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04


8.

“더 좋은 것을 대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아.”

찻주전자를 든 파우스트가 더없이 정성스러운 손놀림으로 차를 따랐다. 연한 찻물이 투박한 찻잔에 쪼르륵 소리를 내며 담긴다. 피가로는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참 고지식한 성격이구나. 언제까지 미안해할 셈이니?”

“윽, 죄, 죄송합니다.”

파우스트 본인도 느끼는 바가 있었나 보다. 그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여간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어떻게 군 생활을 하는 건지 신기할 정도로. 하지만 그런 속내를 직접 전하면 말도 안 된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겠지.

‘이래 봐도 다 큰 성인인걸요. 피가로님한테는 갓난아이쯤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를 미숙하고 귀엽게 봐주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피가로님 한 분밖에 없을 겁니다.’

아아, 들린다, 들려. 당황한 파우스트의 목소리가.

피가로는 제 눈치를 보는 파우스트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찻주전자를 기울이는 손이 흔들리며 자연스럽게 잔에 담긴 찻물이 출렁거렸다.

피가로는 그마저 즐겁게 지켜보았다. 이 아이의 꾸밈없고 솔직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첫 만남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제자를 아끼게 될 줄 몰랐는데. 역시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잔을 채우는 파우스트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앉아. 오랜만에 제자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네!”

파우스트는 서둘러 다기를 정리하고 스승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손님으로서의 접대와 관련해서 파우스트는 요지부동이었다. 사소한 부분은 신경 쓰지 말라고 벌써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파우스트는 여전히 피가로에게 더 좋은 것을 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파우스트는 자리에 앉아서도 편해 보이지 않았다. 두 손을 허벅지에 올리고 연신 무릎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피가로는 내리뜬 눈으로 탁자 밑의 상황을 살피며 먼저 잔을 들었다.

방금 우려낸 찻물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먼저 향을 맡고 찻물을 입에 댔다. 마찬가지로 잔을 잡은 파우스트가 물었다.

“입맛에 맞으신가요?”

“음.”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대답했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북쪽 나라에 위치한 피가로의 오두막에서 한 해 동안 머물면서 스승이 무엇을 입에 대고 즐기는지 유심히 관찰한 보람이 있었다.

오늘 사용한 찻잎은 얼마 전 레녹스의 도움을 받아 함께 고른 것이다. 남쪽 변경에서 나고 자란 레녹스는 식용이 가능한 식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서 종종 서로 배움을 주고받곤 했다.

레녹스와 함께 미리 말려둔 찻잎을 하나하나 끓여 마시며 ‘이것보단 이쪽이 더 입맛에 맞으실 것 같다’든지, ‘피가로님은 역시 단맛을 즐기지 않으시죠’라든지. 스승에 대해 여러 대화를 나누며 치밀한 과정을 거쳐 준비했다.

사심이 가득 담긴 즐거운 시간이었다. 거기다 고심 끝에 고른 것을 스승이 만족스럽게 받아주니, 과중한 업무에 지친 마음이 뿌듯함으로 충만해졌다.

입에 머금은 찻물의 성분을 분석하고 있는데, 제자의 만면에 화색이 돈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피가로는 보란 듯이 몇 모금 더 마시고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파우스트가 목을 축이기 위해 잔을 들었다. 제자의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무심코 행동했으나,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잔을 입에 대기 전에 만류했다.

“잠깐, 파우스트. 마시지 마.”

“……예? 어째서죠?”

“독이다.”

“독…….”

낯을 흐린 파우스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잔을 내려다보는 파우스트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우스트는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파우스트가 피가로에게 달려들었다.

“피가로님, 알면서 드신 건가요? 어째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당장 뱉으면!”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이 어찌나 흉흉한지, 등을 후려쳐서 강제로 토해내게 할 기세였다. 피가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벽을 세웠다.

“파우스트, 진정해. 목적은 내가 아니다. 나한테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보다는 문제에 집중하자.”

“그래도…….”

파우스트는 엄한 얼굴을 하다가도 금방 울상을 지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해선 끝이 없다. 한숨을 쉰 피가로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찻잎은 너와 네 종자가 준비했다 하니 문제가 없을 거고, 그럼 물에 독을 풀었겠군. 수원은 어디지?”

“근처 개울에서 퍼 왔습니다만, 설마 침입자를 막기 위해 강 전체를 오염시키는 선택을 할까요?”

“그래.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겠지. 미친 소리 같지만 현실이야. 파우스트, 너희가 이곳에 자리를 펴고 얼마나 지났지?”

“한 달 정도일 겁니다.”

“안쪽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온 거야. 독 안에 든 쥐가 결국 사람을 문 거지. 잘 버텼어. 승리가 목전이구나.”

피가로의 부드러운 칭찬에 파우스트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러나 안도하는 건 아주 잠시뿐으로, 시름에 잠긴 파우스트는 이마를 문지르며 막사 안을 배회했다. 그들의 혁명은 이상을 관철하고 계속된 동란에 지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 당연히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네, 하지만…… 걱정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동귀어진의 수를 쓰다니. 강이 오염되면 저쪽도 무사하지 않을 텐데요.”

“다른 곳에서 물을 길어올 수단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수원을 확인하러 가자. 정화할 수 있을지 미리 확인해두는 편이 좋을 거야.”

“네, 그럼 그 이전에 알렉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오겠습니다. 누군가 독을 섭취하게 되면 큰일이니까요.”

말을 마친 파우스트는 피가로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레노, 레녹스! 거기 있나?”

“파우스트님, 무슨 일이십니까? 

“따라와, 알렉에게 간다! 당장 보고해야 할 일이 있어!”

홀로 남은 피가로는 막사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인기척이 빠르게 멀어지며 레녹스가 파우스트에게 경위를 묻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같이 가는가 싶더니, 파우스트는 레녹스에게 지시를 내리고 따로 알렉에게 향했다. 멋모르는 병사들이 그 사이에 독을 섭취할 것을 염려한 걸 테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잠깐 생각하는 사이, 간간이 들리던 대화가 끊기고 완전한 적막이 찾아왔다. 할 일이 없어진 피가로는 맞은편에 있는 파우스트의 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들어 입에 대었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다 식은 찻물에선 원래라면 나지 않을, 쓰고 떫은맛이 났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세계를 지배하던 자가 홀연히 사라지며 대륙은 혼돈에 빠졌다. 나라 간의 분쟁, 국가의 내란, 인간과 마법사의 혐오, 증오와 차별 속에서 관계의 골은 깊어만 갔다.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혁명의 불길은 봉화처럼 치솟았다.

사람을 태우는 냄새는 결국 고기를 태우는 냄새와 같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는, 사람의 뼈와 살은 아무런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 높이 쌓은 장작은 언제나 꺼지지 않도록 잉걸불이 남아있었다.

한차례 싸움을 벌이고 나면 시체는 무더기로 나온다. 장례를 치르는 건 산 사람이 마음의 짐을 덜고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장작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폐해란 그런 것이다.

전쟁을 하며 가장 많이 쓴 마법은 공격 마법도, 치유 마법도 아니었다.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통각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이 되었다. 처음부터 잘 쓰던 마법은 아니었지만, 결국 많이 사용한 만큼 자연스럽게 손에 익었다.

전쟁을 하다 보면 돌이 되어 죽는 마법사를 지겹도록 많이 보게 된다. 싸움이 끝나고 어지럽게 파헤쳐진 진흙 위에 흩어진 수많은 돌을 기억한다. 아름다운 채로 붕괴되는 마나석은 마치 대지에 튀기는 빗물 같았다.

죽어서도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모든 죽음이 그렇겠지만, 특히 마법사의 죽음은 비참하고 허무하다. 시체가 남지 않기 때문에 사라진 줄도 모른다. 마법사는 자신을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죽은 얼굴을 보여줄 수도 없다. 그저 계속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제때 돌아오지 않는다면 죽었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게 된다.

‘파우스트님,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릴 수 없을까요? 그 녀석이 죽었을 리 없습니다. 큰 부상을 입고 복귀할 수 없게 되었겠죠. 지금쯤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면 분명 제 발로 돌아올 테니까…….’

‘아니, 예정대로 움직여야 해.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너도 알고 있잖아.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조차 없는 심각한 난전이었어. 물론 살아있을 확률도 있지만…… 그렇다면 때가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믿자.’

그런 희망적인 말 따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애써 부정했을 뿐,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대지에 흩어진 수많은 마나석 중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찾아낼 수 없다.

가벼운 농담을 나누고,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살아서 만나지도, 일방적인 작별을 할 수조차 없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어디선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기대어 위안을 얻어야 하는 걸까?

전장에서 전사한 마법사의 장례에 대해선 언제나 의견이 분분했다. 죽음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신 없는 장례를 치르는 것이 잔혹하다는 쪽과 생사와 관계없이 의미 없는 희망에 기대는 건 그만해야 한다는 쪽으로 파벌이 나뉘었다. 두 파벌의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 마법사를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심각한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정작 이 부분에 대해 인간은 마법사와 견해가 달랐다. 전쟁터에서 전사자의 시신은 대체로 골칫거리였다. 부상이 심한 병사나 참혹하게 죽은 시신은 쉽게 변질된다. 조금만 방치해도 금방 벌레가 끓고 사방에 악취를 풍겼다. 적시에 처리하지 않으면 전염병이 돌게 된다.

집단으로 매장하는 것은 산 사람에게나 죽은 사람에게나 모두에게 잔혹한 일이었다. 이것저것 따지고 나면 결국엔 화장밖에 답이 없었다. 손에 피를 묻힌 병사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뜨거운 불속에서 정화되리라 믿었다. 그들은 타오르는 장작 앞에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천국에 가게 해달라며 간절히 기도했다.

시체를 태우는 데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그것이 수백, 수천 구라면 거대한 장작불에 온종일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시체 타는 냄새에 심각한 정신이상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몇몇 인간들은 마법사의 죽음이 오히려 낫다고 말했다. 죽어서 동료에게 짐덩이가 되느니 돌이 되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마나석은 보기에 아름답고, 운이 좋으면 아군에게 먹혀 도움이 될 수 있다. 비록 제대로 회수되지 못하거나 소중한 사람에게 희망이란 이름의 고문을 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선 부정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마법사의 죽음을 선망했다.

파우스트는 모두의 의견에 적당히 공감했다. 하지만 그 또한 마법사인지라, 돌이 되는 마법사의 죽음보단 육신을 남기는 인간의 죽음을 훨씬 부러워했다. 관련 주제에 대해 알렉과 레녹스, 피가로는 각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솔직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호기심이 앞서 묻지 못하는 건 죽음이라는 것이 그만큼 무거운 주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다니, 아무래도 상대를 과소평가한 모양이야.”

“내 실수다. 순찰하는 인원을 늘리고 꼼꼼하게 확인했어야 했어. 이마저도 피가로님이 안 계셨다면 어땠을지…….”

“피해라면 지금도 만만치 않겠지만. 그 일 때문에 사기가 많이 떨어졌어. 배신자를 찾아서 본보기를 보여야 해.”

“배신자가 있을지 없을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이야. 이 많은 병사들을 전부 검증하여 배신자를 색출해낼 순 없어.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훨씬 나쁜 결과를 낳겠지.”

주둔지 안쪽에 위치한 알렉의 막사에서 열띤 토론이 오갔다. 알렉은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질렀고, 파우스트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알렉은 파우스트를 노려보다가 이내 진정하고 눈에 힘을 풀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말려줘서 고마워, 파우스트.”

“별말씀을.”

알렉이 생각을 바꿔주어서 다행이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파우스트는 그제야 어깨에 힘을 풀었다. 알렉과 의견이 갈릴 때는 종종 있었지만, 다른 사람과 입씨름을 벌이는 건 정말이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작년까진 병충해가 들끓더니 올해는 가뭄인가. 이거야 원, 엎친 데 덮친 격이군.”

“당장 겨울철을 걱정할 일이 아니야.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해. 당장 보름 뒤에 먹고 마실 게 있을지도 모르겠어.”

알렉은 먼저 자리에 앉아 파우스트에게 맞은편의 자리를 권했다. 파우스트는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앉았다.

“동식물을 섭취하는 건?”

“불에 타지 않은 식물과 살아있는 동물이 있다면 말이지.”

알렉은 여러 표시가 그려진 지도를 펼쳐놓고 그들이 있는 곳을 가리킨 다음, 손을 남쪽으로 죽 내리그었다.

“우선은 우리를 따르기로 한 남쪽 변경의 영주들이 도움을 주기로 했어.”

“그쪽도 좋은 상황은 아니지? 얼마 전에 도적떼의 습격으로 노략질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제안한 게 아니야. 그쪽에서 먼저 돕겠다고 나섰어.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겠지.”

“숭고하다니…….”

알렉의 앞이라 조심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즐거워서 나는 웃음이 아닌,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웃음이었다. 피가로의 말대로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은 궁지에 몰려있기도 했다.

어떻게든 물자를 보급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상황이 불투명했다. 알렉이 고개를 들어 파우스트를 쳐다봤다. 그는 파우스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식량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라면 하나 있잖아. 파우스트, 마법사는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마력으로 버틸 수 있다고 했지?”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다. 파우스트는 뜸을 들이며 어렵사리 대답했다.

“……그랬었지.”

“그렇다면 인간들에게 먼저 식량을 배급한다. 인간은 식사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두에 서는 부대가 힘을 못 쓰고 빌빌거리면 곤란해.”

지휘관으로서 옳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자꾸만 무언가가 마음에 밟혔다. 파우스트는 원인을 찾기 위해서 떠도는 생각을 입 밖에 냈다.

“마법사라고 오래 버틸 수 있는 건 아니야. 모두가 마력으로 허기를 달래는 방법에 능한 건 아니고.”

“괜찮아. 최대한 길어지지 않도록 수를 쓸 테니까.”

알렉이 다 생각이 있겠지. 무작정 믿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일하게 두고 볼 수 없었다. 최선의 선택이라지만, 이건 반드시 안 좋은 말이 나올 것이다. 파우스트는 몹시 싫은 기분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차라리 동쪽 제후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때?”

“동쪽 국가는 내란으로 힘든 상황이다. 우리에게 손을 빌려줄 여유는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 분야에 대해선 자신보다 알렉이 정확했다. 동쪽 국가는 이방인에게 배타적이다. 내란이 아니더라도 과연 중앙 국가의 일에 손을 들어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일단은 버티자. 지금 상황에서 물러설 수는 없어.”

“시간을 끄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잖아. 차라리 선제공격을 하는 건.”

알렉은 단호하게 파우스트의 말을 끊었다.

“지난 전투로 알았잖아. 저쪽도 마법사가 있어. 그것도 꽤 강력한 마법사가. 성을 방호할 마법사가 있으니, 우리의 전략에 호락호락하게 당해 주진 않을 거야.”

그 말과 동시에 파우스트가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내가 가서 방호벽을 부술게. 그거면 되겠지?”

알렉이 미간을 모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반응이었다.

“상대 전력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네가 일선에 서는 건 위험해, 파우스트.”

파우스트는 결연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시기를 미뤄봤자 피해만 커질 뿐이다. 물자에 제한이 있는 이상, 고립된 건 그쪽이나 이쪽이나 마찬가지였다.

파우스트가 가장 걱정하는 건 식량 배급의 우선권으로 생기는 부대 내 인간과 마법사의 갈등이었다. 부하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때는 그들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게 파우스트의 지론이었다.

“알렉, 미리 말하지만 난 죽으러 가겠다는 게 아니야. 되든 안 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막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마법사를 이길 수 없어.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같은 마법사뿐이야. 대신, 네가 부대를 이끌고 내가 성벽에 도달할 수 있도록 나를 엄호해 줘. 화살이 닿지 않도록 최대한 높게 날아오를 테니, 나한테 이목이 집중되지 않도록 주의를 분산시키는 거야. 할 수 있지?”

파우스트는 망설임 없이 펼쳐놓은 지도를 접었다. 이미 어느 정도 짜인 마당에 복잡한 작전은 필요 없었다. 알렉이 이끄는 혁명군에서 파우스트는 단연 최강의 말이다. 그가 선두에 서는 한, 실패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예리한 빛으로 번득이는 자색 눈은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없었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렉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너 어쩐지 점점 피가로님의 말투를 닮아가는 것 같네. 알겠어. 못 할 거 없지. 내게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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