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아직도 제목 못 정함………… 전공자 여러분의 많은 지적 바랍니다.
1. 178(-13)회차
“세상에, 괜찮아요?”
“지금은 당연히 괜찮죠. 꽤 지난 일이에요. 한 2년 정도…….”
“2년!” 비명처럼 외친 담당의가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종이에 받아 적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역시 비밀로 한 건 좋은 선택이었다. 피가로는 곧 날아올 잔소리를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간 말할 기회가 스물 네 번이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담당의는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 사람처럼 핫, 하고 소리 내었다.
“설마 그 사이에 상담을 한 번 빼먹으신 것도…….”
“아하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애매한 반응은 사실상 옳다고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본뜬 어시스트로이드를 만들고, 그 어시스트로이드에게 생명을 위협당한 것은 빈말로도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평소 미소를 잃지 않던 담당의도 이번만큼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반응이 나올까 봐 일부러 숨겼었는데, 그새 까먹고 말았다. 아침햇살처럼 포근한 분위기에 이끌려 아무 말이나 술술 내뱉은 게 실수였다. 피가로는 내심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정을 가장했다.
“그 일로 다른 문제는 없었나요?”
다행히 상냥하고 친절한 담당의는 같은 주제로 길게 늘어지지 않았다. 피가로는 담당의가 던진 미끼를 잽싸게 물었다.
“네, 천만다행이죠. 만에 하나의 상황을 가정해 대비책을 마련해둔 것이 신의 한 수였어요. 아슬아슬하게 연구비도 절감했고, 실험도 성공했죠. 전망은 전에 없이 긍정적이에요. 물론 개선점을 고쳐서 새로 만든 어시스트로이드는 실패했지만…… 일단 그때 당시 감정을 가진 어시스트로이드가 인간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제 랩 밖으로 퍼지지 않았어요. 저와 선생님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거죠. 그걸로 스폰서나 투자자가 떨어져 나갈 일 같은 건…….”
“잠깐, 잠시만요, 가르시아 씨.”
바디랭귀지까지 사용해가며 지난 이야기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을 때였다. 담당의가 손을 들어 끝없이 이어지는 말의 행렬을 끊었다.
“그게 아니라, 저는 가르시아 씨에 대해서 묻는 거예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해를 입지는 않았나요?”
“아, 그런 의미였군요.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그런 부분을 염려할 줄은 몰랐다. 담당의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미리 예상하지 못하다니, 이쪽의 생각이 짧았다. 피가로는 반사적으로 허리와 엉덩이 부위를 더듬었다. 뼈와 뼈 사이로 얼얼한 통증이 남아있었다. 이제는 한 몸처럼 느껴지는 사무직의 친구, 요통이었다.
“넘어질 때 안 좋은 곳을 부딪쳐서 며칠간 아팠지만 지금은 좀 나아졌어요. 저도 이제 앞자리가 3이잖아요. 잘못 부딪친 걸로 골골거릴 때가 되었죠.”
“가르시아 씨는 그 이전부터 골골거렸던 것 같은데요.”
“골격근량이 부족해서 그래요. 역시 운동해야겠죠…… 저도 인지는 하고 있습니다.”
피가로는 크나큰 슬픔에 빠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과장된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담당의는 굳이 그를 달래지 않았다.
“그럼 그때 만들었던 어시스트로이드의 처분은 어떻게 했나요?”
“당연히 다 부쉈죠. 그건 정말 위험한 개체였어요. 저도 마음은 아팠지만, 도저히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거든요. 그래도 그 녀석 덕분에 연구의 방향은 확실히 잡았어요. 이미 존재하는 인간의 인격과 기억을 그대로 어시스트로이드에게 연결하는 건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죠. 적어도 충동을 억제하는 장치를 강화하던지 감정을 억압해야 해요. 하지만 그래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시스트로이드를 만든다는 제 연구 과제와 어긋나요. 결국 감정을 살리려면 기억과 인격,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실험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일로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피가로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실험 결과는 앞으로 나아갈 지표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의 목표에 커다란 결점을 남겼다.
기억과 인격, 둘 중 하나를 포기하면 피가로가 꿈꾸는 온전한 부활은 불가능했다. 그 자체로 충분히 정교하고 아름다운 연구지만,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면 연구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실제 인간처럼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기계를 만들면서 정작 입력된 데이터대로 움직이기를 원한다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지. 연구자로서 한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구를 시작한 계기를 떠올리면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실험 이후 문제점을 전부 보완하여 만들어진 것이 스노우와 화이트였다. 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편리하고 부정확한 것인가. 스노우와 화이트의 모델이 된 인간은 어시스트로이드인 그들과 달리 성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조형을 빚어도 머릿속에 진득하게 남은 그들의 형체를 완전히 재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고른 것이 지금의 무구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몸체는 일찍 완성되었지만, 카르디아 시스템을 덧붙임으로써 비로소 완벽해졌다. 그들은 원본의 기억을 제외하고 인격만을 계승했다. 사용하지 못한 기억은 정밀한 분석을 거친 끝에 패턴화되어 그들의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피가로는 그들이 원본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완전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전부 그들을 만든 엔지니어의 잘못이었다. 모델이 된 본체가 아닌, 자신의 기억에 남은 원본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탓이다. 타인의 기억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복제 로봇이라니, 엄연히 본인이라고 말하기는 힘든 상황이지만 당장은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스노우와 화이트의 모델이 된 사람은 이미 육체가 새까맣게 타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가장 중요한 뇌까지 전부 녹아버려,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더욱 정교한 어시스트로이드를 만들고 싶어도 이미 죽은 사람에게서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록 스노우와 화이트는 타협점을 찾아 만들어졌지만, 피가로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더 나은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인격과 기억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고 모두 완벽하게 학습시키면서, 그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을 방법. 그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절망과 실패를 바로잡을 방법을.
‘조금만 더 하면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수많은 불가능을 딛고, 어느덧 여기까지 왔는걸.’
피가로의 말을 들은 담당의는 눈썹을 내리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한 것 같기도 한,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가르시아 씨, 역시 혼자 안고 있기 힘들었죠? 그런 기분을 느꼈는데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알고 지낸 탓일까,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피가로는 불편한 기분을 감추며 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냥,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유쾌한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어요. 저희 만남의 목적이 즐거움만 있는 건 아니니까. 가르시아 씨의 마음은 알지만, 저를 기쁘게 해주려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피가로는 담당의의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을 정도였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적 특성 때문인지 담당의는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빠짐없이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이 작고 하얀 직사각형의 방 안에 들어오면 그 시절의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담당의는 안절부절못하는 피가로를 보며 침착하게 펜을 내려놓았다.
“제가 원하는 건 가르시아 씨의 평화와 안녕이에요. 저는 가르시아 씨의 담당 의사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어도 꽤 오랜 지인이잖아요. 걱정이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에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피가로는 애꿎은 입술을 짓씹는 것을 그만두고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런가요. 왠지 마음이 따뜻하고 이상해…….”
담당의는 피가로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것이 기쁜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피가로도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마주 웃었다.
하루 종일 랩에 틀어박혀 외부의 접촉을 차단하고 있는 가운데, 자발적인 외출은 이곳이 유일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삶에서 이 정도로 평온하고 친화적인 느낌을 주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사소한 정보 하나하나 낱낱이 데이터화하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종이 수기로 기록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독특하긴 해도 그것이 오히려 좋은 느낌을 주었다. 종이를 사각사각 스치는 펜슬 소리와 떠다니는 구름처럼 잔잔한 목소리가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손톱 옆에 난 거스러미를 뜯고 있던 손도, 끊임없이 달달 떨리던 두 다리도 어느새 진정되어 있었다.
“하나 변명하자면, 저는 선생님한테 불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선생님을 만나는 건 한 달에 고작 한 번뿐이잖아요.”
“한 달에 한 번이 아쉽다고 느낀다면 횟수를 더 늘릴까요?”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위기를 감지한 피가로는 아하하, 하고 멋쩍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건 곤란해요. 아시잖아요. 저 엄청나게 바쁜 사람인 거.”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겠지만, 그래요. 가르시아 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건 사실이죠.”
“또 그런다. 짓궂게 구시고…….”
안면 근육에 힘을 주려 해도 자꾸만 헤실헤실 바보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게다가, 이건 어떻게 보면 회사 기밀이잖아요. 이거, 정말 위험한 연구거든요. 물론 선생님을 믿지만, 책임자라는 위치에 있으면 혹시 모를 상황도 걱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유출이라던가, 산업 스파이라던가…… 그런 걸 말하는 건가요?”
“어, 아시네요? 이 분야는 전혀 모르실 줄 알았어요.”
“영화에서 봤어요.”
“맞아요. 요즘 영화는 전문지식까지 세세하게 설명해 줘서 좋죠. 훨씬 몰입이 잘 된다고 해야 하나…….”
화제가 가벼운 쪽으로 돌자, 피가로는 훨씬 밝은 얼굴로 대화에 참여했다. 담당의는 사소한 변화 하나 놓치지 않고, 온화한 눈빛으로 피가로를 지켜보았다. 담당의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은 피가로는 계속해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나저나 선생님이 영화 보는 취미가 있으셨군요. 나중에 재미있는 거 추천해 주세요.”
“그래요. 다음에 올 때 리스트 정리해서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거라면 저도 관심이 가요. 선생님과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어요.”
피가로는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의자 밑으로 뻗은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어린아이처럼 어색한 말투나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은 서른이 넘은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담당의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가르시아 씨, 오늘따라 솔직하시네요.”
“그런가요? 왜지, 이유를 모르겠네…….”
“가르시아 씨도 궁금하시죠? 자, 그럼 그 이유를 알아볼까요?”
담당의는 깔끔하게 정돈된 차트를 뒤적여 종이와 펜을 건네주었다. 피가로는 익숙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종이에는 ‘165회차’라는 단어가, 옆에는 담당 의사의 이름과 환자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었다.
“저번달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담당의는 손깍지를 꼈다.
“사소한 거라도 괜찮아요. 떠오르는 건 무엇이든 말해봅시다.”
“음, 그게, 그러니까…….”
왼손 검지에 낀 반지가 조명의 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 영롱한 빛에 피가로는 한순간 눈길을 빼앗겼다.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도 괜찮을까요? 최근에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라던가.”
“그럼요, 얼마든지요. 언제나 나누는 대화였죠?”
“……제가 평소에 그렇게 업무 관련으로 하소연을 많이 하나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네.”
“줄일게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나름 즐거우니까.”
피가로는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을 삼키고 헛기침을 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많았다. 이렇게 된 거, 전부 털어놓고 편해질 생각이었다.
물론 속 시원히 털어놓아도 결정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무심한 얼굴로 알 수 없는 행동을 일삼던 그 남자를 떠올리니 다시 위염이 도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말하기로 했다. 그래야 언젠가 그 남자의 심기를 거슬러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했을 때, 누군가 자신의 시체라도 찾아줄 것이 아닌가.
“제 새로운 스폰서 말인데요. 전에 얘기한 적 있잖아요. 직업이 무기상인, 키가 크고 무뚝뚝한 남자가 있다고. 보름 전에 그 사람과 미팅이 있었는데…….”
*
바람을 가르며 고가도로를 주행한 에어바이크가 커다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에어바이크의 앞좌석에는 이제 막 10살이 되었을 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가, 뒷좌석에는 키 큰 남성이 아이의 어깨를 안은 채 탑승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습기가 차서 뿌옇게 흐려진 헬멧을 벗었다. 에어바이크를 수동으로 운전하던 어린아이, 어시스트로이드 스노우는 헬멧을 벗자마자 가장 먼저 몸을 돌려 엉망이 된 피가로의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스노우는 온통 뒤집어진 피가로의 머리카락을 야무진 손길로 원래대로 정돈했다. 피가로는 말 잘 듣는 애완동물처럼 그 손길에 온전히 몸을 내맡기며 칭얼거렸다.
“스노우님, 저 잘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피가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이이니, 자신감을 가지란 게야!”
오랫동안 피가로를 보좌해온 스노우는 고작 말 한마디로 그의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스노우는 작은 손을 말아 쥐고 “으쌰으쌰!” 기운차게 소리치며 응원했다. 스노우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긴장과 두려움으로 바짝 수축한 마음이 뜨겁게 데워졌다.
피가로는 수줍게 웃으며 뺨을 내밀었다.
“뭐지? 정신이 번쩍 들게 때려달란 겐가?”
물론, 어느 때고 진심이 전해지는 건 아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스노우는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어린아이답지 단단한 손이 사정없이 얼굴을 두들기기 전에, 피가로는 화들짝 놀라 자신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아, 아뇨아뇨. 승리의 입맞춤 부탁드린다고요.”
“아하~ 그런 거구먼! 참 손이 많이 가는 아이야. 자, 이리 오거라.”
피가로는 발그레한 낯으로 슬금슬금 다시 스노우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못 말리겠다는 듯 키득거린 스노우는 피가로의 턱을 잡고 뺨에 쪼옥, 긴 입맞춤을 남겼다. 부드러운 감촉과 따스한 온기에 폴몬트 시티 지하수로에 처박혀있던 용기가 아주 조금 솟아났다.
“고맙습니다, 스노우님.”
스노우는 당연한 절차인 것처럼 얌전히 뺨을 내밀고 기다렸고, 피가로는 스노우의 뺨에 마찬가지로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끝나면 연락할 테니까 꼭 데리러 와주셔야 해요.”
스노우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듯 평화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피가로야, 이 일이 잘 되면 화이트를 만들어주지 않겠나?”
“……그건 생각해 볼게요.”
익숙한 부탁을 들은 피가로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경직되었다. 스노우가 거듭 보챌까 봐 두려웠던 피가로는 서둘러 일어나 에어바이크에서 내렸다. 다행히 스노우는 두 번은 요구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따 연락하거라.”라고 말한 스노우가 운전대를 잡았다.
피가로는 손을 흔들었고, 그의 옆으로 에어바이크가 부웅, 하는 엔진음을 내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천천히 좀 가라니까…….”
피가로는 아쉬운 눈으로 떠나는 스노우를 배웅했다. 스노우는 피가로가 할 일을 마칠 때까지 근처에 주차를 하고 대기할 심산인 듯했다.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케어를 받을 수 있다니, 고민 끝에 스노우를 데려온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멍하니 서있던 피가로는 스노우의 에어바이크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바람에 흐트러진 칼라를 고치는 손은 가늘게 떨리고, 무의미한 불안과 초조함에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 오늘은 대망의 첫 미팅 날이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가운―어디까지나 스노우의 의견이다. 피가로는 폴몬트 랩 로고가 적나라하게 찍혀있는 실험복을 잠옷보다 편하게 느낀다―을 벗어던지고 오랜만에 정장을 꺼내 입었다. 보관을 게을리한 탓에 꼬깃꼬깃 구김살이 져있었지만, 스노우가 뜨거운 김이 나오는 손으로 정성 들여 다림질을 해주었다. 혹시 몰라 스노우에게 여러 기능을 탑재해둔 것이 요긴하게 쓰인 셈이다.
피가로가 매진하고 있는 카르디아 시스템은 현재 회사의 지원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한때 윗선에서 공문이 내려올 정도로 주목받았던 카르디아 시스템은 피가로가 연구직으로 있는 폴몬트 라보라토리에서 사실상 폐기된 프로젝트나 다름없었다.
카르디아 시스템이 묻힌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카르디아 시스템은 처음부터 자잘한 문제가 많았다. 우선 수익성이 높지 않았고, 기획 자체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며, 특히 인간의 감정을 가진 어시스트로이드라는 분야는 윤리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혹여 불똥이 튀기라도 할까 봐 모두가 섣불리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인기가 없다 뿐이지, 윗선에서 전폭적인 지지는 해주지 않아도 최소한의 지원금은 나오고 있었다. 그것조차 뚝 끊기게 된 것은 올해 초에 발생한 ‘그랑벨 시리즈 A 타입(A-GRANVELLE-999)’ 폭주 사건 이후였다.
어시스트로이드의 혁신적인 개발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던 폴몬트 라보라토리의 역대 최악의 실패는 각종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과학의 발전을 선두에서 이끄는 폴몬트 랩의 보안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지만, 늦은 새벽 랩에서 발생한 사고를 익명의 제보자가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밝혀진 사실이 없었다.
그 일로 책임자였던 피가로는 많은 것을 잃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후 분석 보고서를 빼곡하게 작성하여 사건의 경위를 상세히 보고해야 했고, 매달 꼬박꼬박 나오던 지원금을 잃었으며, 조심스럽게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등한시되었다. 거기에 더해 부장으로서 지니고 있던 몇 가지 권한도 반납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뼈아픈 건 자신을 유독 잘 따르던 유능한 부하를 잃은 일이었다. 자신을 존경하여 뒤따라 입사했다던 그 아이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났고, 그를 마주하고 있으면 아련한 동심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근무한 베테랑들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영특한 아이였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직접 만든 어시스트로이드의 폭주에 휘말린 그 아이는 지금 반쯤 폐인이 되어있었다. 폭주 사건으로 얻은 심신의 상처가 심했는지, 폴몬트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퇴원하기 무섭게 집안에 틀어박혀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일단 재량껏 휴가 처리를 해놓았지만, 무단결근이 계속되는 상황이라 이쪽도 몹시 곤란했다.
아무튼 회사의 지원을 잃은 지금, 피가로는 연구를 이어가기 위해 스스로 발로 뛰어 투자자를 유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그동안 어시스트로이드의 존재 자체, 혹은 어시스트로이드가 마음을 가진다는 사실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는 사람들을 피해 하이클래스 계층을 대상으로 넌지시 투자 제안을 해왔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은 정체불명의 메일을 받았다. 투자도 아니고 스폰서가 되고 싶다는 고마운 제안이었다. 발신인의 이름은 오즈. 놀랍게도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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