔뜩 긴장했다. 레녹스의 느린 말이 이렇게까지 감당이 안 되었던 적이 없었다. 다행히 레녹스는 파우스트의 초조함을 읽은 것처럼 빠르게 말을 이었다.

“피가로님께선, 이곳을 떠나실 생각이신가 봅니다.”

“……이곳이라는 건?”

“아마도 혁명군을. 그리고…….”

“나의, 우리의 곁을 말인가?”

레녹스는 “네…….” 하고 우물거렸다. 그는 드물게 파우스트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불편한 감정이 드러났을 수도 있다. 깨닫고 나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레녹스의 말은 파우스트의 불안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가 말한 것에 대해선 짚이는 바가 있었다. 최근에, 바로 직전까지 파우스트도 비슷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레녹스가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의외였다. 파우스트가 아는 피가로는 빈틈이 없으니까, 자신의 종자인 레녹스를 상대로는 절대 빈틈을 보이지 않을 줄 알았다.

한편으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같은 부분에서 결핍을 가진 사람끼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결핍이 없는 사람이기에 더욱 빠르게 깨닫는 부분이 존재한다.

전란의 시대에 태어난 것치고 레녹스는 비교적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만큼 마냥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대다수 긍정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레녹스의 그런 순수한 면이 피가로를 자극했을 수도 있다. 그래봤자 추측에 불과하지만.

“레노, 피가로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해?”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습니다.”

때로는 몇 번 보고 말, 가벼운 사이이기에 솔직해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만약 피가로가 레녹스에게 어떠한 암시를 주었다면, 그래서 이런 부분에 한없이 둔감한 레녹스조차 직감을 느낀 거라면.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았을 정도로 속이 답답했다.

“레녹스, 너도 피가로님이 아무런 언질도 없이 떠나실 것 같아?”

“조금은…….”

“확실하게 말해줘. 그렇게 느꼈어?”

“……네. 파우스트님도 같은 생각을 하셨나요?”

“모르겠어. 기우라고 하고 싶지만…….”

공기가 무거웠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드리우던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져, 빛이 없는 복도는 캄캄한 어둠에 잠겼다. 파우스트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냈고, 레녹스는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레녹스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저는, 피가로님께서 누군가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표현은 파우스트님의 스승이자 위대한 마법사인 그분에게 실례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레녹스의 말이 옳았다. 레녹스는 대체로 둔하지만, 가끔은 놀라운 적중률을 보였다. 불확실한 일에 말을 아끼는 레녹스가 피가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파우스트는 이미 그 말에 공감했다. 머리로는 일찍이 이해했지만, 내심 부정하고 싶었다.

“정말 이상하지. 단 한 번도 그분이 나를 두고 떠나실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당연히 평생 내 곁에 있어주실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파우스트는 꽉 막힌 숨을 연달아 몰아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고마워, 레녹스. 피가로님과 대화해 볼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을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 사람의 존재가 도움이 되어서가 아니다. 관계에 이득이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그분이 좋았다. 함께 있으면 편하고 의지가 되었다. 마력이 담긴 별사탕처럼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사람이었다. 그 별사탕이 혀 위에서 녹아내리듯, 고작 한두 해 알고 지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삶에 깊이 스며들었다.

피가로를 바꾸고 싶은 건 그 사람에 의해 자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서투른 마법을 안정시키고,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오르는 법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거였다. 설령 이 생이 다할 때까지 갚을 수 없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깨달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피가로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이별을 상정하기엔 이미 잔뜩 마음을 줘버렸다.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아버지처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사람이었다.

파우스트에게는 과분한 사람이다. 피가로님을 만나 그분의 제자로 들어간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과욕은 화를 부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존재했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파우스트는 무엇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랐다. 그들의 길을 열어주고, 행복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더 나아가, 자신 또한 그들의 존재로 충만함을 느끼고 싶었다.

알렉과 레녹스, 피가로님, 그리고 다른 동료들까지. 모두 함께 지금처럼 가까이 지내고 싶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도, 혁명의 성패와 관련 없이 이 삶이 허락하는 한 언제까지고 계속.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과 평생토록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욕심이라면, 나는 기꺼이 욕심쟁이가 되겠어.’

파우스트 라비니아라는 사람은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마법사로 태어나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 반푼이였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했다. 언제나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으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부족할 수는 있지만 결코 못난 사람은 아니었다.

욕심을 부리는 것은 그릇된 일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최선의 결말을 바라기 마련이다. 모두를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는 것이 욕심일지라도, 그들이 실망하고 떠나가지 않도록 몇 배는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붙잡을 것이다. 더 이상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걷어차는 멍청한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악착같이 매달려서 반드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것이다.

“바로 피가로님께 가시나요?”

“그래, 그전에 레노, 네게도 할 말이 있어.”

한 번 마음을 먹으니 그다음은 훨씬 쉬웠다. 파우스트는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입 밖에 내었다.

“너와 가족이 되고 싶어. 그러니 내 여동생을 만나주었으면 해. 낯을 많이 가리지만 착한 아이야. 먼저 진지하게 만나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 주면 좋겠어.”

예상대로 레녹스는 놀란 표정이었다. 레녹스의 기분이 이해가 갔다. 처음으로 묘안을 떠올렸을 때, 파우스트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저는 괜찮지만, 파우스트님의 동생분께선…….”

“네가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는 내가 보증해. 그 애는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나를 닮아 보는 눈이 있는 아이니까.”

“과분한 칭찬이네요.”

“그렇지 않아. 자신감을 가져.”

“알겠습니다. 혁명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맞죠?”

레녹스의 물음에 파우스트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고맙다, 잘 생각해 주었어.”

언뜻 보면 혈육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편이 그녀에게 더 좋았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혁명을 무사히 마무리 지으면 알렉은 중앙 국가의 왕위에 오른다. 파우스트는 누구보다 가까운 신하로서 평생 알렉을 모시고 보필하며 살고 싶었다. 모두의 염원을 짊어진 알렉이 마침내 이상을 펼치고, 그의 왕국이 번영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알렉의 사후, 소중한 친우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를 버티지 못하고 중앙을 떠나게 될지라도, 알렉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고 싶었다.

알렉의 곁을 지키는 건 파우스트의 선택이었다. 파우스트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고, 당연히 수많은 혼담이 오갈 것이다. 제 한 몸 정도는 어떻게 챙기더라도 가족까지 온전히 보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므로 여동생에게 믿음직한 혼약자를 미리 만들어두는 일이 필요했다. 마침 레녹스는 성품이 곧고 우직하여 흠잡을 데가 없었다. 누구도 마다하지 않는 일등 신랑감이었다.

물론 레녹스와 가족이 되고 싶다는 말도 진심이었다. 가족이라는 연으로 더욱 끈끈하게 맺어진다면 두려움 없이 보다 안정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파우스트가 보기에 레녹스 또한 마음 둘 거처를 찾고 있는 듯했다. 인간과는 다른 마법사의 기나긴 삶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것은 레녹스도 마찬가지였다. 남 말 할 처지는 못 되지만, 그런 레녹스에게 의지가 되고 싶었다. 부족한 자신을 믿고 따라준 그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파우스트님, 평안한 밤 되세요.”

“너도.”

레녹스가 이런 억지를 받아들여줘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한시름 덜었다. 파우스트는 꾸벅 인사하는 레녹스의 어깨를 친밀하게 두드리며, 피가로가 머무는 방 쪽으로 향했다.

*

“피가로님, 파우스트입니다.”

파우스트는 늘 그랬듯이 방문을 두 번 두드렸다. 적막한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문 너머에 있는 스승이 답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지난 어느 날을 떠올리게 했다. 팔다리를 좀먹은 저주를 안고 골머리를 썩이던 어둔 밤 말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낡은 경첩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앞에는 피가로가 서있었다.

그때와 다르게 피가로는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피가로는 환복하지 않은 상태였다. 방으로 돌아간 시간을 생각하면 살짝 부자연스러웠다. 혹시 아직도 기분이 좋지 않으신 걸까. 파우스트는 걱정스럽게 피가로를 살폈다. 피가로 쪽에서 몸을 숙여주지 않으니, 그의 안색을 살피려면 반드시 고개를 젖혀 올려다봐야 했다.

불이 켜져 있지 않은 방은 무척 어두웠다. 이따금 커다란 창을 통해 달빛이 들이치는 복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마법으로 띄운 작은 등불에 의지하여 문턱을 넘었다.

“오늘도 잠을 못 이루겠니?”

협탁으로 걸어간 피가로가 등불에 불을 붙였다. 은은한 주홍빛이 서서히 번지며 방 안을 밝혔다. 파우스트를 돌아본 피가로는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 미소는 평소와 달랐다. 고상하고 인자하기는커녕 몹시 비린 맛이 느껴졌다.

“모처럼 좋은 날인데 더 즐기지 않고.”

“시간이 늦었습니다. 내일부터 다시 강행군을 해야 하니, 다들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구나.”

깊게 생각하고 꺼낸 말이 아닌지 피가로는 적당히 수긍했다. 잘 모르겠지만, 그는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이미 더 들어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머리가 복잡한 상태일 수도 있다.

“지금은, 그러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준비를 할 시간이 부족했던 걸지도 모른다. 앞서는 마음을 전달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상대가 아름답고 지혜로운 피가로님이다. 이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지천에 널렸을 것이다. 기나긴 세월 동안 파우스트로선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고백을 들어왔을 터였다. 그런데도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왔다.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그들보다 멋지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파우스트가 가진 것은 이 한 몸뿐이었다. 유일한 제자라는 자존심, 고작 한 해에 불과한 얕은 교제, 그럼에도 그분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자각뿐. 그 알량한 것들이 파우스트를 지금 이 순간까지 이끌었다.

혁명군의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파우스트는 관계에 소극적이었다. 알렉은 누군가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일단 그 사람과 관계를 맺으라고 했다. 사람의 진가를 알고 싶으면 무조건 관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차근차근 알아가는 것이 묘미라고 누누이 이야기했다.

알렉은 아무리 잘못된 사람이라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얼마든지 고쳐 쓸 수 있다며 손을 놓기를 거부했다. 알렉의 그런 대담함이 늘 부러웠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선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게 알렉이었다면, 보다 자연스럽게 말을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해 피가로의 오두막을 찾아가 혁명군에 합류해달라고 부탁했을 때처럼, 훨씬 솜씨 좋게 대화를 이끌었을 것이다. 적어도 파우스트처럼 지레 겁을 먹고 거절당할 상황을 상상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이다지도 말재간이 없는 걸까.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파우스트는 조명이 가려주기를 바라면서 슬쩍 고개를 숙였다. 열 오른 얼굴이 화끈거렸다. 분명 잘 익은 홍시처럼 발그스름하게 물들어있을 것이다.

여러 번 심호흡을 해봤지만, 긴장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피가로는 어정쩡하게 뜸을 들이는 파우스트를 보고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앉으렴.”

파우스트는 홀린 듯이 걸어갔다.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왜 하필 침대일까. 말 못 할 의문이 싹튼 것은 이미 푹신한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뒤였다.

“이곳은 아니지만, 어쩐지 구조가 비슷하구나. 이런 성에서 너의 발을 씻어주었지. 그때가 그리워.”

“저도…….”

피가로는 꽉 조이는 목깃을 넉넉하게 풀어냈다. 두 팔로 침대를 짚고 몸을 기대는 그는 아까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드디어 원래의 엄격하면서도 느긋한 스승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비록 파우스트의 시선은 피가로의 목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말이다.

벌어진 옷 사이로 곧게 뻗은 목선이 들여다보였다. 파우스트는 정성 들여 그은 한 획처럼 우아한 선을 몇 번이고 훔쳐보다가 죄를 짓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스승의 드러난 피부에 눈길을 거두지 못하다니, 이 무슨 파렴치한 제자가 다 있단 말인가.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파우스트의 고개는 나날이 수그러들기만 했다.

자상한 스승이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추억담을 꺼내들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얼떨결에 피가로와 눈이 마주친 파우스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피가로는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능하다. 파우스트도 스승이 마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상상을 수없이 해왔다. 그런 점에서 감탄할 때, 피가로는 오래 산 지혜이거나 나쁜 버릇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피가로가 자신의 생각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그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파우스트, 이제 물어도 될까? 내게 할 말이라는 건?”

불행 중 다행으로, 피가로의 말은 파우스트를 현실로 되돌려놓기에 충분했다. 자칫 볼 일이 있어 찾아왔다는 사실마저 잊을 뻔했다.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도망가려던 몸을 피가로 쪽으로 바짝 끌어앉았다.

팔이 닿을 정도로 밀착한 파우스트가 고개를 기울여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피가로님은 수천 년을 살아온 대마법사시죠? 긴 세월을 지내는 동안 외롭지 않으셨나요? 남들과 다른 시간을 가진 마법사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지 않았나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로 살아가며 언젠가는 반드시 당면하게 될 과제였다. 사실은 답하고 싶지 않은 주제였으나, 애제자의 정중한 질문은 올바른 스승으로서 도저히 피해 갈 수 없었다.

“글쎄, 어떨까…….”

피가로는 이것을 가르침을 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파우스트는 이미 절친한 친우의 죽음을 상상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적이 있다. 마침내 파우스트가 머지않아 찾아올 미래를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면 성심성의껏 답해주어야 한다.

지금껏 피가로는 수없이 많은 사람을 지켜봤다. 그가 관측한 사람 중에는 인간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당연히 마법사의 수도 적지 않았다. 피가로가 느끼기에, 마법사의 약점은 마음이었다. 마음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역설적이게도 힘의 원천과 약점이 동일했다.

마력과 정령의 존재로 인간보다 큰 힘을 가진 마법사는 뜻밖에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변수 때문에 쉽게 망가지고는 했다. 인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거나 가족, 혹은 친지에 둘도 없이 소중한 인간이 있는 경우, 그들을 잃었을 때 마법사는 쉽게 무너졌다. 돌연적인 사고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수명 문제임에도 그러했다.

파우스트는 어린데도 무척 심지가 곧고 단단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혁명은 당연히 성공할 것이고, 알렉은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인간은 믿을 수 없지만 알렉의 곁에는 파우스트가 있었다. 파우스트는 알렉이 잘못된 길로 갈 때마다 바로잡아줄 것이다.

알렉이 수명을 다하기까지 앞으로 수십 년이 남았다.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마음의 동요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정확하게 허점을 찔러온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그들처럼 상실로 인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다.

“토지도, 초목도, 산도, 바다도. 모든 것이 형태를 바꾸고 없어졌어. 마력이 강한 마법사는 쓸데없이 오래 살아.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마법사보다, 그리고 자연보다도 오래 살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바뀌는 걸 계속 지켜봤어. 말도 못 하게 외로웠지.”

피가로는 변덕스러운 쌍둥이 스승을 떠올렸다. 자기들 좋을 대로 제멋대로 구는 쌍둥이를,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랄까 봐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동생제자를, 그밖에 바람처럼 가볍고 짓궂은 치렛타나 인연이 있는 다른 마법사들을 떠올렸다.

외로웠다. 엄청나게 외로웠지만, 돌이켜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이었다. 물론 이만큼 살았는데도 아직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득이하게 속이 답답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삶이 절망적이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낙망은 아주 어릴 적에 이미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죽을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어. 내 주위에는 나만큼 오래 사는 마법사들이 있었고,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주어진 운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거든. 게다가 약한 소리를 하기에는 남들도 비슷하게 살고 있겠지? 그런 관점으로 접근하면 내 고민 같은 건 순식간에 일상적인 생각이 되어버리는 거야.”

“……제겐 아직 어려운 이야기네요. 충분히 경험할 법한 일인데도 아득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정작 파우스트는 애매한 얼굴이다. 역시 파우스트에게는 살짝 일렀을까. 조금 더 다정한 방향으로, 관념적으로 접근했어야 했는데. 피가로가 내심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전보다는 확실히 이해하기 쉬운 것 같아요. 저도 조금은 성장한 걸까요.”

“파우스트, 한 가지 물어보자.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한 거지? 그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져서요.”

파우스트가 깊은숨을 토해냈다. 한숨과는 달랐다. 그는 소맷자락을 매만지며 머릿속으로 할 말을 다듬었다.

“조금 전에 피가로님께서 물어보셨죠. 알렉의 반려 자리에 제가 있으면 어떨 것 같냐고…… 그 이후 여러 가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제 생각은 그때와 같지만, 결정적으로 한 가지 달라진 부분이 있어요.”

알렉의 이름이 나오자 피가로의 안색이 일변했다. 파우스트는 그 잠깐의 변화를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자꾸만 어른거리는 불빛 탓으로 여겼다.

“예전에는 그 녀석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입 밖에 내는 것이 저주라도 되는 것처럼, 막연히 두려워하고 걱정했죠. 하지만 이제는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소중한 사람들이 저를 두고 떠난다는 생각은 괴롭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사로잡혀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청년에게 마법사로서 살아갈 수백 년은 마치 영생처럼 느껴진다. 레녹스 앞에선 자신만만하게 굴었으나, 아직도 파우스트는 앞으로 주어진 까마득한 삶이 두려웠다.

알렉은 인간이고, 결국 파우스트를 두고 먼저 생을 마감할 것이다. 지금은 뜨겁게 불타는 혁명도 언젠가는 전부 빛바랜 기억으로 남을 터였다. 서서히 바래가는 추억을 간직한 채로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별은 단순한 끝이 아니었다. 그때의 추억은, 가슴에 담긴 감정은, 끝없이 이어지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임을 알았다.

“알렉이 살아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그를 보필할 예정입니다. 적어도 나라가 안정될 때까진 그의 곁에 있어야겠지요.”

“그렇구나. 좋은 생각이다. 미련은 남기지 않는 편이 좋겠지.”

피가로는 제자의 성장을 마냥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견함을 느끼는 동시에, 치미는 어떤 감정을 최선을 다해 억누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토록 참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졌으나, 지금은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데 급급했다.

“인간의 삶은 너무나 짧습니다. 고작 스무 살에 불과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피가로님의 말씀 덕에 비로소 상실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마른침을 삼킨 파우스트가 말을 이었다.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워요. 피가로님의 말씀대로 인간도, 마법사도 고독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이별이 있다면 그만큼 새로운 만남이 있을 테니까, 제 곁에는 저처럼 긴 세월을 살아가는 동료들이 많이 있으니까…….”

말을 이어갈수록 피가로의 표정이 점점 흐려졌다. 때마침 겨울바람이 겉창을 두드렸다. 파우스트의 눈을 비껴가던 피가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소리가 난 쪽으로 옮겨갔다. 안돼, 지금이 아니면 영영 말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예감이 들었다.

피가로님이 내게 온전히 집중해 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를 향해 상반신을 기울이고 살집 없는 손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얇은 피부 아래 느껴지는 뼈를 하나하나 더듬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만약, 언젠가 모든 것을 저버리고 떠나고 싶은 날이 온다면…… 피가로님, 그때는 저와 함께 가주실 건가요?”

당신 덕분에 올바르게 날아오르는 방법을 배웠다. 이제는 아무리 높은 곳에서도, 어느 장소에서도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동요하지 않는다. 당신이 여러 번 믿어주고 온화한 얼굴로 웃어주었기 때문에, 실수를 하더라도 ‘다시 해보자’라고 말하며 격려해 주었기 때문에.

“아주 먼 여행이 될지도 모릅니다. 발길이 닿는 대로 이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험하고 궂은일을 수도 없이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저와 함께해 주실 겁니까?”

피가로와 접촉한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미친 듯이 뛰는 맥박에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헐렁하게 앉아있던 피가로가 몸을 바로 세웠다. 한구석에 남아있던 느슨한 면이 완전히 가셨다. 피가로는 붙잡힌 손을 물리려고 했지만, 손등을 내리누르듯 덮은 파우스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승낙이든 거절이든 반드시 답을 들어야겠다. 파우스트는 그런 일념으로 팔에 힘을 주고 버텼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행동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자유로운 손으로 얼굴의 반을 가렸다. 알아듣기 어려운 작은 중얼거림이 한숨처럼 번졌다. 쉴 새 없이 들썩이던 손이 잠잠해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파우스트, 네가 원한다면.”

얼굴을 덮은 손을 미끄러뜨린 피가로가 아주 천천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핏기가 가신 입술에 다시 붉은 기가 번질 즈음, 엷은 눈동자가 파우스트를 향했다.

“우리는 마법사니까, 어디든 갈 수 있어.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이 날아오르면 자유롭게 뛰어넘을 수 있지. 네가 속세에 지치게 되면, 그때는 함께 떠나자. 모두 내려놓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법사의 여행을 떠나는 거야. 네가 원한다면 내가 스승으로서 그 길을 함께해 주마.”

피가로는 기다려주겠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기나긴 세월을 살아가는 마법사로서, 곁에서 지켜보며 언제나 손을 잡아주겠다고. 약속은 아니지만, 한없이 약속에 가까운 말이었다. 파우스트는 격정적으로 밀려오는 감정의 물결에 숨을 허덕였다.

“감사합니다, 피가로님. 정말 감사합니다.”

고민할 것 없이 바로 피가로를 끌어안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건지, 피가로의 어깨를 힘껏 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피가로님을 만난 건 행운이에요.”

“나야말로.”

짧게 답한 피가로는 곧 얕게 도리질 쳤다. 고작 그 정도의 말로는 부족하다는 듯,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내 파우스트의 등에 팔을 둘렀다.

“……너는 내게 정말로 과분한 사람이야, 파우스트.”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유구하게 지녀온 습관일지도 모른다. 머리는 지배하는 희열 때문일까, 아니면 받아들이기 싫었기 때문일까. 피가f로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묻어있다는 사실은 외면해버렸다.

3.

겨울의 막바지, 알렉을 위시한 혁명군은 강행군을 펼치며 중앙성 일대에 진출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 근방에 도는 묘한 소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소문의 내용은 간단하다. 몹시 포악한 마법사가 옛 왕도를 정복하고 성을 빼앗았으며, 근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수탈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혐오하는 마법사의 존재는 그리 드물지 않았다. 마법사와 인간의 갈등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이들의 마찰은 이미 수백, 수천 년간 지속된 것이며, 절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단순히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서라면 굳이 중앙성을 차지하고 농성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중앙성은 줄곧 옛 왕조의 후예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을 터, 일반적인 마법사가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춘 그들을 상대로 혼자서 승리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높은 확률로 살아남은 옛 왕조의 후예와 손을 잡았을 것이다. 그쪽도 혁명군의 발 빠른 진군에 맞춰 진작 움직이고 있었을 테니.

피차 미력한 이들끼리 동맹을 맺는 건 현명한 방법이다.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라면 더 쉽고 간편한 방법이 있겠지만,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피가로는 단언할 수 있었다. 찰나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이미 손에 쥐고 있는 부귀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시하네. 고작 그런 것 따위에 집착하다니.’

현재 중앙의 마법사는 세계정복을 하던 오즈에 의해 쓸려나가, 몹시 어리거나 변변찮은 마력을 지닌 이들밖에 남지 않았다. 운 좋게 소식을 접한 덕에 참사를 면했다고 해도 그래봤자 중앙 출신이다. 치밀하게 조직된 군대에 정면으로 맞설 정도는 아닐 것이다. 빠르게 근접하는 혁명군의 소식을 접했을 텐데 물러나지 않는 것은 다른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이런 식인가.’

이렇게 되면 완전히 구세력과 신세력의 싸움이었다. 혁명군에 합류할 때부터 짐작했던 양상대로 흘러갔다.

저쪽도 어느 정도 세력이 큰 만큼 까다롭기야 하겠지만, 결국 혁명군이 승리할 것이다. 어느 정도 정해진 결말이었다. 단순히 자신이 가세했기 때문이 아니다. 성 안에 틀어박혀 농성이나 하는 겁쟁이들과 중앙 전체를 휩쓸며 이곳까지 도달한 혁명군은 쌓인 경험부터가 차이 났다.

물론 혁명군이 이렇게까지 끈질길 줄은 저쪽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혁명이 여기까지 도달할 줄은.

‘정말로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나다니, 영웅이라는 말에 손색이 없군.’

이 부분에서는 피가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구세력을 상대로 하는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적은 왕도 밖에서부터 방어전을 펼쳤다. 왕도로 접근할수록 과거 유력 귀족이 지배하던 구역이 많아졌다. 그런 성이나 요새는 다른 곳에 비해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구조와 설비가 잘 짜여있었다. 그중에서도 혁명군이 목표로 하는 요새는 비교적 외곽에 있었으나, 전쟁이 길어질 것을 대비하여 거점으로 삼기에 좋은 위치였다. 어차피 잔존 세력 전부를 복속시키기 위해선 무조건 거쳐가야 하는 관문이었다.

요새는 사면에 강을 둘러싸고 있었다. 때문에 요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나 하늘을 통해야 하는데,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수위 자체는 깊지 않지만, 으레 그렇듯이 맨몸으로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늦겨울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날이 추웠다. 표면에 살얼음이 낀 강은 몹시 차가웠다.

그렇다고 하늘을 경유하기에는 마법사 부대가 따로 있는 혁명군을 의식하여 상대도 이미 대비책을 갖춰놓았을 것이다. 마법사 부대라고는 하나, 정식으로 스승에게 교육을 받은 이들은 얼마 없었다. 아직까지 빗자루를 타고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숙달된 마법사라면 모를까, 마법사는 대개 비행 중에 무방비해진다. 그 상태에서 격추당하면 그대로 물에 떨어져 손쓸 도리 없이 목숨을 잃고 만다.

어느 곳 하나 빈틈이 없다는 점에서 과연 난공불락의 요새라 부를만했다.

‘오즈의 벼락 한 번에 와르르 무너져버려서 몰랐지만.’

생각해 보면 오즈의 벼락을 맞고 멀쩡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쓸만한 거라고는 튼튼한 몸과 마력밖에 없는 북쪽의 마법사도 오즈의 마법을 정통으로 맞으면 속수무책으로 돌이 되어버리고는 했다.

아무튼 혁명군은 어떻게든 요새를 공략하려 했으나, 지리적 악조건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그들은 큰 수확 없이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공략전이 뜻밖에 지체되면서, 겨울을 맞이하며 원래도 느려졌던 진군이 더욱 더뎌지게 되었다.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주는 건 첫 번째가 돈과 물자요, 두 번째가 좋은 지휘관이며, 세 번째가 강한 장수였다. 하지만 그것들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병사들의 사기였다. 병사들의 사기가 자잘한 요인으로 쉽게 오르내리는 걸 생각하면 지금은 무척 안 좋은 상황이었다.

굳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파우스트라면 다 알고 있을 테지만.

“피가로님, 부상자의 치료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손을 거들지.”

때마침 돌아온 파우스트가 도움을 청했다. 얼굴에 진 그늘로 보건대, 정찰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듯했다. 파우스트는 묵묵히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으며 다친 병사들을 돌보았다. 피가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소리 없이 안타까워했다.

알렉이 팔을 잃은 이후, 파우스트는 한동안 계속 우울해했다. 제자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파우스트는 꾸밈없이 밝은 얼굴이 제일 잘 어울렸다. 아이의 미소를 보지 못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내심 아쉬워하던 찰나, 1월의 생일을 기점으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사이 커다란 마음의 짐을 덜은 것이 틀림없었다. 비록 이쪽은 그날의 대화를 떠올리면 어쩔 수 없이 불편한 기분이 되어버리지만 말이다.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언젠가는…….’

어떠한 문제를 미루고 외면하는 것은 오래 산 지혜이자 나쁜 버릇이었다. 회피하는 태도가 불성실하게 보일 수도 있다. 누가 뭐라 하든 나름대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여기에 체류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네.”

피가로는 의무실 막사를 나오자마자 운을 떼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안으로 밀고 들어갈 방법을 찾을 거라고 했었지. 그래서 파우스트, 계획은?”

피가로가 질문할 것을 예상했는지, 파우스트는 긴장으로 목을 움츠렸다.

“계획이라고 해봤자 힘으로 뚫는 것밖에 없는데요…….”

“정말 그뿐일 리가 없잖아. 내가 너를 잘 아는데.”

“그것도 그렇네요.”

파우스트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파우스트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도, 이 이상 지체할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것이 걱정입니다만, 목표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해서 분위기가 처져있어요. 날이 따뜻해진다 해도 승리는 요원합니다. 그때까지 모두가 버틸 수 있을지는 더더욱…….”

작게 한숨 쉰 파우스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는 대낮에 보일 리 없는 달의 흔적을 눈으로 좇았다.

“피가로님도 느끼고 계시죠? 마침 재액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열흘 뒤는 만월이 뜨는 날이죠. 부쩍 가까워진 달빛이 쏟아지는 날이라면, 마법사가 많은 저희가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그날까지 체력을 온존하다가 요새의 방호를 뚫겠습니다. 마법사가 선두에 서서 요새의 안쪽부터 제압하면 훨씬 진입이 수월하겠지요.”

“넌 언제나 위험한 작전을 떠올리는구나.”

“저도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습니다만…… 역시 이 밖에 다른 방법은 생각이 나지 않네요.”

“그 점은 나도 동의해.”

위험성은 둘째 치고서라도 굉장히 좋은 작전이었다. 시기가 좋았다. 재액이 가까워지면 마법사의 마력은 강해진다. 그때에는 아무리 약한 마법사여도 평소보다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마법사의 활용이 보다 자유롭다면 다양한 전술을 획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피가로가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번거로웠다.

‘그보다 쉬운 방법이 있는데.’

피가로는 뇌리를 스쳐간 어떠한 가능성에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개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금까지 잘도 도외시해놓고 이제 와서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다니. 아마 끝이 다가오기 때문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일 테다.

파우스트는 알렉에게 보탬이 되고 싶어 은둔하는 피가로를 찾아왔다. 파우스트와 피가로를 이어주는 가장 두꺼운 끈은 바로 혁명이었다. 사제관계에 부여하는 의미는 서로 다르다. 결국은 동상이몽이다.

어느 겨울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찾아와 마법사로서 살아가는 고민을 토로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필요로 했으나, 냉정히 말해 피가로는 뒷전이었다. 그 또한 소중한 것은 맞지만, 피가로는 알렉이 인간이라서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대신 채워주는 일종의 대체재였다. 적어도 피가로가 느끼기로는 그랬다.

이 혁명이 끝나면 그땐 정말로 파우스트에게 자신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너저분하기 짝이 없는 스승의 실체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차마 드러내기 부끄러운 것이라 꽁꽁 감추었으니까.

알렉을 향한 파우스트의 믿음은 굳건했다. 무슨 대화를 해도 알렉의 이름이 나왔다. 파우스트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소중한 친우의 존재는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피가로가 말하는 ‘우리’와 파우스트가 말하는 ‘우리’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포하는 뜻이 전혀 달랐다.

파우스트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 매 순간 알렉과 파우스트의 굳건한 관계를 느끼고, 추악한 질투에 몸서리치며 비참함을 느끼더라도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당장은 이 아이의 가장 소중한 것이 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리라고 믿으려고 했다.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천 년을 넘게 살아왔다. 지난 시간에 비하면 그깟 백 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분명 그럴 텐데, 그래야 할 텐데…… 왜 이렇게 버티기 힘든 걸까? 당장이라도 파우스트가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떠나버릴 것 같은 건 어째서일까?

‘이래서 생각하지 않으려 한 건데.’

오랫동안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돌고 돌아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형태로 정착해버리고 만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다. 파우스트에게서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을 들었으니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피가로는 여전히 도망치고 싶었다.

알렉의 옆에서 웃는 파우스트를 볼 때마다 속이 매스꺼워졌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간 알렉의 부탁에 따라 파우스트를 가르치던 시간이 떠올랐다. 어째서 그런 부탁을 들어주었을까. 하지만 그건 정치에 좀처럼 뜻이 없는 파우스트의 입지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만약 틀렸다고 한다면, 무엇이 옳은지 누군가 답을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늘 이런 마음으로 살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매달리면서.

‘……지친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오즈 앞에서 실컷 지껄인 만큼 이번은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진심은 어땠을까. 파우스트의 말대로 피가로는 언제나 때와 상황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켰다. 피가로는 자신을 감추는데 너무 능숙해서 가끔은 자기 자신마저 감쪽같이 속이고 만다.

제자 자랑은 일부러 했다. 파우스트의 귀여운 점을 한 명이라도 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오즈를 도발하고 싶었다. 그 박정한 녀석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무언가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다.

이럴 거면 세계정복 같은 일은 끼어들지 말 걸 그랬다. 딱히 보답을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계속 그때의 그림자에 속박될 줄 알았더라면 세상이 통째로 불타버리더라도 거들지 않았을 것이다.

“피가로님, 왜 그러세요?”

왁자지껄한 상념을 가르고 다정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피가로를 돌아보는 파우스트는 제비꽃 같은 눈에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파우스트의 말을 놓쳐버린 듯했다.

구름이 이동하면서 생긴 그림자가 파우스트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이상하다. 피가로는 무채색으로 물든 파우스트를 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자신의 제자가 전혀 일면식 없는,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피가로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

늘 그렇듯, 당면한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며 모른 척 외면했다. 그러는 동안 열흘은 덧없이 지나가고, 어느덧 파우스트가 지정한 날이 왔다. 파우스트는 미리 예고한 대로 늦은 밤에 작전을 개시했다.

둥그렇게 뜬 달은 성의 뒤편, 탑의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먹구름이 낀 어두운 밤하늘과 검푸른 강은 제법 운치 있는 풍경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조차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는 모양이다만.

알렉과 함께 후방에 있던 피가로는 병사들이 흉흉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사기가 심각하게 떨어진 탓인지, 아무도 강을 건너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잔뜩 주눅 든 이들을 독려하는 건 힘든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염려와 달리, 파우스트는 동요하지 않았다. 준비를 마친 파우스트는 당당한 걸음으로 알렉에게 다가갔다.

“알렉, 너의 생일에 걸맞은 최고의 승리를.”

파우스트는 정중하게 몸을 낮춘 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알렉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알렉은 몸을 반듯이 세운 채 파우스트를 내려다보았다. 순식간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피가로는 그것이 약속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미래에 나눌 약속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혼은 약속이다. 예로부터 인간과 결혼한 마법사는 매우 드물게 존재했다. 피가로도 세상을 돌아다니며 몇 번 그런 마법사를 만났다. 수명이 다른 마법사와 인간 사이에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었다. 이를 뛰어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길어야 백 년.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마음을 묶인 마법사는 배우자의 사후, 쇠약해지다가 결국 오래 살지 못하고 명을 다했다. 그들이 가여웠다. 어리석고 안타까웠지만, 동시에 부러웠다.

답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파우스트의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연을 끊을 각오를 하고 떠나거나. 선택지는 두 개뿐이었다. 이미 수차례 실패를 겪어봤기에, 파우스트 같은 사람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이대로 알렉의 배우자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과 약속하고 그 사람에게 마음을 건넨 파우스트를, 피가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의 마음을 온전히 차지하지 못한다면, 자신으로 가득 채우지 못한다면 결국 평범한 관계와 다름없었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피가로는 파우스트에게서 알렉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마침내 피가로는 결정했다. 이건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심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은 충동일까.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타인의 어긋난 길을 잡아주는 건 꽤 자신 있었지만, 피가로에게는 그런 옳고 그름을 알려줄 신이 없었다. 그런 존재가 실제로 있었다 해도, 과연 결과가 달라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오랫동안 알렉의 손등에 입술을 누르고 있던 파우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파우스트는 이번에는 피가로를 향해 부탁했다.

“피가로님, 마지막으로 조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어.”

손 위에 떠오른 오브가 느리게 회전했다.

“내가 길을 열어주지.”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강 앞에 대열을 갖추고 있던 병사들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기울어진 달이 강 위에 새하얀 은빛의 길을 드리웠다. 피가로는 까마득한 세월을 지나, 다시 한번 이곳에 섰다. 어리고 한심했던 과거에는 이 광경을 보며 참으로 감상적인 생각에 잠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야 했다.

피가로는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광채를 발하는 오브에서 쏘아진 눈부신 화살이 수면을 쏜살같이 가로질렀다. 마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빛나는 꼬리가 달빛이 낸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하얀 포말이 수면 밖으로 뿜어져 나오고, 잔잔한 강물에 수십 개의 빗금이 그어졌다.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친 물은 거센 파도처럼 일렁이며 외곽으로 쏟아졌다. 사방으로 퍼진 물보라를 맞은 것처럼 먹구름이 걷히고, 부글거리는 물거품은 점점 넓어지다가 이내 물 위를 덧씌우듯 사라졌다.

성곽까지 이어진 길이 단숨에 뚫렸다. 심하게 물러 질퍽거리는 흙길 너머, 굳게 닫힌 성문이 보였다. 좌우로 갈라진 강물은 투명한 장벽에 막힌 듯 탁 트인 길로 쏟아지지 않았다. 물이 세차게 쏟아지는 소리가 잦아들고, 한차례 거친 폭풍우가 지나간 것처럼 비정상적인 고요가 찾아왔다.

기적을 목도한 이들은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같은 사람의 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세상 어딘가에 깊은 물을 가르고 우뚝 솟은 산을 평지로 만드는 강력한 마법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모두가 부풀려진 소문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파우스트였다.

“진격하라! 신은 우리의 편이다!”

파우스트의 외침에 따라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드높아진 사기만큼이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는 귀가 아플 정도였다.

“파우스트, 잠깐.”

피가로는 선두로 향하는 파우스트를 붙잡았다. 파우스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기다리지 않고 그의 뺨을 감싸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피가로님, 이건…….”

화들짝 놀란 파우스트가 팔을 마구 휘저었다. 그럼에도 피가로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파우스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져있었다. 엉망으로 흔들리는 순진한 눈망울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러났다. 축복의 마법을 걸었다는 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것이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등을 힘차게 밀어주었다. 수줍은 청년의 모습에서 장수의 다부진 얼굴로 돌아간 파우스트가 다시 앞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갔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등을 바라보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원래의 자리라니, 이렇게 우스울 데가. 사실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공연히 손목을 문지르다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피가로에게서 어떠한 기색을 읽어낸 알렉은 놀라지 않았다. 알렉은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피가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감이 좋은 녀석이었다.

“알렉, 나도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할까.”

이미 알고 있다면 번거롭게 돌려 말할 필요는 없었다. 피가로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알렉을 돌아보았다.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줘.”

“약속하겠습니다, 반드시.”

하늘에 뜬 달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알렉은 시린 바다처럼 푸른 눈으로 피가로를 보며 맹세했다. 그의 말에 절로 웃음이 났다. 즐거워서 나는 웃음이 아닌, 허탈한 웃음이었다.

약속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은 이렇게나 쉽게 약속을 입에 담는다. 그것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사실은, 피가로도 파우스트에게 선뜻 약속하고 싶었다. 아무런 고민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너와 함께 살겠다고 약속하고 싶었다. 그저 적당히 둘러댄 말이 아니라 진심 어린 마음을 건네고 싶었다.

질투를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인간을 상대로, 지저분하게 시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차피 이런 꿈같은 시간도 전부 끝이었다. 좋은 순간은 아슬아슬한 추억만 남기고 전부 물거품처럼 녹아버렸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필요는 없었다. 쓰디쓴 실패를 삼키고 돌아서면서, 몇 번이고 파우스트를 떠올렸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곱슬머리, 상냥한 자색 눈동자, 수줍은 미소를 떠올렸다. 추운 겨울에도 항상 따뜻한 손과 그보다 뜨겁게 불타는 심장을 떠올렸다.

언제 어느 때고 다정하고 아름다웠던 제자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축복을 덧대었다. 너에게 축복을. 네가 행복하기를. 앞으로도 줄곧, 네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살면서 유성우가 떨어지는 모습을 수십, 수백 번도 넘게 지켜보았다. 지겨우리만치 반복되는 풍경에 감흥이 일기 시작한 것은 유성우가 쏟아지는 날에 네가 내게로 왔기 때문에. 그만큼 너는 내게 각별했다. 너로 인해 다시 한번 꿈을 꾸었다. 실망이 불러온 공허를 딛고 일어나, 나의 행복보다도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을 우선으로 바라게 되었다.

파우스트는 그 자체로 충분히 완벽하다. 그 아이를 바꾸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알렉을 버리고, 그간 이룬 것, 동고동락해온 관계를 전부 자기 손으로 직접 끊어내고 나를 선택해달라고 말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뻔히 정해진 결말을 돌려보겠다고 무작정 떼를 쓰고 애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좋으니 나만 봐달라고 매달리고. 그따위 우스운 촌극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추하게 매달린다면 그 아이는 나를 봐줄 것이다. 손에 쥔 것을 놓지도, 나를 내버려두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겠지. 그거야말로 비극이다. 그건 그 아이를 망가뜨리는 행동이었다. 애지중지 키운 제자를 내 손으로 직접 꺾을 수는 없었다.

파우스트가 나를 선택했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무슨 말을 해도 알렉이 원한다면 파우스트는 결국 그와 약속을 할 것이다. 평생의 사랑을 약속하는, 동반자의 약속을. 설령 알렉이 죽고 나서도 내게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한 쌍으로 존재했던 쌍둥이 마법사가 있었다. 언제까지고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덥힐 것 같았던 그들은 어느 날, 차가운 눈밭을 구르게 되었다. 무릎까지 쌓인 새하얀 눈은 동생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날 얼음의 숲에서 스노우는 화이트의 돌을 양손 가득 움켜쥐고 오열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스노우는 기어이 화이트를 되살렸다. 어리석게도 날 때부터 주어졌던 자신의 반쪽을 제 손으로 없애고, 다시 되살려 그와 함께 웃고 있었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그들은 직접 그것을 증명해냈다. 인간이든, 마법사든, 사람은 반드시 변심한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마법사보다 훨씬 편하다. 백 년은 짧다. 변심하기 전에 수명을 다할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약속을 했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 죽음으로 박제되어 영원히 변치 않는 존재로 남아있다면. 죽음은 가장 완벽한 형태의 종결이다. 산 사람은 절대로 죽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

피가로라는 사람은 알렉 그랑벨과 다르다. 파우스트가 아무리 외로워해도 자신은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할 것이다.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멋대로 참견하고 멋대로 내팽개쳐지고, 다시 그때와 같은 경험을 하는 건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었다. 다행히 오래전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린 덕에 눈치가 빨랐다. 퇴장할 순간은 알고 있다는 것은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빗자루에 올라타 싸늘한 밤바람을 맞고 있으면 소란스러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피가로는 일찍이 가라앉은 머리가 이끄는 대로 무작정 북쪽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역시 이 이야기는 오즈한테 하지 말자. 그 녀석이 알면 분명 비웃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정착할 거라고 호언장담하더니, 결국 또 못 참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으니까. 입 밖으로 내진 않아도, 조금의 인내심도 없는 녀석이라고 속으로 생각할 거야. 비웃음을 당하고, 우습게 여겨질 테니 말하지 말자.’

뼈저린 실패의 기억은 혼자만 품어도 충분하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었다. 이제 더는 좋은 스승으로 남지 않아도 된다. 나 자신을 속여가며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 하지만…… 조금 더 제대로 끝을 맺을걸. 이런 식으로 급하게 도망치지 말 걸. 좋은 기억으로 남도록 적당히 둘러대기라도 할걸. 이미 늦었어. 이런 생각을 지금 와서 해봤자,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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