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높이 뜬 늦은 밤, 수많은 막사 중 하나에 흐릿한 불빛이 비쳤다. 등불이 켜진 막사 안에서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조심스럽게 운을 뗀 건 젊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말문이 막힌 것처럼 곧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건너편에 앉은 상대의 안색을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주홍빛의 등불은 어두운 막사 내부를 밝히기는 한참 부족했다. 청년의 이목구비는 흔들리는 불꽃에 따라 단편적으로 드러났다. 눈앞에 있는 상대의 표정을 간신히 살필 정도의 어둠 속에서도 청년의 새하얀 머리카락만큼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맑고 곧은 푸른 눈이 곧바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향했다.
“파우스트와 혼인하려 합니다.”
피가로는 그 말에 눈을 돌렸다. 무료하게 흘러가던 시선이 똑바로 알렉을 향했다. 옅은 회색으로 보이는 눈이 상대를 내려다볼 때는 훨씬 어두운색이 되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조언을 구하기 위해 군영으로 모셔온 위대한 대마법사는 상대를 마주 볼 때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가 많았다.
발밑을 기어가는 벌레를 보듯 무심한 눈빛이었지만, 알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특별한 부탁을 하기 위해 왔으니 보다 낮은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알렉은 몸을 바로 세우며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나의 친우 파우스트 라비니아와 혼인하여 인간과 마법사가 화합할 수 있는, 더욱 조화롭고 강건한 왕국을 세우고 싶습니다.”
“현명하군. 그런 방법으로 공신을 챙기겠다는 건가.”
대담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피가로가 입을 열었다. 피가로는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딱딱한 말투와는 달리 목소리에는 얕은 흥미가 묻어났다.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알렉은 우선은 그 부분에 안도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괴짜 마법사 중에는 제자에게 유별난 집착을 품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다행히 피가로는 그런 부류는 아닌 듯했다. 파우스트가 피가로의 제자로 들어간 건 고작 일 년 남짓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눈을 통해 가만히 살피고 있을 때였다. 피가로가 어깨너머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무심한 손길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마법사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반발심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초대 국왕이 자신의 친우이자 오른팔인 마법사와 국혼을 올린다면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은 없어지겠지.”
느긋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핵심을 파고들었다.
“좋은 판단이다. 역시 넌 영리해. 중앙의 기질로선 의외라고 할까.”
피가로는 명쾌하게 호평했다. 동시에 무릎 위에 말아 쥐고 있던 알렉의 주먹이 느슨해졌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눈앞의 어린 것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 피가로에게는 훤히 들여다보였다.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쌓아 올린 연륜은 절대적이라, 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쯤에서 피가로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한데, 내게 그 말을 꺼낸 연유가 뭐지?”
“피가로님이 도와주십시오.”
대답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 피가로는 가만히 숨을 들이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대며 턱을 비스듬히 들었다. 계속 말해보라는 태도였다.
“아무리 설득해도 꾸밈없고 정직한 파우스트는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제 곁을 보다 명망 있는 여식이 지켜야 한다며 역으로 저를 설득하려 들겠지요.”
다시 한번 파우스트의 이름이 거론되자, 피가로의 입가가 기울어졌다. 방을 비추는 등불의 불빛만큼이나 희미한 미소였지만, 빛을 발하는 짙은 홍채엔 즐거움이 듬뿍 묻어났다.
“그 애는 그런 면이 있지.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한없이 약해. 나도 몇 번 가르쳐 보려 했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알렉은 평소 무뚝뚝한 대마법사의 얼굴이 제자에 대한 애정으로 물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파우스트의 스승이자 북쪽 나라의 대마법사인 피가로 가르시아는 몹시 어려운 인물이었다. 모든 마법사들이 대하기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피가로는 독보적이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가늠이 가지 않는 표표한 얼굴, 산을 가르고 바다를 뒤집는다는 강력한 힘,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인간들을 치료해 주는 자비로움. 인간들을 어여삐 여기는 건가 싶다가도, 군에 합류하여 적을 대하는 손속은 한 치의 자비도 없었다.
거기에 평범한 마법사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과 모든 사람들을 낮잡아보는 듯한 오만한 태도까지. 무엇보다 이 사내 주위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험한 분위기가 흐른다. 가볍게 말을 걸라 치면 본능이 매섭게 경고음을 울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오로지 파우스트를 화제로 올릴 때만큼은, 명화처럼 반듯한 낯을 한 눈앞의 남자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위대한 대마법사가 자기 자식이 예뻐 죽겠다는 부모처럼 익숙한 얼굴을 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하염없이 이어지는 침묵을 깬 것은 피가로였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 나의 힘을 빌리겠다고. 나보고 그 애를 함정에 빠뜨리라는 건가.”
순수한 애정과 사랑스러움에 눈을 빛내기도 잠시, 고운 얼굴이 금방 차가운 조소를 머금는다. 알렉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금방 평정을 되찾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함정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만, 결과적으로 파우스트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너도 알고 있겠지. 마법사의 약속은 결코 가볍지 않다. 파우스트를 소중히 여기고 그 아이와 일생을 함께 할 생각이라면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거다.”
말끝마다 한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가로는 원래 말을 이렇게 많이 하지 않는다. 그는 어리석은 것을 경멸하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파우스트에게 전해 들은 바 있었다. 그런 그가 보기 드물게 어울려주고 있었다.
“알렉 그랑벨, 네게는 그런 각오가 되어 있나?”
알렉은 그 말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비록 당사자는 이 자리에 없지만, 마치 주례를 통해 정식으로 혼례 절차를 밟는 기분이 들었다.
“네. 무슨 일이 있어도 파우스트를 지키고 곁에 두고 싶습니다.”
그 또한 여러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애초에 이런 전란의 시대에 인간과 마법사의 화합을 이상으로 혁명을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어린 시절, 파우스트라는 마법사와 친교를 나눈 것은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파우스트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스스로 선택했다. 어떤 형태로든 둘도 없는 소중한 벗의 손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알렉 그랑벨의 약속이었다.
“그렇군…….”
반응을 보건대, 의지는 충분히 전해진 것 같다. 중얼거린 피가로가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아주 잠깐 쓴웃음을 지은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알렉은 피가로를 따라 잔을 들었지만,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피가로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남은 술이 밑바닥에 찰랑거리는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을 뿐이다.
“뜻은 알았다. 협조하지.”
복잡한 고민은 필요 없었다. 피가로는 그 자리에서 시원하게 결정을 내렸다. 대화는 이걸로 끝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피가로는 알렉을 등진 채 뒤돌아섰다. 이만 나가라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감사합니다, 피가로님.”
막사를 벗어나기 전, 알렉은 대마법사의 넓은 등에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다.
5.
우연히 제자를 들였다. 오즈에게 내쳐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사실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건 혼자만의 생각이고, 아마 백여 년은 훌쩍 지났을 것이다. 백 년이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때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시름에 잠겨있었다.
마음의 상처는 몸의 상처보다 오래간다. 천 년을 넘게 산 마법사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은 백 년 남짓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하필이면 피가로 자신이 속 좁고 쪼잔한 사람이라 더욱 상처가 오래갔다.
사무치는 고독 속에서 박정한 동생제자를 원망했다. 칩거하는 오두막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을 때만 한 번씩 밖으로 나가 애타게 신을 부르짖는 목소리에 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북쪽 나라엔 궁핍한 사람이 차고 넘치게 있었다. 피가로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한없이 굶주림을 닮은 감각을 간신히 억눌렀다.
계속 이도 저도 아닌 한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그 아이가 찾아왔다.
“나는 파우스트 라비니아! 약한 자들의 희생을 없애기 위해, 어지러운 세계를 바로 세울 깃발을 든 알렉 그랑벨의 동포다!”
먼 곳에 있는 피가로의 거처에 직접 걸음 한 어린 마법사는 당돌하게도 목청 좋게 소리치며 문을 두드렸다.
“이곳에 가까운 마을의 병을 치료하고, 붕괴한 골짜기를 하룻밤 만에 구원한 기적의 대마법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피가로 가르시아님! 부디, 저의 스승이 되어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때마침 유성우가 내리는 날이었다. 등 뒤로 무수히 쏟아지는 별똥별이 보였다. 날아오는 별은 여행객이다. 세계를 바꾸는 여행객이 찾아오면 멈춰있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성우의 사자가 찾아온 덕분에 영영 멎은 줄 알았던 자신의 세계도 변할 예감이 들었다.
북쪽 나라의 위대한 대마법사 피가로 가르시아. 마왕 오즈의 동료이자 그의 책사. 살아있는 유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 오즈가 하도 유명한 탓에 세계정복 건은 보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그는 피로 쌓아 올린 수많은 경험을 가진 의문의 마법사였다. 그런 사람에게 찾아와 지도를 청하는 용기가 가상했다.
하물며 파우스트는 마법사와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이상론을 내세웠다. 긴 세월을 살면서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인간도, 마법사도, 서로 죽도록 싸우는 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북쪽의 마법사라 그 사실을 지리멸렬하게 느끼면서도 결국 납득하고 순응하게 되었다.
타인의 입에서 듣는 이상은 꽤나 좋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쏟아내는 이상이 아름다웠던 건지,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자색 눈이 아름다웠던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마침 세상은 다양한 분쟁으로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세계를 지배하던 자가 사라져, 대륙의 패권을 둘러싼 싸움이 한창이었다. 백여 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으로 사람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법사와 인간의 화합이라.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아이의 말에 설득당한 자신이 있었다. 설득이라고 해야 할까. 실은, 이미 한참 전부터 파우스트를 제자로 받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세계정복 같은 터무니없는 짓을 벌였으니 이 정도는 속죄이자 취미로 괜찮을 터였다.
결정을 내리면 실행은 빨랐다. 한 해를 꼬박 가르쳤다. 파우스트와 그의 종자까지, 북쪽 나라에 위치한 피가로의 오두막에서 함께 숙식하며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가르쳤다. 수업은 다소 거칠었지만 쌍둥이 스승만큼 험하게 굴리지는 않았다.
파우스트는 정말로 잘 따라와 주었다. 울고불고하진 않더라도 적당히 마음이 꺾여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그러지 않았다. 무슨 과제를 주든 기어이 해내고 말았다. 가끔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주눅 들지 않고 다시 한번 힘차게 발돋움을 했다.
그야말로 바라왔던 이상적인 제자였다. 쌍둥이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도 편달하는 과정에서 파우스트와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파우스트와 대화할 때 알렉 그랑벨은 빠질 수 없는 주제였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알렉에 대해 말하는 파우스트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자부심이 넘실거리고 있어, 최고의 단짝이라는 느낌이었다. 몇 마디 하지 않아도 두 사람 간의 우정과 두터운 신뢰가 느껴졌다. 추악한 감정으로 속이 쓰린 것과는 별개로 항상 열정적인 그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어딜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제자였지만 집착할 정도는 아니었다. 파우스트에게는 파우스트만의 인생이 있다는 걸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전쟁 도중에 빠져나온 파우스트는 금방 본부대로 합류해야 한다. 그러니 가르침을 베푸는 것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한 해뿐이었다.
무작정 떼를 쓰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별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무릇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파우스트는 다시 피가로가 머무르는 오두막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소중한 제자, 파우스트의 친우는 건방진 인간이었다. 파우스트가 염치가 있어 하지 못한 일을 그 녀석은 기어이 해냈다. 군에 합류한 파우스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듭 피가로를 찾아오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예의 종자만이 아닌 새로운 혹이 붙어있었다.
그는 자신을 알렉 그랑벨이라 소개했다. 기척을 느꼈을 때부터 진작 알아채고 있었다. 혁명군의 수장이자 파우스트의 벗이며 또한 주인 되는 자. 확실히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단명종치고는 제법 강단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영웅의 기개라는 건 딱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일 테다.
제자가 돌아온 건 환영해 마지않을 일이나, 알렉에 대해서는 그저 그랬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알렉은 혁명군의 합류를 제안했다. 귀찮은 일에 연루되는 건 질색이었다.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일은 누구 때문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래도 피가로는 선뜻 승낙했다. 물론 일선에 나서지 않고 간접적인 책사 역할만 한다는 조건부 동의였다.
오즈의 역할이 대다수이긴 했지만, 어쨌든 세계정복을 앞두고 있던 몸이다. 땅과 재물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반복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강력한 힘으로 쓸어버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된 과정이 아니었다. 나라를 이루고 근간을 다지기 위해선 뭇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성만이 비로소 왕국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피가로가 팔자에도 없는 혁명군의 책사 노릇을 하게 된 건 전부 파우스트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알렉의 뒤에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내심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워 기꺼이 따라나서자고 생각했다.
제자가 활약하는 모습을 관전할 좋은 기회였다. 어차피 시키지 않아도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긴 했다만. 역시 곁에서 보는 경치가 훨씬 장관이겠지. 누군가는 가벼운 마음이라고 비난할 테지만, 당시의 피가로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 정도의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하의 피가로도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알렉의 담대함이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제자와의 결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을 줄은 몰랐다.
하여간 제대로 간덩이가 부은 녀석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하다니. 사람 잘못 찾아왔다고 하고 싶지만, 자세한 사정을 듣고 보니 피가로만큼 이 역할에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가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알렉의 부탁이란 것은 요컨대, 파우스트를 속여 혼인에 적합한 요건을 갖추도록 지도해달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 되지, 사랑에 무슨 복잡한 절차와 조건이 필요하냐 싶지만, 이 결혼의 목적은 오랜 짝사랑의 결실 따위가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머지않아 건국될 국왕의 반려였다.
현재 혁명의 성패는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 혁명이 실패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지켜보는 피가로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이 혁명은 성공이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가 합류한 덕분이 아니라, 대륙의 모두가 지긋지긋한 분쟁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타고나길 영웅의 기질이 있는 알렉은 좋은 시기에 올바르게 태어났다. 어떤 의미로는 전란의 시대에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라 할 수 있지만,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마땅히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기회였다. 파우스트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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