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05



결과부터 말하자면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이번 작전의 주축이 된 것은 파우스트였다. 파우스트는 미리 정한 대로 싸움이 시작되자 빗자루를 타고 높이 날아올랐다.

피가로의 제자로 들어가고 파우스트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마법의 기초였다. 이론적인 부분과 더불어 별사탕을 만드는 법, 빗자루를 타는 방법 등을 교육받았다. 피가로의 수업은 대단히 엄격하여 언제고 어렵지 않았던 적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비행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독보적으로 힘들었다.

가르침을 받기 전에도 빗자루를 타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비행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마법사에 대해서 가장 보편적으로 갖는 이미지였다. 그러나 비행 마법은 단순히 이미지만으로 익히기에 어려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주변에 마법사가 아무도 없었던 탓에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동종 마법사를 만났다. 전란의 불씨로 엉망이 된 세계를 여행하고 있던 마법사는 파우스트의 고향 마을에 우연히 들렸다고 했다. 만남은 짧았지만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훌쩍 떠나간 마법사는 당시 마법사란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던 파우스트에게 날아오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마법사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아. 아직 어린 네게 할 말은 아니지만, 언젠가 모든 것을 저버리고 도망치고 싶어진다면 스스로 나는 방법 정도는 알아야겠지.’

잔인한 말이었으나, 동시에 순수한 호의였다. 그 마법사에겐 아주 단편적인 것만을 배웠기에 완벽하지 않았다.

첫 비행 수업에서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습관을 지적했다. 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석구석 배어든 나쁜 버릇은 파우스트를 단단히 고생시켰다. 그 과정에서 저를 믿어주는 스승을 많이도 실망시켰던 것 같다. 피가로는 매번 온화한 얼굴로 웃으며 ‘다시 해보자’라고 말했지만, 파우스트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때 흘린 피와 땀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몹시 엄격한 수업을 받았기에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날 수 있었다.

파우스트는 성 꼭대기에 접근하여 방호벽을 부수고 상대 마법사를 직접 돌로 만들었다. 상대도 나름대로 강한 축에 속하던 지라, 승부는 그야말로 한 끗 차이였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사방에 파편이 튀겼다. 떨어지는 파편을 맞은 사병들이 비명을 질렀다.

목표로 하던 성은 한 달간의 농성이 거짓말처럼 성문이 뚫리자 싱거울 정도로 쉽게 제압되었다. 싸움을 마치고 뒷수습을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상대는 정말 극한까지 몰려있었던 것 같다. 낯선 군대가 성문을 부수며 진입하는데도 아무도 나서서 막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혁명군의 존재를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성 내부의 상황은 심각했다. 안전을 위해 들였다기보다는 모두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였겠지. 노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분열과 배신을 염두에 두어 적에게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통제했다. 살아남을 사람은 살아남도록 두는 편이 훨씬 나을 텐데도.

물자의 부족을 해결하는 방식은 집단마다 다르다. 과거에 함락한 어느 영지는 마찬가지로 혁명군의 진군을 두려워한 다른 영지에게 지원을 받았고, 혁명군은 마법사에게 배급하는 식량을 줄이는 것으로 활로를 찾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땠을까. 아마 성 안에 가둔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현실이 그랬다. 포위된 상황에서 군대를 해체하거나 침입자에게 성을 내어줄 수는 없으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진 보람이 있었다. 파우스트는 단순히 승리했다는 사실보다 같은 사람들끼리 물어뜯는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는 것에 기쁨을 얻었다. 혁명이라는 보기 좋은 껍질을 뒤집어썼을 뿐, 서로 견제하고 물어뜯는 것은 그들 또한 마찬가지임에도.

마음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다는 건,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얼마나 잔인한 이야기인지.

파우스트는 늦은 시간까지 부하들과 함께 뒷정리를 했다. 아주 사소한 일도 거절하지 않고, 허드렛일까지 흔쾌히 도맡아 했다.

오늘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성 전체를 감싼 강력한 방호벽을 깨고 그만한 방호벽을 펼친 마법사와도 치열하게 겨뤘다. 번거로운 요새를 뚫었으며 마침내 기나긴 싸움에서 승리했다.

여태 험난한 전투는 수도 없이 많았다. 오죽하면 지금까지의 싸움을 일일이 세는 것보다 대화를 통해 해결하거나 큰 피해 없이 순탄하게 점령을 성공한 횟수를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였다. 전쟁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힘들고 어렵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만큼 단기간에 마력을 끌어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사람의 목숨에 경중은 없다. 파우스트는 혁명군의 수장인 알렉의 친우이자 마법사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었지만, 동시에 평범한 한 명의 사람이기도 했다. 아군과 적군을 막론하고 난도질당하거나 말의 발굽에 짓밟힌 시신 등을 수습하는 건 누구라도 원치 않는 일이다. 피가로의 말이 옳았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상, 누구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며, 상처받고 괴로워할 것이다.

그럴수록 한 명이라도 더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렉이 하지 못하는 만큼, 그런 부분을 자신이 채워야 한다고.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가장 낮은 곳을 둘러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 때문에 지친 몸을 종일 쉬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성벽 모퉁이를 돌았다. 전신이 땀과 피로 지저분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 전체에 이미 자신의 몸에서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짙은 악취가 배어있는 탓에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도 미지근한 물 한 잔과 편안한 수면이 고팠다. 지금이라면 허리와 엉덩이가 부서지도록 불편한 간이침대조차 거위털로 만든 최고급 침대처럼 애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히 지친 파우스트가 피로한 눈가를 비빌 때였다.

“이번에는 무리를 했구나, 파우스트.”

“피가로님.”

병사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목에서 피가로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를 보자마자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내게 이유를 묻는 거니? 당연히 너를 찾으러 왔지.”

파우스트는 피가로에게 한달음에 달려가려다가 멈칫했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피가로와 달리 직전까지 시체를 치우고 잔해를 들고 있던 파우스트는 지저분한 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피가로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파우스트가 재와 먼지, 핏물이 골고루 뒤섞인 손을 내려다보며 주춤거릴 즈음이었다.

“이렇게나 다쳐서 오고.”

먼저 성큼 다가와 거리를 좁힌 피가로가 더러워진 뺨을 어루만졌다.

“피가로님, 당신의 손이 더러워집니다.”

“상관없어.”

투명할 정도로 푸른빛이 피가로의 손바닥과 파우스트의 뺨을 감쌌다. 피가로의 마법은 보편적으로 아주 차가운 색이지만, 지금은 더없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봄볕처럼 따스한 온기가 부드럽게 살갗을 감쌌다. 눈치채지 못했는데 뺨에 상처가 있었던 모양이다. 따끔거리는 통증은 오히려 상처가 치료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피가로가 물러나고, 파우스트는 방금 전까지 스승이 쓰다듬던 자리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치료하면서 자신의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겨우내 근처 마을에 돌던 전염병을 치료하여 성자라고 불리던 사람이니 당연한가.

단 하나뿐인 제자라지만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 애써 무던하게 받아들이려 하나, 파우스트에게는 자신이 피가로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우선시해주는 다정한 스승. 이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이 사람과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다.

알렉은 소중한 친구인 동시에 혁명군의 리더였다. 알렉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지금까지 이룬 것들이 전부 무용지물이 된다. 그의 목숨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의 친우이자 혁명 파트너인 자신의 목숨마저도 부품에 불과하다.

모두가 알렉을 믿고 따르고 있었다. 그가 가져다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치고 있었다. 하다못해 종자인 레녹스에게도 유사시에 자신보다 알렉을 우선시하라고 말해두었다. 거짓말에 재주가 없는 레녹스가 떨떠름한 얼굴을 한 것과는 별개로, 잔인하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피가로는 다르다. 피가로님만큼은, 모두의 필사적인 바람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오로지 자신을 봐준다. 자신만을 아끼고, 자신만을 신경 쓴다.

당장은 제자의 부탁을 따라 알렉의 옆을 지키고 있지만, 결국 피가로에게 파우스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이렇게 비밀스럽고 소소한 순간에 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달아오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나도 알아.”

피가로가 다시 파우스트의 얼굴을 만졌다. 굳은살 하나 없이 보드라운 손끝이 지나갈 때마다 땀으로 젖은 얼굴에 후끈거리는 더위가 가시며 청량감이 돌았다. 파우스트는 차마 지저분한 손으로 피가로의 손을 맞잡지 못하고 그 손길에 조심스럽게 기댔다.

“……앉아서 얘기할까?”

떨어지기 전, 손끝으로 파우스트의 눈가를 문지른 피가로가 마법으로 의자를 불러냈다. 착석감이 나쁜 딱딱한 나무 의자였지만, 그마저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오랫동안 서있어 무릎이 무척 아팠던 파우스트는 감지덕지하여 선뜻 앉았다.

“파우스트, 넌 군주에게 이상적인 반려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반려, 그러니까, 왕비 말인가요?”

눈을 동그랗게 뜬 파우스트가 되물었다. 피가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명문가의 여식이거나 인품이나 용모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왕비라고 하니 바로 걸리는 것이 있었다. 피가로는 이런 주제를 가벼운 화젯거리로 삼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아마도 알렉과 관련된 이야기일 터였다.

피가로님은 어째서 내게 이런 걸 물으실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가로님이 하시는 말씀이니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알렉이 차후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피가로님에게 상담한 건 아닐까?

다양한 장수의 합류로 진군이 가속화된 지금, 그들은 썩어빠진 영주들을 타도하고 중앙의 성을 탈환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짧게는 한 해를, 길게는 서너 해를 예상했다. 그런 와중에 오로지 알렉과 피가로만이 지금부터 반년을 계획하고 있었다.

중앙의 왕조가 붕괴된 지금, 혁명군 내부에도 옛 귀족이나 귀족의 후예가 존재했다. 벌써부터 혁명의 성공을 점친 그들이 미래의 왕에게 줄을 대고 있다 들었다. 괴담처럼 은밀하게 도는 소문이었지만, 파우스트는 알렉에게 이미 사실 확인을 마쳐놓았다.

피가로는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다. 권력에 눈이 먼 그들과 달리 피가로는 다분히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정치에 둔한 자신보다는 세상사에 밝고 교류에 능한 피가로 쪽이 훨씬 조언을 구하기 좋을 것이다.

아, 도저히 무리였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파우스트는 최대한 머리를 비우면서 제대로 된 답변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복잡한 자격 요건이 있겠지만, 전 일반적인 부부와 마찬가지로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인 반려란,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지켜주고, 우선적으로 믿어주며, 안정적으로 뒤를 받쳐줄 수 있는 상대겠죠. 당장은 정열적이지만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같은 사랑보다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유대 관계에 의한 사랑을 더 바람직하다고 느낍니다. 꼭 친구나 가족처럼요.”

파우스트의 답에 피가로가 “흐음.” 하고 길게 끄는 추임새를 냈다. 파우스트는 그 반응에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백성들의 짐을 짊어진 군주는 단지 사랑만이 아닌, 직위에 맞는 올바른 반려를 선택해야 하겠죠. 허나, 그렇다고 군주 또한 행복을 좇을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힘든 길이 되겠지만, 전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낙관적이구나. 너의 그런 태도, 나는 마음에 들어.”

피가로는 좀처럼 옳고 그름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는 상대의 의견을 묻고 충분히 들은 다음, 본인의 생각과 조합하여 간단한 평을 남겼다. 그것이 피가로가 남을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파우스트는 그런 피가로의 방식을 좋아했다. 가끔은 딱 잘라 냉정하게 말해주었으면 하면서도, 이것이 피가로 나름대로 타인을 존중하는 행동임을 알고 있었다. 호불호를 넘어서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니 당연한 것이다.

“아직 제게는 어려운 이야기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 알렉의 옆자리에 마법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균형이 올바르게 유지될 테니. 알렉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요.”

말을 마친 파우스트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곰곰이 생각했다. 알렉의 옆에 다른 마법사가 영원한 반려로서 함께하는 그날을 상상하는 것처럼.

파우스트는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입을 열었다.

“한편으로는 왕비가 마법사라면 차후 왕위가 걱정이네요. 만약 알렉이 병에 걸리거나 모종의 이유로 온전히 국사를 돌보지 못하게 된다면…….”

그 사후에, 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파우스트는 끝까지 잇지 못하고 낯을 흐렸다.

파우스트는 인간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전부 인간이었고, 아버지는 마법사로 태어난 자식을 부정하며 집을 나갔다. 자라면서 인간과 마법사의 수명이 다르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마법사로 사는 이상, 가족과 친지를 포함하여 동시대의 인간들 중 누구와도 삶의 흐름을 맞출 수 없었다. 하물며 지금은 전란의 시대였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먼 미래도 아닌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자리에 당사자는 있지도 않은데, 괜스레 못할 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무엄하게 느껴졌다.

그래, 인간과 마법사는 수명이 다르다.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아무리 무의식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간 얻은 교훈을 전부 잊고 그저 계속 함께할 거라고, 한날한시에 살다 죽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을까?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세차게 밀어닥치는 파도처럼 파우스트를 휩쓸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머리가 텅 비어 꺼낼 말도 없었다. 단지 불편한 침묵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파우스트는 망망대해에 내버려진 것처럼 막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가로는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도 크나큰 상심을 읽은 것 같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할까.”

“네, 부디.”

그래서 피가로가 적절히 끊어주었을 때는 무심코 안도의 숨을 쉴 정도였다.


전쟁을 지속하는 데에는 셀 수 없는 자금이 들어간다. 지금까지 전쟁으로 소모된 군수품은 점령을 마친 다른 영지에서 받아내거나 목표로 한 지역을 정벌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군도 여유가 없고, 새로 함락한 성도 마찬가지로 물자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마법사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일을 미룰 수 없는 노릇이다. 벌써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고 파우스트에게 항변을 하러 온 사람도 있었다. 파우스트는 최선을 다해 모두를 이해시키고자 했지만, 처음부터 불합리한 대우를 납득시킨다는 건 불가능했다.

여러모로 앞길이 막막한 상황이다. 승전 연회는 물론이거니와, 인간과 마법사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오가는 탓에 승리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조차 없었다. 골머리를 앓는 동안 물자 보충 문제는 뜻밖의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자세히 이름을 밝히지 않은 서쪽 국가의 귀족이 느닷없이 혁명을 지지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간밤에 펼쳐진 전투를 보았습니다. 인간과 마법사가 한데 어우러져 싸우는 모습이 풍문으로 도는 영웅왕의 설화처럼 인상 깊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열기 위한 혁명을 지지합니다.’

다음 날, 마력의 기색을 느낀 파우스트가 급하게 막사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물자는 정체불명의 편지와 함께 도착해있었다. 그나마도 출처를 파악할 수 있었던 건 편지에 적힌 내용 덕분이었다. 마법을 사용하여 옮긴 물자는 단순히 호의로 치부하기 힘든 양이었다.

마왕 오즈의 세계정복 여파로 한차례 쓸려나간 중앙과 달리 살아남은 서쪽 국가는 기나긴 연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혁명군의 수뇌부라지만 그들은 아직 어렸고,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었다. 서쪽의 마법사는 괴짜로 유명하다. 서쪽 국가에 발을 들인 적도, 서쪽 사람들을 만나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런 지식 없이 상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것이 우연한 행운인지 귀찮은 사건의 발단인지 알 수 없었던 그들은 막사에 모여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

“알렉, 어떡하지? 난 신뢰가 가지 않는데.”

“멀리서나마 손을 거들어 주겠다니, 말은 고맙지만 솔직히 외세의 도움을 받는 건 껄끄러워.”

모처럼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요즘같이 세력을 넓혀가는 시기에 외부에서 뻗어온 도움의 손길이라면 보통은 그럴 것이다. 생각이 같다는 걸 확인하자, 원래도 불안했던 마음이 한층 불편해졌다. 그런 와중에 오직 피가로만이 별 꼴을 다 보겠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복잡하게 고민하지 마. 어차피 유흥이다. 서쪽의 졸부들은 별생각이 없을 테니. 굳이 따지자면 일찍이 멸망한 왕조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이 우스워서일까…… 어차피 거절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겠지. 위기를 기회로 발돋움하면 돼. 지금은 마음껏 받아두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상대에 대한 은근한 멸시가 묻어났다. 피가로가 겉으로 드러나는 부정적인 견해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몹시 드문 일이라 신선한 기분마저 들었다.

피가로는 다른 짚이는 것이 있어 보였다. 그는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최북단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사람답지 않게 세계의 흐름을 세세하게 꿰고 있었다. 피가로가 감추는 것이 무엇이든 그건 중앙 출신인 알렉과 파우스트로선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종류일 것이다.

피가로는 필요에 의해 발언하거나 침묵했다. 그 필요란 대다수 피가로 본인이 아닌, 파우스트, 그리고 혁명군의 성패와 관련된 것이다. 피가로가 말해주지 않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 가끔은 아는 것이 독이 될 때도 있다. 알렉과 파우스트는 더 이상 피가로에게 묻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목숨을 건 혁명을 유흥거리 취급하다니, 이건 불쾌하군.”

“그래, 그렇지만 지금의 우리는 이걸 돌려보낼 수 없어.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야. 모든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피가로님의 말씀대로 조건 없는 호의라면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어.”

“나도 같은 의견이다. 좋아, 만장일치로 결정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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