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프로토콜:#N/A 10


날조.


진로를 정한 건 좋았지만, 그 길을 파고들어 결과를 낼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당시 어시스트로이드 산업은 이미 검증된 시장으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과포화 상태였다. 이른바 레드오션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폴몬트 라보라토리는 시티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굴지의 기업이었다. 입사를 희망하는 사람보다 빠지는 사람이 극히 드물어,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곳에 입사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꾸역꾸역 밀고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파우스트가 누군가. 그는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온 워킹클래스들의 희망의 상징이었다. 파우스트는 아카데미의 홍보문구처럼 아무나 할 수 없는 위업을 성취해냈다. 뜻을 품은지 두 해가 지나서, 그는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폴몬트 라보라토리에 입사하게 되었다.

마침 시기가 적절했다.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마친 후, 파우스트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딱 그때 폴몬트 라보라토리에서 공채가 올라온 것이다. 듣기로는 가르시아 박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부장급 인사를 비롯해 중간직들이 다수 퇴사했다던데, 이는 확실하지 않았다.

폴몬트 라보라토리에 성공적으로 입사한 파우스트는 마침내 동경하던 사람과 재회하게 되었다. 무척이나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반가워. 네가 이번에 들어온 신입이구나. 이름이, 그러니까…….”

“파우스트 라비니아라고 합니다.”

악수를 요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가르시아 박사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고 잡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피하는 것이 분명한 태도로 매정하게 몸을 돌렸을 뿐이다.

‘확실히 직장 상사에게 악수를 청하는 건 아웃이었을지도…….’

일하러 왔다기보다는 응원하는 아이돌을 보러 온 팬 같은 행동이었다. 파우스트는 뒤늦게 자신의 몸가짐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애초에 가르시아 박사는 파우스트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딱히 실망감이 들지는 않았다. 파우스트와 가르시아 박사는 그래봤자 아주 잠깐 만난 사이에 불과했다.

그래, 가르시아 박사는 이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었다. 하루에 만나는 사람이 몇 명인데, 고작 옷깃만 스친 사람을 어떻게 하나하나 기억하겠는가. 파우스트는 서운함이 고개를 들 틈도 없이 그 감정을 뻥 걷어차 날려버렸다.

“파우스트…… 아니, 라비니아 씨라고 하는구나.”

겉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가르시아 박사가 파우스트를 돌아보았다. 가르시아 박사는 왼쪽 가슴에 회사 로고가 박힌 하얀 실험 가운을 입고 있었다. 폴몬트 라보라토리 소속이라는 증표. 곧 자신이 입게 될 옷이기도 했다. 파우스트는 가르시아 박사와 그가 입은 옷을 조금씩 곁눈질―대놓고 쳐다보기엔 무례하다고 생각했다―했고, 넘쳐나는 열망으로 두 눈을 빛내며 늘어뜨린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나는 폴몬트 라보라토리 지능기계정보부 부장, 피가로 가르시아야. 호칭은 반말만 아니면 마음대로 해도 돼. 라비니아 씨, 내가 세 달 동안 당신을 가르칠 거야. 성가시고 까탈스러운 선임이 되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

“자, 잘 부탁드립니다.”

중간관리직은 어디 가고, 부장쯤 되는 사람이 신입을 직접 가르친다고? 듣자마자 의문이 들었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업계에서도 운영 방침이 독특하기로 유명한 폴몬트 라보라토리였다. 아무리 똑 부러져도 파우스트는 이제 막 학원을 졸업한 어수룩한 사회 초년생에 불과했으며, 꿈에 그리던 직장에 입사해 콩깍지가 단단히 씐 상태였다. 당시에는 무슨 이야기를 듣던 이 회사만의 특수한 룰이라고 생각했다.

“어렵거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도록 해. 만약 내가 불편하다면 도움을 줄 사람은 얼마든 있으니까 사양하지 말고.”

가르시아 박사는 한숨을 쉬며 “그리고 또…….”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어두운 낯빛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새로 들어온 신입에게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할 것들을 설명하려 했으나,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만 보니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 눈 밑도 거무스름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매스컴에서 보던 것보다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파우스트는 조금은 낯선 눈초리로 가르시아 박사를 바라보았다. 몽롱하게 흐려진 눈빛부터 턱에 남은 얇은 상처 자국까지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턱의 상처는 어느 면으로 봐도 면도날에 베인 상처였다. ‘서른이나 먹어도 면도가 서투른 건가…….’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또한 내색하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기억하는 가르시아 박사는 활발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피가로 가르시아라는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제 막 입사한 신입 앞에서 컨디션 부진을 숨기지 않는 모습은 그답지 않았다.

계속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가르시아 박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무거운 숨을 뱉어낸 뒤,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일단은 이 정도만 할까. 나머지는 생각나면 마저 설명하기로 하고. 내부 시설을 안내해 줄 테니 따라와.”

“네,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하하…… 기합이 넘치네. 라비니아 씨 같은 성격 꽤 좋아해.”

그 말을 듣고 파우스트는 몹시 감동했다. ‘저도 부장님이 좋아요.’ 그러나 마지막 이성으로 그 말만은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가르시아 박사에게 직접 사내를 안내받았다. 그러는 동안 기대감은 차츰 옅어지고, 냉정하게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사내 기류가 이상했다. 묘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직원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각자 연구를 하느라 랩 안에 있을 수도 있지만, 한참 근무 중일 낮 시간대에 이 정도로 고요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공채와 암암리에 돌던 흉흉한 소문. 싸한 예감이 들었으나, 목표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디딘 파우스트는 그것을 애써 외면했다.

“파우스트의 입사 시기는 정말 절묘했어요. 파우스트는 공적을 세우고 싶어 했고, 회사는 일머리가 좋은 연구원이 필요했거든요. 그때는 제가 입사한 이래로 일손이 가장 부족한 시기였죠.”

“그러고 보니 당시 어시스트로이드 산업이 급격히 상승세를 보였죠? 일손이 부족했다는 건 사업 확장을 위해 인력이 필요했다는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전혀 다른 이유였어요. 저희는 기초적인 구상이나 설계를 담당할 뿐, 실제로 기체를 찍어내는 건 생산시설이니까……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저희 쪽 연구원들은 원체 고집도 세고 괴팍해서 협력이 어려워요. 다들 제멋대로라서 여럿이 힘을 합쳐도 능률이 오르지 않죠. 가끔은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하고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 선생님도 아시죠?”

피가로는 기억을 되짚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얌전히 앉아있는 것이 힘든 사람 같기도 했다.

“이럴 때면 옛날이 그립다니까요. 그때는 손발이 잘 맞는 동료들이 많아서 훨씬 편했는데.”

그 말을 끝으로 피가로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담당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원래 피가로는 소나기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내다가도, 어느 순간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한참을 침묵하곤 했다. 그 버릇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는지, 피가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 이마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실은, 그 즈음에 동기가 자진 퇴사했어요. 라스티카라고, 언제나 저와 함께 연구에 매진하던 동료였죠.”

피가로는 찻물을 쭉 들이켜곤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냈다.

“원칙과 이론에 얽매여 고착화된 저랑 다르게, 라스티카는 창의성이 두드러지는 인재였어요. 연구에 도무지 진전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특히 많은 도움을 받았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라스티카도 저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저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천재였을지도 모르겠네요.”

피가로는 눈을 감고 아주 먼 기억을 되짚었다. 그때는 비교적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이 심하지 않았던 때였다. 정확히는,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이라는 낯선 병에 걸린 것은 라스티카가 먼저였으니까.

그 병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나갈수록 회사에, 그리고 사회에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같은 인간과의 의사소통에서 비롯된 갈등은 본격적으로 카르디아 시스템에 손을 대고, 연구가 결실을 맺을 무렵 더욱 심화되었다.

“복잡한 원론을 따르는 건 잘 정돈된 매뉴얼과 시간이 있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라스티카는 특별했어요. 라스티카는 마치 기발한 발상이 샘솟는 우물 같았죠. 세상에서 오로지 라스티카만이 고안해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늘 막막한 앞길을 시원하게 열어주었어요.”

“아름다운 비유네요. 가르시아 씨는 그분에게 많이 의지하셨군요.”

“그랬던 것 같네요. 이런 제가 없어지고 나서 허전함을 느꼈을 정도니까.”

피가로는 어둠 속에서 그리운 얼굴을 떠올렸다. 순박하게 웃는 모습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올이 가는 연한 노을빛 머리카락이 얼굴을 감싸고, 언뜻 유약해 보이는 인상은 기품 있고 우아한 언행과 뒤섞여 새로운 형태의 상냥함을 만들어냈다. 다소 엉뚱한 구석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친밀감을 자아냈다.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이 심해지기 전까지 라스티카는 연구소 내에서 피가로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다. 라스티카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부하들도 손에 꼽을 수 없이 많았다. 그래서 라스티카가 갑작스럽게 퇴사했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던 것일 터였다.

“두 분이 서로 잘 맞는 파트너였다는 게 말만 들어도 느껴져요. 그래도 그때 쌓은 유대가 무의미하지는 않았죠?”

“……글쎄요. 어쩌면 라스티카는 절 원망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피가로는 모호하게 말을 흐리며 인상을 썼다.

“확실하진 않지만, 라스티카가 퇴사한 것도 어느 정도 저한테 잘못이 있어요. 제가 우리 둘의 꿈이었던 연구를 멋대로 그만두자고 잘라냈거든요.”

담당의는 “아…….” 하고 작은 탄식을 흘렸다. 피가로는 순식간에 먹구름이 낀 듯 우중충한 낯이 되었다.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담당의의 얼굴에,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한 라스티카의 얼굴이 겹쳐졌다.

피가로의 시간은 라스티카가 일방적으로 퇴사를 통보한 그날로 되돌아갔다.

‘미안해, 피가로.’

‘……클로에 때문이지? 널 비난할 사람은 없어. 그러고 싶은 사람도 없을 테고. 나는 신경 쓰지 마.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남는 거니까.’

그보다 너는 어떻게 지내려고? 이곳을 나가서 어디로 가려고?

물어보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어떤 말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을 앓고 있는 두 사람은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시선을 맞추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서로 고개를 돌린 채 바보처럼 떠듬떠듬 말을 더듬으며 간단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 번 앓기 시작한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은 절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어시스트로이드를 통해 진정한 구원을 찾았고, 앞으로도 그 구원에 매달릴 테니까. 그 점에서 서로의 생각이 일치했던 것 같다. 피가로는 라스티카의 거취를 묻지 않았고, 라스티카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어련히 잘 살고 있겠거니 생각할 뿐. 관계의 단절은 그렇게 간단했다.

“이미 큰 실패를 겪은 뒤였죠.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라스티카는 그때 빠지는 게 옳았어요. 라스티카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우리의 연구는, 인류를 구원할 카르디아 시스템은 이미 완성된 상태였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어요.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진행하던, 저만의 진정한 목표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온전한 부활, 혹은 죽은 사람의 완벽한 구현. 겉으로는 어떤 표현이든 상관없었다. 담당의는 피가로의 바람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피가로의 뜻에 반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피가로는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연락을 시도하지는 않으셨나요?”

“라스티카와는 말 그대로 동기일 뿐, 원래도 사적으로 연락하던 사이는 아니었어요. 게다가 이 허울뿐인 화려한 네온 시티에서 마침내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떠난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을 방해할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저.”

피가로는 “전 모든 사랑을 좋아하고 또 응원해요. 사랑이란 완벽하고 아름다운 거니까요.”라고 덧붙이며 코끝을 찡그렸다. 보기 드문 너스레에 담당의의 뺨이 느슨해졌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이 대화 주제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슬슬 옛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어지던 참이었다. 피가로는 괜스레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입꼬리를 당겼다. 자연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한 번 과거를 떠올리자, 기억은 물밀듯 밀려왔다.

라스티카와는 오랜 인연이었다. 처음 입사할 때부터 함께였으니, 못해도 근 십 년 가까이 함께 근속한 셈이다. 입사할 때만 해도 애매한 위치였던 지능기계정보부가 여기까지 입지가 다져진 것은 분명 라스티카의 영향도 있었다.

친구라고 말하긴 애매할지 몰라도 꽤나 동고동락의 우정을 쌓은 사이였다.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했다.

‘오웬은 어떻게 할 거야? 넌 오웬을 폐기할 수 없잖아.’

‘방법은 많아. 일단은 최대한 부수지 않는 방향을 고려하고 있어. 멋대로 만들고 방치해둔 내게도 잘못이 있으니까.’

‘피가로, 모든 것을 네가 떠안을 필요는 없어. 정 안 되면 나도…….’

‘그럼 클로에는?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클로에잖아. 그게 너의 전부를 버릴 정도의 일이야? 우리가 카르디아 시스템으로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면 윗선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클로에를 언급하자 라스티카는 눈에 띄게 주춤했다. 알고 있다. 알고 있고말고. 라스티카는 예전부터 마음이 약하고 쓸데없는 정에 휘둘리곤 했다. 그런 그가 애매한 태도에서 벗어나 결단을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 꺼낸 말이었다. 피가로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등을 돌렸다.

‘라스티카, 지금은 저울질을 할 때야. 간단하게 생각하자. 나와 오웬, 그리고 클로에 중에 선택해. 어차피 넌 후자를 고르겠지만.’

‘피가로, 나는…….’

‘못 고르겠다는 말만 하지 마. 그게 최악이니까.’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는 점이 그다웠다.

‘네 말이 맞아. 전부 버리고 떠나려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결국 위선처럼 들리겠지. 내일 클로에를 데리고 떠날게. 오웬을 부탁해.’

‘……그렇게 나와야지.’

압도적인 사랑 앞에 효율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더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한 사람을 고를 수 있는 것. 다수의 이익으로 기우는 저울을 뒤집을 정도의 결의와 용기.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파우스트 얘기로 돌아가자면, 솔직히 고생할 줄 알았는데 금방 적응하더군요. 지능기계정보부는 신설된 지 오래된 부서인데, 매뉴얼은 개판이었거든요. 아무도 매뉴얼을 갱신하려 하지 않아서…… 저도 그중 하나였고요.”

“…….”

담당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환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분명 측은함을 담고 있었다. 자칫 오해하기 쉽지만, 피가로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겉보기만 멀쩡한 회사에 꿈과 희망을 품고 들어간 새내기를 향한 동정이었다.

“파우스트는 스스로 어려운 일을 자처했어요. 없느니만 못한 과거의 매뉴얼을 반쯤 갈아엎고 새롭게 정립한 것도 그 애에요.”

“신입이 그런 중요한 업무를 맡아도 괜찮은 건가요?”

“물론 제가 도왔죠. 모두가 손 놓고 있는 일을 전부 도맡아 하는 파우스트가 안쓰러워서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도 둘이 하니까 금방 끝나더라고요. 한두 달…… 아니, 세 달인가…… 각성제를 막 때려부으면서 작업하니까 그 정도로 끝나서…….”

피가로는 앞뒤로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그대로 취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덤덤하게 이야기를 듣던 담당의는 점차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연히 이전 상담에서 이런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각성제, 무슨 각성제요?”

“아, 진화유전자연구부에서 만든 건데 효과가 엄청 좋거든요. 얼마나 끝내주는지 팔다리가 하나씩 더 늘어난 기분이 드는 거 있죠?”

“……시중에서 파는 의약품은 아니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피가로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담당의는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하며 심호흡을 했다.

“맨 처음 회사 기물로 각성제를 만든 친구들은 이미 잘렸지만, 레시피는 여전히 남아서 계속 발전하고 있어요. 그것도 누군가의 연구 결과니까 당연히 보존해야죠! 물론 그 과정에서 정식으로 허가받고 시중에 유통된 것도 있어요.”

몸을 비스듬히 돌린 담당의는 펜을 잡고 종이에 빠르게 무언가를 적었다. 그러자 종이 위의 글자가 옅은 빛을 발하더니, 서서히 흡수되어 사라졌다.

“가르시아 씨, 그런 임상실험은 가급적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병원에서 처방한 약물과 검증되지 않은 다른 약물을 함께 복용하면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미리 얘기해둘 테니 오늘 상담이 끝난 후에 꼭 진료받으시고, 새로 처방받아 가세요. 기존 약은 폐기하시거나 다음 상담 때 가져오시면 제가 처분해 드리겠습니다.”

“네에…….”

기운 없이 대답한 피가로는 고개를 홱 돌리며 중얼거렸다. “……혼날 줄 알았으면 말 안 했을 텐데.” 혼자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담당의의 이마에 두꺼운 핏대가 솟았다. 하지만 담당의는 여태까지 쌓아온 값진 경험으로 어른스럽게 위기를 이겨냈다.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 볼까요? 파우스트 씨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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