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07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눈이 떠지는 날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피가로님은 절대 ‘그냥’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무엇이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알지 못하는 새에 악몽을 꿨거나 잠자리가 불편했던 둥, 여러 가지 가능성이 혼재한다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었다. 부쩍 선선해지는 환절기의 시작을 알리듯이 막사 안에도 쌀쌀한 바람이 조금씩 새어 들어왔다. 새벽이 되면 더욱 매서워지는 바람 탓일까, 잠결에 펄럭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풍압이 느껴진 것은 아주 잠시뿐이다. 곤히 잠든 파우스트의 머리카락 몇 올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아주 얕은, 피부를 간질이는 감각.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피로한 몸뚱이에 진득하게 엉겨 붙은 잠기운이 순식간에 걷혔다. 담요를 박차고 몸을 일으킨 파우스트가 손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인 손에 짧고 투박한 손잡이가 잡혔다. 그것은 내내 베개에 깔려있던 탓에 온기를 품고 있었다.

숨겨진 칼날은 칼집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파우스트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뽑아 다가오는 침입자를 찔렀다. 상대보다 작은 체구를 이용하여 두 손으로 손잡이를 쥐고 체중을 실어 있는 힘껏 부딪쳤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은 곧장 옷을 뚫고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는 어깨를 찌른 칼의 손잡이를 감싸듯 아랫면을 눌러 더욱 깊숙이 욱여넣었다.

비명은 없었다. 그러나 통증은 제대로 느끼는지 주춤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단번에 심장을 찌를 생각이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등불이 꺼진 막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칼을 뽑고 물러나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다시금 파우스트를 덮쳐왔다. 파우스트는 정체불명의 침입자와 좁은 막사 내부에서 엎치락뒤치락 굴렀다. 차내 쓴 이불에 동선이 꼬이자, 섬뜩한 한기가 목덜미를 비껴갔다.

상반신을 숙이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했다. 언뜻 귀밑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 외에 다른 것을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좁은 막사에서 마법을 쓰는 건 위험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틸크나트·무르크리드》!”

허공에 그려진 마법진이 강한 빛을 뿜어냈다. 동시에 침입자가 펄쩍 뛰어 물러났다. 시야가 한순간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물들었다. 폭발이 발생하는 것과 침입자가 도망치는 건 거의 동시였다. 마법으로 인한 폭발의 여파에 휘말리기 전에 침입자는 막사 모퉁이를 칼로 찢고 빠져나갔다. 그 행동이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몹시 날랬다.

죽이거나 생포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테지만,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혼자 남은 파우스트는 격렬한 몸싸움 중에 넘어진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재와 먼지로 지저분해진 옷을 털며 쯧, 혀를 찼다.

폭발에 휩쓸린 막사는 반쯤 날아가있었다. 탁자와 의자 등 얼마 없는 가구는 전부 부서지고, 타는 물건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침대는 볼만했다. 얇은 담요와 베개는 새까맣게 탄 속을 드러낸 채였다.

마법은 사용자에게 감응한다. 불이나 폭발 마법만큼은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기습을 당한 상태에서 그런 냉정한 사고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덕분에 이 꼴이다. 이래서 마법을 쓰지 않으려 했는데.

파우스트는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워 불길을 제압했다. 다행히 본인이 저지른 일이라 수습이 쉬웠다. 막사가 불바다가 된 마당에 정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만 불씨도 남지 않도록 하나하나 꼼꼼하게 지워갈 때였다. 거의 다 타서 흔적만 남은 막사 천막이 걷히며 레녹스가 뛰어 들어왔다.

“파우스트님, 무사하십니까!”

“레노인가, 너는 괜찮아?”

레녹스는 보기 드물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여기까지 한달음에 뛰어온 게 분명했다. 아닌 밤중에 깨어난 건 그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역시 마법은 쓰지 말 걸 그랬나. 파우스트는 미안한 감정이 앞서 헛기침을 했다.

레녹스는 파우스트가 민망해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지난 상황을 보고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만 다른 쪽은 수라장입니다. 습격 인원은 소수였지만, 워낙 늦은 시간인데다 불침번이 방심하고 있던 모양이라.”

“벌써 경을 쳤겠군.”

“네. 알렉님이 무척 노하셔서…….”

“알렉.”

파우스트는 레녹스의 말을 반복했다. 소중한 이를 떠올리자 가라앉은 눈에 빛이 돌아왔다.

“알렉은 무사한가?”

“알렉님은.”

레녹스가 대답하기 전이었다.

“됐어. 내가 직접 확인하지.”

파우스트는 레녹스의 말을 듣지 않고 간신히 형태만 유지한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의 달리다시피 성큼성큼 걷고 있으니, 레녹스가 보폭을 넓혀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알렉님도 무사하십니다.”

“그래, 저기 보이는군.”

레녹스의 말대로 야영지는 엉망이었다. 불탄 것은 파우스트의 막사만이 아니었다. 그건 본인의 손으로 불태웠지만, 불이 붙은 야영지는 명백히 적대 진영의 방화였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뛰어다니고, 다친 이들은 구석에 주저앉아있다.

알렉은 이미 밖으로 나와서 혼란한 병사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알렉도 습격을 받았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이 곧 병사들의 사기와 직결된다며 매번 옷차림에 신경 쓰던 그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모두를 이끌고 있었다.

어쨌든 안색도 괜찮고, 특별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파우스트는 그 사실에 안심했다.

“파우스트.”

멀리서 파우스트를 알아본 알렉이 아는 체를 했다. 원래는 무사한지 확인만 할 생각이었으나, 이렇게 되면 가까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파우스트는 알렉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알렉, 무사해서 다행이다.”

“응, 너야말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기도 잠시, 지척에서 파우스트를 확인한 알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의 시선은 정확히 파우스트의 목덜미를 향하고 있었다.

“파우스트, 너…….”

알렉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파우스트가 손을 들어 막았다.

“잠깐, 조금만 있다 얘기하자. 우선 피가로님께 다녀올게.”

“……그래.”

알렉은 떨떠름한 눈치였지만 흔쾌히 보내주었다. 파우스트는 미안하다는 듯이 멋쩍게 웃었다. 못내 마음이 편치 않아 뒤를 돌아보니, 눈이 마주친 알렉이 손을 흔들었다. 다행히 뜻은 잘 전해진 것 같다.

파우스트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틈에서 걸음을 서둘렀다. 점점 빠르게 걷던 것이 끝에 가선 흡사 달리고 있었다. 때아닌 습격에 부상당한 병사들이 신음하는 소리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피가로의 막사는 파우스트의 막사 근처에 있었다. 파우스트는 여타 막사보다 번듯하게 세워진 개인 막사 앞에서 숨을 골랐다. 땀이 난 손바닥을 슬쩍 옷에 문지른 파우스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피가로님,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은 없었으나,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알렉도 자신도 피습을 당했다. 상대가 일부러 개인 막사를 가진 간부를 노렸다면 당연히 피가로도 습격을 받았을 것이다. 피가로가 당했을 거라곤 생각지 않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결심한 파우스트는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파우스트의 막사와 마찬가지로 온통 깜깜했다. 얼마나 어둡냐면, 천막이 열리며 오히려 바깥의 빛이 안쪽으로 쏟아졌을 정도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피가로가 침대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깍지 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앉은 그는 제멋대로 입구를 열어젖힌 파우스트를 한 번 쳐다보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들이친 빛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피가로의 발치에 무언가 있었다. 그곳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파우스트는 스승이 일어나 앉아있는 모습을 보곤 다시 허둥지둥 천막을 내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안쪽을 엿보지 못하도록 완전히 차단한 다음, 벽을 더듬어 등불을 찾아냈다.

등불을 높이 든 파우스트가 피가로에게 접근했다.

“피가로님, 괜찮으십니까?”

“그럼. 내가 누구인지 잊은 거니?”

드디어 피가로가 반응을 보였다.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돌아보며 입가를 느슨하게 했다. 은은한 주홍 불빛에 차가운 얼굴과 핏기 하나 없는 낯빛이 더욱 두드러졌다. 파우스트는 “아뇨…….”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등불로 바닥을 비췄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피가로의 발밑에 두 명의 사람, 아니, 두 구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파우스트는 바로 주저앉아 맥을 짚었다. 당연하지만 숨은 진작 끊겼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온기만이 이들이 방금까지 살아있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피가로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엄연히 말해 이것도 죽이는 장면 자체를 본 건 아니지만,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파우스트는 등불을 이리저리 비추며 시신을 확인했다. 소속으로는 짐작 가는 바가 있으나, 보다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아까부터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찌른다 싶더니, 사망한 침입자들은 전신이 얇은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심하게 너덜거렸다. 상흔으로 보건대, 직접적인 흉기는 아니고 마법인 것 같다. 난잡한 것을 싫어하는 피가로라면 깔끔하게 급소를 노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익숙한 마력의 흔적을 읽어낸 파우스트가 고개를 들어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피가로는 여느 때와 같이 무던한 태도로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입자의 핏물은 바닥과 침대에 흩뿌려있을 뿐, 피가로의 몸에는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만큼 정교하게 마법을 사용하다니, 홀랑 타버린 자신의 막사를 떠올리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진다.

평소의 온후한 스승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잔인한 손속이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만을 믿지 않았다.

북쪽의 마법사는 땅의 기질만큼이나 잔혹하고 변덕스럽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파우스트가 스승으로 모시는 피가로 또한 북쪽의 마법사였다. 처음 피가로를 찾아갈 때만 해도 유성이 불러온 불운의 사자라고 여겨져 죽임을 당할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던가.

한 가지 이해 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죽은 시신의 상태였다. 사망 원인은 더없이 분명한데, 눈, 코, 입, 그리고 귀까지 포함하여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이유까진 알 수 없었다. 꼭 머리 안쪽의 뇌가 폭발한 것처럼.

오래 고민하면 무언가 손에 잡힐 것도 같았으나, 파우스트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는 흠뻑 묻어나는 피를 손끝으로 비볐다. 야영지를 뒤덮은 안개처럼, 짙은 혈향에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역시 죽음이란 몇 번을 지켜봐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상대가 설령 은사를 노린 암살자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엉망이네요.”

“화풀이를 해버렸어. 모처럼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 말대로 피가로는 보기 드물게 흐트러진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목숨을 위협당하고도 여전히 잠기운이 남았는지, 눈을 가늘게 뜬 모습이 몹시 나른해 보였다.

“피가로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탁자에 등불을 내려놓은 파우스트가 천천히 피가로에게 손을 뻗었다. 파우스트는 스승의 맨살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흘러내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자신의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구겨진 소매와 바짓단을 반듯하게 펼치고 느슨해진 허리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흉 하나 없이 하얀 맨발을 손바닥 전체로 감싸고 주위에 나뒹구는 신을 신겨주었다.

스승의 옷차림을 다듬는 것은 추운 북녘에서 지낼 때, 수행 제자 시절에 종종 하던 일이다. 집에 몸이 불편한 가족과 어린 여동생이 있던 파우스트는 제법 손이 야무졌다. 피가로는 타인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파우스트는 언제나 고집을 부렸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처음에는 거절하던 피가로도 결국엔 파우스트가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이어진 것이 지금은 퍽 당연한 일이 되었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너는 가끔 과할 정도로 깍듯해.”

피가로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할 일을 마친 파우스트는 겸손하게 몸을 낮추며 물러났다. 피가로는 다리를 꼰 채 파우스트를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선 그는 간밤에 수면을 취하느라 풀어헤친 머리를 단출하게 모아 묶었다.

“파우스트, 네 쪽은 어떻게 되었지?”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놓쳤습니다.”

“놓쳤다고? 꼼꼼한 너답지 않구나.”

피가로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파우스트는 면목이 없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어두워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차라리 마법으로 불을 밝혔다면…….”

“아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무작정 불을 밝히는 것도 위험할 수 있으니.”

늘 그렇듯 담담한 얼굴로 돌아온 피가로가 고개를 저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을 보고 내려놓은 등불을 챙겼다.

“달리 잃어버린 물건은?”

“없습니다.”

대답은 주저 없이 나왔다. “그렇군.” 짧게 답한 피가로는 입구로 향하며 자연스럽게 파우스트를 쳐다보았고, 등불에 비친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파우스트, 너 머리가…….”

“……네? 아.”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승의 말을 곱씹고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문득 목덜미로 눈길이 갔다. 깨달음을 얻은 것도 그즈음이다. 파우스트는 빈손으로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어깨 근처에서 항상 잡히던 머리카락이 손에 닿지 않았다. 매 전투마다 거슬려서 질끈 묶어야 했던 파우스트의 머리카락은 그보다 조금 더 위에, 목덜미 부근에서 흙 위에 돋아난 잡초처럼 고르지 않게 뻗쳐있었다.

파우스트는 예리한 칼날이 목덜미를 스친 순간,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귀밑에서 들린 서걱거리는 소리를.

“머리카락을.”

그는 말을 더듬었다. 황망한 눈빛에 형용할 수 없는 곤혹이 묻어났다.

“머리카락을 가져갔습니다.”

그 말에 이번만큼은 피가로도 할 말을 잃었다.


언제나 표표한 스승이 아주 드물게 보여주는 당황한 표정이 좋았다. 한참 부족한 자신을 제자로 받아준 스승에게 감히 무엄하게도, 그 사람의 곤란한 얼굴을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그러나 맹세컨대 이런 식으로 당혹감을 주려던 건 아니었다.

“방심했구나, 파우스트.”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막사는, 상대는 마법사였나?”

“그건, 제가…….”

폭발 마법으로 반쯤 날아간 막사를 둘러보던 피가로가 황당한 눈초리를 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파우스트는 익은 벼 이삭처럼 연달아 고개를 숙였다. 스승은 매우, 매우 매우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자를 나무라지 않으려 애써 감추던 스승의 얼굴을, 파우스트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하필 지금 이 순간, 뇌리에 과거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올해 여름 동남부의 정벌을 앞두고 어느 마을에 이르렀을 무렵, 피가로가 어떤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어.’

파우스트는 그때 그 말이 지금도 유효할지 궁금해졌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적습으로 야영지는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상대가 이렇게 능동적으로 대응할 거라 생각지 못했다. 습격을 통해 잃은 것이 물질적인 것이면 비교적 나았을 것이다. 간밤의 일로 적에게 몇 명의 포로가 잡힌 것 같다. 포로의 교환은 쌍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쪽은 내세울 포로가 없었다.

적은 포로의 교환 조건으로 퇴진을 걸었지만, 그것만큼은 절대 들어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상대를 몰아넣기 위해 들인 시간과 자금, 수차례에 걸친 충돌에서 전사한 동료들의 목숨 값까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파우스트와 단둘이 있을 때, 알렉은 몹시 괴로운 얼굴을 했다. 포로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 정말 미안하다. 하필이면 너의 부하들이 포로로 잡히다니…….”

“다른 사람이어도 마찬가지야. 네 잘못이 아닌 일로 자책하지 마.”

단순한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 잡혀간 포로는 전부 마법사였다. 혁명군의 체제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는 막사를 섞어 썼지만, 뜻에 찬동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분리하게 되었다. 속한 부대와 직속상관이 다르기에 편의성 면에서 불편함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같은 막사를 쓰는 것보단 특정하기 쉽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만 골라서 끌고 가다니. 이런 짓을 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마력의 기운을 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역시…….”

마침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알렉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파우스트를 쳐다봤다. 파우스트는 그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소행이다.”

두 사람은 미리 입을 맞춘 것처럼 동시에 말했다.

“상대 쪽에 강한 마법사가 있어. 지휘를 할 정도로 발언권이 있나 본데.”

“어째서 지금까지 알지 못한 거지? 상대 쪽에서 꽁꽁 숨긴 건가?”

“비장의 카드…… 같은 느낌이겠지. 이번에는 우리가 당했구나.”

미리 조사한 정보로는 상대 진영에 마법사는 없었다. 물론 전혀 없을 거라고 여긴 건 아니다. 마을 주민이라던가, 영주에게 고용된 마법사가 몇 명은 있었겠지만, 명령을 내릴 정도로 높은 위치에 마법사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성주가 마법사인 게 아니라면 지금까지는 늘 비슷했다. 그야 마법사는 평이 나쁘니까. 인간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마법사를 두려워하여 좀처럼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니까. 그것이 이 세상에 만연한 차별이었다.

“아마 결정권자는 아닐 거야. 비슷하게 보수를 받거나 마음이 동하여 인간의 편을 든 마법사겠지. 우리 군은 마법사가 많으니까, 대항하기 위해 꺼내든 수단일 거야.”

숨 막히는 침묵이 전신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파우스트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조용했다. 다른 때라면 더 많은 의견을 제시했을 텐데,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어딘가 불편한 것 같기도 했다.

어젯밤부터 정신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 소꿉친구로서 뜻을 함께한 혁명 동지지만, 가끔은 파우스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운 건 아닐까 고민할 때가 있었다. 알렉은 파우스트가 얼마나 진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크게 상심했을 그가 걱정되었다.

알렉은 일부러 파우스트에게 말을 건넸다.

“어때, 파우스트. 괜찮을 거 같아?”

“……잘 모르겠어. 신경 쓰이는 것도 있고.”

“네 머리카락 말이지?”

“…….”

파우스트는 팔짱을 끼며 대답을 회피했다.

마법사의 신체 일부는 주술의 매개로 이용당할 수 있다. 알렉은 인간이지만, 혁명군을 주도하는 만큼 마법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친우인 파우스트에게 부탁하여 모르는 건 무엇이든 설명을 들어두기도 했다.

그러고도 매개를 빼앗긴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확실히 와닿지 않았다. 알렉은 파우스트의 능력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강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다. 어떤 저주가 와도 그라면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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