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 기한을 넘긴 시신이 많습니다. 효수 당한 목을 치워주지 않았을 정도면 치안이 아주 나빴겠죠. 자잘한 궐기도 잦았을 겁니다.”
“엉망이구나. 분명 구실을 만들어 강제로 징집을 했겠지. 그럼 우리는 성 쪽으로 가볼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우뚝 선 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수로, 그것도 마법사들끼리 사찰을 나온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디선가 망을 보고 있을 병사를 의식하여 마법을 걸고 은밀하게 접근했다.
피가로는 지저분한 성벽에 손을 댔다. 검은 먼지와 녹슨 쇳물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느긋한 손길로 성벽을 살펴본 피가로가 입을 열었다.
“성벽이 높고 단단하네. 이건 외부에서 부수긴 힘들겠어.”
“늘 하던 대로는 어렵겠죠?”
“마력으로 만든 불덩이라는 건 결국 거리가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해지니까. 성벽에 도달할 정도가 되면 너무 약해져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을 거야.”
피가로는 어느새 깨끗해진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듯 눈을 감고 집중했다.
“힘으로 뚫자면 뚫지 못할 것도 없지만, 이대로 틀어박혀 농성한다면 피해가 커지겠어.”
이번에는 파우스트가 성벽 가까이 다가갔다. 파우스트는 직접 성벽을 두드려보고 강도를 가늠했다. 피가로의 말대로였다. 마법사를 동원하여 막아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벽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수를 쓰는 것과는 관계없이 아군이 가진 힘으로는 뚫어내기 어려웠다.
되도록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병사들의 사기도 문제지만, 특히 얼마 없는 마법사의 수는 더 이상 줄어선 안 된다. 자칫하다간 유사시에 비장의 작전조차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소수 정예로 암습을 해야겠네요. 혼란을 틈타 신속하게 침입하여 영주의 목만 베어낸다면 군은 자연스럽게 와해될 겁니다.”
파우스트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성 외곽에 마법진을 그려놓죠.”
”촉발 마법인가?”
피가로가 자세를 바꿔 팔짱을 꼈다. 명백히 흥미가 있는 태도였다. 파우스트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과연 피가로님이다. 무슨 마법을 사용할 건지 말하지 않아도 쉽게 의중을 읽어냈다. 꼭 생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편했다. 파우스트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가벼운 기폭제로 크게 발화하도록 보조 마법진을 덧대어 장치할까 고민 중에 있습니다만…….”
“연쇄 작용을 노리고 있겠지. 평범한 폭발보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을 거야. 좋은 생각이구나. 그렇게 하자.”
“지반은 괜찮을까요? 성 안에 있는 사람들도 걱정이고, 병사들이 들어올 통로를 만들어주어야 할 텐데.”
“적당히 튼튼해. 잘 버텨줄 거다.”
파우스트는 잊고 있던 게 떠오른 사람처럼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성벽 위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모았다.
“아, 망루에 감시자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진을 설치하죠? 들키지 않도록 인식 저해 마법을 걸어볼까요? 그것도 안쪽에 마법사가 있다면 쉽게 감지될 텐데.”
눈을 동그랗게 뜬 피가로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얼마만큼 큰 마법진을 그리려고?”
“성 전체를 감쌀 정도로…….”
안색이 흐려진 파우스트가 말을 더듬었다. 스승이 소리 내어 웃으니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잔잔하게 미소 짓는 모습은 많이 봤어도 지금처럼 크게 웃는 건 낯설었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하면서도 무언가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것 같아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불편한 침묵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웃음을 그친 피가로가 눈가를 훔쳐냈다.
“파우스트, 잊은 거니? 우리는 마법사다. 방법은 무한하니 생각에 제한을 두지 마.”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을 잡더니, 시원하게 뻗은 손가락을 얽고 커다란 손바닥으로 천천히 손등을 감쌌다. 파우스트는 글자를 처음 배우는 학생처럼 피가로의 손놀림에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난 정말 무식하게 싸우는 마법사를 알고 있어. 미의식이라곤 조금도 없이, 그저 승리하기 위한 싸움만을 하지. 마법은 마음으로 쓰는 거야. 그러니 상식에 얽매일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어. 파우스트, 상상을 멈추면 안 돼. 너의 마음속에서 네가 바라는 일은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어. 영특한 너라면 이해했겠지?”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을 움직여 성벽에 보이지 않는 표식을 덧그렸다. 그것은 아주 작은 마법진이었다.
아, 그렇구나. 위대한 스승의 자랑스러운 제자답게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의도를 이해했다. 깨달음을 얻은 눈이 꽃이 개화하듯 크게 뜨였다.
“네!”
피가로는 힘차게 대답하는 파우스트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우스트는 품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 곧장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손바닥을 베어 상처를 낸 뒤, 그것으로 성벽에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했다. 피가 부족하면 강하게 주먹을 쥐어 혈액을 짜냈다.
“매개를 사용해도 들키지 않을까요?”
성벽에 달라붙어 마법진을 그리는 파우스트는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얼마나 몰두하고 있으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세심하게 마법진을 설계하는 것을 옆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
“들키지 않을 거야. 이 성엔 마법사가 없으니까. 규격 외의 힘을 보여주는 마법사란 존재를 무턱대고 성 안에 들일 수 없었겠지.”
“벌써 마력을 탐지하신 겁니까? 역시 피가로님.”
파우스트는 오늘만 벌써 두 번째로 감탄했다. 성벽을 더듬어 빈틈을 찾아낸 그는 근처에 빠르게 마법진을 완성시켰다. 계획했던 대로 보조 마법진도 여러 개 겹쳤다. 확실히 그릴 면적이 적으니 어려운 작업도 금방 끝이 보였다.
오랫동안 한곳에 집중한 탓인지, 아니면 매개를 너무 많이 사용한 건지, 약간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아니면 단순히 날이 더운 게 문제일지도. 파우스트는 팔 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급격히 나태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피가로가 파우스트를 끌어당겼다.
“돌아가기 전에 잠깐 쉴까?”
“그래도 될까요?”
“안될 게 뭐 있나. 아직 해가 지기 전까진 여유가 있어.”
두 사람은 땡볕 아래에서 벗어나 근처의 그늘로 향했다. 마법진을 그린 위치를 확실하게 외우고, 피가로가 이끄는 대로 앙상한 나무 밑에 섰다. 그들이 그늘로 택한 나무는 방화에 휩쓸렸는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마저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높이 뜬 해가 가려지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으니 독기가 서린 악취도 바람을 따라 은은하게 실려 왔다. 파우스트는 허리춤에서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를 빼내 목을 축였다.
“이곳의 성주는 겁이 아주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지지기반을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처형을 반복하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신에 구더기가 들끓고 있어요.”
“악취가 지독하군. 이곳을 점령하는 즉시 물자를 챙겨서 떠나자. 전염병이 돌 거야.”
“땅을 정화하는 건 어떨까요? 결국 이곳도 누군가의 터전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하지만 파우스트, 너도 알다시피 땅을 정화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많은 마력과 섬세한 작업이 요구돼. 진군이 늦춰지게 될 텐데 괜찮겠어?”
피가로의 염려는 타당했다. 파우스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자리했다.
“인민의 영웅이잖아요. 그 정도는 어떻게든 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파우스트는 세간에서 혁명군을 어떻게 칭하는지 알고 있었다. 알렉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가만히 숨죽인 채 힘겨운 현실을 간신히 견디고 있는 사람들이, 괴로운 나날 속에서 모두가 품는 기대를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언젠가는 그 기대에 무너질 지경이 되어도 억지로 버텨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와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다. 애초에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목적을 이루기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혁명이고, 알렉과 자신이 품은 결의니까.
약속을 어기면 마력을 잃는 마법사는 약속이라는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향한 결의만큼은 약속이라는 틀에서 교묘하게 피해갈 수 있었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스스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알렉을 도와 그의 곁에서 혁명을 승리로 이끌겠다고. 알렉과 자신이 그랬듯이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을 이루겠다고.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돕지.”
“앗,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런 번거로운 일을 피가로님께 맡겨도 될는지…….”
“신경 쓰지 마. 마법사는 자연의 친구잖아. 이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존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
말이 미묘하게 바뀐 것 같지만,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피가로가 자신의 설득으로 생각을 바꿔준다면 그저 감사한 일이다.
알렉이 이끄는 혁명군의 마법병단은 파우스트에게 대거 의지하고 있었다. 나이부터 성별까지, 다양한 마법사가 중앙 전역에서 골고루 모였다고 해도 기초적인 마법조차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래선지 가끔은 자신의 역할이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피가로를 만난 건 인생에 다시없을 행운이었다. 그의 스승은 무척 온후하고 마음이 따뜻한 마법사였다. 언제나 곁에서 부담을 덜어주고, 지켜보고 응원해 주며, 이런 사소한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거들어준다. 아주 조금이지만 어깨에 얹힌 짐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뺨이 절로 느슨해지며 어깨에 힘이 풀렸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옆얼굴을 몰래 훔쳐봤다. 피가로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지, 매끈한 낯으로 단정하게 땋은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넘기고 있었다. 그 유려한 모습을 지켜보며 파우스트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떠올렸다.
때는 피가로가 종군한 지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피가로는 군의 총책임자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알렉 대신 파우스트의 안내를 받아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진영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세히 묻지 않았구나. 파우스트, 너희는 마법사를 어떻게 사용하지?”
“보통은 후방에서 위력이 강한 마법으로 선제공격을 하거나 아군을 보조합니다.”
“전투의 시작을 여는 역할이군. 꽤나 중요하네.”
“네. 특히 요새를 공략할 때 효과적입니다.”
“그렇다는 건 전면에 나서는 일은 전혀 없다는 건가.”
“백병전은 제가 이끄는 소수의 병사만 참여합니다. 마법사는 수가 적어 귀하기도 하고, 직접 몸으로 뛰어들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져서요.”
“요새를 공략할 때 쓰는 방법을 확인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피가로가 책사로서 혁명군에 합류한다고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설득 과정을 모두 지켜봤음에도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일 년간 북쪽 나라에서 지도 편달을 받은 파우스트가 군에 합류했을 때부터 알렉은 어떻게든 피가로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당시 승승장구를 반복하던 혁명군은 막다른 길에 놓여있었다. 야습을 당해 많은 부하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어진 전투도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고 후퇴를 반복하는 상황이었다. 여러 방안을 제시해 봤지만, 요긴하게 쓰일만한 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알렉이 먼저 제안한 것이다.
‘파우스트, 네 스승인 피가로님을 뵈러 가자. 더 이상 동료를 잃을 순 없어. 자존심을 내려놓고 현인께 도움을 구하는 거야. 기왕 이어진 인연이잖아. 얻어낼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내자.’
파우스트는 망설였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알렉은 노골적으로 피가로를 이용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교육 기간 동안 스승이 얼마나 위대한 마법사인지 몸소 겪어 알게 되었다. 동시에 피가로가 마법사로서 인간과 어울리며 겪은 일들을 전해 들었다. 그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며 답을 얻기 위해 까마귀처럼 끊임없이 쪼아대는 사람들. 그런 무도한 무리에 포함되고 싶지 않았다.
까마득한 절벽 위, 눈 덮인 산골짜기에 은거한 피가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참여하여 얻을 것이 없었다. 평화로이 지내는 스승을 끌어들이는 것은 순전히 이쪽의 욕심이었다. 처음에 파우스트는 알렉을 만류하려 했으나, 결국에는 늘 그랬듯 친우의 뜻에 따르게 되었다.
서로 힘든 시기였다. 알렉이나 자신이나 각자 맡은 막중한 임무에 짓눌려 숨을 쉬기조차 버거운 순간이었다.
파우스트가 아는 범위에서 피가로는 가장 강하고 현명한 마법사였다. 피가로가 그들을 돕는다면 그만큼 든든한 일이 없었다. 게다가 한편에는 북쪽 나라에서 수업을 듣던 시절처럼 스승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피가로가 와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파우스트는 미리 마법진을 설치해둔 장소로 피가로를 안내하며 새삼스레 스승의 은혜에 감사했다.
“이처럼 완성된 마법진에 다수의 마법사가 일제히 마력을 불어넣는 겁니다. 주가 되는 마법사가 대략적인 마법의 형태를 구상하고 발동을 하면 다른 마법사들이 마력을 보태주는 방식이죠.”
“현명하네. 이거라면 약한 마법사도 참여할 수 있겠어.”
피가로는 마법진이 그려진 땅을 더듬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태도였다. 그것이 몹시 의외였던 지라, 파우스트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피가로님이 알지 못하는 영역도 있군요.”
“전혀 모르지는 않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너희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마. 약할수록 뭉쳐야지. 그게 맞아. 무리를 짓는 건 인간이 마법사보다 잘 하는 행동이야. 자기 자신을 지킬 힘도, 긴 수명도 없지만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피가로는 말을 마치고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역시 비효율적이군.” 고민 끝에 입을 열고서 흘긋 쳐다보는 것이, 이쪽이 상처받지 않도록 상냥한 표현을 고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피가로는 가끔 그랬다. 알렉과 마찬가지로, 파우스트는 스스로의 의지로 혁명을 일으켰다. 나이는 어려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가 아닌데, 피가로는 이따금 불필요한 배려를 해주곤 했다. 충분히 기분 나쁠만한 일이다. 그러나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러한 배려를 받아본 적이 없는 파우스트는 자상한 스승이 마냥 고마웠다.
“아무래도 방법에 제약이 많죠. 적은 마력이라도 좋으니 모든 마법사가 보다 정밀한 컨트롤을 할 수 있다면 다른 병법을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지금부터라도 마법사들을 모아 가르치면 어떨까요?”
“네 휘하에 있는 마법사들을 말하는 거라면, 무리야. 그들은 가진 마력이 너무 약해. 교육을 통해 방법은 가르칠 수 있지만 태생적인 한계는 넘을 수 없어. 그보다는 장수 정도의, 강한 마력을 지닌 소수의 마법사들을 챙기는 편이 나을 거야.”
피가로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려놓은 마법진의 일부를 수정했다. 껄끄러울 법도 하건만, 타인의 마법에 개입하는 손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익숙했다.
“그래, 그런 거라면 나도 조금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이어진 말에 깜짝 놀란 파우스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가로님이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가볍게 손을 얹는 정도라면.”
“피가로님이 함께해 주신다면 무엇이든 불가능한 건 없겠죠!”
지원군으로 왔지만 피가로는 초대받은 손님에 가까웠다. 피가로는 균형을 흔들만한 일은 하지 않는다. 단지 몇 가지 전술과 관련된 조언을 하고, 군의관으로서 막사에서 병사들을 치료했다.
피가로가 가진 마력과 쌓아 올린 지식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 어찌나 유능한지 숨만 붙어있으면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일반 병사들 사이에선 피가로가 알렉의 뜻에 감화되어 그를 따르기 시작한 성자라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돌았다. 과하게 부풀어 와전된 소문은 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군 전체를 통솔하는 알렉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 그는 소문이 퍼지도록 내버려두었다. 무엇이든 이용하겠다는 친우의 말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이 거북한 심정이 되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파우스트의 강렬한 반응에 피가로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나 믿어주는 건가.”
“당연하죠. 무려 피가로님이신데!”
“네게 그런 말을 듣는 건 나쁘지 않네.”
기억 속에 남은 순간을 멍하니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피가로가 한 방향으로 서서히 기우는 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충분히 쉬었으면 슬슬 돌아가자.”
“네, 피가로님.”
나무둥치에 앉아있던 파우스트는 옷을 털며 허둥지둥 일어섰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돌아갈 때도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법을 걸었다. 그들은 합류하기로 했던 마을 입구로 향했다.
“피가로님이 함께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전하고 싶은 인사는 언제나 가장 방심했을 때에, 생각을 거치지 않고 불쑥 튀어나왔다. 피가로는 고개를 돌려 파우스트를 쳐다봤다. 파우스트는 시선을 느꼈지만 일부러 고집스럽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분명 바보같이 풀어진 낯을 하고 있을 것이다. 기대고 싶은 마음은 사실이지만, 스승 앞에서 대놓고 칠칠맞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이런 얄팍한 발버둥을 피가로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는 파우스트를 위해 기꺼이 모른척해 주었다.
“밤에는 성대한 불꽃놀이를 볼 수 있겠군.”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부디 지켜봐 주십시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너는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어.”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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