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구색을 맞추기 위해 건성건성 피가로를 달래주던 스노우는 자신에게 공격이 들어오자 바로 사납게 돌변했다.
“뭬야? 누가 감히 나와 화이트를 능멸한단 말이냐!”
“제 스폰서가요. 오즈가 두 분의 근원을 부정했어요. 제가 얼마나 카르디아 시스템에 진심인지 아시잖아요. 저에 대한 모욕은 괜찮지만, 이 연구만큼은…… 그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고 도망치고 말았어요. 저는 이제 어떡하면 좋죠?”
피가로는 눈물도 나오지 않으면서 울먹거렸다. 스노우는 그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은 듯 한층 더 길길이 날뛰었다.
“후회할 것 없어! 아주 잘 했구나! 면전에 대고 시원하게 욕을 갈겨주지 그랬니!”
“해, 했어요. 욕까지는 아니어도 꽤 심한 말을 하긴 했어요.”
“다시는 건방지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얼굴에 칼자국도 내주지 그랬어!”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범죄를 조장하지 마세요!”
피가로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책임을 지고 적당히 동조했더니 갈수록 도가 지나쳤다. 대체 누가 만든 건지 이 어시스트로이드는 다른 기체에 비해 양심과 도덕성 파라미터가 현저히 떨어졌다.
애초에 오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무려 인류 최종 병기를 보유한 무기상, ‘신의 천둥’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처럼 무력한 사람이 그런 무시무시한 사람에게 덤볐다가는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버릴 것이다.
“피가로쨩의 능력이라면 스폰서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겠지. 그런 돼먹지 못한 놈팡이에 연연하지 말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자꾸나.”
스노우는 성실하게 엉덩이를 때리는 것을 멈추고 피가로를 끌어안았다. 피가로는 그 몰래 슬쩍 얼굴을 붉혔다. 먼저 부탁하지 않았는데 스노우가 자신을 안고 달래주는 일은 드물었다. 같이 화를 내주는 건 기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요. 역시 치기 어린 행동이었어요. 스노우님과 화이트님을 완벽하게 되돌릴 기회였는데, 제가 그걸 걷어차버린 거죠. 분에 넘치는 기회인 줄도 모르고.”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감정이 가라앉으며 전신의 피가 식고, 머리가 차분해졌다. 그 순간은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피가로는 한숨을 쉬며 스노우를 약하게 밀어냈다.
“저는 왜 이렇게 충동적이고 한심한 걸까요? 우리가 마침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기에 스노우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피가로는 쫙 펼친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스노우는 피가로가 눈앞의 현실에서 도망치도록 내버려두지 보지 않았다. 스노우는 피가로의 어깨를 붙잡아 강제로 몸을 돌렸다.
“피가로야, 말해보렴. 그 자를 잃어서 화이트를 만들 수 없게 된 거니?”
아, 또다시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피가로는 스노우를 밀어내려 했지만, 스노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자비와 애정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샛노란 눈동자가 피가로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그만한 돈을 후원해 주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겠죠.”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서 싹싹 빌어야지.”
스노우는 눈 깜짝할 새에 소중한 것들을 저울질했다. 그러고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피가로를 거리낌 없이 절벽으로 내몰았다. 차라리 알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스노우의 작은 머리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피가로는 끝내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스노우님! 어떻게 당신이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당신만큼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날카로운 외침은 마치 어린아이가 떼쓰는 소리 같았다. ‘그런 것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세요. 당신은 나의 부모잖아요.’ 자신의 얄팍한 속내를 깨달은 피가로는 수치심과 슬픔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스노우는 몰아치는 눈보라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겠니. 나는 화이트와 재회하고 싶은데.”
이 일에 걸린 것이 단지 돈 몇 푼이었다면 스노우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비용의 대부분과 화이트의 존망이 걸려있다면, 스노우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 우리를 반드시 완벽하게 되돌려놓겠다고. 누구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약속했었지? 피가로여,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약속을 어기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 약속을 어긴 아이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아주 나쁜 아이란다.”
“스노우님, 저는, 그게…….”
하다못해 변명이라도 하려고 했다. 그러나 피가로는 한참 동안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를 중얼거리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무슨 말을 해도 스노우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피가로는 자신의 작품인 스노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노우는 이미 피가로의 과실로 모든 것을 정의 내렸다. 화이트가 걸린 일에 스노우는 절대 양보가 없었다.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번 일은 명백히 피가로의 실책이었다.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입장에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실의를 감추지 못한 피가로의 낯빛은 점점 시름시름 흙색으로 변해갔다. 감정은 가졌지만 동정심은 배우지 못한 어시스트로이드가 눈앞에서 그를 매서운 눈빛으로 책망하고 있었다. 눈을 깜박이지도, 숨을 쉬지도 않으니 어떤 방법으로도 그 시선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스노우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오너를 몰아붙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스노우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화이트뿐이었다. 다른 사람을 탓하고 싶어도, 이 모든 것은 피가로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결과였다.
피가로는 두 번째, 아니, 세 번째로 부모에게 버려진 기분을 느꼈다. 첫 번째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이라 아무렇지 않았고, 두 번째는 너무 괴롭고 슬퍼서 살아갈 의지를 잃어버렸다. 앞을 보고 똑바로 나아가는 것조차 버겁던 시기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세 번째는 도대체 어떡하지?
그저 기분 탓이 아니라면, 정말로 세 번째로 버려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스노우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화이트를 온전히 되살려 스노우와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돕고 싶었다. 다시 한번 그들의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다정하고 짓궂은 칭찬과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를. 영원히 떨쳐내지 못할 지독한 고독 속의 그리움을 되찾고 싶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오랜 정적이 흘렀다. 피가로가 오랫동안 말을 잇지 않자, 담당의가 물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죠?”
“……명령어를 사용해서 스노우님을 오프 상태로 돌렸어요. 스노우님은 감정이 있는 자유로운 어시스트로이드지만, 제겐 아직 오너로서의 권한이 남아있거든요.”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방법에 불과하잖아요. 그 이후로 스노우를 다시는 부팅하지 않으셨나요?”
“그럴 리가요. 당연히 했죠. 대화 기록을 삭제하는 것도 고려했지만, 그 이상 스노우님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어요. 그때 당황해서 스노우님을 오프한 것도 결국 후회했거든요.”
짙은 패색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피가로는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피로로 짓무른 눈가를 문질렀다.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서로의 마음이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는 걸 저도 알아요. 상대가 저에게 마음이 없는 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죠. 하지만 두 분이 저를 봐주지 않아도, 저는 지금까지 두 분의 기억에 손을 댄 적이 없어요. 어떠한 강제성 없이 오롯이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제가 바라는 것이자 저의 긍지인걸요.”
“가르시아 씨.”
담당의는 조심스럽게 손깍지를 꼈다. 불편하고 어려운 말을 꺼내기 직전의 버릇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피가로는 담당의의 말을 끊었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 알아요. 그 말대로 분위기는 더 나빠졌어요. 스노우님이 화가 많이 나셨거든요.”
피가로는 손톱을 세워 팔뚝을 긁었다. 계속 어쩔 줄 몰라 불안한 행동을 보이다가, 의자 위로 다리를 올려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세운 무릎 틈으로 머리를 파묻었다. 꼭 그렇게 하면 좁은 공간에 숨을 수 있다는 듯이.
“원래라면 내일이 스폰서와 만날 날이었어요. 제가 그날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바람에 무산되었겠지만…….”
벽장 속에 갇힌 아이처럼 몸을 웅크린 피가로가 마구 도리질을 쳤다.
“역시 제 쪽에서 연락해야겠죠? 대의보다 개인적인 감정이 우선시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물론 카르디아 시스템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 자체가 저의 사심이지만, 이대로 후원을 받지 못하면 모든 과정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해요. 기껏 좋은 조건을 가진 스폰서를 만났는데…….”
피가로는 팔을 세워 머리를 감쌌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높낮이가 쉴 새 없이 오락가락했고, 팔과 무릎에 막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 말이 맞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스노우님도 그랬잖아요. 전부 제가 문제래요. 그 일이 있은 뒤로 스노우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못된 아이라며 저를 보려고 하지 않아요. 스폰서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상황을 개선하기 전까지는 아는 척도 하지 말래요. 당장 오늘 저녁에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는데 어떡하죠? 스노우님이 없으면, 스노우님이 다시는 저를 봐주지 않는다면,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선생님, 제발 알려주세요…….”
심장이 쿵쿵 뛰고 식은땀이 배어났다. 매스꺼움이 느껴져 팔뚝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이미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지만, 이 나이를 먹고서 담당의 앞에서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상이 아닐지라도 정상처럼 보이고 싶었다.
핏기가 돌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참고 있으니, 곧 익숙한 감각이 덮쳤다. 세상이 빙글빙글 어지럽게 도는 것이 멈추고 몸이 붕 뜬 듯한 부유감이 찾아왔다. 하늘을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깊은 물속에 가라앉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담당의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당의는 피가로에게 다가가 그가 앉아있는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인기척을 느낀 피가로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담당의는 눈을 감은 채 몸을 굽히고 있었다.
좁아터진 공간이 한순간 넓어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피가로는 바리케이드처럼 세운 팔 너머로 담당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담당의는 피가로가 놀랄 것을 염려한 듯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피가로에게 손을 대지 않고, 아이를 달래서 재우는 것처럼 부드럽게 팔걸이를 토닥였다.
“가르시아 씨, 진정하세요. 우선 깊이 숨을 마시고 천천히 내쉬어볼까요?”
피가로는 팔걸이를 쓰다듬는 담당의의 손을 내려다보며 숨을 헐떡였다.
“이, 이렇게요…….”
“네, 그렇게.”
거짓말처럼 숨쉬기가 조금 편해졌다. 언제부턴가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히끅거리며 딸꾹질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피가로는 갈고리에 걸린 것처럼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담당의의 입꼬리를 바라보며 자신의 목과 가슴을 더듬었다.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캐치하다니, 정말 의사는 심오한 직업이구나.’ 진이 빠진 피가로는 멍하니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도움을 받았어요.”
피가로의 인사를 받은 담당의는 작은 기합소리와 함께 구부렸던 몸을 바로 세웠다. 가볍게 감겨있던 눈이 그제야 뜨였다. 담당의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피가로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완전히 구겨진 종이를 반듯하게 펼치려 애쓰고 있을 즈음, 담당의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제안을 건넸다.
“일단 스폰서에게 연락해 보는 게 어떨까요? 다른 건 몰라도 내일 미팅 일정이 확실한지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네요. 스폰서 쪽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고 했죠? 그럼 제가 도와드릴 테니, 지금…….”
“안돼요.”
피가로는 여전히 의자 위에 웅크린 채로 한 번 더 담당의의 말을 끊었다. 그는 머뭇머뭇 망설이며 담당의의 눈치를 살폈다. 여태 손이 많이 가는 환자를 상담하며 내공이 쌓인 담당의는 어느 상황에서도 침착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그게…….”
“그게?”
담당의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피가로의 말을 따라 했다. 아무래도 그대로 입을 다문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피가로는 지친 얼굴로 이실직고했다.
“차단했어요.”
“네?”
“……제가, 차단했다고요.”
“…….”
어느 상황에서도 침착하다는 말은 취소였다. 천하의 담당의도 말문이 막혔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두려웠던 피가로는 땀을 뻘뻘 흘렸다. 변명을 하려면 지금밖에 없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절대 풀 수 없어요. 아무리 선생님이 원해도 그것만큼은 들어줄 수 없어요.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정말 연락을 했으면 어떡해요? 차단을 풀자마자 ‘어디 있는 거냐. 찾아내서 죽여버리겠다’는 메시지가 도착하기라도 하면…….”
“가르시아 씨.”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할 때였다. 이번에는 반대로 담당의가 피가로의 말을 끊었다. 더 들어줄 수 없다는 듯 피가로를 멈추게 한 담당의는 힘없이 마른 세수를 했다.
“무엇이든 외면하는 건 좋지 않아요. 회피하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차단을 풀고 연락을 해봅시다.”
기어이 하나뿐인 아군이 자신을 배신했다. 대단히 충격을 받은 피가로는 입을 크게 벌렸다. 피가로는 담당의가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꿔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지, 지금요? 여기서?”
“네, 지금 당장.”
그러나 담당의는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입가에 자리한 강철 같은 미소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서 안 하겠다고 버텨봤자 결국 말로 설득당하고 말 것이다. 이쪽도 꽤나 말발이 있다고 자신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의료 업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를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빠르게 패배를 인정한 피가로는 잔뜩 주눅 들어 쭈글쭈글해진 상태로 메신저를 불러왔다. 담당의는 그 앞에서 만들어진 로봇처럼 방싯방싯 웃고 있었다.
2. 173(-13)회차
「금일, 폴몬트 라보라토리에서 개발 중이던 차세대 어시스트로이드 ‘그랑벨 시리즈’가 내부 시스템 충돌로 폭주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폴몬트 라보라토리가 그동안 어시스트로이드의 개발과 관리로 높은 신뢰와 주목을 받아온 기관인 만큼 이번 사고는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폭주한 ‘그랑벨 시리즈’는 연구소 내부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던 프로젝트라고 하며, 이로 인해 내부 데이터베이스가 손상되고, 시스템 붕괴의 우려가 커졌습니다. 폴몬트 라보라토리에서 출시한 기체를 소유한 고객들 사이에서는 사건 이후 기체가 오작동을 일으켰다는 제보도 들어오고 있으며…….」
「폴몬트 라보라토리는 정전 사고로 피해를 입은 인근 주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며, 사고 직후 ‘그랑벨 시리즈’의 프로젝트 진행을 동결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폴몬트 라보라토리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는 크게 추락하였습니다. 이에 일부 협력 업체들은 계약을 재검토하고 있으며, 어시스트로이드의 안전성에 대한 대중의 불안은 커지고 있습니다.」
「폴몬트 라보라토리 측은 현재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으며, 기술적 결함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어시스트로이드 산업에 미칠 영향은 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폴몬트 라보라토리에서 출시한 기체로는 대표적으로 어시스트로이드 ‘북쪽의 마법사 시리즈’, 펫로이드 ‘무무’와 ‘램’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학습기계 ‘폴몬트 에듀케이션’이…….」
세상이 온통 시끌시끌했다. 새하얀 직사각형의 방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피가로는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바깥의 풍경에 관심을 가질 무렵, 때마침 투명한 햇빛차단막이 펼쳐져 시야를 가렸다.
침침한 눈가를 손끝으로 더듬고 있으니, 갑자기 눈앞에 불쑥 잔이 들이밀어졌다. 피가로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잔을 받았다. 풀풀 올라오는 따뜻한 김이 코끝을 간질이며 향기로운 냄새가 방 안에 퍼져나갔다.
“가르시아 씨는 에어차로, 괜찮으시죠?”
“……아, 고맙습니다.”
적당한 두께의 잔을 통해 전해지는 차의 온기는 사시사철 차가운 손끝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피가로는 한 치의 미동 없이 차 위에 떠있는 작은 잎을 내려다보았다. 담당의는 피가로를 잠시 바라보다가 제 몫의 잔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소식 들었어요. 큰일이 있었다죠?”
“네, 그 일 때문에 상담을 계속 미뤘어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이해해요. 예약은 얼마든지 미뤄도 좋으니, 가르시아 씨는 자신의 마음을 우선시해주세요.”
“배려 감사합니다.”
피가로는 희미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잘한 행동 하나하나가 기본적인 의사소통 프로그램이 내장된 로봇처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담당의는 목을 축이며 조심스럽게 피가로를 살폈다. 살짝 기울어진 자세는 불편해 보이고,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조명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 밑이 시커멓게 물들어있었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그새 조금 마른 것 같았다. 그의 내담자가 영 힘을 못 쓸 것처럼 생긴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만면을 뒤덮은 우울한 그늘 때문에 더욱 기운 없고 부실해 보였다. 빈말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구부리면 엿가락처럼 휘어질 듯했다.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신가요? 미리 말하지만,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평소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책임자로서 뒷수습이 바빴을 뿐, 저는 그 사고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도 않았는걸요.”
담당의는 잔을 들고만 있는 피가로를 보며 차를 마실 것을 권했다. 피가로는 그제야 조금씩 찻물을 홀짝이며 마셨다.
“저보다는 다른 사람이 문제죠. 이를테면 제 부하라던가…….”
“그러고 보니 전에 말해주셨죠. 파우스트 씨라고 했던가요?”
“맞아요. 기억하고 계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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