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날조
이 업계에서 천재적인 두뇌나 많은 인력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돈, 돈이다. 겉으로는 공익을 위한 연구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연구소도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에 불과했다. 그나마 폴몬트 랩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요즘 대기업답지 않게 개인 연구에 간섭하지 않고, 오히려 상황에 따라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적어도 회사의 감시망을 피해 위법적인 연구를 하거나 처음부터 설비를 구비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회사에서 손을 뗀 연구를 마저 이어가고 싶다면 독자적으로 자금만 구해오면 된다니, 이 얼마나 형편 좋은 이야기인가.
뭐, 카르디아 시스템이 언젠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리라는 건 일찍이 짐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연구원들이 손을 대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카르디아 시스템이 난해하고 복잡해서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가로는 하이클래스의 돈 깨나 가지고 있다 하는 높으신 양반들을 어느 정도 외워두었다.
그러나 오즈라는 이름은 지금껏 듣도 보도 못했다.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그게 누군데?’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수준이었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지만, 피가로는 소액 지원을 믿지 않았다. 그간 독자적으로 움직이면서 못 볼 꼴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투자가를 구하는 과정에서 당당하게 조건부 만남이나 불륜 제의를 해오는 사람도 적잖이 있었다.
피가로는 자신이 제법 지적이고 섹시하다―기분 탓인지 수많은 야유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시티 매거진이 인정한 공공연한 사실 아닌가?―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세 줄이 넘어가는 늙은 변태 영감에게까지 수요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늘만 살고 죽을 것도 아닌데 미쳤다고 그런 사람과 손을 잡겠는가. 피가로는 자신의 가치를 알았다. 차라리 고액이 오가는 거래라면 몰라도, 고작 몇 푼의 돈을 지원받기 위해 자신의 미래가치를 떨어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심지어 이 오즈라는 사람은 성질이 급하기로는 또 엄청나게 급해서, 확정되지도 않은 미팅에 ‘최대한 빨리 만나고 싶다’고 적어두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의 감을 신뢰하는 피가로는 곧장 데이터 서버에 접속했다.
자본주의 정보화 시대에서는 충분한 금전과 촘촘한 정보망, 그리고 이름 석 자만 알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대의 모든 행적을 조사할 수 있었다. 원한다면 오늘 입은 속옷 색까지 알아낼 수 있는 세상이었다.
마침 폴몬트 랩에는 이를 위한 최첨단 시스템이 구현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런 용도로 존재하는 설비는 아니었지만, 도구라는 건 무릇 사용하기 나름이 아니겠는가.
회사 설비를 멋대로 악용하는 것도, 함부로 다른 사람의 신상을 캐는 것도 불법에 해당되지만, 이미 금기에 가까운 연구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시간은 없었다. 무엇이든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급기야 양심을 내다 버린 피가로는 한때 양심이 존재했던 흔적기관의 통증을 느꼈다. 소중한 것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스폰서의 정보를 뒤졌으나, 메일에 남은 이름을 토대로 조회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사람은 살면서 어디에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인데,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수상했다. 이러면 메일의 내용이 거짓이거나 차마 어디 가서 말 못 할 사업을 벌이고 있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베일에 싸인 신비한 컨셉은 아닌 것 같은데.’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인데, 그런 컨셉은 몹시 귀찮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 보고 만나자며 귀찮게 굴기 일쑤였고, 항상 번지르르한 말만 잔뜩 늘어놓으면서 실제로는 자금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던 경험이 많았다.
‘영 수상한데…… 그래도 일단은 만나봐야겠지.’
스폰이라는 건 거절하기에는 지나치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피가로는 차게 식은 손끝을 주무르며 메일을 회신했다.
그것이 불과 지난주의 일이었다. 돈 많은 양반들은 바쁘기는 또 어찌나 바쁜지, 미팅이 가능한 날짜를 보내기 무섭게 가장 가까운 날로 약속이 잡혀버렸다.
“토할 것 같아…….”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피가로는 불안한 앞날에 대한 시름으로 속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긴장 때문에 화장실을 여러 번 들락날락할 것 같아 일부러 위장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건만,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피가로는 쓰라린 배를 부여잡고 호텔 로비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 호텔의 레스토랑은 전망 좋은 루프탑에 위치해있었다. 주말의 호텔은 사람들이 쓸데없이 많았다. 어디를 가도 왁자지껄한 대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피가로는 가족 단위로 놀러 온 여행객들과 사이좋은 연인들을 피해 그늘이 진 기둥 뒤에서 서성거렸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한 명도 타지 않을 때 즈음에서야 겨우 탑승했다. 대낮부터 사람을 너무 많이 봤더니 벌써부터 진이 다 빠졌다. 인식 왜곡 장치를 사용하고 있어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 일은 없다고 해도, 사람과 마주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기껏 멋진 정장을 꺼내 입어놓고 어깨를 한껏 옹송그렸다. 다소 궁상맞긴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볼 사람도 없으니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까지 가는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럭키!’ 피가로는 소리 없이 환호하며 엘리베이터 벽면에 붙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전날까지 잠을 설쳐서 안색은 별로였지만, 나머지는 완벽했다. 겉모습만 보면 대외활동에 충실한, 지적이고 세련된 회사원 같았다.
「당신의 꿈의 여행, 이제 현실이 됩니다! 증강현실로 펼쳐지는 다채로운 세계 여행!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정글, 사막 속 오아시스부터 최첨단 도시 투어까지, 언제 어디서든 시공간 제약 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지금 예약하고 신세계를 체험하세요! 자세한 사항은…….」
엘리베이터의 투명한 전광판에서는 마침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상 속의 장소에 실제로 있는 것처럼 청량한 풀 냄새와 푸석한 모래 냄새가 맡아졌다. 광고를 끝까지 시청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음을 내디딘 피가로는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빈속에 고속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가끔 이런 일이 생기곤 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레스토랑이 한적하다는 것이다. 딱 점심과 저녁 사이에 애매하게 끼인 시간대였다. 스폰서도 피가로와 조용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었다. 기왕 평일에 단둘뿐인 밀폐된 공간을 골라주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니지. 상대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밀폐된 공간은 절대 안 될 말이지.’
생각은 자유라지만, 한 번 자유를 주었더니 정도가 지나쳤다. 피가로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헛된 기대를 버리기로 했다. 그는 침착하게 예약해둔 자리를 찾아갔다. 직원과 말을 섞을 필요 없도록 위치는 미리 숙지해두었다.
스폰서가 예약해둔 자리는 하필이면 가장 눈에 띄는 자리였다. 시티의 경치가 훤히 내다보이는 장점이 있었지만, 단점으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좋다는 점이 있었다. 칸막이조차 없는 자리는 프라이버시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야말로 위세 부리기를 좋아하는 졸부를 위한 명당이었다.
피가로는 벌써부터 죽을 상을 했다. 사람이 얼마 없어서 정말,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최악의 하루를 예감했는데, 성실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일부러 일찍 왔음에도 스폰서는 이미 자리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착오가 있었나 싶어 시간을 확인했으나,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이른 시각이었다. 피가로는 차근차근 세운 계획이 차근차근 깨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괜찮아, 진정해. 이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사소한 문제로 주눅 들지 말고, 앞으로 해야 할 일만 생각해. 눈 딱 감고 끝내는 거야! 그리고 돌아갈 때 스노우님의 품에 안겨 잔뜩 예쁨 받아야지!’
마인드 컨트롤은 언제 어느 때나 도움이 되었다. 피가로는 크게 심호흡한 뒤, 한가롭게 경치를 구경하고 있는 스폰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오즈님 맞으신가요?”
스폰서가 고개를 들어 피가로를 올려다보았다. 하나로 묶은 숱 많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가 특히 인상적인 남자였다. 피가로는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짐짓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폴몬트 라보라토리의 피가로 가르시아입니다.”
“……오즈다.”
역시 낯선 이름이었다. 오즈는 일어서서 인사를 나누었다. 피가로는 악수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명함부터 건넸다. 그러고도 악수를 하자고 하면 어쩌나 내심 공포에 떨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오즈는 똑같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피가로에게 건넸을 뿐이었다.
빠르게 명함을 훑어봤지만,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사업가라며? 무슨 사업을 하는지 정도는 적어놔야지! 하다못해 연락처라던가!’ 피가로는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어떻게 된 게 멀쩡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최소한의 위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웃자, 웃어. 분위기 망치지 말고 일단 웃어.’
지나치게 많이 웃어서 헤프거나 어디 한 군데 모자라게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기우였던 것 같다. 오즈는 피가로가 맞은편에 앉는 것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악수를 청하지 않은 것은 의외였다. 피가로는 앞서 매스컴에 나와서 스스로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이라고 밝힌 바 있었다. 현재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이라는 병명은 알 사람만 알고, 아직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문득 저 세상만사에 무관심해 보이는 남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피가로는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차가운 땀을 몰래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앉아서 분위기를 살피고 있으려니 금방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생선 카르파초!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얇게 썬 생선에 올리브오일, 치즈, 루콜라가 규칙적이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속이 뒤집어지는 요리를 깨작거릴 결심을 하고 온 피가로는 화색을 띠었다.
피가로는 주방장의 훌륭한 메뉴 선정에 감탄하며 식기를 들었다. 오즈도 말없이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업무 관련으로 많은 이들을 만나보면서 느낀 건데, 사람을 판가름하는 데에는 첫인상이 제일 중요하다. 눈앞의 남자는 무서울 정도로 말수가 적었다. 백 퍼센트 옆에서 조잘조잘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혼자 멋대로 결론지은 피가로는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조심조심 오즈를 훔쳐보았다. 오즈는 키가 크고 무표정한 남자였다. 아무리 외관만으로는 나이를 파악할 수 없는 시대라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꽤 젊어 보였다. 어떤 말을 해도 표정에 미동조차 없는 것이 칼로 찌르면 파란 피가 흐를 것 같았다. 미소 한 점 없이 경직된 얼굴은 언뜻 이 상황을 지루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어려 보이는데 돈이 많구나, 좋겠다. 자신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주제에 피가로는 부러운 눈빛으로 오즈를 쳐다봤다. 하지만 자신의 돈은 거의 재단에 묶여있고, 저 남자의 돈은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을 테니 이야기가 다르다.
침묵 속에 식사를 이어가던 중, 벌써 메인 요리가 나왔다. 슬슬 한계였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 어차피 한 번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맨 처음 인사를 나누고 꽤 시간이 흘러 콩닥거리는 심장도 평소처럼 적당한 박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피가로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업 분야를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대답해 주지 않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즈는 입을 열었다.
“무기다.”
“……예?”
“…….”
모르는 새에 멍청한 반응이 튀어나갔다. 오즈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찌푸려진 미간이 대단히 언짢아 보였다. 피가로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무기를 사고파는 사업을 한다고 했다.”
무기상! 최악이다! 피가로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사소한 변덕 하나로 자신이 벌집이 되는 미래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시티를 통과하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오즈라는 이름이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뒷세계에서 암약하는 존재라면 일찍이 자신의 기록을 말소했을 것이다. 진실을 알고 나니 연약한 새가슴이 쉴 새 없이 벌렁거렸다. 어렵사리 끌어올린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잔뜩 힘이 들어간 안면 근육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부럽다는 말은 취소다. 태양 아래에서는 꿈도 못 꿀 정도의 돈을 줄 테니 뒷세계와 연루되겠냐고 물으면 한 치의 고민 없이 “아니, 절대 아니!”를 외칠 것이다. 험한 일을 겪거나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쫓기면서 평생을 사느니, 지금처럼 연구에 매진하며 직접 발로 뛰어 투자가를 찾는 삶이 훨씬 나았다.
이쯤 되니 진심으로 랩에 돌아가고 싶었다. 무서운 경험을 했다며 스노우의 품에 안겨 마음껏 징징거리고 싶었다. 그러니까, 오늘 미팅이 무사히 마무리된다면. 최소한 눈앞의 무시무시한 사업가에게 총알 세례만 당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때, 오즈가 시선을 느낀 것처럼 고개를 돌려 피가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피가로는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 새라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눈을 마주치지 않는군.”
“예에…….”
오즈는 입을 꾹 다물었다. 피가로는 연신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오즈를 쳐다보는 것도, 쳐다보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스탠스를 유지했다. 역시 이 남자가 자신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건 착각이었던 것 같다. 이유를 설명해야 할까? 식사를 멈추고 쳐다보는 것이 피가로에게 변명할 시간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결국 피가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을 꺼냈다.
“저, 오즈님은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 그건 병인가?”
“병, 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요.”
“확실히 해라.”
“넵, 일종의 정신질환입니다.”
오즈는 미간을 모았다. 이거 봐라,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대놓고 불쾌한 낯을 한다. 기분이 몹시 나빴지만 스폰서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피가로의 경우,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크나큰 결점인 건 사실이니 말이다.
“얼마나 심한 병이지? 증상은?”
“사람에게 익숙해지지 못하고, 사람과 마주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정도예요. 대인관계에서 생겨나는 스트레스보다도 해가 없는 증상입니다.”
“흥미롭군. 자세히 설명해라.”
이후, 피가로는 자신의 병에 대해서 낱낱이 불어야 했다. 오즈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경청했다.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은 좋았지만, 자꾸 혼자서만 자신의 약점을 떠벌거리려니 목이 마르고 식은땀이 났다. 할 말이 떨어지면서 점점 말수가 줄어들더니, 대화는 그걸로 자연스럽게 종료되었다.
‘이 사람, 말이 너무 없어!’
이쯤 되니 맛은커녕 비싼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연구 얘기는 제대로 꺼내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녹초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핏기가 비치는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푹 찌른 피가로는 속으로 ‘제발!’이라고 외쳤다. 그러다가 금방 생각을 바꾸었다. 말수가 적어서 곤란하다고? 아니, 오히려 좋다. 빨리 연구 얘기만 하고 헤어지면 그만이다.
어차피 배가 차서 더 들어가지도 않던 참이었다. 피가로는 아예 식기를 내려놓고 허공을 두드려 홀로그램을 띄웠다. 이어서 카르디아 시스템에 대해 간추린 문서를 오즈에게 전송한 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모양 좋은 입술을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오즈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인간과 감정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어시스트로이드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AI는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거나 반응하는 방식이 정해진 규칙을 따르고 있죠. 하지만 저는 단순히 데이터에 기반한 행동을 넘어, 그들이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부여할 생각입니다. 어시스트로이드가 인간처럼 타인의 얼굴과 목소리, 행동을 통해 마음을 읽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죠.”
오즈는 피가로의 설명을 들으며 전송된 문서를 다운로드 받아 읽었다. 화면에 빼곡하게 들어찬 글자를 읽으면서 턱에 들어간 힘이 약간 느슨해졌다. 피가로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카르디아 시스템을 탑재한 어시스트로이드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감정의 자유가 있고, 각자의 의지로 우리의 삶을 대변하며, 이상적인 동반자이자 지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오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넣는 둥 듣고 있다는 신호조차 없었다. 미친 듯이 똥줄이 탔다. 가뜩이나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긍정적인 반응도, 부정적인 반응도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으니 상대의 감정을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더 묻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아니…….”
오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무리 투자가 아닌 기부에 가까운 형식이라지만, 관심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이쪽과 거래를 할 마음이 있는지조차 심히 의심스러웠다.
예비 스폰서의 시큰둥한 반응은 큰 상처가 되었다. 자신의 연구가 충분히 관심을 끌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피가로는 일그러지는 얼굴에 애써 힘을 주며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절실하게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모처럼 잡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피가로는 혹시 몰라 몇 개의 참고 문서를 더 보내주었다. 그러나 오즈는 그 문서를 읽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해했다. 지원금은 이 정도면 되나?”
그래도 후원을 할 생각이긴 했구나. 자존심도 없는지, 피가로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양가감정에 휘둘리는 피가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오즈는 허공에 떠오른 스크린에 무언가를 적어 전송해 주었다. 강한 회의감에 축 늘어져있기도 잠시, 피가로는 내용을 확인하고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이, 이만큼이나?”
저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눈앞에 펼쳐진 스크린에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적혀있었다. 여태 살아오면서 본 것 중 가장 큰돈이었다. 이건 절대 장난이 아니었다. 카르디아 시스템의 새로운 스폰서는 실로 어마무시한 재력과 저 하늘의 달처럼 눈부신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알고 있다. 후원금이 후원금이니만큼 단순히 자선사업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은 투자가 아닌 스폰의 형식을 취하면서까지 카르디아 시스템으로 무슨 이득을 보려는 걸까? 어디 말 못 할 취향을 발산할 비밀친구라도 원하는 걸까? 막대한 자금과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음을 가진 어시스트로이드를 구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구하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힐 텐데. 어느 모로 보나 이해할 수 없는 점투성이였다.
감히 꿈도 꾸지 못한 엄청난 제안을 받은 탓에 머리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하이클래스인 피가로가 바라본 세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그조차도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조건 없이 이런 굉장한 금액을 지원할 리 없었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할지 문득 두려워졌다. 피가로는 열 손가락을 바쁘게 얽으며, 오즈의 눈치를 살폈다.
“브랜드의 홍보라던가, 시스템을 적용한 어시스트로이드 기체라던가. 다른 요구사항은 없으신가요?”
“필요 없다. 너는 불필요한 걱정 없이 네 일에만 집중하면 돼.”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시다고요? 하지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무래도 도저히 믿기 힘든 얼굴을 하고 있었나 보다. 오즈는 잠시 고민하더니, 뒤늦게 조건을 붙였다.
“그렇다면 네게 아서의 메인터넌스를 부탁하고 싶다.”
“아서라는 건?”
“내가 소유한 어시스트로이드다.”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반 박자 늦게 느긋한 어조로 덧붙였다.
“아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특별해. 아무한테나 정비를 맡길 수는 없다.”
피가로는 눈을 크게 떴다. 특별하다니, 내내 돌덩이처럼 딱딱한 태도를 고수하던 남자의 입에서 의외의 단어가 나왔다. 비록 망할 어시스트로이드 의존증 때문에 표정을 살피지는 못했으나, 피가로는 오즈의 표정을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분명 이른 봄이 온 것처럼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아, 겉으로는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런 사람도 소중히 여기는 어시스트로이드가 있었다. 이제야 자신을 후원한 이유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다. 무엇 하나 섣불리 추론할 수 없어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동질감을 느낀 피가로가 밝은 얼굴을 했을 때였다. 오즈는 기강을 잡듯 방심한 틈을 치고 들어왔다.
“그리고 하나 더, 주기적으로 오늘 같은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주기적으로?’ 피가로는 머릿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슬금슬금 올라가던 입꼬리가 거짓말처럼 일자로 내려갔다. 이 사람은 대체 자신을 얼마나 말려 죽이고 싶은 걸까.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하늘 같은 스폰서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릴 수도, 솔직한 심정을 내비칠 수도 없었다.
“생각해둔 요일이나 날짜가 있으신가요?”
오즈는 턱을 까딱이며 말했다. 그 행동이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되도록 자주.”
이 사람은 주기적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게 아닐까. 피가로는 자꾸만 뾰족해지는 눈매를 둥글게 말았다.
“자주라는 건 어느 정도인가요? 대략적인 주기를 알 수 있을까요?”
“주에 한 번은 반드시 만났으면 한다.”
청천벽력! 정수리로 천둥벼락이 내리쳤다. 몹시 애석하게도 피가로는 자신이 살아있는 피뢰침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게다가 피가로에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앞서 언급된 여러 사안들에 비하면 매우 개인적인 고민이었지만, 동시에 무척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다.
오즈는 자신의 직업을 무기상이라고 소개했다. 세탁이 되었다고 해도 결코 바르지 않은 경로로 얻은 돈이었다. 타인의 피를 수도 없이 묻히며 얻은 더러운 돈이다. 그런 자금으로 카르디아 시스템을 완성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건 기적 같은 재회의 유일한 희망이자,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명예로운 연구였다.
연구라는 건 상상도 못할 비용이 든다. 한 번 실험을 진행하려면 일반적인 사람의 상상력을 초과하는 엄청난 금액이 필요했다. 그 돈은 워킹클래스 가정의 10년 치 식비와 맞먹을 정도였다. 애초에 카르디아 시스템을 구동하는 서버가 연산을 한 번 할 때마다 누군가의 한 달 식비가 녹아내리는 수준이다. 더군다나 가설을 증명하고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성패도 불확실한 그런 실험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했다.
윗선에게 완전히 팽 당한 요즈음,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피가로는 침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몇 번을 고민해도 결론은 같았다.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다고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 세상은 기적을 바라는 데에도 돈이 필요했다. 하다못해 폴몬트 시티의 천사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조차 기부금이 필요한 세상이다. 명예고 나발이고, 일단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붙잡아야 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지독한 결핍에서 탈출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일일이 도덕성을 따졌다고. 어차피 이건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연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잘만 된다면 전인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마음을 좀먹는 고독이라는 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저 자신의 같잖은 기분 하나 희생하면,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게다가 미팅 과정에서 상대에 대해서도 보다 잘 알게 되었다. 똑같이 어시스트로이드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뢰가 갔다. 본디 돈은 돌고 도는 것, 중요한 것은 그 돈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였다. 중요한 건 수단이 아니라 결과였다. 물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만한 일은 해선 안 되겠지만, 이건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니까 괜찮을 것이다.
피가로는 빠르게 결심을 마쳤고, 더는 미룰 것 없이 바로 양식을 준비했다.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계약서, 당장 작성하죠.”
오즈는 이 결과가 당연하다는 듯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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