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폭행…. 주의.
지능기계정보부의 두 신입은 그날부터 사내 데이터베이스에 남아있는 그랑벨 시리즈 A 타입의 초안을 바탕으로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회를 잡은 파우스트는 지나치게 기합이 들어가 있었고, 지나치게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한동안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다. 두 달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파우스트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레녹스의 공이 컸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그랬듯, 레녹스와의 호흡은 완벽했다. 그들은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이 프로젝트는 일반적인 규모보다 적은 인원으로 진행되었지만, 오히려 레녹스와 단둘이 작업을 하면서 더 높은 효율을 낼 수 있었다.
파우스트는 카르디아 시스템의 접근 권한을 얻고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서야 진정으로 가르시아 부장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카르디아 시스템은 어시스트로이드에게 감정을 부여하는 것. 즉, 인간에 의해, 인간의 필요로 만들어진 영혼 없는 기계에 사람의 마음을 불어넣는 연구였다.
카르디아 시스템에 대해 알게 된 파우스트는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카르디아 시스템을 탑재한 어시스트로이드에 올바른 기억과 인격을 부여하는 일이었다. 비록 완전한 형태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방법이라면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알렉에게 새 삶을 선물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실제 인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어시스트로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였다. 카르디아 시스템에는 모두가 학을 떼고, 가르시아 부장이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유가 있었다. 핵심이 되는 감정맵이 극도로 복잡하기에, 시스템을 실험하는 과정에서는 어시스트로이드에 기본적으로 내장된 시스템을 대거 비활성화해야 했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어시스트로이드가 인간에게 적대감을 품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적대감조차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로봇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요소로, 정밀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제어 프로토콜을 실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테스트를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알렉이 나를 공격할 리가 없지. 알렉은 전부 이해해 줄 거야.’
파우스트는 기억 속의 알렉을 믿었지만, 이건 혼자만의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구현하고자 하는 형태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이상, 파트너에게 말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원래라면 가르시아 부장에게 털어놓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가르시아 부장에게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녹스, 이런 말 하기 염치없지만 내 뜻에 따라줄 수 있을까? 오랜 미련을 떨쳐내고 후회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것만은 반드시 시도해 보고 싶어.”
본질적인 작업에 착수하기 전, 파우스트는 레녹스에게 동의를 구했다. 차마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레녹스의 반응은 무척 긍정적이었다.
“저는 손을 보탰을 뿐, 실질적인 작업은 파우스트 선배가 도맡아 하셨죠. 저는 상관없어요. 함께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인걸요.”
레녹스는 짧은 고민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파우스트 선배의 바람이 곧 저의 바람입니다.”
“너는 정말…… 고맙다. 이번 일은 언젠가 꼭 갚을게.”
몹시 감동한 파우스트는 레녹스의 손을 붙잡았다. 레녹스는 생색내지 않고 잔잔하게 웃었을 따름이다. 역시 레녹스는 요즘 하이클래스답지 않게 배려심이 깊고 상냥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니, 자신이 얼마나 큰 행운을 얻었는지 올해 들어 여러 번 곱씹게 되었다.
파우스트가 만들고자 하는 건 단순한 프로토타입이 아니었다. 지나간 상실의 상처를 치유하고,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단 한 명의 친구였다. 파우스트는 기체의 외관부터 사소한 특징 하나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A-GRANVELLE-999. 통칭, ‘알렉 그랑벨’이었다.
어린 시절의 친구가 무사히 살아남아 자신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면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알렉’은 그런 일념으로 제작되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친구를 누추한 육신에 가둬둘 수는 없었기에, 파우스트는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
절박함과 별개로 연구는 몹시 즐거웠다. ‘알렉’의 가장 큰 줄기가 될 인격은 파우스트의 기억 속에서 살아 있는 알렉의 모습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데이터화하여 생전 알렉에 대한 정보를 추출해냈다. 그 과정에서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야 할 이유도 생겼다. 부족한 부분은 과거 알렉을 보살폈던 시설과 그를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경험을 빌렸다.
그렇게 모인 정보를 종합해, 보다 정확한 기억과 성격을 재구성했다. 새로 태어난 ‘알렉’이 자신의 존재에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그리고 그간의 공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존재하지 않는 인위적인 사건들을 일부러 배치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익히 알고 있던 알렉의 구성에 손을 댄다는 사실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괜찮아졌다.
“파우스트 선배, 이쪽은 준비 만전입니다.”
“그래, 기억과 인격은 완벽하게 동기화됐어. 이제 배터리만 넣으면…….”
마침내 ‘알렉’을 재기동하는 날이 왔다. 겉보기만 번지르르하지 실상 구멍 난 양말 같았던 카르디아 시스템의 보완도, 여러모로 속을 썩이던 기체도 완성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동안 아무리 시도해 봐도 ‘알렉’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좀처럼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한 번은 하드웨어를 통째로 교체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간략하게 보고를 받은 가르시아 부장이 조언을 해주었다.
‘기체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구동 시스템의 문제일 가능성이 커. 한 번 점검해 보지 그래?’
당시 가르시아 부장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개인 랩 밖으로 일절 걸음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택으로 퇴근조차 하지 않고 거의 랩에서 상주하다시피 했다. 파우스트와 레녹스는 가르시아 부장을 염려했지만, 다른 동료들은 “이맘때 즈음엔 흔히 있는 일이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결과적으로 가르시아 부장의 조언은 정확했다. 파우스트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실험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실험대 위에는 조명 아래 더욱 밝게 빛나는 하얀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 잠들어있는 것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은 그리운 친구의 장성한 얼굴이었다.
파우스트는 마지막으로 뒤로 돌아 투명한 패널 너머에 있는 레녹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결한다.”
파우스트는 심장 역할을 할 마나 플레이트를 준비된 어시스트로이드의 왼쪽 가슴에 삽입했다. 직사각형의 마나 플레이트는 푸른 빛무리와 함께 기체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얕게 닫힌 눈꺼풀과 그 끝에 매달린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렸다.
눈을 뜬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곳에서 1년을 일했지만, 온전히 자신의 손으로 창조한 어시스트로이드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작은 손아귀가 자신의 손가락을 움켜쥘 때처럼, 생명의 탄생은 실로 경이로웠다.
온통 하얗고 푸르스름한 색이 넘치는 실험실.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에서, ‘알렉’은 첫 숨을 내쉬었다.
“알렉…….”
눈앞에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지독한 악취로 가득했던 고향, 둥근 장막 너머로 내다보이던 유일한 희망의 빛. 파우스트는 하늘에 포근하게 피어난 뭉게구름처럼 부드럽게 물결치는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알렉’의 두 눈은 유리 세공품처럼 아름다웠다. 다른 부위보다도 눈동자를 자연스럽게 구현하기 위해 특히 많은 비용을 들인 보람이 있었다. 파우스트는 되살아난 친구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어렵사리 억눌렀다.
뭐든지 몰아붙이는 것은 좋지 않았다. 우선은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고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어시스트로이드 쪽에서 먼저 행동을 보일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매뉴얼을 되새기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으나, ‘알렉’은 정상적으로 구동된 이후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부분에서 파우스트는 한없이 인내심이 부족했다. 그는 레녹스에게 간단한 사인을 보낸 뒤, ‘알렉’에게 접근했다.
“이봐,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파우스트.”
‘알렉’은 고개를 들어 파우스트를 바라보았다. 파우스트를 알아본 ‘알렉’의 눈빛이 대번에 흐리멍덩해졌다. 원하던 반응은 아니었으나, 이만하면 충분했다. 적응은 느려도 나머지 시스템은 전부 정상인 듯했다. 안도감이 밀려오며 맥이 탁 풀렸다.
“나를 알아보는구나. 그밖에 또 기억나는 게 있다면 말해줘. 특히 너에 대해서…….”
“나? 나는…….”
‘알렉’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열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가 쫙 펼치기를 반복하던 ‘알렉’은 몸을 돌려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허둥거리기도 잠시, 그는 머지않아 광택이 흐르는 기계에 흐릿하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알렉’은 기계에 비친 자신의 일그러진 형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머리와 얼굴, 목과 가슴팍, 그밖에 팔다리 등을 미친 듯이 더듬었다. 날카롭게 세운 손끝이 얼굴을 엉망으로 늘리고 짓뭉갰다. 인간보다 육체의 강도가 높다곤 해도 분명 통증이 있을 텐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같은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결국 보다 못한 파우스트가 ‘알렉’의 팔을 붙잡았다.
“알렉, 대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알렉? 아니야, 나는, 나는…….”
이름을 부른 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알렉’은 살아있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기괴하게 몸을 뒤틀었다. 팔다리가 마구 꺾이며, 잔뜩 힘이 들어간 손등의 힘줄이 불거졌다. 벽에 늘어진 그림자는 벼락 맞은 고목처럼 어긋나있었고, 흡사 영화 속 괴물을 방불케 했다.
악귀처럼 변해가는 친구의 모습을 목격한 파우스트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알렉’이 파우스트의 손을 강하게 밀쳐내며 크게 고함을 쳤다.
“나는 알렉이 아니야!”
그 소리는 마치 절규 같았다. 밀쳐진 파우스트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머리를 감싼 ‘알렉’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숨이 넘어갈 듯 흐느끼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닥치는 대로 주위를 부수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이상을 감지한 보안 센서가 눈치 빠르게 작동했다. 랩에 붉은 불빛이 번쩍이며 앵앵거리는 경보가 울려 퍼졌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파우스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알렉’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도 주변 기물을 파괴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연동이 제대로 안 된 건가? 아니면 작동 오류? 시스템에 충돌이 있는 건가? 잠깐 기다려봐, 알렉. 내가 바로 문제를 파악해서 편하게 해줄 테니까…….”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매서운 발길질이 날아왔다. 옆구리를 걷어차인 파우스트가 펄쩍 뛰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알렉, 알렉? 알렉이라고! 내가 아직도 네 친구 알렉으로 보여?”
파우스트는 옆구리를 감싼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은 파우스트가 얌전히 고통을 이겨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머리맡에 그늘이 드리우더니, ‘알렉’의 발이 파우스트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찍어눌렀다.
그대로 힘을 줘서 내리치자, 딱딱한 바닥과 충돌한 머리에서 큰 소음이 나며 두 줄기의 핏물이 턱을 타고 흘렀다. 순식간에 파우스트의 인중과 입가가 온통 시뻘겋게 물들었다. 약한 점막이 자극을 받아 코피가 멈추지 않고 지저분하게 쏟아져 바닥을 더럽혔다.
파우스트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에 어금니를 꽉 물었고, ‘알렉’은 한층 미쳐 날뛰었다.
“파우스트,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벌일 수 없겠지! 달라진 건 나만이 아니야! 너는 나를 알렉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래봤자 나는 네가 유사하게 빚어낸 가짜에 불과해. 네 기억 속에서 나는 변질됐고, 그동안 너는 변심했어! 그날 우리의 고향에서 함께 꿈을 나누던 너는 이제는 죽고 없는 거야!”
쩌렁쩌렁한 외침에 고막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파우스트는 쏟아지는 폭력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으나, 동시에 불쑥 뻗은 손이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떻게 제지할 틈도 없었다. ‘알렉’은 파우스트의 멱살을 움켜잡고 강제로 들어 올렸다. 두 다리가 허공에 붕 떴다. 그야말로 인간이 아니기에 가능한,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강제로 파우스트를 일으켜 세운 ‘알렉’은 그를 놓아주는가 싶더니, 곧장 손등으로 따귀를 후려갈겼다. 자세를 바로잡을 새도 없이 반대쪽에 똑같은 일격이 가해졌다. 무식한 힘에 고개가 홱홱 돌아갔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기우뚱거린 파우스트는 연이은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파우스트, 파우스트, 파우스트!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 감히 나를 하이클래스를 위한 노리개로 만들다니! 그저 너를 위해서, 너 하나만을 위해 나보고 평생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봉사하라는 거냐? 넌 정말 이기적인 녀석이야!”
눈에 실핏줄이 터졌는지 시야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파우스트는 연신 기침하며 핏물을 뱉어냈다. ‘알렉’은 개의치 않고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한 치 망설임 없는 발길질이 몸과 머리를 가리지 않고 세찬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얼마나 간사한 마음으로 이 일을 꾀했을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구나! 자기 주제도 모르고 이딴 짓을 벌이다니, 넌 벌을 받아야 돼!”
저항해 보려 했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팔을 막아내고 발목을 붙잡아도 ‘알렉’은 금세 뿌리치고 파우스트를 짓밟았다. 배를 걷어차이는 순간, 명치가 옴폭 패이면서 절로 숨통이 턱 막혔다. 헉, 소리 없이 신음한 파우스트가 배를 부여잡고 캑캑거렸다. 입가로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질질 흐르며 옹송그린 몸뚱이가 바삐 들썩였다. ‘알렉’은 말마따나 파우스트를 때려죽일 기세였다.
“파우스트 선배!”
뜻밖의 상황에 아연실색한 것은 레녹스도 마찬가지였던 듯싶다. 본의 아니게 넋을 놓고 사태를 관망하던 레녹스가 서둘러 달려왔다.
“레노, 오지 마!”
파우스트는 팔을 들어 그를 멈추고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크, 레녹스, 부장님을…… 부장님을 호출해!”
레녹스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서둘러 책상을 뒤졌고, 마구 떠밀린 책상 위의 물건들이 우르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파우스트는 네 발로 기어 도망치려다가 ‘알렉’에게 머리채가 붙잡혀 질질 끌려갔다. 빨갛고 거뭇한 시야가 약발이 떨어진 전등처럼 잇따라 점멸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 레녹스는 비상벨을 찾아 누른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날이 소란스러워지는 경보음 외에는 상황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각종 소음으로 먹먹해진 귓가에 레녹스의 황망한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분명 랩에 계실 텐데.”
‘알렉’은 급기야 파우스트를 체중으로 깔아뭉갰다. 뒤늦게 셧다운 장치의 존재가 떠올랐지만, 이 난장판 속에서는 아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경험 부족이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았다.
이 와중에 파우스트는 자신이 생각보다 튼튼하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알렉’이 파우스트의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친 것이다. 골을 울리는 타격에 속에서 무언가가 역류하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토사물에 질식할 지경이었다. 서서히 의식이 흐려졌다. 마지막 기운을 짜낸 미약한 반격은 강인한 어시스트로이드의 육체에 막혀 무의미한 시도로 변질되었다. 아, 이대로 기절하면 안 되는데. 적어도 레녹스만은 여기서 내보내야 하는데……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새빨간 점멸등과 눈부신 조명 아래, 강렬한 섬광이 번뜩였다. ‘알렉’의 등 뒤로, 레녹스가 보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얼굴로 스패너를 높이 쳐들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그것은 더 이상 파우스트가 아는 알렉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망가진다고 생각하자, 진득한 미련이 전신을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았다. 불현듯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강물을 타고 떠내려온 어린아이의 시신과 그 시신을 둘러싸고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던 시티 폴리스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파우스트는 피가래가 끓는 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레노, 부수는 건 안돼! 이건 나의 친구이자 우리의 결실이다!”
“…….”
“당장 그만둬!”
그러나 레녹스는 파우스트의 말을 듣지 않고 이미 손에 든 연장을 휘두르고 있었다. 레녹스의 풀 스윙은 정말이지 명품이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정통으로 얻어맞은 ‘알렉’은 깡, 하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고꾸라졌다.
레녹스는 그걸로도 모자라서 ‘알렉’을 향해 몸을 던졌다. 레녹스와 ‘알렉’은 서로 부둥켜안고 데굴데굴 바닥을 두어 바퀴 굴렀다. 잠깐 몸싸움을 벌이는가 싶더니, 우위를 점한 레녹스가 기체를 깔아뭉갰다. ‘알렉’은 한 번의 충격에 개의치 않고 버둥거렸지만, 그 위로 연달아 묵직한 스패너가 내리꽂혔다.
“아악! 싫어…… 하지 마, 아파! 아프다고!”
이제 바닥을 기는 것은 반대로 ‘알렉’이었다. ‘알렉’은 레녹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그럴수록 레녹스는 몸에 힘을 주고 단단하게 버텼다.
레녹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연장을 힘껏 내리쳤다. 커다란 망치로 못질을 하듯, 단지 연장을 들고 내려치는 무심한 행동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계속, 계속.
“이럴 거면 나를 왜, 왜 만들어낸 거야! 저주할 거야, 저주할 거다! 죽어서도 너희를…….”
기체가 부서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연약한 부분은 으깨지고 금이 갔으며, 금속은 찢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심히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연이었다.
각 부위에서 구부러진 전선이 툭 불거진 혈관처럼 삐죽삐죽 솟구쳤다. 단가를 낮추기 위해 사용한 저렴한 소재가 좌우로 쩍 갈라지며 내장된 기계 부품들이 터져 나와 이리저리 날아가 튕겼다. 눈을 감싼 투명한 막이 깨어지자 내부의 회로가 섬광처럼 번쩍였다.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이 간 푸른 하늘은 산산조각으로 깨져나갔다.
‘알렉’은 기체의 손상으로 움직임이 멎기 전까지 비명을 질렀다. 날카롭게 깎아지르는 비명은 그들이 있는 랩 전체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정도였다. ‘알렉’이 마구 몸부림치며, 깨진 파란색 유리조각이 파우스트의 발치까지 흩뿌려졌다.
어느 한 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힘없이 주저앉은 파우스트는 욱신거리는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레녹스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했지만, 파우스트에게는 이것이 살인처럼 느껴졌다.
파우스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자신의 눈가를 더듬었다.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살인이라면, 파우스트는 레녹스에게 암묵적으로 살인을 교사한 것이 된다. 원래는 파우스트, 자신의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레녹스에게 모든 것을 떠맡긴 셈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파우스트는 떨리는 팔을 내밀어 레녹스를 만류했다.
“그만, 그만해. 레노, 이제 됐으니까…….”
레녹스는 이마에 맺힌 땀을 팔등으로 닦아냈다. 그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한때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어시스트로이드를 내려다봤다. 그것은 이제 간신히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형편없이 찌그러져있었다.
“프로젝트는 실패했습니다. 제가 부장님께 보고를 올릴 테니, 선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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