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09


“잘했다, 파우스트. 고생 많았구나.”

누군가 산보를 하듯 느긋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왔다. 상대를 알아본 파우스트가 반색했다.

“피가로님…….”

그토록 듣고 싶었던 칭찬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북쪽 땅의 익숙하지 않은 추위 속에서 고된 훈련을 하며 파우스트의 마음을 지탱했던 건, 곧 성장해서 돌아올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알렉의 존재와 피가로의 칭찬이었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파우스트는 자신과 타인의 피에 흠씬 젖어 생과 사를 넘나들면서 수도 없이 두 사람을 떠올렸다.

가장 괴로운 순간에 앞을 밝히는 등불이 될 만큼 마음속에 그리고 또 그렸으나, 막상 고대하던 때가 오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아까보다 훨씬 진정된 마음에 죄악감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평범한 병사와 입장이 다르다. 파우스트는 지휘관이었고, 그의 판단 한 번에 수많은 동료들의 목숨이 걸려있었다.

상대가 저주를 사용할 것을 알고 있었다.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대응이 미흡했다. 다소 갑작스럽게 시작된 전투라고는 하나, 자신이 평정을 잃지 않았더라면 보다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지시를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마법으로 착란에 빠진 모두를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직접 겪어본 결과, 적이 사용한 저주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감정적 충격을 부추겨 내부를 파괴하는 방법이었다.

착란이라는 건 결국 외부의 자극이 가해지면 쉽게 풀리기 마련이다. 착란에 빠진 동료 마법사를 빠르게 장벽을 펼쳐 가둔다거나, 갈라진 계곡에서 길어온 찬물을 끼얹는다거나. 어느 쪽이든 마력의 소모가 크고 손이 많이 가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전부를 구하진 못해도 일부는 구할 수 있었겠지.

규모가 큰 마법의 사용으로 마력이 부족해 싸울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잠깐 물러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전쟁은 짧은 시간 내에 마무리되지 않는다. 동료에게 등을 맡기고 육박전을 벌이다가 평소처럼 마력 소모가 적은 마법을 적절하게 섞어 쓰면 그만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실책이었다. 증오나 슬픔, 원망 등, 부정적인 감정에는 끝이 없다. 설령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수많은 죽음을 딛고 살아남은 이상, 뿌리 깊은 죄의식은 떨칠 수 없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먼저 말을 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묘하게 기가 죽었다. 파우스트는 여러 번 입을 달싹였으나, 결국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피가로는 우울하게 고개를 숙인 파우스트를 보고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너는 여유가 있었다면 기꺼이 저주마저 포용했겠지.”

파우스트는 마지못해 웃었다.

“아무리 저라도 그렇게까지 하진 않습니다. 피가로님이 저를 너무 좋게 봐주시는 겁니다. 지금은 모두를 이끌고 있지만, 사실은 저도 한 명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니까요.”

피가로는 언제나 파우스트를 대단한 사람처럼 추켜세웠다. 아마 하나뿐인 제자를 향한 애정과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면 파우스트는 스승이 품는 기대에 감사하면서도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피가로님, 당신에게는 늘 은혜를 입는 것 같습니다. 이 빚을 생전에 다 갚을 수 있을는지…….”

“우리 사이에 빚이라고 생각하지 마. 넌 나의 제자고, 난 스승으로서 마땅히 제자를 이끌 뿐이다.”

피가로는 말을 마치고 파우스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파우스트, 몸에 저주가 남았구나.”

“해주하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해서…….”

파우스트는 저주로 얼룩진 손을 옷자락을 끌어올려 감췄다. 그래봤자 넝마가 되어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행동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존중해 주기로 결정한 것 같다. 그는 여러 말을 얹는 대신 파우스트와 거리를 좁혔다.

“……피가로님?”

피가로의 손이 파우스트의 턱을 잡았다. 바짝 긴장했던 파우스트는 이내 힘을 빼고 스승에게 몸을 맡겼다. 피가로는 고개를 기울인 채 파우스트의 턱을 검지로 살짝 들어 올려 자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피가로는 어떠한 행동을 할 때 좀처럼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차마 의중을 묻지 못하고 땀만 뻘뻘 흘렸다. 그러던 중 천천히 뻗은 엄지가 아랫입술을 꾹 누르더니, 곧 작은 덩어리가 벌어진 입안으로 들어왔다.

별사탕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혀에 닿았다. 파우스트는 눈을 크게 뜨고 별사탕을 맛보았다. 피가로의 마력이 담긴 별사탕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났다. 이것도 꽤 오랜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피가로는 별사탕을 오물대는 파우스트의 뺨을 기특하다는 듯 어루만지며 말했다.

“파우스트, 오늘 밤. 급한 일이 마무리되면 내가 머무는 방으로 오도록 해.”

“예? ……아, 네!”

말을 전한 피가로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떠났다. 긴 옷자락이 펄럭이는 궤적을, 파우스트는 오랫동안 눈으로 좇고 있었다.


얼추 정리를 마쳤을 즈음에는 늦은 밤이 되어있었다. 밤이라고 해야 할까, 하늘에는 이미 달이 기울고 있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새벽이라 부름이 마땅할 것이다.

피가로 쪽에서 먼저 밤에 찾아오라고 하기는 했으나, 이 시간이면 되레 잠을 깨우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그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추운 북쪽 출신인 피가로는 잠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파우스트보다 늦게 잤으며 먼저 일어나있었다. 솔직히 이 시간에는 당연하게 깨어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서 움직여야겠다.

달빛이 비치는 복도를 걷고 있으니, 일에 쫓겨 잊고 있던 피로가 새삼스럽게 몰려왔다. 발밑의 그림자가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사지가 무거웠다. 괜스레 소름이 끼쳐 손톱을 세워 목덜미를 긁었다.

이 싸한 감각의 원인도 사실은 알고 있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소매를 걷었다. 몸을 좀먹은 저주는 조금 더 위로, 넓게 뻗쳐있었다. 손끝은 이미 검게 물들었고, 팔꿈치 위까지 검은 반점으로 얼룩덜룩하게 물들었다. 옷에 감싸인 다리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보나 마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도저히 시간이 없었다. 마력은 진작 바닥났으며, 이만한 저주의 정화는 복잡한 과정과 많은 시간을 요했다. 깨끗한 자연 속에서 정양하며 몸과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저주의 대상이 명확했던 탓에 정화의 의식까지는 필요 없었으나, 어쨌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선 약식으로나마 해두긴 해야 한다. 정화의 의식은 다음과 같다.

일단은냄비를준비해서물을받은다음창문과문을닫고초에불을밝힌다은냄비에담은물을끓이고입고있던옷을전부탈의하여전신에수증기를뒤집어쓴다우선혀에다음으로눈꺼풀에그리고손가락에물이한방울도안남고사라질때까지입을다문채과정을이어간다끝나면창문과문을열고증기를밖으로빼내어바람을통하게하는것이다.

정말 그뿐이다. 말만 들으면 참 간단하지만 실상 전혀 그렇지 않았다. 피가로의 가르침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떠올린 파우스트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그런 걸 일일이 할 시간은 없는데.’

아무리 약식으로 한다고 해도 복잡한 건 마찬가지다. 의식을 치를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더는 미룰 수 없겠지. 피가로님께 다녀오고 나서 정화의 의식을 진행하자. 파우스트는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복도 끝, 피가로가 머무르는 방 앞에 선 파우스트는 거칠어진 목을 가다듬고 방문을 두 번 두드렸다.

“피가로님, 파우스트입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포기하고 돌아섰을 때였다. 이번에는 문이 저절로 열렸다. 우연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파우스트는 아무 이유 없이 주위를 둘러본 뒤,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편한 옷을 입은 피가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독서를 즐기고 있었는지, 피가로는 침대 가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나머지 손으로는 책을 받치고 있었다.

파우스트가 방 안에 완전히 들어서자, 등 뒤에서 저절로 문이 닫혔다. 파우스트는 소리 없이 닫히는 문을 일별하고는 보폭을 넓혀 피가로에게 다가갔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전혀. 이만큼 오래 살았으면 기다림도 일종의 유희지.”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은 피가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가로는 허공에 손을 튕기며 이제는 귀에 익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손에 든 책이 사라지고 깊이가 깊은 쟁반이 나타났다.

피가로는 허공에서 떨어진 쟁반을 손에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읏차.” 파우스트는 피가로 본인조차 의식하지 않고 낸 소리가 꽤나 애교스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만으로도 불경해서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리 와 앉으렴. 정화의 의식을 해주마.”

피가로는 제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편안한 낯으로 침대를 두드렸다. 평소라면 감히 스승의 침대에 엉덩이를 들이밀 생각 따위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잡념에 빠진 파우스트는 얼떨결에 걸어가 앉았다.

“피가로님, 이건?”

“겉보기엔 평범한 물이지만, 미량의 약초와 내 축복을 녹였어. 인간들 사이에선 흔히 성수라고 부르는 물건이겠지.”

피가로는 파우스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맨손으로 쟁반에 담긴 물을 휘저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쟁반에는 이미 가득 담긴 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물에 자연스럽게 뒤섞인 마력의 밀도를 읽어낸 파우스트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피가로님의 마력이라면 마땅히 그만한 힘을 품고 있겠죠.”

“이걸로 네 저주를 정화할 거야. 알맞은 시기는 놓쳤어도 이만한 재료면 차고 넘치지.”

다 좋은데, 온도가 살짝 애매한가. 피가로는 물에 손을 담근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가로가 정성스럽게 온도를 맞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따뜻해졌다. 자신이 얼마나 유약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가로님은 저주에 대해 잘 알고 계시나요?”

“물론, 잘 알고 있지.”

고개를 든 피가로가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질문이 의도와는 다르게 전해진 것 같았다. 팔자 눈썹이 된 파우스트가 말을 덧대었다.

“질문이 좀 이상했죠? 피가로님께서 모르는 것이 있을 리가 없는데. 예전에 저주에 대해 배운 적은 있지만, 그때는 깊이 파고들지 않았던 것 같아서요. 피가로님도 가르치는 걸 꺼려 하셨고…… 타인을 저주하는 방법은 배울 가치가 없다고 하셨죠. 피가로님께선 다른 사람들처럼 저주를 사특한 것으로 보시나요?”

“사특한 것이라, 사람에 따라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구나. 허나, 난 결국 저주란 수많은 마법의 형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피가로는 젖은 손을 털며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저주라는 건 결국 약한 자의 발버둥이야. 직접적으로 상대를 해치지 못하는 경우에나 사용하는 비겁한 방법이지. 저주라는 분야 자체에 관심은 없다만, 어떻게 해서든 상대에게 피해를 주고 싶다는 그 집념만큼은 흥미롭구나.”

마지막으로, 그는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한때는 진심으로 탐구했던 적도 있지만, 글쎄. 지금은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는군. 아무리 오래 살아도 매한가지야.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저주에 흠뻑 빠져 사는 음침한 사람들의 생각 따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니까.”

순수한 웃음이라기보다는 그저 가소롭다는 얼굴이었다. 대체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스승에게서 좀처럼 듣기 힘든 야박한 평가였다. 파우스트는 오히려 그 부분에 흥미를 느꼈다.

남 일처럼 말하는 피가로는 살면서 단 한 번도 타인을 저주해 본 경험이 없는 말투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피가로는 정말로 그럴 것 같았다. 실제로 저주에 관련된 수업을 하던 날, 스승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스스로 약자의 입장에 선 적도, 누군가를 저주할 만큼 미워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파우스트는 조부의 유언을 떠올렸다. 조부는 파우스트에게 자신의 불행 속에서도 언제나 타인의 행복을 빌어주라고 했다. 아마 어린 나이에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게 될 손자가 본인의 처지에 매몰되지 않게끔 신경 쓸 것이리라.

그러나 어린 날의 파우스트는 가끔 자신에게만 야박한 조부가 미웠다. 파우스트는 천성적으로 타인의 문제를 꼬집지 못했다. 못된 말은 물론이거니와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변변찮은 해명조차 하지 못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삶의 방식은 회의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조부가 남긴 말이 저주가 되어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그것이 피가로의 대단한 점이자 본받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다. 충분히 강하다면 억울한 일을 겪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인과관계가 얽힌 일로 누군가를 탓하거나 저주하지 않아도 되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파우스트는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만인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 모든 면에서 완벽한 그의 스승처럼.

“충분한 대답이 되었니?”

“……네.”

파우스트는 독초를 삼킨 것처럼 쓰게 웃었다. 피가로는 제자의 찌푸린 미간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 같지만 특별히 묻지는 않았다. 그 배려가 고마웠다.

침묵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와 한 짝처럼 어색한 분위기도 뒤따랐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피가로 쪽이었다.

“그럼 잡담은 여기까지 할까. 너와의 대화는 즐겁지만, 지금은 해주가 먼저니까. 자, 파우스트, 발을 줘.”

그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직접 저주를 씻어주겠다는 말은 아무래도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옛 추억과 더불어 나름 감상에 잠겨있던 파우스트가 돌연 안색을 바꾸었다.

“피가로님, 여기서부터는 제가.”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있어. 내가 하는 편이 훨씬 쉽고 빠르게 끝나니까.”

당연하게도 옳은 말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지새운 피가로의 지혜와 마력은 그 같은 병아리 마법사가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납득하고 발을 내밀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피가로는 ‘진작 그럴 것이지’라고 말하고 싶은듯했다.

눈처럼 흰 손이 썩은 고목처럼 검게 변한 발을 부드럽게 감쌌다. 저주가 퍼진 팔다리는 등을 맞대고 싸운 동료들조차 움찔하며 피할 정도로 보기 흉했다. 그러나 피가로는 전혀 개의치 않고 파우스트의 발을 붙잡아 물에 담갔다. 그는 파우스트의 몸을 자신의 수족,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신중하게 다뤘다.

존귀한 스승이 타인의 사념으로 오염된 지저분한 발을 맨손으로 닦아주고 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하인들이나 하는 그런 일을 기꺼이 자처하고 있었다. 어쩐지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흡사 죄를 범하는 기분이었다. 결국 파우스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말문을 트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저, 피가로님.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제가 하는 편이.”

“정말이지. 말끝마다 피가로님, 피가로님, 시끄럽구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만.”

피가로는 손을 멈추고 파우스트를 올려다봤다. 자꾸만 쫑알거리는 파우스트가 귀찮은지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고지식하긴. 제자가 스승에게 봉사하는 건 가능하면서 스승이 제자한테 봉사하는 건 못 참겠다는 건가?”

“다, 당연하죠! 제자가 스승에게 봉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다르지 않습니까!”

우다다 쏟아내기도 잠시, 파우스트는 숨을 흡 들이마시곤 골몰히 생각했다. 숨을 너무 오래 참은 파우스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파하, 하고 막힌 숨을 뱉어내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애초에 봉사가 아니라, 공경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스승의 유려한 말솜씨에 단단히 휘말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우스트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며 시근거렸다. 그러나 쉽게 흥분하는 파우스트와 달리 피가로는 별 반응이 없었다. 피가로는 입가를 삐뚜름히 올리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파우스트, 내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건가?”

“아뇨,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 뒤로 파우스트는 아예 입에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하여간, 네 고집은 못 이기겠어.”

계속 시끄럽게 굴던 파우스트가 입을 다무니 훨씬 작업이 수월해졌다. 사랑스러운 제자가 새처럼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살짝 아쉽지만 말이다.

피가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야에 가득 담긴 물을 손날로 끌어올려 파우스트의 발목을 적셨다. 걷어올린 옷자락 아래, 젖은 피부를 타고 물이 불규칙하게 흘러내렸다. 맨살에 닿는 물은 따뜻하면서도 시원했다. 피가로의 마력이 고초로 짓무른 피부를 온전히 감싸며 묵은 저주를 씻어냈다.

“사제지간이 아니더라도 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보듬어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거늘. 뭐, 받는 사람 입장에선 어쩔 수 없나. 나도 옛날에는 너와 비슷했으니.”

뜻밖에 흥미로운 주제가 나왔다. 적다면 적고, 길다면 긴 시간을 함께 어울리며 스승이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파우스트는 혹여 피가로가 더 많은 말을 해줄 새라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렸으나, 그는 더 이상 같은 화제를 입에 담지 않았다.

저주의 기색은 깜짝 놀랄 정도로 금방 지워졌다. 본체의 매개를 사용한 저주도 압도적인 마력 앞에서는 무력했다. 정화의 의식을 치르고도 몇 날은 더 조심해야 하는 저주였는데. 파우스트는 제 몸을 잠식한 독한 저주가 피가로의 손길에 순식간에 쓸려나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절대 말을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인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옅어지는 저주처럼 파우스트의 입을 봉인한 자물쇠도 덩달아 헐거워졌다. 이 정도면 은냄비나 폭풍의 비 없이도 혼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살만해진 파우스트는 다시금 신중하게 운을 뗐다.

“역시 피가로님. 피가로님 덕분에 그 독한 저주가 거의 닦여나갔습니다. 나머지는 제자가 할 수 있으니 이제 그만…….”

“그래도 끝까지 해야겠다. 한 번 시작한 건 끝을 내지 않고는 못 참는 성미라서.”

피가로는 얄팍한 술수에 걸려들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제자의 고집을 나무라기엔 스승도 똑같이 고집스러웠던 것이다.

“으으…….”

작게 신음한 파우스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치도록 신경 쓰일 바엔 차라리 보지 않으려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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