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은 차기 왕비 자리에 파우스트를 내정했다. 어차피 국가를 건설하는 순간, 정략혼 제의는 빗발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권력의 흐름에 편승하려 할 것이다. 파우스트와 결혼하는 건 혁명 파트너의 공로를 챙기고, 마법사의 권리를 챙기며, 나아가 인간과 마법사를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확실히 반드시, 라는 표현은 옳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공치사라곤 해도 여기에 파우스트의 의사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파우스트는 이용당하는 것이다.
알렉은 설득을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가장 친한 친우이자 오른팔에게 경멸당하고 싶지는 않았겠지. 그래서 미움 받을지도 모르는 역할을 이쪽에 떠넘겼나.
자기 주관이 뚜렷한 파우스트에게 전쟁이 끝난 뒤에 오랜 친우와 혼인하여 왕비의 자리에 오르라 하면 그는 당연히 기함을 토하며 거절할 것이다. 상황에 따라선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지금의 파우스트는 곱상한 얼굴을 하고 있다곤 하나, 투박한 군인에 불과했다. 지금 모습대로 혼사를 치르면 아무도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모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적당한 모습을 취해야 한다. 그걸 위해 여인의 몸으로 자기 자신을 바꾸는 거다. 도장을 꽉 눌러찍듯, 불편한 틀에 맞춰 행동을 하나하나 교정하고 맞춰가는 것이다.
알렉은 백성의 기대를 받는 미래의 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두가 환영하는 성대한 국혼을 위해, 정치적 선전을 위해 일생에 한 번뿐인 혼약마저 이용할 생각이었다.
도와주십사 청하는 알렉에게서 파우스트를 향한 연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의에 사적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가능성도 열려있었다. 아무리 마법사가 성별과 무관하기로서니, 성애의 감정이 없는 친우와 결혼하겠다는 건 굉장히 독특한 발상이었다. 파우스트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본인도 자각하지 못했거나 단순히 피가로 앞에서 잘 숨겼을 확률도 있다.
파우스트를 향한 알렉의 감정이야 어쨌든, 피가로는 그를 도와 파우스트를 교육하면 되는 문제였다. 늘 그래왔듯이.
피가로는 항상 하던 수업에 불필요한 과목을 교묘하게 편성했다. 파우스트는 군의 지휘관으로서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곧잘 수업을 들었다. 때로는 너무 피곤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날도 있었지만, 제비꽃처럼 청순한 눈동자만큼은 또랑또랑하게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아이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아이를, 다른 이들에게 하던 대로 약삭빠르게 속여 이용해먹고 있었다.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여러 인간들을 만났다. 불신과 배신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의 약속은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약속을 어기면 마력을 잃는 마법사와 달리 그들은 잃을 게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가벼운 말로 쉽게 약속을 하고, 순간의 변심으로 약속을 어겼다.
양심의 가책이라니, 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단지 잠깐의 심리적 불편함을 얻는 것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터였다. 그러기에 인간을 온전히 신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피로 덧칠된 경험을 단지 듣기에 아름다운 이상론으로 하루아침에 덧씌우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이라는 것에 대해 피가로는 여전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보여줬으면 하는 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린 듯이 완벽한 제자인 파우스트와 그의 친우가 만들 새로운 세계를.
7.
“넌 변신 마법에 정말이지 재능이 없구나.”
쓰게 웃은 피가로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한숨 섞인 목소리에 파우스트는 허둥지둥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죄, 죄송합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시정하겠습니다.”
눈앞의 제자는 피가로가 제시한 대로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둥근 얼굴과 적당히 굴곡진 몸매, 품이 넉넉한 옷차림이나 튀어나온 앞섶 등. 원래의 형태를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 파우스트가 생각하는 여성의 모습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첫 시도치고는 그럭저럭 봐줄만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다. 외관을 바꿔도 가장 중요한 행동거지가 그대로였다. 어깨너비에 약간 못 미치게 벌어진 다리와 딱딱한 자세가 순전한 여성이라기보다는 여성의 몸에 갇힌 남성이란 느낌을 주었다.
마법의 사용이 미숙하다기보다는 그냥 파우스트라는 사람이 워낙 투박하다. 뭐, 육체의 변화로 몸에 익은 버릇이 변하는 것도 이상한가. 피가로는 적당히 납득했다.
눈에 안 띄는 부분은 천천히 교정하기로 하고, 먼저 부족한 것부터 하나하나 짚어주기로 했다. 스승 된 도리로 파우스트가 차기 왕의 혼약자로서 조금의 흠도 남지 않도록 꼼꼼하게 가르쳐야 했다.
“좋은 태도다. 우선은 이쪽.”
피가로는 턱을 매만지며 파우스트 주위를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뾰족하게 세운 검지가 허리를 툭 건드렸다. 간단한 터치에 흠칫 놀란 파우스트가 반사적으로 등을 곧추세웠다.
“허리는 가늘게 하는 편이 좋아. 여성의 몸은 곡선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여기, 머리카락은 살짝 늘려볼까?”
피가로의 손끝이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을 스쳤다. 흐르는 물처럼 부드러운 손길에 투박한 머리끈이 풀리더니, 아까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흘러내렸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길어진 파우스트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쓸어넘겼다. 피가로는 그대로 손을 떼지 않고 무언가를 확인하듯 어깨와 팔 주변을 배회했다.
얇은 옷 너머, 가만히 있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날개뼈 언저리를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덮었다. 파우스트는 어색함을 참기 힘든 듯이 몇 번이고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는 파우스트와 달리 피가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낭랑한 웃음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피가로는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차분하게 풀어진 입가만이 그가 방금 전까지 미소를 머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피가로가 고개를 흔들자 바다색 머리카락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서 출렁거렸다. 피가로의 머리카락은 끝자락으로 갈수록 거품이 섞인 파도처럼 연한 색으로 물들었다. 무한하게 펼쳐진 푸른 하늘처럼 낯설고도 익숙한 색채였다. 무심코 손을 뻗어 잡을 뻔한 것을 주먹을 말아 쥐는 것으로 참았다.
“자, 봐.”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손목을 잡고 밝은 곳으로 이끌었다. 달빛 아래 유연한 몸을 가진 여성이 서있었다. 파우스트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난 피가로는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두 팔을 벌린 채 그를 마주 보았다.
얇은 팔다리도, 한 팔에 쏙 들어올 것 같은 가느다란 허리도. 전체적으로 가냘프기 짝이 없다. 남성일 때도 한 폭의 명화를 연상케 하던 사람이다. 여성의 모습을 한 피가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백이면 백, 전부 돌아볼 정도로 뛰어난 미인이었다.
저도 모르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꼭 무례한 짓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님, 하고 작게 신음했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굉장히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의식한 다음부터는 차마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었다. 하물며 자세히 본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쳐다보는 척 그의 어깨너머로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파우스트, 눈 돌리지 말고 제대로 봐야지.”
그러자 곧장 따끔한 충고가 날아들었다.
“어때, 할만해?”
“전혀요…….”
피가로의 말이 옳았다. 완벽한 스승에 비해 자신은 한참 미숙했다. 어색하다 못해 추잡한 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피가로 앞에 모습을 내보이는 것이 겸연쩍어서 자꾸만 두 팔로 몸을 감싸고 움츠러들게 되었다.
얼마 없는 귀한 수업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많이, 빠르게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사소한 일로 쩔쩔 매는 자신이 싫어졌다.
뜨겁게 끓는 의욕에 현실이라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기운이 빠진 파우스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런 마법을 꼭 알아야 할까요?”
“살다 보면 필요할 거야. 특히 어딘가에 잠입할 때, 굉장히 유용해.”
그 말대로 피가로는 단 한 번도 불필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장은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결국 어딘가에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스승이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온 대마법사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파우스트, 넌 아직도 네 위치와 힘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구나. 금방 얼굴이 팔릴 거다. 설령 네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을 전부 죽인다고 해도 언젠가는 정보가 새어나가겠지. 만약을 대비한다고 생각해.”
오늘도 스승은 평온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파우스트는 속으로 한숨을 폭폭 쉬었다. 조금이라도 어수룩한 이미지를 벗고 싶었다. 오로지 그런 일념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고양이의 모습이라면.”
“고양이?”
파우스트의 말이 의외였는지 피가로의 독특한 동공이 커졌다.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파우스트는 순순히 인정하고 재빨리 변명했다.
“제가 살던 마을에 길고양이가 많았거든요. 무심코 돌봐주다 보니 자신이 생겼습니다.”
“자연스럽게 관찰을 하게 되었구나. 역시 넌 상냥해.”
“……네, 그런 거죠.”
파우스트는 한동안 뜸을 들였다. 바로 자세를 잡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었으나, 파우스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피가로님. 그, 고양이로 변신할까요?”
“아니, 됐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넵…….”
피가로는 성큼성큼 걸어 파우스트 앞에 섰다. 거리가 가까웠다. 갈 곳 잃은 시선이 또다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했다. 피가로는 흠, 하고 목울대를 울리며 파우스트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턱 선은 조금 더 갸르스름하게 하는 편이 좋겠어. 넌 청순하니까 그쪽이 더 잘 어울릴 거야.”
“이렇게, 요?”
“응, 지금이 딱 좋네.”
피가로는 파우스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계속 피하기만 해선 도무지 진전이 없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어렵사리 다시 시선을 들자, 눈이 마주쳤다.
“파우스트, 넌 아름답구나.”
피가로는 여전히 파우스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저는 별로…… 피가로님이야말로 아름다우세요.”
서로를 칭찬하는 분위기가 몹시 낯간지러웠다. 하지만 결코 빈말이 아니니까. 파우스트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헛기침을 했다. 피가로는 눈매를 가늘게 휘었다. 빛을 받은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게 실로 장관이었다.
뒤로 물러선 피가로가 발끝으로 흙바닥을 그었다. 피가로는 바닥에 남은 작은 반원 자국과 함께 다시 남성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주문조차 외우지 않았다. 형태를 바꾸는 것보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쉽다지만, 파우스트는 절대 피가로처럼 할 수 없었다.
뛰어난 마력 컨트롤에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뒤늦게 피가로를 따라 본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깜짝 놀란 파우스트가 허둥지둥 주문을 외우려고 할 때였다.
“아, 그럼 저도……!”
“그대로 있어.”
피가로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파우스트, 손을.”
그는 가볍게 몸을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춤을 청하는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정중했다. 파우스트는 머뭇거림 끝에 피가로의 손을 맞잡았다.
“이것도 잠입을 위한 수행의 일환인가요?”
“그래.”
피가로는 명쾌하게 답했다. 그는 파우스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스승의 지시대로 이것저것 맞추다 보니 키가 더 작아진 걸지도 모른다. 눈높이가 훨씬 크게 차이가 났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 피가로의 안색을 살필 수 있었다.
파우스트는 피가로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며 물었다.
“어째서 마녀의 모습으로 추지 않으시는 건가요?”
“이쪽이 더 익숙하니까.”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피가로는 긴 말을 하지 않고 온화하게 파우스트를 이끌었다. 늘 하던 대로 자유롭게 추는 춤이 아닌, 격식에 맞춘 춤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는 분야였지만, 몸을 쓰는 일은 무엇이든 자신 있었던 덕에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법 수련이라기보다는 사교 교육에 가까웠다. 잠입을 위해서라기엔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위대한 현인이기에 의문은 잠시 접어두었다.
알렉이 부탁이라는 형태로 도맡긴 파우스트의 교육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교육보다는 차라리 신부수업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렸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만 가르치진 않았다. 알렉의 부탁보다 우선시되는 게 기존에 이어가던 수업이었다.
열댓 명의 마법사가 일제히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았다. 파우스트를 필두로 한 마법사 부대의 정예 병사였다. 이번에는 빠른 사전답사를 위해 특별히 비행이 가능한 마법사를 차출했다.
빗자루를 사용하여 비행하는 일은 별사탕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마법의 기초라고 할 수 있지만, 스승을 두지 않은 약한 마법사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과거의 파우스트는 그들처럼 스승을 두지 않은 마법사였으나, 그럼에도 스스로 비행을 하는 법을 깨우쳤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서 뼈를 깎는 노력이 요구되었다.
현재는 별사탕을 만드는 법도,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나는 법도 전부 피가로에게 지도 받아 실력이 좋아졌다. 그러니 지금 파우스트의 뒤를 따르는 마법사들은 처음부터 독학하거나 그에게 조언을 받아 스스로 발전한 이들이었다.
사전답사라고 하지만, 적진에 발을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일에 선뜻 나서준 귀중한 인재들이다. 파우스트는 부하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간의 수행이 헛되지 않았는지, 꽤 서두르고 있음에도 낙오되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정면을 바라본 파우스트가 입을 살짝 벌렸다. 옆에서 나란히 날던 피가로는 작은 하품을 놓치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그늘이 진 퀭한 눈가를 문질렀다. 지난 밤 늦게까지 가르침을 받은 탓에 잠이 부족해 보였다.
그것도 그렇지만, 역시 잠자리를 설친 것 같다.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유심히 지켜보고 있자, 눈치 빠른 파우스트는 금방 깨닫고 머쓱하게 웃었다. 가만 보니 얼굴이 약간 붉어져있었다.
제자가 부끄럼을 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사실 나는 지인의 곤란한 얼굴을 보는 걸 즐길지도 몰라. 그러고 보면 예전에 치렛타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다. 그리운 추억을 떠올린 피가로가 코끝을 울려 웃었다.
파우스트는 짧게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곁에서 웃음소리를 들은 듯했다. 다시는 하품을 하지 않도록 아랫입술을 꽉 깨문 것이 사랑스러웠다. 일부러 가까이 붙어 날았다. 서서히 밀착하자 어쩔 모르며 조금씩 멀어진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적당히 장난을 치고 있으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파우스트님,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내릴까요?”
뒤를 바짝 쫓던 레녹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까마득한 지상을 향해 눈을 돌리니 작은 점으로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파우스트는 손을 높이 들어 지시를 내렸다.
“하강한다!”
“예!”
우렁찬 대답이 들렸다. 파우스트와 피가로가 먼저 지상에 착지하고, 뒤이어 레녹스와 다른 마법사들이 저마다 신발 밑창과 빗자루로 바닥을 끌며 부드럽게 착지했다.
입구부터 흉흉한 기미가 보이더니, 마을 상황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을은 이미 한차례 불태웠는지 잿더미가 되어있었다. 당연하게도 주민들은커녕 수비군조차 보이지 않는다.
곳곳에 지붕이 내려앉은 집이나 완전히 무너진 잔해 따위가 널려있었다. 탐색이나 탐문 등의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을 듯했다. 마법사라면 정령이나 자연과 교감하여 무엇이든 얻어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앞장선 피가로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작은 마을이야. 눈앞에 성이 보이는군.”
파우스트는 부하들을 이끌고 재빨리 뒤를 따랐다.
“인기척이 하나도 없군요. 남은 주민들은 전부 성 안에 들여보냈겠죠. 저희가 진군하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요?”
“설마. 그 정도로 정보력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도적이나 다른 세력을 피해 숨어들었겠지.”
다른 의미로 눈 둘 곳을 찾기 어려웠다. 본래 사용처가 불분명한 썩은 나무 기둥에 까마귀 몇 마리가 올라앉아있다. 기둥에 늘어진 찌그러진 철망에는 잘린 팔다리가 들어있고, 효수 당한 목 등이 보란 듯이 길게 뻗은 가지에 걸려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진입해 보니 광장 한복판에 목 없는 시체가 매달려있었다. 시신이 부패한 정도로 보아 비교적 최근에 숨이 멎은 것 같다. 시체 옆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까마귀가 영혼이 빠져나간 고깃덩이를 쪼아먹으며 시끄럽게 울어대었다. 흐릿한 탄내와 부패한 시체의 썩은 내가 코를 찌르며 머리가 터질 듯 아파왔다.
실로 참담한 광경이었다. 마을 변두리를 걸으며 피가로는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보았고, 파우스트는 혀를 찼다. 혹시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반파된 집 문을 열어보았지만 대들보에 목매단 시체만이 반겨주었을 따름이다. 파우스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미 반쯤 떨어져 나간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계속해서 끼익 끼익, 소음을 내는 문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요란하게 토악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확인하니, 따라온 부하 중 두엇이 바닥에 쓰러져 잿더미가 된 땅에 뱃속에 든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당황한 레녹스가 한달음에 달려가 동료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같은 사람으로서 공감도 가고 안쓰럽긴 하다만,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하면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피가로의 옷자락을 잡아 작은 소리로 사과했다.
“피가로님,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이들도 있어서…….”
“괜찮아.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파우스트가 선수 치듯 말하지 않아도 책망할 생각은 없었다. 피가로는 넓은 아량으로 이해했다. 전란의 불길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심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특히 마음으로 마법을 쓰는 마법사에겐 취약한 환경이었다. 마치 마법사를 대동한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일부러 조성해놓은 것처럼 인위적이기까지 하다.
감히 이 땅의 주인 노릇을 하는 자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확실하게 보였다. 보이지 않는 감정이 투명하게 전달되어 오히려 유쾌하기까지 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에게 보이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옅게 미소 지었다.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긴 진청색 머리칼이 손에 잡힐 듯 어른거린다. 너무나 익숙한 광경을 목도한 탓일까.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옛 추억까지 떠올라버렸다.
“여기서부턴 흩어진다. 각자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도록!”
그 사이, 파우스트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각자 짝을 지어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오로지 레녹스만이 남아있었다.
“파우스트님, 따르겠습니다.”
“나는 괜찮아. 피가로님이 계시니까. 레노, 나대신 그쪽을 부탁해.”
“알겠습니다.”
언뜻 고집스럽게 굴 것 같았던 레녹스는 순순히 말을 따랐다. 역시 위계질서가 확실했다. 레녹스는 피가로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뒤, 앞서 출발한 동료들을 따라갔다. 피가로는 한동안 그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