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1권 part.1


0.

달이 높이 뜬 늦은 밤, 수많은 막사 중 하나에 흐릿한 불빛이 비쳤다. 등불이 켜진 막사 안에서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조심스럽게 운을 뗀 건 젊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말문이 막힌 것처럼 곧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건너편에 앉은 상대의 안색을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주홍빛의 등불은 어두운 막사 내부를 밝히기는 한참 부족했다. 청년의 이목구비는 흔들리는 불꽃에 따라 단편적으로 드러났다. 눈앞에 있는 상대의 표정을 간신히 살필 정도의 어둠 속에서도 청년의 새하얀 머리카락만큼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맑고 곧은 푸른 눈이 곧바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향했다.

“파우스트와 혼인하려 합니다.”

피가로는 그 말에 눈을 돌렸다. 무료하게 흘러가던 시선이 똑바로 알렉을 향했다. 옅은 회색으로 보이는 눈이 상대를 내려다볼 때는 훨씬 어두운색이 되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조언을 구하기 위해 군영으로 모셔온 위대한 대마법사는 상대를 마주 볼 때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가 많았다.

발밑을 기어가는 벌레를 보듯 무심한 눈빛이었지만, 알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특별한 부탁을 하기 위해 왔으니 보다 낮은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알렉은 몸을 바로 세우며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나의 친우 파우스트 라비니아와 혼인하여 인간과 마법사가 화합할 수 있는, 더욱 조화롭고 강건한 왕국을 세우고 싶습니다.”

“현명하군. 그런 방법으로 공신을 챙기겠다는 건가.”

대담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피가로가 입을 열었다. 피가로는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딱딱한 말투와는 달리 목소리에는 얕은 흥미가 묻어났다.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알렉은 우선은 그 부분에 안도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괴짜 마법사 중에는 제자에게 유별난 집착을 품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다행히 피가로는 그런 부류는 아닌 듯했다. 파우스트가 피가로의 제자로 들어간 건 고작 일 년 남짓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눈을 통해 가만히 살피고 있을 때였다. 피가로가 어깨너머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무심한 손길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마법사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반발심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초대 국왕이 자신의 친우이자 오른팔인 마법사와 국혼을 올린다면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은 없어지겠지.”

느긋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핵심을 파고들었다.

“좋은 판단이다. 역시 넌 영리해. 중앙의 기질로선 의외라고 할까.”

피가로는 명쾌하게 호평했다. 동시에 무릎 위에 말아 쥐고 있던 알렉의 주먹이 느슨해졌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눈앞의 어린 것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 피가로에게는 훤히 들여다보였다.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쌓아 올린 연륜은 절대적이라, 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쯤에서 피가로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한데, 내게 그 말을 꺼낸 연유가 뭐지?”

“피가로님이 도와주십시오.”

대답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 피가로는 가만히 숨을 들이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대며 턱을 비스듬히 들었다. 계속 말해보라는 태도였다.

“아무리 설득해도 꾸밈없고 정직한 파우스트는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제 곁을 보다 명망 있는 여식이 지켜야 한다며 역으로 저를 설득하려 들겠지요.”

다시 한번 파우스트의 이름이 거론되자, 피가로의 입가가 기울어졌다. 방을 비추는 등불의 불빛만큼이나 희미한 미소였지만, 빛을 발하는 짙은 홍채엔 즐거움이 듬뿍 묻어났다.

“그 애는 그런 면이 있지.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한없이 약해. 나도 몇 번 가르쳐 보려 했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알렉은 평소 무뚝뚝한 대마법사의 얼굴이 제자에 대한 애정으로 물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파우스트의 스승이자 북쪽 나라의 대마법사인 피가로 가르시아는 몹시 어려운 인물이었다. 모든 마법사들이 대하기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피가로는 독보적이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가늠이 가지 않는 표표한 얼굴, 산을 가르고 바다를 뒤집는다는 강력한 힘,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인간들을 치료해 주는 자비로움. 인간들을 어여삐 여기는 건가 싶다가도, 군에 합류하여 적을 대하는 손속은 한 치의 자비도 없었다.

거기에 평범한 마법사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과 모든 사람들을 낮잡아보는 듯한 오만한 태도까지. 무엇보다 이 사내 주위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험한 분위기가 흐른다. 가볍게 말을 걸라 치면 본능이 매섭게 경고음을 울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오로지 파우스트를 화제로 올릴 때만큼은, 명화처럼 반듯한 낯을 한 눈앞의 남자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위대한 대마법사가 자기 자식이 예뻐 죽겠다는 부모처럼 익숙한 얼굴을 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하염없이 이어지는 침묵을 깬 것은 피가로였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 나의 힘을 빌리겠다고. 나보고 그 애를 함정에 빠뜨리라는 건가.”

순수한 애정과 사랑스러움에 눈을 빛내기도 잠시, 고운 얼굴이 금방 차가운 조소를 머금는다. 알렉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금방 평정을 되찾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함정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만, 결과적으로 파우스트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너도 알고 있겠지. 마법사의 약속은 결코 가볍지 않다. 파우스트를 소중히 여기고 그 아이와 일생을 함께 할 생각이라면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거다.”

말끝마다 한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가로는 원래 말을 이렇게 많이 하지 않는다. 그는 어리석은 것을 경멸하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파우스트에게 전해 들은 바 있었다. 그런 그가 보기 드물게 어울려주고 있었다.

“알렉 그랑벨, 네게는 그런 각오가 되어 있나?”

알렉은 그 말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비록 당사자는 이 자리에 없지만, 마치 주례를 통해 정식으로 혼례 절차를 밟는 기분이 들었다.

“네. 무슨 일이 있어도 파우스트를 지키고 곁에 두고 싶습니다.”

그 또한 여러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애초에 이런 전란의 시대에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을 이상으로 혁명을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어린 시절, 파우스트라는 마법사와 친교를 나눈 것은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파우스트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스스로 선택했다. 어떤 형태로든 둘도 없는 소중한 벗의 손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알렉 그랑벨의 약속이었다.

“그렇군…….”

반응을 보건대, 의지는 충분히 전해진 것 같다. 중얼거린 피가로가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아주 잠깐 쓴웃음을 지은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알렉은 피가로를 따라 잔을 들었지만,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피가로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남은 술이 밑바닥에 찰랑거리는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을 뿐이다.

“뜻은 알았다. 협조하지.”

복잡한 고민은 필요 없었다. 피가로는 그 자리에서 시원하게 결정을 내렸다. 대화는 이걸로 끝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피가로는 알렉을 등진 채 뒤돌아섰다. 이만 나가라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감사합니다, 피가로님.”

막사를 벗어나기 전, 알렉은 대마법사의 넓은 등에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다.

5.

우연히 제자를 들였다. 오즈에게 내쳐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사실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건 혼자만의 생각이고, 아마 백여 년은 훌쩍 지났을 것이다. 백 년이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때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시름에 잠겨있었다.

마음의 상처는 몸의 상처보다 오래간다. 천 년을 넘게 산 마법사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은 백 년 남짓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하필이면 피가로 자신이 속 좁고 쪼잔한 사람이라 더욱 상처가 오래갔다.

사무치는 고독 속에서 박정한 동생제자를 원망했다. 칩거하는 오두막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을 때만 한 번씩 밖으로 나가 애타게 신을 부르짖는 목소리에 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북쪽 나라엔 궁핍한 사람이 차고 넘치게 있었다. 피가로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한없이 굶주림을 닮은 감각을 간신히 억눌렀다.

계속 이도 저도 아닌 한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그 아이가 찾아왔다.

“나는 파우스트 라비니아! 약한 자들의 희생을 없애기 위해, 어지러운 세계를 바로 세울 깃발을 든 알렉 그랑벨의 동포다!”

먼 곳에 있는 피가로의 거처에 직접 걸음 한 어린 마법사는 당돌하게도 목청 좋게 소리치며 문을 두드렸다.

“이곳에 가까운 마을의 병을 치료하고, 붕괴한 골짜기를 하룻밤 만에 구원한 기적의 대마법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피가로 가르시아님! 부디, 저의 스승이 되어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때마침 유성우가 내리는 날이었다. 등 뒤로 무수히 쏟아지는 별똥별이 보였다. 날아오는 별은 여행객이다. 세계를 바꾸는 여행객이 찾아오면 멈춰있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성우의 사자가 찾아온 덕분에 영영 멎은 줄 알았던 자신의 세계도 변할 예감이 들었다.

북쪽 나라의 위대한 대마법사 피가로 가르시아. 마왕 오즈의 동료이자 그의 책사. 살아있는 유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 오즈가 하도 유명한 탓에 세계정복 건은 보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그는 피로 쌓아 올린 수많은 경험을 가진 의문의 마법사였다. 그런 사람에게 찾아와 지도를 청하는 용기가 가상했다.

하물며 파우스트는 마법사와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이상론을 내세웠다. 긴 세월을 살면서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인간도, 마법사도, 서로 죽도록 싸우는 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북쪽의 마법사라 그 사실을 지리멸렬하게 느끼면서도 결국 납득하고 순응하게 되었다.

타인의 입에서 듣는 이상은 꽤나 좋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쏟아내는 이상이 아름다웠던 건지,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자색 눈이 아름다웠던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마침 세상은 다양한 분쟁으로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세계를 지배하던 자가 사라져, 대륙의 패권을 둘러싼 싸움이 한창이었다. 백여 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으로 사람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법사와 인간의 화합이라.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아이의 말에 설득당한 자신이 있었다. 설득이라고 해야 할까. 실은, 이미 한참 전부터 파우스트를 제자로 받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세계정복 같은 터무니없는 짓을 벌였으니 이 정도는 속죄이자 취미로 괜찮을 터였다.

결정을 내리면 실행은 빨랐다. 한 해를 꼬박 가르쳤다. 파우스트와 그의 종자까지, 북쪽 나라에 위치한 피가로의 오두막에서 함께 숙식하며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가르쳤다. 수업은 다소 거칠었지만 쌍둥이 스승만큼 험하게 굴리지는 않았다.

파우스트는 정말로 잘 따라와 주었다. 울고불고하진 않더라도 적당히 마음이 꺾여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그러지 않았다. 무슨 과제를 주든 기어이 해내고 말았다. 가끔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주눅 들지 않고 다시 한번 힘차게 발돋움을 했다.

그야말로 바라왔던 이상적인 제자였다. 쌍둥이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도 편달하는 과정에서 파우스트와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파우스트와 대화할 때 알렉 그랑벨은 빠질 수 없는 주제였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알렉에 대해 말하는 파우스트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자부심이 넘실거리고 있어, 최고의 단짝이라는 느낌이었다. 몇 마디 하지 않아도 두 사람 간의 우정과 두터운 신뢰가 느껴졌다. 추악한 감정으로 속이 쓰린 것과는 별개로 항상 열정적인 그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어딜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제자였지만 집착할 정도는 아니었다. 파우스트에게는 파우스트만의 인생이 있다는 걸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전쟁 도중에 빠져나온 파우스트는 금방 본부대로 합류해야 한다. 그러니 가르침을 베푸는 것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한 해뿐이었다.

무작정 떼를 쓰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별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무릇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파우스트는 다시 피가로가 머무르는 오두막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소중한 제자, 파우스트의 친우는 건방진 인간이었다. 파우스트가 염치가 있어 하지 못한 일을 그 녀석은 기어이 해냈다. 군에 합류한 파우스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듭 피가로를 찾아오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예의 종자만이 아닌 새로운 혹이 붙어있었다.

그는 자신을 알렉 그랑벨이라 소개했다. 기척을 느꼈을 때부터 진작 알아채고 있었다. 혁명군의 수장이자 파우스트의 벗이며 또한 주인 되는 자. 확실히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단명종치고는 제법 강단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영웅의 기개라는 건 딱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일 테다.

제자가 돌아온 건 환영해 마지않을 일이나, 알렉에 대해서는 그저 그랬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알렉은 혁명군의 합류를 제안했다. 귀찮은 일에 연루되는 건 질색이었다.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일은 누구 때문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래도 피가로는 선뜻 승낙했다. 물론 일선에 나서지 않고 간접적인 책사 역할만 한다는 조건부 동의였다.

오즈의 역할이 대다수이긴 했지만, 어쨌든 세계정복을 앞두고 있던 몸이다. 땅과 재물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반복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강력한 힘으로 쓸어버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된 과정이 아니었다. 나라를 이루고 근간을 다지기 위해선 뭇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성만이 비로소 왕국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피가로가 팔자에도 없는 혁명군의 책사 노릇을 하게 된 건 전부 파우스트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알렉의 뒤에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내심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워 기꺼이 따라나서자고 생각했다.

제자가 활약하는 모습을 관전할 좋은 기회였다. 어차피 시키지 않아도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긴 했다만. 역시 곁에서 보는 경치가 훨씬 장관이겠지. 누군가는 가벼운 마음이라고 비난할 테지만, 당시의 피가로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 정도의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하의 피가로도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알렉의 담대함이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제자와의 결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을 줄은 몰랐다.

하여간 제대로 간덩이가 부은 녀석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하다니. 사람 잘못 찾아왔다고 하고 싶지만, 자세한 사정을 듣고 보니 피가로만큼 이 역할에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가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알렉의 부탁이란 것은 요컨대, 파우스트를 속여 혼인에 적합한 요건을 갖추도록 지도해달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 되지, 사랑에 무슨 복잡한 절차와 조건이 필요하냐 싶지만, 이 결혼의 목적은 오랜 짝사랑의 결실 따위가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머지않아 건국될 국왕의 반려였다.

현재 혁명의 성패는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 혁명이 실패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지켜보는 피가로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이 혁명은 성공이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가 합류한 덕분이 아니라, 대륙의 모두가 지긋지긋한 분쟁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타고나길 영웅의 기질이 있는 알렉은 좋은 시기에 올바르게 태어났다. 어떤 의미로는 전란의 시대에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라 할 수 있지만,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마땅히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기회였다. 파우스트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상이다.

알렉은 차기 왕비 자리에 파우스트를 내정했다. 어차피 국가를 건설하는 순간, 정략혼 제의는 빗발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권력의 흐름에 편승하려 할 것이다. 파우스트와 결혼하는 건 혁명 파트너의 공로를 챙기고, 마법사의 권리를 챙기며, 나아가 인간과 마법사를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확실히 반드시, 라는 표현은 옳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공치사라곤 해도 여기에 파우스트의 의사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파우스트는 이용당하는 것이다.

알렉은 설득을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가장 친한 친우이자 오른팔에게 경멸당하고 싶지는 않았겠지. 그래서 미움 받을지도 모르는 역할을 이쪽에 떠넘겼나.

자기 주관이 뚜렷한 파우스트에게 전쟁이 끝난 뒤에 오랜 친우와 혼인하여 왕비의 자리에 오르라 하면 그는 당연히 기함을 토하며 거절할 것이다. 상황에 따라선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지금의 파우스트는 곱상한 얼굴을 하고 있다곤 하나, 투박한 군인에 불과했다. 지금 모습대로 혼사를 치르면 아무도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모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적당한 모습을 취해야 한다. 그걸 위해 여인의 몸으로 자기 자신을 바꾸는 거다. 도장을 꽉 눌러찍듯, 불편한 틀에 맞춰 행동을 하나하나 교정하고 맞춰가는 것이다.

알렉은 백성의 기대를 받는 미래의 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두가 환영하는 성대한 국혼을 위해, 정치적 선전을 위해 일생에 한 번뿐인 혼약마저 이용할 생각이었다.

도와주십사 청하는 알렉에게서 파우스트를 향한 연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의에 사적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가능성도 열려있었다. 아무리 마법사가 성별과 무관하기로서니, 성애의 감정이 없는 친우와 결혼하겠다는 건 굉장히 독특한 발상이었다. 파우스트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본인도 자각하지 못했거나 단순히 피가로 앞에서 잘 숨겼을 확률도 있다.

파우스트를 향한 알렉의 감정이야 어쨌든, 피가로는 그를 도와 파우스트를 교육하면 되는 문제였다. 늘 그래왔듯이.

피가로는 항상 하던 수업에 불필요한 과목을 교묘하게 편성했다. 파우스트는 군의 지휘관으로서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곧잘 수업을 들었다. 때로는 너무 피곤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날도 있었지만, 제비꽃처럼 청순한 눈동자만큼은 또랑또랑하게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아이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아이를, 다른 이들에게 하던 대로 약삭빠르게 속여 이용해먹고 있었다.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여러 인간들을 만났다. 불신과 배신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의 약속은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약속을 어기면 마력을 잃는 마법사와 달리 그들은 잃을 게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가벼운 말로 쉽게 약속을 하고, 순간의 변심으로 약속을 어겼다.

양심의 가책이라니, 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단지 잠깐의 심리적 불편함을 얻는 것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터였다. 그러기에 인간을 온전히 신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피로 덧칠된 경험을 단지 듣기에 아름다운 이상론으로 하루아침에 덧씌우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이라는 것에 대해 피가로는 여전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보여줬으면 하는 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린 듯이 완벽한 제자인 파우스트와 그의 친우가 만들 새로운 세계를.

7.

“넌 변신 마법에 정말이지 재능이 없구나.”

쓰게 웃은 피가로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한숨 섞인 목소리에 파우스트는 허둥지둥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죄, 죄송합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시정하겠습니다.”

눈앞의 제자는 피가로가 제시한 대로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둥근 얼굴과 적당히 굴곡진 몸매, 품이 넉넉한 옷차림이나 튀어나온 앞섶 등. 원래의 형태를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 파우스트가 생각하는 여성의 모습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첫 시도치고는 그럭저럭 봐줄만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다. 외관을 바꿔도 가장 중요한 행동거지가 그대로였다. 어깨너비에 약간 못 미치게 벌어진 다리와 딱딱한 자세가 순전한 여성이라기보다는 여성의 몸에 갇힌 남성이란 느낌을 주었다.

마법의 사용이 미숙하다기보다는 그냥 파우스트라는 사람이 워낙 투박하다. 뭐, 육체의 변화로 몸에 익은 버릇이 변하는 것도 이상한가. 피가로는 적당히 납득했다.

눈에 안 띄는 부분은 천천히 교정하기로 하고, 먼저 부족한 것부터 하나하나 짚어주기로 했다. 스승 된 도리로 파우스트가 차기 왕의 혼약자로서 조금의 흠도 남지 않도록 꼼꼼하게 가르쳐야 했다.

“좋은 태도다. 우선은 이쪽.”

피가로는 턱을 매만지며 파우스트 주위를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뾰족하게 세운 검지가 허리를 툭 건드렸다. 간단한 터치에 흠칫 놀란 파우스트가 반사적으로 등을 곧추세웠다.

“허리는 가늘게 하는 편이 좋아. 여성의 몸은 곡선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여기, 머리카락은 살짝 늘려볼까?”

피가로의 손끝이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을 스쳤다. 흐르는 물처럼 부드러운 손길에 투박한 머리끈이 풀리더니, 아까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흘러내렸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길어진 파우스트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쓸어넘겼다. 피가로는 그대로 손을 떼지 않고 무언가를 확인하듯 어깨와 팔 주변을 배회했다.

얇은 옷 너머, 가만히 있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날개뼈 언저리를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덮었다. 파우스트는 어색함을 참기 힘든 듯이 몇 번이고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는 파우스트와 달리 피가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낭랑한 웃음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피가로는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차분하게 풀어진 입가만이 그가 방금 전까지 미소를 머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피가로가 고개를 흔들자 바다색 머리카락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서 출렁거렸다. 피가로의 머리카락은 끝자락으로 갈수록 거품이 섞인 파도처럼 연한 색으로 물들었다. 무한하게 펼쳐진 푸른 하늘처럼 낯설고도 익숙한 색채였다. 무심코 손을 뻗어 잡을 뻔한 것을 주먹을 말아 쥐는 것으로 참았다.

“자, 봐.”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목을 잡고 밝은 곳으로 이끌었다. 달빛 아래 유연한 몸을 가진 여성이 서있었다. 파우스트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난 피가로는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두 팔을 벌린 채 그를 마주 보았다.

얇은 팔다리도, 한 팔에 쏙 들어올 것 같은 가느다란 허리도. 전체적으로 가냘프기 짝이 없다. 남성일 때도 한 폭의 명화를 연상케 하던 사람이다. 여성의 모습을 한 피가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백이면 백, 전부 돌아볼 정도로 뛰어난 미인이었다.

저도 모르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꼭 무례한 짓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님, 하고 작게 신음했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굉장히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의식한 다음부터는 차마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었다. 하물며 자세히 본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쳐다보는 척 그의 어깨너머로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파우스트, 눈 돌리지 말고 제대로 봐야지.”

그러자 곧장 따끔한 충고가 날아들었다.

“어때, 할만해?”

“전혀요…….”

피가로의 말이 옳았다. 완벽한 스승에 비해 자신은 한참 미숙했다. 어색하다 못해 추잡한 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피가로 앞에 모습을 내보이는 것이 겸연쩍어서 자꾸만 두 팔로 몸을 감싸고 움츠러들게 되었다.

얼마 없는 귀한 수업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많이, 빠르게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사소한 일로 쩔쩔 매는 자신이 싫어졌다. 뜨겁게 끓는 의욕에 현실이라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기운이 빠진 파우스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런 마법을 꼭 알아야 할까요?”

“살다 보면 필요할 거야. 특히 어딘가에 잠입할 때, 굉장히 유용해.”

그 말대로 피가로는 단 한 번도 불필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장은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결국 어딘가에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스승이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온 대마법사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파우스트, 넌 아직도 네 위치와 힘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구나. 금방 얼굴이 팔릴 거다. 설령 네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을 전부 죽인다고 해도 언젠가는 정보가 새어나가겠지. 만약을 대비한다고 생각해.”

오늘도 스승은 평온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파우스트는 속으로 한숨을 폭폭 쉬었다. 조금이라도 어수룩한 이미지를 벗고 싶었다. 오로지 그런 일념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고양이의 모습이라면.”

“고양이?”

파우스트의 말이 의외였는지 피가로의 독특한 동공이 커졌다.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파우스트는 순순히 인정하고 재빨리 변명했다.

“제가 살던 마을에 길고양이가 많았거든요. 무심코 돌봐주다 보니 자신이 생겼습니다.”

“자연스럽게 관찰을 하게 되었구나. 역시 넌 상냥해.”

“……네, 그런 거죠.”

파우스트는 한동안 뜸을 들였다. 바로 자세를 잡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었으나, 파우스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피가로님. 그, 고양이로 변신할까요?”

“아니, 됐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넵…….”

피가로는 성큼성큼 걸어 파우스트 앞에 섰다. 거리가 가까웠다. 갈 곳 잃은 시선이 또다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했다. 피가로는 흠, 하고 목울대를 울리며 파우스트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턱 선은 조금 더 갸르스름하게 하는 편이 좋겠어. 넌 청순하니까 그쪽이 더 잘 어울릴 거야.”

“이렇게, 요?”

“응, 지금이 딱 좋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계속 피하기만 해선 도무지 진전이 없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어렵사리 다시 시선을 들자, 눈이 마주쳤다.

“파우스트, 넌 아름답구나.”

피가로는 여전히 파우스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저는 별로…… 피가로님이야말로 아름다우세요.”

서로를 칭찬하는 분위기가 몹시 낯간지러웠다. 하지만 결코 빈말이 아니니까. 파우스트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헛기침을 했다. 피가로는 눈매를 가늘게 휘었다. 빛을 받은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게 실로 장관이었다.

뒤로 물러선 피가로가 발끝으로 흙바닥을 그었다. 피가로는 바닥에 남은 작은 반원 자국과 함께 다시 남성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주문조차 외우지 않았다. 형태를 바꾸는 것보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쉽다지만, 파우스트는 절대 피가로처럼 할 수 없었다.

뛰어난 마력 컨트롤에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뒤늦게 피가로를 따라 본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깜짝 놀란 파우스트가 허둥지둥 주문을 외우려고 할 때였다.

“아, 그럼 저도……!”

“그대로 있어.” 피가로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파우스트, 손을.”

그는 가볍게 몸을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춤을 청하는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정중했다. 파우스트는 머뭇거림 끝에 피가로의 손을 맞잡았다.

“이것도 잠입을 위한 수행의 일환인가요?”

“그래.”

피가로는 명쾌하게 답했다. 그는 파우스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스승의 지시대로 이것저것 맞추다 보니 키가 더 작아진 걸지도 모른다. 눈높이가 훨씬 크게 차이가 났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 피가로의 안색을 살필 수 있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며 물었다.

“어째서 마녀의 모습으로 추지 않으시는 건가요?”

“이쪽이 더 익숙하니까.”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피가로는 긴 말을 하지 않고 온화하게 파우스트를 이끌었다. 늘 하던 대로 자유롭게 추는 춤이 아닌, 격식에 맞춘 춤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는 분야였지만, 몸을 쓰는 일은 무엇이든 자신 있었던 덕에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법 수련이라기보다는 사교 교육에 가까웠다. 잠입을 위해서라기엔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위대한 현인이기에 의문은 잠시 접어두었다.

*

알렉이 부탁이라는 형태로 도맡긴 파우스트의 교육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교육보다는 차라리 신부수업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렸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만 가르치진 않았다. 알렉의 부탁보다 우선시되는 게 기존에 이어가던 수업이었다.

열댓 명의 마법사가 일제히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았다. 파우스트를 필두로 한 마법사 부대의 정예 병사였다. 이번에는 빠른 사전답사를 위해 특별히 비행이 가능한 마법사를 차출했다.

빗자루를 사용하여 비행하는 일은 별사탕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마법의 기초라고 할 수 있지만, 스승을 두지 않은 약한 마법사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과거의 파우스트는 그들처럼 스승을 두지 않은 마법사였으나, 그럼에도 스스로 비행을 하는 법을 깨우쳤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서 뼈를 깎는 노력이 요구되었다.

현재는 별사탕을 만드는 법도,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나는 법도 전부 피가로에게 지도 받아 실력이 좋아졌다. 그러니 지금 파우스트의 뒤를 따르는 마법사들은 처음부터 독학하거나 그에게 조언을 받아 스스로 발전한 이들이었다.

사전답사라고 하지만, 적진에 발을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일에 선뜻 나서준 귀중한 인재들이다. 파우스트는 부하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간의 수행이 헛되지 않았는지, 꽤 서두르고 있음에도 낙오되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정면을 바라본 파우스트가 입을 살짝 벌렸다. 옆에서 나란히 날던 피가로는 작은 하품을 놓치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그늘이 진 퀭한 눈가를 문질렀다. 지난 밤 늦게까지 가르침을 받은 탓에 잠이 부족해 보였다.

그것도 그렇지만, 역시 잠자리를 설친 것 같다.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유심히 지켜보고 있자, 눈치 빠른 파우스트는 금방 깨닫고 머쓱하게 웃었다. 가만 보니 얼굴이 약간 붉어져있었다.

제자가 부끄럼을 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사실 나는 지인의 곤란한 얼굴을 보는 걸 즐길지도 몰라. 그러고 보면 예전에 치렛타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다. 그리운 추억을 떠올린 피가로가 코끝을 울려 웃었다.

파우스트는 짧게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곁에서 웃음소리를 들은 듯했다. 다시는 하품을 하지 않도록 아랫입술을 꽉 깨문 것이 사랑스러웠다. 일부러 가까이 붙어 날았다. 서서히 밀착하자 어쩔 모르며 조금씩 멀어진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적당히 장난을 치고 있으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파우스트님,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내릴까요?”

뒤를 바짝 쫓던 레녹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까마득한 지상을 향해 눈을 돌리니 작은 점으로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파우스트는 손을 높이 들어 지시를 내렸다.

“하강한다!”

“예!”

우렁찬 대답이 들렸다. 파우스트와 피가로가 먼저 지상에 착지하고, 뒤이어 레녹스와 다른 마법사들이 저마다 신발 밑창과 빗자루로 바닥을 끌며 부드럽게 착지했다.

입구부터 흉흉한 기미가 보이더니, 마을 상황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을은 이미 한차례 불태웠는지 잿더미가 되어있었다. 당연하게도 주민들은커녕 수비군조차 보이지 않는다.

곳곳에 지붕이 내려앉은 집이나 완전히 무너진 잔해 따위가 널려있었다. 탐색이나 탐문 등의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을 듯했다. 마법사라면 정령이나 자연과 교감하여 무엇이든 얻어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앞장선 피가로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작은 마을이야. 눈앞에 성이 보이는군.”

파우스트는 부하들을 이끌고 재빨리 뒤를 따랐다.

“인기척이 하나도 없군요. 남은 주민들은 전부 성 안에 들여보냈겠죠. 저희가 진군하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요?”

“설마. 그 정도로 정보력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도적이나 다른 세력을 피해 숨어들었겠지.”

다른 의미로 눈 둘 곳을 찾기 어려웠다. 본래 사용처가 불분명한 썩은 나무 기둥에 까마귀 몇 마리가 올라앉아있다. 기둥에 늘어진 찌그러진 철망에는 잘린 팔다리가 들어있고, 효수 당한 목 등이 보란 듯이 길게 뻗은 가지에 걸려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진입해 보니 광장 한복판에 목 없는 시체가 매달려있었다. 시신이 부패한 정도로 보아 비교적 최근에 숨이 멎은 것 같다. 시체 옆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까마귀가 영혼이 빠져나간 고깃덩이를 쪼아먹으며 시끄럽게 울어대었다. 흐릿한 탄내와 부패한 시체의 썩은 내가 코를 찌르며 머리가 터질 듯 아파왔다.

실로 참담한 광경이었다. 마을 변두리를 걸으며 피가로는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보았고, 파우스트는 혀를 찼다. 혹시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반파된 집 문을 열어보았지만 대들보에 목매단 시체만이 반겨주었을 따름이다. 파우스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미 반쯤 떨어져 나간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계속해서 끼익 끼익, 소음을 내는 문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요란하게 토악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확인하니, 따라온 부하 중 두엇이 바닥에 쓰러져 잿더미가 된 땅에 뱃속에 든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당황한 레녹스가 한달음에 달려가 동료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같은 사람으로서 공감도 가고 안쓰럽긴 하다만,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하면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피가로의 옷자락을 잡아 작은 소리로 사과했다.

“피가로님,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이들도 있어서…….”

“괜찮아.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파우스트가 선수 치듯 말하지 않아도 책망할 생각은 없었다. 피가로는 넓은 아량으로 이해했다. 전란의 불길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심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특히 마음으로 마법을 쓰는 마법사에겐 취약한 환경이었다. 마치 마법사를 대동한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일부러 조성해놓은 것처럼 인위적이기까지 하다.

감히 이 땅의 주인 노릇을 하는 자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확실하게 보였다. 보이지 않는 감정이 투명하게 전달되어 오히려 유쾌하기까지 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에게 보이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옅게 미소 지었다.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긴 진청색 머리칼이 손에 잡힐 듯 어른거린다. 너무나 익숙한 광경을 목도한 탓일까.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옛 추억까지 떠올라버렸다.

“여기서부턴 흩어진다. 각자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도록!”

그 사이, 파우스트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각자 짝을 지어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오로지 레녹스만이 남아있었다.

“파우스트님, 따르겠습니다.”

“나는 괜찮아. 피가로님이 계시니까. 레노, 나대신 그쪽을 부탁해.”

“알겠습니다.”

언뜻 고집스럽게 굴 것 같았던 레녹스는 순순히 말을 따랐다. 역시 위계질서가 확실했다. 레녹스는 피가로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뒤, 앞서 출발한 동료들을 따라갔다. 피가로는 한동안 그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수 기한을 넘긴 시신이 많습니다. 효수 당한 목을 치워주지 않았을 정도면 치안이 아주 나빴겠죠. 자잘한 궐기도 잦았을 겁니다.”

“엉망이구나. 분명 구실을 만들어 강제로 징집을 했겠지. 그럼 우리는 성 쪽으로 가볼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우뚝 선 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수로, 그것도 마법사들끼리 사찰을 나온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디선가 망을 보고 있을 병사를 의식하여 마법을 걸고 은밀하게 접근했다.

피가로는 지저분한 성벽에 손을 댔다. 검은 먼지와 녹슨 쇳물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느긋한 손길로 성벽을 살펴본 피가로가 입을 열었다.

“성벽이 높고 단단하네. 이건 외부에서 부수긴 힘들겠어.”

“늘 하던 대로는 어렵겠죠?”

“마력으로 만든 불덩이라는 건 결국 거리가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해지니까. 성벽에 도달할 정도가 되면 너무 약해져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을 거야.”

피가로는 어느새 깨끗해진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듯 눈을 감고 집중했다.

“힘으로 뚫자면 뚫지 못할 것도 없지만, 이대로 틀어박혀 농성한다면 피해가 커지겠어.”

이번에는 파우스트가 성벽 가까이 다가갔다. 파우스트는 직접 성벽을 두드려보고 강도를 가늠했다. 피가로의 말대로였다. 마법사를 동원하여 막아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벽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수를 쓰는 것과는 관계없이 아군이 가진 힘으로는 뚫어내기 어려웠다.

되도록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병사들의 사기도 문제지만, 특히 얼마 없는 마법사의 수는 더 이상 줄어선 안 된다. 자칫하다간 유사시에 비장의 작전조차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소수 정예로 암습을 해야겠네요. 혼란을 틈타 신속하게 침입하여 영주의 목만 베어낸다면 군은 자연스럽게 와해될 겁니다.”

파우스트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성 외곽에 마법진을 그려놓죠.”

”촉발 마법인가?”

피가로가 자세를 바꿔 팔짱을 꼈다. 명백히 흥미가 있는 태도였다. 파우스트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과연 피가로님이다. 무슨 마법을 사용할 건지 말하지 않아도 쉽게 의중을 읽어냈다. 꼭 생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편했다. 파우스트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가벼운 기폭제로 크게 발화하도록 보조 마법진을 덧대어 장치할까 고민 중에 있습니다만…….”

“연쇄 작용을 노리고 있겠지. 평범한 폭발보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을 거야. 좋은 생각이구나. 그렇게 하자.”

“지반은 괜찮을까요? 성 안에 있는 사람들도 걱정이고, 병사들이 들어올 통로를 만들어주어야 할 텐데.”

“적당히 튼튼해. 잘 버텨줄 거다.”

파우스트는 잊고 있던 게 떠오른 사람처럼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성벽 위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모았다.

“아, 망루에 감시자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진을 설치하죠? 들키지 않도록 인식 저해 마법을 걸어볼까요? 그것도 안쪽에 마법사가 있다면 쉽게 감지될 텐데.”

눈을 동그랗게 뜬 피가로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얼마만큼 큰 마법진을 그리려고?”

“성 전체를 감쌀 정도로…….”

안색이 흐려진 파우스트가 말을 더듬었다. 스승이 소리 내어 웃으니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잔잔하게 미소 짓는 모습은 많이 봤어도 지금처럼 크게 웃는 건 낯설었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하면서도 무언가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것 같아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불편한 침묵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웃음을 그친 피가로가 눈가를 훔쳐냈다.

“파우스트, 잊은 거니? 우리는 마법사다. 방법은 무한하니 생각에 제한을 두지 마.”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을 잡더니, 시원하게 뻗은 손가락을 얽고 커다란 손바닥으로 천천히 손등을 감쌌다. 파우스트는 글자를 처음 배우는 학생처럼 피가로의 손놀림에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난 정말 무식하게 싸우는 마법사를 알고 있어. 미의식이라곤 조금도 없이, 그저 승리하기 위한 싸움만을 하지. 마법은 마음으로 쓰는 거야. 그러니 상식에 얽매일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어. 파우스트, 상상을 멈추면 안 돼. 너의 마음속에서 네가 바라는 일은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어. 영특한 너라면 이해했겠지?”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을 움직여 성벽에 보이지 않는 표식을 덧그렸다. 그것은 아주 작은 마법진이었다.

아, 그렇구나. 위대한 스승의 자랑스러운 제자답게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의도를 이해했다. 깨달음을 얻은 눈이 꽃이 개화하듯 크게 뜨였다.

“네!”

피가로는 힘차게 대답하는 파우스트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우스트는 품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 곧장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손바닥을 베어 상처를 낸 뒤, 그것으로 성벽에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했다. 피가 부족하면 강하게 주먹을 쥐어 혈액을 짜냈다.

“매개를 사용해도 들키지 않을까요?”

성벽에 달라붙어 마법진을 그리는 파우스트는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얼마나 몰두하고 있으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세심하게 마법진을 설계하는 것을 옆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

“들키지 않을 거야. 이 성엔 마법사가 없으니까. 규격 외의 힘을 보여주는 마법사란 존재를 무턱대고 성 안에 들일 수 없었겠지.”

“벌써 마력을 탐지하신 겁니까? 역시 피가로님.”

파우스트는 오늘만 벌써 두 번째로 감탄했다. 성벽을 더듬어 빈틈을 찾아낸 그는 근처에 빠르게 마법진을 완성시켰다. 계획했던 대로 보조 마법진도 여러 개 겹쳤다. 확실히 그릴 면적이 적으니 어려운 작업도 금방 끝이 보였다.

오랫동안 한곳에 집중한 탓인지, 아니면 매개를 너무 많이 사용한 건지, 약간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아니면 단순히 날이 더운 게 문제일지도. 파우스트는 팔 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급격히 나태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피가로가 파우스트를 끌어당겼다.

“돌아가기 전에 잠깐 쉴까?”

“그래도 될까요?”

“안될 게 뭐 있나. 아직 해가 지기 전까진 여유가 있어.”

두 사람은 땡볕 아래에서 벗어나 근처의 그늘로 향했다. 마법진을 그린 위치를 확실하게 외우고, 피가로가 이끄는 대로 앙상한 나무 밑에 섰다. 그들이 그늘로 택한 나무는 방화에 휩쓸렸는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마저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높이 뜬 해가 가려지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으니 독기가 서린 악취도 바람을 따라 은은하게 실려 왔다. 파우스트는 허리춤에서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를 빼내 목을 축였다.

“이곳의 성주는 겁이 아주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지지기반을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처형을 반복하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신에 구더기가 들끓고 있어요.”

“악취가 지독하군. 이곳을 점령하는 즉시 물자를 챙겨서 떠나자. 전염병이 돌 거야.”

“땅을 정화하는 건 어떨까요? 결국 이곳도 누군가의 터전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하지만 파우스트, 너도 알다시피 땅을 정화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많은 마력과 섬세한 작업이 요구돼. 진군이 늦춰지게 될 텐데 괜찮겠어?”

피가로의 염려는 타당했다. 파우스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자리했다.

“인민의 영웅이잖아요. 그 정도는 어떻게든 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파우스트는 세간에서 혁명군을 어떻게 칭하는지 알고 있었다. 알렉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가만히 숨죽인 채 힘겨운 현실을 간신히 견디고 있는 사람들이, 괴로운 나날 속에서 모두가 품는 기대를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언젠가는 그 기대에 무너질 지경이 되어도 억지로 버텨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와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다. 애초에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목적을 이루기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혁명이고, 알렉과 자신이 품은 결의니까.

약속을 어기면 마력을 잃는 마법사는 약속이라는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향한 결의만큼은 약속이라는 틀에서 교묘하게 피해갈 수 있었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스스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알렉을 도와 그의 곁에서 혁명을 승리로 이끌겠다고. 알렉과 자신이 그랬듯이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을 이루겠다고.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돕지.”

“앗,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런 번거로운 일을 피가로님께 맡겨도 될는지…….”

“신경 쓰지 마. 마법사는 자연의 친구잖아. 이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존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

말이 미묘하게 바뀐 것 같지만,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피가로가 자신의 설득으로 생각을 바꿔준다면 그저 감사한 일이다.

알렉이 이끄는 혁명군의 마법병단은 파우스트에게 대거 의지하고 있었다. 나이부터 성별까지, 다양한 마법사가 중앙 전역에서 골고루 모였다고 해도 기초적인 마법조차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래선지 가끔은 자신의 역할이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피가로를 만난 건 인생에 다시없을 행운이었다. 그의 스승은 무척 온후하고 마음이 따뜻한 마법사였다. 언제나 곁에서 부담을 덜어주고, 지켜보고 응원해 주며, 이런 사소한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거들어준다. 아주 조금이지만 어깨에 얹힌 짐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뺨이 절로 느슨해지며 어깨에 힘이 풀렸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옆얼굴을 몰래 훔쳐봤다. 피가로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지, 매끈한 낯으로 단정하게 땋은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넘기고 있었다. 그 유려한 모습을 지켜보며 파우스트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떠올렸다.

때는 피가로가 종군한 지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피가로는 군의 총책임자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알렉 대신 파우스트의 안내를 받아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진영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세히 묻지 않았구나. 파우스트, 너희는 마법사를 어떻게 사용하지?”

“보통은 후방에서 위력이 강한 마법으로 선제공격을 하거나 아군을 보조합니다.”

“전투의 시작을 여는 역할이군. 꽤나 중요하네.”

“네. 특히 요새를 공략할 때 효과적입니다.”

“그렇다는 건 전면에 나서는 일은 전혀 없다는 건가.”

“백병전은 제가 이끄는 소수의 병사만 참여합니다. 마법사는 수가 적어 귀하기도 하고, 직접 몸으로 뛰어들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져서요.”

“요새를 공략할 때 쓰는 방법을 확인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피가로가 책사로서 혁명군에 합류한다고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설득 과정을 모두 지켜봤음에도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일 년간 북쪽 나라에서 지도 편달을 받은 파우스트가 군에 합류했을 때부터 알렉은 어떻게든 피가로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당시 승승장구를 반복하던 혁명군은 막다른 길에 놓여있었다. 야습을 당해 많은 부하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어진 전투도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고 후퇴를 반복하는 상황이었다. 여러 방안을 제시해 봤지만, 요긴하게 쓰일만한 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알렉이 먼저 제안한 것이다.

‘파우스트, 네 스승인 피가로님을 뵈러 가자. 더 이상 동료를 잃을 순 없어. 자존심을 내려놓고 현인께 도움을 구하는 거야. 기왕 이어진 인연이잖아. 얻어낼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내자.’

파우스트는 망설였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알렉은 노골적으로 피가로를 이용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교육 기간 동안 스승이 얼마나 위대한 마법사인지 몸소 겪어 알게 되었다. 동시에 피가로가 마법사로서 인간과 어울리며 겪은 일들을 전해 들었다. 그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며 답을 얻기 위해 까마귀처럼 끊임없이 쪼아대는 사람들. 그런 무도한 무리에 포함되고 싶지 않았다.

까마득한 절벽 위, 눈 덮인 산골짜기에 은거한 피가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참여하여 얻을 것이 없었다. 평화로이 지내는 스승을 끌어들이는 것은 순전히 이쪽의 욕심이었다. 처음에 파우스트는 알렉을 만류하려 했으나, 결국에는 늘 그랬듯 친우의 뜻에 따르게 되었다.

서로 힘든 시기였다. 알렉이나 자신이나 각자 맡은 막중한 임무에 짓눌려 숨을 쉬기조차 버거운 순간이었다.

파우스트가 아는 범위에서 피가로는 가장 강하고 현명한 마법사였다. 피가로가 그들을 돕는다면 그만큼 든든한 일이 없었다. 게다가 한편에는 북쪽 나라에서 수업을 듣던 시절처럼 스승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피가로가 와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파우스트는 미리 마법진을 설치해둔 장소로 피가로를 안내하며 새삼스레 스승의 은혜에 감사했다.

“이처럼 완성된 마법진에 다수의 마법사가 일제히 마력을 불어넣는 겁니다. 주가 되는 마법사가 대략적인 마법의 형태를 구상하고 발동을 하면 다른 마법사들이 마력을 보태주는 방식이죠.”

“현명하네. 이거라면 약한 마법사도 참여할 수 있겠어.”

피가로는 마법진이 그려진 땅을 더듬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태도였다. 그것이 몹시 의외였던 지라, 파우스트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피가로님이 알지 못하는 영역도 있군요.”

“전혀 모르지는 않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너희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마. 약할수록 뭉쳐야지. 그게 맞아. 무리를 짓는 건 인간이 마법사보다 잘 하는 행동이야. 자기 자신을 지킬 힘도, 긴 수명도 없지만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피가로는 말을 마치고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역시 비효율적이군.” 고민 끝에 입을 열고서 흘긋 쳐다보는 것이, 이쪽이 상처받지 않도록 상냥한 표현을 고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피가로는 가끔 그랬다. 알렉과 마찬가지로, 파우스트는 스스로의 의지로 혁명을 일으켰다. 나이는 어려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가 아닌데, 피가로는 이따금 불필요한 배려를 해주곤 했다. 충분히 기분 나쁠만한 일이다. 그러나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러한 배려를 받아본 적이 없는 파우스트는 자상한 스승이 마냥 고마웠다.

“아무래도 방법에 제약이 많죠. 적은 마력이라도 좋으니 모든 마법사가 보다 정밀한 컨트롤을 할 수 있다면 다른 병법을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지금부터라도 마법사들을 모아 가르치면 어떨까요?”

“네 휘하에 있는 마법사들을 말하는 거라면, 무리야. 그들은 가진 마력이 너무 약해. 교육을 통해 방법은 가르칠 수 있지만 태생적인 한계는 넘을 수 없어. 그보다는 장수 정도의, 강한 마력을 지닌 소수의 마법사들을 챙기는 편이 나을 거야.”

피가로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려놓은 마법진의 일부를 수정했다. 껄끄러울 법도 하건만, 타인의 마법에 개입하는 손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익숙했다.

“그래, 그런 거라면 나도 조금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이어진 말에 깜짝 놀란 파우스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가로님이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가볍게 손을 얹는 정도라면.”

“피가로님이 함께해 주신다면 무엇이든 불가능한 건 없겠죠!”

지원군으로 왔지만 피가로는 초대받은 손님에 가까웠다. 피가로는 균형을 흔들만한 일은 하지 않는다. 단지 몇 가지 전술과 관련된 조언을 하고, 군의관으로서 막사에서 병사들을 치료했다.

피가로가 가진 마력과 쌓아 올린 지식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 어찌나 유능한지 숨만 붙어있으면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일반 병사들 사이에선 피가로가 알렉의 뜻에 감화되어 그를 따르기 시작한 성자라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돌았다. 과하게 부풀어 와전된 소문은 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군 전체를 통솔하는 알렉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 그는 소문이 퍼지도록 내버려두었다. 무엇이든 이용하겠다는 친우의 말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이 거북한 심정이 되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파우스트의 강렬한 반응에 피가로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나 믿어주는 건가.”

“당연하죠. 무려 피가로님이신데!”

“네게 그런 말을 듣는 건 나쁘지 않네.”

기억 속에 남은 순간을 멍하니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피가로가 한 방향으로 서서히 기우는 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충분히 쉬었으면 슬슬 돌아가자.”

“네, 피가로님.”

나무둥치에 앉아있던 파우스트는 옷을 털며 허둥지둥 일어섰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돌아갈 때도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법을 걸었다. 그들은 합류하기로 했던 마을 입구로 향했다.

“피가로님이 함께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전하고 싶은 인사는 언제나 가장 방심했을 때에, 생각을 거치지 않고 불쑥 튀어나왔다. 피가로는 고개를 돌려 파우스트를 쳐다봤다. 파우스트는 시선을 느꼈지만 일부러 고집스럽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분명 바보같이 풀어진 낯을 하고 있을 것이다. 기대고 싶은 마음은 사실이지만, 스승 앞에서 대놓고 칠칠맞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이런 얄팍한 발버둥을 피가로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는 파우스트를 위해 기꺼이 모른척해 주었다.

“밤에는 성대한 불꽃놀이를 볼 수 있겠군.”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부디 지켜봐 주십시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너는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어.”

“……그런가요.”

8.

“더 좋은 것을 대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아.”

찻주전자를 든 파우스트가 더없이 정성스러운 손놀림으로 차를 따랐다. 연한 찻물이 투박한 찻잔에 쪼르륵 소리를 내며 담긴다. 피가로는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참 고지식한 성격이구나. 언제까지 미안해할 셈이니?”

“윽, 죄, 죄송합니다.”

파우스트 본인도 느끼는 바가 있었나 보다. 그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여간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어떻게 군 생활을 하는 건지 신기할 정도로. 하지만 그런 속내를 직접 전하면 말도 안 된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겠지.

‘이래 봐도 다 큰 성인인걸요. 피가로님한테는 갓난아이쯤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를 미숙하고 귀엽게 봐주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피가로님 한 분밖에 없을 겁니다.’

아아, 들린다, 들려. 당황한 파우스트의 목소리가.

피가로는 제 눈치를 보는 파우스트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찻주전자를 기울이는 손이 흔들리며 자연스럽게 잔에 담긴 찻물이 출렁거렸다.

피가로는 그마저 즐겁게 지켜보았다. 이 아이의 꾸밈없고 솔직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첫 만남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제자를 아끼게 될 줄 몰랐는데. 역시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잔을 채우는 파우스트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앉아. 오랜만에 제자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네!”

파우스트는 서둘러 다기를 정리하고 스승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손님으로서의 접대와 관련해서 파우스트는 요지부동이었다. 사소한 부분은 신경 쓰지 말라고 벌써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파우스트는 여전히 피가로에게 더 좋은 것을 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파우스트는 자리에 앉아서도 편해 보이지 않았다. 두 손을 허벅지에 올리고 연신 무릎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피가로는 내리뜬 눈으로 탁자 밑의 상황을 살피며 먼저 잔을 들었다.

방금 우려낸 찻물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먼저 향을 맡고 찻물을 입에 댔다. 마찬가지로 잔을 잡은 파우스트가 물었다.

“입맛에 맞으신가요?”

“음.”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대답했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북쪽 나라에 위치한 피가로의 오두막에서 한 해 동안 머물면서 스승이 무엇을 입에 대고 즐기는지 유심히 관찰한 보람이 있었다.

오늘 사용한 찻잎은 얼마 전 레녹스의 도움을 받아 함께 고른 것이다. 남쪽 변경에서 나고 자란 레녹스는 식용이 가능한 식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서 종종 서로 배움을 주고받곤 했다.

레녹스와 함께 미리 말려둔 찻잎을 하나하나 끓여 마시며 ‘이것보단 이쪽이 더 입맛에 맞으실 것 같다’든지, ‘피가로님은 역시 단맛을 즐기지 않으시죠’라든지. 스승에 대해 여러 대화를 나누며 치밀한 과정을 거쳐 준비했다.

사심이 가득 담긴 즐거운 시간이었다. 거기다 고심 끝에 고른 것을 스승이 만족스럽게 받아주니, 과중한 업무에 지친 마음이 뿌듯함으로 충만해졌다.

입에 머금은 찻물의 성분을 분석하고 있는데, 제자의 만면에 화색이 돈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피가로는 보란 듯이 몇 모금 더 마시고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파우스트가 목을 축이기 위해 잔을 들었다. 제자의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무심코 행동했으나,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잔을 입에 대기 전에 만류했다.

“잠깐, 파우스트. 마시지 마.”

“……예? 어째서죠?”

“독이다.”

“독…….”

낯을 흐린 파우스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잔을 내려다보는 파우스트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우스트는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파우스트가 피가로에게 달려들었다.

“피가로님, 알면서 드신 건가요? 어째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당장 뱉으면!”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이 어찌나 흉흉한지, 등을 후려쳐서 강제로 토해내게 할 기세였다. 피가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벽을 세웠다.

“파우스트, 진정해. 목적은 내가 아니다. 나한테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보다는 문제에 집중하자.”

“그래도…….”

파우스트는 엄한 얼굴을 하다가도 금방 울상을 지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해선 끝이 없다. 한숨을 쉰 피가로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찻잎은 너와 네 종자가 준비했다 하니 문제가 없을 거고, 그럼 물에 독을 풀었겠군. 수원은 어디지?”

“근처 개울에서 퍼 왔습니다만, 설마 침입자를 막기 위해 강 전체를 오염시키는 선택을 할까요?”

“그래.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겠지. 미친 소리 같지만 현실이야. 파우스트, 너희가 이곳에 자리를 펴고 얼마나 지났지?”

“한 달 정도일 겁니다.”

“안쪽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온 거야. 독 안에 든 쥐가 결국 사람을 문 거지. 잘 버텼어. 승리가 목전이구나.”

피가로의 부드러운 칭찬에 파우스트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러나 안도하는 건 아주 잠시뿐으로, 시름에 잠긴 파우스트는 이마를 문지르며 막사 안을 배회했다. 그들의 혁명은 이상을 관철하고 계속된 동란에 지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 당연히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네, 하지만…… 걱정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동귀어진의 수를 쓰다니. 강이 오염되면 저쪽도 무사하지 않을 텐데요.”

“다른 곳에서 물을 길어올 수단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수원을 확인하러 가자. 정화할 수 있을지 미리 확인해두는 편이 좋을 거야.”

“네, 그럼 그 이전에 알렉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오겠습니다. 누군가 독을 섭취하게 되면 큰일이니까요.”

말을 마친 파우스트는 피가로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레노, 레녹스! 거기 있나?”

“파우스트님, 무슨 일이십니까?

“따라와, 알렉에게 간다! 당장 보고해야 할 일이 있어!”

홀로 남은 피가로는 막사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인기척이 빠르게 멀어지며 레녹스가 파우스트에게 경위를 묻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같이 가는가 싶더니, 파우스트는 레녹스에게 지시를 내리고 따로 알렉에게 향했다. 멋모르는 병사들이 그 사이에 독을 섭취할 것을 염려한 걸 테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잠깐 생각하는 사이, 간간이 들리던 대화가 끊기고 완전한 적막이 찾아왔다. 할 일이 없어진 피가로는 맞은편에 있는 파우스트의 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들어 입에 대었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다 식은 찻물에선 원래라면 나지 않을, 쓰고 떫은맛이 났다.

*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세계를 지배하던 자가 홀연히 사라지며 대륙은 혼돈에 빠졌다. 나라 간의 분쟁, 국가의 내란, 인간과 마법사의 혐오, 증오와 차별 속에서 관계의 골은 깊어만 갔다.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혁명의 불길은 봉화처럼 치솟았다.

사람을 태우는 냄새는 결국 고기를 태우는 냄새와 같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는, 사람의 뼈와 살은 아무런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 높이 쌓은 장작은 언제나 꺼지지 않도록 잉걸불이 남아있었다.

한차례 싸움을 벌이고 나면 시체는 무더기로 나온다. 장례를 치르는 건 산 사람이 마음의 짐을 덜고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장작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폐해란 그런 것이다.

전쟁을 하며 가장 많이 쓴 마법은 공격 마법도, 치유 마법도 아니었다.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통각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이 되었다. 처음부터 잘 쓰던 마법은 아니었지만, 결국 많이 사용한 만큼 자연스럽게 손에 익었다.

전쟁을 하다 보면 돌이 되어 죽는 마법사를 지겹도록 많이 보게 된다. 싸움이 끝나고 어지럽게 파헤쳐진 진흙 위에 흩어진 수많은 돌을 기억한다. 아름다운 채로 붕괴되는 마나석은 마치 대지에 튀기는 빗물 같았다.

죽어서도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모든 죽음이 그렇겠지만, 특히 마법사의 죽음은 비참하고 허무하다. 시체가 남지 않기 때문에 사라진 줄도 모른다. 마법사는 자신을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죽은 얼굴을 보여줄 수도 없다. 그저 계속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제때 돌아오지 않는다면 죽었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게 된다.

‘파우스트님,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릴 수 없을까요? 그 녀석이 죽었을 리 없습니다. 큰 부상을 입고 복귀할 수 없게 되었겠죠. 지금쯤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면 분명 제 발로 돌아올 테니까…….’

‘아니, 예정대로 움직여야 해.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너도 알고 있잖아.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조차 없는 심각한 난전이었어. 물론 살아있을 확률도 있지만…… 그렇다면 때가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믿자.’

그런 희망적인 말 따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애써 부정했을 뿐,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대지에 흩어진 수많은 마나석 중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찾아낼 수 없다.

가벼운 농담을 나누고,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살아서 만나지도, 일방적인 작별을 할 수조차 없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어디선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기대어 위안을 얻어야 하는 걸까?

전장에서 전사한 마법사의 장례에 대해선 언제나 의견이 분분했다. 죽음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신 없는 장례를 치르는 것이 잔혹하다는 쪽과 생사와 관계없이 의미 없는 희망에 기대는 건 그만해야 한다는 쪽으로 파벌이 나뉘었다. 두 파벌의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 마법사를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심각한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정작 이 부분에 대해 인간은 마법사와 견해가 달랐다. 전쟁터에서 전사자의 시신은 대체로 골칫거리였다. 부상이 심한 병사나 참혹하게 죽은 시신은 쉽게 변질된다. 조금만 방치해도 금방 벌레가 끓고 사방에 악취를 풍겼다. 적시에 처리하지 않으면 전염병이 돌게 된다.

집단으로 매장하는 것은 산 사람에게나 죽은 사람에게나 모두에게 잔혹한 일이었다. 이것저것 따지고 나면 결국엔 화장밖에 답이 없었다. 손에 피를 묻힌 병사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뜨거운 불속에서 정화되리라 믿었다. 그들은 타오르는 장작 앞에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천국에 가게 해달라며 간절히 기도했다.

시체를 태우는 데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그것이 수백, 수천 구라면 거대한 장작불에 온종일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시체 타는 냄새에 심각한 정신이상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몇몇 인간들은 마법사의 죽음이 오히려 낫다고 말했다. 죽어서 동료에게 짐덩이가 되느니 돌이 되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마나석은 보기에 아름답고, 운이 좋으면 아군에게 먹혀 도움이 될 수 있다. 비록 제대로 회수되지 못하거나 소중한 사람에게 희망이란 이름의 고문을 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선 부정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마법사의 죽음을 선망했다.

파우스트는 모두의 의견에 적당히 공감했다. 하지만 그 또한 마법사인지라, 돌이 되는 마법사의 죽음보단 육신을 남기는 인간의 죽음을 훨씬 부러워했다.

관련 주제에 대해 알렉과 레녹스, 피가로는 각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솔직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호기심이 앞서 묻지 못하는 건 죽음이라는 것이 그만큼 무거운 주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다니, 아무래도 상대를 과소평가한 모양이야.”

“내 실수다. 순찰하는 인원을 늘리고 꼼꼼하게 확인했어야 했어. 이마저도 피가로님이 안 계셨다면 어땠을지…….”

“피해라면 지금도 만만치 않겠지만. 그 일 때문에 사기가 많이 떨어졌어. 배신자를 찾아서 본보기를 보여야 해.”

“배신자가 있을지 없을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이야. 이 많은 병사들을 전부 검증하여 배신자를 색출해낼 순 없어.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훨씬 나쁜 결과를 낳겠지.”

주둔지 안쪽에 위치한 알렉의 막사에서 열띤 토론이 오갔다. 알렉은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질렀고, 파우스트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알렉은 파우스트를 노려보다가 이내 진정하고 눈에 힘을 풀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말려줘서 고마워, 파우스트.”

“별말씀을.”

알렉이 생각을 바꿔주어서 다행이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파우스트는 그제야 어깨에 힘을 풀었다. 알렉과 의견이 갈릴 때는 종종 있었지만, 다른 사람과 입씨름을 벌이는 건 정말이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작년까진 병충해가 들끓더니 올해는 가뭄인가. 이거야 원, 엎친 데 덮친 격이군.”

“당장 겨울철을 걱정할 일이 아니야.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해. 당장 보름 뒤에 먹고 마실 게 있을지도 모르겠어.”

알렉은 먼저 자리에 앉아 파우스트에게 맞은편의 자리를 권했다. 파우스트는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앉았다.

“동식물을 섭취하는 건?”

“불에 타지 않은 식물과 살아있는 동물이 있다면 말이지.”

알렉은 여러 표시가 그려진 지도를 펼쳐놓고 그들이 있는 곳을 가리킨 다음, 손을 남쪽으로 죽 내리그었다.

“우선은 우리를 따르기로 한 남쪽 변경의 영주들이 도움을 주기로 했어.”

“그쪽도 좋은 상황은 아니지? 얼마 전에 도적떼의 습격으로 노략질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제안한 게 아니야. 그쪽에서 먼저 돕겠다고 나섰어.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겠지.”

“숭고하다니…….”

알렉의 앞이라 조심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즐거워서 나는 웃음이 아닌,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웃음이었다. 피가로의 말대로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은 궁지에 몰려있기도 했다.

어떻게든 물자를 보급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상황이 불투명했다. 알렉이 고개를 들어 파우스트를 쳐다봤다. 그는 파우스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식량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라면 하나 있잖아. 파우스트, 마법사는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마력으로 버틸 수 있다고 했지?”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다. 파우스트는 뜸을 들이며 어렵사리 대답했다.

“……그랬었지.”

“그렇다면 인간들에게 먼저 식량을 배급한다. 인간은 식사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두에 서는 부대가 힘을 못 쓰고 빌빌거리면 곤란해.”

지휘관으로서 옳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자꾸만 무언가가 마음에 밟혔다. 파우스트는 원인을 찾기 위해서 떠도는 생각을 입 밖에 냈다.

“마법사라고 오래 버틸 수 있는 건 아니야. 모두가 마력으로 허기를 달래는 방법에 능한 건 아니고.”

“괜찮아. 최대한 길어지지 않도록 수를 쓸 테니까.”

알렉이 다 생각이 있겠지. 무작정 믿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일하게 두고 볼 수 없었다. 최선의 선택이라지만, 이건 반드시 안 좋은 말이 나올 것이다. 파우스트는 몹시 싫은 기분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차라리 동쪽 제후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때?”

“동쪽 국가는 내란으로 힘든 상황이다. 우리에게 손을 빌려줄 여유는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 분야에 대해선 자신보다 알렉이 정확했다. 동쪽 국가는 이방인에게 배타적이다. 내란이 아니더라도 과연 중앙 국가의 일에 손을 들어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일단은 버티자. 지금 상황에서 물러설 수는 없어.”

“시간을 끄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잖아. 차라리 선제공격을 하는 건.”

알렉은 단호하게 파우스트의 말을 끊었다.

“지난 전투로 알았잖아. 저쪽도 마법사가 있어. 그것도 꽤 강력한 마법사가. 성을 방호할 마법사가 있으니, 우리의 전략에 호락호락하게 당해 주진 않을 거야.”

그 말과 동시에 파우스트가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내가 가서 방호벽을 부술게. 그거면 되겠지?”

알렉이 미간을 모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반응이었다.

“상대 전력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네가 일선에 서는 건 위험해, 파우스트.”

파우스트는 결연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시기를 미뤄봤자 피해만 커질 뿐이다. 물자에 제한이 있는 이상, 고립된 건 그쪽이나 이쪽이나 마찬가지였다.

파우스트가 가장 걱정하는 건 식량 배급의 우선권으로 생기는 부대 내 인간과 마법사의 갈등이었다. 부하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때는 그들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게 파우스트의 지론이었다.

“알렉, 미리 말하지만 난 죽으러 가겠다는 게 아니야. 되든 안 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막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마법사를 이길 수 없어.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같은 마법사뿐이야. 대신, 네가 부대를 이끌고 내가 성벽에 도달할 수 있도록 나를 엄호해 줘. 화살이 닿지 않도록 최대한 높게 날아오를 테니, 나한테 이목이 집중되지 않도록 주의를 분산시키는 거야. 할 수 있지?”

파우스트는 망설임 없이 펼쳐놓은 지도를 접었다. 이미 어느 정도 짜인 마당에 복잡한 작전은 필요 없었다. 알렉이 이끄는 혁명군에서 파우스트는 단연 최강의 말이다. 그가 선두에 서는 한, 실패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예리한 빛으로 번득이는 자색 눈은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없었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렉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너 어쩐지 점점 피가로님의 말투를 닮아가는 것 같네. 알겠어. 못 할 거 없지. 내게 맡겨!”

*

결과부터 말하자면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이번 작전의 주축이 된 것은 파우스트였다. 파우스트는 미리 정한 대로 싸움이 시작되자 빗자루를 타고 높이 날아올랐다.

피가로의 제자로 들어가고 파우스트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마법의 기초였다. 이론적인 부분과 더불어 별사탕을 만드는 법, 빗자루를 타는 방법 등을 교육받았다. 피가로의 수업은 대단히 엄격하여 언제고 어렵지 않았던 적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비행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독보적으로 힘들었다.

가르침을 받기 전에도 빗자루를 타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비행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마법사에 대해서 가장 보편적으로 갖는 이미지였다. 그러나 비행 마법은 단순히 이미지만으로 익히기에 어려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주변에 마법사가 아무도 없었던 탓에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동종 마법사를 만났다. 전란의 불씨로 엉망이 된 세계를 여행하고 있던 마법사는 파우스트의 고향 마을에 우연히 들렸다고 했다. 만남은 짧았지만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훌쩍 떠나간 마법사는 당시 마법사란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던 파우스트에게 날아오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마법사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아. 아직 어린 네게 할 말은 아니지만, 언젠가 모든 것을 저버리고 도망치고 싶어진다면 스스로 나는 방법 정도는 알아야겠지.’

잔인한 말이었으나, 동시에 순수한 호의였다. 그 마법사에겐 아주 단편적인 것만을 배웠기에 완벽하지 않았다.

첫 비행 수업에서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습관을 지적했다. 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석구석 배어든 나쁜 버릇은 파우스트를 단단히 고생시켰다. 그 과정에서 저를 믿어주는 스승을 많이도 실망시켰던 것 같다. 피가로는 매번 온화한 얼굴로 웃으며 ‘다시 해보자’라고 말했지만, 파우스트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때 흘린 피와 땀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몹시 엄격한 수업을 받았기에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날 수 있었다.

파우스트는 성 꼭대기에 접근하여 방호벽을 부수고 상대 마법사를 직접 돌로 만들었다. 상대도 나름대로 강한 축에 속하던 지라, 승부는 그야말로 한 끗 차이였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사방에 파편이 튀겼다. 떨어지는 파편을 맞은 사병들이 비명을 질렀다.

목표로 하던 성은 한 달간의 농성이 거짓말처럼 성문이 뚫리자 싱거울 정도로 쉽게 제압되었다. 싸움을 마치고 뒷수습을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상대는 정말 극한까지 몰려있었던 것 같다. 낯선 군대가 성문을 부수며 진입하는데도 아무도 나서서 막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혁명군의 존재를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성 내부의 상황은 심각했다. 안전을 위해 들였다기보다는 모두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였겠지. 노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분열과 배신을 염두에 두어 적에게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통제했다. 살아남을 사람은 살아남도록 두는 편이 훨씬 나을 텐데도.

물자의 부족을 해결하는 방식은 집단마다 다르다. 과거에 함락한 어느 영지는 마찬가지로 혁명군의 진군을 두려워한 다른 영지에게 지원을 받았고, 혁명군은 마법사에게 배급하는 식량을 줄이는 것으로 활로를 찾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땠을까. 아마 성 안에 가둔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현실이 그랬다. 포위된 상황에서 군대를 해체하거나 침입자에게 성을 내어줄 수는 없으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진 보람이 있었다. 파우스트는 단순히 승리했다는 사실보다 같은 사람들끼리 물어뜯는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는 것에 기쁨을 얻었다. 혁명이라는 보기 좋은 껍질을 뒤집어썼을 뿐, 서로 견제하고 물어뜯는 것은 그들 또한 마찬가지임에도.

마음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다는 건,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얼마나 잔인한 이야기인지.

파우스트는 늦은 시간까지 부하들과 함께 뒷정리를 했다. 아주 사소한 일도 거절하지 않고, 허드렛일까지 흔쾌히 도맡아 했다.

오늘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성 전체를 감싼 강력한 방호벽을 깨고 그만한 방호벽을 펼친 마법사와도 치열하게 겨뤘다. 번거로운 요새를 뚫었으며 마침내 기나긴 싸움에서 승리했다.

여태 험난한 전투는 수도 없이 많았다. 오죽하면 지금까지의 싸움을 일일이 세는 것보다 대화를 통해 해결하거나 큰 피해 없이 순탄하게 점령을 성공한 횟수를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였다. 전쟁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힘들고 어렵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만큼 단기간에 마력을 끌어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사람의 목숨에 경중은 없다. 파우스트는 혁명군의 수장인 알렉의 친우이자 마법사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었지만, 동시에 평범한 한 명의 사람이기도 했다. 아군과 적군을 막론하고 난도질당하거나 말의 발굽에 짓밟힌 시신 등을 수습하는 건 누구라도 원치 않는 일이다. 피가로의 말이 옳았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상, 누구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며, 상처받고 괴로워할 것이다.

그럴수록 한 명이라도 더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렉이 하지 못하는 만큼, 그런 부분을 자신이 채워야 한다고.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가장 낮은 곳을 둘러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 때문에 지친 몸을 종일 쉬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성벽 모퉁이를 돌았다. 전신이 땀과 피로 지저분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 전체에 이미 자신의 몸에서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짙은 악취가 배어있는 탓에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도 미지근한 물 한 잔과 편안한 수면이 고팠다. 지금이라면 허리와 엉덩이가 부서지도록 불편한 간이침대조차 거위털로 만든 최고급 침대처럼 애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히 지친 파우스트가 피로한 눈가를 비빌 때였다.

“이번에는 무리를 했구나, 파우스트.”

“피가로님.”

병사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목에서 피가로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를 보자마자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내게 이유를 묻는 거니? 당연히 너를 찾으러 왔지.”

파우스트는 피가로에게 한달음에 달려가려다가 멈칫했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피가로와 달리 직전까지 시체를 치우고 잔해를 들고 있던 파우스트는 지저분한 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피가로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파우스트가 재와 먼지, 핏물이 골고루 뒤섞인 손을 내려다보며 주춤거릴 즈음이었다.

“이렇게나 다쳐서 오고.”

먼저 성큼 다가와 거리를 좁힌 피가로가 더러워진 뺨을 어루만졌다.

“피가로님, 당신의 손이 더러워집니다.”

“상관없어.”

투명할 정도로 푸른빛이 피가로의 손바닥과 파우스트의 뺨을 감쌌다. 피가로의 마법은 보편적으로 아주 차가운 색이지만, 지금은 더없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봄볕처럼 따스한 온기가 부드럽게 살갗을 감쌌다. 눈치채지 못했는데 뺨에 상처가 있었던 모양이다. 따끔거리는 통증은 오히려 상처가 치료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피가로가 물러나고, 파우스트는 방금 전까지 스승이 쓰다듬던 자리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치료하면서 자신의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겨우내 근처 마을에 돌던 전염병을 치료하여 성자라고 불리던 사람이니 당연한가.

단 하나뿐인 제자라지만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 애써 무던하게 받아들이려 하나, 파우스트에게는 자신이 피가로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우선시해주는 다정한 스승. 이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이 사람과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다.

알렉은 소중한 친구인 동시에 혁명군의 리더였다. 알렉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지금까지 이룬 것들이 전부 무용지물이 된다. 그의 목숨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의 친우이자 혁명 파트너인 자신의 목숨마저도 부품에 불과하다.

모두가 알렉을 믿고 따르고 있었다. 그가 가져다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치고 있었다. 하다못해 종자인 레녹스에게도 유사시에 자신보다 알렉을 우선시하라고 말해두었다. 거짓말에 재주가 없는 레녹스가 떨떠름한 얼굴을 한 것과는 별개로, 잔인하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피가로는 다르다. 피가로님만큼은, 모두의 필사적인 바람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오로지 자신을 봐준다. 자신만을 아끼고, 자신만을 신경 쓴다.

당장은 제자의 부탁을 따라 알렉의 옆을 지키고 있지만, 결국 피가로에게 파우스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이렇게 비밀스럽고 소소한 순간에 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달아오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나도 알아.”

피가로가 다시 파우스트의 얼굴을 만졌다. 굳은살 하나 없이 보드라운 손끝이 지나갈 때마다 땀으로 젖은 얼굴에 후끈거리는 더위가 가시며 청량감이 돌았다. 파우스트는 차마 지저분한 손으로 피가로의 손을 맞잡지 못하고 그 손길에 조심스럽게 기댔다.

“……앉아서 얘기할까?”

떨어지기 전, 손끝으로 파우스트의 눈가를 문지른 피가로가 마법으로 의자를 불러냈다. 착석감이 나쁜 딱딱한 나무 의자였지만, 그마저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오랫동안 서있어 무릎이 무척 아팠던 파우스트는 감지덕지하여 선뜻 앉았다.

“파우스트, 넌 군주에게 이상적인 반려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반려, 그러니까, 왕비 말인가요?”

눈을 동그랗게 뜬 파우스트가 되물었다. 피가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명문가의 여식이거나 인품이나 용모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왕비라고 하니 바로 걸리는 것이 있었다. 피가로는 이런 주제를 가벼운 화젯거리로 삼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아마도 알렉과 관련된 이야기일 터였다.

피가로님은 어째서 내게 이런 걸 물으실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가로님이 하시는 말씀이니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알렉이 차후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피가로님에게 상담한 건 아닐까?

다양한 장수의 합류로 진군이 가속화된 지금, 그들은 썩어빠진 영주들을 타도하고 중앙의 성을 탈환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짧게는 한 해를, 길게는 서너 해를 예상했다. 그런 와중에 오로지 알렉과 피가로만이 지금부터 반년을 계획하고 있었다.

중앙의 왕조가 붕괴된 지금, 혁명군 내부에도 옛 귀족이나 귀족의 후예가 존재했다. 벌써부터 혁명의 성공을 점친 그들이 미래의 왕에게 줄을 대고 있다 들었다. 괴담처럼 은밀하게 도는 소문이었지만, 파우스트는 알렉에게 이미 사실 확인을 마쳐놓았다.

피가로는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다. 권력에 눈이 먼 그들과 달리 피가로는 다분히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정치에 둔한 자신보다는 세상사에 밝고 교류에 능한 피가로 쪽이 훨씬 조언을 구하기 좋을 것이다.

아, 도저히 무리였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파우스트는 최대한 머리를 비우면서 제대로 된 답변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복잡한 자격 요건이 있겠지만, 전 일반적인 부부와 마찬가지로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인 반려란,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지켜주고, 우선적으로 믿어주며, 안정적으로 뒤를 받쳐줄 수 있는 상대겠죠. 당장은 정열적이지만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같은 사랑보다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유대 관계에 의한 사랑을 더 바람직하다고 느낍니다. 꼭 친구나 가족처럼요.”

파우스트의 답에 피가로가 “흐음.” 하고 길게 끄는 추임새를 냈다. 파우스트는 그 반응에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백성들의 짐을 짊어진 군주는 단지 사랑만이 아닌, 직위에 맞는 올바른 반려를 선택해야 하겠죠. 허나, 그렇다고 군주 또한 행복을 좇을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힘든 길이 되겠지만, 전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낙관적이구나. 너의 그런 태도, 나는 마음에 들어.”

피가로는 좀처럼 옳고 그름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는 상대의 의견을 묻고 충분히 들은 다음, 본인의 생각과 조합하여 간단한 평을 남겼다. 그것이 피가로가 남을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파우스트는 그런 피가로의 방식을 좋아했다. 가끔은 딱 잘라 냉정하게 말해주었으면 하면서도, 이것이 피가로 나름대로 타인을 존중하는 행동임을 알고 있었다. 호불호를 넘어서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니 당연한 것이다.

“아직 제게는 어려운 이야기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 알렉의 옆자리에 마법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균형이 올바르게 유지될 테니. 알렉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요.”

말을 마친 파우스트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곰곰이 생각했다. 알렉의 옆에 다른 마법사가 영원한 반려로서 함께하는 그날을 상상하는 것처럼.

파우스트는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입을 열었다.

“한편으로는 왕비가 마법사라면 차후 왕위가 걱정이네요. 만약 알렉이 병에 걸리거나 모종의 이유로 온전히 국사를 돌보지 못하게 된다면…….”

그 사후에, 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파우스트는 끝까지 잇지 못하고 낯을 흐렸다.

파우스트는 인간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전부 인간이었고, 아버지는 마법사로 태어난 자식을 부정하며 집을 나갔다. 자라면서 인간과 마법사의 수명이 다르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마법사로 사는 이상, 가족과 친지를 포함하여 동시대의 인간들 중 누구와도 삶의 흐름을 맞출 수 없었다. 하물며 지금은 전란의 시대였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먼 미래도 아닌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자리에 당사자는 있지도 않은데, 괜스레 못할 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무엄하게 느껴졌다.

그래, 인간과 마법사는 수명이 다르다.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아무리 무의식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간 얻은 교훈을 전부 잊고 그저 계속 함께할 거라고, 한날한시에 살다 죽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을까?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세차게 밀어닥치는 파도처럼 파우스트를 휩쓸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머리가 텅 비어 꺼낼 말도 없었다. 단지 불편한 침묵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파우스트는 망망대해에 내버려진 것처럼 막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가로는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도 크나큰 상심을 읽은 것 같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할까.”

“네, 부디.”

그래서 피가로가 적절히 끊어주었을 때는 무심코 안도의 숨을 쉴 정도였다.

*

전쟁을 지속하는 데에는 셀 수 없는 자금이 들어간다. 지금까지 전쟁으로 소모된 군수품은 점령을 마친 다른 영지에서 받아내거나 목표로 한 지역을 정벌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군도 여유가 없고, 새로 함락한 성도 마찬가지로 물자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마법사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일을 미룰 수 없는 노릇이다. 벌써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고 파우스트에게 항변을 하러 온 사람도 있었다. 파우스트는 최선을 다해 모두를 이해시키고자 했지만, 처음부터 불합리한 대우를 납득시킨다는 건 불가능했다.

여러모로 앞길이 막막한 상황이다. 승전 연회는 물론이거니와, 인간과 마법사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오가는 탓에 승리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조차 없었다. 골머리를 앓는 동안 물자 보충 문제는 뜻밖의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자세히 이름을 밝히지 않은 서쪽 국가의 귀족이 느닷없이 혁명을 지지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간밤에 펼쳐진 전투를 보았습니다. 인간과 마법사가 한데 어우러져 싸우는 모습이 풍문으로 도는 영웅왕의 설화처럼 인상 깊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열기 위한 혁명을 지지합니다.’

다음 날, 마력의 기색을 느낀 파우스트가 급하게 막사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물자는 정체불명의 편지와 함께 도착해있었다. 그나마도 출처를 파악할 수 있었던 건 편지에 적힌 내용 덕분이었다. 마법을 사용하여 옮긴 물자는 단순히 호의로 치부하기 힘든 양이었다.

마왕 오즈의 세계정복 여파로 한차례 쓸려나간 중앙과 달리 살아남은 서쪽 국가는 기나긴 연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혁명군의 수뇌부라지만 그들은 아직 어렸고,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었다. 서쪽의 마법사는 괴짜로 유명하다. 서쪽 국가에 발을 들인 적도, 서쪽 사람들을 만나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런 지식 없이 상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것이 우연한 행운인지 귀찮은 사건의 발단인지 알 수 없었던 그들은 막사에 모여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

“알렉, 어떡하지? 난 신뢰가 가지 않는데.”

“멀리서나마 손을 거들어 주겠다니, 말은 고맙지만 솔직히 외세의 도움을 받는 건 껄끄러워.”

모처럼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요즘같이 세력을 넓혀가는 시기에 외부에서 뻗어온 도움의 손길이라면 보통은 그럴 것이다. 생각이 같다는 걸 확인하자, 원래도 불안했던 마음이 한층 불편해졌다. 그런 와중에 오직 피가로만이 별 꼴을 다 보겠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복잡하게 고민하지 마. 어차피 유흥이다. 서쪽의 졸부들은 별생각이 없을 테니. 굳이 따지자면 일찍이 멸망한 왕조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이 우스워서일까…… 어차피 거절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겠지. 위기를 기회로 발돋움하면 돼. 지금은 마음껏 받아두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상대에 대한 은근한 멸시가 묻어났다. 피가로가 겉으로 드러나는 부정적인 견해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몹시 드문 일이라 신선한 기분마저 들었다.

피가로는 다른 짚이는 것이 있어 보였다. 그는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최북단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사람답지 않게 세계의 흐름을 세세하게 꿰고 있었다. 피가로가 감추는 것이 무엇이든 그건 중앙 출신인 알렉과 파우스트로선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종류일 것이다.

피가로는 필요에 의해 발언하거나 침묵했다. 그 필요란 대다수 피가로 본인이 아닌, 파우스트, 그리고 혁명군의 성패와 관련된 것이다. 피가로가 말해주지 않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 가끔은 아는 것이 독이 될 때도 있다. 알렉과 파우스트는 더 이상 피가로에게 묻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목숨을 건 혁명을 유흥거리 취급하다니, 이건 불쾌하군.”

“그래, 그렇지만 지금의 우리는 이걸 돌려보낼 수 없어.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야. 모든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피가로님의 말씀대로 조건 없는 호의라면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어.”

“나도 같은 의견이다. 좋아, 만장일치로 결정됐군.”

인간과 마법사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사람으로서 충분히 화합할 수 있었다. 혁명군 내에도 긴밀하게 교류하는 이들이 있었다. 인간과 마법사를 가리지 않고 처음부터 믿음직한 가족, 혹은 친지와 함께 혁명군에 합류한 사람들이 있었다.

보급품의 차등 분배에 대해서 마법사들은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파우스트는 항상 그것이 미안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마법사에게 그들이 원하는 긍정적인 답변을 줄 수 없어 죄스러웠다. 마법사들이 주린 배를 안고 배식을 받아 가는 인간을 가만히 지켜볼 때마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이 자신의 부덕함처럼 느껴졌다.

“그럼 난 마법사들을 확인하고 올게.”

마침내 문제가 해결되었다. 꽉 막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내내 좌불안석이던 파우스트가 막사를 뛰쳐나갔다. 알렉과 피가로 중 누구도 파우스트를 제지하지 않았다. 요 며칠 한껏 찌푸린 인상을 풀지 못하던 파우스트는 막사 밖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길 때 훨씬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파우스트의 기척이 멀어지자, 근처 의자에 걸터앉으며 알렉에게 눈짓했다.

“그보다 알렉, 잠깐 보지.”

“피가로님, 무슨 일이시죠.”

알렉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는 피가로의 의도를 알지 못했지만, 일단 눈치 빠르게 다가와 앉았다.

“중요한 이야기야.”

익숙하게 다리를 꼰 피가로가 턱을 비스듬히 들었다.

“이것저것 잴 필요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게 신권정치를 제안하려고. 정치의 방향을 정하긴 다소 이르지 않나 싶지만, 이런 건 미리 생각해놓는 편이 좋으니까.”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알렉은 버릇처럼 미소 띤 얼굴로 피가로의 말을 곱씹었고, 이내 조금씩 표정을 굳혔다.

“……피가로님은 언제나 깜짝 놀랄 제안을 하시는군요. 저의 식견이 부족하다 보니 때때로 따라가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그런 것을 논하기엔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적절한 시기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피가로는 자신의 기분을 숨기지 않고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건 명백한 조소였다. 알렉은 피가로의 노골적인 조롱에 오히려 평정을 되찾았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침착한 대응에 피가로가 눈가를 접었다. 파우스트 앞에서 보여주는 것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미소였다. 이제는 알고 있었다. 적당히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너도 느끼고 있겠지. 전쟁이 길어지면서 모두가 서서히 지쳐가고 있어. 머지않아 불만이 쏟아질 거다. 공존과 화합이라는 취지는 좋으나,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피가로는 말을 멈추고 알렉을 쳐다보았다. 회색 눈동자 속, 독특한 동공이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본다. 생리현상을 잊은 것처럼 한 번 깜박이지 않는 눈은 마치 이해했냐고 묻는듯했다. 알렉은 거북한 속내를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피가로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느닷없이 신권정치를 제안한 건 그 때문이야. 모든 전쟁이 그렇겠지만, 그중에서도 혁명이라는 건 맹목적인 믿음 없이는 불가능해.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을 만드는데 가장 효율적인 것이 바로 신앙이다.”

피가로는 말을 하며 느긋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곧추세운 허리가 느슨하게 풀리면서 깍지 낀 손이 무릎 위에 놓였다.

“왕을 목표로 하는 자로서 신앙의 중요성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성자를 내세워서 군대를 이끄는 거다. 신이 모두를 가호하여 이끌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거야.”

“그건 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을 속이는 일이 아닙니까?”

그 말과 동시에 피가로가 입매를 비틀었다. 아주 어리고 하찮은 것을 보듯이, 한없이 자애로우면서도 끝없이 업신여기는 눈빛이었다.

“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무작정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따지고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니까.”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언가 실수를 한 건가. 알렉은 한층 조심스럽게 피가로를 관찰했다. 파우스트의 스승이자 위대한 현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는 강대한 마력을 가진 대마법사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북쪽 국가의 마법사가 얼마나 괴팍한 성정을 가졌는지 생각하면 괜스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단지 불쾌하다는 이유로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손짓 한 번, 더도 덜도 말고 딱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이 사람에게 도움을 구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피가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데, 어느덧 언짢은 기색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다시 무감각한 얼굴로 돌아간 피가로에게선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직전까지의 서늘한 분위기가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전환이 빨랐다.

“속이다니, 그건 또 흥미로운 발상이구나. 아무래도 서로 보고 느끼는 게 다른 것 같으니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볼까.”

뾰족하게 세운 손끝이 탁자를 두드렸다. 원본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름의 음률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과 정령은 긴밀하게 이어져있어. 마법사의 마력의 근원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마법사는 정령을 사역하여 힘을 얻지. 정령은 다양한 형태로 사람의 삶에 관여하곤 한다. 특히 인간에게 그들은 변덕스럽고 감당할 수 없는 존재겠지. 그런 의미에서 너희가 살아가는 세상에 정령의 존재는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정령이라는 게 정말로 실존하는 겁니까?”

알렉의 질문에 피가로는 독주를 든 것처럼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믿지 못하는가. 그런 너희를 이해시키는 것이 가끔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 신중함은 나름의 지혜라고 생각해. 허나, 너희 인간들이 믿고 안 믿고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정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다. 인간은 믿지 못해도 마법사들은 알아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거다.”

“마법사가 정령을 사역하여 힘을 얻는다면, 정령의 존재를 신으로 받아들이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 그 표현은 잘못되었나. 나의 나쁜 버릇이야. 정정하지, 사역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만한 자격을 갖춘 강한 마법사뿐이다. 이제 그런 마법사는 세계에 얼마 남지 않았으니, 대다수의 마법사가 정령에게 끌려다니고 있을 거다.”

보다 안정적인 혁명을 기원하며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건넸다. 자칫 골치 아플 수 있는 상황인데도 알렉은 침착하게 의문을 풀어나갔다. 피가로에게도 이처럼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는 인간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보면 볼수록 왕이 되기에 합당한 인재라는 생각이 든다. 알렉이 혁명을 거쳐 왕위에 오르는 것은 더없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느껴졌다. 마치 어떤 거대한 존재가 달이 만든 모형 정원을 마음껏 조종하는 것처럼, 한낱 사람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묘한 힘이 느껴졌다.

어차피 막을 생각도 없긴 했다. 한 번 제 손으로 부순 것의 재건을 돕는다는 건 실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아무렴 뭐 어떤가. 자신이 개입한 이상, 모든 것은 파우스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짧은 순간, 피가로는 자연스럽게 북쪽의 쌍둥이 스승을 떠올렸다. 그들처럼 자신도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둘 생각이었다. 여태 지켜본 결과, 안타깝게도 그의 제자는 정치 머리는 영 꽝인 것 같다.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낌없이 퍼주다가 사서 손해 볼 상이다.

얼마 전, 보급대상에서 제외된 마법사들이 파우스트에게 따져 묻는 것을 보았다. 단편적인 것밖에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원망의 화살을 가장 편리한 대상에게 돌렸다. 마음 약한 파우스트는 가련하게도 심리적 부채감에 시달리며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피가로는 떠나기 전에 제자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놓을 생각이었다. 소박한 파우스트는 신격화 따위 원치 않겠지만, 집단 내부에서 암암리에 인간보다 뒤처지고 있는 마법사의 권리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조치였다.

게다가 신격화라는 건 듣기에는 별로지만 막상 겪어보면 그렇게 나쁘지 않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고독이라는 늪에 빠질 수도 있으나, 파우스트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알렉도, 레녹스도. 만약을 대비한 보험은 충분했다.

“세계가 절망하고 있을수록 사람들의 희망이 될 영웅이 필요해. 그러나 신이 아닌 이상, 조잡하고 나약한 몸뚱이로 아무런 흠이 없는 건 불가능하지. 사람들에게 신화적인 영웅으로 추대 받기 위해서, 어려운 도박의 성공률을 높이자는 거다.”

이끄는 자가 약한 자라면 병사들도 덩달아 약해진다. 그런 점에서 알렉은 인간들을 통솔하기에 최적의 인재였다. 다만 한 가지, 그의 정통성은 혁명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말이 나올 것이다.

혁명군을 이끌 때는 괜찮다. 시작은 오히려 평범한 한 명의 인간인 편이 훨씬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쉬웠다. 같은 약자의 편에서 함께 부당함에 분노하고 무기를 들어줄 테니까.

그러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출신이 문제가 된다.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조악한 시골 마을 출신 왕을 믿고 따를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무사히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공로도 있고, 곁에서 지켜본 것이 있으니 충성을 맹세한 기존의 부하들까진 아슬아슬하게 따를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사소한 실수에도 쉽게 비난하고 몰아세울 것이다.

나라는 일개 군대와 비할 바 없다.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뛰어난 지도력도, 강한 무력도 아니다. 반드시 만인이 납득할 만한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

알렉은 피가로의 말을 이해하고, 정통성이 필요하다는 부분에 동의했지만 그의 방식에 찬성하지 않았다.

“설화 속의 영웅왕처럼 말인가요? 하지만 피가로님, 살아있는 사람은 절대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영웅처럼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제게는 불멸의 신체도, 무적의 군대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허풍쟁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할 겁니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을 뿐, 결국 사람들을 속인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굳이 그런 어려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과 마음을 이을 수 있다. 알렉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피가로는 알렉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실망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는군. 네 허리춤을 봐. 적어도 보검은 있다. 네 수중엔 이미 신의 부름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어. 알렉 그랑벨, 넌 무엇을 위해 혁명을 시작하고 그 검을 뽑았지?”

알렉은 반박할 말을 찾기 위해 입을 뻐끔거리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기세에 밀려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더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지금이 바로 강경하게 밀어붙일 때였다.

참 먼 길을 돌아왔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이보다 빠르게 원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마왕 오즈와 함께하던 그 시절이라면…….

피가로는 눈을 한 번 깜박이는 것으로 과거의 잔재를 지워냈다. 그는 거침없이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주 선 피가로는 알렉보다 키가 컸다. 나무로 만든 탁자를 치는 소리에 놀란 알렉이 고개를 들어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피가로는 북녘에 쌓인 눈처럼 냉랭한 낯을 하고 있었다.

“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감정은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라,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아. 언제든 쉽게 돌아서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다른 얄팍한 감정과 비교하면 신심은 비교적 퇴색되지 않는다. 나를 믿어. 그 부분에 대해선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 중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해가 진 막사 안에 어둠이 드리웠다. 그중에서도 그늘진 곳에 피가로의 두 눈은 새까맣게 보였다. 한가운데의 동공만이 비상식적으로 선명한 빛을 발했다. 알렉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요동쳤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만 요란했다.

알렉은 끝까지 반신반의했다. 설득이 통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확신이 필요할 뿐이다. 손쉽게 군주를 탓하는 백성과 달리 군주는 누구도 탓할 수 없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알렉은 실패의 반동을 걱정하고 있었다. 정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피가로는 친한 사람에게 하듯이 알렉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알렉, 네가 사람의 아들이 되는 거야. 그리고 네가 이끄는 혁명군은 신의 부름을 받은 군대가 된다. 그로서 죄책감을 덜고 나아갈 명분을 얻는 거지. 결국 대의와 학살은 한 끗 차이 아니겠나.”

“피가로님…….”

피가로는 오른손을 들어 알렉의 이마를 짚었다. 허공에 띄운 손이 천천히 내려와 가슴팍을, 양쪽 어깨를 차례대로 그었다. 느른히 입가를 당기는 모습은 경건하기는커녕 염세적으로 느껴졌다.

“……파우스트는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 애는 늘 그렇지. 변함없이 선량하고 신실해.”

파우스트의 이름이 거론되자, 피가로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눈동자 속에 담긴 보석이 찬란한 빛무리를 흩뿌렸다. 계책을 내던 직전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화사한 미소였다.

그 안에 담긴 것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애정이다. 피가로에게 민감한 부탁을 하러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애정의 크기는 더 커지면 커졌지 결코 작아지지 않았다.

“넌 그 애와 달라. 이 내가, 결과적으로 네게 좋은 일이 될 거라 장담하지. 어떠한 풍파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너의 각오를 보여주도록.”

파우스트를 위해서. 마지막에 피가로는 웃는 얼굴 그대로 덧붙였다.

그제야 새삼 되새기게 된다. 눈앞의 마법사가 오로지 자신의 애제자만을 위해 이런 귀찮은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나이 든 고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의 감정이 무섭다고 느끼게 되었다.

10.

“오만방자한 반동분자 같으니, 네까짓 게 어딜 감히 신의 이름을 모방하려 드느냐! 천벌이 두렵지도 않으냐? 새 시대를 여는 것은 너희 혁명군이 아닌 우리의 주군이시다. 우리는 중앙 나라의 뿌리조차 알지 못하는 너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리의 주군께선 근본도 모를 잡것들을 물리치고 옛 왕조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다!”

듣는 사람이 낯 뜨거울 정도로 모욕적인 언사였다.

“아쉽구나.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피로 물든 홀을 둘러본 알렉이 진심으로 한탄했다. 주위에 수많은 시체가 아무렇지 않게 널브러져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사라져버릴 만큼 잔혹한 광경이었다.

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 중 혁명군 외에 살아있는 건 홀까지 끌려 나온 성주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아내와 자식은 포위당하기 전에 제 손으로 직접 숨을 끊었는지 칼에 찔려 죽은 시신이 내방에서 발견되었다.

“일찍이 멸망한 과거의 잔재를 쫓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 꿈, 다음 생에는 모쪼록 이루기를 바라지.”

검을 쥔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알렉은 손에 힘을 주고 단칼에 성주의 목을 베어냈다.

*

다른 때보다 몇 배는 길게 느껴지던 여름의 끝물, 완연한 가을을 맞이하며 상승세를 타던 혁명군은 파도의 흐름에 탑승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세력을 넓혔다.

오로지 중앙성만 탈환하면 된다며 시작했던 혁명이었으나, 박해받는 사람들을 모른 척 지나치지 못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점점 복잡하고 커지게 되었다. 그렇게 번진 불길은 이제는 중앙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중앙으로 갈수록 과거 중앙 왕조에 충성하던 귀족의 후예들이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혁명군이 중앙을 향해 진군을 서두를수록 그들은 더욱 끈끈하게 결집했다. 실로 괴기한 충성심이었다.

점점 전투는 치열해지고, 누구도 투항하지 않은 채 어느 한쪽이 재기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때까지 전쟁은 계속되었다.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거다. 새로운 왕조가 설립되면 반드시 판도가 바뀌게 되니까. 그간 어렵사리 쌓아 올리고 유지한 것을 한낱 종잇조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거지.”

피가로는 간략하게 말했다. 혁명군의 사정에 깊게 관여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남 일처럼 낯선 태도를 유지했다. 알렉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나라는 지도자 없이는 굴러가지 않아. 지금은 제후들의 동맹으로 굴러가는 동쪽도 머지않아 왕조를 세울 거다. 많은 지지를 받는 블랑셰 가를 견제하기 위해 제후들이 잇따라 손을 잡고 있다 들었어.”

“블랑셰라면 동쪽 나라 변방에 위치한 무가겠지. 블랑셰의 가주가 무력과 인망을 두루 갖춘 대단한 명장이라더군. 그게 사실이라면, 뿔뿔이 흩어져 서로 견제하기 바쁜 제후들이 부랴부랴 협정을 맺을만 하구나.”

알렉과 피가로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니 괜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구불거리는 앞머리를 매만졌다.

“중앙의 왕조가 멸망한 지도 어언 백 년이야. 살아남은 후예가 새로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여태 중앙성이 잠잠한 건 그 때문이었나…… 시기가 나쁘네. 왜 하필 지금일까.”

“파우스트, 우연이 아니야. 혁명군이 북상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서두르고 있는 거다.”

왕조는 멸망했지만, 나라보다 일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던 몇 명의 귀족들은 살아남았다. 혁명의 불길이 날로 거세지는데도 중앙성에 남은 귀족들은 변변찮은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판이었던 것 같다.

피가로는 삐뚤게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확실히, 꼼꼼하게 청소한다고 했지만 남아있는 왕족이 있었을 수도 있겠네.”

인간의 목숨은 질기니까. 피가로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으나,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이 소리가 되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알렉도 비슷한 심정인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할 말이 없어 하하, 어색하게 웃다가 안색을 흐렸다.

그보다 이상한 말이다. 중앙 나라를 전복시키고 왕조를 무너뜨린 건 분명 마왕 오즈일 텐데, 지금 말은 피가로 본인이 세계정복을 주도한 당사자처럼 들린다. 파우스트는 땀을 흘리며 알렉을 곁눈질했다. 알렉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파우스트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되물었다.

“마왕 오즈가, 말이죠?”

“아, 그래. 마왕 오즈가.”

피가로는 마찬가지로 미소 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동요의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때, 고민하던 알렉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피가로님은 마왕이 세계를 정복할 때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마왕의 눈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있었지. 마왕 오즈는 나와 같은 북쪽 출신의 마법사고, 그쪽부터 세계정복을 시작했잖아?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 오즈는 이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 나로선 그놈이 세계를 불태우는 걸 막을 수도 없고, 그놈을 돌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 흔한 이야기지. 뭐든 할 수 있었다면 오죽 좋겠냐마는.”

담담한 목소리와 별개로 짙은 환멸과 체념, 미미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 말을 들으며 파우스트는 확신했다. 역시 피가로는 마왕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동시대를 살아가던 수많은 마법사가 마왕에 의해 돌이 되었다고 한다. 피가로 본인은 자리를 피하여 화를 면했다고 하나, 돌이 된 마법사 중에 그의 지인이 있었을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겪은 입장에서 당연히 좋게 보이지 않겠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파우스트는 순간, 돌이 된 동료들을 떠올렸다. 잊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머릿속에 새기는 그리운 얼굴들을 생각했다. 그러자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일을 이야기하는 피가로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주제넘은 생각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전혀 관련 없는 일로 피가로를 추궁하는 분위기가 불편했다. 파우스트는 한쪽 팔을 들어 피가로와 알렉 사이를 가로막았다.

“마왕에 대한 건 이제 됐잖아. 어차피 지난 일이니까. 알렉, 그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자.”

알렉은 파우스트의 행동에 슬쩍 인상을 썼으나, 금방 평소처럼 믿음직한 친구의 얼굴로 돌아왔다.

“맞는 말이야. 그래서 여러 조건을 고려해 봤는데 다음은 이곳부터…….”

*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눈이 떠지는 날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피가로님은 절대 ‘그냥’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무엇이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알지 못하는 새에 악몽을 꿨거나 잠자리가 불편했던 둥, 여러 가지 가능성이 혼재한다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었다. 부쩍 선선해지는 환절기의 시작을 알리듯이 막사 안에도 쌀쌀한 바람이 조금씩 새어 들어왔다. 새벽이 되면 더욱 매서워지는 바람 탓일까, 잠결에 펄럭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풍압이 느껴진 것은 아주 잠시뿐이다. 곤히 잠든 파우스트의 머리카락 몇 올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아주 얕은, 피부를 간질이는 감각.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피로한 몸뚱이에 진득하게 엉겨 붙은 잠기운이 순식간에 걷혔다. 담요를 박차고 몸을 일으킨 파우스트가 손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인 손에 짧고 투박한 손잡이가 잡혔다. 그것은 내내 베개에 깔려있던 탓에 온기를 품고 있었다.

숨겨진 칼날은 칼집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파우스트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뽑아 다가오는 침입자를 찔렀다. 상대보다 작은 체구를 이용하여 두 손으로 손잡이를 쥐고 체중을 실어 있는 힘껏 부딪쳤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은 곧장 옷을 뚫고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는 어깨를 찌른 칼의 손잡이를 감싸듯 아랫면을 눌러 더욱 깊숙이 욱여넣었다.

비명은 없었다. 그러나 통증은 제대로 느끼는지 주춤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단번에 심장을 찌를 생각이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등불이 꺼진 막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칼을 뽑고 물러나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다시금 파우스트를 덮쳐왔다. 파우스트는 정체불명의 침입자와 좁은 막사 내부에서 엎치락뒤치락 굴렀다. 차내 쓴 이불에 동선이 꼬이자, 섬뜩한 한기가 목덜미를 비껴갔다.

상반신을 숙이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했다. 언뜻 귀밑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 외에 다른 것을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좁은 막사에서 마법을 쓰는 건 위험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틸크나트·무르크리드》!”

허공에 그려진 마법진이 강한 빛을 뿜어냈다. 동시에 침입자가 펄쩍 뛰어 물러났다. 시야가 한순간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물들었다. 폭발이 발생하는 것과 침입자가 도망치는 건 거의 동시였다. 마법으로 인한 폭발의 여파에 휘말리기 전에 침입자는 막사 모퉁이를 칼로 찢고 빠져나갔다. 그 행동이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몹시 날랬다.

죽이거나 생포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테지만,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혼자 남은 파우스트는 격렬한 몸싸움 중에 넘어진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재와 먼지로 지저분해진 옷을 털며 쯧, 혀를 찼다.

폭발에 휩쓸린 막사는 반쯤 날아가있었다. 탁자와 의자 등 얼마 없는 가구는 전부 부서지고, 타는 물건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침대는 볼만했다. 얇은 담요와 베개는 새까맣게 탄 속을 드러낸 채였다.

마법은 사용자에게 감응한다. 불이나 폭발 마법만큼은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기습을 당한 상태에서 그런 냉정한 사고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덕분에 이 꼴이다. 이래서 마법을 쓰지 않으려 했는데.

파우스트는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워 불길을 제압했다. 다행히 본인이 저지른 일이라 수습이 쉬웠다. 막사가 불바다가 된 마당에 정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만 불씨도 남지 않도록 하나하나 꼼꼼하게 지워갈 때였다. 거의 다 타서 흔적만 남은 막사 천막이 걷히며 레녹스가 뛰어 들어왔다.

“파우스트님, 무사하십니까!”

“레노인가, 너는 괜찮아?”

레녹스는 보기 드물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여기까지 한달음에 뛰어온 게 분명했다. 아닌 밤중에 깨어난 건 그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역시 마법은 쓰지 말 걸 그랬나. 파우스트는 미안한 감정이 앞서 헛기침을 했다.

레녹스는 파우스트가 민망해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지난 상황을 보고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만 다른 쪽은 수라장입니다. 습격 인원은 소수였지만, 워낙 늦은 시간인데다 불침번이 방심하고 있던 모양이라.”

“벌써 경을 쳤겠군.”

“네. 알렉님이 무척 노하셔서…….”

“알렉.”

파우스트는 레녹스의 말을 반복했다. 소중한 이를 떠올리자 가라앉은 눈에 빛이 돌아왔다.

“알렉은 무사한가?”

“알렉님은.”

레녹스가 대답하기 전이었다.

“됐어. 내가 직접 확인하지.”

파우스트는 레녹스의 말을 듣지 않고 간신히 형태만 유지한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의 달리다시피 성큼성큼 걷고 있으니, 레녹스가 보폭을 넓혀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알렉님도 무사하십니다.”

“그래, 저기 보이는군.”

레녹스의 말대로 야영지는 엉망이었다. 불탄 것은 파우스트의 막사만이 아니었다. 그건 본인의 손으로 불태웠지만, 불이 붙은 야영지는 명백히 적대 진영의 방화였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뛰어다니고, 다친 이들은 구석에 주저앉아있다.

알렉은 이미 밖으로 나와서 혼란한 병사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알렉도 습격을 받았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이 곧 병사들의 사기와 직결된다며 매번 옷차림에 신경 쓰던 그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모두를 이끌고 있었다.

어쨌든 안색도 괜찮고, 특별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파우스트는 그 사실에 안심했다.

“파우스트.”

멀리서 파우스트를 알아본 알렉이 아는 체를 했다. 원래는 무사한지 확인만 할 생각이었으나, 이렇게 되면 가까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파우스트는 알렉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알렉, 무사해서 다행이다.”

“응, 너야말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기도 잠시, 지척에서 파우스트를 확인한 알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의 시선은 정확히 파우스트의 목덜미를 향하고 있었다.

“파우스트, 너…….”

알렉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파우스트가 손을 들어 막았다.

“잠깐, 조금만 있다 얘기하자. 우선 피가로님께 다녀올게.”

“……그래.”

알렉은 떨떠름한 눈치였지만 흔쾌히 보내주었다. 파우스트는 미안하다는 듯이 멋쩍게 웃었다. 못내 마음이 편치 않아 뒤를 돌아보니, 눈이 마주친 알렉이 손을 흔들었다. 다행히 뜻은 잘 전해진 것 같다.

파우스트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틈에서 걸음을 서둘렀다. 점점 빠르게 걷던 것이 끝에 가선 흡사 달리고 있었다. 때아닌 습격에 부상당한 병사들이 신음하는 소리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피가로의 막사는 파우스트의 막사 근처에 있었다. 파우스트는 여타 막사보다 번듯하게 세워진 개인 막사 앞에서 숨을 골랐다. 땀이 난 손바닥을 슬쩍 옷에 문지른 파우스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피가로님,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은 없었으나,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알렉도 자신도 피습을 당했다. 상대가 일부러 개인 막사를 가진 간부를 노렸다면 당연히 피가로도 습격을 받았을 것이다. 피가로가 당했을 거라곤 생각지 않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결심한 파우스트는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파우스트의 막사와 마찬가지로 온통 깜깜했다. 얼마나 어둡냐면, 천막이 열리며 오히려 바깥의 빛이 안쪽으로 쏟아졌을 정도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피가로가 침대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깍지 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앉은 그는 제멋대로 입구를 열어젖힌 파우스트를 한 번 쳐다보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들이친 빛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피가로의 발치에 무언가 있었다. 그곳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파우스트는 스승이 일어나 앉아있는 모습을 보곤 다시 허둥지둥 천막을 내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안쪽을 엿보지 못하도록 완전히 차단한 다음, 벽을 더듬어 등불을 찾아냈다.

등불을 높이 든 파우스트가 피가로에게 접근했다.

“피가로님, 괜찮으십니까?”

“그럼. 내가 누구인지 잊은 거니?”

드디어 피가로가 반응을 보였다.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돌아보며 입가를 느슨하게 했다. 은은한 주홍 불빛에 차가운 얼굴과 핏기 하나 없는 낯빛이 더욱 두드러졌다. 파우스트는 “아뇨…….”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등불로 바닥을 비췄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피가로의 발밑에 두 명의 사람, 아니, 두 구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파우스트는 바로 주저앉아 맥을 짚었다. 당연하지만 숨은 진작 끊겼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온기만이 이들이 방금까지 살아있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피가로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엄연히 말해 이것도 죽이는 장면 자체를 본 건 아니지만,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파우스트는 등불을 이리저리 비추며 시신을 확인했다. 소속으로는 짐작 가는 바가 있으나, 보다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아까부터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찌른다 싶더니, 사망한 침입자들은 전신이 얇은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심하게 너덜거렸다. 상흔으로 보건대, 직접적인 흉기는 아니고 마법인 것 같다. 난잡한 것을 싫어하는 피가로라면 깔끔하게 급소를 노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익숙한 마력의 흔적을 읽어낸 파우스트가 고개를 들어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피가로는 여느 때와 같이 무던한 태도로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입자의 핏물은 바닥과 침대에 흩뿌려있을 뿐, 피가로의 몸에는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만큼 정교하게 마법을 사용하다니, 홀랑 타버린 자신의 막사를 떠올리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진다.

평소의 온후한 스승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잔인한 손속이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만을 믿지 않았다.

북쪽의 마법사는 땅의 기질만큼이나 잔혹하고 변덕스럽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파우스트가 스승으로 모시는 피가로 또한 북쪽의 마법사였다. 처음 피가로를 찾아갈 때만 해도 유성이 불러온 불운의 사자라고 여겨져 죽임을 당할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던가.

한 가지 이해 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죽은 시신의 상태였다. 사망 원인은 더없이 분명한데, 눈, 코, 입, 그리고 귀까지 포함하여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이유까진 알 수 없었다. 꼭 머리 안쪽의 뇌가 폭발한 것처럼.

오래 고민하면 무언가 손에 잡힐 것도 같았으나, 파우스트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는 흠뻑 묻어나는 피를 손끝으로 비볐다. 야영지를 뒤덮은 안개처럼, 짙은 혈향에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역시 죽음이란 몇 번을 지켜봐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상대가 설령 은사를 노린 암살자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엉망이네요.”

“화풀이를 해버렸어. 모처럼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 말대로 피가로는 보기 드물게 흐트러진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목숨을 위협당하고도 여전히 잠기운이 남았는지, 눈을 가늘게 뜬 모습이 몹시 나른해 보였다.

“피가로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탁자에 등불을 내려놓은 파우스트가 천천히 피가로에게 손을 뻗었다. 파우스트는 스승의 맨살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흘러내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자신의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구겨진 소매와 바짓단을 반듯하게 펼치고 느슨해진 허리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흉 하나 없이 하얀 맨발을 손바닥 전체로 감싸고 주위에 나뒹구는 신을 신겨주었다.

스승의 옷차림을 다듬는 것은 추운 북녘에서 지낼 때, 수행 제자 시절에 종종 하던 일이다. 집에 몸이 불편한 가족과 어린 여동생이 있던 파우스트는 제법 손이 야무졌다. 피가로는 타인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파우스트는 언제나 고집을 부렸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처음에는 거절하던 피가로도 결국엔 파우스트가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이어진 것이 지금은 퍽 당연한 일이 되었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너는 가끔 과할 정도로 깍듯해.”

피가로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할 일을 마친 파우스트는 겸손하게 몸을 낮추며 물러났다. 피가로는 다리를 꼰 채 파우스트를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선 그는 간밤에 수면을 취하느라 풀어헤친 머리를 단출하게 모아 묶었다.

“파우스트, 네 쪽은 어떻게 되었지?”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놓쳤습니다.”

“놓쳤다고? 꼼꼼한 너답지 않구나.”

피가로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파우스트는 면목이 없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어두워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차라리 마법으로 불을 밝혔다면…….”

“아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무작정 불을 밝히는 것도 위험할 수 있으니.”

늘 그렇듯 담담한 얼굴로 돌아온 피가로가 고개를 저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을 보고 내려놓은 등불을 챙겼다.

“달리 잃어버린 물건은?”

“없습니다.”

대답은 주저 없이 나왔다. “그렇군.” 짧게 답한 피가로는 입구로 향하며 자연스럽게 파우스트를 쳐다보았고, 등불에 비친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파우스트, 너 머리가…….”

“……네? 아.”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승의 말을 곱씹고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문득 목덜미로 눈길이 갔다. 깨달음을 얻은 것도 그즈음이다. 파우스트는 빈손으로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어깨 근처에서 항상 잡히던 머리카락이 손에 닿지 않았다. 매 전투마다 거슬려서 질끈 묶어야 했던 파우스트의 머리카락은 그보다 조금 더 위에, 목덜미 부근에서 흙 위에 돋아난 잡초처럼 고르지 않게 뻗쳐있었다.

파우스트는 예리한 칼날이 목덜미를 스친 순간,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귀밑에서 들린 서걱거리는 소리를.

“머리카락을.”

그는 말을 더듬었다. 황망한 눈빛에 형용할 수 없는 곤혹이 묻어났다.

“머리카락을 가져갔습니다.”

그 말에 이번만큼은 피가로도 할 말을 잃었다.

*

언제나 표표한 스승이 아주 드물게 보여주는 당황한 표정이 좋았다. 한참 부족한 자신을 제자로 받아준 스승에게 감히 무엄하게도, 그 사람의 곤란한 얼굴을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그러나 맹세컨대 이런 식으로 당혹감을 주려던 건 아니었다.

“방심했구나, 파우스트.”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막사는, 상대는 마법사였나?”

“그건, 제가…….”

폭발 마법으로 반쯤 날아간 막사를 둘러보던 피가로가 황당한 눈초리를 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파우스트는 익은 벼 이삭처럼 연달아 고개를 숙였다. 스승은 매우, 매우 매우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자를 나무라지 않으려 애써 감추던 스승의 얼굴을, 파우스트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하필 지금 이 순간, 뇌리에 과거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올해 여름 동남부의 정벌을 앞두고 어느 마을에 이르렀을 무렵, 피가로가 어떤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어.’

파우스트는 그때 그 말이 지금도 유효할지 궁금해졌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적습으로 야영지는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상대가 이렇게 능동적으로 대응할 거라 생각지 못했다. 습격을 통해 잃은 것이 물질적인 것이면 비교적 나았을 것이다. 간밤의 일로 적에게 몇 명의 포로가 잡힌 것 같다. 포로의 교환은 쌍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쪽은 내세울 포로가 없었다.

적은 포로의 교환 조건으로 퇴진을 걸었지만, 그것만큼은 절대 들어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상대를 몰아넣기 위해 들인 시간과 자금, 수차례에 걸친 충돌에서 전사한 동료들의 목숨 값까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파우스트와 단둘이 있을 때, 알렉은 몹시 괴로운 얼굴을 했다. 포로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 정말 미안하다. 하필이면 너의 부하들이 포로로 잡히다니…….”

“다른 사람이어도 마찬가지야. 네 잘못이 아닌 일로 자책하지 마.”

단순한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 잡혀간 포로는 전부 마법사였다. 혁명군의 체제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는 막사를 섞어 썼지만, 뜻에 찬동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분리하게 되었다. 속한 부대와 직속상관이 다르기에 편의성 면에서 불편함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같은 막사를 쓰는 것보단 특정하기 쉽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만 골라서 끌고 가다니. 이런 짓을 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마력의 기운을 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역시…….”

마침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알렉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파우스트를 쳐다봤다. 파우스트는 그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소행이다.”

두 사람은 미리 입을 맞춘 것처럼 동시에 말했다.

“상대 쪽에 강한 마법사가 있어. 지휘를 할 정도로 발언권이 있나 본데.”

“어째서 지금까지 알지 못한 거지? 상대 쪽에서 꽁꽁 숨긴 건가?”

“비장의 카드…… 같은 느낌이겠지. 이번에는 우리가 당했구나.”

미리 조사한 정보로는 상대 진영에 마법사는 없었다. 물론 전혀 없을 거라고 여긴 건 아니다. 마을 주민이라던가, 영주에게 고용된 마법사가 몇 명은 있었겠지만, 명령을 내릴 정도로 높은 위치에 마법사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성주가 마법사인 게 아니라면 지금까지는 늘 비슷했다. 그야 마법사는 평이 나쁘니까. 인간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마법사를 두려워하여 좀처럼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니까. 그것이 이 세상에 만연한 차별이었다.

“아마 결정권자는 아닐 거야. 비슷하게 보수를 받거나 마음이 동하여 인간의 편을 든 마법사겠지. 우리 군은 마법사가 많으니까, 대항하기 위해 꺼내든 수단일 거야.”

숨 막히는 침묵이 전신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파우스트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조용했다. 다른 때라면 더 많은 의견을 제시했을 텐데,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어딘가 불편한 것 같기도 했다.

어젯밤부터 정신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 소꿉친구로서 뜻을 함께한 혁명 동지지만, 가끔은 파우스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운 건 아닐까 고민할 때가 있었다. 알렉은 파우스트가 얼마나 진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크게 상심했을 그가 걱정되었다.

알렉은 일부러 파우스트에게 말을 건넸다.

“어때, 파우스트. 괜찮을 거 같아?”

“……잘 모르겠어. 신경 쓰이는 것도 있고.”

“네 머리카락 말이지?”

“…….”

파우스트는 팔짱을 끼며 대답을 회피했다.

마법사의 신체 일부는 주술의 매개로 이용당할 수 있다. 알렉은 인간이지만, 혁명군을 주도하는 만큼 마법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친우인 파우스트에게 부탁하여 모르는 건 무엇이든 설명을 들어두기도 했다.

그러고도 매개를 빼앗긴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확실히 와닿지 않았다. 알렉은 파우스트의 능력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강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다. 어떤 저주가 와도 그라면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도 출정의 시간은 다가왔다. 항상 성 안쪽에서 농성을 하던 적은 야습 이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공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기회가 왔을 때 바로 움직이려는 모양이었다. 무슨 계책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정찰병이 성 앞에서 군대가 집결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을 때, 두 사람은 짧은 회의를 중단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언제든 나가서 싸울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두었다.

파우스트가 이끄는 마법사 부대는 가장 높은 언덕에서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싸움은 오즈의 손톱자국에서 벌어졌다. 과거, 세계의 정복자가 남기고 간 흔적에서 새로운 집단이 대륙의 패권을 쥐기 위해 맞부딪쳤다.

새파란 섬광이 지나간 자리는 길게 갈라져 계곡이 되었다. 대지 곳곳에 상흔처럼 균열이 새겨져있었다. 중앙은 전체적으로 그랬다. 한때는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전부 불탔지만, 그 뒤로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군 땅이었다.

저 멀리 성 앞에 까맣게 우글거리는 적병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샌가 소리 없이 다가온 피가로가 옆에 섰다.

“파우스트, 이번 건은 위험할 거다. 그래도 출전할 텐가?”

“피가로님이 보시기에도 그런가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피가로 앞에선 착잡한 심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부하들을 등지고 선 파우스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피가로가 직접 위험하다고 말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쪽에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겨울이 되면 다시 물자의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불고 대지가 얼어붙게 되면, 당연하게도 수성하는 쪽보다 공성하는 쪽이 훨씬 버거워진다.

적어도 농성하는 쪽은 오랫동안 그들의 터전인 덕에 추운 겨울을 날 최소한의 식량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이쪽은 겨우내 지지부진한 싸움을 이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체 모를 타국의 후원자가 보내주는 변덕스러운 선물에 언제까지고 안주할 수는 없다.

거기에 더해, 아예 퇴각을 하면 적에게 절호의 찬스를 주는 셈이다. 갑작스러운 침략으로 어수선했던 상대는 이쪽의 군대가 물러난 틈에 새로이 체계를 정비하고 여러 방비를 갖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몹시 힘겨운 전투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다만, 현재는 수많은 희생을 낳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있으나,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파우스트는 고민 끝에 다시금 결심을 다졌다.

“언제고 위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그중 하나일 뿐이에요. 전 모두를 이끄는 장수이니,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겠죠. 반드시 승리를 거머쥐겠습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피가로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제자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쁜지, 파우스트를 붙잡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보냈다. 달콤한 과육을 씹은 것처럼 산뜻한 미소였다. 그 눈부신 광경을 지켜본 파우스트는 얼핏 고개를 내민 어떤 감정에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스승은 매번 그랬듯 뒤에서 지켜볼 것이다. 저마다의 신념을 건 싸움을 고고한 태도로 지켜보다가, 언젠가 버거워지는 순간이 오면 홀연히 나타나 조언을 해줄 것이다. 피가로 가르시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 피가로님, 저는 이제…….”

아직 본대에서 신호는 오지 않았지만, 지금 움직이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파우스트는 출정 준비를 마치려고 했다.

“기다려, 파우스트.”

그때, 돌아서는 파우스트를 피가로가 불러 세웠다.

“가까이 오렴.”

이미 충분히 가까운 거리였다. 파우스트는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피가로에게 바짝 붙었다. 피가로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서로의 숨이 느껴질 만큼 밀착했다. 그는 경갑을 두른 파우스트의 어깨에 친근하게 손을 올렸다.

“가엾게도 긴장했구나. 네 긴장을 풀어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옳지, 오랜만에 수업을 해볼까.”

“하지만 피가로님, 지금은 시간이.”

파우스트는 이번에도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쉿. 그냥 듣기만 하면 돼.”

검지를 세워 입술 앞에 댄 피가로가 고개를 숙여 파우스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등 뒤에 포진한 병사들이 아닌 척 관심을 갖는 것이 느껴졌다. 피가로는 누구도 듣지 못하게끔 작은 소리로 속닥였고, 말을 이을수록 파우스트는 눈을 부릅떴다.

말을 마친 피가로는 이내 파우스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물러났다.

“언제나 내 말을 명심하렴.”

그날, 피가로와의 대화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당혹감에 물든 파우스트가 피가로에게 되물으려고 할 즈음, 알렉이 보낸 신호가 전해졌다. 진군 개시였다.

같은 뜻을 품은 전우들과 함께 마왕의 손톱자국이 남은 벌판에 뒤섞이면서 파우스트는 몇 번이고 피가로의 충고를 곱씹었다. 그의 스승은 결단코 의미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시야가 넓고 방대한 정보를 가진 피가로는 언제나 남이 보지 못하는 걸 보았다. 자세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피가로가 그런 말을 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치열한 전투였다. 만만치 않을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적은 상상 이상이었다. 각기 다른 색을 띤 군대가 충돌하는 흐름은 스승의 진의에 대한 고민을 휘발시킬 정도로 격렬했다.

변수가 된 건 상대의 전략이다. 빼앗긴 머리카락과 포로를 어떻게든 이용할 거라 생각했으나, 방법까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커다란 낭패가 되었다.

가장 보편적인 매개의 사용처는 저주다. 매개에 담긴 마력을 뽑아 쓰는 방법도 있지만, 상대는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필시 병사들 사이에 몸을 숨긴 파우스트의 존재를 위협으로 여긴 것 같다.

성벽에서 강한 마력의 기척이 났다. 누군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오싹한 느낌이었다. 파우스트는 그것을 몇 배는 민감하게 느꼈다. 단순히 파우스트가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매개로 하여 저주가 발동되고 있었다.

동시에 조금이라도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사는 전부 고개를 들어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일찍이 구하기를 포기한 포로가 나무 기둥에 일렬로 매달려있었다. 파우스트가 있는 위치에선 보이지 않지만, 아마 그 앞에 저주에 사용할 마법진과 매개가 놓여있을 것이다.

적병이 든 횃불이 멀리서도 보였다. 포로의 발밑에 장작이 쌓여있을 때부터 그들이 무엇을 할지 예상했어야 했는데. 알면서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한 것은 내심 설마, 하는 생각 탓이었던 것 같다.

횃불이 허공에 새빨간 호선을 그렸다. 포로들이 묶인 기둥에 차례로 불이 붙으며 뿌연 연기가 올라왔다.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포로들은 처음에는 의연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어차피 모두가 알고 있는 결말이었다. 이미 포로로 잡힌 순간부터 체념했을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상을 위해 한 몸 바치자.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조촐한 연회를 즐기며 모든 혁명군이 그렇게 다짐했다. 그때 그 순간 다 같이 어깨동무를 걸고 먹고 마시며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 지금은 불길에 휩싸여 춤을 추고 있었다. 죽음과 저주의 춤을.

상식을 초월하는 고통 속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잠시뿐이다. 포로들은 곧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기분 탓인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포로가 산 채로 타오르며 내지르는 비명은 파우스트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그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저주하는 통곡이었다.

파우스트에게 쏟아지는 저주는 두 종류였다. 첫 번째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모든 마법사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 저주. 사람의 목숨을 쥐어짜서 터뜨리는 최악의 저주였고, 두 번째는 머리카락을 매개로 사용한 특정 대상의 저주였다. 한 종류라면 어렵지 않게 튕겨낼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여러 사정이 겹쳐 쉽지 않았다.

이렇게나 어지럽고 혼란한 와중에 죽어가는 사람의 통곡은 어찌나 빠짐없이 귀를 파고드는지.

파우스트는 몸을 방어하는 마력을 한껏 끌어올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저주를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출렁였고, 빈틈을 파고든 저주는 빠르게 그를 좀먹기 시작했다.

모순적이게도 마음을 약하게 하는 저주는 나약해진 가슴에 더욱 강하게 파고든다. 파우스트가 무너지기 이전에, 뒤쪽에 물러나 그의 지시에 따르던 마법사들이 단체로 착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군과 적군, 심지어 자신의 보유 마력조차 개의치 않고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끌어내 마구잡이로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인간 병사들은 아군이 쏜 마법에 맞고 피를 흘리며 나자빠졌다. 순식간에 대열이 무너지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이좋게 어울리던 동료들이 서로에게 칼을 들이미는 광경은 흡사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마음이 무너진 마법사의 말로는 처참했다. 그만두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목이 터져라 외쳐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억지로라도 그들을 말리기엔 정작 파우스트도 심각한 타격을 입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필사적으로 소리친 목은 욱신거리고, 어찌할 수 없는 초조함에 가슴이 불이 난 듯 뜨거워졌다. 인접한 착란의 효과는 똑같이 파우스트에게도 전해졌다. 파우스트는 불현듯 어둡고 좁은 방에 갇힌 것처럼 갑갑함을 느꼈고, 그게 시작이었다.

완전히 잊고 있던 아버지의 고함 소리,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흐려진 어머니의 눈물과 어린 여동생의 울음소리. 낡고 지저분한 거울에 비친 퀭하고 창백한 자신의 얼굴. 먼지 쌓인 집구석과 온종일 병상에 누워있던 조부의 시선. 병자 특유의 시큼한 냄새. 말라비틀어진 손가락과 열에 들뜬 마지막 유언.

짧은 순간, 작은 상자 속에 전부 밀어 넣어 봉해둔 감정이 흘러넘쳤다. 그 모든 것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갔다. 마치 번개를 맞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저주가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파우스트는 그가 겪었던 것 중 최악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기억과 감정을 밀어내고 있으면 머리가 심하게 지끈거렸다. 벌어진 입술에선 끈적하게 마른 타액과 간간이 앓는 신음만 흘러나올 뿐, 그마저도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파우스트는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발끝이 오므라들고 세운 손톱이 두피를 사정없이 긁어내렸다.

파우스트의 손은 빈 도화지에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검은 반점에 물들어있었다. 신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아마 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체가 재구성되는 것처럼 속에 있는 것이 전부 위로 밀려 올라왔다. 별안간 구역질이 나더니, 위액이 울컥 목구멍을 비집었다. 파우스트는 입을 다물고 숨을 참는 것으로 간신히 참았으나, 옆에 있는 마법사는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죄다 정체 모를 투명한 물을 게워냈다.

어떤 마법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파우스트의 부대 내에서도 유독 마력이 약한 마법사는 싸움이 한창 벌어지는 한복판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 마법사는 돌진하는 말발굽에 밟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어차피 보나 마나 돌이 되었을 것이다.

후각이 마비되어 더 이상 피비린내조차 나지 않았다. 팔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비명은 계속되었다. 살려줘, 죽여줘, 도와줘, 부탁이야, 제발. 그 소리를 들으며 파우스트는 높은 성벽 위에서 추락하는 상상을 했다.

아, 신이시여. 파우스트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지휘관으로서의 역할,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그런 것은 갈라진 대지 위에 번진 핏물처럼 희미해진지 오래였다. 어떤 방식이든 좋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무저갱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당장은 그것만을 애타게 바랐다.

‘언제나 내 말을 명심하렴.’

바로 그때였다. 그토록 바라던 구원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뻑 젖은 뺨에 깃털처럼 내려앉는 것이 신의 손길인지, 스승의 숨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잔혹한 마법사보다 망설임 없이 무서운 짓을 하지. 마법사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편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거야. 마찬가지로 사람의 형태를 한 그들을 조각내고, 불로 태우며 위안을 얻는단다. 이 정도는 원망스럽거나 비통하지도 않구나. 너무 뻔해서 식상한 이야기야.’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뒤에서 끌어안듯 양쪽 어깨를 쥐고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청회색의 얇은 머리카락이 허전한 목덜미를 스치며 기묘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파우스트에게 완전히 밀착한 피가로는 두 손을 들어 천천히 그의 귀를 막았다. 그러고도 까마득한 옛이야기를 하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제대로 안쪽에 스며들었다.

‘원통하게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을 귀담아듣지 마. 네게 감정에 매몰될 시간이 있나? 파우스트, 네 말대로 너는 모두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이미 손에서 놓친 목숨보다 네 손에 남아있는 이들을 떠올려.’

이것은 망가진 정신이 만들어내는 환영일까, 아니면 자상한 스승의 안배일까. 아주 드물게 닿는 스승의 손은 그가 살던 북녘처럼 차가웠다. 마치 지금 파우스트와 함께 있는 스승의 존재처럼.

그래서 더더욱 이것이 현실인지 망상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제자, 파우스트. 너는 강하고 영특한 아이다. 절대로 잊지 말거라. 유성우가 떨어지던 날, 내 앞에서 당당하게 외치던 너의 목표, 그리고 네가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것들을.’

그래, 피가로는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피가로의 삶의 방식에 어긋난다. 이곳에서 피가로는 흔히 마법사보다 현인이라고 불린다. 평범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많은 것을 내다보는 사람이기에 그는 파우스트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해주었다.

“……피가로님. 피가로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잃은 것을 돌아보는 건 이 전투가 끝난 다음이면 족하겠죠.”

파우스트는 피눈물을 흘렸다. 마왕의 손톱자국. 과거 마왕이 세계정복을 하며 새긴 상흔. 그러나 이곳에서 사람들이 새로이 남기는 피의 흔적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곳은 살아있는 지옥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달려드는 적병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용서해라. 이 전쟁이 끝나면 너희의 한, 전부 받아줄 테니. 그러니 부디 지금은…….”

마침내 긴 시간을 견뎌냈다. 여명이 밝듯이, 캄캄했던 머릿속이 개었다. 파우스트는 포로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까지 타버린 나무 기둥은 잿더미가 되었고, 불길은 진압되었다.

흙탕물처럼 흐려진 눈에 명확한 빛이 돌아왔다. 몸은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시야는 흐릿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가슴은 여전히 둔통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파우스트는 스스로 스승의 품에서 벗어나, 영원히 안주하고 싶은 욕구를 떨치고 힘차게 발돋움했다.

*

늦은 오후에 시작된 전투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결판이 났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점령전은 밤이 되고,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되었다. 치열한 사투 끝에 동이 틀 무렵, 마침내 파우스트는 적의 성탑에 혁명군의 깃발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

온통 붉게 물든 성채에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파우스트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정도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있었다. 꼬박 하루 동안 이어진 지리멸렬한 싸움이 마침내 끝이 났다. 그렇게 생각하자 맥이 탁 풀리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이 병사들과 함께 꼭대기에 올랐다. 알렉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덩그러니 앉아있는 파우스트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파우스트. 이번에는 정말로 너를 잃는 줄 알았어.”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손발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다. 그런 가운데 맞닿는 타인의 온기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본능적으로 알렉의 등을 쓰다듬었지만, 사실 진정으로 기대고 싶은 건 이쪽이었다.

여느 때보다 긴 하루, 어찌 보면 고작 하루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몹시 두려운 일을 겪었다. 소중한 친우의 품이 눈물이 나올 만큼 반가웠다.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살아서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파우스트는 알렉을 강하게 마주안고서 눈물이 비집고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파우스트는 혁명군에서 명실상부 가장 강한 마법사였다. 파우스트라고 저주에 대해서 전문으로 배운 건 아니었지만, 스승의 폭넓은 가르침 덕분에 무엇이든 기본 이상은 할 줄 알았다. 적어도 그보다 저주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반드시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강력한 저주의 여파로 거동이 자유로운 사람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화형 당한 동료의 뒷수습은 자연스럽게 파우스트의 몫이 되었다.

알렉은 파우스트를 몇 번이고 만져보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미련이 남은 알렉이 부득이하게 떠나고 나서, 파우스트는 당연하게 따라붙으려는 레녹스를 거절하고 혼자 성벽으로 향했다.

성벽 위의 마나석은 바깥 대지에 뒹구는 다른 마나석과 달리 누구의 것인지 극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비교적 소수였고, 명백한 아군이었으며, 다른 이들과 뒤섞이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나 끔찍하게 타죽었는데 그러기에 오히려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니.

이번 전투는 마법사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저주가 사용되었기에 역대 전투를 통틀어 파우스트의 부대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저주가 불러온 착란 탓이었지만, 아군이 아군을 공격하는 초유의 사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원래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다. 인간과 마법사는 전투에서 승리한 지금도 거리를 벌려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달리는 말과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질로 오즈의 손톱자국에는 다시 한번 깊은 상처가 패였다. 그 과정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마나석은 흙 속에 파묻히거나 갈라진 계곡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애초에 피아식별이 불가한 저주였다. 상대 쪽에선 처음부터 마법사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 탓에 들판에 흩어진 건 대다수 아군의 마나석이었다. 전쟁터 한복판에 내버려진 동료의 마나석을 되찾지 못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여태 그런 식으로 되찾을 수 없게 된 동료의 흔적이 수두룩했다.

파우스트는 이들만이라도 소중한 이의 품에 돌려보내고 싶었다. 한 편으로는 이들을 제외한 누구의 마나석도 되찾을 수 없는데, 이들의 것만 챙겨 돌아가는 것은 너덜너덜하게 살아남은 다른 마법사들에게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터에서 공평한 건 없다. 여건이 된다면 모두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파우스트는 이들의 마나석을 이대로 안치하는 것이 나은지, 회수하는 것이 나은지 판단할 수 없었다. 힘겨운 전투 끝에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저울에 올려 형평성을 측정한다는 건 무척이나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었다.

파우스트는 그 돌을 직접 회수하여 약식으로나마 장례를 치러주고 싶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잔혹하게 살해당한 마법사의 마나석은 저주나 사념이 깃들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들고 간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의미한 고민을 뭐 하러 지지부진하게 이어가는 걸까. 어차피 죽은 사람은 고통을 느낄 수 없다. 비단 고통만이 아니라, 기쁨도, 슬픔도, 무엇 하나 느낄 수 없었다. 마나석에 잔류한 사념을 본인이라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니 돌에 깃든 저주 또한 굳이 정화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파우스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었다. 쌓아 올린 장작불 앞에서 경건하게 두 손을 모은 사람들처럼, 소중한 이들이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더 좋은 곳에 가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싶었다.

“생명은 돌고 도는 것이니, 언젠가 다시 만나자.”

그러한 기도는 기원이 되어 축복을 남긴다. 파우스트는 땅에 떨어진 마나석을 더없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입을 맞추었다. 직전의 전투로 마력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는 팔다리에 퍼진 저주에 저항하던 마지막 마력까지 끌어내어 돌에 깃든 저주를 씻어내렸다.

그대로 한참을 있었던 것 같다. 축복을 머금은 마나석은 지평선 너머에서 서서히 고개를 드는 햇볕을 받아 투명한 빛을 발했다. 전신을 휩쓰는 탈력감에 눈을 감고 무지근한 숨을 내쉬고 있으니,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잘했다, 파우스트. 고생 많았구나.”

누군가 산보를 하듯 느긋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왔다. 상대를 알아본 파우스트가 반색했다.

“피가로님…….”

그토록 듣고 싶었던 칭찬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북쪽 땅의 익숙하지 않은 추위 속에서 고된 훈련을 하며 파우스트의 마음을 지탱했던 건, 곧 성장해서 돌아올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알렉의 존재와 피가로의 칭찬이었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파우스트는 자신과 타인의 피에 흠씬 젖어 생과 사를 넘나들면서 수도 없이 두 사람을 떠올렸다.

가장 괴로운 순간에 앞을 밝히는 등불이 될 만큼 마음속에 그리고 또 그렸으나, 막상 고대하던 때가 오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아까보다 훨씬 진정된 마음에 죄악감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평범한 병사와 입장이 다르다. 파우스트는 지휘관이었고, 그의 판단 한 번에 수많은 동료들의 목숨이 걸려있었다.

상대가 저주를 사용할 것을 알고 있었다.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대응이 미흡했다. 다소 갑작스럽게 시작된 전투라고는 하나, 자신이 평정을 잃지 않았더라면 보다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지시를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마법으로 착란에 빠진 모두를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직접 겪어본 결과, 적이 사용한 저주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감정적 충격을 부추겨 내부를 파괴하는 방법이었다.

착란이라는 건 결국 외부의 자극이 가해지면 쉽게 풀리기 마련이다. 착란에 빠진 동료 마법사를 빠르게 장벽을 펼쳐 가둔다거나, 갈라진 계곡에서 길어온 찬물을 끼얹는다거나. 어느 쪽이든 마력의 소모가 크고 손이 많이 가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전부를 구하진 못해도 일부는 구할 수 있었겠지.

규모가 큰 마법의 사용으로 마력이 부족해 싸울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잠깐 물러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전쟁은 짧은 시간 내에 마무리되지 않는다. 동료에게 등을 맡기고 육박전을 벌이다가 평소처럼 마력 소모가 적은 마법을 적절하게 섞어 쓰면 그만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실책이었다. 증오나 슬픔, 원망 등, 부정적인 감정에는 끝이 없다. 설령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수많은 죽음을 딛고 살아남은 이상, 뿌리 깊은 죄의식은 떨칠 수 없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먼저 말을 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묘하게 기가 죽었다. 파우스트는 여러 번 입을 달싹였으나, 결국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피가로는 우울하게 고개를 숙인 파우스트를 보고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너는 여유가 있었다면 기꺼이 저주마저 포용했겠지.”

파우스트는 마지못해 웃었다.

“아무리 저라도 그렇게까지 하진 않습니다. 피가로님이 저를 너무 좋게 봐주시는 겁니다. 지금은 모두를 이끌고 있지만, 사실은 저도 한 명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니까요.”

피가로는 언제나 파우스트를 대단한 사람처럼 추켜세웠다. 아마 하나뿐인 제자를 향한 애정과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면 파우스트는 스승이 품는 기대에 감사하면서도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피가로님, 당신에게는 늘 은혜를 입는 것 같습니다. 이 빚을 생전에 다 갚을 수 있을는지…….”

“우리 사이에 빚이라고 생각하지 마. 넌 나의 제자고, 난 스승으로서 마땅히 제자를 이끌 뿐이다.”

피가로는 말을 마치고 파우스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파우스트, 몸에 저주가 남았구나.”

“해주하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해서…….”

파우스트는 저주로 얼룩진 손을 옷자락을 끌어올려 감췄다. 그래봤자 넝마가 되어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행동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존중해 주기로 결정한 것 같다. 그는 여러 말을 얹는 대신 파우스트와 거리를 좁혔다.

“……피가로님?”

피가로의 손이 파우스트의 턱을 잡았다. 바짝 긴장했던 파우스트는 이내 힘을 빼고 스승에게 몸을 맡겼다. 피가로는 고개를 기울인 채 파우스트의 턱을 검지로 살짝 들어 올려 자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피가로는 어떠한 행동을 할 때 좀처럼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차마 의중을 묻지 못하고 땀만 뻘뻘 흘렸다. 그러던 중 천천히 뻗은 엄지가 아랫입술을 꾹 누르더니, 곧 작은 덩어리가 벌어진 입안으로 들어왔다.

별사탕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혀에 닿았다. 파우스트는 눈을 크게 뜨고 별사탕을 맛보았다. 피가로의 마력이 담긴 별사탕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났다. 이것도 꽤 오랜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피가로는 별사탕을 오물대는 파우스트의 뺨을 기특하다는 듯 어루만지며 말했다.

“파우스트, 오늘 밤. 급한 일이 마무리되면 내가 머무는 방으로 오도록 해.”

“예? ……아, 네!”

말을 전한 피가로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떠났다. 긴 옷자락이 펄럭이는 궤적을, 파우스트는 오랫동안 눈으로 좇고 있었다.

*

얼추 정리를 마쳤을 즈음에는 늦은 밤이 되어있었다. 밤이라고 해야 할까, 하늘에는 이미 달이 기울고 있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새벽이라 부름이 마땅할 것이다.

피가로 쪽에서 먼저 밤에 찾아오라고 하기는 했으나, 이 시간이면 되레 잠을 깨우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그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추운 북쪽 출신인 피가로는 잠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파우스트보다 늦게 잤으며 먼저 일어나있었다. 솔직히 이 시간에는 당연하게 깨어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서 움직여야겠다.

달빛이 비치는 복도를 걷고 있으니, 일에 쫓겨 잊고 있던 피로가 새삼스럽게 몰려왔다. 발밑의 그림자가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사지가 무거웠다. 괜스레 소름이 끼쳐 손톱을 세워 목덜미를 긁었다.

이 싸한 감각의 원인도 사실은 알고 있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소매를 걷었다. 몸을 좀먹은 저주는 조금 더 위로, 넓게 뻗쳐있었다. 손끝은 이미 검게 물들었고, 팔꿈치 위까지 검은 반점으로 얼룩덜룩하게 물들었다. 옷에 감싸인 다리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보나 마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도저히 시간이 없었다. 마력은 진작 바닥났으며, 이만한 저주의 정화는 복잡한 과정과 많은 시간을 요했다. 깨끗한 자연 속에서 정양하며 몸과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저주의 대상이 명확했던 탓에 정화의 의식까지는 필요 없었으나, 어쨌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선 약식으로나마 해두긴 해야 한다. 정화의 의식은 다음과 같다.

일단은냄비를준비해서물을받은다음창문과문을닫고초에불을밝힌다은냄비에담은물을끓이고입고있던옷을전부탈의하여전신에수증기를뒤집어쓴다우선혀에다음으로눈꺼풀에그리고손가락에물이한방울도안남고사라질때까지입을다문채과정을이어간다끝나면창문과문을열고증기를밖으로빼내어바람을통하게하는것이다.

정말 그뿐이다. 말만 들으면 참 간단하지만 실상 전혀 그렇지 않았다. 피가로의 가르침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떠올린 파우스트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그런 걸 일일이 할 시간은 없는데.’

아무리 약식으로 한다고 해도 복잡한 건 마찬가지다. 의식을 치를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더는 미룰 수 없겠지. 피가로님께 다녀오고 나서 정화의 의식을 진행하자. 파우스트는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복도 끝, 피가로가 머무르는 방 앞에 선 파우스트는 거칠어진 목을 가다듬고 방문을 두 번 두드렸다.

“피가로님, 파우스트입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포기하고 돌아섰을 때였다. 이번에는 문이 저절로 열렸다. 우연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파우스트는 아무 이유 없이 주위를 둘러본 뒤,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편한 옷을 입은 피가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독서를 즐기고 있었는지, 피가로는 침대 가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나머지 손으로는 책을 받치고 있었다.

파우스트가 방 안에 완전히 들어서자, 등 뒤에서 저절로 문이 닫혔다. 파우스트는 소리 없이 닫히는 문을 일별하고는 보폭을 넓혀 피가로에게 다가갔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전혀. 이만큼 오래 살았으면 기다림도 일종의 유희지.”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은 피가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가로는 허공에 손을 튕기며 이제는 귀에 익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손에 든 책이 사라지고 깊이가 깊은 쟁반이 나타났다.

피가로는 허공에서 떨어진 쟁반을 손에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읏차.” 파우스트는 피가로 본인조차 의식하지 않고 낸 소리가 꽤나 애교스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만으로도 불경해서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리 와 앉으렴. 정화의 의식을 해주마.”

피가로는 제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편안한 낯으로 침대를 두드렸다. 평소라면 감히 스승의 침대에 엉덩이를 들이밀 생각 따위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잡념에 빠진 파우스트는 얼떨결에 걸어가 앉았다.

“피가로님, 이건?”

“겉보기엔 평범한 물이지만, 미량의 약초와 내 축복을 녹였어. 인간들 사이에선 흔히 성수라고 부르는 물건이겠지.”

피가로는 파우스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맨손으로 쟁반에 담긴 물을 휘저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쟁반에는 이미 가득 담긴 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물에 자연스럽게 뒤섞인 마력의 밀도를 읽어낸 파우스트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피가로님의 마력이라면 마땅히 그만한 힘을 품고 있겠죠.”

“이걸로 네 저주를 정화할 거야. 알맞은 시기는 놓쳤어도 이만한 재료면 차고 넘치지.”

다 좋은데, 온도가 살짝 애매한가. 피가로는 물에 손을 담근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가로가 정성스럽게 온도를 맞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따뜻해졌다. 자신이 얼마나 유약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가로님은 저주에 대해 잘 알고 계시나요?”

“물론, 잘 알고 있지.”

고개를 든 피가로가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질문이 의도와는 다르게 전해진 것 같았다. 팔자 눈썹이 된 파우스트가 말을 덧대었다.

“질문이 좀 이상했죠? 피가로님께서 모르는 것이 있을 리가 없는데. 예전에 저주에 대해 배운 적은 있지만, 그때는 깊이 파고들지 않았던 것 같아서요. 피가로님도 가르치는 걸 꺼려 하셨고…… 타인을 저주하는 방법은 배울 가치가 없다고 하셨죠. 피가로님께선 다른 사람들처럼 저주를 사특한 것으로 보시나요?”

“사특한 것이라, 사람에 따라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구나. 허나, 난 결국 저주란 수많은 마법의 형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피가로는 젖은 손을 털며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저주라는 건 결국 약한 자의 발버둥이야. 직접적으로 상대를 해치지 못하는 경우에나 사용하는 비겁한 방법이지. 저주라는 분야 자체에 관심은 없다만, 어떻게 해서든 상대에게 피해를 주고 싶다는 그 집념만큼은 흥미롭구나.”

마지막으로, 그는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한때는 진심으로 탐구했던 적도 있지만, 글쎄. 지금은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는군. 아무리 오래 살아도 매한가지야.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저주에 흠뻑 빠져 사는 음침한 사람들의 생각 따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니까.”

순수한 웃음이라기보다는 그저 가소롭다는 얼굴이었다. 대체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스승에게서 좀처럼 듣기 힘든 야박한 평가였다. 파우스트는 오히려 그 부분에 흥미를 느꼈다.

남 일처럼 말하는 피가로는 살면서 단 한 번도 타인을 저주해 본 경험이 없는 말투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피가로는 정말로 그럴 것 같았다. 실제로 저주에 관련된 수업을 하던 날, 스승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스스로 약자의 입장에 선 적도, 누군가를 저주할 만큼 미워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파우스트는 조부의 유언을 떠올렸다. 조부는 파우스트에게 자신의 불행 속에서도 언제나 타인의 행복을 빌어주라고 했다. 아마 어린 나이에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게 될 손자가 본인의 처지에 매몰되지 않게끔 신경 쓸 것이리라.

그러나 어린 날의 파우스트는 가끔 자신에게만 야박한 조부가 미웠다. 파우스트는 천성적으로 타인의 문제를 꼬집지 못했다. 못된 말은 물론이거니와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변변찮은 해명조차 하지 못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삶의 방식은 회의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조부가 남긴 말이 저주가 되어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그것이 피가로의 대단한 점이자 본받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다. 충분히 강하다면 억울한 일을 겪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인과관계가 얽힌 일로 누군가를 탓하거나 저주하지 않아도 되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파우스트는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만인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 모든 면에서 완벽한 그의 스승처럼.

“충분한 대답이 되었니?”

“……네.”

파우스트는 독초를 삼킨 것처럼 쓰게 웃었다. 피가로는 제자의 찌푸린 미간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 같지만 특별히 묻지는 않았다. 그 배려가 고마웠다.

침묵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와 한 짝처럼 어색한 분위기도 뒤따랐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피가로 쪽이었다.

“그럼 잡담은 여기까지 할까. 너와의 대화는 즐겁지만, 지금은 해주가 먼저니까. 자, 파우스트, 발을 줘.”

그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직접 저주를 씻어주겠다는 말은 아무래도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옛 추억과 더불어 나름 감상에 잠겨있던 파우스트가 돌연 안색을 바꾸었다.

“피가로님, 여기서부터는 제가.”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있어. 내가 하는 편이 훨씬 쉽고 빠르게 끝나니까.”

당연하게도 옳은 말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지새운 피가로의 지혜와 마력은 그 같은 병아리 마법사가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납득하고 발을 내밀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피가로는 ‘진작 그럴 것이지’라고 말하고 싶은듯했다.

눈처럼 흰 손이 썩은 고목처럼 검게 변한 발을 부드럽게 감쌌다. 저주가 퍼진 팔다리는 등을 맞대고 싸운 동료들조차 움찔하며 피할 정도로 보기 흉했다. 그러나 피가로는 전혀 개의치 않고 파우스트의 발을 붙잡아 물에 담갔다. 그는 파우스트의 몸을 자신의 수족,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신중하게 다뤘다.

존귀한 스승이 타인의 사념으로 오염된 지저분한 발을 맨손으로 닦아주고 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하인들이나 하는 그런 일을 기꺼이 자처하고 있었다. 어쩐지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흡사 죄를 범하는 기분이었다. 결국 파우스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말문을 트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저, 피가로님.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제가 하는 편이.”

“정말이지. 말끝마다 피가로님, 피가로님, 시끄럽구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만.”

피가로는 손을 멈추고 파우스트를 올려다봤다. 자꾸만 쫑알거리는 파우스트가 귀찮은지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고지식하긴. 제자가 스승에게 봉사하는 건 가능하면서 스승이 제자한테 봉사하는 건 못 참겠다는 건가?”

“다, 당연하죠! 제자가 스승에게 봉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다르지 않습니까!”

우다다 쏟아내기도 잠시, 파우스트는 숨을 흡 들이마시곤 골몰히 생각했다. 숨을 너무 오래 참은 파우스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파하, 하고 막힌 숨을 뱉어내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애초에 봉사가 아니라, 공경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스승의 유려한 말솜씨에 단단히 휘말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우스트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며 시근거렸다. 그러나 쉽게 흥분하는 파우스트와 달리 피가로는 별 반응이 없었다. 피가로는 입가를 삐뚜름히 올리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파우스트, 내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건가?”

“아뇨,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 뒤로 파우스트는 아예 입에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하여간, 네 고집은 못 이기겠어.”

계속 시끄럽게 굴던 파우스트가 입을 다무니 훨씬 작업이 수월해졌다. 사랑스러운 제자가 새처럼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살짝 아쉽지만 말이다.

피가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야에 가득 담긴 물을 손날로 끌어올려 파우스트의 발목을 적셨다. 걷어올린 옷자락 아래, 젖은 피부를 타고 물이 불규칙하게 흘러내렸다. 맨살에 닿는 물은 따뜻하면서도 시원했다. 피가로의 마력이 고초로 짓무른 피부를 온전히 감싸며 묵은 저주를 씻어냈다.

“사제지간이 아니더라도 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보듬어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거늘. 뭐, 받는 사람 입장에선 어쩔 수 없나. 나도 옛날에는 너와 비슷했으니.”

뜻밖에 흥미로운 주제가 나왔다. 적다면 적고, 길다면 긴 시간을 함께 어울리며 스승이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파우스트는 혹여 피가로가 더 많은 말을 해줄 새라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렸으나, 그는 더 이상 같은 화제를 입에 담지 않았다.

저주의 기색은 깜짝 놀랄 정도로 금방 지워졌다. 본체의 매개를 사용한 저주도 압도적인 마력 앞에서는 무력했다. 정화의 의식을 치르고도 몇 날은 더 조심해야 하는 저주였는데. 파우스트는 제 몸을 잠식한 독한 저주가 피가로의 손길에 순식간에 쓸려나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절대 말을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인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옅어지는 저주처럼 파우스트의 입을 봉인한 자물쇠도 덩달아 헐거워졌다. 이 정도면 은냄비나 폭풍의 비 없이도 혼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살만해진 파우스트는 다시금 신중하게 운을 뗐다.

“역시 피가로님. 피가로님 덕분에 그 독한 저주가 거의 닦여나갔습니다. 나머지는 제자가 할 수 있으니 이제 그만…….”

“그래도 끝까지 해야겠다. 한 번 시작한 건 끝을 내지 않고는 못 참는 성미라서.”

피가로는 얄팍한 술수에 걸려들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제자의 고집을 나무라기엔 스승도 똑같이 고집스러웠던 것이다.

“으으…….”

작게 신음한 파우스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치도록 신경 쓰일 바엔 차라리 보지 않으려는 셈이었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 눈을 감으니 오히려 감각이 예민해졌다. 들릴 듯 말 듯 작고 부드러운 흥얼거림, 발목까지 찰랑이는 미온수와 궂은살 하나 없는 섬섬옥수가 발가락 사이를 정성스럽게 문지르는 느낌까지.

앞서 괜찮다고 지겹도록 말했건만, 파우스트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피가로는 꿈틀거리는 발가락 하나하나를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얽으며 키득거렸다.

“옛날에도 종종 이렇게 네 발을 씻겨주곤 했지. 기억하는지 모르겠구나.”

“기억하죠. 기억하고말고요.”

“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쑥스러움을 타.”

“당신 앞에선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여전히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추켜세우고.”

“피가로님은 경애와 신의를 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됐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 따로 없구나.”

파우스트는 말 한마디 지지 않았다. 보기 드물게 기세에 밀린 피가로가 쯧, 혀를 찼다. 불쑥 치고 들어오는 추억담에 경직된 입가가 풀렸다. 일부러 노골적으로 반응하는 스승을 보며 파우스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말대로, 피가로가 파우스트의 발을 씻겨주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제자 시절부터 유구하게 이어져온 관례 같은 거였다. 고된 수행으로 마력이 바닥나 녹초가 되어 있으면 늘 피가로가 뒤처리를 해주었다. 과도한 마력 운용의 부작용으로 앓아누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피가로는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파우스트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사람들은 흔히 과묵하고 위엄이 넘치는 피가로를 무서운 마법사로 오해하지만, 사실 그는 무척 온후하고 제자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피가로의 제자로서 배움의 길을 걸은 파우스트가, 파우스트를 곁에서 모시기 위해 함께 있던 레녹스가 대표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주에 가려져있을 때는 몰랐는데, 피가로의 손에 감싸인 자신의 발은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로 볼품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가장으로 고된 일을 일삼은 파우스트의 발은 흉 하나 없이 매끈한 피가로의 발과 달리 투박하고 궂은살이 박여있었다.

파우스트는 짧은 인생의 험난한 굴곡에도 일평생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피가로에게 흉터로 가득한 자신의 발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웠다.

발톱은 찌그러졌고, 발바닥은 부르텄으며, 발꿈치는 보기 흉하게 갈라져 있다. 아무리 둘러봐도 물렁한 면 없이 온통 단단하고 거칠어서 피가로의 부드러운 손에 몹시 거슬릴 것이다. 그런데도 피가로는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파우스트의 발을 씻어주었다.

스승에게 궂은일을 시킨다는 부담에 속이 더부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 같아서 위로가 되기도 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긍정해 준다는 건 이런 느낌이겠지. 파우스트는 막연히 생각했다.

불현듯 목이 꽉 막히며 콧부리가 시큰해졌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내려다보며 공연히 코를 비틀었다.

스승이기 이전에, 이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이 몸을 낮추고 자신의 발을 대신 씻어주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외려 그 편이 이상할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배덕감에 자꾸만 가슴이 술렁였다.

저주가 빠져나간 파우스트의 발은 깨끗해진지 오래였다. 그 와중에 장난기가 도졌음이 틀림없다. 짓궂은 구석이 있는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발을 찰흙을 반죽하듯 몇 번 더 주물거리고는 놓아주었다.

드디어 풀려났다. 파우스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어찌어찌 버티긴 했지만, 단지 기운 없이 박박 씻김 당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이런 건 다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스승의 다정한 손길이 기분 좋은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자신에게 봉사―파우스트는 아직도 동의하지 않는다―하는 피가로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로 심장에 해로웠다.

피가로는 이번에도 마법으로 젖은 손을 말렸다. 그 모습을 보며 파우스트는 직감했다. 해주가 일단락되었으면 이제 미뤄온 이야기를 꺼낼 때였다. 그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피가로님, 인사가 늦었지만 미리 언질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해주신 조언 덕분에 무사히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파우스트가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분명 더 높은 곳에 앉아있는데, 거듭 인사를 하느라 조만간 머리가 땅에 닿을 것 같았다.

“피가로님이 안 계셨다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습니다. 큰소리를 떵떵 친 게 부끄럽게도, 전 실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하하…… 이거, 지휘관 실격이네요.”

담담하게 사실만 고하려고 했으나, 결국 자조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피가로에게 주눅 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궁상을 떤단 말인가. 이보다 험난한 미래를 생각하면 침울해질 시간도 없었다. 모두의 목숨을 짊어진 이상, 자신의 잘못을 알았으면 더 나아지고 발전해야 한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정처 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기가 쉽지 않았다.

피가로는 침울한 파우스트를 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진지하게 임하는 제자에겐 미안한 일이나, 역시 이 아이는 아직 한참 젊었다. 파우스트를 보고 있으면 너무 성실한 것도 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을 좋아하긴 하지만.

“파우스트, 지나간 일을 마음에 두지 마. 누구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다. 당장의 실수보다 뒷일이 중요한 거야. 난 너라서 훌륭하게 처신했다고 생각해.”

몸을 일으키고 허리를 곧추세운 피가로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그러자 신묘하게도 파우스트의 팔을 뒤덮은 검은 반점이 점점 묽어지더니, 머지않아 피가로의 손바닥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그라졌다.

피가로는 다정한 스승이지만, 교육을 할 때는 가차 없었다. 지금까지 수행이라는 명목의 극기 훈련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몇 번이던가. 좋은 말로 달래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솔직히 이번 건은 회초리를 맞을 거라 생각했다. 차고 넘치는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에 맞춰 대응하지 못했으니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가로는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깐깐한 스승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빈말을 하지 않기에, 방금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진심이었다.

파우스트는 새삼스럽게 느꼈다. 자신의 내면에 피가로의 존재는 정말 거대했다. 오죽하면 스승의 한 마디에 좌불안석 불안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버릴 정도였다.

파우스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피가로님께선 늘 최적의 시기에 최선의 조언을 해주시죠. 그 지식과 지혜에 매번 감탄하곤 합니다. 언젠가 저도 당신처럼 될 수 있을까요?”

“……충분히 될 수 있지. 난 그저 오래 살았을 뿐, 일개 범부에 지나지 않아.”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을 잡은 채로 옆자리에 앉았다. ‘아니, 넌 무리야. 나 같은 사람이 되기에 넌 너무 순진하고 사랑스럽거든.’ 순간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은 마음속에 곱게 묻어두었다.

생각이 많은 건 천성이자 버릇이었다. 순간적인 고민으로 기분이 저조해진 피가로가 한숨을 삼켰다. 이런 불유쾌한 심정을 파우스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는 살짝 거리를 벌리면 된다. 일단 멀어져서 적당히 무게를 잡으며 스승으로서의 위엄을 되찾으면 그만이다. 파우스트가 이쪽에게 가진 환상을 깨지 않도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주의하면서 아주 천천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피가로가 파우스트에게 닿은 손을 조심스럽게 빼낼 때였다. 파우스트는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손을 맞잡았다. 사소한 접촉에 어쩔 줄 모르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다섯 손가락에 제 손을 강하게 얽으며 눈을 빛냈다.

“아니요. 이제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요. 피가로님은 자신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피가로님은 언제나 때와 상황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그건 결코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파우스트는 한차례 숨을 골랐다.

“피가로님께 배움을 청합니다. 이번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셨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음에 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알아두고 싶습니다.”

이번에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잡힌 쪽은 피가로였다. 피가로는 붙들린 손을 내려다보며 꼼지락거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스승의 체면이라는 것이 있는데, 파우스트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건 정말 우스울 것 같았다.

“우선, 놓아주지 않겠니?”

“아,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란 파우스트가 손을 놓고 물러났다. 아무래도 의식하지 않고 저지른 행동이었던 듯싶다. 피가로는 펼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꾹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다행히 허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군중을 제어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압도적인 힘도, 잔혹성도 아닌 공포야. 마법사와 인간을 가리지 않고 공포는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공포는 아주 가벼운 시도조차 할 수 없도록 억압하고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사람은 나약한 육체와 불안정한 정신을 타고났기에 별것 아닌 감정의 농간만으로도 순식간에 무력해질 수 있어.”

피가로는 평소처럼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착란의 원인은 저주지만, 그 기저에는 공포가 있다. 이번 전투에 사용된 저주는 내면의 기억을 자극하여 공포를 유발하고, 그로 인해 극대화된 공포는 뇌의 어느 부분을 자극하여 혼란을 일으킨다. 공포는 끔찍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어. 마법사는 정령과 마력의 기색을 읽을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해. 마음이 약해진 마법사는 저주에 당해 인간을 공격하고, 아군에게 허를 찔린 인간은 미지의 공포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저주의 연쇄지. 그때부터는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는 인간도 마찬가지로 저주에 걸려들게 되는 거야. 공포라는 이름의 저주에.”

말로 설명을 들으니 보다 명확하게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등을 맡기고 싸운 전우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 따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복기가 필요했다.

파우스트는 눈을 감고 지난 일을 회상했다. 문제의 전투로부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거니와 당시 현장이 말도 못 하게 잔혹했던 지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공포, 공포라.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저주의 여파가 역병처럼 퍼진 뒤로, 파우스트는 잃어버린 통솔권을 되찾기까지 아주 많은 고생을 했다. 불특정 다수가 토해내는 처절한 비명을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파우스트는 본능적으로 저주가 사라진 자리를 더듬었다.

“피가로님도 공포를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나라고 없지 않겠지. 공포라는 건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그래도, 지금 말하고 있는 거라면 꽤나 단순하고 원초적인 종류겠지? 아, 그렇게 들으니 당장 떠오르는 일이 있구나.”

“이렇게나 강하고 현명한 피가로님께서 공포를 느끼는 존재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나를 믿고 따르는 제자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그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야. 일종의 영혼에 각인된 감정이지.”

피가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자리했다. 파우스트는 낯설고도 익숙한 옆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탄식했다. 역시 피가로는 공포를 알고 있었다. 그 대상은 아마 마왕 오즈겠지. 피가로님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하는 건 오로지 그 자밖에 없었다.

파우스트는 과거 세계를 평정한 마왕 오즈에 대해서 무엇 하나 알지 못한다. 몸집이 집채만 하다던가, 머리에 뿔이 달렸다던가, 여자, 그것도 처녀를 밝힌다던가. 항간에 도는 소문은 무수하게 많지만 그것이 전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가 대지에 거대한 상흔을 남길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이며, 인간과 마법사를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도륙하고 다녔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마왕 오즈가 세계정복을 시도한 것은 파우스트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그 때문에 마법사가 두려운 존재로 각인되고, 중앙 국가가 분열했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원한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스승의 고운 얼굴에 주름이 지는 이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마왕이 원망스러웠다.

측은한 눈빛으로 피가로를 바라본 파우스트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살짝 아쉬운 기분이네요. 그런 감정이 없다면 더욱 거리낌 없이 많은 일을 행할 수 있을 텐데.”

“이론상으로는 그렇겠지. 하지만 실제는 달라.”

피가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파우스트, 사람은 공포 없이는 살 수 없어. 공포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벽이 되기도,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해. 공포가 있기에 자신의 몸을 돌보고, 무모한 행동을 억제할 수 있는 거야. 공포라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면 이런 되다만 몸뚱이로는 조금도 살지 못할 거다.”

“사람은 영원히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요.”

“……그래, 공포라는 감정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야.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라도.”

피가로는 동시에 몹시 불쾌한 얼굴을 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멍하니 쳐다봤다. 또다시 그 얼굴이었다. 아주 먼 옛날을 되새기는, 그립고도 아쉬운 낯 말이다.

파우스트는 같은 사람의 몸과 마음, 그러한 형태를 가지고 어떠한 감정이 결여된 채 살아가는 사람을 상상했다. 적어도 파우스트 주위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 싶지만, 피가로는 까다로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알고 있는 듯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에게 관심이 많았다. 평소에는 최대한 억누르고 있으나, 그에 대한 것은 무엇이든 궁금했다. 피가로가 떠올리는 사람이 자신이 짐작하는 그 사람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질문은 자유였다. 그러나 어떠한 질문을 해도 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피가로님은 늘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답을 주려 하지만,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는 정작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으니까.

“반면,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몸을 사리는 데에는 공포가 필요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 대업을 앞두고 보이지 않는 공포 따위에 짓눌려서는 곤란하지.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느니 차라리 공포를 뛰어넘어보자. 그 편이 더 후회가 남지 않을 테니까.”

“네, 피가로님.”

스승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일단 맞장구를 쳤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과는 별개로, 피가로는 공포를 뛰어넘는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그것이 가능할 거라고 믿지 않는 듯했다. 진심으로 조언하던 이전과 달리 서로 다른 기질에 적당히 맞춰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피가로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정리했다.

“사담이 길어졌군. 파우스트,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네 방으로 돌아가렴.”

“아, 그게…….”

파우스트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 머뭇거렸다. 다른 때라면 순순히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게 떠나고 싶지 않았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에게 등을 보인 채로 물었다.

“왜 그러지?”

“그게, 이대로 돌아가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무서운 경험을 한 탓인지, 도저히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결례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 더 곁에 있고 싶었다. 이 나이를 먹고도 누군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어수룩한 모습이 민망해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피가로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던 중, 뒤를 돌아본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화들짝 놀란 파우스트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콩닥콩닥 요란하게 뛰었다. 이래서야 완전히 제 발 저린 꼴이다.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곁눈질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기댄 그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는 달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피가로는 어두운 하늘과 짙은 먹구름을 올려다보며, 흘러가는 구름처럼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네 방은 여기서 가장 멀리 있었지. 돌아가기 힘들다면 오늘은 여기서 함께 잘까?”

“예에? 어떻게 그런 짓을!”

파우스트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펄쩍 뛰기도 잠시, 곧 마음을 바꿨다. 직전의 반응은 솔직하지 못했다. 여기에 남고 싶어서 망설였던 주제에 이제 와서 아닌 척 빼다니, 엄청나게 속 보이고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확실히 피곤한 것 같습니다. 저, 저주가 심신에 부담을 준 것일지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말을 더듬고 잔기침을 하면서도 끝까지 꿋꿋하게 말을 마쳤다.

“그런 모양이구나. 정말 상태가 나빠 보여.”

“그, 그흠, 하루만 신세 져도 괜찮을까요?”

파우스트는 말아 쥔 주먹에 검지만 펼쳐들었다. 금방 커튼을 치고 돌아온 피가로가 친히 검지를 접어주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필요 없대도.”

*

긴 밤과 짧은 새벽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해가 뜬다. 치열한 전투 끝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어도 살아남은 이들은 어떻게든 새로운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대의를 짊어진다는 건 결국 그런 의미다. 때때로 현실이 무자비하게 느껴지더라도, 이 또한 자신이 선택한 길이라고 생각하면 갈 곳 없는 원망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맞으며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혁명군의 전신이라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이상, 잠시도 쉴 수 없었다. 특히 어제처럼 혹독한 전투를 치른 뒤에는 더더욱.

알렉은 아침 일찍 성을 둘러본 후, 피가로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는 파우스트를 먼저 볼 생각이었지만, 이제 막 해가 떠오른 이른 시간임에도 그는 방에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고에 대해 이미 보고를 받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차마 말 못 할 끔찍한 저주에 휩쓸린 파우스트는 완전히 지친 듯했다. 점령한 성을 정리하는 내내 말이 없었고, 저주가 퍼진 팔다리며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안색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눈이 가물가물 감기는 것을 몇 번이고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알렉은 진심으로 파우스트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본인이 먼저 드러내지 않는 이상, 그의 부진을 언급할 수는 없었다. 그건 친우를 모욕하는 일이었다. 파우스트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자신은 어느 때고 흔들리지 않는 채로 강인하게 그를 이끌어줄 뿐이다.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지만 일종의 약속 같은 거였다.

오늘도 방을 비워두고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마음 같아선 침대에 묶어두고 온종일 휴식을 취하게 만들고 싶었으나, 그런 건 본인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요즘같이 바쁜 시기에 파우스트쯤 되는 인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파우스트를 안전한 장소에서 편히 쉬게 만들려면 그 없이도 문제없이 굴러가게끔 하루 빨리 더 나은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지금은 그것과 관련된 상담이 우선이었다. 연이은 전투로 머리가 굳은 탓에 혼자서는 이렇다 할 명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이의 힘을 빌리기엔 지나치게 사적이거나 털어놓기 곤란한 문제가 수두룩했다. 이럴 때는 권력에 욕심이 없으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피가로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그걸 위해 모셔온 사람이니까.

알렉은 연달아 마른 세수를 하는 것으로 피로한 기색을 씻어내고 문을 두드렸다.

“피가로님, 계십니까?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아침 일찍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침묵. 그리고 또 침묵. 두꺼운 문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자리를 비운 건가? 공교롭게도 파우스트와 피가로 모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두 사람이라면 어디서 마법 수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피가로와 파우스트가 자투리 시간에 수련을 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종종 있었던 일이다. 파우스트는 지식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뛰어난 교육자인 스승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지 못해 안달이었다.

지식에 대한 열정이라고 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전부 알렉 때문이었다. 파우스트는 알렉이 이끄는 혁명군이 큰 위기를 겪고 주저앉을 뻔했을 때, 반대를 무릅쓰고 스승을 구하러 나섰고, 짧은 기간 동안 목숨을 걸고 많은 것을 배워왔으며, 피가로의 도움을 받기 위해 알렉을 스승의 거처까지 안내하기도 했다. 중간에 설득의 과정이 있었지만, 파우스트는 지금까지 대체로 큰 이견 없이 알렉에게 동조해왔으므로 이 부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새삼 친우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역시 파우스트를 만나면 꼭 감사를 전하자. 뜻을 함께해 주고, 언제나 믿고 따라와 줘서 고맙다는 진심을 직접 얼굴을 맞대고 전하도록 하자. 예고 없이 북받친 감정에 목과 가슴이 뜨거워졌다. 옷 위로 가슴 근처를 그러쥔 알렉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을 때였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갑작스럽게 문이 열렸다.

“알렉,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파우스트?”

문을 열고 나온 것은 파우스트였다. 당연히 피가로를 상상하고 있던 알렉은 눈을 크게 떴다. 파우스트는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알렉을 올려다봤다. 그는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 몰랐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수상쩍게 허둥거렸고, 알렉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난, 피가로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 맞다. 그랬었지. 나도 참, 경황이 없어서…… 이만 가볼게.”

그러는 너는? 너는 왜 여기서 나와?

제대로 묻기도 전에 파우스트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파우스트는 알렉을 남겨둔 채 복도 저편으로 달려갔다. 꽉 막힌 것은 말문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떠나는 파우스트를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알렉은 멀어지는 파우스트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황당한 건 황당한 거고, 여기까지 온 목표를 잊어선 안 되었다. 알렉은 얼떨떨한 심정을 어렵사리 내리누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 안쪽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뒷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이 방에서 급하게 뛰쳐나온 누구와는 달리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피가로님.”

“서 있지 말고 앉지.”

창가로 걸어간 알렉은 피가로의 맞은편에 앉았다. 피가로는 친히 잔을 채워주었다. 일련의 동작이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오늘따라 몹시 기분이 좋아 보인다.

피가로가 혁명군에 합류한지 대략 반년, 이토록 들뜬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하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혁명군의 수장으로서 친화력은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는데도, 피가로에 대해선 무엇 하나 알지 못했다.

피가로는 속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파우스트는 한사코 부정하지만, 피가로가 풍기는 분위기는 도저히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마법사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다. 피가로는 거만하고 오만한 태도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이 세상에 관리자가 있다면 아마 그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것이다.

피가로가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은 파우스트와 관련된 상황뿐이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못내 안심이 되었으나, 지금은 잘 모르겠다. 소중한 친우가 괴팍한 마법사를 스승으로 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한편, 오로지 파우스트만을 바라보는 피가로의 시선에 간혹 뒷목이 서늘해졌다.

알렉은 잔을 들어 향을 맡고 찻물을 입에 댔다. 그는 피가로의 기분이 아닌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알렉이 앉기 전까지 피가로의 맞은편은 잔이 놓여있지 않았다. 이로써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첫 번째, 파우스트는 함께 차를 들지 않았다. 두 번째, 피가로에게 다과상을 차려준 것은 파우스트였다. 피가로가 준비했다면 파우스트의 잔을 빼놓을 리 없으니까.

정신없이 옷매무새를 바로잡던 파우스트를 떠올렸다.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그 녀석은 자기 옷차림을 다듬지도 못했으면서 이 사람부터 챙긴 거구나. 그렇다는 건 정말 이곳에서 밤을 보내기라도 했단 말인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미묘하게 찝찝해졌다.

파우스트가 어떤 사람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렉은 파우스트의 오래된 친구이자 부모만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부모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파우스트가 알렉을 아는 만큼, 알렉 또한 파우스트를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뜻을 함께 할 정도로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보기보다 관계에 서투른 구석이 있었다. 그의 인생에 가벼운 만남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자신의 스승을 상대로는. 하물며 직전 알렉이 떠올린 어떠한 망상은 더더욱 가망이 없었다. 단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람을 사귀느니 차라리 혼전순결을 외칠 사람이었다.

파우스트가 피가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한없이 결핍에 가깝다. 혁명군에 몸담고 험난한 전쟁터를 전전하고 있다 하나, 그들은 아직 한참 어렸다. 파우스트는 어릴 적 집을 나간 친아버지 대신, 피가로에게 본인이 가지지 못한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문제는 피가로의 생각을 전혀 모르겠다는 건데…… 알렉은 가늘게 뜬 눈으로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피가로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제자가 깔아준 판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알렉의 눈빛이나 비정상적인 침묵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물어보는 것이다. 알렉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피가로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계획의 진행 여부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질문의 의중을 모르겠군.”

“일전에 말씀드린 건 말입니다.”

잔에서 입을 뗀 피가로가 아, 하고 웃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래 봐도 교육에는 조예가 깊어서, 저 고지식하고 숙맥인 아이를 상대로도 착실히 나아가고 있다.”

“……그렇습니까.”

차마 무엇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돌아올 답도 무서웠지만, 당초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체면을 구기는 것이다. 피가로가 무슨 대답을 하든 어차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답답함이 영 내키지 않았다.

가르치라고 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다던가, 파우스트가 동의했다는 말이라도 나오면 그땐 정말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이전에 들은 제자에게 유별난 집착을 품는 괴짜 마법사의 건도 동시에 생각나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그 부분은 안심해도 돼. 네 계획을 훼방 놓을 생각은 없으니.”

그 말에 아무런 걱정 없이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피가로 가르시아가 이유 없이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변덕스러운 마법사라는 점이다. 그것도 명백히 갑의 입장에 있는. 그래서 알렉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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