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 03


“문제는 마력을 성숙하게 만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대다수의 마법사가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마력의 안정 같은 건 시간이 해결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가장 편하니까. 아마 쌍둥이 선생님도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낸 결과일걸. 그렇죠?”

쌍둥이가 “오오~!” 소리 내며 감탄했다.

“정확하구나.”

“우리도 얼떨결에 해냈단 게야. 제자 앞에서 무게 잡고 싶어서 적당히 말했을 뿐, 자세한 방법은 모른다네.”

팔짱을 낀 오즈가 하, 짧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거군.”

오즈는 정정해 주길 바라는 것 같으나, 그렇다고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피가로는 간단히 긍정했다.

“그 말대로. 제어가 안 되는 경우라면 모를까, 경험이 적어 미숙한 것을 짧은 기간 안에 억지로 해낼 순 없어. 너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텐데.”

오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기다렸지만 역시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상대가 아무리 침묵의 마왕 오즈라 해도 이만한 무언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그땐 당사자가 방법을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 몇 번 모른 척 상담했지만 언제나 두루뭉술하게 말을 돌려서 유의미한 답을 얻을 순 없었지. 그런 건 두 분한테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허나 그대는 똑똑한 아이였다네. 막히는 곳이 있으면 언제나 스스로 답을 찾아냈어.”

“흥미롭구나. 그래서 그대는 무슨 답을 내렸는가.”

“결국 마력을 다루고 정령을 거느리는데 문제가 없으니 중요한 건 마력의 양이라고 결론 지었어요. 빠른 시간 안에 마력의 양을 늘리는 건, 당연히 질 좋은 마나석을 섭취하는 것밖에 없었고요.”

“무작정 마나석을 먹는다 해도 그 힘을 온전히 제 것으로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않니. 날뛰는 기운을 가라앉히는 건 어떻게 할 셈이었지?”

“간단하죠. 계속 싸우는 거예요. 어차피 마나석은 수도 없이 필요하니까, 마나석을 모으는 김에 실전으로 압축하는 거죠.”

오즈는 미간을 모았고, 쌍둥이는 동시에 혀를 찼다. 닥치는 대로 먹고 닥치는 대로 싸워서 마력을 쌓는다니, 여기 있는 누군가가 생각나는 방법이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데 모였다.

“날 보지 마라.” 주목을 받은 오즈가 짜증을 냈다. 굳이 잠자는 마수의 코털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원래 주제로 복귀했다.

“저런, 답지 않게 무식한 방법을 고안했구나.”

“과연 북쪽의 마법사라고 해야 할까…….”

“뭐, 그만큼 몰려있었던 거죠.”

피가로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쌍둥이의 말대로 꽤나 무리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만, 그때는 워낙 급하고 초조해서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고작 열몇 살에 불과한 아이가 애정에 굶주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일만 아니라면 마음껏 안타까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언가를 느끼기엔 셀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먼 과거의 일이다.

스승의 비호 아래, 어리광을 부리기 위해 영원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남는다. 그러나 마력이 안정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스승이 가르칠 게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족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신의 미숙함을 증명해야 한다니, 굉장히 모순적인 이야기다.

다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걸 진심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는 맹목적으로 돌을 모으기 시작했다.

현재 많은 마법사들이 오즈에 의해 돌이 되었지만, 그 시절 북쪽에는 강하고 위험한 마법사들이 득시글했다. 마력 감지가 미숙했던 피가로는 상대를 유인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사용했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마법사의 신체 일부는 훌륭한 매개체가 된다. 특히 피는 다른 무엇보다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 취급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지금이라면 날 잡아줍쇼 하고 설산을 활보해도 쉽사리 덤벼들 이가 없겠으나, 당시의 피가로는 복잡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피를 적당량 흩뿌리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북쪽의 법칙은 약육강식. 먼저 움직이지 않아도 냄새를 맡은 마법사들이 하이에나처럼 몰려들 터였다.

애먼 사람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첫째, 기색을 읽고 찾아올 수 있다면 어느 정도 힘이 있는 마법사일 것이다. 둘째, 일부러 여기까지 온다는 건 그를 죽여 돌을 갖겠다는 의도와 일맥상통한다. 셋째, 덜 자란 어린아이를 선제공격할 정도면 확실히 악질적인 마법사일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피가로는 생명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모든 삶은 존중 받아 마땅하지만 목숨의 경중은 결코 같지 않다. 그 또한 잔혹하기로 소문난 북쪽의 마법사인지라, 타인을 해치는 일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자기 자신을 미끼로 삼아 거리낌 없이 돌을 모은다는 발상은 더없이 효율적이고 획기적이었다. 실제로 ‘나쁜 마법사’들은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피가로가 준비한 판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양질의 마나석을 손쉽게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혹여 다른 사람에게 뺏길 새라 앞다투어 달려드는 모습은 한 편의 촌극이 따로 없었다. 유일하게 간과한 것은 피가로를 가르친 스승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것이다.

수많은 마법사들과 싸우며 고전한 순간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투를 거듭할수록 쌍둥이가 얼마나 훌륭한 스승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피가로는 제게 달려드는 성가신 마법사들을 차례차례 돌로 만들었고, 돌로 만든 마법사의 수만큼이나 착실하게 악명을 쌓아갔다.

“이젠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 옛날 일이라 다행이야.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알아본다면 얼마나 사람 사귀기가 어렵겠어?”

“애초에 문제가 될 행동을 안 하면 되지 않누.”

“그 일을 기억하는 얼마 안 되는 마법사들까지 오즈가 돌로 만들었지. 얼마 전엔 치렛타까지 그리되었으니, 이젠 정말 아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겠구나.”

“네, 정말 천운이죠. 오즈, 너도 고맙다.”

“…….”

무려 2천 년을 함께해 온 사제가 와하하 웃었다. 웃지 않는 건 오즈―혹은 가게 마감 준비를 하는 샤일록―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웃음소리는 또 어찌나 발랄한지. 끼리끼리 어울린다더니 딱 그짝이다.

“뭐야, 왜 그렇게 봐?”

“너도 만만치 않군.”

강렬한 눈빛에 옆얼굴이 뚫릴 것 같았다. 시선을 추적해 보니, 정면에서 오즈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일부러 눈치를 준 건가? 오즈답지 않은 소심한 행동이다. 시도는 좋았지만, 하필 이쪽이 타고난 철면피라 미안하게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뭐, 그렇지. 부끄러운 과거는 누구나 있는 거잖아?”

오즈의 말을 받아넘긴 피가로는 거듭 잔을 비웠다. 목이 마르기도 했고, 마침 취기가 떨어질 즈음이었다.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한 번 닿은 눈길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오즈는 영 마뜩잖은 기색이었다.

아, 얘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오즈를 마주하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난처한 기분이 든다.

“실망했어? 네 형제자가 생각만큼 자비롭고 상냥한 사람이 아니라서.”

“……아니.”

“그럼?”

오즈는 표현할 말을 찾는 듯 한참을 뜸 들였다. 대답이 궁금했던 피가로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오즈는 고집스러운 입술을 달싹이더니, 간신히 한 문장을 내뱉었다.

“네게, 내가 모르는 모습이 있다는 것이.”

오즈는 타인에게 좀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는 녀석이니까,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잠깐 동안 오즈가 할 말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그중에서도 상당히 뜻밖이었다.

“모르는 모습을 세기보단 아는 모습을 세는 편이 더 빠르지 않을까?”

“그런 의미가 아니다.”

눈가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한숨을 쉬는 오즈는 몹시 골치 아파 보였다. 그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이내 포기하고 손을 저었다. 이제 됐으니 그냥 하던 말이나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뭐야, 재미없게…….”

오즈가 입을 다물어버리면 이쪽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재간이 없다. 흥이 식은 피가로는 남의 일이라고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 쌍둥이를 외면했다.

굶주린 시간은 잠시뿐으로, 현재는 아무거나 마구잡이로 입에 넣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지금이 그렇다는 거고, 그 당시에는 죽인 마법사의 수가 곧 마나석을 먹은 횟수였다. 그렇게 비웃고 업신여기던 촌극에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나석을 올바르게 흡수하는 방법은 일찍이 배웠다. 피를 매개로 마법을 발동하는 법과 더불어, 쌍둥이가 가장 먼저 가르쳐 준 것이다. 자라온 터전이 북쪽이라 그런가, 어느 정도 본능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마음 한 편에 불안이 도사리고 있긴 했지만, 마나석에 잔존한 사념 따위에 사로잡힐 정도로 나약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몸에 좋은 것이라도 적정 복용량을 지키라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 수많은 마법사들이 왜 다량의 마나석을 한 번에 흡수하지 않는지, 피가로는 몸소 배우게 되었다.

모든 마나석에 사념이 담기는 것은 아니다.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거나 그만한 원한을 품었거나.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살아생전 남은 미련이 비슷한 작용을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다.

하다못해 망령조차 되지 못하는 사념 따위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약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 쌓인 설원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움을 벌였다. 수북하게 쌓인 눈이 전부 녹고, 평평한 대지가 오목하게 파일 때까지. 미친 듯이 싸우고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 일을 시작했더라?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스승으로서의 쌍둥이는 엄격하니까 제시간에 돌아가지 않으면 화를 낼 텐데. 어쩌면 평소보다 더 심하게 굴릴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뭘 배우기로 했었지? 소환 마법이었던가? 아, 그건 정말 배우고 싶었는데. 스스로 해보려고 해도 독학으로는 잘 안돼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결국 아무 결론도 나지 않았다. 마나석을 먹으면 먹을수록 생각과 기억의 명멸 현상은 심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집중하기가 어려워지고, 자신의 것이 아닌 다양한 감정이 속에서 들끓었다.

“일종의 소화불량 같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오즈, 넌 그런 적 있어?”

“기억나지 않는다.”

“너까지 그러기야?”

어렵게 얻은 마나석을 끝까지 삼키지 못하고 게워낸 적도 있다. 마나석은 체내에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것으로, 먹는다는 개념은 처음부터 옳지 않다. 그래서일까,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마나석이 위액과 뒤섞여 맨바닥에 쏟아지는 모습은 몹시 그로테스크했다.

신으로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을 때에도, 고향이 멸망했을 때에도, 거칠기 짝이 없는 쌍둥이의 수업을 받을 때에도 우는소리 한 번 해본 적 없다. 하지만 그때는 눈물이 쏙 빠지게 힘들었다. 이러다가는 진짜 죽겠다 싶을 정도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말로 떠오르는 게 있었나 보다. 남의 무릎에 앉은 채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던 쌍둥이가 “아~!” 하고 큰 소리를 냈다.

“그렇군. 그 즈음이구나. 근방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경험과 연륜이 지긋한 마법사들을 돌로 만들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누군가가 전했다네.”

“그 말을 한 게 누구더라?”

스노우가 되묻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화이트가 코웃음 쳤다.

“누구든 중요하지 않겠지! 세계 최강의 마법사인 우리에게 감히 ‘조심하라’고 말하다니, 아주 고얀 녀석이야.”

“그럼 그럼. 그런 말을 하고도 목이 붙어있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야 할 것이야.”

화이트의 기분을 재빠르게 읽은 스노우가 아첨을 늘어놓았다. 토라진 화이트도 귀엽다는 둥, 늘 하는 칭찬 일색이다.

피가로는 두 사람을 완전한 타인처럼 낯설게 바라보았다. 저런 말을 매번 제정신으로, 진심으로 하는 게 신기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을 지켜보자니 괜히 속이 쓰려서 언제부턴가 채워진 잔을 비웠다.

스노우의 그루밍을 받으며 콧김을 뿜기도 잠시,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것처럼 화이트가 침음을 냈다.

“그런데, 살려서 돌려보냈던가?”

“정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방금 화이트쨩이 말했잖아?”

“어이쿠, 그랬었지 참. 내 정신 좀 봐. 나이를 먹으니 한 번씩 깜박한다니까.”

나이보단 한 번 죽었다 살아난 게 문제일 수도. 이 자리에 있는 과반수가 같은 생각을 했으나,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급격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큼큼, 헛기침을 한 스노우가 좋은 타이밍에 대화를 재개했다.

“아무튼, 그쯤 되니 낙천적인 우리도 걱정이 들기 시작했단다.”

소리 소문 없이 집을 나간 피가로가 돌아오지 않은지 보름 정도―“정확하진 않아. 시간이 워낙 빨라야지.” 화이트가 덧붙였다―지났을 무렵이었다. 인간들은 딱 피가로만 한 나이일 때 사춘기라는 걸 겪는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부모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하던데,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피가로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지만, 일단은 인간의 품에서 자랐다. 그 애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사는 마법사로서의 삶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없이 무던하면서도 섬세하고 예민한 아이다. 그런 피가로라면 사춘기라는 걸 겪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키우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쌍둥이는 피가로를 찾지 않기로 했다. 그들의 애제자는 말없이 사라지는 아이―“이미 사라졌잖아.” 오즈가 끼어들었으나, 쌍둥이는 무시했다―가 아니다.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올 것이다.

참된 양육자로서 하나뿐인 제자에게 숨 쉴 공간을 주기로 했다. 멋대로 수업을 빼먹은 건 용서할 수 없지만, 벌은 관대하게 내릴 것이다. 저기, 북쪽 꼭대기에 있는 이름 모를 산맥에 처음 보는 마수가 출몰했던데, 경험 삼아 토벌을 보내도 좋을 테다. 꽤 강한 녀석이지만, 가르친 스승이 누구인데 그럭저럭 죽지 않을 정도―“관대? 관대의 뜻을 모르는 거 아녜요?” 피가로가 콧방귀를 뀌었다―는 되겠지.

강한 마수를 목전에 둔 제자가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모습은 썩 유쾌할 것이다. 생을 이어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은 인간이고 마법사고 가릴 것 없이 전부 아름다우니까. 그날이 기대되는구나. 즐거운 상상―“최악.” 제자들이 입을 모아 평가했다―을 한 스노우가 상기된 얼굴로 차를 마실 때였다.

“스노우쨩, 그 소식 들었는고?”

유리온실에 화이트가 뛰어 들어왔다. 한달음에 달려와 맞은편 의자에 앉는 화이트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본신이다.

“오늘도 아주 사랑스럽구나, 화이트여.”

스노우가 주책을 떨자, 화이트 또한 빙그레 웃으며 같은 말을 돌려주었다. “스노우도.”

“화이트가 이렇게 흥분할 정도면, 어디 보자…… 우리 제자에 대한 것이렷다.”

“모르는 척 시침 떼지 말게.”

스노우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짐짓 고민하는 척 딴청을 피우자 작게 한숨 쉰 화이트가 찻잔을 든다. 화이트가 들어 올린 잔에는 어느샌가 따뜻한 홍차가 채워져 있었다.

화이트의 말대로, 스노우는 피가로의 행적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춘기니 뭐니 하며 피가로를 자유롭게 풀어주었지만, 어디서 뭘 하는지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야 그 애는 그들의 비호를 받고 있는, 관리 대상이니까.

스노우와 화이트는 의식을 공유하는 쌍둥이다. 스노우가 알고 있는 것을 화이트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굳이 질문의 형태로 확인한 것은 화이트의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달했다는 것이다.

화이트는 새로 들인 제자가 정말로 마음에 드나 보구나.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역시 화이트와 자신은 모든 면에서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스노우는 그러한 불변의 사실에 안정감을 얻었다.

그럼 화이트가 조급증을 내기 전에 어울려주자꾸나. 그렇게 결정 내린 스노우가 마침내 운을 떼었다.

“그 애, 북쪽의 강한 마법사들을 상대로 악착같이 돌을 모은다지?”

그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귀를 쫑긋 세운 화이트가 말했다.

“듣자 하니 닥치는 대로 싸운다고 하던데. 도통 자기 몸을 아낄 줄 모르는구먼!”

“아슬아슬하긴 해도 용케 연전연승을 이어가고 있는 모양이야. 한데, 피가로가 원래 이렇게 호전적인 성격이었던가?”

“북쪽의 마법사로 치면 평균이지. 하지만 그 아이는 명백히 성향이 다르지 않나.”

“의미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 아이야. 어째서 그렇게까지 힘에 집착하는 걸까?”

“다른 목적이 있다면 어떤가. 가령, 스승을 짓밟고 그 위에 서고 싶다던가. 이 북쪽에선 흔한 일이 아닌가.”

이야기는 빠르게 진전되었다. 그리하여 피가로의 목적까지 도달했을 즈음엔 한차례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부드럽게 일렁이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 속에 쌍둥이는 조심스럽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마법사의 제자가 스승을 죽이고 돌을 취하는 건 약육강식인 북쪽에서는 흔한 일이다. 흔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길러준 스승을 뛰어넘었다는 증표로서 일부러 그런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

반대로 스승이 제자를 키우다가 완전히 성장하기 전에 잡아먹는 경우도 있다. 이쯤 되면 전통이라고 할 정도였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라니,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북쪽의 마법사에게 사제지간의 의미는 그만큼 얄팍하다. 북쪽에서 정이란 하등 쓸모없는 것. 스스로 약점을 만들어 족쇄를 매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보다는 힘이고, 힘이 있으면 정이라는 불필요한 감정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

“피가로가 우리를 목표로 한다고? 그 앤 우리에 비해 턱없이 약할 터인데.”

“어허, 그러니까 돌을 모으겠지. 무리하게 몸집을 부풀리고 있는 게야.”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 생각했지만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무엇보다 화이트가 하는 말이다. 생각마저 공유하는 쌍둥이니까 화이트가 틀릴 리 없다. 어느 순간부터 스노우는 화이트의 추측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소문을 들은 걸까? 북쪽의 많은 마법사들이 그리한다고, 우리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 다른 마법사와의 접촉을 제약하고 있었거늘, 용케도 정보를 얻었군.”

“아직 확실하진 않지 않나. 오해가 있다면 직접 만나서 풀면 되는 일일세.”

화이트는 스노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혀를 찼다. 두 사람 중 언제나 온화한 의견을 제시하는 건 화이트 쪽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명백히 스노우가 피가로를 두둔하고 있었다. 상대가 소중한 제자라지만, 타인을 상대로 영혼의 반쪽이 보여주는 낯선 모습은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스노우여, 오늘따라 답지 않게 나약한 소리를 하는구나. 시도는 좋으나, 때에 따라선 대화가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네. 우리에게 들키지 않도록 간밤에 몰래 빠져나간 아이야.”

“하지만…….” 스노우가 망설임을 보이자 화이트는 한층 강하게 몰아붙였다.

“정식으로 맺은 약속은 아니지만, 그 아이는 스승으로서 우리가 정한 규칙에 따르지 않았네.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망설이는가! 지금까지 그래왔듯 따끔하게 혼을 내고 데려와 꿇어앉히면 될 일이 아닌고!”

“허나 화이트야, 피가로는 힘으로 찍어 누른다고 해서 말을 들을 아이가 아니지 않누.”

“그러니까 훈계가 필요한 게지! 예로부터 말을 듣지 않는 제자에겐 매가 약이네. 모처럼 마음에 든 제자인데 쉽게 놓아줄 순 없지 않나. 눈물 콧물 쏙 나올 정도로 혼쭐내서 집에 데려오자꾸나!”

제자를 놓친다. 스노우는 그 말에 마음을 달리 먹었다. 화이트의 주장이 옳았다. 일단 데려와야 설교를 하던 조언을 하던 할 게 아닌가. 지금으로선 그 아이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연 알 도리가 없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피가로는 항상 말 잘 듣는 제자였으니까, 때가 되면 제 발로 돌아오겠거니, 돌아와서 사실을 털어놓고 위로를 구하겠거니…… 그런 건 본인의 바람일 뿐이다. 이곳은 사제 간의 불화가 두드러지는 북부다. 이상을 꿈꾸는 건 나쁘지 않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함께한 시간은 고작 2년이지만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 물건이나 시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마음이다. 결국은 걱정보다 괘씸함이 앞섰다. 너울거리는 동요는 곧 굳은 의지가 되었다.

“그래그래,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주자!”

“너희들은 항상 그런 식인가?”

좋은 않은 기억이 떠오른 오즈가 쌍둥이를 노려봤다. 그 눈빛이 어찌나 매서운지, 마법을 쓸 수 없는 밤인데도 등골이 오싹했다.

“오즈가 화가 많이 났네.”

중얼거리는 피가로 뒤로 쌍둥이가 줄줄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때는 우리도 젊었으니까…….”

“크흠, 미숙한 시절이었지.”

무슨 말을 해도 오즈는 눈에 힘을 풀지 않았다.

“우리 제자지만 무서워!”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네!”

울상을 지은 쌍둥이가 칭얼거렸다. 어지간하면 편을 들어주겠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다 늙은 스승을 상대할 때만 입바른 학생이 되는 피가로는 망설임 없이 끼어들었다.

“그치만 두 분, 오즈를 제자로 들이셨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걸요. 오히려 심하면 심했지…….”

“피가로쨩, 바보! 대체 누구 편을 드는 거니?”

“당연히 동생제자 편을…… 아야, 아야, 아파요.”

득달같이 달려든 쌍둥이가 팔뚝과 가슴팍을 마구 때렸다. 무쇠 같은 주먹―이상하다. 전혀 말랑말랑하지 않다―으로 두들기다가 심하게는 꼬집기까지 한다. 하도 얻어맞은 피가로는 마른 기침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잘도 살아남았군.”

매사 진지하지 않고 장난스러운 모습은 그나마 있는 정까지 다 떨어지게 만든다. 오즈는 쌍둥이를 보며 아주 진저리를 쳤다.

“그야 우린 최강이었으니까!”

“그래서 적이 많지 않나. 최근에는 애먼 사람에게 불똥도 튀겼고.”

“그 드래곤을 말하는 건가.”

“비슷해요~”

“여전히 막 나가는 사람들이야.”

말문이 막힌 피가로가 허허 웃었다. 쌍둥이는 무슨 일이 있었든 여전히 명랑 쾌활하다. 매사 긍정적인 태도가 부럽기도 하고, 그냥 평범하게 노망난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이 되는대로 적당히 처신하는 건 늘 있는 일이라 이젠 놀랍지도 않다. 또 마냥 대충 한다고 하기엔 쌍둥이 정도면 수완이 좋은 편이었다. 역시 연륜이라는 건 무시할 게 못 된다.

“그나저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제가 하극상을 하고 싶어 한다고.”

“그랬지. 달리 짚이는 바가 없었으니.”

“아, 조금 실망인데…… 상상력이 대단하시네요. 두 해 동안 사랑으로 키운 제자 마음을 그렇게 몰라서 어디 쓰겠어요?”

천하의 쌍둥이도 이번만큼은 할 말이 없는지 앓는 소리만 냈다. 피가로의 말이 맞다. 당시에는 제자를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버릇이 나빠진 줄 알았다. 하늘 같은 스승을 우습게 본 제자에게 벌을 내리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결정을 내린 쌍둥이는 발 빠르게 피가로를 만나러 갔다.

오랫동안 한곳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으니 찾기는 쉬웠다. 굳이 터를 잡은 이유는 알만 하다. 피가로가 맞서 싸우는 상대는 마법사들끼리의 싸움에 익숙한 노장들이다. 주술이든 함정이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승패를 장담하기 힘들 것이다.

타고나길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다. 마력의 여부와 관계없이 살해당하는 어린 마법사들을 그간 수도 없이 봐왔다. 그게 바로 경험의 차이였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피가로는 이제 막 마법사의 싸움을 몸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연달아 계속 싸우기에는 한계가 있을 터. 시간이 흐른 지금, 피가로가 사용한 매개의 힘은 희미해지다 못해 거의 사라졌다. 남아있는 건 결계 정도일까.

과연 피가로는 어떤 상태일까. 무너지기 직전의, 지쳐있는 순간에 만나러 가는 것이 스승으로서 옳은 행동일까. 제자의 자존심에 괜한 상처를 입히는 꼴이 아닌가. 앞서 마음을 다잡았다곤 하나, 의문은 스노우의 머릿속에 여전히 건재했다.

불편한 기분을 대변하듯 그날따라 유독 날씨가 나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푸르스름한 보랏빛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었다.

빗자루에 올라탄 채 마법으로 눈보라를 걷어내며 나아갔다. 그러던 중, 문득 화이트가 말을 걸었다.

“스노우.”

“응?”

“만약 그 아이가 돌이 되기 직전이면 어떻게 할 건가?”

눈보라를 거침없이 뚫고 나아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오돌토돌한 싸락눈이 드러난 피부를 가볍게 두드렸다. 눈치를 보느라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뜻밖에 화이트가 제대로 짚어왔다.

“마력의 기색은 아직 생생한데…….”

“그러니까, 만약 말이야. 그런 상황이라면 싸움에 끼어들어 구할 건가?”

“글쎄, 잘 모르겠구나.”

스노우는 한숨을 쉬었다. 돌이 되기 직전이라던가, 피가로의 마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시점에서 가정은 딱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는 것도,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거라는 상상조차 하기 싫어서인 것 같았다.

“북부의 마법사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 돌이 되는 것도, 타인을 돌로 만드는 것도 전부 그 애의 운명일 텐데.”

“운명은 절대적이지. 허나 스노우,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본인은…….”

화이트가 말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켰다. 스노우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화이트는 무척 중요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간 그들이 취해온 태도의 근본을 뒤흔들 말을.

“……잠깐. 저기, 누군가 보이는구나.”

그러나 화이트는 끝까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시야를 가리는 안개와 눈보라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쌍둥이는 동시에 그것이 마법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익숙한 기척의 마법사가 한 명, 누군지는 뻔하다.

상대를 알아본 쌍둥이는 빗자루를 당겨 급강하했다.

“피가로쨩!”

“피가로야!”

발을 디딘 땅은 엉망이었다. 쌍둥이가 피가로의 기척을 쫓아온 곳은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외진 장소로, 한때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냈을 설원은 군데군데 움푹 파이고 까뒤집어져 있었다. 이따금 잘린 나무 밑동 따위가 보였으나, 단단한 몸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필시 길고 고된 전투에 휩쓸려 가루가 되어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피 냄새가 지독했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혈향은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와 짙은 안갯속에서도 선명했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흩뿌려졌을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무모한…….”

당황한 화이트가 말을 더듬었다. 긴 세월을 살며 이보다 험한 꼴은 수도 없이 보았지만, 하필이면 하나뿐인 제자의 일이다.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렴풋이 상상했던 것보다 한층 엉망이었다. 주변에 남은 흔적을 눈으로 추적하다 보니 어느덧 피가로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피가로가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기척이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스승인 그들만은 언제 어디서든 알아볼 수 있도록 가르쳤다. 그런데도 피가로는 쌍둥이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저를 데리러 먼 길을 온 스승한테 당장 무릎 꿇고 죄송하다 빌어도 모자랄 판에. 몹시 언짢아진 스노우가 한 마디 하려고 할 때였다. 화이트가 앞으로 나서는 스노우의 손을 잡았다. 눈이 마주쳤다. 화이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화이트는 이전부터 이런 종류의 감이 좋았다. 꿈은 물론이거니와 생각마저 공유하는 쌍둥이지만, 무엇이든 숨기는 게 능숙한 피가로의 거짓말을 바로 간파하는 건 언제나 화이트 쪽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서로의 장기가 있다. 그 사실이 이다지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화이트와 자신이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서겠지.

스노우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화이트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정작 화이트는 피가로의 동태를 살피느라 스노우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조차 속이 쓰렸으나, 지금은 제자를 챙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눈보라로 뒤덮인 희끄무레한 시야 속에서, 두 눈만 형형하게 빛났다. 어두운 눈동자 안의 초록색 동공이 유독 선명했다. 피가로는 쌍둥이가 온 순간부터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불청객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은 본능만 남은 짐승 같았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은 쌍둥이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바라보는 시선은 얼어붙은 바다 같다. 쏟아지는 눈조차 얼려버리는 차가운 겨울 바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에 있는 이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마법사는 먼저 행동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쌍둥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노우.”

“그래.”

섣불리 자극하면 안 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접근하자. 눈짓을 주고받은 쌍둥이는 침착하게 다가갔다.

“피가로야, 우리를 알아보겠느냐.”

“……스노우님, 화이트님.”

말을 건 것은 좋은 시도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정신이 든 건지, 낯선 마법사가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그러자 직전의 호전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눈앞에 겁을 질린 아이만이 남았다. 그들의 제자, 그들의 아이. 눈에 빛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쌍둥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두 분이 어째서 여기에.”

쌍둥이를 알아본 피가로는 어쩔 줄을 몰라 허둥거리며, 정신없이 옷매무새를 다듬기 시작했다. 말라붙은 핏물로 엉킨 머리를 손빗으로 빗어내리고, 붉게 물들어 찢어진 옷을 어떻게든 감추려 애썼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게졌다. 분을 칠한 것처럼 허옇게 뜬 얼굴에 열이 오르니, 그 모습은 꼭 홍시 같았다. 숫기 없는 태도가 도살자에 버금가는 차림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피가로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숨기려 들었다. 여러모로 괴리감이 느껴지는 광경이다. 그 모습을 본 쌍둥이의 표정은 점점 기이해졌다.

이 아이가 우리에게 맞설 셈이라고? 나쁜 결말을 맞이한 북쪽의 다른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스승을 돌로 만들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눈앞에 있는 건 갈 곳을 완전히 잃은, 망망대해 속에 내버려진 아이였다. 몸의 절반이 잠겨 허우적거리면서도, 차마 살려달라며 손을 뻗지 못하는 그런 아이 말이다.

피가로는 눈을 싫어한다. 정확히 눈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쌓일 정도로 내리는 눈도, 이미 쌓인 눈도 엄청나게 싫어한다. 하물며 몸이 잠길 정도라면 더더욱 질색했다. 그런 아이가 험하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홀로 서있었다.

이 아이의 이런 모습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늘 품에 안아 상냥하게 어르고 달래며 길렀거늘, 불과 두 해만에 이렇게 될 줄이야. 가슴 언저리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간을 찌푸린 스노우가 화이트를 쳐다봤다.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나, 마침 화이트 또한 스노우를 보고 있었다.

화이트의 표정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초조함이 엿보였다. 그래, 확실히 같은 것을 느꼈다. 스노우는 일말의 안도감과 함께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말 안 듣는 제자를 찾으러 왔지.”

“사랑스러운 제자를 데리러 왔지.”

피가로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으나, 그보다 스노우와 화이트가 빨랐다. 선뜻 거리를 좁힌 쌍둥이가 애원하듯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만하면 되었다.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더 이상 이런 짓을 반복하다간 네 마음이 부서질 게야.”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고 싶다면, 우리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마.”

처음부터 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 점을 감안해도 대답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

“아뇨, 갈 수 없어요.”

자신의 단호한 말투에 놀랐는지 피가로는 재깍 입을 다물었다. 그러기도 잠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옷자락을 쥔 쌍둥이를 밀어냈다.

“강해지고 싶은 게 아니에요. 강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밀어내는 손길은 냉정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스치듯 닿은 살갗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스노우와 화이트는 덜덜 떨리는 손을 잡아주려 했지만, 이번에도 피가로 쪽에서 피했다.

“……저는, 스노우님과 화이트님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눈을 감은 피가로가 아랫입술을 사리 물었다.

“우리는 가족인가요? 시간이 지나 제가 어른이 되고, 두 분이 제게 질리게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가족인가요? 그날, 저를 주워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가 단순히 변덕이라면, 이 세상에 서로밖에 없는 두 분의 변덕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걸까요?”

핏기가 몰려 새빨갛게 자국이 남은 것을 몇 번이고 연달아 짓이긴다.

“스노우님, 화이트님…… 두 분은 어린아이에게 유독 관대하시죠. 이보다 시간이 지나 제가 어른이 되어도, 저는 여전히 두 분에게 사랑스러운 제자인가요?”

얼어붙은 손으로 팔뚝을 감쌌다. 소맷자락 아래, 손톱을 세워 드러난 피부를 할퀴었다.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저한테는 중요한 문제라서…….”

작게 신음 한 피가로가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머릿속에 들어찬 무언가를 몰아내려는 것처럼 좌우로 얕게 도리질을 쳤다.

“제가 없어져도 두 분은 아무렇지 않으시겠죠. 스노우님에겐 화이트님이, 화이트님에겐 스노우님이 계시니까. 너무 당연한 건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언제나 나만 절박한 것 같아요. 나만 외로움을 느끼고, 나만 다시 혼자가 될까 봐 전전긍긍한 것 같아요.”

쌍둥이는 말없이 피가로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이렇게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자기 좋을 대로 주절주절 늘어놓은 말은 하나같이 엉터리였다. 이기적이고 편집적이어서 대답하기 곤란할 듯싶었다.

“아니,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저는, 그런 게 아니라.”

꽉 막힌 한탄이 뿌연 입김과 함께 떠올랐다. 스스로가 꼴불견이었다. 코가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무엇을 위해 이런 버거운 짓을 하고 있었을까.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허상에 홀려 얼어붙은 바다에 무작정 뛰어들던 그때처럼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저 두 분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인데.”

올바른 답을 구하듯 절박하게 쌍둥이를 쳐다봤다. 살아온 세월만큼 현명한 스승은 언제나 옳은 답을 들려주었고,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런 기대감을 담아 쳐다보자 그들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돼, 더는 무리다. 두 사람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실망스러운 눈빛이 돌아오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누구도 필요치 않는 불용품이 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 바다에서 두 분에게 매달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계속 앞으로 나아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어야 했는데…….

“피가로여, 고개를 들어라.”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구나. 그대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 우리의 부덕인 게지.”

쌍둥이는 피가로를 꾸짖지 않았다. 도리어 제 탓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해서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가여운지고.”

“이런 식으로, 언제나 불안에 떨고 있었구나.”

쌍둥이는 안쓰러움에 혀를 찼다. 남의 눈치를 과하게 살피며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제자의 진심 어린 고백은 저릿한 통증을 유발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의 미숙함이 안타깝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피가로의 방황과 불안은 결국 그가 얼마나 사랑과 소속감을 갈망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쌍둥이에게는 가여운 아픔으로 다가왔다.

“진작 두 분에게 여쭤봤어야 했어요. 멋대로 판단하지 말고, 두 분께 먼저 물었어야 했어요. 하지만 두 분은 언제나 쉽게 끝을 말씀하시니까, 막상 답을 듣기 무서워서…….”

자신은 쌍둥이와 같지 않다. 쌍둥이처럼 평생 서로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아이는 언젠간 어른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터전을 찾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 확신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었다. 그러니 가장 필요한 건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여태 꾹꾹 눌러 감춰온 진심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걸 보면.

“죄송해요. 이렇게 겁이 많고 못난 사람이라서.”

언제부턴가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몇 번이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사과를 반복했다.

“아직 어리구나. 이렇게나 어려…….”

“우리가 그댈 믿지 않으면 누가 믿을까.”

쌍둥이는 주저앉은 피가로를 따라 무릎을 굽히고 몸을 숙여 구부정한 등을 감쌌다. 두 쌍의 팔이 서로 얽히듯 피가로를 끌어안았다.

“괜찮다.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어. 아직 늦지 않았단다.”

“그대가 그러고 싶은 만큼, 언제까지고 곁에 있어도 된단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의 편이니.”

자상하게 다독이는 손길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을 땐 얼굴이 온통 축축했다. 두 사람은 피와 먼지가 얼룩덜룩하게 묻은 피가로의 뺨을 옷소매로 닦아내었다. 쌍둥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 만난 바다에 그러했듯, 턱을 감싸고 이마와 뺨에 쪼는 듯한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제야 지독한 추위가 느껴졌다. 숨을 쉬기 어려운 것이 폐부에 들어찬 찬 공기 때문인지, 끊임없이 들썩이는 어깨 때문인지 알기 어려웠다. 쌍둥이에게 몸을 기댄 채 헐떡이고 있으면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옳지. 차라리 예언을 할까.”

“예언은 우리의 특기이니 말일세.”

쌍둥이가 서로를 마주 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들은 미리 약속한 것처럼 입을 모아 말했다.

“걱정이 많은 그대를 위해 한 가지 예언을 내려주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항상 너를 총애할 것이다.”

말을 마치고도 부족하다 느꼈는지, 재빠르게 한 마디씩 덧붙였다.

“늘 아끼고 사랑할 것이야!”

“무엇보다 우리의 애제자니까 말이지.”

맥 빠진 피가로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보통 그런 걸 예언이라고 하진 않죠. 그런 건 예언도, 약속도 아니잖아요.”

기운 빠진 목소리에도 쌍둥이의 안색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스노우와 화이트는 두 팔을 크게 벌려 피가로를 끌어안은 채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아무렴 어떠냐.”

“드디어 웃어주는구나.”

자그마한 쌍둥이가 어린 목소리로 까르르 웃었다. 껑충 뛰어 한 발자국 앞서 나간 그들은 이번엔 피가로의 손을 각자 하나씩 잡았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이 날씨에 돌아다니기엔 늙은이는 뼈가 시리구나.”

“그런 스노우와 피가로를 위해 이 몸이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내어주지.”

4.

“그때는 듣기 좋은 말로 그대를 달래주었어. 마법사는 약속을 하지 않으니까.”

“스노우, 그대도 솔직하지 않구먼. 그냥 듣기 좋은 말만은 아니었지 않나.”

스노우의 가벼운 발언에 화이트가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피가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쌍둥이 스승이 남의 마음도 모르고 무신경한 말을 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얼추 맞네요. 용케 떠올려주셨어요.”

쌍둥이는 에헴, 하고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가만히 있어도 절로 으쓱이는 어깨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본인, 한다면 하는 사람일세.”

“본인도!”

턱을 괴고 앉은 채 멍하니 있던 오즈가 묵직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약속을 하지 않았군.”

여전히 느린 반응이다. 피가로는 키들키들 웃으며 텅 빈 자신의 잔 대신 오즈의 잔을 가져가 대신 마셨다.

“보통은 그러겠지. 너도 알잖아. 오래 산 마법사들은 약속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아. 약속으로 인해 파멸하고, 맺은 약속을 후회하는 마법사들을 수도 없이 봐왔지. 그래서 절대로 약속을 하지 않아.”

빈 잔을 돌려받은 오즈가 물었다.

“아쉽진 않나?”

피가로는 완전히 의외란 얼굴이었다. ‘네가 그런 말을 다 해?’ 정확히 그렇게 묻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연륜 있는 마법사답게 그는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다행이야. 그런 애매한 약속을 했으면 지금까지 계속 괴롭힘당하고 있었을걸. 물론 지금도 만만찮지만.”

고개를 숙인 피가로가 음, 하고 난처한 소리를 냈다. 공연히 눈썹을 긁적이다가 미지근한 술잔의 표면을 툭툭 건드렸다.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쌍둥이의 관심도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몰렸다. 두 사람이 답을 기다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느껴진다. 피가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냈다.

“하지만, 그래, 한 편으로는 그쪽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죽는 날까지 부대끼면서, 서로 아끼면서 산다니……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우리도 이렇게 썩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걸.”

몇 마디 하기 무섭게 칼같이 잔소리가 쏟아진다.

“썩은 인연이라니, 말이 심하구나. 우린 아직도 피가로를 아끼고 사랑하는데!”

“네네, 감사히 여기고 있어요. 진심이에요.”

건성으로 대답하는 피가로의 목소리엔 고마움과 귀찮음이 적절하게 섞여있었다.

“그러고 보니 피가로 말이야. 그다음에 호되게 앓아누웠지. 여러모로 마음고생이 심했으니 말일세.”

“눈보라 속에 며칠간 있기도 했고…… 피가로는 생각보다 더 섬세한 아이라는 게야.”

“응응, 애교가 많고 외로움을 많이 타지.”

“우리가 극진한 간호를 해줬다네.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줬구나.”

“그리고 굿나잇 키스를 해줬어.”

먼 옛날을 떠올린 쌍둥이가 꺅꺅 야단을 떨었다. 어지간해선 얌전히 듣고 있으려 했는데 이것만큼은 도저히 무리였다. 생리적인 거부감을 넘어서 오싹함까지 든다. 피가로는 심각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굿나잇…… 뭐? 잠깐, 그거 모르는 일인데요.”

“잠든 뒤에 했으니까.”

“아…… 거기까진 알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묻지 말 걸 그랬다. 피가로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스노우는 투덜거리고, 화이트는 혀를 찼다.

“정말~ 여전히 부끄럼이 많은 아이구나.”

“거짓말 치면 못 쓴단다. 사실은 엄청나게 알고 싶었을 거야. 그리고 엄청나게 감동받았겠지.”

“여전히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시네요. 뭐, 그러세요.”

피가로는 한숨을 쉬며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수천 년 지난 과거의 흔적을 이제 와서 지워낼 수 있다는 듯이 열심히도 닦았다. 일부러 보란 듯이 얄밉게 구는 게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쌍둥이는 피가로를 아니꼽게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치열한 신경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즈음, 오즈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극진한 간호라는 건?”

“지금까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겐가.”

스노우가 탄식했다. 말이 탄식이지, 거의 감탄에 가까웠다. 오즈의 이해력은 굼벵이에 가깝다. 그 사실이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어째선지 매번 놀라게 되었다.

예로부터 오즈의 질문에 한 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답해주는 사람은 피가로뿐이었다. 피가로는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극진한 간호라는 건 말이야.” 설명을 위해 말을 꺼내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거린 피가로는 쌍둥이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즈는 아서가 아플 때에도 나한테 데려왔었네. 그 조그마한 어린애를 얼음 물에 넣어버리기나 하고…… 스노우님, 화이트님. 한 번도 오즈가 아플 때 돌봐주지 않은 거예요?”

“으음…….”

“오즈는 튼튼한 아이였으니까…….”

쌍둥이가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당신들이 그럼 그렇지. 짧은 대화로 상황을 파악한 피가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례한 눈빛이구먼!”

“스승을 향한 경의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존경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한테 하는 거죠.”

일단 큰 소리를 내보았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진 못했다. 쌀쌀맞은 제자의 말에 충격받은 쌍둥이가 “쿠궁!” 소리를 냈다. 훌쩍거리는 스승의 울음소리에 오즈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납게 인상을 쓴 것이 누가 봐도 엄청나게 신경 쓰이는 태도였다.

반면, 원인을 제공한 피가로는 영 시큰둥했다. 어차피 전혀 상처받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설령 진짜라고 해도 그깟 상처, 받으면 어떤가. 이런 못난 어른들 밑에서 제자로 자란 이쪽의 인생이 더 불쌍했다.

마음 같아선 눈물로 마법관을 잠기게 하든 말든 끝까지 무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좀 해보라는 오즈의 강렬한 눈빛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좋아. 여기서 한 번 끊어가죠.”

결국 얼마 못 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피가로가 허공에 손짓하자, 카운터에 있는 잔 두 개가 둥실둥실 날아와 쌍둥이 앞에 놓였다. 피가로는 먼저 오즈와 자신의 잔을 채우고, 그보다 작은 잔에 남아 있던 술을 전부 털어냈다.

“잔 들어. 건배 한 번 하자.”

피가로는 오즈에게 술을 권한 뒤, 쌍둥이에게도 똑같이 권했다. “어서, 스노우님이랑 화이트님도요.”

오즈는 선뜻 잔을 들어 마시려다가 건배를 떠올리곤 멈칫했고, 눈을 동그랗게 뜬 쌍둥이는 못 이긴 척 작은 잔을 하나씩 가져갔다.

“앞으로의 원활한 관계를 위하여.”

“다른 건배사는 없는 거니?”

“네. 건배.”

“건배.”

중간에 누군가 불만을 토로했으나,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다 함께 구령을 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탁자에 깔끔하게 비운 잔 네 개가 놓였다. 오즈가 처음에 비해 현저히 느려진 어조―원래도 느렸지만 더 느려졌다―로 말했다.

“아무것도 받지 못한 건 아니야.”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잔을 부딪친 건데, 다시 직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황당해진 피가로가 “오즈, 너 말이야…….” 하고 운을 떼었을 때였다. 오즈는 피가로의 말을 끊고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아서를 네게 데려간 건, 아프면 네게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뭐 그런 건가? 하긴, 넌 아이를 돌보는데 서툴렀으니까.”

“그런 게 아니다.” 오즈는 내리뜬 눈을 들어 똑바로 피가로를 마주했다.

“네가 그랬다.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자기한테 오면 된다고.”

“……내가?”

피가로가 말을 더듬었다. 솔직히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랬나아, 하고 말꼬리를 늘이며 머리를 굴려보지만 역시나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의지가 되고 싶었다. 그건 오즈한테도 마찬가지였다.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 중 한 명에는 그 역시 포함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딱 자신이 할 법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색하게 손목을 문지르고 있는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감은 오즈가 다시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그래서 네게 갔다. 너라면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오즈는 피가로가 자신과 눈을 맞출 때까지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피가로는 긴 시간을 들여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췄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듯 오즈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은 감탄사를 냈다.

“나, 이렇게나 신뢰받고 있었구나.”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뿌듯함이 벌어진 입에서 새어 나온다. 하나뿐인 형제제자로서 제멋대로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오즈의 곤란한 얼굴을 보는 것도 나름 즐거웠지만 오즈에게 신뢰받는 것이 가장 기분이 좋았다.

생각하는 것만큼 큰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뭉클해졌다. 순식간에 마음이 뜨거운 열기로 충만해져서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고 만다.

“아. 피가로, 기분 좋아졌다.”

“이 정도로 행복하길 바라진 않았는데.”

“이보세요, 어르신들. 나잇값 좀 하세요.”

“할아버지 아니야!”

“피가로한테 듣고 싶지 않은걸!”

얼마나 기분이 들뜨면 쌍둥이가 눈치 없이 참견해도, 뺨을 부풀리고 툴툴거려도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버릇처럼 잔에 손을 뻗었다가 뒤늦게 비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한 번 물꼬를 튼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미친 게지.”

“제정신이 아니야.”

쌍둥이가 다 들리게 저들끼리 소곤거렸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이젠 오즈조차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는 피가로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결론이 뭐지.”

어느덧 탈선한 이야기를 되돌린 건 오즈였다. 꽤나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피가로는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러게. 두 분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간단한 얘기가 여기까지 끌려버렸네.”

“너는 잘못이 없는 줄 아느냐, 너는.”

“예나 지금이나 영악한 아이야.”

“처음부터 말했지만 저랑 아서는 반대의 경우니까요. 저도 대화에 가담하긴 했지만 결국 스타트를 끊은 건 두 분이셨죠.”

“피가로야, 혀가 길다.”

“결론을 말해.”

“보거라. 오즈가 재촉하지 않니.”

“알겠어. 말할게, 말할게.”

할 말은 정해져 있었지만 막상 설명하려니 골치가 아팠다. 정확히는, 오즈가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하는 게 문제였다.

“나도 정답을 아는 건 아니야. 나도 너랑 비슷한 문제를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왔거든. 대충 이렇게 하면 좋다, 이 정도가 최선이다, 정도의 지침은 가지고 있지만 항상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진심 어린 호소도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나 받아들일 수 있는 거잖아. 여기선 그래, 아서는 꽤 알기 쉬운 편이니까 육아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도록 할까.”

피가로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며 느지막이 말을 이었다.

“몇 번이고 말해줘. 네가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대견하다고. 하지만 동시에 따끔한 충고도 해주는 거야. 계속 이대로 가다간 마력이 불안정해질 거다, 더 높은 경지를 위해 옆에서 지켜보며 도와주겠다. 뭐, 거짓말은 나쁘지만 그게 아니라면야. 그리고 마지막엔 꽉 안아주면 돼. 숨도 쉬기 버거울 정도로. 어차피 그럴 셈이었지?”

“눈치채고 있었군.”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오즈치곤 보기 드물게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지금이라면 독심술을 쓴다고 말해도 진심으로 믿을 것 같았다. 피가로는 흥, 하고 코를 울려 웃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무리 퇴물이어도 동고동락한 내 형제제자랑 올해 열일곱 된 애송이의 상태 정도는 무난하게 파악하지.”

“퇴물이 아니다.”

뜬금없는 오즈의 말에 피가로는 멈칫했다. 농담인가? 당연히 농담이겠지? 어느 타이밍에 웃어야 할까? 오즈를 다루는―아니, ‘대하는’ 이겠지? 오즈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이제 그만두기로 하지 않았나―건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여전히 어려워서, 언제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대충 장단에 맞추기 위해 입꼬리를 슬그머니 당겼으나, 마주친 오즈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설마 위로한 건가? 희미한 가능성이 뇌리를 스친다. 오즈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론 요즘이라면 뭔가 다를 거라는 희미한 기대가 생겼다.

“어…… 그래, 고마워. 솔직히 네가 그런 말 할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해하지 못한 오즈가 입매를 일자로 만들었다. 이런, 오해의 소지가 있었나 보다. 피가로는 열심히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아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싫다는 건 아니니까.”

서둘러 덧붙이자 그제야 주름진 미간이 약간 풀어졌다.

“네 고민이라는 건.”

“여기서 말할 건 아니지만, 아무튼 네 일과는 달라. 난 오히려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 없는 상태랄까. 아니, 슬슬 결단을 내려야 할 거 같은데…… 일단 자리를 만들어서 얘기부터 해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라.”

“힘내라고? 하하, 그거 듣기 좋네.”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즈음, 인기척이 나더니 누군가가 움직였다. 그들 외에 바에 남아있는 인물, 당연하게도 가게 주인인 샤일록이었다. 그동안 카운터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그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야기는 마치셨을까요? 슬슬 폐점 시간이 다가와서요.”

자영업자도 고생이 많다. 마감 시간까지 줄기차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손님을 내쫓지도 못하고 지켜봐야 한다니. 원래도 샤일록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피가로는 그를 각별히 갸륵하게 여겼다.

“그렇게 오래 있었나.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건 오랜만이네. 그럼 일어날까요?”

의자를 빼낸 피가로가 으쌰, 아저씨 같은 기합을 넣으며 무릎에 앉은 화이트를 안아 올렸다. 샤일록은 베넷 바의 조명만큼이나 은은한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손에 든 것을 건넸다.

“그전에 이걸.”

피가로의 다리에 매달린 스노우가 까치발을 들었다.

“오, 무척 값나가 보이는 와인이구나.”

“굉장히 달콤한 냄새가 나는구먼.”

피가로는 쌍둥이의 유난스러운 반응에 눈썹을 내려뜨렸다.

“이건 뭐야, 샤일록?”

“이야기를 들려준 것에 대한 답례에요.”

“네게 들려줄 생각은 없었는데. 남의 말을 엿듣다니, 서쪽 마법사는 취미가 고약하구나.”

여우처럼 눈매를 가늘게 접은 샤일록이 후후, 하고 웃었다. 그는 손을 뻗어 흐트러진 화이트의 리본 장식을 바로잡아주었다.

“남이 들어선 안 될 프라이빗한 이야기라면 공개된 장소에서 삼가셨어야죠. 그래서, 받지 않으실 건가요?”

“설마. 이리 줘.”

설령 답례라 해도 샤일록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기회가 있을 때 경험해두어야지. 피가로는 싱글벙글 웃으며 술을 받아들었다.

“어차피 오늘은 오즈가 쏘는 거라 이런 뇌물은 필요 없는데 말이지.”

“그래도 받아주세요. 그리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것이니.”

“뭐, 샤일록 같은 미인의 호의는 언제나 환영이니까. 이봐, 오즈. 이건 아껴뒀다가 쌍둥이 선생님과 반주할 때 마실게. 괜찮지?”

“상관없다. 네 이야기를 팔아 얻은 술이니.”

“역시 너는 화술을 조금 더 익혀야겠다.”

방금 전까지 달콤하게 굴던 오즈는 금세 평소의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머리를 기울이며 웃은 피가로가 손에 든 와인을 흔들었다.

“들으셨죠? 두 분 거예요.”

“야호~!”

스노우와 화이트가 두 팔을 높이 들어 환호했다. 샤일록은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한 것처럼 여상한 낯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확신이 들었다. 쌍둥이 선생님은 음주를 즐기지 않지만 샤일록이 알아서 적당한 걸로 골라주었을 것이다. 하여간 이쪽도 제법 수완이 좋은 마법사다.

화이트를 안은 피가로는 뒤편의 의자로 다가갔다.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액자에 손을 뻗자, 품에 있던 화이트가 스노우를 따라 스르륵 액자로 빨려 들어갔다. 피가로는 몰래 하품하는 오즈의 품에 억지로 액자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스노우님, 아까 얘긴데요.”

“뭔가.”

“저, 싫어하지 않아요.”

“무엇을?” 스노우는 액자 속에서 눈만 굴려 피가로를 올려다봤다. 고개를 숙여 액자를 들여다본 피가로가 살며시 입가를 당겼다.

“눈 말이에요. 싫어하지 않는다고요. 옛날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리운 고향의 경치기도 하고…… 당신이 잔뜩 알려줬잖아요.”

피가로는 스노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액자 속 화이트가 꾸물꾸물 움직여 옆에 있는 스노우를 툭 쳤다. 처음엔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곧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화이트와 피가로를 번갈아 본 스노우가 아, 하고 웃었다.

“그렇구나. 내가, 화이트가, 우리가 그대에게 알려주었어.”

“알고 계시면 됐어요.”

말을 마치고 났더니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솔직하지 않은 점은 길러준 스승을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이 달아올라 뒤돌아서서 기지개를 크게 켰다.

“내친김에 오랜만에 북쪽으로 갈까요? 지금 당장은 말고요.”

“나는…….”

“물론 갈 때는 오즈, 너도 함께야.”

피가로는 오즈가 말을 마치기 전에 잽싸게 선수 쳤다. 슬쩍 돌아보니 오즈가 뭐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황 상 거절하려 했던 것 같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어두운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데, 들뜬 쌍둥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들끼리 조잘조잘 떠들었다.

오즈는 가만히 표정을 구길 뿐, 결국 방에 돌아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같잖은 가족 놀이에 동참하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이래서야 진저리를 치면서도 스노우가 부르면 꼬박꼬박 쌍둥이의 거처에 찾아가던 그때와 다를 바 없다.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결같이 마음이 약한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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