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나중에 몰아서 수정. 순서 싹 바뀔 수 있음.
“또 서운한 말을 하는구나. 우리는 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않니.”
“그래. 우리를 스노우와 화이트라는 이름으로, 또한 가족으로 묶는 존재는 너밖에 없지 않냐.”
“……그런 말씀은 살짝 서운하네요. 꼭 제가 없으면 우리가 더는 가족이 아닌 것처럼.”
이놈의 예민한 성정은 살면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뒤늦게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우리를 둘이서 하나인 존재로 창조한 건 피가로, 바로 그대가 아닌가. 그대가 우리를 책망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냐는 말이야. 그것도 이 좁은 실험실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 채로.”
“책망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전 그냥 소외되는 게 섭섭해서…….”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좋은 결과가 난 적이 없었다. 인간이란 어째서 이다지 감정에 휘둘리는 생물인지. 뒤늦게 자책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피가로여, 말해보거라. 우리가 무엇을 더 해야 우리를 인정해 줄 거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우리를 온전히 사랑해 줄 거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이 치솟았다. 서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구걸하는 건 두 사람답지 않았다. 동시에 그러기를 바라는 자신이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는 것. 필요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하고, 가질 수 있는 감정이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건 평생을 가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가장 큰 욕구였으니까.
정말 싫은 기분이다.
‘……짜증나.’
피가로는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요. 전 두 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요. 두 분과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제 삶의 전부를 바쳤는데, 이 이상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그 말도 맞구나. 피가로는 화이트와 나를 만나게 해주었지.”
“피가로의 세심한 배려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영원히 고독했을 것이야.”
스노우와 화이트는 그의 말에 동의했으나, 정작 피가로 본인은 엎드려 절 받는 심정이었다. 그럴듯한 표현과는 달리 그들은 그다지 만족한 것 같지 않았다. 피가로의 정성과 희생을 갸륵하게 여기기보다 원치 않는 선물을 받은 것처럼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가 따로 없다. 원래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은 끝이 없다 하지만, 매분 매초 서로의 눈치를 보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럼 전 준비하러 가볼게요. 촬영 끝나면 바로 나갈 테니까 두 분은 낮잠을 주무시든 말든 알아서 하시고요.”
“엄청 기분 나빴나 봐. 잔뜩 꿍쳐 두고 있구먼.”
“에잉, 속 좁기는.”
“제가 직접 절전 모드로 전환해 드릴까요?”
설령 가족을 둘러싼 기만과 슬픔이 지긋지긋할지라도 모두를 잃고 혼자 남는 것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독사 같은 혓바닥 아래 진심을 숨기고 있을지언정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는 이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
피가로가 처음부터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썩어빠진 어른이었던 건 아니다. 모든 어른에게 어린 시절이 있듯, 거뭇거뭇한 다크서클과 까슬한 수염자국이 난 그에게도 꿈과 희망으로 반짝이던 과거가 있었다.
“공학자가 되고 싶어요.”
화이트의 무릎 위에 앉은 피가로는 손에 든 책을 높이 들었다. 아이의 주위에 쌓인 것은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서적이었다.
“영특하기도 하지.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을꼬?”
소년처럼 까르르 웃은 스노우가 아이의 말랑한 볼을 향해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부모의 애정에 얌전히 당해줄 피가로가 아니었다. 피가로는 스노우의 입맞춤을 피해 잽싸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과학의 발전은 급진적이죠. 지금은 다들 쫓기듯 도망치고 추월하기 급급하지만, 결국은 느린 것이 남을 거예요. 서둘러야 하는 사람은 부족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뿐이죠. 남들을 제치는 행위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움직일 때 머물러있는 여유가 사치가 되는 날이 올 거예요. 전 그런 여유를 더 많은 사람들이 누렸으면 해요. 그러니까 그걸 위한 턱을 낮추고 싶어요.”
피가로는 뺨을 느슨하게 풀며 책 페이지를 매만졌다.
“두 분이 제게 쏟는 돈과 애정, 어느 쪽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요. 언젠가 제가 받은 것 이상을 스노우님과 화이트님에게 돌려드리고 싶어요.”
“똑똑한 줄만 알았더니, 어쩜 이리 대견할까. 우리의 홍복이 따로 없구나.”
“그 정도는 아니에요…….”
화이트에게 등을 기댄 아이는 다리를 얌전히 두지 못하고 앞뒤로 흔들었다. 곱슬기가 있는 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 끝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있었다. 듣기 좋은 말은 청산유수로 쏟아내는 주제에 쑥스러움도 잘 타고 숫기가 없었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났다.
피가로는 어릴 때도 범상치 않은 아이였다. 비록 잎사귀가 꽁꽁 얼어붙은 추운 겨울, 눈 덮인 야산에 버려진 고아였으나, 동떨어진 사고방식과 뛰어난 재능 탓에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본 적 없었다. 미래에 대한 깊은 시름에 잠겨있던 건 열댓 살이 처음으로, 그나마도 쌍둥이 신사의 양자로 입적된 이후에는 캄캄한 앞날을 향한 고민조차 사라졌다.
스노우와 화이트는 피가로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낼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건 신이나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두 사람은 막무가내였다.
갈 곳 없는 아이에게 머물 집을 만들어주고 꿈을 키워준 두 사람은 피가로에게 친부모나 다름없었다. 그런 쌍둥이가 어느 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작고했을 때, 피가로는 세상이 끝난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실제로 피가로의 삶은 그로부터 오랫동안 흙빛이었다. 그러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고 괴로웠지만, 돌이켜보면 억수로 퍼붓는 소나기나 폭포의 유속처럼 찰나의 순간이었다.
피가로는 금방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 일은 무기력을 덜어내고,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라스티카와 일할 때는 좋았다. 비록 끝까지 진심을 터놓지는 못했지만, 라스티카는 좋은 친구이자 열정 넘치는 동료였다. 그때는 지금보다 마음 맞는 팀원들도 많았고, 가능성이라는 희망에 눈이 멀어있을 즈음이었다. 꿈을 대하는 태도도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절박함보다는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에 가까웠다.
이렇듯 폴몬트 라보라토리에 입사한 것은 단점보다 장점이 두드러졌다. 좋은 동료를 만났고, 개인으로는 접할 수 없었던 많은 연구 자료를 섭렵할 수 있었다. 굳이 치명적인 단점을 꼽자면 까마득히 높은 자리에 있는 상사가 그 사람이라는 점일까.
때는 피가로가 서버 데이터에서 ‘카르디아 시스템’의 정보를 찾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이사장실에 불려간 피가로는 무르를 대면했다.
“피가로, 역시 예상대로 카르디아 시스템에 접근했구나.”
공교롭게도 시기가 좋지 않았다. 무르는 피가로를 위해 차를 내어주었지만, 그는 전혀 대접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예상대로? 이사장님은 제가 카르디아 시스템을 연구할 것을 알고 계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말하자면 그렇지. 당신의 관심사도, 폴몬트 라보라토리에 입사한 이유도 전부 알고 있으니까.”
완벽한 한 쌍으로 만들어졌을 두 사람이 서로 싸우고, 화이트가 부서졌다. 다른 누구보다 자신의 반려를 위해야 할 스노우가 화이트를 망가뜨렸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스노우의 어리석음 덕분에 피가로는 다시 한번 가족을 잃게 되었다. 그 뒤처리를 마치기도 전에 불려온 거였다. 아마도 연구소 내에 설치한 감시 카메라를 통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 이사장에게.
무르는 피가로를 야단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원래도 자기 권위를 내세우는 것은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피가로가 앉을 자리를 거부하고 꿋꿋하게 서있자, 무르는 혼자 자리에 앉았다.
입에선 역한 토사물 맛이 났고, 벌겋게 짓무른 눈가는 쓰라렸다. 그런 상태에서 능청스럽게 차를 마시는 이사장을 보고 있으니 배알이 꼴렸다.
“당신은 내 생각보다 쉽게 그물에 걸려들었어. 그만큼 목적이 확고하고, 절박했다는 거겠지. 나로서는 환영해마지않을 호재야.”
“카르디아 시스템을 연구할 수 있도록 승인을 내려준 사람이 이사장님이셨군요. 어째서 끝까지 연구하지 않으신 겁니까? 고명한 학자인 당신이 카르디아 시스템이 가진 잠재력을 모르지 않을 텐데요.”
“서로 의견이 다르구나. 난 나름대로 끝을 봤다고 생각해. 나한테 카르디아 시스템은 깊이 파고들만한 가치가 없었거든. 그건 내게 스쳐가는 연구 중 하나에 불과해. 세계의 수많은 신비 중 하나일 뿐이지. 무엇보다 어설프게 인간을 따라 하는 로봇 같은 건 내 미학에 어긋나는걸.”
무르는 투명한 유리알 너머로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카르디아 시스템보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다른 쪽이야.”
옥색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은 상당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넋을 놓고 있는 피가로를 보며 슬그머니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난 당신에게 흥미가 있어, 피가로. 정확히는 당신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가로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아니지. 정정할게. 이 도시에서 당신만큼 끌리는 사람은 없어.” 무르는 깍지 낀 손에 턱을 얹으며 덧붙였다.
“그 말은 꼭 카르디아 시스템의 기원이 저한테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만…….”
“과연, 이해가 빠르네. 맞아. 당신을 통해 영감을 얻었어.”
이어진 말에 피가로는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사실상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특별한 인재에게 연구 재료로 간택 받은 거였지만, 애석하게도 전혀 고맙지 않았다.
“카르디아 시스템의 연구는 몹시 즐거웠어. 피가로, 당신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을 대체할 존재를 원했지? 그 연구 덕분에 나는 당신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앞에 있는 사람이 화병으로 죽어가든 말든, 무르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며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당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건 내 나름의 존경의 표시야. 원래 특별한 개념에는 그와 관련된 명칭을 붙이잖아? 당신을 통해 연구를 시작했고, 만족할 만한 값을 얻었으니 그 이름을 매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
“……이사장님이 저를 이해하신다고요?”
모멸감에 눈가가 가늘게 떨리고, 입매가 마구 뒤틀렸다. 저 사람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철저한 갑의 입장에서 상대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걸까. 어느 쪽이든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오만한 이사장이 눈앞에 있는 인격체를 무시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날 우습게 보는 거야! 이쪽은 카르디아 시스템의 연구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잘난 듯이 지껄이기나 하고…… 카르디아 시스템의 진가를 알고 있으면서 무책임하게 손을 놔버리다니, 과학자로서의 소명 따위는 없는 거야? 당신 같은 사람이 가벼운 유흥거리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궁지에 몰린 사람의 절박함을 모르는 이에게 훈수를 듣고 싶지 않았다. 턱에 힘이 들어가고, 두 눈은 부릅 뜨였으며, 뻣뻣하게 세운 목에 핏대가 섰다.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단순히 눈앞의 건방진 천재가 자신의 밥줄을 쥐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은 빙글빙글 웃는 면상에 대고 어디까지 연구를 진행했냐며 다그치고 싶었다.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은 사례가 있다면 순순히 내놓으라며 협박하고 싶었고, 발밑에 엎드려 연구를 마저 진행해달라며 싹싹 빌고 싶기도 했다. 아무튼 이러고 싶었다가 저러고 싶었다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고독의 이해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우린 서로 공통점이 있네. 아, 물론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했다는 것도.”
자수성가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자수성가의 뜻을 모르는 것 아닌가? 우연히 갑부 집안에서 태어나 돈과 권력을 대물림 받은 기득권층 주제에.
“…….”
피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관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 사회인으로서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목에 걸린 욕지거리를 냅다 이사장의 면전에 쏘아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쪽도 무르를 나무랄 입장은 되지 않는다. 그 또한 운이 좋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무르와는 다른 점이, 피가로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자수성가라는 타이틀을 캐치프레이즈처럼 사용하곤 있지만, 그는 몇만분의 일 확률로 특별한 복권에 당첨된 케이스였다. 성공의 기반이 된 건 당연히 양부모가 물려준 재산이다. 하이클래스로 남아있으면서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살아갈 돈. 원하는 만큼 공부를 하고, 최소한의 기반을 다질 정도의 재산 말이다.
“물론 다른 점이 있긴 하지. 사람의 마음을 글로 배운 사람과 직접 상실을 겪어본 사람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어? 그 경험이 바로 당신과 나의 중요한 차이점일 거야.”
‘또 같은 취급…….’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편함이 표정으로 드러났던 것 같다. 무르는 부하 직원의 은근한 멸시에 코웃음을 쳤다.
“내 칭찬이 반갑지 않았으려나? 당신의 노력을 높이 사고 있어.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을 다른 형태로 되살린다니, 애틋하기도 하지. 천륜을 거스르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그리움과 사랑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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