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06


인간과 마법사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사람으로서 충분히 화합할 수 있었다. 혁명군 내에도 긴밀하게 교류하는 이들이 있었다. 인간과 마법사를 가리지 않고 처음부터 믿음직한 가족, 혹은 친지와 함께 혁명군에 합류한 사람들이 있었다.

보급품의 차등 분배에 대해서 마법사들은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파우스트는 항상 그것이 미안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마법사에게 그들이 원하는 긍정적인 답변을 줄 수 없어 죄스러웠다. 마법사들이 주린 배를 안고 배식을 받아 가는 인간을 가만히 지켜볼 때마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이 자신의 부덕함처럼 느껴졌다.

“그럼 난 마법사들을 확인하고 올게.”

마침내 문제가 해결되었다. 꽉 막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내내 좌불안석이던 파우스트가 막사를 뛰쳐나갔다. 알렉과 피가로 중 누구도 파우스트를 제지하지 않았다. 요 며칠 한껏 찌푸린 인상을 풀지 못하던 파우스트는 막사 밖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길 때 훨씬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파우스트의 기척이 멀어지자, 근처 의자에 걸터앉으며 알렉에게 눈짓했다.

“그보다 알렉, 잠깐 보지.”

“피가로님, 무슨 일이시죠.”

알렉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는 피가로의 의도를 알지 못했지만, 일단 눈치 빠르게 다가와 앉았다. 

“중요한 이야기야.”

익숙하게 다리를 꼰 피가로가 턱을 비스듬히 들었다.

“이것저것 잴 필요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게 신권정치를 제안하려고. 정치의 방향을 정하긴 다소 이르지 않나 싶지만, 이런 건 미리 생각해놓는 편이 좋으니까.”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알렉은 버릇처럼 미소 띤 얼굴로 피가로의 말을 곱씹었고, 이내 조금씩 표정을 굳혔다.

“……피가로님은 언제나 깜짝 놀랄 제안을 하시는군요. 저의 식견이 부족하다 보니 때때로 따라가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그런 것을 논하기엔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적절한 시기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피가로는 자신의 기분을 숨기지 않고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건 명백한 조소였다. 알렉은 피가로의 노골적인 조롱에 오히려 평정을 되찾았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침착한 대응에 피가로가 눈가를 접었다. 파우스트 앞에서 보여주는 것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미소였다. 이제는 알고 있었다. 적당히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너도 느끼고 있겠지. 전쟁이 길어지면서 모두가 서서히 지쳐가고 있어. 머지않아 불만이 쏟아질 거다. 공존과 화합이라는 취지는 좋으나,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피가로는 말을 멈추고 알렉을 쳐다보았다. 회색 눈동자 속, 독특한 동공이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본다. 생리현상을 잊은 것처럼 한 번 깜박이지 않는 눈은 마치 이해했냐고 묻는듯했다. 알렉은 거북한 속내를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피가로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느닷없이 신권정치를 제안한 건 그 때문이야. 모든 전쟁이 그렇겠지만, 그중에서도 혁명이라는 건 맹목적인 믿음 없이는 불가능해.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을 만드는데 가장 효율적인 것이 바로 신앙이다.”

피가로는 말을 하며 느긋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곧추세운 허리가 느슨하게 풀리면서 깍지 낀 손이 무릎 위에 놓였다.

“왕을 목표로 하는 자로서 신앙의 중요성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성자를 내세워서 군대를 이끄는 거다. 신이 모두를 가호하여 이끌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거야.”

“그건 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을 속이는 일이 아닙니까?”

그 말과 동시에 피가로가 입매를 비틀었다. 아주 어리고 하찮은 것을 보듯이, 한없이 자애로우면서도 끝없이 업신여기는 눈빛이었다.

“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무작정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따지고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니까.”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언가 실수를 한 건가. 알렉은 한층 조심스럽게 피가로를 관찰했다. 파우스트의 스승이자 위대한 현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는 강대한 마력을 가진 대마법사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북쪽 국가의 마법사가 얼마나 괴팍한 성정을 가졌는지 생각하면 괜스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단지 불쾌하다는 이유로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손짓 한 번, 더도 덜도 말고 딱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이 사람에게 도움을 구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피가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데, 어느덧 언짢은 기색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다시 무감각한 얼굴로 돌아간 피가로에게선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직전까지의 서늘한 분위기가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전환이 빨랐다.

“속이다니, 그건 또 흥미로운 발상이구나. 아무래도 서로 보고 느끼는 게 다른 것 같으니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볼까.”

뾰족하게 세운 손끝이 탁자를 두드렸다. 원본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름의 음률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과 정령은 긴밀하게 이어져있어. 마법사의 마력의 근원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마법사는 정령을 사역하여 힘을 얻지. 정령은 다양한 형태로 사람의 삶에 관여하곤 한다. 특히 인간에게 그들은 변덕스럽고 감당할 수 없는 존재겠지. 그런 의미에서 너희가 살아가는 세상에 정령의 존재는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정령이라는 게 정말로 실존하는 겁니까?”

알렉의 질문에 피가로는 독주를 든 것처럼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믿지 못하는가. 그런 너희를 이해시키는 것이 가끔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 신중함은 나름의 지혜라고 생각해. 허나, 너희 인간들이 믿고 안 믿고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정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다. 인간은 믿지 못해도 마법사들은 알아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거다.”

“마법사가 정령을 사역하여 힘을 얻는다면, 정령의 존재를 신으로 받아들이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 그 표현은 잘못되었나. 나의 나쁜 버릇이야. 정정하지, 사역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만한 자격을 갖춘 강한 마법사뿐이다. 이제 그런 마법사는 세계에 얼마 남지 않았으니, 대다수의 마법사가 정령에게 끌려다니고 있을 거다.”

보다 안정적인 혁명을 기원하며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건넸다. 자칫 골치 아플 수 있는 상황인데도 알렉은 침착하게 의문을 풀어나갔다. 피가로에게도 이처럼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는 인간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보면 볼수록 왕이 되기에 합당한 인재라는 생각이 든다. 알렉이 혁명을 거쳐 왕위에 오르는 것은 더없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느껴졌다. 마치 어떤 거대한 존재가 달이 만든 모형 정원을 마음껏 조종하는 것처럼, 한낱 사람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묘한 힘이 느껴졌다.

어차피 막을 생각도 없긴 했다. 한 번 제 손으로 부순 것의 재건을 돕는다는 건 실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아무렴 뭐 어떤가. 자신이 개입한 이상, 모든 것은 파우스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짧은 순간, 피가로는 자연스럽게 북쪽의 쌍둥이 스승을 떠올렸다. 그들처럼 자신도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둘 생각이었다. 여태 지켜본 결과, 안타깝게도 그의 제자는 정치 머리는 영 꽝인 것 같다.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낌없이 퍼주다가 사서 손해 볼 상이다.

얼마 전, 보급대상에서 제외된 마법사들이 파우스트에게 따져 묻는 것을 보았다. 단편적인 것밖에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원망의 화살을 가장 편리한 대상에게 돌렸다. 마음 약한 파우스트는 가련하게도 심리적 부채감에 시달리며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피가로는 떠나기 전에 제자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놓을 생각이었다. 소박한 파우스트는 신격화 따위 원치 않겠지만, 집단 내부에서 암암리에 인간보다 뒤처지고 있는 마법사의 권리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조치였다.

게다가 신격화라는 건 듣기에는 별로지만 막상 겪어보면 그렇게 나쁘지 않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고독이라는 늪에 빠질 수도 있으나, 파우스트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알렉도, 레녹스도. 만약을 대비한 보험은 충분했다.

“세계가 절망하고 있을수록 사람들의 희망이 될 영웅이 필요해. 그러나 신이 아닌 이상, 조잡하고 나약한 몸뚱이로 아무런 흠이 없는 건 불가능하지. 사람들에게 신화적인 영웅으로 추대 받기 위해서, 어려운 도박의 성공률을 높이자는 거다.”

이끄는 자가 약한 자라면 병사들도 덩달아 약해진다. 그런 점에서 알렉은 인간들을 통솔하기에 최적의 인재였다. 다만 한 가지, 그의 정통성은 혁명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말이 나올 것이다.

혁명군을 이끌 때는 괜찮다. 시작은 오히려 평범한 한 명의 인간인 편이 훨씬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쉬웠다. 같은 약자의 편에서 함께 부당함에 분노하고 무기를 들어줄 테니까.

그러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출신이 문제가 된다.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조악한 시골 마을 출신 왕을 믿고 따를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무사히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공로도 있고, 곁에서 지켜본 것이 있으니 충성을 맹세한 기존의 부하들까진 아슬아슬하게 따를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사소한 실수에도 쉽게 비난하고 몰아세울 것이다.

나라는 일개 군대와 비할 바 없다.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뛰어난 지도력도, 강한 무력도 아니다. 반드시 만인이 납득할 만한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

알렉은 피가로의 말을 이해하고, 정통성이 필요하다는 부분에 동의했지만 그의 방식에 찬성하지 않았다.

“설화 속의 영웅왕처럼 말인가요? 하지만 피가로님, 살아있는 사람은 절대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영웅처럼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제게는 불멸의 신체도, 무적의 군대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허풍쟁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할 겁니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을 뿐, 결국 사람들을 속인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굳이 그런 어려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과 마음을 이을 수 있다. 알렉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피가로는 알렉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실망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는군. 네 허리춤을 봐. 적어도 보검은 있다. 네 수중엔 이미 신의 부름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어. 알렉 그랑벨, 넌 무엇을 위해 혁명을 시작하고 그 검을 뽑았지?”

알렉은 반박할 말을 찾기 위해 입을 뻐끔거리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기세에 밀려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더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지금이 바로 강경하게 밀어붙일 때였다.

참 먼 길을 돌아왔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이보다 빠르게 원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마왕 오즈와 함께하던 그 시절이라면…….

피가로는 눈을 한 번 깜박이는 것으로 과거의 잔재를 지워냈다. 그는 거침없이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주 선 피가로는 알렉보다 키가 컸다. 나무로 만든 탁자를 치는 소리에 놀란 알렉이 고개를 들어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피가로는 북녘에 쌓인 눈처럼 냉랭한 낯을 하고 있었다.

“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감정은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라,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아. 언제든 쉽게 돌아서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다른 얄팍한 감정과 비교하면 신심은 비교적 퇴색되지 않는다. 나를 믿어. 그 부분에 대해선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 중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해가 진 막사 안에 어둠이 드리웠다. 그중에서도 그늘진 곳에 피가로의 두 눈은 새까맣게 보였다. 한가운데의 동공만이 비상식적으로 선명한 빛을 발했다. 알렉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요동쳤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만 요란했다.

알렉은 끝까지 반신반의했다. 설득이 통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확신이 필요할 뿐이다. 손쉽게 군주를 탓하는 백성과 달리 군주는 누구도 탓할 수 없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알렉은 실패의 반동을 걱정하고 있었다. 정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피가로는 친한 사람에게 하듯이 알렉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알렉, 네가 사람의 아들이 되는 거야. 그리고 네가 이끄는 혁명군은 신의 부름을 받은 군대가 된다. 그로서 죄책감을 덜고 나아갈 명분을 얻는 거지. 결국 대의와 학살은 한 끗 차이 아니겠나.”

“피가로님…….”

피가로는 오른손을 들어 알렉의 이마를 짚었다. 허공에 띄운 손이 천천히 내려와 가슴팍을, 양쪽 어깨를 차례대로 그었다. 느른히 입가를 당기는 모습은 경건하기는커녕 염세적으로 느껴졌다.

“……파우스트는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 애는 늘 그렇지. 변함없이 선량하고 신실해.”

파우스트의 이름이 거론되자, 피가로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눈동자 속에 담긴 보석이 찬란한 빛무리를 흩뿌렸다. 계책을 내던 직전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화사한 미소였다.

그 안에 담긴 것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애정이다. 피가로에게 민감한 부탁을 하러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애정의 크기는 더 커지면 커졌지 결코 작아지지 않았다.

“넌 그 애와 달라. 이 내가, 결과적으로 네게 좋은 일이 될 거라 장담하지. 어떠한 풍파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너의 각오를 보여주도록.”

파우스트를 위해서. 마지막에 피가로는 웃는 얼굴 그대로 덧붙였다.

그제야 새삼 되새기게 된다. 눈앞의 마법사가 오로지 자신의 애제자만을 위해 이런 귀찮은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나이 든 고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의 감정이 무섭다고 느끼게 되었다.

10.

“오만방자한 반동분자 같으니, 네까짓 게 어딜 감히 신의 이름을 모방하려 드느냐! 천벌이 두렵지도 않으냐? 새 시대를 여는 것은 너희 혁명군이 아닌 우리의 주군이시다. 우리는 중앙 나라의 뿌리조차 알지 못하는 너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리의 주군께선 근본도 모를 잡것들을 물리치고 옛 왕조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다!”

듣는 사람이 낯 뜨거울 정도로 모욕적인 언사였다.

“아쉽구나.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피로 물든 홀을 둘러본 알렉이 진심으로 한탄했다. 주위에 수많은 시체가 아무렇지 않게 널브러져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사라져버릴 만큼 잔혹한 광경이었다.

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 중 혁명군 외에 살아있는 건 홀까지 끌려 나온 성주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아내와 자식은 포위당하기 전에 제 손으로 직접 숨을 끊었는지 칼에 찔려 죽은 시신이 내방에서 발견되었다.

“일찍이 멸망한 과거의 잔재를 쫓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 꿈, 다음 생에는 모쪼록 이루기를 바라지.”

검을 쥔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알렉은 손에 힘을 주고 단칼에 성주의 목을 베어냈다.


다른 때보다 몇 배는 길게 느껴지던 여름의 끝물, 완연한 가을을 맞이하며 상승세를 타던 혁명군은 파도의 흐름에 탑승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세력을 넓혔다.

오로지 중앙성만 탈환하면 된다며 시작했던 혁명이었으나, 박해받는 사람들을 모른 척 지나치지 못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점점 복잡하고 커지게 되었다. 그렇게 번진 불길은 이제는 중앙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중앙으로 갈수록 과거 중앙 왕조에 충성하던 귀족의 후예들이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혁명군이 중앙을 향해 진군을 서두를수록 그들은 더욱 끈끈하게 결집했다. 실로 괴기한 충성심이었다.

점점 전투는 치열해지고, 누구도 투항하지 않은 채 어느 한쪽이 재기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때까지 전쟁은 계속되었다.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거다. 새로운 왕조가 설립되면 반드시 판도가 바뀌게 되니까. 그간 어렵사리 쌓아 올리고 유지한 것을 한낱 종잇조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거지.”

피가로는 간략하게 말했다. 혁명군의 사정에 깊게 관여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남 일처럼 낯선 태도를 유지했다. 알렉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나라는 지도자 없이는 굴러가지 않아. 지금은 제후들의 동맹으로 굴러가는 동쪽도 머지않아 왕조를 세울 거다. 많은 지지를 받는 블랑셰 가를 견제하기 위해 제후들이 잇따라 손을 잡고 있다 들었어.”

“블랑셰라면 동쪽 나라 변방에 위치한 무가겠지. 블랑셰의 가주가 무력과 인망을 두루 갖춘 대단한 명장이라더군. 그게 사실이라면, 뿔뿔이 흩어져 서로 견제하기 바쁜 제후들이 부랴부랴 협정을 맺을만 하구나.”

알렉과 피가로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니 괜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구불거리는 앞머리를 매만졌다.

“중앙의 왕조가 멸망한 지도 어언 백 년이야. 살아남은 후예가 새로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여태 중앙성이 잠잠한 건 그 때문이었나…… 시기가 나쁘네. 왜 하필 지금일까.”

“파우스트, 우연이 아니야. 혁명군이 북상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서두르고 있는 거다.”

왕조는 멸망했지만, 나라보다 일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던 몇 명의 귀족들은 살아남았다. 혁명의 불길이 날로 거세지는데도 중앙성에 남은 귀족들은 변변찮은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판이었던 것 같다.

피가로는 삐뚤게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확실히, 꼼꼼하게 청소한다고 했지만 남아있는 왕족이 있었을 수도 있겠네.”

인간의 목숨은 질기니까. 피가로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으나,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이 소리가 되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알렉도 비슷한 심정인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할 말이 없어 하하, 어색하게 웃다가 안색을 흐렸다.

그보다 이상한 말이다. 중앙 나라를 전복시키고 왕조를 무너뜨린 건 분명 마왕 오즈일 텐데, 지금 말은 피가로 본인이 세계정복을 주도한 당사자처럼 들린다. 파우스트는 땀을 흘리며 알렉을 곁눈질했다. 알렉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파우스트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되물었다.

“마왕 오즈가, 말이죠?”

“아, 그래. 마왕 오즈가.”

피가로는 마찬가지로 미소 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동요의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때, 고민하던 알렉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피가로님은 마왕이 세계를 정복할 때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마왕의 눈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있었지. 마왕 오즈는 나와 같은 북쪽 출신의 마법사고, 그쪽부터 세계정복을 시작했잖아?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 오즈는 이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 나로선 그놈이 세계를 불태우는 걸 막을 수도 없고, 그놈을 돌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 흔한 이야기지. 뭐든 할 수 있었다면 오죽 좋겠냐마는.”

담담한 목소리와 별개로 짙은 환멸과 체념, 미미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 말을 들으며 파우스트는 확신했다. 역시 피가로는 마왕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동시대를 살아가던 수많은 마법사가 마왕에 의해 돌이 되었다고 한다. 피가로 본인은 자리를 피하여 화를 면했다고 하나, 돌이 된 마법사 중에 그의 지인이 있었을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겪은 입장에서 당연히 좋게 보이지 않겠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파우스트는 순간, 돌이 된 동료들을 떠올렸다. 잊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머릿속에 새기는 그리운 얼굴들을 생각했다. 그러자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일을 이야기하는 피가로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주제넘은 생각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전혀 관련 없는 일로 피가로를 추궁하는 분위기가 불편했다. 파우스트는 한쪽 팔을 들어 피가로와 알렉 사이를 가로막았다.

“마왕에 대한 건 이제 됐잖아. 어차피 지난 일이니까. 알렉, 그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자.”

알렉은 파우스트의 행동에 슬쩍 인상을 썼으나, 금방 평소처럼 믿음직한 친구의 얼굴로 돌아왔다.

“맞는 말이야. 그래서 여러 조건을 고려해 봤는데 다음은 이곳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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