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프로토콜:#N/A 08


날조.


지난주 폴몬트 라보라토리의 한 랩에서 어시스트로이드 폭주 사건이 발생했다. 폭주한 기체는 ‘그랑벨 시리즈 A 타입(A-GRANVELLE-999)’으로, 윗선의 명령을 받고 지능기계정보부에서 제작하던 기체였다.

지능기계정보부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라고 해도 실제로 제작에 참여한 엔지니어는 단 두 명이었다. 학원도시 폴몬트 아카데미 소속의 신입 연구원, 파우스트와 레녹스 말이다. 피가로는 프로젝트의 책임자이자 멘토로서 참여했다.

과거, 파우스트는 피가로를 존경하여 폴몬트 라보라토리에 입사를 결심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례를 롤 모델로 삼았다고 생각했지, 설마 파우스트가 자신과 같은 방향을 추구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기체를 디자인한 것은 파우스트였다. 파우스트는 폴몬트 랩 내부 데이터베이스에 남아있는 카르디아 시스템과 제작에 성공한 그랑벨 시리즈 A 타입을 토대로 A-GRANVELLE-999을 만들었다. 파우스트는 기체의 외관과 사소한 특징을 구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피가로가 그것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사건이 발생한 이후였다.

“파우스트가 걱정이에요. 그 아이, 무척 영특하고 보기 드물게 열정이 넘치는 아이였거든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였어요. 고작 그런 사고로 잃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는 거죠.”

“가르시아 씨는 그 일로 죄책감을 느끼고 계시는군요. 책임자라는 위치 때문인가요?”

“아뇨, 그런 것보다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그래요. 실은 사고가 발생한 것도, 피해 규모가 커진 것도 전부 제 잘못이거든요.”

사고 당일, 개인 랩에 틀어박혀있던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보지 못했다. 듣자 하니 파우스트는 폭주한 어시스트로이드에게 호되게 당했음에도, 끝까지 들것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제 발로 병원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피가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의 지원과 사후 처리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거예요.”

피가로는 잔속의 액체를 충동적으로 벌컥벌컥 들이켜곤 한숨을 쉬었다.

그랑벨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이자 연구팀 선임으로서 파우스트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피가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그날 연락을 받고도 행동하지 않았던 자신을 비난할까 봐 그의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사후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랴, 사고 경위를 조사하여 보고하랴, 징계 위원회에 참석하랴. 도무지 여유가 없던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피가로는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은 것이다. 실수를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는 핑계로 자신의 책임에서 간편하게 도피했다.

그것이 파우스트를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폴몬트 종합병원에서 퇴원한 파우스트는 곧바로 자택에 틀어박혔고, 피가로는 그 이후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자택으로 찾아간다는 선택지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같은 폴몬트 라보라토리 소속 연구원이자 파우스트의 후배인 레녹스에게 보고받은 바로는, 파우스트는 폐인이 되어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피가로가 파우스트를 찾아가는 것은 아픈 상처를 들쑤시는 행동이었다.

설령 찾아간다고 해도, 파우스트는 그처럼 비겁하고 약삭빠른 사람은 만나 주지 않을 것이다. 확실하게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 몇 번이고 부딪칠 용기 같은 건 피가로에게 없었다.

“얼마든지, 시간은 넉넉하니까요.”

그래도 이 답답한 상황을 타개할 계책이 있다면, 만약 그런 방법을 상냥하고 현명한 담당의가 알고 있다면, 미약한 가능성에 기대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피가로는 눈을 내리깔며 뒷말을 흐렸다. 그는 어느덧 미지근해진 잔을 힘껏 부여잡고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그러려면, 파우스트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겠네요.”

*

워킹클래스는 다들 싹싹하고 노력파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워킹클래스가 특별히 성실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거였다.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것조차 힘겨운 세상에서 게으른 사람은 서서히 도태되어 목숨을 잃고 만다.

파우스트는 워킹클래스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인 최하층 계층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아버지는 부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고, 이제 남은 가족이라고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늙은 조부와 몸이 불편한 어머니, 어린 여동생뿐이었다.

파우스트가 나고 자란 슬럼은 빈말로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건물은 낡고, 도로는 부서져 있었다. 좁고 얽힌 골목 사이로 슬러지와 폐수가 줄줄 흐르며, 그 흐름을 따라 녹슬고 썩은 배관들이 복잡하게 엉켜있었다. 거리 곳곳에 자리한 쓰레기 처리장에서는 끔찍한 악취가 퍼졌고, 사람들은 익숙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 앞을 지나쳤다.

마을에 들어선 수많은 처리장들 때문에 이곳의 공기는 항상 쓰레기를 녹이기 위한 기름과 독한 화학물질 냄새로 가득했다. 이곳 사람들은 하이클래스에 대한 불만과 삶에 대한 절망을 간신히 이겨내며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의 아이들은 어느 정도 자라면 가족을 부양하거나 자신의 보잘것없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각종 처리장에 스스로 발을 들였다. 파우스트도 그중 하나였다. 이를테면, 시궁쥐로 태어나 하수구를 전전하는 삶이었다.

윗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한 번 떨어지면 절대 기어오를 수 없는 지옥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볼거리라고는 푸르른 하늘밖에 없었다. 둥근 장막 너머로 내다보이는 푸른 하늘은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파우스트도 종종 고된 일로 지쳐 쉴 때면 언제나 맑은 빛을 띠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새하얗고 푹신한 구름이 몽글몽글 떠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묵은 피로가 조금은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파우스트, 넌 지금의 세계가 올바르다고 생각해?”

파우스트에게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올바른 말을 곧잘 한다는 이유로 자주 어른들에게 불려가 꾸지람을 듣는 아이였다. 파우스트의 친구이자 마을의 시설 출신인 알렉은 무척 아름답고 영리하여 파우스트는 언제나 그를 닮고 싶어 했다.

“하이클래스는 우리를 이용해 에너지를 착취하고, 자신들만 배불리고 있어. 우리의 목숨을 소모품 취급하면서, 수많은 희생을 발판 삼아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지.”

알렉의 눈은 드높은 하늘색이었다. 구름 한 점 끼어있지 않은 투명한 파란색 말이다. 햇빛을 받은 알렉의 눈동자는 부드럽게 물결쳤고, 그것은 마치 흘러가는 구름처럼 보였다.

“출신으로 급을 나누는 이 사회는 잘못되었어. 이 세상은 바뀌어야 해. 모든 것을 평등하게 나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구역을 가르고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그만둬야 돼. 모든 생명은 축복받아야 마땅하고,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거야. 하이클래스와 워킹클래스의 구분 같은 건 이 세상과 미래를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태 파우스트의 몸과 정신은 차갑고 속물적인 세상에 갇혀있었다. 그가 사는 세상에서 생각은 불필요했다. 쓸데없는 잡념은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지 못했고, 그저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그처럼 낮은 곳에 머무르는 사람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톱니바퀴처럼 빡빡하게 맞물려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알렉 덕분에 처음으로 눈을 뜨고, 넓어진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기계처럼 강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무이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를 마주한 충격은 그야말로 굉장했다.

뜻을 품은 사람은 아름답다. 별빛처럼 반짝이는 두 눈이, 당당하게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그 목소리가, 어느 것 하나 눈부시지 않은 것이 없었다. 파우스트는 하늘을 등진 알렉에게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알렉이 자체적으로 발하는 빛에 매료된 파우스트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걸 결심을 했다. 알렉이 걸어가는 길은 전에 없이 황홀하게 물들어 있었다. 파우스트는 알렉을 통해 꿈을 꾸었고, 미래를 엿보았다. 알렉은 파우스트에게 세상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였다.

알렉은 장차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알렉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싶었고, 그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옆에서 돕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날, 서로의 손을 맞잡은 소년들은 같은 꿈을 꾸었다. 찬란한 미래로 향하는 꿈을.

그 꿈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른 아침, 어린아이의 시신이 강물에 떠내려왔다. 세찬 비가 내린 다음날, 힘없이 널브러진 팔다리가 거뭇한 탁류에 반쯤 잠긴 채 둥둥 떠있었다. 당시 워킹클래스들이 거주하는 구역에서는 어린아이들의 실종 사건이 잇따르고 있었다.

참혹한 현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워킹클래스 중에서도 특히 치안이 불안정한 곳에서 이런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곤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쉴 새 없이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파우스트는 순간적으로 느낀 불안의 정체도 알지 못한 채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잠시만요, 잠시만…….”

파우스트는 떠들썩하게 몰려든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다급하게 휘젓는 팔에 밀쳐진 사람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 알렉…….”

그 끝에 본 것은 막 물속에서 건져올린 친구의 시신이었다. 하늘을 향해 누운 알렉은 축 늘어져 미동조차 없었다. 젖은 몸은 지저분한 바닥에 짙은 얼룩을 남겼고, 굳게 닫아 걸린 눈꺼풀은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쯤은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알렉의 영혼은 이미 몸을 빠져나갔다. 만면을 일그러뜨린 파우스트는 믿기 힘든 현실에 고개를 저었다.

가족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마음을 나눈 사람이었다. 감정 없는 기계처럼 살아가던 삶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이었다. 파우스트는 아직 어렸지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특별한 사람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곧장 알렉에게 가려 했으나, 시티 폴리스가 앞길을 막아섰다.

“꼬마는 물러나라. 쯧, 귀찮은 일에 휘말렸어.”

“이봐, 제대로 통제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들으셨죠? 자자, 다들 성가시게 굴지 말고 물러나세요. 어차피 출신도 불분명한 워킹클래스의 천애고아라면서요?”

“빨리 처리하고 가자.”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젠가 알렉이 말한 적이 있었다. 폴몬트 시티 폴리스는 부패했다고.

마을의 어른들도 종종 꺼내는 주제였다. 그들이 말하길, 한때 마을의 순찰부터 사건 사고 처리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시민의 안전을 지키던 조직은 이제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시티 폴리스는 공적 기관이나 뒷세계의 권력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시티 폴리스는 실상 하이클래스가 부리는 노예지. 그들을 위해서라면 출세에 도움 안 되는 워킹클래스쯤은 서슴없이 처리할걸.’

어른들의 말이 옳았다. 그들은 하다못해 썩어빠진 속내를 감추지도 않았다. 하이클래스의 잃어버린 로봇을 찾기 위해서는 다수의 인력을 동원하면서, 최하층 계층이 사는 구역에서 벌어진 심각한 사건은 수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최소한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현장에 들리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알렉의 사망은 미제 사건으로 처리되었다. 하필이면 시설 출신인 알렉은 연고가 없는 탓에 그를 대신해서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룻밤 새 한 명의 어린아이가 목숨을 잃었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알렉은 분명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처음 며칠간 파우스트는 억울하게 죽은 알렉의 넋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누구도 파우스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그것이 당연했다. 모두가 파우스트를 별종 취급하며 손가락질했다. 심지어 조부마저 파우스트를 나무랐다.

파우스트는 알렉과 달랐다. 알렉은 모든 차별과 부조리에 맞서 싸울 용기가 있었지만, 파우스트는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알렉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알렉이 없는 파우스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계속해서 이어진 외로운 싸움은 파우스트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파우스트가 알렉을 위해 노력한 시간은 한 달도 아니고, 고작 며칠에 불과했다. 제게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을 견디지 못한 파우스트는 결국 현실에 순응하기로 했다.

그 이후로 푸른 하늘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파우스트의 하늘은 그날 그대로, 알렉의 삶과 함께 완전히 닫혀버렸다. 정의는 죽었고, 세상은 미쳐있었다. 이곳은 하이클래스가 소유한 감정 없는 깡통보다 더 가치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기본적인 인권을 챙기기는커녕 생명으로서 존중받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단 하루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무릇 사람은 환경에 맞춰 살아간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그럴만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금세 악하게 물들곤 한다. 인간답게, 인간처럼 살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신과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곳을 반드시 떠나야 했다. 그렇게 결심한 파우스트는 어디에도 한눈을 팔지 않고 오로지 마을을 벗어나는 것만을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파우스트는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지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끝없는 노력 끝에 폴몬트 아카데미에 수석으로 합격한 것이다. 폴몬트 아카데미는 여러 교육기관이 밀집해있는 학원도시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이었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재능을 직접 증명하여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비록 가족은 고향에 남겨두었지만, 모두를 데리고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 파우스트는 어느 때고 치열하게 살았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워킹클래스로서 다른 사람의 발판이 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서로 각기 다른 상흔을 남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원치 않아도 열정을 불태우게 되었다.

파우스트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도 좀처럼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폴몬트 아카데미는 대체로 부유층의 아이들이 다니는 곳으로, 워킹클래스가 전액 장학금을 받아 입학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수석으로 입학한 파우스트는 폴몬트 아카데미의 간판처럼 여겨졌다.

대체 누가 그딴 조건을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장학금을 수령하려면 기본적인 대외 활동이 필수였다. 하이클래스를 위한 광대 역할만큼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파우스트는 가장 유명한 폴몬트 매거진과 시티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순식간에 자수성가의 아이콘으로 유명해졌다. ‘워킹클래스 희망의 발판, 너도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발판이 되는 삶을 살기 싫어서 고향에서 도망쳤더니, 이곳에서도 똑같이 발판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뭐, 여기까지는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일이니 참아줄만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학원에서 함께 수학하는 동문들 사이에서 그가 워킹클래스 출신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어차피 홍보 대사로 활동하는 이상, 언젠가는 들통날 사실이었다. 파우스트는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주변은 그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선배와 동문을 막론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워킹클래스 출신의 거지새끼’라며 야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파우스트 옆을 지나갈 때, 일부러 코를 틀어쥐고 지나갔다. 무슨 수를 쓴 건지, 파우스트의 고향이 쓰레기 처리장이 밀집된 구역이라는 사실을 용케 알아낸 모양이었다.

부모 하나 잘 만나서 평생 좋은 것만 보고 자라온 하이클래스들은 몹시 비위가 약했다. 고작 상상만으로도 냄새가 난다며 사람을 피해 다닌다니. 그런 그들을 위해 고향에서 직접 퍼 온 오색빛깔 지하수를 정수리부터 끼얹어주고 싶었지만, 높으신 분들을 상대로 문제를 일으켜서 득이 될 것이 없기에 꾹 참았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그것은 파우스트에게 은근한 상처가 되었다. 그는 고향에서도, 아카데미에서도 언제나 혼자였다. 가족들과 떨어져 누구에게도 긍정 받지 못하는 시간을 보냈더니 점차 마음이 허해졌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던 발목이 절로 꺾일 정도로 우울한 시기였다. 파우스트는 자연스럽게 혼자만의 생각에 파고들었다. 그는 여유가 날 때면 늘 큰 충격으로 남은 어린 시절과 알렉을 떠올렸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 회고하는 어린 시절은 여러 감정이 들게 했다. 파우스트는 이제야 자신이 단지 알렉에게 이끌렸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렉은 파우스트에게 과분한 존재였다. 어린 파우스트는 알렉의 곁에 있으면 자신 또한 특별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평범하고 나약한 자신과는 달리, 스스로 광채를 발하는 그의 특별함에 자아를 의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알렉이 너무나 가여웠다. 비록 죽은 사람의 유지를 이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가 자신의 소중한 친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지도 못하고 원통하게 죽은 알렉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파우스트가 새로운 사람을 사귀지 못하는 이유는 상황의 문제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친구의 죽음이 영향을 미쳤다. 파우스트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마주한 친구의 죽음은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지 못할 정도로.

제때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상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점점 벌어지며, 결핍이라는 형태로 변질되었다. 그러던 참에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제가 파우스트를 처음 만난 것은 강연 초청을 받고 학원도시에 있는 폴몬트 아카데미에 갔을 때였어요.”

피가로는 고개를 까딱이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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