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08


두 사람이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도 출정의 시간은 다가왔다. 항상 성 안쪽에서 농성을 하던 적은 야습 이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공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기회가 왔을 때 바로 움직이려는 모양이었다. 무슨 계책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정찰병이 성 앞에서 군대가 집결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을 때, 두 사람은 짧은 회의를 중단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언제든 나가서 싸울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두었다.

파우스트가 이끄는 마법사 부대는 가장 높은 언덕에서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싸움은 오즈의 손톱자국에서 벌어졌다. 과거, 세계의 정복자가 남기고 간 흔적에서 새로운 집단이 대륙의 패권을 쥐기 위해 맞부딪쳤다.

새파란 섬광이 지나간 자리는 길게 갈라져 계곡이 되었다. 대지 곳곳에 상흔처럼 균열이 새겨져있었다. 중앙은 전체적으로 그랬다. 한때는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전부 불탔지만, 그 뒤로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군 땅이었다.

저 멀리 성 앞에 까맣게 우글거리는 적병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샌가 소리 없이 다가온 피가로가 옆에 섰다.

“파우스트, 이번 건은 위험할 거다. 그래도 출전할 텐가?”

“피가로님이 보시기에도 그런가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피가로 앞에선 착잡한 심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부하들을 등지고 선 파우스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피가로가 직접 위험하다고 말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쪽에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겨울이 되면 다시 물자의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불고 대지가 얼어붙게 되면, 당연하게도 수성하는 쪽보다 공성하는 쪽이 훨씬 버거워진다.

적어도 농성하는 쪽은 오랫동안 그들의 터전인 덕에 추운 겨울을 날 최소한의 식량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이쪽은 겨우내 지지부진한 싸움을 이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체 모를 타국의 후원자가 보내주는 변덕스러운 선물에 언제까지고 안주할 수는 없다.

거기에 더해, 아예 퇴각을 하면 적에게 절호의 찬스를 주는 셈이다. 갑작스러운 침략으로 어수선했던 상대는 이쪽의 군대가 물러난 틈에 새로이 체계를 정비하고 여러 방비를 갖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몹시 힘겨운 전투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다만, 현재는 수많은 희생을 낳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있으나,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파우스트는 고민 끝에 다시금 결심을 다졌다.

“언제고 위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그중 하나일 뿐이에요. 전 모두를 이끄는 장수이니,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겠죠. 반드시 승리를 거머쥐겠습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피가로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제자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쁜지, 파우스트를 붙잡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보냈다. 달콤한 과육을 씹은 것처럼 산뜻한 미소였다. 그 눈부신 광경을 지켜본 파우스트는 얼핏 고개를 내민 어떤 감정에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스승은 매번 그랬듯 뒤에서 지켜볼 것이다. 저마다의 신념을 건 싸움을 고고한 태도로 지켜보다가, 언젠가 버거워지는 순간이 오면 홀연히 나타나 조언을 해줄 것이다. 피가로 가르시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 피가로님, 저는 이제…….”

아직 본대에서 신호는 오지 않았지만, 지금 움직이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파우스트는 출정 준비를 마치려고 했다.

“기다려, 파우스트.”

그때, 돌아서는 파우스트를 피가로가 불러 세웠다.

“가까이 오렴.”

이미 충분히 가까운 거리였다. 파우스트는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피가로에게 바짝 붙었다. 피가로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서로의 숨이 느껴질 만큼 밀착했다. 그는 경갑을 두른 파우스트의 어깨에 친근하게 손을 올렸다.

“가엾게도 긴장했구나. 네 긴장을 풀어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옳지, 오랜만에 수업을 해볼까.”

“하지만 피가로님, 지금은 시간이.”

파우스트는 이번에도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쉿. 그냥 듣기만 하면 돼.”

검지를 세워 입술 앞에 댄 피가로가 고개를 숙여 파우스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등 뒤에 포진한 병사들이 아닌 척 관심을 갖는 것이 느껴졌다. 피가로는 누구도 듣지 못하게끔 작은 소리로 속닥였고, 말을 이을수록 파우스트는 눈을 부릅떴다.

말을 마친 피가로는 이내 파우스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물러났다.

“언제나 내 말을 명심하렴.”

그날, 피가로와의 대화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당혹감에 물든 파우스트가 피가로에게 되물으려고 할 즈음, 알렉이 보낸 신호가 전해졌다. 진군 개시였다.

같은 뜻을 품은 전우들과 함께 마왕의 손톱자국이 남은 벌판에 뒤섞이면서 파우스트는 몇 번이고 피가로의 충고를 곱씹었다. 그의 스승은 결단코 의미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시야가 넓고 방대한 정보를 가진 피가로는 언제나 남이 보지 못하는 걸 보았다. 자세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피가로가 그런 말을 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치열한 전투였다. 만만치 않을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적은 상상 이상이었다. 각기 다른 색을 띤 군대가 충돌하는 흐름은 스승의 진의에 대한 고민을 휘발시킬 정도로 격렬했다.

변수가 된 건 상대의 전략이다. 빼앗긴 머리카락과 포로를 어떻게든 이용할 거라 생각했으나, 방법까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커다란 낭패가 되었다.

가장 보편적인 매개의 사용처는 저주다. 매개에 담긴 마력을 뽑아 쓰는 방법도 있지만, 상대는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필시 병사들 사이에 몸을 숨긴 파우스트의 존재를 위협으로 여긴 것 같다.

성벽에서 강한 마력의 기척이 났다. 누군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오싹한 느낌이었다. 파우스트는 그것을 몇 배는 민감하게 느꼈다. 단순히 파우스트가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매개로 하여 저주가 발동되고 있었다.

동시에 조금이라도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사는 전부 고개를 들어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일찍이 구하기를 포기한 포로가 나무 기둥에 일렬로 매달려있었다. 파우스트가 있는 위치에선 보이지 않지만, 아마 그 앞에 저주에 사용할 마법진과 매개가 놓여있을 것이다.

적병이 든 횃불이 멀리서도 보였다. 포로의 발밑에 장작이 쌓여있을 때부터 그들이 무엇을 할지 예상했어야 했는데. 알면서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한 것은 내심 설마, 하는 생각 탓이었던 것 같다.

횃불이 허공에 새빨간 호선을 그렸다. 포로들이 묶인 기둥에 차례로 불이 붙으며 뿌연 연기가 올라왔다.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포로들은 처음에는 의연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어차피 모두가 알고 있는 결말이었다. 이미 포로로 잡힌 순간부터 체념했을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상을 위해 한 몸 바치자.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조촐한 연회를 즐기며 모든 혁명군이 그렇게 다짐했다. 그때 그 순간 다 같이 어깨동무를 걸고 먹고 마시며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 지금은 불길에 휩싸여 춤을 추고 있었다. 죽음과 저주의 춤을.

상식을 초월하는 고통 속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잠시뿐이다. 포로들은 곧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기분 탓인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포로가 산 채로 타오르며 내지르는 비명은 파우스트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그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저주하는 통곡이었다.

파우스트에게 쏟아지는 저주는 두 종류였다. 첫 번째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모든 마법사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 저주. 사람의 목숨을 쥐어짜서 터뜨리는 최악의 저주였고, 두 번째는 머리카락을 매개로 사용한 특정 대상의 저주였다. 한 종류라면 어렵지 않게 튕겨낼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여러 사정이 겹쳐 쉽지 않았다.

이렇게나 어지럽고 혼란한 와중에 죽어가는 사람의 통곡은 어찌나 빠짐없이 귀를 파고드는지.

파우스트는 몸을 방어하는 마력을 한껏 끌어올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저주를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출렁였고, 빈틈을 파고든 저주는 빠르게 그를 좀먹기 시작했다.

모순적이게도 마음을 약하게 하는 저주는 나약해진 가슴에 더욱 강하게 파고든다. 파우스트가 무너지기 이전에, 뒤쪽에 물러나 그의 지시에 따르던 마법사들이 단체로 착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군과 적군, 심지어 자신의 보유 마력조차 개의치 않고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끌어내 마구잡이로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인간 병사들은 아군이 쏜 마법에 맞고 피를 흘리며 나자빠졌다. 순식간에 대열이 무너지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이좋게 어울리던 동료들이 서로에게 칼을 들이미는 광경은 흡사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마음이 무너진 마법사의 말로는 처참했다. 그만두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목이 터져라 외쳐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억지로라도 그들을 말리기엔 정작 파우스트도 심각한 타격을 입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필사적으로 소리친 목은 욱신거리고, 어찌할 수 없는 초조함에 가슴이 불이 난 듯 뜨거워졌다. 인접한 착란의 효과는 똑같이 파우스트에게도 전해졌다. 파우스트는 불현듯 어둡고 좁은 방에 갇힌 것처럼 갑갑함을 느꼈고, 그게 시작이었다.

완전히 잊고 있던 아버지의 고함 소리,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흐려진 어머니의 눈물과 어린 여동생의 울음소리. 낡고 지저분한 거울에 비친 퀭하고 창백한 자신의 얼굴. 먼지 쌓인 집구석과 온종일 병상에 누워있던 조부의 시선. 병자 특유의 시큼한 냄새. 말라비틀어진 손가락과 열에 들뜬 마지막 유언.

짧은 순간, 작은 상자 속에 전부 밀어 넣어 봉해둔 감정이 흘러넘쳤다. 그 모든 것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갔다. 마치 번개를 맞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저주가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파우스트는 그가 겪었던 것 중 최악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기억과 감정을 밀어내고 있으면 머리가 심하게 지끈거렸다. 벌어진 입술에선 끈적하게 마른 타액과 간간이 앓는 신음만 흘러나올 뿐, 그마저도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파우스트는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발끝이 오므라들고 세운 손톱이 두피를 사정없이 긁어내렸다.

파우스트의 손은 빈 도화지에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검은 반점에 물들어있었다. 신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아마 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체가 재구성되는 것처럼 속에 있는 것이 전부 위로 밀려 올라왔다. 별안간 구역질이 나더니, 위액이 울컥 목구멍을 비집었다. 파우스트는 입을 다물고 숨을 참는 것으로 간신히 참았으나, 옆에 있는 마법사는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죄다 정체 모를 투명한 물을 게워냈다.

어떤 마법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파우스트의 부대 내에서도 유독 마력이 약한 마법사는 싸움이 한창 벌어지는 한복판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 마법사는 돌진하는 말발굽에 밟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어차피 보나 마나 돌이 되었을 것이다.

후각이 마비되어 더 이상 피비린내조차 나지 않았다. 팔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비명은 계속되었다. 살려줘, 죽여줘, 도와줘, 부탁이야, 제발. 그 소리를 들으며 파우스트는 높은 성벽 위에서 추락하는 상상을 했다.

아, 신이시여. 파우스트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지휘관으로서의 역할,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그런 것은 갈라진 대지 위에 번진 핏물처럼 희미해진지 오래였다. 어떤 방식이든 좋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무저갱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당장은 그것만을 애타게 바랐다.

‘언제나 내 말을 명심하렴.’

바로 그때였다. 그토록 바라던 구원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뻑 젖은 뺨에 깃털처럼 내려앉는 것이 신의 손길인지, 스승의 숨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잔혹한 마법사보다 망설임 없이 무서운 짓을 하지. 마법사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편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거야. 마찬가지로 사람의 형태를 한 그들을 조각내고, 불로 태우며 위안을 얻는단다. 이 정도는 원망스럽거나 비통하지도 않구나. 너무 뻔해서 식상한 이야기야.’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뒤에서 끌어안듯 양쪽 어깨를 쥐고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청회색의 얇은 머리카락이 허전한 목덜미를 스치며 기묘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파우스트에게 완전히 밀착한 피가로는 두 손을 들어 천천히 그의 귀를 막았다. 그러고도 까마득한 옛이야기를 하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제대로 안쪽에 스며들었다.

‘원통하게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을 귀담아듣지 마. 네게 감정에 매몰될 시간이 있나? 파우스트, 네 말대로 너는 모두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이미 손에서 놓친 목숨보다 네 손에 남아있는 이들을 떠올려.’

이것은 망가진 정신이 만들어내는 환영일까, 아니면 자상한 스승의 안배일까. 아주 드물게 닿는 스승의 손은 그가 살던 북녘처럼 차가웠다. 마치 지금 파우스트와 함께 있는 스승의 존재처럼.

그래서 더더욱 이것이 현실인지 망상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제자, 파우스트. 너는 강하고 영특한 아이다. 절대로 잊지 말거라. 유성우가 떨어지던 날, 내 앞에서 당당하게 외치던 너의 목표, 그리고 네가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것들을.’

그래, 피가로는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피가로의 삶의 방식에 어긋난다. 이곳에서 피가로는 흔히 마법사보다 현인이라고 불린다. 평범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많은 것을 내다보는 사람이기에 그는 파우스트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해주었다.

“……피가로님. 피가로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잃은 것을 돌아보는 건 이 전투가 끝난 다음이면 족하겠죠.”

파우스트는 피눈물을 흘렸다. 마왕의 손톱자국. 과거 마왕이 세계정복을 하며 새긴 상흔. 그러나 이곳에서 사람들이 새로이 남기는 피의 흔적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곳은 살아있는 지옥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달려드는 적병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용서해라. 이 전쟁이 끝나면 너희의 한, 전부 받아줄 테니. 그러니 부디 지금은…….”

마침내 긴 시간을 견뎌냈다. 여명이 밝듯이, 캄캄했던 머릿속이 개었다. 파우스트는 포로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까지 타버린 나무 기둥은 잿더미가 되었고, 불길은 진압되었다.

흙탕물처럼 흐려진 눈에 명확한 빛이 돌아왔다. 몸은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시야는 흐릿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가슴은 여전히 둔통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파우스트는 스스로 스승의 품에서 벗어나, 영원히 안주하고 싶은 욕구를 떨치고 힘차게 발돋움했다. 


늦은 오후에 시작된 전투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결판이 났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점령전은 밤이 되고,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되었다. 치열한 사투 끝에 동이 틀 무렵, 마침내 파우스트는 적의 성탑에 혁명군의 깃발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

온통 붉게 물든 성채에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파우스트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정도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있었다. 꼬박 하루 동안 이어진 지리멸렬한 싸움이 마침내 끝이 났다. 그렇게 생각하자 맥이 탁 풀리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이 병사들과 함께 꼭대기에 올랐다. 알렉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덩그러니 앉아있는 파우스트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파우스트. 이번에는 정말로 너를 잃는 줄 알았어.”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손발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다. 그런 가운데 맞닿는 타인의 온기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본능적으로 알렉의 등을 쓰다듬었지만, 사실 진정으로 기대고 싶은 건 이쪽이었다.

여느 때보다 긴 하루, 어찌 보면 고작 하루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몹시 두려운 일을 겪었다. 소중한 친우의 품이 눈물이 나올 만큼 반가웠다.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살아서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파우스트는 알렉을 강하게 마주안고서 눈물이 비집고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파우스트는 혁명군에서 명실상부 가장 강한 마법사였다. 파우스트라고 저주에 대해서 전문으로 배운 건 아니었지만, 스승의 폭넓은 가르침 덕분에 무엇이든 기본 이상은 할 줄 알았다. 적어도 그보다 저주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반드시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강력한 저주의 여파로 거동이 자유로운 사람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화형 당한 동료의 뒷수습은 자연스럽게 파우스트의 몫이 되었다.

알렉은 파우스트를 몇 번이고 만져보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미련이 남은 알렉이 부득이하게 떠나고 나서, 파우스트는 당연하게 따라붙으려는 레녹스를 거절하고 혼자 성벽으로 향했다.

성벽 위의 마나석은 바깥 대지에 뒹구는 다른 마나석과 달리 누구의 것인지 극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비교적 소수였고, 명백한 아군이었으며, 다른 이들과 뒤섞이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나 끔찍하게 타죽었는데 그러기에 오히려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니. 

이번 전투는 마법사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저주가 사용되었기에 역대 전투를 통틀어 파우스트의 부대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저주가 불러온 착란 탓이었지만, 아군이 아군을 공격하는 초유의 사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원래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다. 인간과 마법사는 전투에서 승리한 지금도 거리를 벌려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달리는 말과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질로 오즈의 손톱자국에는 다시 한번 깊은 상처가 패였다. 그 과정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마나석은 흙 속에 파묻히거나 갈라진 계곡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애초에 피아식별이 불가한 저주였다. 상대 쪽에선 처음부터 마법사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 탓에 들판에 흩어진 건 대다수 아군의 마나석이었다. 전쟁터 한복판에 내버려진 동료의 마나석을 되찾지 못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여태 그런 식으로 되찾을 수 없게 된 동료의 흔적이 수두룩했다.

파우스트는 이들만이라도 소중한 이의 품에 돌려보내고 싶었다. 한 편으로는 이들을 제외한 누구의 마나석도 되찾을 수 없는데, 이들의 것만 챙겨 돌아가는 것은 너덜너덜하게 살아남은 다른 마법사들에게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터에서 공평한 건 없다. 여건이 된다면 모두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파우스트는 이들의 마나석을 이대로 안치하는 것이 나은지, 회수하는 것이 나은지 판단할 수 없었다. 힘겨운 전투 끝에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저울에 올려 형평성을 측정한다는 건 무척이나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었다.

파우스트는 그 돌을 직접 회수하여 약식으로나마 장례를 치러주고 싶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잔혹하게 살해당한 마법사의 마나석은 저주나 사념이 깃들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들고 간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의미한 고민을 뭐 하러 지지부진하게 이어가는 걸까. 어차피 죽은 사람은 고통을 느낄 수 없다. 비단 고통만이 아니라, 기쁨도, 슬픔도, 무엇 하나 느낄 수 없었다. 마나석에 잔류한 사념을 본인이라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니 돌에 깃든 저주 또한 굳이 정화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파우스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었다. 쌓아 올린 장작불 앞에서 경건하게 두 손을 모은 사람들처럼, 소중한 이들이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더 좋은 곳에 가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싶었다.

“생명은 돌고 도는 것이니, 언젠가 다시 만나자.”

그러한 기도는 기원이 되어 축복을 남긴다. 파우스트는 땅에 떨어진 마나석을 더없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입을 맞추었다. 직전의 전투로 마력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는 팔다리에 퍼진 저주에 저항하던 마지막 마력까지 끌어내어 돌에 깃든 저주를 씻어내렸다.

그대로 한참을 있었던 것 같다. 축복을 머금은 마나석은 지평선 너머에서 서서히 고개를 드는 햇볕을 받아 투명한 빛을 발했다. 전신을 휩쓰는 탈력감에 눈을 감고 무지근한 숨을 내쉬고 있으니,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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