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프로토콜:#N/A 14


날조.

이대로면 영원히 미완일 거 같아서 스트리트 글쓰기 함.

나중에 몰아서 수정. 순서 싹 바뀔 수 있음.


피가로는 망설임 없이 답했고, 담당의는 멈칫했다. 피가로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담당의를 계속 곁눈질했다. 구부정한 자세로 목을 쭉 뺀 채 집중하고 있으니 시선을 눈치챈 담당의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그 말은 원하시던 답이 아니군요.”

담당의는 서둘러 안색을 바꾸고 자세를 고쳐 앉았으나, 그보다 피가로가 빨랐다. 피가로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그는 뭉툭한 손끝으로 왼쪽 이마를 문지르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창백한 얼굴에 짙은 패색이 묻어났다.

“제가 또 선생님을 실망시켰나 봐요.”

“가르시아 씨, 그런 게 아니에요.”

“억지로 위로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담당의는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피가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대로 피가로는 불쾌한 기색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피하는 반응이 당연하다는 투였다. 그는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저는 위로가 필요하지 않아요. 제가 겪은 일은 전부 자업자득이거든요.”

“…….”

담당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담당의는 조심스럽게 피가로의 눈치를 살폈다. 피가로는 생각에 잠긴 담당의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단순한 이야기예요. 그건 화이트님도 아니었고, 제 자신을 본뜬 것도 아니었어요. 제작 의도를 똑바로 반영하지 못한 물건을 빈말로도 잘 만들었다 말할 수는 없겠죠. 프로젝트가 성공했다는 건 착각이고, 제가 만든 건 이도 저도 아닌 괴물이었던 겁니다. 그저 상황과 감정을 학습했을 뿐인, 인간을 따라 하는 거짓된 생명체.”

피가로는 이전의 동요가 거짓말처럼 빠르게 진정되었다. 차분하게 가라앉다 못해 일견 따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 일부러 꾸며낸 태도였다. 당혹감을 억누르고 평정을 가장하는 행동이 얼마나 먹혀들었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담당의는 더 이상 그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틀림없이 옳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치부를 들춰내는 것처럼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이다. 엔지니어로서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자아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피가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역시 마음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아직은 포기할 수 없어요.”

담당의는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그야 그럴 것이다. 재작년 피가로가 자기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었다며 솔직하게 고백했을 때부터 줄곧 담당의는 피가로의 무모한 도전을 만류하고 있었다. 말해도 좀처럼 들어먹지를 않으니 어느 순간부터 반쯤 포기한 상태기는 했지만 말이다.

자신의 행동과 그로 인한 결과를 회피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몹시 긍정적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피가로를 진료한 입장에서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기나긴 삶에 조금은 느슨하게 지내도 될 텐데, 피가로는 언제나 강박적일 정도로 모든 일을 서둘렀다.

피가로는 널리 알려진 모습으로, 그리고 실제로도 버들가지처럼 부드럽고 유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보이는 것과 달리 느긋한 사람이 아니었다. 몸은 쉬고 있을지언정 머리는 언제나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다.

먼 옛날부터 피가로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폭주기관차처럼 달리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을 풀어주고 느슨하게 지내는 게 가능한 사람이었다면 지금처럼 걱정을 사진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피가로는 무척 골치가 아픈 듯했다. 그는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머릿속으로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분명 기억과 감정을 연결하는 회로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텐데. 결국 내가 가진 제한된 정보만으로는 생전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건가? 하지만 토대는 틀리지 않았어. 아니, 틀리지 않은 게 아니야. 옳고 그름을 똑바로 검증할 수 없는 거야. 이것밖에 방법이 없는 거야. 끌어올 수 있는 자원은 오로지 내 기억뿐. 아무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니까 침착하게 다시 시도해 보면 돼. 어차피 이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나직한 중얼거림이 정적을 덮었다. 담당의는 익숙한 듯 섣불리 말을 끊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멈춘 피가로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가르시아 씨?”

담당의는 피가로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지만 어느 때보다 민첩하게 반응했다. 내담 파일을 들여다보던 담당의가 고개를 들었다. 피가로는 눈썹을 내린 채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통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단순히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했다. 담당의는 피가로가 아까부터 계속 같은 위치를 문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쪽이든 반드시 확인해야 할 일이었다.

“가르시아 씨, 머리가 아프신가요?”

“아뇨, 그건 아닌데…….”

“아까부터 계속 같은 곳을 만지고 계세요.”

“……아.”

피가로는 그제야 눈을 크게 뜨며 이마를 문지르고 있던 손을 내렸다. 여태 본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듯싶다. 담당의는 당혹감이 서린 피가로의 눈빛과 머뭇머뭇 팔을 내리는 방식을 유심히 살폈다. 맹세컨대 이전에는 없던 버릇이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없었던 버릇이 새로 생겼다면 그건 어떠한 사건에서 유발된 행동일 가능성이 컸다.

피가로는 담당의를 흘끔거리며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명백하게 혼날까 봐 두려워하는 눈빛이었다. 담당의는 익숙한 표정에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눈을 굴리며 입술을 비죽이는 모습을 보자 옛날 생각이 났다.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변치 않는 부분이 있었다.

“실은, 맞았어요.”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것은 결코 옛 추억처럼 온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네, 맞았…… 맞았다고요? 누구에게, 무엇으로요?”

눈을 크게 뜬 담당의가 언성을 높였다. 피가로는 여전히 담당의의 시선을 피한 채 팔짱을 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시스트로이드 폭주 사건 이후로 기자회견이 나갔잖아요.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보름 정도 출근 정지 당했거든요. 집에서 쉬다오라고 했지만 사실상 근신이나 다름없죠. 그래서 자택으로 가고 있었는데, 누가 달걀을 던졌어요.”

“날계란이요?”

“네에.”

“그게 무슨 무식한…….”

담당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상치도 못한 사건에 현기증이 이는지 미간을 짚고 헛숨을 들이켰다. 담당의의 동요를 읽지 못한 피가로는 두 팔을 휘적거리며 당시의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게 하필 정확히 이마에 맞아서 ‘팍!’ 하고 터지지 뭐예요. 꽤 아팠어요. 껍질이랑 뭔지 모를 끈적끈적한 것들이 머리카락에 잔뜩 엉겨 붙어서 불쾌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뭐, 이번 일은 조금 맞아도 싸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도 맞고…….”

“가르시아 씨, 가르시아 씨가 설령 큰 죄를 지었더라도 ‘맞아도 싼 경우’ 같은 건 없어요. 잘못했다고 해서 무조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당해도 된다는 건 그릇된 생각이에요.”

피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담쟁이넝쿨처럼 얽은 팔짱도 풀지 않는다. 전혀 납득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아쉽게도 그의 내담자는 상당히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였다. 피가로가 전혀 귀담아듣는 기색이 없자 담당의는 주제를 돌렸다.

“범인은 잡혔나요?”

“네, 현장에서 바로 잡혔어요. 자기가 했다는 걸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더라고요. 대중들이란 참…….”

피가로는 쉽게 주의가 분산되었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한쪽 다리를 살살 구르며 투덜거렸다.

“모두에게 변치 않는 사랑을 받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디스플레이에 뜨는 내 모습을 보고 자수성가의 아이콘이라고, 우리 세대에 가장 성공한 연구자라며 선망의 시선을 던졌으면서. 내 잘생기고 똑똑한 모습에 박수를 쳤으면서, 내 우수한 유전자를 시기 질투했으면서!”

“음, 자의식이 뚜렷하다는 건 좋은 일이죠…….”

흥분한 피가로가 언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담당의의 난처함도 커졌다. 어떻게든 입을 열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대답할 말이 없어 억지로 쥐어짜낸 느낌이었다. 다행히 피가로는 담당의의 반응에 별 관심이 없었다. 평소 무의미한 자가 진단과 습관적인 거짓말로 성가신 편인 그는 뜻밖에 이런 부분까지 까다롭진 않았다.

“지금도 출근 정지 상태인가요?”

담당의의 질문에 피가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죠.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집에 콕 틀어박혀서 보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담당의는 오피스텔 침대 위에서 금일 상담 약속 취소를 고려하는 피가로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동의의 표시로 머리를 주억거렸다.

“가르시아 씨는 보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가지셔야 할 것 같아요. 더 자주 외출하시고, 많이 걸으시고요. 물론 지금 당장을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당분간은 되도록 혼자 돌아다니지 마시고요. 스노우는 랩에 있나요?”

“네, 이래 봐도 스노우님은 연구소에 귀속된 몸이니까요. 허락 없이 멋대로 자택에 데리고 갈 수는 없거든요.”

“그럼 가르시아 씨 혼자 자택에…….”

담당의는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지만, 피가로는 미처 뱉지 못한 말을 손쉽게 읽어냈다. 지난 수년의 교제로 상대에 대한 데이터가 쌓인 것은 담당의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생님도 참, 불안할 게 뭐 있어요. 제가 아직도 그때 그 시절 코흘리개 아이처럼 보이세요?”

피가로는 우려를 놓지 못하는 담당의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정말 미안하지만 그다지 신용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3. 156(-13)회차

누군가가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연이은 불면의 밤 탓에 녹초가 되어있던 피가로는 위아래로 격렬하게 흔드는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휘둘렸다.

“피가로, 성공이야! 성공했어!”

입사 동기이자 연구 동료인 라스티카는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었다. 그런 라스티카가 흥분한 모습은 오랜 지인인 피가로에게도 몹시 낯설게 다가왔다. 순간의 기분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기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장장 10년에 걸친 연구였다.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 마음고생 등은 오로지 연구의 성공으로만 보상받을 수 있었다. 라스티카의 뺨은 발그스레하게 물들어있었고,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았다. 피가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동안 피가로의 손을 잡고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던 라스티카는 이내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 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참, 내 정신 좀 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팀원들을 불러올게.”

“잠깐, 라스티카.”

라스티카가 연구실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피가로는 그를 불러 세웠다.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손을 붙잡자 라스티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피가로는 맞닿은 다섯 손가락을 오므리며 겸연쩍게,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머금었다.

“고마워, 전부 네 덕분이야. 네가 없었다면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거야.”

라스티카는 보기 드물게 솔직한 반응에 놀란 눈치였다. 그러기도 잠시, 그는 꽃망울이 피어나듯 해사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 나나 다른 팀원들이 없었더라도 너는 언제고 해냈을 거야. 우리가 한 일은 미래의 성공을 앞당겨주었을 뿐이야.”

“그게 중요한 거지. 세간의 평을 빌리자면 카르디아 시스템은 기약 없는 프로젝트였으니까.”

라스티카는 더 이상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피가로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피가로의 고집은 폴몬트 라보라토리에서도 알아주는 편이다. 애초에 이만큼 고집스럽지 않았다면 모두가 불가능하다며 손을 내저은 프로젝트를 무사히 성공으로 이끌 수 없었을 터였다. 라스티카는 피가로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있잖아, 피가로. 너와 함께하면서 나도 많은 것을 배웠어.”

“뭐야, 갑자기 낯간지럽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연구를 성공한 것보다도 마침내 네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이 더 기뻐.”

상대가 보여주는 온전한 호의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라스티카의 순박한 태도는 비밀을 가진 자에게 치명적이었다. 피가로는 울퉁불퉁한 가시처럼 따끔따끔 찌르는 양심의 가책을 외면했다. 찌푸린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실험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손을 맞잡은 스노우와 화이트가 있었다.

라스티카는 피가로가 진정으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라스티카만이 아니라, 이 실험을 함께한 모두가 그러하다. 그야 피가로가 사리사욕을 위해 연구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지금처럼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세상을 위한 연구라며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동료를 속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언젠가는 들키게 된다고 해도 당분간은 이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피가로는 입을 다물었고, 라스티카는 그의 침묵을 적당히 편한 대로 받아들였다.

“모두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하고 올게. 경사스러운 날이니까 오늘은 피가로가 한 턱 내는 거지?”

“법카도 있는데 왜 내가…… 그래 뭐, 아무렴 어때! 그러자.”

“다들 기뻐할 거야.”

라스티카는 끝까지 웃는 얼굴로 연구실을 나갔다. 덩달아 뺨을 느슨하게 푼 피가로는 라스티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입꼬리를 축 내렸다. 라스티카는 성미가 나긋하고 말이 느리니까 팀원들에게 경위를 설명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피가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실험대로 걸어갔다. 그는 실험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그 위에 누운 스노우와 화이트를 향해 상반신을 기울였다.

“스노우님, 화이트님.”

두 기체는 동시에 눈을 떴다. 피가로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언제 눈을 감고 있었냐는 듯 또랑또랑했다. 그들을 깨운 것은 그들을 세상에 낳은 주인의 목소리일까, 아니면 메모리에 심어진 낯익은 이름일까. 피가로는 그들이 무엇에 반응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나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스노우와 화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서로 시선을 교환하거나 눈을 깜박이는 둥 가벼운 반응조차 없었다. 가만히 누워 미동도 없는 그들은 그저 잘 빚어진 인형 같았다. 그 탓에 조급증이 인 피가로는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되물었다.

아직, 아직이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물려받았으니 당장은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경과를 관찰해 봐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욕심껏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이번에는 제대로 반응이 있었다. 크게 뜬 눈을 천천히 깜박인 스노우와 화이트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피가로,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

그 말에 피가로의 낯이 경직되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 어쩔 줄을 모르던 그는 곧 “아아.” 하고 가냘픈 신음을 흘렸다. 얼굴을 가린 두 손이 서서히 미끄러져 만면을 덮은 얇은 가면을 벗겨냈다. 여전히 딱딱하고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그만하면 충분했다.

피가로는 한껏 몸을 낮춰 스노우와 화이트를 끌어안았다. 쭉 뻗은 팔로 가는 어깨를 끌어안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뺨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먼 옛날,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한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두 분 다 어서 오세요. 보고 싶었어요.”

속삭이는 목소리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부모를 반기는 아이처럼 앳된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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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브포에버
    잘못하면 맞아도 싸다고 생각하면서도 잘못된 행위를 끝없이 하고 있어서 너무 재밌어요. 다음엔 무슨 잘못을 할지 기대되고 잘못을 덮으려는 듯한? 그렇기 때문에 멈출 수 없는 상태라는 느낌이라 더 좋아요.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도부가로 도부가로 도부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